제20장
배신
비스듬한 시각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은 분명 에스메랄다였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채는 여인. 조잘조잘, 벌어지는 붉은 입술에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이 일어난다. 숨결과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저곳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아 안을 헤집고 싶다.
그 속에 있는 타액은 분명 달콤하겠지? 중형 마수의 피로 만들었다는 각성제, 시모르타보다 더한 중독성을 가졌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애가 탈 정도인데, 맛보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음습한 생각을 하던 도중 그녀가 움직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하얀 목덜미가 얼핏 보였다. 자제할 틈도 없이 손이 부드러운 금발을 훑었다. 그녀의 목덜미가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곳에 이를 들이밀어 깨물면 자국이 나겠지? 그건 자신이 그녀에게 닿았다는 흔적이,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 응?
갑작스러운 접촉 때문에 놀란 것일까? 의문을 담고 올려다보는 녹안 때문에 미칠 것 같다.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싶다. 한입에 삼켜 자신의 속에 집어넣고 다닌다면, 그녀와 떨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느껴지는 박탈감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있을 텐데.
─ 여기, 먼지가, 묻어서.
─ 그래? 고마워.
자신의 속내를 그녀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짐승 같다 하여 경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흔들린 그녀가 일전의 통보를 거둬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복잡한 감정이 굽이굽이 들어찬 숨과 함께 그녀가 사라졌다. 몇 시간 전에 떠난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실제로 그의 눈앞에 있는 건 익숙한 가죽 책과 깃펜. 오늘 낮에 본 그녀를 떠올리자 몸이 곧장 달아오른다.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그가 가죽 책 속에 글을 남겼다.
「대륙력 1442년 라 70일.
벌써 2년이 지났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를 향한 열기는 나날이 더해지기만 한다. --를 가지고 싶다는 저열한 탐욕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일까? 매일, 매 순간 버티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
--를 떠올리며 홀로 쾌락을 좇는 나의 행동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다. 만약 이런 나를 알게 된다면 --는 뭐라고 할까? 한 순간에는 들키고 싶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또 어떤 순간에는 모든 게 들통나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충동에 휘둘린다.
몇 번이고 서신을 썼다. --를 향한 마음을 고하고, 나를 허락해 달라는 애원을 구구절절 적어 보았다. 모두 찢어발기거나 벽난로에 집어넣어 태워 버렸지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다.
과거에 그 서신을 보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지금이라도 보내 볼까? 이 지독하고 애절한 감정을 고하고 싶다. 닿고 싶다. 만지고 싶다. 내 정액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나신을 마음껏 주물러 보고 싶다. 그리하여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나만의 여인으로. 나의 배필로. 그리하여 나 역시도 그녀에게 종속되고 싶다.」
앙다문 잇새 사이에서 나온 건 짐승의 것과 닮은 울림이었다. 아래로 내려간 시야를 통해 보이는 건 잔뜩 성이 난 하복부였다.
─ 정말 미치겠군.
한숨과 함께 깃펜이 책상 위를 나뒹굴었다. 바지춤을 풀어내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지금에 와서는 속에 담긴 것이 갈망인지 원망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 젠장… 으읏……!
스치듯 닿은 그녀의 체온, 가까이에서 훔쳐 맡았던 체 향, 도둑질하듯 몰래 엿보았던 살결을 생각하며 열기를 홀로 풀어 본다.
성기의 기둥을 쓸며 민감한 부분을 문지르자, 미끈한 액체가 쉼 없이 쏟아지며 에스메랄다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의 나신을 떠올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스스로를 상상할 때마다 허리가 뻐근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를 그녀의 음부에 찔러 넣고, 힘껏 허리를 쳐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다급한 손짓 뒤로 격한 숨을 내뱉은 아르페시스가 책상 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의 허리는 당장이라도 에스메랄다를 파고들어 갈 것처럼 움찔거렸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허락 아래서나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매번 홀로 그려야 하는 처지였다.
혹시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커다란 손으로 기둥을 최대한 감싸고 위아래로 흔드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 으, 하……!
곧이어 뻐끔뻐끔, 구멍을 벌려 대던 선단에서 짙은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허억, 허억,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고 나면 남는 건 쾌락의 잔재와 자괴뿐이다.
─ 이 나이에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의 부하들은 본인의 부인과 보낸 밤을 자랑처럼 떠드는데, 그는 매번 혼자다.
─ --에게 술이라도 먹여 보면…….
쾌락의 끝에 찾아오는 자괴감과 고독에 못된 생각을 해 본다. 횟수가 거듭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못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어차피 그녀보다 주량이 약한 그는 와인 한 잔에 곯아떨어질 텐데, 성공할 가능성도 없는 일을 생각해 봐서 무얼 하나.
─ --, --, --…….
그의 심장을 가져간 사람은 그것을 가져갔다는 것조차 모른 채 평온하게 잠들겠지. 그게 얄미워 죽겠다. 이렇게 간절히 바라 보면 무얼 하나, 마음을 고할 수가 없는데.
황제가 반황실 세력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와의 혼례를 허락해 줄 리 없다. 황제가 죽으면 황태자가 견제를 이어받아 할 테니 앞으로도 계속 불가능하다. 그에게는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가 허락되지 않았다.
에렘에서 미혼자의 혼례 적령기는 20대 초반에서 중반. 그녀도 혼례 얘기가 오가기 시작할 시기다. 결국은 그가 아닌 다른 사내가 그녀의 곁에 서겠지. 지독히도 끔찍한 미래다. 그녀가 다른 사내와 초야를 치를 것만 생각하면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찾아가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꿈을 꾸고서 달뜬 몸으로 깨어나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그를, 절대 알지 못하리라.
─ --, 벌써 네가 보고 싶다.
고작 며칠 전에 보았는데, 또다시 그립다.
─ 마차의 바퀴라도 빠져 돌아오면 좋을 텐데…….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기회로 포장해 오늘 떠난 그녀가 돌아와 주기를 바라 본다.
─ 사랑한다.
그 마음을 받아 줄 사람이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말을 해 본다.
─ --, 너를 사랑한다.
이 달콤한 말이 그녀로부터 돌아와 주면 세상의 그 어떤 사내보다 행복할 자신이 있는데.
─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
오늘도 그녀의 이름을 심장 깊은 곳에 새겨 본다.
정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음으로, 내일로 미루기만 했더니 벌써 2년이 지나 버렸다. 언제쯤 미래가 없는 이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까?
─ 에스메랄다, 사랑한다.
중얼거림 위로 언젠가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족쇄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건 온몸이 결박당한 상태인데도 지독한 안정감을 주는 쇠사슬과 함께였다.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에스메랄다를 생각하자 불쑥 반항심이 솟았다. 정확히는 족쇄가 느껴지기 시작한 후로 에스메랄다가 나오는 꿈을 꾸는 게 처음이었다.
이 족쇄를 떨쳐 내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몸을 비틀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 소리가 귀를 찢어 놓는 것 같아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 것같이 무거운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족쇄 너머로 보이는 것들이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땐 글자도 족쇄도, 꿈속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평소보다 언짢음이 심한 것 같은 페드로뿐이다. 침대 옆의 외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채, 꼬고 앉은 다리를 까닥이고 있는 페드로라니. 그를 발견하자마자 위기감을 느낀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렸다.
“망할…….”
꿈속에서 느꼈던 쾌감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어제 에스메랄다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녀에게서 무려 입맞춤까지 받은지라 혹시나, 하는 예상은 했다. 해서 평소와 달리 창문을 모조리 걸어 잠그고 잠들지 않았던가. 페드로와 또 한 번, 이러한 상황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는 그깟 장애물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당연하게 침실에 들어와 있다.
망할, 망할, 정말 망할. 이건 완전히 사생활 침해가 아닌가! 축축한 하반신을 가리기 위해 이불을 끌어모아 보았지만…….
“할 얘기 있으니까 빨리 처리하고 와라.”
서늘하게 쏘아보는 청록색 눈동자에,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위축된다. 오늘 꿈은 발설하기가 조금, 아니 심각하게 곤란한데. 꾸지 않았다고 발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욕실로 향했다.
“점점 더 거슬리네…….”
뒤에서 들리는 페드로의 중얼거림에 괜히 울컥한다. 꿈의 내용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그가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조금 음흉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건 전부 꿈속의 그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일은 사내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 무려 페드로가 직접 말해 준 것이지 않나! 지금의 그녀에겐 당장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도 없단 말이다!
혼자 구시렁거리며 페드로가 집어 던져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베트 영애가 오늘 천사를 온실로 초대할 겁니다. 쿠베트 부인께서 두 사람의 교류를 반기신 덕분에 낮 시간 동안 계속 두 사람이 함께 있게 될 예정이지요.”
아르페시스는 인간의 간사함을 절절하게 실감하며 재빨리 페드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직접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페드로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일정을 계획해 왔으니까! 욕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를 원망했는데,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지혜를 빌려준다는 인도자 가브리엘이 바로 그가 아닐까?
“언제부터 그녀를 볼 수 있나?”
“……오찬 이후입니다.”
“몇 시간 정도? 내가 온실로 이동하면 되는 일인가?”
“만찬을 위해 두 사람이 함께 식당에 간다는 계획이니 오후 내내.”
“오후 내내? 정말인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건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오래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페드로의 말이 짧아진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이랬다, 저랬다, 말투를 바꾸느니 차라리 아예 편하게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 말했더니 역시나, 무례한 페드로는 거절 한번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렇게 말한 그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비켜 갔다. 아르페시스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일기를 보여 줄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그의 손은 얌전하기만 했다.
“듣는 동안 써.”
“오늘 내용은… 굳이 알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대충 지난번과 그… 비슷하기도 하고.”
“쓰라고 했어.”
아르페시스는 맹수에게 위협당하는 강아지의 심정을 이해하며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체격 차이가 좁혀지면 두고 보자, 같은 생각을 하면서. 지금 당장은 자신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으니 훗날을 기약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유능한 그의 생존 본능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그리고 낮에 천사랑 있으면서 애 좀 재워.”
“아?”
재우라고? 시간 아깝게 그런 짓을 왜 하란 말인가? 그는 내일 병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연회가 끝났는데 너무 오래 머물면 좋을 게 없으니까. 본래의 일정에서 딱 하루를 더 연장했음에도 아슬아슬하다. 긴 전투로 인한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는 변명이 통하기를 바라면서 조마조마하게 숨죽이고 있는데. 오늘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를 재우라니! 반항을 가득 담아 페드로를 보니, 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천사는 매일 울면서 깨.”
“그게 무슨……?”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 그 때문에 자는 시간이 턱없이 적어. 4~5시간 정도. 그러니까 지난번에 미로 정원에서 본 것처럼 좀 재우고,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깨워. 그렇게라도 재워야 해.”
그녀가 매일 악몽을 꾸는 것도 모자라 울면서 깨어난다고? 아르페시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가 운다고? 왜? 무슨 꿈을 꾸기에? 수면초 처방은 받지 않나?”
“그런 걸로 해결이 됐으면 벌써 했어. 내 덕에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거니 하라는 대로 좀 해.”
“……알겠다.”
아르페시스는 꿈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적으면서도 심란했다.
“악몽을 꾸기 시작하면 몸이 뻣뻣하게 굳거나 호흡이 흐트러지니까 늦지 않게 깨워. 알겠어?”
“……알겠다는데도.”
아르페시스는 내용을 다 채운 종이를 쭉 밀었다. 무슨 숙제 검사를 받는 것도 아니고, 이게 다 페드로에게 꿈에 대해 얘기해 버린 스스로의 업보다.
“후우…….”
내용을 다 읽은 후 페드로가 목을 좌우로 꺾기 시작했다. 몇 번 보았더니 저게 그의 버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짜증이나 화를 참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니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
“하지만 지금 손대는 일은 없어야 할 거다. 그 아인 이제 고작 열세 살이니까.”
“내가 그 정도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꿈속에서 본 것과 달리, 지금의 그녀가 어리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맹세코, 아르페시스는 현실의 에스메랄다에게 사랑과 경애를 느낄지언정 음욕을 품은 적은 없었다. 몇 번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잘 갈무리했다고 자부한다. 그녀를 향한 음욕은 그가 꿈속의 자신에게만 허락한 것이었다.
“사내놈들은 믿을 게 못 되지.”
“하? 그대도 사내이면서 말이…….”
“내가 사내니까, 사내들이 여인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지독하게 잘 알고 있거든.”
할 말이… 없다. 아르페시스는 꾹 다문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어제 그녀가 입술을 맞춰 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가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순간 꿈속의 에스메랄다와 혼동할 뻔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 * *
스스로가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페드로가 말한 오후까지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에스메랄다는 침실을 나섰다. 손님으로 머무는 중이라 해도 아르페시스를 비롯한 그의 일행은 기사이니 기초 훈련을 빼먹지 않을 터. 고로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정원을 배회하며 그가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생각이었다.
소식을 전한 후 곧장 돌아갔던 페드로를 먼저 발견해 버리는 바람에 멈춰 서야 했지만. 정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미간에 새겨진 골은 깊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의 한결같은 애정은 꽁꽁 언 원망을 녹여 사방에 흐르도록 만들었다.
검디검어 지독한 냄새까지 나는 액체는 원망이 녹아 만들어진 흔적이었다. 그것이 사라질 날은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를 볼 때마다 삐죽거리며 솟아오르던 화는 없어진 지 오래. 이유도 모르면서, 페드로는 그녀가 쏟아 내는 원망을 다 받아들여 주었다.
“미련하게…….”
정말 미련하게, 기억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녀의 원망을 그리도 쉽게 받아들였단 말인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페드로가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고,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늘의 페드로는 그녀를 보고도 환하게 웃어 주지 않았다. 모친의 연주실에 갔던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먼저 페드로를 향해 걸어간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동그랗게 떠진 그의 눈을 보니 충동적으로 팔을 뻗고야 말았다. 그제야 페드로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안아 주었다.
“산책을 나온 거니?”
“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품에 뺨을 묻으며 대답했다. 아르페시스에게 마음을 열어 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도 마음을 준 걸까, 아니면 페드로가 제 멋대로 그녀의 마음을 열고 들어온 것일까?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리라. 이미 페드로는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린 상태니까.
이번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니 항상 곁에 있어 주겠지. 그러니 거리를 재지 말고 하고픈 대로 다시금 사랑해도 괜찮을 것이다. 페드로가 조금 전처럼 웃지 않는 게 싫었다.
“제가 밉지 않으세요?”
그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스스로가 미웠다.
“내가 너를?”
페드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무릎을 내어 주었다. 그곳에 올라앉은 에스메랄다가 페드로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오라버니께 했던 말들은 전부…….”
“무언가 이유가 있었겠지.”
에스메랄다의 눈꼬리가 처졌다.
“나의 행동들이 너를 화나게 했다면 감내해야지. 설령 그것이 내가 인지하지 못한 잘못이라도.”
“하지만…….”
“잘못은 오롯이 나의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오라버니는 미련하세요.”
“미련하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란다.”
페드로가 녹여 낸 응어리는 언젠가 증발되어 사라질 것이다. 거뭇한 액체에 젖었던 흔적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응어리 자체는 남지 않을 터. 원망은 사라지지 않아도 원망으로 인해 화가 나는 날은 점차 줄어들겠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에스메랄다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품에 앉아 조잘거렸다.
“전하를 반대하지는 않으세요?”
“말했잖니, 네가 좋다면 내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땋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영특하니 알고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이라면 가문 차원에서 너와 전하의 미래를 허락하는 건 힘들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 훗날 도래할 혼례 문제를 말하는 것이겠지. 에스메랄다 역시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페드로가 언급한 지금의 상황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황좌의 주인이 현황과 훗날의 황태자일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에스메랄다의 생각이 깊고 깊은 곳으로 천천히 침잠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녀는 시간을 돌아온 후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없었다. 바란 것은 그저 복수의 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와 연인이 되어 버린 지금은? 복수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던 에스메랄다가 처음으로 다음에 대한 의문을 느꼈다.
“그래도 조금 씁쓸하긴 하구나. 네가 벌써 사랑을 할 만큼 자라다니.”
생각 속에서 빠져나온 건 조금의 불퉁함을 담은 페드로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생각하자. 에스메랄다는 어렵고 복잡하기만 한 것을 미뤄 버렸다. 페드로의 안락한 품에서 굳이 힘겨운 것들을 생각하며 골머리를 썩이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찾아온 문제를 외면해 버렸다.
“더 이상 오라버니 팔뚝만 하던 아기가 아닌걸요.”
“넌 평생 나보다 작을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페드로가 짓궂게 웃었다.
“네가 나보다 커질 일은 없으니, 넌 언제나 내게 작고 여린 누이일 거다.”
작다는 말이 그녀의 식사량을 문제 삼는 것처럼 들렸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주눅 든 채 대꾸했다. 속이 거북해서 딱 필요한 만큼만 먹는데, 식사량을 늘려야 할까? 그녀가 안겨 버린 걱정이니 직접 덜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키는 크고 있어요.”
“그렇게 먹어선 내 어깨에도 오지 못할 텐데?”
“오라버니께서 챙겨 주신 약제도 매일 먹어요.”
“……앞으로도 매일 먹겠다고 약속해 주렴.”
“네, 약속할게요.”
페드로는 당연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리본을 꺼냈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지만, 그의 손길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에게 다시 마음을 연 이상,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줄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하하,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네.”
“다행인걸.”
머리를 다 땋아 준 페드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언제나 너의 행복을 바라며.”
에스메랄다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춰 주며 답례했다.
“언제나 오라버니의 행복을 바라며.”
에스메랄다에게는 14년여 전, 페드로에게는 3년여 전에 주고받던 축복이 다시금 서로에게 향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축복이 함께했음에도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페드로의 얼굴에 드리운 건 그림자였다.
* * *
쿠베트 후작 성의 온실 안에는 몇몇 인원이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보드라운 소파와 티 테이블이 놓인 그곳에서 만난 아르페시스는 어제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자리도 멀찍이 떨어져 앉으려고 했고, 뺨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에스메랄다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였다. 그러니 직접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갈 수밖에.
서로가 소파의 양 끝에 앉아 있던 상황에서 에스메랄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 그녀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아르페시스가 소파 끝의 팔걸이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녀에게서 멀어지려는 듯이.
“어어……!”
거리가 가까워지는 내내 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에스메랄다가 그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을 때는…….
“흐업……!”
양팔을 교차해 상체를 가리고는 기겁을 하는 게 아닌가? 이 불한당이 된 기분은 뭐지? 어제는 본인이 먼저 무릎에 앉히고 싶다 말했으면서!
에스메랄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에스메랄다는 어제처럼 그의 양쪽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아르페시스가 눈을 감아 버렸다. 콧잔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매우 꽉.
에스메랄다는 눈을 끔뻑이며 그런 그를 관찰했다. 정확히는, 조금씩 앞으로 나오고 있는 그의 입술을. 동그랗게 모인 채 앞으로 쭉 내밀어진 입술 때문에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입술은 뭐야?”
못난 얼굴이던 그가 한쪽 눈을 찔끔 떴다. 아르페시스는 가볍게 맞닿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내밀었던 입술을 도로 안쪽으로 말아 넣는 중이었다.
“왜 이제 와서 집어넣어?”
“……다시 내밀 수는 없지 않나.”
예상치 못한 그의 대꾸에 에스메랄다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르페시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으…….”
다시 눈을 꽉 감아 버린 그는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에스메랄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후부턴 에스메랄다가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일의 반복이었다. 이마, 눈, 뺨, 코, 그리고 입술까지, 그녀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아르페시스의 얼굴 근육이 쉼 없이 꿈틀거리는 동안 쪽쪽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고요한 온실을 채워 나갔다. 자신의 상체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이 에스메랄다의 허리로 이동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이상은 하지 못하니 그를 너무 자극해서 괴롭히는 건 그만해야겠다.
에스메랄다가 이렇게 적극적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그가 자신에게 안달복달하는 모습이 꽤나 재미있어서. 두 번째로, 작은 접촉에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황홀해하는 그를 보는 게 좋아서. 세 번째로는, 그가 자신에게 더 빠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어떻게든 그를 더 옭아매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초조하니까.
에스메랄다의 행동이 멈추자,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너무 좋다…….”
그러고는 꿍얼꿍얼, ‘여기는 꿈속이 아니다’ 같은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꿈에서 대체 뭘 하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거지? 에스메랄다는 이 나이대의 사내들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기에 쉽게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꿈속이면 어쩌려고?”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킨 사람처럼, 그녀를 꽉 껴안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벼, 벼, 별로, 트, 특별한 건…….”
“거짓말하기는. 네가 꿈속에서 뭘 하는지, 나도 알 건 다 안다고.”
그를 놀리는 게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짓궂은 말이 나가고야 많다.
“하, 하다니, 내가 대체 무엇을 한단…….”
“네가 꿈속에서 나랑 침대에…….”
“그런 적 없다!”
거짓말을 이렇게까지 못하는 것도 재능이다. 에스메랄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창백하게 질린 채 부정했다.
“침대라니, 거기서 할 게 뭐가 있다고! 난 그런 곳에 올라가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올라가 본 적도 없다!”
“침대에서 잠을 자지 뭘 하겠어? 너 바닥에서 자는 거야?”
아르페시스의 눈초리가 살짝 굳었다. 아무래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어… 잠은… 침대에서 자긴 하는데…….”
알려 줄까, 말까. 아무래도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나이를 보고 상세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전부 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누구랑?”
“……뭐?”
“어떤 여인과 침대를 쓰냐고.”
은회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오가기 시작했다. 당황했구나.
“정말 다… 아는 것인가?”
“뭘?”
“그, 음… 어른의, 수면 시간?”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웃음이 터졌다. 한참이나 소리 내어 웃는 동안 그의 표정은 불퉁해져 있었다.
“아이가 생기는 수면 시간 말이지?”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 대체 어떻게? 난… 그대가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교육을 받았으니 알지.”
“벌써? 난 열네 살이 되어서야 자세히 배웠는데?”
“모두가 같은 시기에 배우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아르페시스가 할 말을 찾는 사람처럼 입을 닫고 있을 때, 에스메랄다는 그의 품에 매달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아,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그런 기색이 보이면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라고 하셨어.”
“가랑… 누가?”
“페드로 오라버니께서.”
표정이 찡그려진 것을 보니 페드로가 언급된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그가 그대의 오라비라고는 하나 이런 일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는가? 그도 일단… 사내인데.”
“하지만 난 어머니가 계시지 않잖아. 오라버니께서 그분의 역할을 대신해 주시는 거지.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고. 네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당연히 걷어차야지. 난 올해 겨우 열세 살인걸.”
“……맹세코, 나쁜 생각을 품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페드로의 불신이 못마땅했던 것인지 아르페시스가 꿍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행동으로 인해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는 낯이었다. 그 시절과 비슷한 분위기의 대화가 기쁜 걸 보면, 마지막 1년 동안 생각보다 더 외로웠나 보다.
마지막 순간 그는 정말 황도에 없었던 걸까? 자신에게 실망한 그가 등을 돌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위험에 처했다고 달려와 준 것이었으면? 그에게 기억이 없다고 확답을 내린 이상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었다.
“정말이다. 나는 결백해.”
“믿어는 줄게.”
시선을 거두며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자 그것을 실망의 전조로 본 아르페시스가 자진해서 토설하기 시작했다. 거의 변명에 가까운 해명이었다.
“그대가… 그대가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 적어도 성년은 분명하게 넘긴 모습으로 홀로 상상을 해 봤을 뿐이다. 사내가 사, 사랑하는 여인을 워, 원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이것 봐. 뭔가 했잖아.”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럼?”
“……본능?”
정말 웃음이 끊일 일이 없다. 에스메랄다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머릿속을 차지한 것들이 그 웃음에 가려진다.
“비웃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착각이겠지?”
“응, 착각이야.”
“……그래. 그대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입술을 삐죽이는 그에게 에스메랄다는 또 한 번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투덜거리던 건 어디로 갔는지, 그는 망설이면서도 입술을 쭉 내밀었다. 더 해 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행동에 에스메랄다는 기꺼이 응해 주었다. 다시 한번 쪽쪽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시작되었다.
“으…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린 그가 끙끙거렸다.
“대체, 그대는 어떻게 그리도 여유로울 수가 있지?”
“여유롭지는 않은데…….”
심장이 쿵쾅거리고 그와 닿은 몸 곳곳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운데, 여유라니. 그저 아르페시스와 달리 그녀에겐 이런 식의 접촉이 완전히 낯설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너무, 너무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야…….”
지금처럼 그와 함께하는 달콤한 시간을 몇 번이고 홀로 바란 적이 있었으니까.
“혹시…….”
끙끙거리며 숨을 고르던 그가 돌연 입술을 깨물며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혹시?”
힐끔거리며 자신을 살피는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미 해 본 것은, 아니겠… 지?”
“많이 해 봤지.”
“……누구와?”
조금은 화가 난 것 같아 보이는데… 골려 줄까?
아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오해의 상대방이 아르페시스라면 더더욱. 에스메랄다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뭐?”
“또 오라버니.”
“…….”
“또 또 오라버니와 한 번 더 오라버니, 그리고 아버지까지.”
어린 그녀에게 매일같이 축복을 해 주던 가족이었으니까.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변하기 전까지는.
“지금은 아니지만.”
페드로가 그녀에게 사과를 해 주었다고 해서 가족들 모두에게 마음을 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또한 이전처럼 가족들을 모두 미워하기만 할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온실에는 서로가 숨 쉬는 소리만이 남았다. 아르페시스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가족들에 대한 얘기는 힘들었기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조금 궁금했는데…….”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깨는 건 언제나 아르페시스였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페드로 외의 가족들과는 그리 친근해 보이지 않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티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쓰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그냥?”
에스메랄다가 답을 피하자 그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 대화 이후로 두 사람의 분위기는 조금 차분하게 바뀌었다. 서로 목소리를 높여 가며 웃던 그들은 소리를 죽인 채 서로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상대방의 온기에 취해 버거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어 보았다.
따듯한 온실의 공기 때문인지, 포근한 아르페시스의 체온 때문인지, 에스메랄다에게 졸음이 찾아왔다. 지난번 페드로의 품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곤한가……?”
잠결에 뭐라고 답을 한 것 같긴 한데, 몽롱하기만 해서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필요할 때 내가 깨워 줄 테니 잠들어도 된다.”
어째서 아르페시스가 페드로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저, 포근한 온기와 안도감에 휘말려 수마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나이대에 필요한 수면 시간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기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날 두 번째 낮잠과 함께 찾아온 악몽은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평소와 달리 처형대에 묶이기 전 그녀를 부르는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처형대 위로 뛰어 올라온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구해 주었으니까. 그는 에스메랄다를 안아 주었고 지금의 시간에서처럼 사랑을 고해 주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 * *
아르페시스로서는 곱게 잠들어 있는 그녀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심장이 떨려서 못 했던 것들을 해 볼 수 있는 것도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도둑질 같긴 하지만, 먼저 나서서 입술도 맞춰 보았다.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접촉처럼, 닿자마자 떨어졌지만.
혹시나 그녀가 깨어날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그녀의 머리카락도 만지작거려 보고, 작은 손과 깍지도 껴 보고. 녹안에 홀려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던 그녀라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기서 문제는…….
“좋긴 한데…….”
깨어 있는 그녀와 함께하는 게 더 좋다는 것이겠지. 그녀가 자진하여 입을 맞춰 줄 땐 정말 미칠 것같이 좋아서, 심장이 터져 나가는 것 같으니까.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는 약을 한 것처럼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기도 하고. 깨어 있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아는 그에게, 잠들어 있는 그녀를 관찰하기만 하는 것은…….
‘좋기는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시간’이었다. 내일이면 보지 못할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에스메랄다가 웅얼거리다 잠든 지 1시간, 2시간, 이윽고 3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에 대한 불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숨소리가 흩어진다거나, 몸이 굳는다거나 하는 전조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녀는 3시간 가까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에스메랄다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대뜸 그녀를 깨울 수는 없었다. 매일 울며 깨어난다는 말을 들은 상태가 아닌가.
“4~5시간…….”
본인 역시 그와 엇비슷한 시간을 자면서 에스메랄다가 그러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페드로의 얘기가 거짓말이라는 확신이 없는 이상 에스메랄다의 수면을 방해할 수가 없었다.
“깨울 수도 없고.”
불만이 담겼으나, 혹여나 그녀가 깨어날까 싶어 조심스러운 중얼거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잠든 그녀를 관찰하며 홀로 이것저것 생각에 잠겼다.
페드로 외의 다른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처럼 그녀가 쉽게 답하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이나 그녀가 잠들기 전 해 주었던 밀어들을 곱씹기도 했다. 정신없이 에스메랄다에게 몰두하던 때와 달리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분명,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서신을 보내 주긴 했지만, 쿠베트성에서 다시 만난 후로 친근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제만 해도 그 이유를 몰라도 상관없다 여겼는데 지금은 또다시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아르페시스가 느끼는 것은 불안에 가까웠다. 그것이 의심까지 번지지 않는 이유는 냉철하게 살폈을 때 그녀가 거짓으로 연인 행세를 할 이유가 없음이고. 또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진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은 감정들.
“생각보다는… 말이 적은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는 많이 들어 보았다. 주로 공적인 일과 관련되어 있을 때였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일에 있어서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무조건 말해 달라 떼를 쓸 수도 없고…….”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캐낼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가 이제 겨우 사랑을 고해 주는 그녀가 다시금 그를 밀어낼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품에 안겨 오는 달콤함을 알았는데, 이걸 잃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고.
비록 알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불안하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현명한 것일까?
“먼저 말해 준다면 더없이 기쁠 텐데.”
숨기는 것 하나 없이,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말해 준다면 좋겠다. 에스메랄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음으로써, 누구보다 그녀를 잘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그녀가 자신을 의지하며 필요로 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1년, 2년, 10년, 아니 평생토록 그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 텐데. 그때처럼 그녀에게 배제당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 생각이 들고 몇 초가 흐른 뒤, 아르페시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때처럼……?”
그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때? 그때라니? 언제를 말하는 거지? 분명 그 스스로가 한 생각인데 본인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성 연회장의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이런 식의 의문은 종종 그를 찾아왔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더니 이상한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크기의 커다란 수정과 그 위에 떡하니 박힌 마석.
“응?”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그의 시야에는 수정을 만지고 있는 손이 보였다.
─ 내가 필요 없어진 것일까?
아직은 낯설지만 분명 꿈에서 몇 번이고 접했던 목소리다. 이미 그의 목소리는 지금 듣고 있는 것과 비슷해지기까지 했다.
─ 배제당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나와 달리 이성적인 사람이니 가능성이 없진 않겠어.
─ 바쁘신 것일 테지요. 물자 지원이나 운송 현황에 대한 전보는 꾸준히 오고 있지 않습니까.
─ 그건 그녀가 아니라 디아나가 담당하는 전보지. 그리고 그녀는 남부군을 존경하고 있으니 나와는 별개로 남부군을 지원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이 내린 선고는 이토록 명확하다.
─ 먼저 연락을 해 보시는 건…….
─ 용기가, 나지를, 않는다.
시야는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음에도 이상한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한 감정과 생각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 마수 앞에 달려드는 것은 그리도 잘하면서, 그녀의 앞에서는 항상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
잠든 에스메랄다의 위로 환청 같은 말소리가 덧그려졌다.
─ 연락을 했는데 그녀로부터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어쩌면 그녀가 눈치를 챈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 무엇을?
─ 전하, 그럴 리가 없습니다. 두 분의 유대가 가볍지 않음을 저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 그녀에게, 심한 말을, 했다.
귀로 들리는지, 머리에서 울리는지 확실하지 않은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 놈들과 똑같다는 말을… 그 순간 너무 무서워서……. 그녀가 밤사이 떠나 버려 사과를 하지도 못했다. 말이 심했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려 했는데…….
─ 급한 일이 생겨 돌아가신 것일지도 모르는…….
─ 그랬다면 이미 연락이 왔겠지. 반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 내가 보기 싫어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난 것이 더 그럴듯한 추측 아닐까?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이의 목소리는 초라했다.
─ 나도 그녀가 말한 것이 최선임을 안다. 그래서, 그런 선택밖에 남지 않는 현실이 버거워서… 아니, 무서워서…….
텅 비어 버린 목소리가 웅, 웅, 울렸다.
─ 지금 이 순간에 남부군과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내 생각만 하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 끔찍하다.
─ 전하…….
헉, 하고 갈급하게 숨을 들이쉬어 보았지만 부족했다. 아르페시스는 제 머릿속에 드는 생각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혼란에 잠겨 들었다.
─ 그저, 그저 남부에서 태어났을 뿐인데 왜 그들의 목숨이 제물이 되어야 하지? 왜 그들을 제물로 바치는 게 최선이 되어 버린 것이고? 어째서 나는 그들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이미 그의 뺨은 눈물로 젖어 든 상태였다.
─ 내가 그녀처럼 강건한 사람이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지금의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다면…….
─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선 제가 본 그 어떤 분보다 강건하십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옷깃에 툭, 떨어진 붉은 물방울을 보고 다급히 손을 들었다. 입 주변을 틀어막은 손을 타고 코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그녀에게 연락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고 있으니까. 나의 나약하고 추악한 모습을 눈치챈 그녀가 나를 내친 것이 분명하다. 그녀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대체 무엇을? 두통이다. 아르페시스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 백작님께서는 분명 전하를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여기는 분명 현실인데, 꿈에서나 느껴졌던 족쇄와 쇠사슬이 그의 몸을 휘감아 왔다.
─ 그녀가,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하루는 괴물을 풀어 백성들을 버리고 싶다가, 또 하루는 괴물을 묶어 백성들을 지키고 싶다.
─ 휴고, 남부군을 동원하는 게 정말 최선일까? 내 이기가 백성들을 학살하는 죄악을 정당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조가 섞인 목소리는 그의 내면에서 발견한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뜀박질을 한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난, 나는 황제의…….
그를 뒤덮은 건 공포였다. 동시에 웅얼웅얼,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곧 완전히 사라졌다. 에스메랄다의 옷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몸을 빼는 사이 페드로가 도착했다.
“전하?”
그와 함께 온 루이자가 힉, 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난 그는 페드로가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신관은 부르지 말라.”
“하나 지금 피가…….”
“부르지 말라.”
신관에게 치료받느니 고통스러운 게 낫다니,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들지? 결국 페드로가 본인의 손수건을 빌려주며 지혈을 도왔다. 목 뒤를 몇 번이나 주물렀을까? 천천히 코피가 멎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에게 손을 뻗었으나,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다시 거두어야만 했다.
“돌아가지.”
“……천사와 인사는 하지 않으십니까?”
“이 꼴을 보여 봤자 그녀가 걱정밖에 더하겠나? 돌아가지.”
루이자에게 짧은 감사 인사와 뒤처리를 부탁한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와 함께 서둘러 온실을 벗어났다. 피범벅이 된 모습을 에스메랄다에게 보여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 * *
분명 아르페시스가 처형대 위해서 구해 주었는데, 너무 간절히 바라 생겨난 순간의 환상이었나 보다. 돌에 얻어맞은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썹을 지나, 눈꺼풀까지 넘어 흘러내린 피가 뺨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금 돌팔매질 위에 서게 된 에스메랄다는 수백 번도 더 본 광경을 빤히 응시했다. 가족, 시간, 감정까지.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친 그녀와 달리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으면서. 그녀의 가족들이 내어 놓은 목숨과 피 위에 만들어진 평화를 당연하다는 듯 영위하는 기생충들.
저들을 증오한다. 저들을 이용해 자신을 비참한 지옥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는 이들 역시 증오한다. 그들 모두에게 멸망을, 절망을, 죽음을 선물할 수만 있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에스메랄다가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익숙한 환청을 듣기 직전.
“영애! 일어나요!”
울먹이는 부름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에스메랄다는 빠르게 악몽을 등지며 현실을 파악했다. 눈물이 조금 흐른 것 같지만 평소와 달리 눈이 붓지는 않았다. 오래 울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호흡을 골랐다. 잠시간 숨을 더 고른 그녀가 눈을 떠서 루이자를 마주했다. 울먹거리던 루이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쿠베트… 영애.”
“괘, 괜찮아요?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괜찮아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진 대답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 하여 어쩔 것인가? 이 지독한 증오는 놈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낸 이후에야 잠잠해질 텐데. 에스메랄다는 루이자가 또다시 입을 열기 전 온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눈물의 흔적을 닦아 내는 손길은 익숙함을 넘어, 당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미안해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네요.”
“아, 아니에요…….”
희미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스메랄다는 제 옷에 난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전하께선…….”
“아, 저, 전하께선 급한 일로 돌아가셨어요.”
“급한 일이요?”
루이자가 손을 꿈지럭거리며 구두로 바닥을 비벼 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붉은 얼룩이 그려진 손수건과 자꾸만 옆으로 살살 이동하며 구두를 문질러 대는 루이자. 에스메랄다는 허공에 남은 옅은 향과 붉은 자국을 보고 이 장소에 피가 흘렀음을 직감했다.
“전하의… 피인가요?”
“어… 그게, 그러니까…….”
루이자도 아르페시스만큼이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반면 거짓말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던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입을 통해 모든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왔을 땐 아르페시스가 이미 코피를 쏟아 내던 중이란다. 에스메랄다는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차분하고자 노력했다.
“그럼 급한 일이라는 건…….”
“어, 그건 또 다른데…….”
그녀가 발견하기 전 핏자국을 지우는 데 실패한 루이자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 황실에서…….”
달갑지 않은 단어가 나온 순간 그녀는 이미 답을 찾았다. 에스메랄다는 눈을 감으며 이어지는 루이자의 말을 들었다.
“황실에서… 전서구가 왔어요.”
“……남부군을 지원하라는 내용이겠군요.”
“네…….”
눈을 떠 온실 내부의 전광을 바라보는 동안 힐끔거리는 루이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가 현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잘게 떨리는 제 손을 움켜쥔 채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늘도… 정말 고마워요.”
“전… 그냥 도움 되고 싶어서…….”
그는 무사할 것이다. 사라진 시간에서도 10년이 넘도록 전선에서 버틴 사람이다. 실제로 죽음의 순서를 따지면, 에스메랄다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이 아르페시스다.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지금의 시간에서도 그는 다시 한번 기적을 행하리라. 그렇게 믿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지.
덜덜 떨리려는 몸을 심호흡으로 풀어낸 에스메랄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 하고 싶은 것 말고, 해야 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루이자의 하늘색 눈동자를 쫓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에스메랄다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루이자가 보이는 호감은 지나치게 정직했다. 그녀의 도움 덕분에 타인의 시선을 피해 아르페시스를 만나고 있기까지 하다. 지난번 응접실에서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듯 떠났다. 하지만 오늘도 그럴 수는 없겠지. 일방적인 관계는 반드시 폐단을 불러오니까. 에스메랄다가 원한 호의가 아니라 해도 받은 이상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사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루이자가 어색했다. 또한 언제부턴가 호의만으로 타인을 도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루이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기준은 계산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행동하면 하나의 이득이, 저렇게 움직이면 또 다른 이득이 있으니까 행동한다. 반면 루이자는 그녀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전 영애가 조금 어렵네요.”
그렇기에 이런 진심을 꺼내 보일 수 있다. 다르니까. 루이자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저는 호의만으로 타인을 도와 본 적이 없거든요.”
“아…….”
“그래도 감사는 진심이에요. 영애가 아니었다면 전하와 이렇게 만나지 못했겠죠.”
몇 번 입을 벙긋거리는 듯했으나, 루이자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녀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화를 청했다.
“그러니 영애가 제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알려 줄래요?”
진심으로 서로를 걱정하는 친구 같은 건 그녀의 인생에 없었다.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던 루이자가 꺼낸 말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줄곧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음… 그럼 서부가 조금 더 안정되면요.”
“네.”
“백작 성에 초대해 주세요.”
역시 루이자는 어려운 사람이다. 에스메랄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승마도 하고 체스도 두고, 피아노 연주도 했으면 좋겠어요!”
모두 여가를 위한 유흥거리. 호의에 대한 답례로 무언가를 제시하라고 한 건 그녀였으니, 거절할 명분은 없다.
“네… 그러죠.”
“헤헤헤헤, 전 이걸로 충분해요!”
루이자에게 익숙해지려면 정말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오래가지 않아 그녀와 함께 온실을 나섰다. 본래 약속되어 있던 대로 그녀와 만찬을 먹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선 아르페시스가 신관을 불러 치료를 받았는지, 몸은 괜찮은 것인지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다. 차라리 후에 따로 알아보는 게 더 나을 터였다.
* * *
“연회에서 흥청망청, 퍼마시면서 노느라 바쁘겠지.”
데미안과 함께 이동 중이던 아스터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애초에, 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침을 뱉어 내며 히죽거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호위 기사들을 그만큼 옆에 끼고 다니는데, 죽을 일이 어디 있다고. 누구나 다 세울 수 있는 공을 가지고 영웅이라니, 진짜 우스워서.”
킬킬거리며 떠들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잔뜩 구겨진 신문이 들려 있었다.
“황족이라고 치켜세우는 거지.”
이어지는 말에 아스터의 이가 악물렸다. 화가 치솟아 오른 그는 얘기를 떠들고 있는 남자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 아스…….”
함께 있던 데미안이 그의 팔을 붙들며 막으려 했지만, 아스터는 멈추지 않았다. 남자의 갑옷에 그려진 문양은 라히크 백작가의 것. 테노리엘 백작령의 바로 위에 있는 영지가 바로 라히크 백작령이다. 같은 부대에 속했기에 전장 속에서 종종 본 인물이기도 했다.
“오, 이게 누군가?”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이들과 떠들던 남자가 아스터를 발견하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중앙군 출신 페넬로프 경이 아닌가? 명령 오판으로 이탈했던.”
탈영을 했던 과거를 비꼬는 것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지울 수 없는 과거였고, 아스터는 자신이 그 일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비판을 발판 삼아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개선을 위한 비판도 아니고, 감정적 우월감을 위한 하찮은 비난 따위에 자극받지 않았다. 연합군 내에서 더없이 많이 당해 본 일이라 익숙하기도 했고. 다만, 저 남자가 언급한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게.”
“하?”
아스터는 남자의 앞으로 바짝 다가간 후 말했다.
“호위 기사들을 그만큼 옆에 끼고 다니는데, 죽을 일이 어디 있느냐고?”
이미 호위 기사를 낀 채로도 죽어 나간 지휘관이 상당수다. 그런데도 저런 말이 나온다고?
아스터가 분노로 인한 떨림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가 전장에서 목격한 아르페시스는 저런 말로 폄하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스터는 아르페시스의 전투를 곁에서 지켜볼 때마다 감탄했고, 그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 인간인지 실감해 왔다.
기사들이라 하여 전장을 홀로 누비며 마수를 상대하는 게 아니다. 무기를 겨눈 마수들 주변에는 또 마수가 있기 마련. 다른 이들이 마수를 견제하는 동안 한 마리를 죽이고 다음 마수로 넘어가는 게 보편적인 방식이다.
차석 지휘관인 아스터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호위 기사나 병사들과 함께 전투에 임한다. 그리고 주변의 마수들을 견제해 주는 지원이 없을 경우, 그가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는 마수는 두 마리가 한계다.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공이라고?”
아르페시스가 다른 이들보다 안전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전장에서 그의 안전만을 위해 검을 드는 호위가 20명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아르페시스의 전투를 대신해 주는 건 아니었다.
초반에는 한두 마리, 어느 순간부터는 서너 마리. 최근 전투에서는 아르페시스가 홀로 상대하는 마수가 대여섯 마리까지 늘어난 것을 보았다. 아스터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소년이, 그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페시스의 호위 기사들은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 주는 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헤롤을 비롯한 테노리엘의 기사들이 부리는 심술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스터의 오해는 깊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로 깊어져 있는가 하면, 아스터는 전투가 끝난 후 개인 정비 및 휴식을 취하는 일반 기사들과 달리 행정 처리까지 완벽하게 행하는 아르페시스가 문무에 모두 뛰어난 천재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눈앞의 기사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당장 본인 역시 누군가의 지원 없이 다수의 마수들을 상대할 수 없는 주제에. 아스터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자네에게 아들이 있는가?”
기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럴수록 아스터의 말투도 비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열여섯이 되면 내게 꼭 보내게. 전장에 세워 줄 테니.”
“뭐라고?!”
성이 난 것인지,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터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에 아스터 역시 지지 않고 그 기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 인맥이든 뭐든, 자유 기사를 고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하의 호위 기사들과 똑같은 실력자들을 붙여 줄 생각이니 걱정할 것 없네.”
식식거리는 기사가 언성을 높이기 전 아스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한껏 비아냥거리는 음성으로.
“20명의 호위만 붙여 주면 자네 아들 역시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공을 쟁취할 수 있을 텐데, 어찌 그러나?”
뻐끔뻐끔거리며 말문이 막힌 모습을 보니 조금은, 화가 식었다. 아스터는 그와 닿아 있는 것조차 역겨워 손을 털어 냈다. 강한 힘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기사를 쏘아보는 내내,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치졸한 열등감을 좀 감춰 보는 게 어떤가? 자네가 하지 못하는 일을 훌륭히 해내고 계시는 전하에게 풀어내는 대신 말이네.”
아스터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기사를 등졌다. 곁에 있던 데미안이 몇 번 말을 걸었지만, 아스터는 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칭송받아야 하는 아르페시스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고작 몇십 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스터가 아르페시스에게 가지는 존경심은 굳어 가고 있었다.
그는 아스터의 잘못을 언제까지고 질질 끌고 가지 않고 다시 한번의 기회를 허락해 주었다. 아르페시스는 부상을 치료한 직후에 필요한 효율적인 휴식을 위해 쉰 것을 제외하면, 매일같이 전장으로 나와 마수들을 베어 넘겼다.
안전을 위한 호위 기사? 황족에게만 허락될 수 있다는 최상급의 마나 운용법? 그걸 가지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놈들이. 열등감과 고까움으로 단지 감정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저따위 행동이나 하고 있다. 아스터 본인과 별다를 게 없는 이들이 감히, 그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훌륭한 아르페시스를 깎아내린 것이다.
“제 주제도 모르고…….”
이를 악문 채 흘러나간 말은 잔뜩 뭉그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아스터의 행동을 보며 또 한 번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탈영이나 해 댄 주제에 이제 와 충성이라도 하는 거냐고. 하지만 아스터는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 공포 앞에서도 도주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평화 속에서 나와 공포 앞에 당당히 섰기에 과오를 딛고 나아 섰다.
아르페시스의 연설이, 그가 줄곧 보여 준 전투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아르페시스는 부족한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준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폄하되는 꼴을 눈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겠나?
“데니.”
“어, 어어?”
눈치를 보며 침묵하던 데미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남부의 일이 끝나고 나면 보좌를 새로 구해야 할 거다.”
“……어?”
남부의 일이 끝나 중앙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도,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까. 관용과 기회를 베풀고, 실천을 통해 존경심을 앗아 간 아르페시스 옆에 남을 생각이었다. 아스터는 쿠베트 후작 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방어전 위주의 함정 설치나 전투에 따른 피해 보고는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기에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 * *
에스메랄다는 지난해의 마지막 날부터 방을 나갈 땐 항상 창문을 열어 두었다. 루그레디안이 언제 답장을 보낼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그로부터 다시금 답이 왔다. 열어 둔 창문을 통해 방문한 전서구는 얌전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부터가 지키지 못한 말을 그대에게 강요했군. 사과하겠소. 절박함으로 인한 실책이라 여기고, 부디 용서를.
루」
괜한 기 싸움 없이 순순히 숙이고 들어오니 시간이 절약되었다. 이제 황도 뒷골목은 루그레디안에게 넘기고 어떻게 통제하고,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면 된다. 지금까지 해 온 것을 전달해 일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도 알려 주고.
쿠베트성에 온 이후 오랜 휴식을 취했던 머리가 다시 제 기능을 찾았다. 에스메랄다는 다른 조련석으로 전서구를 부르며 종이를 펼쳤다.
「근 시일 내로 손님맞이를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디」
갈색의 전서구를 날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그녀가 부른 노란 깃의 전서구가 도착했다.
「붉은 지역으로 환영 선물 전달.」
지금 당장 에스메랄다가 백작 성에 돌아가 서류를 작성할 순 없다. 변경된 일정에 따르면 아르페시스는 내일 오전에 떠날 것이고, 그녀는 모레 오전까지 체류하기로 했다. 그녀가 체류 기간을 늘린 것은 다른 이유라고 시치미 떼기 위해서라도 하루 정도는 더 머물러야 한다. 루이자와의 친분이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 주고 있으니 사용해야지.
전서구가 들고 갈 만큼 적은 양의 내용이 아니니 사람을 써야 하는데……. 이곳에서 작성해 사람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 결국은 일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루그레디안에게 해야 하는 설명을 에반스에게 위임했다. 현재 중부는 물론, 그녀가 있는 지역과도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 에반스다.
바의 10일 정도면 중부로 향한 선물이 전달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백작 성에 귀환했을 것이고 아르페시스는 남부로 향하겠지.
“그는 살아남을 거야…….”
지금으로서는 그가 남부로 가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 미래에서도 그는 결국 살아남았으니… 믿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또다시 말이다.
그녀는 무위를 쌓을 정도로 건강하지 못했기에 결국은 무력하게 기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매번 그것을 느낄 때마다 어찌나 비참한지. 에스메랄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좀먹는 불안감을 직시했다.
자신으로 인해 미래가 변한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이기에 그녀의 불안은 더 커진 상태였다. 그녀가 바꿔 놓은 미래에서는 아르페시스가 살아남지 못할까 봐. 그녀는 덜덜 떨리는 자신의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불안감과 무력감을 다루는 일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매번 하던 것이니 새로울 것도 없다. 지금은 이 감정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백작 성으로 돌아간 후의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상권을 공격하는 일과 테브라를 꿰어 내는 일, 북부의 신전까지.
머릿속에서 퍼즐과 상황을 이리저리 맞춰 보던 그녀의 눈앞에 불쑥 아르페시스가 나타났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녀가 굳어 있는 사이 창문 아래에서 튀어나온 아르페시스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커튼을 친 후에야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어……?”
“그대가 보고 싶어서 왔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에스메랄다의 탄식 뒤로 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찬 후 계속 방에 있다던데… 소식은 들었는가?”
“……황실에서 온 소식을 말하는 거야?”
에스메랄다의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남부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예정대로 내일 오전에는 병영으로 돌아간 후 이동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령관저로 쓰이고 있는 루소멜 백작령까지 바로 가는 건 힘들 테니, 쿠베트와 붙어 있는 록스 백작령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곳에 완성되어 있는 보급로를 타고 이동, 틈틈이 인근 부대를 지원하며 이동하게 될 터. 최소 30일에서 최대 50일 정도가 걸릴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에반스 쪽에서 황태자의 명령서를 가지고 분탕질을 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아르페시스가 사령관저에 도착할 무렵에는 일이 끝나고도 남겠지.
에스메랄다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마주 안았다. 시간이 멈춰 버려 지금이 영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힘들지 않아도 될 텐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가 바라는 소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때문에 청할 것이 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한숨을 따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허락해 준다면 해가 뜨기 전까지 함께 있고 싶은데…….”
어쩌면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삼켜진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좋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기쁘다.”
보드라운 뺨이 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맞댄 이마가 뜨겁다.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는 아르페시스의 품에서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찌 알았나?”
“핏자국. 쿠베트 영애가 말해 주기도 했고.”
“끙, 비밀로 해 달라 그리 신신당부를 했는데.”
“왜 숨기려고 해? 걱정되잖아.”
“……그대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러지. 별것도 아닌 일로.”
“코피를 쏟아 냈다며, 그게 왜 별것 아닌 일이야?”
“……잘못했다.”
“알면 다음부턴 숨기지 마. 네가 말하지 않는 게 더 걱정된다고.”
“……그리하겠다.”
“그래서, 몸은 괜찮은 거냐고. 신관이 성내에 들렀다는 소식은 따로 못 들었는데.”
분명 기억이 없다는 쪽으로 확신을 내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신관을 꺼리는 것일까?
“이상하게 신관은 꺼려져서……. 지금은 괜찮다. 어릴 적부터 수련을 거듭한 덕에 몸 하나는 튼튼하니, 너무 걱정 말라.”
“……응.”
이상하게 꺼려진다, 라…….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복잡하게 엉키는 것들을 밀어내는 온기가 너무 따듯해서, 어리석게도 해야만 하는 생각을 또다시 미뤄 버리고야 만다.
“침대로 갈까?”
뻣뻣하게 굳는 몸이 재밌기도 하고, 아리기도 하고.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차라리 소파로…….”
소파에서도 하려면 못 할 것이 없건만, 순진하기는. 침대 위로 올라오지 않으려는 그를 몇 번이고 잡아당겨야만 했다. 반항할 힘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그녀가 당기는 대로 딸려 오고, 미는 대로 밀리는 게 꽤나 귀여웠다. 아르페시스가 침대에 눕자 그의 옆구리는 에스메랄다의 차지가 되었다.
“으아…….”
앓는 소리를 낸 그가 손을 어정쩡하게 들어 올렸다. 에스메랄다는 홀로 쿡쿡거리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대는 대체…….”
“싫지도 않으면서.”
“……대체가 요망한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모르겠군.”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웅얼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고. 이후 그는 짧은 침묵 위에서 몇 번이고 깊은숨을 삼켰다. 에스메랄다는 문득 그가 연회 날 밤부터 몇 번, 이렇게 군 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설마… 냄새를 맡는 건 아니겠지? 에스메랄다가 의문을 느낀 직후 마른침을 꿀떡 삼킨 그로부터 질문이 이어졌다.
“향유는… 뭘 쓰지?”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갑자기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생각 같아선 머리카락이나 옷을 코앞으로 끌어와 킁킁거리며 확인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딱히… 골라 쓰는 건 없는데… 지금은 쿠베트 영애가 보내 준 걸로 쓰고. 이상… 해?”
향 자체에 민감하다 보니 본래부터 향유는 즐겨 쓰지 않았다. 쓰더라도 옅은 꽃향기가 나는 종류만 쓰고. 아르페시스가 좋아하는 향이 있다면 써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조금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쓰지 않았으면 하는데.”
“……왜?”
그는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숨을 깊게 들이쉬는 행동을 멈추지 않으니 에스메랄다로서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자신이 아니라 그를 중심에 둔 대화로 주제를 바꾸었다.
“너는 쓰지 않는 것 같네.”
“번거로워서. 혹시 그대가 원하는… 아니, 좋아하는 향이 있다면 쓰도록 해 보겠다.”
“……아니, 이게 좋아.”
어떤 향도 더해지지 않은 그의 체 향은 여름의 바람 냄새를 닮은 것 같았다.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길에 딸려 갔다. 그의 위에 엎드린 채 이어지는 시간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았다.
“다른, 다른 사내에게도 이렇게 친근한 행동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안 해.”
“나에게만 하는 것이지?”
“당연하잖아.”
“앞으로도, 다른 사내에겐 허락하지 않겠노라 약속해 주겠나?”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허리를 옥죄는 힘을 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불안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내일이면 오래도록 떨어져야 하는 현실에, 그 나름의 불안감을 품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줄곧, 너에게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듯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리라. 에스메랄다의 속삭임에 아르페시스의 목울대에서 짐승의 것 같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약속한 것이다. 나에게만 허락하겠다고.”
“응.”
에스메랄다는 그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요구했다. 긴 시간을 떨어져 있다 해도 다른 이에게 눈 돌리지 않겠다는 약속.
“당연히, 나 역시 그대만 보겠노라 약속하겠다.”
“약속한 거야, 서로에게.”
“그래, 약속한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서로의 뺨을 맞댄 채 문지르기 시작했다. 빈틈 하나 없이 밀착한 몸을 통해 서로의 고동 소리가 전달되었다. 깊고 긴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각자의 불안을 덮어 냈다. 자정의 밤은 점차 깊어져 새벽이 되고, 졸음에 취한 그들이 웅얼거리기 시작할 정도로 늦은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깨워 주고 가야 해?”
온실에서 그가 떠난 후 본래의 악몽을 마주했던 에스메랄다의 속삭임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야만 했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하겠다.”
곧 수마가 그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잠결에 곁에 있는 온기 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를 옥죄는 힘이 느껴졌다.
“에스메랄다…….”
그의 달콤한 부름이 들려온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잠에 빠져들면서도 그 부름에 응했다.
“응…….”
맞닿아 있는 그의 몸이 조금 흔들린 것 같다.
“에스메랄다…….”
“응…….”
그렇게 몇 번이고, 부름과 대답이 이어지던 공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서로 얽히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는 숨소리가 두 사람이 함께 있음을 증명하며 고요한 침실 위로 덧그려졌다.
* * *
금빛으로 물든 소녀가 웃었다.
깊은 녹안을 가진 여인이 웃었다.
레이스가 잘 어울리는 소녀가 웃었다.
그의 세상을 지배한 여인이 웃었다.
몇 번이고 그녀의 모습과 배경이 바뀌었다. 어떨 때는 환하게 웃고, 또 어떨 때는 쓰게 웃는 그녀가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이거나 깨물기도 했다. 지켜보는 것으로도 애달프게 우는 모습까지. 볼 때마다 그녀는 달랐고, 또한 같았다.
─ --.
짧은 부름에 뒤돌아본 그녀가 연기로 흩어졌다.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기다리는 마차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몸은 활력을 빼앗겼고 박탈감 속에 파묻혔다.
이어서 아르페시스는 낯선 공간에 떨어져 내렸다.
─ 알.
불쾌한 부름에 놀란 것은 그 이름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긴 금발을 땋아 내린 에스메랄다가 있었다. 그때부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되었다.
─ 뭐야? 표정이 왜 그래? 편하게 대하라며?
인상을 찌푸린 그의 태도에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 이름은 부르지 마라, 뭐 그런 심보야?
─ 그게 아니라…….
황제가 그를 그렇게 부르곤 했기에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고 설명을 했더니 에스메랄다가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 그럼 다른 이름으로 부를까?
─ 다른 이름?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푹푹 찌는 더위 때문에 자꾸만 차가운 물로 손이 갔다. 그는 물을 꿀떡꿀떡 삼키면서 에스메랄다를 응시했다.
─ 페페?
인상이 험악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치한 아명 같은 것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 아니면 페시스?
더 싫다. 황태자의 이름과 비슷한 발음조차 달갑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형제이기에 이름을 구성하는 음절이 비슷했다. 단 한 번도 달갑게 여겼던 적이 없는 사실이다. 구구절절 불쾌함을 설명했더니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 까다롭기는.
그에 아르페시스도 투덜거렸다. 굳이 이름을 줄여 부르지 않아도 될 일을 왜 그러냐고.
─ 그럼 매번 불편하게 아르페시스, 아르페시스, 그렇게 부르라고? 네 이름은 너무 길잖아.
─ 그대의 이름도 길지 않나. 에스메랄다, 하고.
─ 그래서 난 리디, 라는 예쁜 이름이 또 있잖아?
흥, 하고 콧대를 세우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그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다. 황제가 준 이름인데 좋아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 아, 그럼 ---는 어때?
─ 마음대로 해.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만들어진 낯선 음절은 어째서인지, 그를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 좋아, 이제 나만 부르는 네 이름이 만들어졌네.
그녀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 나쁘지 않았다. 순간 다음 말을 내뱉은 건, 순전한 장난이었다.
─ 그런 것 같군. 그럼 나는 그대를 --라고 부르지.
─ 뭐? 싫어. 사내 같잖아. 난 이미 리디라는 예쁜 이름이 있다고!
하지만 충동적으로 내뱉은 그 음절이 혀의 주변을 맴돌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 그대만 부르는 내 이름이 있으니, 나만 부를 수 있는 그대의 이름이 있는 게 공평하지 않겠나?
그래서 포기하기 싫었다. 억지를 들이밀었더니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마음대로 해.’ 하고 넘어가 버렸다. 그만이 부를 수 있는 그녀의 이름, 왜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짧은 음절의 이름을 불렀다.
─ --.
그 순간, 아르페시스는 보이지 않는 족쇄 속에서 몸부림쳤다. 온몸을 칭칭 감은 사슬은 세상을 덮을 것처럼 컸고, 그를 붙든 족쇄는 단단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편하다거나 거슬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억압당하고 있다는 반발은커녕, 오히려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
그럼에도 빠져나오고 싶었다. 몸을 결박하고 있는 그것을 모조리 끊어 내 몸에서 떼어 버리고 싶었다. 철컹, 절그럭, 철컹, 절그럭, 영혼을 찢어 내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는 몸부림을 치는 그의 행동이 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반항이 더 이어졌지만 아르페시스의 움직임은 점점 약해지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족쇄 밖에서 일렁이는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족쇄를 찢어 내고 달려가 저것이 사라지기 전에 붙들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
절박한 부름이 허공을 갈랐다.
─ --!
분명 절규였는데, 무엇을 부르짖었는지 모르겠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꿈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그녀가 곁에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아직 잠에 취한 상태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몸이 에스메랄다를 완전히 덮었다.
“에스메랄다…….”
녹을 듯 따스한 부름이었다. 꿈속에서 그를 잠식했던 박탈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충만함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그녀다. 그녀가 곁에 있다. 그녀가 살아서 곁에 있다.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그림으로 그려 낸 것처럼 선명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지막한 부름이 그녀를 깨운 것인가? 눈꺼풀 사이에서 녹안이 드러났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어 주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시스…….”
그녀에게서만 불릴 수 있었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에게 마주 웃으며 몸을 기울였다. 그가 움직이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다시금 잠에 빠진 모양이다.
고른 숨소리를 감상하며 에스메랄다의 뺨을 훔쳐 낸 그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언젠가부터 줄곧 간절히 바라보았던 것을 행할 기회가 왔다. 이를 드러낸 그가 에스메랄다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파렴치하게 혀를 놀려 그녀의 살결을 훑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음…….”
그의 품속에 가둬진 에스메랄다가 움찔거리며 소리를 냈다.
“하아…….”
아르페시스는 탄식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새어 나온 소리를 음미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래도록 굶주린 심장은 당장 찾아온 기회를 눈치채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주인을 한 번만 더 느끼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아르페시스는 그런 심장의 뜻에 착실히 따랐다. 이번에는 혀로 훑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짝 빨아올리기까지 했다.
“음…….”
에스메랄다가 감미로운 소리로 답해 주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서 떨어지자 아주 미세하게 붉어진 목덜미가 보였다. 그가 남긴 흔적. 일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만족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그녀가 사랑을 고해 주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르페시스는 아직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다고. 그가 입맛을 다시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더 자극적인 곳, 그녀의 붉은 입술을 살짝 빨아 올렸다. 에스메랄다가 잠결에 움찔, 하고 몸을 떨며 그를 자극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자, 항거할 수 없는 유혹에 잡아먹혔다.
그는 순순히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내부를 침범했다. 다음을 기대하는 몸이 에스메랄다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무게감 때문일까? 에스메랄다가 불편한 숨을 쉬며 뒤척거렸다. 움직임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아르페시스로부터 으음, 하고 낮은 비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자극을 받은 심장이 소리를 내질렀다. 이대로 더! 오래도록 갈망해 왔던 그녀의 달콤한 타액을 맛본 혀가 본격적으로 안을 헤집기 위해 준비 자세를 취한 그때. 텅, 하고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무엇인지 모를 것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아르페시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맞물려 있던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한 손으로 뒤통수를 움켜쥔 아르페시스는 살벌한 청록색 눈동자를 보고 굳어 버렸다. 그의 머리를 가격하고 침대 위를 구른 빈 발화 그릇이 기어코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카펫 위를 데굴데굴 굴러간 그것은 곧 대리석 위에 올라서며 타라랑, 하는 청명한 소리를 냈다. 살을 베어 내는 것 같은 섬뜩한 분위기 속에서 페드로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냈다. 아르페시스가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조금 전 맛본 에스메랄다의 타액이 함께 넘어가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제야 스스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은 그가 딸꾹질을 하는 사이.
“떨어져.”
잔뜩 굳은 얼굴의 페드로에게서 위협적인 경고가 떨어졌다. 딸꾹, 딸꾹, 대답 대신 딸꾹질을 내뱉은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위에서 후다닥 비켜났다. 그는 자신의 파렴치하고 무도한 행동에 놀라다 못해 기겁을 한 참이다.
맙소사,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대체 무슨 짓을! 심장이 굉음을 내며 뛰어 대는 것과 달리 아르페시스의 얼굴은 점차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꿈속의 그녀도 아니고, 현실의 어린 에스메랄다에게 이토록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뚝, 뚝, 뚝, 페드로가 목을 좌우로 꺾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혹여나 아직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가 깨어날까 싶어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해가 떠오른 아침, 환한 햇빛이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침대에서 주춤, 주춤 멀어졌지만 페드로는 반대로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며,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에 페드로가 멀찍이 떨어진 채 굳어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손을 까딱였다. 당장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관두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반응을 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는 페드로에게 뒷덜미가 붙들린 채 에스메랄다의 옆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아르페시스가 곁에 눕자, 정말 거짓말처럼 에스메랄다의 숨소리가 고르게 흩어졌다. 힐끔, 힐끔, 페드로의 눈치를 살피던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정말… 악몽을 꾸는 건가?”
조금 전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보았기에 물어야만 했다. 페드로는 답이 없었다. 어제 온실을 나서면서 했던 대화 때문에 저러는 것 같은데…….
아르페시스는 고작 하루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에스메랄다가 잠든 지 얼마나 지났냐고 묻는 그에게 3시간쯤 되었다고 답했다. 페드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해서 곤히 잘만 잤다, 정말 악몽을 꾸는 게 맞느냐, 전혀 그런 기색이 없더라, 등등. 조금 따지듯이 말했더니 그가 에스메랄다의 침실에 가서 그녀를 재우라지 뭔가? 당연히 좋다꾸나 하고 달려와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한참 동안 아르페시스를 주시하던 페드로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무 늦지 않게 깨우고 네 방으로 돌아가.”
“아?”
“다시 한번 허튼짓을 했다간.”
에스메랄다의 곁에 누워 있는 자세 그대로 멱살이 잡혔다. 페드로가 숨소리로 만들어 낸 경고를 속삭였다.
“네놈의 가랑이 사이를 잘라 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다.”
아르페시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후 페드로는 창문을 넘어 돌아가 버렸다. 아무리 남매라지만 누이가 깨어나지도 않은 침실에 들락거리는 건 좋게만 보이지 않을 테니까.
페드로가 사라지자 침실에는 그와 에스메랄다만이 남았다. 끔뻑, 끔뻑, 긴 속눈썹을 매달고 있는 눈꺼풀을 끔뻑이던 아르페시스가 별안간 소리도, 동작도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미친놈! 파렴치한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에스메랄다가 깰까 싶어 차마 발버둥을 치지도 못하고 속으로 자괴를 곱씹었다. 맹세코!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생각은 만반이었지만 실행을 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아직 꿈속에서 본 것처럼 성숙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르페시스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우르르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꿈속의 에스메랄다와 현실의 에스메랄다를 구분하기 위해 더한 노력을 쏟아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생각 속에서 이윽고, 스스로가 믿을 만한 놈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에스메랄다가 그의 품을 파고들며 눈을 떴다.
“깨어났는가?”
속에서 무슨 일이 있든, 일단 에스메랄다를 보면 헤실헤실 표정이 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밝게 웃으며 햇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녹안을 반겼다. 절대로 발을 뺄 수 없는, 그리하여 영원히 사로잡혀 있을 선명한 녹색 눈동자.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와 똑같이 웃어 주는 에스메랄다가 사랑스럽다.
“보고 싶었어…….”
부드럽고 얇은 천이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가볍고 살랑거리는 목소리였다. 잠결의 투정처럼 웅얼거리는 말에 또 한 번 그녀에게 빠져든다. 아르페시스는 열기가 차오를 것 같은 눈을 꽉 감고서 에스메랄다를 끌어당겼다.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감정 때문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그대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웠었으니까.
“사랑한다, 에스메랄다.”
꿈속에서는 이 짧은 말을 그녀에게 전하지 못하고 홀로 읊조려야 했었는데, 지금은 그녀에게 사랑을 고하고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눈을 감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사이 에스메랄다는 다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애초에 완전히 깨어난 게 아니라, 잠투정을 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떴던 모양이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아르페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해가 떴으니 곧 떠나야 하는데, 이 온기 없이 어떻게 살지? 1년, 혹은 그 이상을 보지 못할 텐데 그사이 다른 놈이 에스메랄다에게 집적거리면 어떻게 하나.
원하지 않았음에도 찾아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은 마수의 마기처럼 질척거렸다. 그는 애써 경직된 입매를 풀며 마음을 다독였다. 분명 서로만을 보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주먹을 꽉 움켜쥔 아르페시스가 중얼거렸다. 지난밤, 그녀를 부르고 답을 들었던 그 시간처럼 이번에도.
“에스메랄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흩어지길 바란다. 어서 깨어나서 답해 주기를.
“에스메랄다?”
눈꺼풀 사이에 숨어 버린 녹색 눈동자가 보고 싶다. 그녀의 대답으로 이 불안감이 사라지기를.
“에스메랄다.”
“응…….”
이윽고 대답이 돌아왔다. 아르페시스는 계속, 몇 번이고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잠에서 깬 것인지, 그녀가 키득거림과 함께 부름에 응해 주었다. 입매가 바짝 말라 가기 시작하자 그는 굳어 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에스메랄다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에게 밀어를 속삭이게 된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꿈속에서처럼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떨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까.
곧 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를 실감한 순간 든 생각은 아주 단순했고, 또한 강렬했다. 죽고 싶지 않다. 아니, 살고 싶었다. 언제나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었고 누구나 탐낼 것이 분명한 그녀의 곁을 비우기 싫었다.
처음으로, 죽기 싫다보다 살고 싶다는 명제가 강렬해진 순간이었다.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의 이후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삶을 위해 살고 싶었다. 그에게 삶에 대한 집착이 피어난 것이다.
* * *
잠결에 아르페시스를 배웅했다. 이렇게 깊게, 그리고 오래도록 잔 것이 몇 년 만인지라 잠에서 헤어 나오는 데 오래 걸린 탓이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조찬을 마치자 아르페시스와 근위대가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황족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에스메랄다는 가족들 틈에 서서 아르페시스를 힐끔거렸다. 그도 종종 그녀를 힐끔거리는 통에 시선이 마주치곤 했다.
그가 당장에 남부로 들어서는 게 아니라서 다행일까? 아마도 병영에 도착하면 중앙군을 연합군에서 제외하는 업무부터 시작하겠지. 그가 떠난 후 총사령관직을 인계할 인사도 선출해야 할 테고.
그가 당장 남부에 진입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입 안이 쓰다. 에스메랄다는 불규칙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짧은 행복이 끝났으니 이제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환대해 주어 편히 쉬다 가는군. 쿠베트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지.”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성의 주인과 손님이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은 뒤 아르페시스가 말에 올랐다. 떠나기 직전 그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간 스치듯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면 그녀의 착각일까? 에스메랄다는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지만 보지 않음에도 멀어지는 그가 눈앞에 생생했다.
“영애, 잠시 걷지 않을래요?”
아르페시스가 떠난 후 쭈뼛거리며 다가온 루이자가 아니었다면 속에서 또 무엇을 곱씹었을지 모를 일이다.
쿠베트 부인이 흐뭇하게 웃는 사이, 그들은 나란히 서서 정원으로 향했다. 어색한 시간이었지만 굳이 자리를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본래의 일정보다 오래 남은 건 그녀와의 친분 때문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루이자는 에스메랄다를 배려하는 것인지 아르페시스에 대한 얘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영애는 자수를 잘 놓나요? 전 정말 그런 데는 손재주가 없거든요.”
그날은 정말 하루 온종일 루이자와 붙어 있었다. 에스메랄다에겐 어색하나 평범한 영애들이면 누구나 하는 대화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표면적으로는 또래 영애들이 친해져 함께 노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 배웅을 위해 나온 루이자는 후에 꼭 백작 성으로 초대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약속 잊으면 안 돼요?”
에스메랄다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며 반드시 그리하겠노라 답했다. 백작을 시작으로 아레스, 페드로, 오멘과 페르멘이 말에 올랐다. 이후 에스메랄다가 마차에 타자 테노리엘 일가가 귀환길에 올랐다. 쿠베트성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며칠이건만, 기나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백작 성으로 돌아온 날, 에스메랄다는 자정이 훌쩍 넘는 시간까지 집무실에 앉아 밀린 보고서들을 살펴보았다. 북부는 아직 촉각을 곤두세운 채 몸을 웅크린 상태였고, 남부는 아르페시스의 전공에 자극받은 황태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부군 지휘부를 들쑤시며 대형 마수를 찾고 있으니 곧 토벌을 계획할 것 같다는 소식이 함께 왔다.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희소식이 예정보다 빨리 들려온 것이다. 에반스는 그 토벌 자체를 방해하기 위해 각 부대의 집결지를 변경한 명령서를 보낼 예정이다.
며칠 성내를 비운 사이 라그나는 실드 마도구를 더 만들어 놓았고, 나단의 교육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본격적인 승마를 위해 개인 말을 구비하기로 했다. 하는 김에 라그나와 나단에게 줄 말도 함께 주문했고.
“남은 건 디아나의 일인가…….”
오랜만에 글을 가득 읽어 마음이 평안해졌다고 하면 정상이 아닌 것일까? 밀린 것들부터 확인한 후에야 침대에 누운 에스메랄다가 생각했다. 그 이후의 며칠도 평소와 같았다. 잠이 들었고, 악몽을 꾼 후에는 울며 깨어났다. 속에 담긴 새까만 감정들을 다시 곱씹으며, 부은 눈 위에 젖은 천을 올렸다.
당일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 후 침대에서 일어난 것까지 똑같았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는 것도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더해 페드로와 약속한 대로 조찬으로는 매일 차와 함께 약제를 챙겨 먹기 시작했고.
페드로가 가져온 음식으로 식사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 중인 것은 물론 종종 그가 이끄는 대로 품에 안긴 채 정원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의 품에서 10분, 20분 낮잠을 청하며 앞으로도 매일이 같을 것이라 당연하게 믿었다. 성으로 돌아온 지 10여 일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
어제 아르페시스가 살아남은 중앙군 4천 2백여 명, 그리고 서부 영주들의 사병 중 자원한 기사 5백여 명을 데리고 남부로 간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모두 기존에 모시던 영주들과의 고용을 해지하고, 자유 기사로 전향한 이들. 필히 그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벌써부터 마음과 충성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리라.
다가올 일들 때문에 복잡했지만 그녀는 아르페시스를 향한 믿음 하나만으로 버티며 똑같은 하루를 시작했었다. 본래라면 책상에 앉아 영지 업무부터 빠르게 처리하는 사이 차와 함께 약제가 왔을 것이다. 요 며칠 동안 익숙해진 대로. 하지만 아쉽게도, 에스메랄다는 책상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간 직후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사랑하는 천사에게.」
익숙한 필체가 적힌 서신 봉투가 책상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그녀의 얼굴에 스멀스멀, 절망이 피어났다.
지난 저녁에도 페드로와 함께 식사를 했다. 지금쯤이면 그는 연무장에서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이후에는 매일 그리하는 것처럼 지하 보관소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 저 서신은 뭐지? 혹시 깜짝 선물 같은 것일까? 그녀는 속을 장악하고자 밀려드는 절망을 막아서며 그렇게 생각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책상 위에 곱게 놓여 있는 서신을 들었다. 별것 아니겠지,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밀봉된 것을 뜯어내 속에 든 것을 꺼낼 때까지, 봉투 속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전까지, 계속.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를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로 임명한다.」
조금 딱딱한 아르페시스의 필체가 채워진 임명장과 뒤에 겹쳐져 있는 종이까지, 총 두 장.
「미안하다.」
페드로의 필체가 만들어 낸 건 그게 전부였다. 구구절절한 변명도, 이해시키고자 하는 설명도 없이 그저 단 한 마디.
에스메랄다의 손에서 우그러진 두 장의 종이가 그녀의 몸과 함께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마수를 보며 느끼는 공포보다 선명한 배신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아득, 하고 울린 것은 그녀의 잇새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아르페시스와 그녀의 관계를 본 페드로이니 대충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것 같았다. 안다 하여 이해하고 포용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에 남은 페드로와의 시간이 그녀를 할퀴기 시작했다.
‘잘못했다. 내가 전부 잘못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홀로 남겨 두어 미안하다.’
그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했다. 환청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 그리 아프게 울지 마.’
‘내가 언제든 뒤에 서 있으마.’
그 달콤한 속삭임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듣기에만 좋은 거짓말에 현혹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했지 않니.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못 할 게 없다는 것만 알아 두어라.’
아르페시스를 지키기 위해 간 것이 뻔하다. 가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면서도 결국은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오라비는 비난받아 마땅하건만, 연인을 지켜 주기 위해 떠난 기사를 비난할 방법은 알지 못한다. 페드로가 말을 하고 떠났으면 지금과 달랐을까? 아니, 미리 언질해 주었다 해도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다리가 꺾였다. 책상 옆에 주저앉은 그녀의 몸은 쉴 틈 없이 떨리고 있다. 두 사람이 사지로 걸어갔지만 거기서 오는 의미와 영향은 달랐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아르페시스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겠다는 약속을 그는 끝끝내 지켜 냈기에, 에스메랄다에겐 믿음이 남아 있었다.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반면 페드로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죽어 버렸다. 죽음에 관해선 에스메랄다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에스메랄다는 자신 때문에 변한 미래에서 아르페시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겨우 버텨 내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페드로가 얹은 무게는 기어코 그녀를 무너트렸다. 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으으…….”
그러나 말을 잃어버린 벙어리처럼 앓는 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페드로의 배신감에 무너진 그녀는 쉴 틈도 없이 찾아온 다른 감정들로부터 난도질당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강렬해져 가는 감정은 페드로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르페시스를 향한 것이었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의 호수 속에서 떠올라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페드로 외의 가족들과는 그리 친근해 보이지 않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그것을 알면서도 한 명뿐인 가족을 사지로 데려간 아르페시스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페드로를 데리고 간 것은 살아남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서겠지.
그것을 미리 알려 주지 않은 이유? 에스메랄다가 지금처럼 부들거릴 것을 알았기 때문일 터. 모든 행동의 이유가 보였다. 본래라면 아르페시스가 안전을 위해 호위 기사를 충원한 건 잘한 일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임명장에 쓰인 이름이 페드로의 것이 되자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어찌나 간사하고 옹졸한지.
고맙다는 감사는 물론, 잘했다는 칭찬과 밉다는 원망까지. 에스메랄다는 두 사람에게 그중 어떤 것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현실의 선택 위에서 감정으로는 덮을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었으니.
‘가지 않으마.’
그 맹세를 했던 페드로는 에스메랄다를 배신했고, 그 맹세를 믿었던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에게 기만당했다. 이렇게 다시금 떠나갈 거였다면 차라리 밀어낼 때 다가오지 말지. 심장을 에워싸고 있던 지독한 원망을 녹여 주지 말 것이지.
당장이라도 페드로의 전사 소식을 알리는 파발꾼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무섭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녀의 세상은 무너지겠지. 두렵다. 이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흉측하게 망가진 세상을 보며 우는 것뿐이다. 비참하다.
그 모든 감정 속에서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페드로의 죽음을 아르페시스 때문이라고 여기며 그를 원망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유일하게 다시 품은 가족을 사지로 데려간 원흉이라고 여기며 훗날 그를 용서하지 못하게 될까 봐. 오래도록 사랑해 이제야 이어진 그를 증오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그게 가장 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역겨웠지만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고, 차와 약을 가지고 온 시녀에 의해 발견되어 침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꼬박 열흘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페드로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의 시신이 오기를 기다렸던 10여 년 전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