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밀회
“아버지.”
테노리엘 백작과 페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일가가 도착한 것은 어제였지만, 백작과 그가 서로를 마주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주변을 배회한다고 바빴으니까. 도착 직후 아레스와 조금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다. 두 사람은 지난번의 언쟁을 잊어버린 사람들처럼 대화에 임했다. 본디 가족이란 그런 법이다. 매일 싸우면서도 또 매일을 함께 웃는.
“남부는 어떻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아비에게 안부조차 묻지 않고 대뜸 용건이더냐?”
“평안하지 않으신 게 빤히 보이는데 여쭤보아 무얼 합니까?”
페드로의 직설적인 성격은 모친을 닮았다. 그것을 알기에 백작도 한숨을 내쉬며 넘어가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페드로와 똑같이 행동하던 부인을 사랑했고, 그녀를 빼다 박은 페드로를 미워할 수가 없으니까.
제멋대로 황실 기사단을 박차고 나온 페드로를 파문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훈련과 교육에 관한 것만 아니면 매번 자식들에게 져 버리고 마는 백작다웠다. 결국 오늘도, 그는 아들의 건방짐을 부정이라는 왜곡으로 묵인했다.
“그래서, 남부는 어떻습니까?”
“그걸 왜 내게 묻느냐? 네가 알아보지 않고.”
그렇다고 아들에게 심통이 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백작의 말에 페드로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귀와 눈이 다 막혀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다 네놈이 자처한 것이지. 누가 그리 내팽개치고 가라고 하더냐?”
언짢음을 내보이고 있지만 페드로는 백작이 이미 자신의 행동에 백기를 들었음을 눈치챘다. 에스메랄다가 형제들에게 사랑받으며 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형제들 역시 위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즉, 그는 부친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얄밉게 부친의 그 사랑을 파고들어 고집을 부리는 것도 다 그 사랑의 크기를 알고 있는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백작은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을 쥐여 주리라. 내일쯤이면 그간 듣지 못했던 남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백작은 몇 오지 않은 서부의 영주들과 대화하기 위해 떠났고 페드로는 형제들 틈에 끼었다. 후작 내외에게 다가가는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건 한창 쌍둥이를 괴롭히던 도중이었다.
“먼저 간다.”
“어?”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에스메랄다를 발견했으나 먼저 다가가지 못하던 형제들을 등진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홀 내부에 아르페시스가 없는 것을 보니, 먼저 자리를 피해 기다리는 중인 모양이다. 지금부터 일어날 모든 일은 페드로의 이기심 때문이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에스메랄다가 다시 웃기를 바라는 그의 이기심.
“쉬러 갈 생각이니?”
“네, 피곤해서요.”
에스메랄다는 당연하다는 듯 그가 내민 손을 잡아 주었다. 곁에 다가가는 것도 힘들었던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만, 여전히 그녀는 웃지 않는다.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의견을 배제한 채 일을 강행한 건 조급함, 무력감,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다.
아르페시스에게 거리를 두고자 하면서 막상 문제가 벌어졌을 때는 벌벌 떠는 에스메랄다의 반응. 거기서 페드로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르페시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그의 행동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미리 아르페시스에게 알려 주었던 방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골랐다. 에스메랄다가 머무는 손님방으로 가는 방향 속에서, 그가 후작 성에 들어온 이틀 동안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던 구석진 방. 마땅한 장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발견한 곳이었다. 평범한 문 앞에 멈춰 선 페드로는 천천히 에스메랄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
의문을 담고 그를 올려다보는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인형의 것처럼 일관적이었다. 살아 숨 쉬지 못하는, 그리하여 생명을 가질 수 없는 인형.
페드로는 기억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환하게 웃던 시절을 꺼내 왔다. 그녀가 다시금 그렇게 웃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 할까. 설령 그것이 지금의 에스메랄다에게 조금은 힘든 일이라 해도, 끝에 가서 웃을 수만 있다면.
“도주가 나쁜 것은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순간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지.”
“……네?”
“그러니 외면하지 말고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렴. 내칠 것인지, 품을 것인지.”
페드로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렸고, 이미 내부에 진입해 있던 이가 잠금을 풀어 둔 덕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문이 열렸다. 이윽고 그는 작디작은 에스메랄다를 뒤로 밀었다. 페드로가 시선을 들어 찾은 것은 의문을 가득 담은 녹안 대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은회색 눈동자였다.
“오라버니?”
“오래는 안 됩니다.”
움찔거리며 순식간에 긴장하기 시작하는 에스메랄다의 뒤에서 조금 떨리는 답이 돌아왔다.
“……알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은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와 함께 걸었던 복도를 되돌아갔다.
“네가 결정을 내려야 나도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복도의 모퉁이에 도착한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걸 결정하기 위해선 에스메랄다의 결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부터 그는 보초병이다. 그녀의 결정이 확정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그의 역할이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나 장막을 주변에 두르고, 복도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감각을 확장했다. 그가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무엇을 숨기는 데 능하지 못해 아마 알고 있겠지만… 정식으로 고하고 싶었다.”
아마도, 저렇게 직접적인 말까지 외면하지는 못하겠지. 페드로는 지금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 지 빤히 보였다. 그것을 알고 만든 만남이었건만, 에스메랄다에게 외간 남자가 다가오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홀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페드로는 이어지는 말을 듣고 픽 웃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해. 내 심장은 이미 그대의 것이다.”
애송이인 줄만 알았더니 마냥 어리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저런 말을 할 줄 알다니. 순수함을 품은 채 어설프기만 하던 소년은 어느새 사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대가 대답하지 않으면 내 멋대로 믿을 것이다. 내가 사생아라 밀어내는 것이라고, 그래도 되는가?”
페드로의 웃음은 협박에 가까운 말이 나왔을 때부터 사라졌다. 그는 아르페시스의 뒤통수라도 한 대 갈겨 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손가락 마디를 풀기 시작했다.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위협적으로 나오며 협박을 하는데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이어지는 확답이 없었다면 슬슬 들어가서 두 사람을 떼어 놨을 것이다.
“나도…….”
페드로가 막 한 발자국을 떼었을 때 에스메랄다의 속삭임은 명확한 말이 되었다.
“사랑, 해.”
역시나. 아르페시스에게는 보름 사이에 시작된 불같은 감정일지 모르겠지만 에스메랄다에게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황태자의 약혼 연회에서 마주쳤던 그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녀는 아르페시스와 이어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캐 봐야 하나, 싶어 막막해지는 와중에도 페드로는 작게 중얼거렸다.
“괘씸한 놈…….”
예상은 했지만 결국은 에스메랄다 입에서 인정하는 말이 세상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제는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주변을 알짱거려도 막기는커녕, 도와줘야 할 판이다. 에스메랄다가 좋다는데 그가 뭘 어쩌겠는가.
오멘이나 페르멘이면 당장 난입을 해 방해를 했겠지만, 그는 아니다. 그에게 최우선은 언제나 에스메랄다였고, 중요한 건 그녀의 감정이니까. 또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목을 매는 게 훤히 보이니 함부로 굴 것 같지도 않고. 페드로는 그 뒤로 이어지는 절절한 말들을 흘려듣던 도중 흠칫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공간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척이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은 명백히 그의 실책이었다. 아르페시스가 방비를 할 수도 있었지만, 긴장을 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 그가 직접 신경 썼어야 했다.
“망할.”
페드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홀에서 올라오는 기척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미 있는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대에게 닿으면 자제가 되질 않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터질 것만 같다.”
닿아? 닿는다고?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기에? 때마침 심기를 제대로 건드는 말이 들리기도 했기에 페드로는 험악한 인상으로 두 사람이 있는 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화들짝 놀란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품속으로 감추듯 더 꽉 껴안았다. 그러는 사이 페드로는 두 사람 너머에 있는 곁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형태를 만든 것과 그것이 곁문의 열쇠 구멍을 채우는 일, 그리고 잠금이 풀리는 딸칵 소리가 들린 건 거의 동시였다.
* * *
사생아, 아르페시스에겐 정말 별것도 아닌 단어였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 종종 입에 담는다, 그 정도?
하지만 그 단어에 에스메랄다가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사냥감을 궁지로 몰아넣고자 하는 사냥꾼의 본능이라고 봐야 했다. 그것을 이용하면 고대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행하였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냈다.
그를 피하려던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녀가 대답을 했는데. 무려, 그가 고했던 것과 같은 단어가 그녀로부터 돌아왔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모든 것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완연한 충족감, 그리고 환희. 품 가득 에스메랄다를 껴안은 그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게, 이게 꿈은 아니겠지?”
똑같은 깊이와 색채의 감정을 답으로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감정의 편린이면 충분했다.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을 자신도 있었건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와 같은 사랑이었다.
“온종일 내 세상은 그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대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눈에 밟힌다.”
“…….”
“내가 살아 숨 쉬는 데 필요한 심장을 그대가 가져가 버려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을 모두 고하고자 했던 건 아니건만, 자제가 되지를 않았다. 충동적으로 그간 담아 온 것들을 모두 털어놔 버리고야 만다. 이제까지처럼 속에 얌전히 담아 두는 게 불가능했다. 털어놓지 못하면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품에 안겨 있는 에스메랄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맞닿아 있기에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는 건 느껴졌다. 듣지 못한 건 아닌 것 같으니 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당장은 이 감정을 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르페시스는 어렵게, 어렵게 그녀를 품에서 놔주었다. 자신의 옷깃을 움켜쥔 손길이 그를 벅차게 만든다. 품속에서 올려다보는 저 예쁜 눈동자는 어떠하고? 그녀의 녹안에 사로잡힌 것 같다. 그래, 아르페시스는 한때 꿈속에서 했던 생각을 다시 하며 손을 뻗었다.
그를 사로잡아 포로로 만든 녹안 속에 가득 담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그녀를 독차지한 것만 같아서.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몇 번이고 쓸어 보았다. 꿈결에 탐해 보았던 입술도, 오뚝한 코도, 자신을 담고 있는 녹색 눈동자도.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데도 아무런 저항 없이 모두 허락해 주는 그녀가 좋아서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부러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손을 놀렸다. 별것 아닌 손길을 따라, 에스메랄다의 탐스러운 금발이 흐트러졌다. 또다시 홀려 버린다.
“그대가 좋아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꽤나 복잡해 보였지만 아르페시스는 멈출 줄 몰랐다. 녹색 눈동자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보았으니까. 충만함, 그리고 환희.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나? 답이 없어도 감정이 돌아오는데.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말랑거리는 뺨을 문질러 보았다. 볼품없이 떨리는 손이 어째서인지 부끄러웠다. 그의 일생에 있어 누군가에게 전해 볼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밀어를 속삭여 본다.
“아닌 것처럼 내게 벽을 세우다가, 갑자기 걱정하고 있다는 서신을 보내고. 그러니 내가 이리 홀린 것이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깨무는 게 너무 싫었다. 상처가 나면 어쩌려고. 지난번 사령관실에서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무는 것 같더니, 왜 이런 안 좋은 버릇이 있단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미간을 모으며 그녀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하지 말라고, 상처가 나지 않느냐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에스메랄다가 제 입술을 놔주었다. 그게 또, 미치게 좋았다. 제 마음을 알아준 것만 같아서.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그대를 대체 어찌하면 좋지?”
그녀로부터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귓가를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어 오는 소리 때문에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과거에 보았던 일기가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은 그는 불굴의 의지로, 파렴치한 모든 것을 밀어냈다.
그의 흑심, 사심, 욕심을 모두 채우기엔 그녀가 아직 너무 어리다. 서부를 회복하는 동안 그의 키가 더 커 버려서 에스메랄다는 전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이 이상은 사랑이란 감정으로 포장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딱 하나. 지금 해 보아도 괜찮을 것 같은 욕심 하나.
‘--의 보드라운 살결에 고개를 묻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고 싶었다. 그녀의 향이 흩어지지 못하도록 들이쉬어 나의 폐부를 가득 채운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그건 너무 변태 같을까? 아르페시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불쾌해하면 어쩌나, 혹시 어린이들에게 반응하는 것이라 오해하면 어쩌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는 그저 사랑하는 이에게 반응하는 정직한 사내일 뿐이다. 도의적으로 그 이상 바라서는 안 되기에 꾹 참고 있기까지 하질 않나. 그러니까, 그러니까, 잘 참고 있는 보상으로 이 정도는…….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이런 신장 차이 때문에라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어리다.
왜 꿈에서 그녀가 훌쩍 자란 모습을 봐 버린 것일까. 그걸 보지 못했다면 이런 욕망은 품지 않은 채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빨리 꿈속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자라난 에스메랄다를 보고 싶다. 마음속에서 바라는 것들이 모두 파렴치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있도록.
그는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존재가 자신을 채우자,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전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일기가 적어 내려갔던 대로, 황홀했다. 아릿한 꽃향기는 향유의 것일까? 그 속에 다디달아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체 향이 섞여 있었다. 꽃향기를 치워 버리고 이것만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어디로든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나 원하는 순간에 그를 채울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나마 바라 본다. 그녀도 지금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뛰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머리를 멍멍하게 울릴 정도로 뛰어 대는데, 그녀에게도 들릴 것이다. 제 주인을 만나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알아봐 줄 것이다.
몇 번이고 제 욕심을 채운 아르페시스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대에게 닿으면 자제가 되질 않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터질 것만 같다.”
그리고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화들짝 놀라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갑자기 벌컥 열린 문을 지나 페드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당황해서 굳어 있던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마나로 잠금쇠를 풀어버리고 연 곁문 너머를 확인한 후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에스메랄다에게 속삭인 말들을 누군가 들었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황제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된다. 필요하다면 허리에 맨 예장용 검을 사용할 의사도 있었지만 정작 그가 검을 뽑아 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 죄송합… 히끅, 그게… 들으려고 한 건 히끅, 아닌데…….”
아르페시스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무리 입막음이 필요하다고 해도, 쿠베트 후작의 손녀를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둠으로 가려진 곁문 너머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건 루이자였다. 아르페시스의 팔 안에 갇혀 있던 에스메랄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로 시선을 내린 아르페시스는 자신으로 가득 찼던 녹안에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저걸 되찾아 오라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제 속에서 피어나는 음습한 감정을 꾹꾹 누른 그가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정신을 딴 곳에 파느라 해야 하는 최소한의 경계도 하지 않다니, 자책해야 마땅하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근방의 기척을 전혀 확인해 보지 않은 것은 분명 그였으니까. 두 사람이 자책과 당황으로 굳어 있는 사이 페드로가 가장 먼저 나섰다.
“천사야, 잠시만 여길 맡아 주겠니? 네가 없는 연회장에서 전하께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셨다. 이 이상은 위험해.”
“……네.”
“가시지요, 전하.”
페드로의 말대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임을 알지만 그의 발은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은 그이건만, 뒤처리는 에스메랄다에게 떠맡기고 도망치듯 떠나다니. 그는 이를 악물며 제게 폭 파묻혀 있는 에스메랄다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책감으로 복잡했지만, 가야 한다. 그 전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아르페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폐부 가득 그녀를 채워 보았건만, 처음의 만족감은 어딜 갔는지 부족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는 페드로의 시선을 외면하며 속삭였다.
“당당하게 그대 곁에 설 수 없는 처지라 미안하다.”
오늘의 시간도, 앞으로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까지. 전부 숨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비참했다. 이런 그의 처지 때문에 에스메랄다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숨기거나 포장할 수조차 없는 것이라 입 안이 쓰다. 아르페시스는 침묵하는 에스메랄다를 어렵게 등져야만 했다.
“미리 살피지 않은 실책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역시 하지 않은 것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다.”
“……제가 모든 순간에 천사와 전하를 시야에 둘 순 없으니, 그러시는 게 좋긴 할 겁니다.”
미로 속에서 대화를 나눈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을 이렇게 처리하다니.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쿠베트 영애는 어찌해야 하나? 쿠베트가 황실과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테노리엘의 적극적인 우방이라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우선은 저희 쪽에서 해결해 보지요. 전하께서는 돌아가서 자리를 지키는 데 신경을 쓰십시오.”
아르페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자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이미 페드로에 대한 신뢰가 자리를 잡아서인지, 그가 저렇게 말하자 루이자의 문제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생각을 떨쳐 내면서도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 다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에스메랄다에게 답을 들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어쩌면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있는 이상 그와 에스메랄다의 관계는 결코 안전하지 않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가?”
층계를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선 페드로가 말했다.
“중요한 건 그 아이 마음이니까.”
“……그런가? 고맙군.”
“그렇기에 너에게 감사 인사를 들을 이유는 없어.”
또……. 아르페시스는 이제 페드로의 반말에도 별다른 감흥도 느끼지 않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경고하지.”
“…….”
“테노리엘의 이름을 가진 다섯 자루의 검이 매 순간 너를 지켜볼 거다.”
아르페시스의 등골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부디, 그것을 감내하시고 발을 들이셨길 바랍니다.”
이제 가 보라는 듯, 페드로가 그의 등을 툭 밀었다. 무방비하게 등을 내준 접촉은 처음이건만, 그게 나쁜 감각이 아니라서 이상했다.
아르페시스는 어색하게 움직이는 입꼬리를 문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품에 안아 보았던 작은 체온, 귓가에 들리는 숨소리, 한때나마 폐부를 가득 채웠던 그녀의 체 향. 찰나의 순간 지나가 버렸지만 억겁의 시간 동안 누린 것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이대로 다시 귀족들 틈에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하.”
3층에서 내려와 막 2층에 발을 디뎠을 무렵,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있던 페르멘을 마주했다. 아르페시스는 갑작스러운 조우에 멈칫했으나, 조금 전 페드로의 말을 떠올리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섯이라는 숫자에 분명 저 소년도 들어가리라. 그리고 페드로와 달리 페르멘은 그를 적대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내 형제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여인과 엮여 본 적이 있어야 알지. 그가 배운 책 속의 지식에는 이럴 때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페르멘이 대뜸 무릎을 꿇어 버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아르페시스는 당황한 채 굳어 버렸다. 대체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일까?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손끝을 움찔거렸다.
“일전 제가 전하께 저지른 무례에 감히, 용서를 청합니다.”
무례? 무슨 무례?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지식 속에 있는 무례의 정의를 떠올렸다. 그리고 페르멘이 말한 무례가 무엇인지 곱씹어야만 했다.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생각 없이 말을 내뱉어 전하를 모욕한 죄, 용서를 청하며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말로써 행한 무례… 그것도 몇 개 있는지라 범위가 많이 좁혀지진 않았다. 고작 황성 복도에서 한 번, 쿠베트성의 정원에서 한 번 만난 것뿐인데 왜 이렇게 많은지.
“정확히 어떤……?”
결국엔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정말 이상했다. 두 동갑내기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그렇다고 페르멘이 머리를 땅에 댄 건 정말 그가 바랐던 상황이 아니었다.
“도의의 죄를 물어야 할 대상은 다름에도, 감히 발칙한 단어를 선정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벌을 청합니다.”
그제야 아르페시스는 페르멘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귀족의 말인지라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사생아를 들먹였던 일을 말하나 보다. 솔직히 이렇게 찾아와 사과할 만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부정과 배덕의 죄는 황제가 지은 것이지,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을 단어만 바꿔 그대로 말하는 페르멘이 신기하기도 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그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편하게 말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것이 친근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 기뻤다. 다시 그렇게 말해 달라고 하면, 해 줄까?
본인의 몸속에 흐르는 피를 생각하며 씁쓸해지기 전, 그는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생각을 밀어냈다. 솔직히 테노리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에겐 이미 호감이 되어 버린지라 페르멘이 하는 행동이 불쾌하지도 않았다. 곤란했던 거지.
“애초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으니 그만 일어나지.”
페르멘은 두말하지 않고 일어났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래.”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궁금한 것이 생겼다. 무엇을 특정하는지 몰라 되물어야만 했던 페르멘의 무례.
“한데 사생아에 대해서만? 다른 것은?”
인적이 없는 곳에서 기다린 이유는 이해가 간다. 테노리엘과 그가 따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굳이 타인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겠지. 그가 타인의 눈을 피해 에스메랄다와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사과를 하러 올 필요가 있나? 모르는 척 넘어가도 될 텐데. 아르페시스는 페르멘이 잠시간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덤덤한 얼굴이던 페르멘이 곧 표정을 바꿨다.
“다른 것은 딱히 죄송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정원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적대감을 가득 담은 표정. 아르페시스는 문득 실소가 흘렀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일관성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한번 경고드리지만, 저희 리디 근처에 접근하지 마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이미 그의 소관을 벗어난 문제일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 에스메랄다와 가졌던 은밀한 시간. 그래, 밀회를 떠올리며 웃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것이,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온다. 무려 그녀의 마음을 확인했으니까. 그녀에게 한 모든 행동을 허락받기까지 했다.
“왜 실실 쪼… 아니, 그렇게 웃으시는지?”
“글쎄?”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에게 배운 적 있는 말 돌리기를 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은 루이자의 문제는 페드로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를 믿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페르멘을 뒤로하고 연회장으로 돌아온 그는 당장 휴고를 테라스로 끌고 나가 속닥거렸다. 이번에는 마나 장막을 만들어 대화 소리를 차단하는 것도 잊지 않고.
“사랑하는 이의 사내 형제들에겐 어찌해야 하는가?”
“……예?”
대뜸 그에게 끌려 나온 휴고가 반문했다. 어서 대답을 하라는 아르페시스의 압박에, 결국 그는 자신의 상식선에 있는 답을 내어 놓았다.
“잘… 보여야겠지요.”
“잘 보여야 한다고? 어떻게?”
왜 그걸 자신에게 묻는가.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가 된 후 연인에게 차인 전적이 있는 휴고가 울컥거리는 화를 억눌렀다. 누구는 차인 후로 계속 혼자인데, 아르페시스는 뭔가 잘된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또 한 번의 번거로운 일을 시작할 모양인데……. 휴고는 그것을 깨닫고 머리를 굴렸다.
“귀환 일정은 어찌할까요?”
후에 귀찮아지느니, 할 수 있을 때 빨리 해 두자.
“아… 그 문제가 있었군. 귀환은 얼마나 늦출 수 있지?”
“……쿠베트 후작님과 상의를…….”
“최대한 늦춰라, 최대한. 알겠는가?”
“……예.”
내일부터 또 본연의 업무 외, 추가 차출이 있을 것만 같았다.
* * *
에스메랄다는 부친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에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휘둘러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도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면 후에 다가올 일에 대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미, 미안해요, 영애… 그게,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녀가 하는 말인즉, 여기는 원래 손님에게 공개하지 않는 응접실이다. 3개의 응접실이 곁문으로 쪼르르 연결된 구조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연회가 지루해진 루이자가 열쇠로 열고 들어와 왼편의 끝 방에 들어갔고, 이후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가 오른편의 끝 방에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사생아니 뭐니, 거기에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는 소리를 루이자가 들었고, 곁문을 열고 가운데 방에 들어왔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그대로 엿들었다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이마를 짚었다. 무슨 정신으로, 어디에 황제의 눈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해 보자면, 사실 조금 전까지는 챙길 만한 정신이 아예 없었다. 그가 속삭이는 밀어에 기절하지 않고 깨어 있는 게 용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살아 숨 쉬는 데 필요한 심장을 그대가 가져가 버려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머리를 쥐어짜 대처 방안을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그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휘둘리다니.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그대를 대체 어찌하면 좋지?’
세상에, 아르페시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석에서는 조금 짓궂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혀가 마비될 만큼 달콤한 말로 여인을 흔들 줄 아는 사내라는 건 알지 못했다. 그녀는 사내로서의 아르페시스를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조금 전의 시간이 여러모로, 너무나 충격적인지라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저, 저기 영애?”
흠칫 몸을 떤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뺨을 착, 착 때렸다. 정신 차려라. 여기선 루이자의 입을 어떻게 닫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어 루이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막 입을 열고자 했을 때, 루이자가 한발 빨랐다.
“어, 어디 가서 말할 생각은 없어요!”
그 말 하나를 덜렁 믿기엔 에스메랄다가 타인에게 걸어 두는 신뢰의 무게가 너무 가벼웠다.
“제, 제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눈치는 있어요. 10년 넘게 후계자 교육을 받았는걸요.”
정확한 주고받음이 없는 거래는 신용할 수 없다.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은 후에 몸에 새긴 배움이다.
“황자 전하와 테노리엘의 접점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도는 알아요.”
코앞에서 모든 걸 목도한 이에게 대체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오전까지만 해도 쓰지 못해 안달이 났던 머리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쿠베트도 황실이랑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죠. 굳이 제가 본 걸 말하고 다닐 이유가 없어요!”
루이자가 앞으로 포개 모은 손을 꼬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야, 약속할 수 있어요!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여기서 수긍하고 넘어가야 하나? 그녀의 무엇을 믿고? 에스메랄다는 입 속의 살을 깨문 후 심호흡을 했다.
“영애의 호의에는 감사해요.”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참으로 볼품이 없다.
“하지만 제가 그 말을 믿어야 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으니, 제 의심은 합당한 것이겠죠.”
“아… 그건… 그렇긴 한데…….”
“우선, 영애가 쉬는 공간의 근처에서 언성을 높인 건 사과하죠. 하지만 영애가 애초부터 인기척을 내고 알려 주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렇게 문 뒤에 숨어 엿듣는 대신 말이죠.”
루이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 에스메랄다가 한 말은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 무례를 지적한 것이니까.
“미,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리고, 그리고, 그게…….”
에스메랄다는 별안간 얼굴을 붉히는 루이자를 보며 멈칫했다. 그녀가 붉게 물든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을 때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듣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너무 집중을 하게 돼서 기척을 낼 수가 없었어요.”
에스메랄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제가 있다는 것을 아시면 전하께선 당연히 그만두실 텐데! 그럼 저 때문에 영애가 그 달콤한 말들을 듣지 못하게 되잖아요!”
“…….”
“세상에! 전 딱딱하고 어려운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영애에겐 어쩜 그리 달콤하시죠? 제 심장이 다 떨렸다니까요?”
에스메랄다가 대응 방법을 찾기도 전에, 무언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루이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고개를 치켜들더니 말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데 필요한 심장을 그대가 가져가 버려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고는 아르페시스의 흉내를 내는 게 아닌가?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더니, 결국엔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지 못한 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루이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것도 좋았다며 말을 이어 갔다.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그대를 대체 어찌하면 좋지? 라니! 꺄악! 어쩜, 전 이런 말은 소설 속에나 있는 줄 알았다고요!”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창피해서 쥐구멍에 기어들어 가서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또래 영애들이 하는 대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사랑이니 연애니, 치장에 대한 것을 주제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익숙하지 않은 것을 처음 접할 때는 어색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다.
“제가 듣기에는 느글거리기만 했는데, 여인들은 그런 말을 좋아합니까?”
언제 돌아온 것인지 페드로가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루이자가 그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답했다. 어느새 단호하게 움켜쥔 두 손이 그녀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당연하죠! 영애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이렇게 막 손과 발이 흐물흐물해졌다니까요?”
“사내들이 보기엔 한심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내들이 여인들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거예요! 전하를 좀 본받으시라고요!”
그들의 대화에서 에스메랄다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붉어진 몸을 가누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노력은 해 보지요, 영애.”
페드로가 웃으며 에스메랄다에게 다가왔다.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하는 게 좋겠구나.”
“네…….”
에스메랄다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우선, 자리를 옮길까요?”
“네! 좋아요, 갈래요!”
그렇게 루이자와 페드로를 데리고 침실로 돌아왔다.
“앉으세요.”
에스메랄다는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티 테이블과 의자 쪽으로 루이자를 안내했다. 그녀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는 동안 페드로는 문을 등진 채 마나 장막을 펼쳤다.
“이제 새어 나갈 걱정은 없다.”
페드로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로 주변에 누군가 접근해도 듣지 못할 정도라는 의미다. 그의 마나 운용력은 동년배는 물론, 더 나이가 많은 이들에 비해서도 상당한 수준이니까.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할 말을 고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문제는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루이자가 선수를 쳐 버렸다는 거겠지.
“언제부터 전하를 좋아했어요? 백작 성에서 처음 만난 거죠? 첫눈에 반한 건가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어 오는 루이자의 태도에 에스메랄다는 기어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와 반대로 페드로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작게 웃고 있었다. 루이자가 왜 이렇게 호의적인지, 또 페드로가 어떻게 이리도 당연하게 도와주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임에도, 분명한 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루이자가 대뜸 내뱉은 약속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에스메랄다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무렵, 페드로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끌었다. 힐끔 돌아보니, 그는 손으로 간략한 수신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당연히 저것을 알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게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녀 역시 기사의 딸, 사라진 시간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한 최소한의 훈련을 받았다. 무력적인 측면보다는 암호나 신호 체계, 전술 같은 이론 분야가 대부분이었기에 페드로가 그려 낸 수신호의 뜻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
[쿠베트, 기사, 세작.]
페드로가 하는 말이니 거짓은 아닐 터. 어떻게 그 정보를 확신하는지는 후에 들어도 된다. 지금은 최소한 거래에 내밀 패를 하나 얻었음에 안도해도 충분하다.
“아, 혹시 여전히 제가 못 미더우시면 각서라도 쓸까요?”
에스메랄다와 페드로가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루이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순진하고 순수한 그녀의 모습에 에스메랄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녀와 달리 모든 이들을 검은 눈으로 보는 스스로가 조금은, 조금은 불쌍했다. 에스메랄다는 성급하게 구는 대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루이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아니면 서로 비밀을 공유하지 않을래요? 전 영애의, 영애는 저의 연애사를 비밀로 하는 거예요!”
에스메랄다가 들어 본 것 중에, 주고받는 정보의 가치가 가장 모호한 제안이었다. 서로의 연애사를 침묵해 주자는 거래 조건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걸 보지 못한 것인지 루이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침실 문을 등진 채 서 있는 페드로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4년간 진행되었으나 결국은 지난해 종결을 고한 본인의 짝사랑을 설명했다고 보면 되리라. 침묵함으로써 거래에 쓸 만한 패를 하나 더 얻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아닌 것 같은데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에스메랄다의 영민한 머리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뭐, 저도 그런 녀석에게 더 이상 관심 없어요. 더 훌륭한 사내를 만날 거니까요.”
팔짱을 낀 채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본인을 두고 다른 가문의 영애를 쫓아다니는 어린 시절 친구를 헐뜯었다.
“이건 진짜,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요?”
말할 때는 당차더니, 막상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쑥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어설프게 웃었다. 침실 문을 떡하니 막고 서 있는 페드로는 다 들었을 텐데…….
“미안하지만, 그런 무형적인 것으로 신뢰를 다지기엔… 우리가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지 않나요?”
“아…….”
“영애가 말한 대로, 테노리엘과 전하의 접점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지요.”
루이자가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영애가 해 준 제안이 제게 무척 달갑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아요.”
“아, 그럼…….”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본연의 가면을 되찾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루이자의 뜬금없는 행동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르페시스를 조금이나마 밀어내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제가 쿠베트를 믿어야 할 그 어떤 근거가 없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죠. 전 영애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에스메랄다의 손이 티 테이블 위를 쓸며 그녀의 무릎 위로 돌아왔다. 이 거래의 상대방은 루이자이나, 에스메랄다가 그녀에게 가지는 신뢰는 전무하다. 스스로는 잘 맞지 않는다고 했으나, 루이자 역시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정세를 보는 안목을 키운 상태다. 그러니 지금부터 에스메랄다가 언급하는 정보가 그녀의 가문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따져 볼 능력은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제 일도 문제지만 쿠베트의 보안도 문제네요.”
“…….”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어……?”
루이자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조금은 심각해진 표정이, 쿠베트가 황실에 가진 반감을 충분히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녀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인사라면 더없이 좋을 텐데.
루이자가 가진 패는 그 정보로 인해 벌어질 일들이 지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테노리엘과 아르페시스의 연합이라는 오해는 황제의 견제, 정치적 공격, 그리고 에렘의 국내 정세 변동 같은 것을 야기한다.
반면 에스메랄다가 내놓을 수 있는 정보는 발설 시 쿠베트 측이 해결할 수 있는 단발성 정보다. 알려 주면 그걸로 끝나는 것. 상대측이 정보를 받고 입을 씻어 버리면 곤란한 것 역시 이쪽이다. 협상 자체가 에스메랄다에게 불리한 판 위에 깔렸다.
“보안이요……? 그러니까… 그게 쿠베트의 사람 중에… 세작 같은 거라도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 얘기를 꺼낸 이상, 거래가 성립하기 위해선 정보를 전해 줘야 한다.
“글쎄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지만 그걸 지금 당장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정보는 독점할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알고 싶으면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교활함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루이자의 밝은 하늘색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부디, 영애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요.”
그때가 도래하기 전까진 알려 주지 않을 테니까.
쿠베트의 속에 있는 황제의 사람을 알려 주지 않음으로써, 루이자에게 금제를 건 것이다. 네가 가진 정보를 퍼트리면, 나도 이걸 너에게 알려 주지 않겠다고. 만약 그들이 자의적으로 밝혀내면 에스메랄다는 패를 잃는 것이지만, 당장은 이게 최선이다. 멍청하게 감정에 휘둘려 사고를 친 탓에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오늘 호의는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가 보이는 모든 호의는… 빚이 아닌 대가로 정의해야겠다.
“테노리엘이 쿠베트에게 손을 내밀었듯, 쿠베트 역시 저희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군요.”
“어어…….”
“가문 간의 우호를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어요.”
이럴 작정으로 쿠베트에 구호 물자를 보낸 건 아니었지만, 무엇이든 해 두면 훗날 쓸 데가 있는 법 아니겠나? 지금처럼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다정하게 웃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영애와 친분을 쌓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네에… 저도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다과라도 함께 할까요?”
“네에… 내일요…….”
루이자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따라 일어섰다. 당황한 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루이자는 에스메랄다의 축객령에 침실을 나서야만 했다.
문 앞까지 그녀를 배웅한 후에야 피로가 몰려왔다. 에스메랄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신을 가만히 직시하고 있는 페드로에게 말했다.
“정확히 누구죠?”
페드로가 음성 대신 손으로 철자를 그려 이름을 만들어 냈다.
[라 루그 카만 로날드.]
쿠베트 내에 있는 세작의 이름은 확보했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페드로가 직접 판단한 것이니 믿을 만하겠지. 이제 남은 건…….
“언제부터, 계획하셨던 거죠?”
“오늘 오전에, 정원에서.”
정원에서? 거기서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와 만난 적이 있을 리가…….
“네가 잠든 사이에.”
에스메랄다는 경악에 찬 눈으로 페드로를 노려보았다. 채신머리없이 그의 앞에서 잠든 모습을 보였다는 말이 아닌가!
눈곱이 끼거나 침을 흘리거나, 흉하게 입을 벌리고 잔 건 아니겠지? 급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장 먼저 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언제나처럼 곱고 예쁘게, 잠투정 한번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거라.”
그런 심리 상태를 페드로가 모조리 읽었다는 것에서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의 팔에 앉아 정원으로 나가며 생각했던 것처럼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다, 들으셨지요?”
아르페시스와 그녀 사이에 오간 말들을 전부!
“엿들어서 미안하구나. 놈이 혹여나 네게 몹쓸 짓이라도 할까 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에스메랄다의 고개는 점차,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확인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 많은데,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질 않는다.
“왜… 왜, 이런 일을 꾸미신 거예요?”
“네가 놈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이상하게 거리를 두려고 하니까.”
“오라버니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니었어요!”
“내치든, 품든 결정이 나야 네가 편할 테니 나선 것뿐이란다.”
얼굴에 다시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정말 다 들었구나. 괜한 참견이었다고 화를 내든지, 테노리엘이 공격받을 빌미를 만들려던 게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든지, 뭐라도 해야만 하는데 입이 열리질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말을 잃어버린 벙어리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는 사이 페드로가 말했다.
“네가 좋다고 한 이상 굳이 떼어 낼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황실이니 가문이니, 그런 것도 생각하지 말거라.”
“…….”
“말했잖니,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계속 문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던 페드로가 허리를 숙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곁에 내가 있음을 언제나 명심하고.”
“……”
“오늘은 늦었으니 우선 쉬렴. 내일 보자.”
이마에 입을 맞춰 준 그가 돌아갔다. 홀로 남은 에스메랄다의 몸이 스르륵 아래로 무너졌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고작 몇십 분 전 닿았던 온기가 여전히 선명했다. 이 정신으로 머리를 굴리고, 루이자를 상대하고, 가면까지 꺼내 썼으니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할 것이다.
‘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그대를 대체 어찌하면 좋지?’
정말, 대체 어찌하면 좋지? 그를 사랑하고, 그에 대한 답이 돌아오는 이상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저열한 탐욕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탐욕은 아르페시스를 전송하며 느꼈던 것보다 더더욱 커진 상태였다. 가시밭길에 제 발로 들어선 이 어리석음을 어찌하면 좋은가.
훗날 그와 반군의 일로 마주치면? 방해를 받았을 때 그를 제거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에 침묵하겠지. 그런 행동이 이후의 계획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게 될까? 전선으로 향해야만 하는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다시 품고 살아갈 하루하루는?
해소시킬 수 없는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여 간다. 아르페시스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또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다. 전선에서 소중한 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며, 무력하게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다시 실감해야 한다.
그가 죽지 않을까 매일을 마음 졸여야 할 것이고, 곁에서 지켜 줄 수 없는 약한 몸뚱이를 원망하겠지. 미래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 피가 말라 가는 날이 지속될 것이다. 비참한 결정을 해 버린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벌써부터 그가 보고 싶다. 자신을 감싸던 그 커다란 온기를 다시 한번 느껴 볼 수만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멍청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이런 생각을 하는 상황에서 만약, 모든 것을 들켜 다시 한번 비난받으면 버틸 수 있을까? 에스메랄다는 사라진 시간에서처럼 그가 등을 돌리면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숨겨야겠지…….”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도록. 그리하여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계속 웃어 줄 수 있도록.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는 법. 복수를 포기할 수도 없고, 다가올 앞날을 바꿀 수도 없으니 만일을 대비해 들키더라도 그가 등을 돌릴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비겁자…….”
에스메랄다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백성들을 학살하며 그들의 가족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으면서, 본인은 행복을 놓지 못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죄책감의 웅덩이에 파묻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겁쟁이…….”
페드로가 온기와 함께 떨구었던 물방울 위로, 아르페시스가 죄책감과 두려움을 뒤섞은 물을 한 바가지 쏟아 내 버렸다.
‘그대에게 닿으면 자제가 되질 않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터질 것만 같다.’
아르페시스를 통해 손에 넣은 행복, 의식이 흐릿해질 만큼 짙은 행복 때문에 몽롱했다.
‘마수와 인간의 피 속에 무릎을 꿇려,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봐 주마.’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복수심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비참하고 힘겨운 와중에도 그녀의 머리는 계책을 내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수 있을까?
심장에 품은 사내로부터 받는 사랑을 마음껏 누리지도 못하다니, 이게 대체 뭐 하는 꼴인지. 이 지독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넘게 죽음을 경험했으리라.
감정을 거세당한 채 악귀로만 살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어째서 신은 그녀를 돌려보낼 때 감정을 거둬 가지 않은 것일까? 어둡고 질척한 한숨이 텅 빈 침실을 떠돌다 사라졌다.
* * *
커튼이 달빛을 가려 버려 어둡기만 한 공간에서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둠이 방해가 되지도 않는지, 그곳에 있는 남자는 촛불조차 켜지 않았다. 곧 작은 전서구용 종이에 글을 다 채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자들이 가져온 개인 짐을 뒤적거리길 잠시, 그 속에서 나온 것은 그의 손보다 조금 큰 상자였다.
“날아갈 체력이 되려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잡아들인 후에도 1주일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구멍도 뚫어 두었고 먹이와 물을 함께 넣어 두긴 했지만 조금 불안했다. 상자 속에서 전서구를 꺼낸 남자가 혀를 찼다.
“쯧, 정말이지 번거로워 죽겠네.”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날개를 파닥거리는 전서구의 발통에 서신을 끼워 넣었다. 날갯짓에 들린 힘을 보니 다행히도 날아갈 수 있을 모양이다.
짐 속에서 꺼낸 마도구로 새의 깃털을 새까맣게 물들인 그가 창밖을 살폈다. 순찰하는 병력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전서구가 하늘에 떠올랐다. 어둠이 검게 물든 전서구를 잡아먹었다. 이제 조련석의 마석이 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련석을 인멸하면 된다. 마석이 깨어진다는 건 반대쪽 조련석이 망가졌다는 의미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으면 더 좋겠는데…….”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남자가 창가에서 생각을 곱씹은 지 꽤나 시간이 지났다. 검게 물들어 있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이른 새벽의 적막에 동참한 남자가 과거를 곱씹었다.
‘어찌하겠느냐?’
기사 서임을 받은 지 벌써 7년.
‘기사에겐 주군께서 가시는 길이 곧 정의입니다.’
그가 믿는 정의를 위해서는 조심해야 하건만.
“하필이면 테노리엘이라니… 이게 천운이라 해야 하나, 불운이라 해야 하나. 애매한데…….”
혼자 킬킬거리며 웃던 남자는 불현듯 들려온 노크 소리에 창가를 떠났다. 침실의 문을 열자 초췌한 안색의 휴고가 서 있었다.
“이 시간부터 무슨 일?”
당장 휴고가 이 꼭두새벽부터 찾아올 만한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전하께서 찾으신다.”
“음,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그래.”
부른다니 가기는 하는데 이거 어째 한 번 겪어 본 일 같다. 침실을 나선 후 옆에서 걷던 휴고를 슬쩍 찔러 보자 아니나 다를까.
“라퓨나 때와 비슷하다.”
“이야, 어제 진짜 무슨 일 있으셨던 거 아니야? 궁금해 죽겠네.”
“하아, 너무 경솔하게 움직이시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해 죽을 지경이다.”
휴고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이러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하필이면 많이 위험한 분과 그러고 계시니 말이야.”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슬쩍, 휴고의 눈치를 살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신을 조금 더 늦게 보낼 걸 그랬다. 그러면 오늘 일까지 적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뭘 해야 하지?”
아무래도 다음번 서신에 쓸 내용은 훨씬 더 많아질 것 같다. 어둠을 완전히 밀어낸 햇빛 아래, 남자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 *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와 다시 만나기 전 쿠베트 후작을 먼저 만났다. 본래 오늘 돌아가고자 했으나 며칠 정도 더 머무르고자 하는 뜻을 내비치기 위함이었다. 당장 루이자를 시야 밖으로 놓치기엔 이르다고 생각되었으니까.
어제 직접 다음을 약속하기도 했으니, 에스메랄다는 예정대로 후작을 만난 다음 루이자가 초대한 티타임 자리에 도착했다.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페드로를 보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고.
“초대해 주셔서 기뻐요.”
“네에…….”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루이자는 손에 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힐끔거렸다. 에스메랄다는 굳이 먼저 대화의 서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루이자의 생각을 읽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그녀가 어제 언급했던 쿠베트 내의 세작을 알아내기 위해서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다면, 자신의 입에는 자물쇠를 채우고 루이자에게는 침묵을 강요해야…….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루이자가 페드로를 힐끔거리며 꺼낸 말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생각이 도중에 뚝 끊겼다. 또, 페드로가 그녀 모르게 움직이며 무슨 짓을 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제대로 한 소리를 해야 하나, 같은 잡생각이 끼어들기 시작했을 때, 루이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작년에 영애가 영주 대리를 위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미웠어요. 벌써 2년이 넘었다는 말도… 할아버지께서 영애 얘기를 꺼내실 때면 항상 입을 삐죽였죠. 저보다 어린데 영주 대리 업무를 수행하면서 잡음이 들리지 않았잖아요?”
에스메랄다의 손이 흠칫 떨리는 바람에 그녀가 쥐고 있던 찻잔 속에서 찻물이 출렁거렸다. 그녀는 루이자가 무엇을 목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열등감은 저를 힘들게만 하더라고요. 로렌스가 태어난 덕분에 더 이상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돼서 여유가 생겼던 건지도 모르고요.”
시선을 들었을 때 보게 된 것은 루이자의 미소였다. 배시시 웃는 그녀는, 참 예뻤다.
“못난 누나죠? 동생의 탄생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후계자 교육을 그만둘 수 있어서 기뻐하다니.”
눈으로 확인을 할 수 있을 만큼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의심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어둡고 질척거리는 인간의 악의가 보이지 않으니 그것을 헤집어 봐야겠다는 의욕이 시들어 버린다.
“사람에겐 저마다 맞는 자리가 다른 것뿐입니다.”
입을 다문 에스메랄다 대신 페드로가 말을 받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후에 쿠베트 영식이 힘들다 하면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뭐… 제가 할 수 있는 건요.”
손을 꾸물거리며 수줍게 고해 오는 말이 자꾸만 경계심을 녹인다.
“음… 왜 이런 말을 했냐면 말이죠. 저는 정말 영애가 좋아요. 뭐라고 할까, 동경할 수 있는 사람? 닮고 싶은 우상?”
“…….”
“헤헤헤, 말해 버렸다. 조금 부끄럽네요.”
뺨을 감싸 쥔 채 환하게 웃는 모습이 부럽다고 하면, 그녀는 뭐라고 말할까?
“지금의 전 영애가 정말 좋아요. 그러니까, 그 세작에 대해서 굳이 알려 주지 않으셔도 비밀은 꼭 지킬게요. 이렇게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다면… 그 세작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거래에 응하는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루이자의 순수한 모습은 에스메랄다의 경계심을 파고들어 와 속삭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어둡게 보고 날카롭게 파고들지 않아도 된다고.
그녀의 밝은 분위기에 한순간 휩쓸린 것인지,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한 루이자가 계속 저렇게 존재해 주길 바라서인지. 이유를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으나 복합적인 마음이 들끓어 결국 입을 열어 버렸다.
“……라 루그 카만 로날드.”
“네?”
“당장 내치는 건 악수예요.”
어차피 황제는 다시금 세작을 심을 것이다. 차라리 존재와 정체를 확신한 상태에서, 그쪽으로 넘어가는 정보를 제한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그러니 종자를 바꾸거나, 거처의 유지 보수 등을 핑계로 기사단 숙소를 옮기며 감시할 인원을 곁에 붙이는 게 좋아요.”
“아… 네, 네! 할아버지께 꼭 말씀드릴게요.”
“자세한 건 오라버니와 얘기를 나눠 보세요. 저도 전해 들은 것이라 상세한 정황은 알지 못해서요.”
루이자가 고개를 쉼 없이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불신, 경계, 의심, 기만, 배신. 그중 루이자는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경계심이 계속 허물어지는 모양이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저도, 고마워요.”
“헤헤헤헤.”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흔들던 루이자가 별안간 몸을 앞으로 숙이며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페드로를 신경 쓰는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말해 주어야 하나? 이렇게 작게 속삭여도 그는 다 듣는다고. 지난번 그녀의 짝사랑 서사도 모두 들었을 것이라고.
에스메랄다가 고민을 하는 사이 루이자가 속닥속닥,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정말, 정말 실례되는 질문인 건 아는데요.”
“……네?”
바짝 거리를 좁혀 온 루이자를 보고 에스메랄다는 긴장했다.
“언제부터 전하를 좋아했어요? 정말 너무너무 궁금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해 주지 않아도 돼요.”
에스메랄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평온하기만 한 페드로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 통에 뭔가 알아낼 순 없었지만.
“정말 말해 주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요! 혹시라도… 누구한테 말하고 싶다면 저라도 괜찮았으면 해서…….”
혹여나 미움을 받을까, 걱정하면서도 더 다가오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를 미워하는 방법이 있을까?
에스메랄다는 무릎 위에 포개진 채 꼼지락거리는 루이자의 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요.”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하고 포기하기 위해 노력해도 그녀의 심장 속에는 아르페시스뿐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쓰게 웃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자 루이자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오래전이요? 언제 처음 만난 거예요?”
다시 한번 페드로를 돌아보았더니 그가 에스메랄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성…….”
에스메랄다는 그런 페드로를 마주한 채, 많은 것을 가려 버린 대답을 꺼냈다.
“황성에서요.”
“황성이요?”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
“아하! 거기 참석하셨군요?”
“네…….”
거짓말은 아니지. 그를 처음 만난 건 분명 그날 황성의 후원이었으니까.
“첫눈에 딱! 반하신 거예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이 처음에는 참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어색함이라는 걸 알겠다.
“아마도… 요.”
그때는 그저 철없는 신념을 위해서였지만… 그 계기가 아니었다면 그를 사랑할 일도 없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 계속된 그녀의 대답에 루이자는 활짝 웃었다.
“하긴, 저도 솔직히 리오를 언제부터 좋아한 건지, 확실한 시기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 어린 시절 친구요?”
“네, 지금은 정말 좋아하지 않지만요.”
루이자는 새침하게, 흥 하고 콧대를 세웠다. 여전히 어색했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녀와의 대화에 충실했다. 감추는 것 대신 드러낼 수 있는 대화는 진심이 들어가 버리기에 너무나도 쉽게 빠져든다. 그녀들이 차 한 잔을 비웠을 무렵 페드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아쉽지만… 다음에 또 함께하면 되니까요.”
“네?”
그녀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도 이번 문제는 페드로가 빠르게 알려 주었기에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그 한마디가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가득 차지한 생각을 모조리 밀어내 버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짐에 따라 떨리는 손을 뻗자 페드로가 능숙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다녀와요.”
루이자가 특유의 밝은 웃음과 함께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고마워요.”
이 일의 배경이 무엇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해 버린다. 그녀는 페드로의 품에 안겨 루이자의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페드로는 한 팔로 에스메랄다를 안은 상태에서도 돌의 틈을 밟아 능숙하게 외벽을 기어올랐다. 이윽고 그가 멈춘 곳은 루이자의 응접실 바로 위층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똑똑, 페드로가 만든 노크 소리에 안쪽에서 커튼이 걷혔다.
그 안에 있던 아르페시스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다른 것을 모두 밀어 버리고 하나만 생각했다. 아르페시스라는 사람, 단 하나만. 에스메랄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손을 뻗자 창문을 연 그가 마찬가지로 손을 뻗어 왔다. 페드로의 품에서 내려와 창틀을 밟은 에스메랄다는 그대로 뛰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안착한 곳은 아르페시스의 온기 속이었다.
“다, 다치면 어찌하려고 거기서 뛰어내리는가!”
해 보았자 그녀의 가슴께 높이인 것을. 에스메랄다는 뻣뻣하게 굳은 아르페시스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를 향한 감정을 잘라 내려고 노력했던 건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작 하룻밤 보지 못했다고 그리웠다. 아르페시스의 온기 속에서는 그녀를 둘러싼 현실의 무게가 무의미해졌다.
“내가 할 말을 그대가 먼저 해 버리는군.”
웃음기가 섞인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에 온몸이 녹아나는 것 같다.
“두 시간 뒤에 오겠습니다.”
“……고맙다, 페드로.”
“오라버니…….”
이렇게 직접 나서서 그와의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 머뭇거리는 동안, 여전히 창틀 밖에 서 있던 페드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못 할 게 없다는 것만 알아 두어라.”
페드로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아르페시스가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 버렸다.
“밤새 그대가 그리웠다.”
에스메랄다는 그 고백에 답하듯 그의 품을 파고들며 버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닫힌 창문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어 왔지만 두 사람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탄식을 내뱉으며 에스메랄다를 꽉 껴안았다. 이렇게 품을 파고들면 어떻게 놓으란 말인가. 이 작은 소녀는 그의 심장에 너무나도 위협적이다. 그녀의 손아귀에 떨어진 심장이 꽉 쥐어짜지는 기분이었다.
“놀라지는 않았는가?”
걸어오는 것도 아니고, 벽을 타고 오게 만들었으니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아르페시스는 날이 밝자마자 밤새 작성한 기획안을 페드로에게 들이밀었다. 에스메랄다와 그가 각자 따로 있는 상황을 만들고 뒤에서 몰래 만나기 위한 기획안 말이다. 혼자서는 그 일을 감행할 만한 인맥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페드로가 순순히 도와준 건 조금 의외였지만 다행히도 결국은 성사되었다. 이 일을 위해 동원된 인원은 페드로, 휴고, 테베르, 마지막으로 루이자였다. 루이자가 돕는다고 했을 때는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페드로가 전한 소식이라 그러려니 했다.
당장 아르페시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에스메랄다를 만날 방법은 이런 것뿐이다. 에스메랄다는 루이자와 함께 그녀의 응접실에, 그는 지금 침실에서 근위 기사들과 전술을 검토하는 중이라고 되어 있다.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만 보면, 그들이 만났다는 흔적은 없으니 괜찮으리라. 괜찮아야만 한다.
아르페시스는 전날처럼 에스메랄다의 체 향으로 자신을 채웠다.
“이런 식으로밖에 그대를 만나지 못하는 내게 실망하지는 않았나?”
불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모두 부가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지금 당장은 그의 품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어제만 해도 돌아오는 감정만으로 충분하다 여겼건만, 고작 하루가 지난 오늘은 그것으로는 모자란다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은 나날이 커질 줄만 알지, 줄어드는 방법을 모르는 게걸스러운 놈이다.
“……보고 싶었어요.”
패배를 인정하고 나니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콤한 것들이 밀려들어 온다.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자신만으로 가득 찬 은회색 눈동자에 전율이 인다. 그가 좋다. 날뛰는 심장의 소리가 그에게 전해질까 무섭다.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이렇게 동요하는 걸 들켜도 되는 것일까?
“듣고 싶다 하여 곧장 들려주면… 정말 심장이 남아나지를 않겠어.”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소파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정작 자리에 앉지는 못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팔을 붙든 채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왜… 그러세요?”
“그게…….”
몇 번이고 망설인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해, 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을? 에스메랄다는 의문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릎에… 그러니까, 페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페드로가 그랬던 것?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눈을 질끈 감은 아르페시스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대를 내 무릎에 앉혀 보고 싶다는 의미였다.”
페드로의 무릎에 앉은 것을 언제 보았다고? 의문을 느낀 직후, 에스메랄다는 지난밤 페드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조숙하지 못하게, 그의 앞에서 잠들었던 적이 있지. 에스메랄다가 쑥스러움 때문에 뺨을 붉히는 사이, 다시 눈을 뜬 아르페시스의 변명이 한창이었다.
“물론, 이게 내 욕심이라는 걸 안다. 그대가 싫다면… 억지를 부리지 않겠다.”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초조해하고 있는 모습은 사람을 홀린다. 에스메랄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애를 태우듯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나아간 손이 아르페시스에게 닿았다. 갈급한 손길에 의해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부유감이 끝났을 때, 그녀는 이미 아르페시스의 무릎 위에 곱게 앉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뺨을 훑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에 아르페시스가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감았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그를 만져 볼 수 있다니. 이 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이라도 치를 수 있으리라.
아르페시스의 손이 에스메랄다의 손등을 덮었다. 그의 체온 속에 손이 가두어짐과 동시에 손바닥에 스치듯, 아르페시스의 입술이 닿았다. 몸에 있는 솜털이 곤두서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음에도 더, 더, 더 닿고 싶다.
“그대에게 닿으면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것 같다. 아무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어. 대체 다른 이들은 이런 감정을 품고 어떻게 멀쩡하게 지내는 거지?”
익숙하지 못한 그의 밀어는 감정을 뱉어 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심장이, 아파요…….”
너무 빨리 뛰어서, 통증으로 신음을 할 정도로. 아르페시스가 눈을 떠 그녀를 찾았다. 에스메랄다의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네…….”
“……왜 이리 어여쁜 말만 하느냔 말이다.”
녹을 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기어이 남은 한 손마저 뻗어 버렸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자 아르페시스가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온기 때문에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부유감을 느꼈다. 그녀의 손길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더 그녀에게 닿고 싶고, 그녀를 시야에 담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꾸 눈을 감는 건, 꿈에서 보았던 그녀와 달리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에스메랄다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그 간극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나름의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에스메랄다가 사랑을 고해 준 후, 그는 페드로의 경고를 떠올리며 꿈속의 그녀와 현실의 그녀를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해서 실제로 구분 선을 세우고 꿈속에서 느꼈던 열락을 현실로 가져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아르페시스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진 후 눈을 떴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여전히 그를 담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 보자, 에스메랄다가 그 손에 기대어 왔다. 말간 눈을 깜빡이는 그 광경이 아르페시스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니.
꿈속의 그녀가 성숙하고 매혹적이었다면,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는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한 번도 실물로 본 적은 없으나 귀족가의 어린 영애들이 자기로 빚은 인형을 가지고 논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르페시스의 눈에는 어린 에스메랄다가 꼭 그 인형 같았다.
그래서 페드로가 그녀를 무릎에 앉혀 두고 있을 때 저도 꼭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고, 현재에 이르러 정말 그 바람을 성취해 냈다.
아르페시스가 어린 에스메랄다를 보며 느끼는 감상을 굳이 표현하자면, ‘인형이 살아 움직인다!’라는 감탄에 가까우리라. 그 인형이 제 소유처럼 품에 꼭 안겨 있기까지 한 상황이니, 행복해서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평생 그녀를 이렇게 품에 안고 다니고 싶었다. 언제, 어디서든.
“지난밤 정말, 세상을 다 가진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제 뺨을 매만지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손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
“그리고… 그대가 내게 편하게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조금 전에도 그러했고.”
그의 말이 이어지자 품에 안긴 에스메랄다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게 또 너무 좋아서 밤새 뒤척였다. 다시 말해 달라 하면 해 줄까? 나를 그리 친근하게, 가까운 이로 여겨 줄까? 계속 생각했다.”
“……그건…….”
“그건, 안 되는 것인가?”
에스메랄다는 잠시 망설였다. 그런 행동은 기억 속의 시간을 생생하게 떠올리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늪에 발을 들인 사람이 거기서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에스메랄다.”
“응?”
“에스메랄다, 하고 이름을 불러 줘.”
아르페시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전율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것인가? 빼앗겼던 본인의 것을 다시금 되찾은 기분이었다. 왜 이리 버거운지 잘 모르겠다. 눈을 감아 버렸기에 어두워야 할 시야에 이상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벅차게 치솟는 만족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에스메랄… 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아르페시스가 수줍은 마음에 뺨을 붉혔다. 부끄러운 듯, 기쁜 듯 웃는 그의 모습을 본 에스메랄다가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무슨 짓을 해도 그를 밀어내지 못하리라.
* * *
“거기서 뭐 해?”
페드로의 시선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갔다.
“보초.”
“보초? 어디의?”
“궁금하면 알아내 봐.”
웃으며 손을 뻗자 아레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가져온 것을 건네주었다.
“그러려면 너를 지나가야 하고?”
“당연히.”
페드로는 현재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가 있는 방의 인근 복도에서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보초를 서는 셈이었다. 그렇게 창틀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아레스가 온 것이다.
“많이 안 좋은 거야? 아버지 얼굴이 말이 아니시던데.”
“……읽어 봐. 지금 남부군 터지기 직전이니까.”
한 뭉텅이의 서류를 꺼내 든 페드로는 그것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전해 주지 않는 남부군과 관련된 소식이었다. 그리고 곧 아레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넘치도록 이해했다.
“이 미친놈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자긍심은 자만이 되고, 자존심은 우월감이 되어 버린 괴물?”
아레스가 조소와 함께 답을 해 주었다.
“황자 전하의 전공이 퍼져서 더 안 좋아.”
“전하의 전공? 설마… 이 날씨에 밀고 내려갈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본인도 전공을 세우겠다고?”
“대형 마수 토벌 건으로 남부군 지휘부를 들쑤시고 있는 모양이야.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전하께서 빨리 가시는 게 나을 거라고 본다.”
페드로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며 복도 안쪽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메랄다가 관여된 것 같으니까. 말을 해 주지 않아 일의 진행 사항을 알 길이 없었는데, 손 놓고 방관만 하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다.
표정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은 결코 이런 방식에 동조하지 않겠지. 하지만 페드로는 정말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경멸해 마지않는 그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너무 이르지만, 홀로 느껴야만 하는 이 감정에 축배를 들어 볼까. 페드로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에 아레스가 주변을 돌아보며 웅얼거렸다.
“왜?”
“빨리, 한 개비만 줘 봐.”
“……없어.”
“아버지께 고자질이라도 하러 가야 줄 거야?”
아레스가 유일하게 백작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건 연초 문제였다. 성년에 호기심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백작에게 혼쭐이 나고도 끊질 못한 것이다. 물론 폐활량 때문에 줄이기는 했다. 창녀촌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건전한 일탈이지만, 몸을 자산처럼 관리해야 할 기사에게 연초가 좋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럼 넌 나를 연무장에서 만나게 될 거야.”
“그거 기대되는데. 오랜만에 한 판 할까? 207전 155승을 156승으로 바꿔야지.”
페드로의 압박에 이기지 못한 아레스는 결국 연초를 내주었다. 페드로는 그것을 입에 물며 말했다.
“그런데 알고 계실걸?”
“알아, 감추는 척이라도 해야지.”
“아버지도 진짜, 우리한테 너무 무르셔.”
편한 웃음 속에서 알싸한 연초 향이 퍼져 나갔다. 쌍둥이는 아직 부친을 무서워하고 있지만 페드로와 아레스는 이미 자신들이 고집을 부리면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정해진 교육과 훈련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창틀의 양쪽 끝을 차지하고 앉은 형제는 오랜만의 재회에서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내들의 대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여인들에 관한 것이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페드로는 응접실에서 홀로 놀고 있을 루이자를 떠올리며 웃었다. 질문을 꺼낸 아레스를 슬쩍 훔쳐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사퇴하고는 이리저리 정신이 없었거든. 형은?”
“나도 딱히.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슬슬 우리 혼사를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 참석할 사교 행사를 골라 주시더라고.”
“벌써? 너무 빠르지 않아? 어차피 하지도 않을 건데.”
혼담 얘기가 벌써 나올 줄이야. 페드로와 아레스 모두 이제 고작 20대 초반이다. 후반까지는 별문제 없을 줄 알았더니.
부친이 혼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루이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상황으로만 따지자면 아레스보단 그가 유리한 것 같기는 한데……. 애초에 아직 루이자가 어려서 그런지 아레스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
예전부터 두 사람은 그랬다. 성격은 정반대이면서 취향은 어찌나 같은지. 모친같이 직설적인 여인에게 끌리곤 했다.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기는커녕 있는 그대로 내뱉고 보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 말에 악의가 없어 속내가 얼마나 순수한지 전부 드러나 버리는 그런 사람.
당장은 루이자에게 따로 시선을 주는 것이 그뿐인 것 같지만……. 아레스가 언제 그녀를 발견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당장 그의 취향에 맞춰 태어난 것만 같은 루이자와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 아니었다. 루이자가 오늘부로 성년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다. 실제 지금 여아의 성년을 규정하는 16세라는 숫자는 30여 년 전 있었던 사건 때문에 낮춰진 것뿐이니까.
해서 페드로는 18세 이하의 소녀들을 성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레스도 마찬가지일 테고. 더욱이 두 사람이 여인에게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영애에게 외사랑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뭐, 이미 한 번 흔들린 것 같지만 그건 사내로서의 본능 같은 것이기도 했고…….
‘그저 손짓 한 번이면 영애 앞에 모두 무릎을 꿇을 테니, 그중에서 고르시면 되는 겁니다.’
직접적인 언급을 한 것도 아니니까 스스로에게 관대해져 보자. 페드로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생각이 전혀 없어?”
“내후년… 아니, 내년에 오멘이 군사부 재무관으로 들어갈 예정이야. 이후에는 내가 전선에 갈 거고. 누가 빠지는 바람에 말이지.”
아레스는 황성 재무부 소속이다. 중앙군 근무 경력이 없기 때문에 파병될 중앙군의 지휘권을 가질 수가 없다. 본래 그것은 중앙군의 상급 기관인 황실 기사단에서 근무하던 페드로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아레스는 아마 자원병 부대를 통솔하는 방식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쪽은 테노리엘의 사병이 대다수의 병력을 구성한, 사실상 테노리엘 부대나 마찬가지니까.
“이런 상황에서 배필이라니 너무 이기적이잖아. 빤히 알고 있으면서 굳이 물어보기는.”
조금 전의 질문을 내뱉을 당시 페드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혼기가 찬 그들끼리는 가끔 꺼내는 주제라 오랜만에 만난 김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아레스에게서 나온 답 역시 익히 알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테노리엘 백작이 전선에 나가 있던 시절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모친이 얼마나 힘겨워했는지 알기에, 자신의 배필이 될 여인에게는 그런 잔인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약혼도, 혼인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새로이 만나게 된 루이자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관계를 발전시킬 생각이 없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번 나누던 대화는 기억 속에 숨어 있던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혼자서 그 악귀들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 뒀잖아!’
페드로의 몸이 떨렸다. 그의 시선이 창밖의 풍경에서 아레스에게로 옮겨 갔다.
훗날의 죽음을 그리며 혼인도, 후손도 남기지 않는 형제들. 죽을 각오를 다지며 전선에 갈 날을 세고 있는 형제들. 페드로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래?”
역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페드로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고작 두어 모금 마신 연초가 그의 손을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오라버니는 위선을 사랑이라 부르시나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고하건대, 진심으로 전선에서 죽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에스메랄다가 사는 땅을 지키고 그녀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목숨 따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죽기 위해 살고 있는 형제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페드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그녀의 입장에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페드로? 펠? 왜 그러는 건데?”
“……우리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깨달아서.”
“뭐?”
위선. 그래, 이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위선이라 칭하겠나.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한 애정과 사랑이 정말 그녀에게 제대로 전해졌을까? 그녀를 두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던 형제가 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았다고?
“하……!”
페드로는 조금 전까지 전선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보고 환하게 미소 짓는 걸 보지 않았는가. 그가 할 수 없는 걸 아르페시스는 너무나도 쉽게 해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가 아니라 아르페시스라는 확신이 들게 만들 정도로, 너무 쉽게. 그것 때문에 전선에 따라가 호위라도 해야 하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위선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것을 알려 주어야 할까? 에스메랄다가 가족들에게 품은 이유 모를 원망이 얼마나 큰지 설명하고, 자신들의 태도가 그녀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기에? 당장 그것을 깨달은 페드로만 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는 아르페시스를 따라가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만약 죽음이 둘 중 누군가를 찾아온다면, 아르페시스가 아니라 자신에게 와야 된다고 여긴다. 모르고서 행하는 것과 알고서도 행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잔인한가?
“망할…….”
몸이 두 개라면 하나는 아르페시스를 따라가고, 하나는 여기에 남아 에스메랄다의 곁을 지킬 수 있을 텐데.
“형.”
“너 지금 너무 창백하다. 신관을 부르…….”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황자가 남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페드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레스는 오래도록 답이 없었다. 중형 마수가 10마리, 20마리 규모로 뭉치던 서부와 달리 남부는 몇백 단위로 집결한다. 5천 이상의 병력을 가진 부대가 4, 5개씩 연합해 난전을 벌이는 게 일상인 곳.
거기다 겨울에 출몰한 후 아직 토벌되지 않은 대형 마수까지 남아 있어 예년보다 위험했다. 아르페시스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그가 지금의 황태자처럼 방구석에 앉아 있어도 되는 입장이었다면.
일전 에스메랄다에게 한 약속 때문에라도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아르페시스는 전장에 서야만 한다. 그게 남부군 사이에 빠르게 스며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황제가 황실의 명예를 위해 아르페시스에게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거부한다고 해도 황제가 새로 보낼 것이 빤한 근위 기사들의 손에 끌려 나가 전장에 서게 될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이름 앞에 한 맹세를 가벼이 여기는 건 아니다. 그저 약속과 맹세를 이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조금 전, 아르페시스를 발견하자마자 피어났던 에스메랄다의 미소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 * *
아르페시스의 무릎에 올라앉은 후로 서신에 쓰지 못한 그간의 일이나 서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선물로 보내 주었던 라퓨나에 대한 얘기, 그걸 고르던 당시 아르페시스가 느꼈던 감정, 선물을 받고 설렜던 에스메랄다의 감정 같은 것들. 조곤조곤 이어지는 두 사람만의 대화. 두 사람만의 밀어.
“신기하다.”
“뭐가……?”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작은 손을 조몰락거리며 말했다.
“그대와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 이토록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녀를 만난 날 꾸었던 꿈 때문에 어쩌면 예상했을지도? 아르페시스는 절절하기만 하던 글귀들을 심장 한구석에 담아 두었다.
싸한 감각이 그를 비집고 들어오고자 했지만, 당장 곁에 있는 에스메랄다의 온기가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에스메랄다 역시 지금의 시간이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렇게 그대가 나를 보고 싶었다 말해 주고, 내 품에 머물러 주다니 꿈만 같다.”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에스메랄다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홀린다.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충만했던 시간 속에서 그가 별안간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싶어 기다렸다.
“그대와 나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는…….”
만지고 있던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움켜쥔 아르페시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웅얼거렸다.
“무슨 사이… 인 거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그의 귀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져 있던 그의 귀를 만지작거린 건, 그 자극적인 것에 직접 닿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귀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더 깊게 끌어안는 그의 행동이 벅차다. 오래도록 숨소리만 오가는 곳에서 아르페시스가 먼저 나섰다.
“내가 이렇게… 그대를 제멋대로 만지고 끌어안고 있지 않나.”
“…….”
“그대는 이런 내 행동을 다 허락해 주고, 또 나를 보고 싶었다고 해 주었으니까, 어제는 나를… 나를 사, 사, 사랑한다고도 해 주었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는 나름 확답을 받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한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목을 더 꽉 껴안았다. 그녀가 매달리자, 그 역시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귓가에 닿는 그의 숨소리가 점차, 점차 빨라졌다. 그녀가 떨리는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사이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답을 꺼내는 에스메랄다의 목소리에는 차마 감추지 못한 떨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언젠가 바라보았으나 결국은 포기했던 것. 오늘에 이르러 다시 바라게 된 것. 이렇게 그녀를 찾아올 줄이야.
“연인, 사이?”
짧으나 또한 격한 들숨이 이어졌고, 그의 팔에 힘이 더해졌다. 허리가 옥죄어지는 통증마저 행복하다니.
“정말, 정말 그리 여겨 주는 것인가?”
목덜미에서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소름이 돋는다. 그녀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그에게 속삭여 주었다.
“네가 허락해 준다면.”
“허락이라니, 이건, 그건 내가 아니라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두서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대의 여, 연인이라니, 이게 꿈은 아니겠지? 꿈일까 무섭다. 깨고 싶지 않아, 평생 이곳에 있고 싶다.”
지금 느껴지는 떨림은 에스메랄다의 것일까, 아르페시스의 것일까.
“숨을, 쉬기가, 힘들다.”
“……나도.”
그를 연인이라 부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새삼스럽게 기적 같은 상황을 실감한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살짝 밀어냈다. 갑작스럽게 밀려난 바람에 긴장한 채 눈치를 살피면서도,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에스메랄다가 그의 뺨을 다시 감싸 쥐었다.
“아르페시스…….”
중얼거림과도 닮은 부름에 그가 수줍은 소년의 얼굴로 웃었다. 목덜미부터 귓바퀴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수줍음이 자꾸만 불안감을 밀어내고 다시금 생각을 방해한다. 창문 너머에 있던 그의 품으로 뛰어들던 때처럼.
“이제까지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는데… 그대가 불러 주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름이 된 것 같다.”
그는 하핫, 하고 웃으며 말했다. 심장의 의견을 단 하나의 변절도 없이 전하는 말은, 여인을 홀리는 데 훌륭한 무기이다. 에스메랄다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설핏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아르페시스의 미소도 짙어졌다.
“이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대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나보다 행복한 이는 없을 것 같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이 든다.”
에스메랄다의 미소가 그를 따라 짙어졌다.
“나도 그래.”
“나로 인해서?”
“응, 너로 인해서.”
아르페시스가 내쉬는 숨에는 전율이 섞여 있었다.
“지금 심장이 느끼는 통증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난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데.”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르페시스가 눈으로 어째서? 라는 질문을 해 왔다.
“평생 벅차고 싶으니까.”
“……평생.”
알고서 이리 행동하는 건 아니겠지만, 에스메랄다는 또다시 붉디붉은 토마토가 되어 같은 단어를 웅얼거리는 그에게 홀렸다. 천천히 기울어진 고개가 그와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평생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실실거리던 아르페시스는 불현듯 지나치게 가까워진 에스메랄다의 숨결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그 덕에 그녀의 입술은 본래 의도했던 곳과는 달리 아르페시스의 뺨에 닿았다. 무릎을 내어 주고 있던 그의 몸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쉽다. 입술을 훔치려고 했는데. 그는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에스메랄다는 한참이나 말이 없는 그에게 물었다.
“하지 말까?”
어떤 답이 돌아올지 빤히 알면서 올가미를 치고 그 속에 들어올 사냥감을 기다린다. 경악 어린 시선과 마주쳤다. 다급하게 이어진 말은 그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르페시스가 본인의 뺨을 손으로 덮었다. 무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사람처럼.
“하, 하지 않는다고? 왜? 이것을 왜, 왜 하지 않지?”
기꺼이 올가미에 걸려든 사냥감을 보며 에스메랄다가 눈매를 살짝 좁혔다. 눈꼬리가 미미하게 굽어져 웃음기를 담고 있었지만 아르페시스는 그걸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에스메랄다의 입술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네가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싫어한다고? 내가?”
태어나 이런 기가 막힌 말은 처음 들어 본다는 듯, 그는 격하게 반발했다.
“시, 싫어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럼 또 해도 돼?”
열심히 항변하던 아르페시스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에스메랄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다가갔다. 그의 양쪽 뺨을 손으로 꽉 붙든 채, 애를 태우듯이 천천히. 이번에는 확실하게 입술 쪽으로. 하지만 그 시도는 아르페시스의 저지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가 에스메랄다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완전히 틀어 버렸다.
“아, 아니, 아직, 내가, 이건 내가 아직…….”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양쪽 손목을 붙들린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본 아르페시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이, 이건… 다, 다음에. 다음에 해 줬으면 한다.”
“왜?”
숨을 헐떡이며 말까지 더듬은 그가 어렵게 답했다.
“시, 심장이 머, 멈춰 버릴 것 같으니까…….”
“…….”
“그, 그러니까… 이건, 다음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 그때…….”
마른침을 꿀꺽꿀꺽, 물 마시듯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창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탄식하며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벌써?”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얼거리는 말 뒤로 그들을 재촉하듯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아르페시스는 한참이나 답을 하지 않다가, 창문을 부술 듯 세게 치는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에스메랄다 역시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랐기에 아르페시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였다. 아르페시스가 한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허벅지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창밖에 와 있던 페드로와 시선이 마주친 직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스메랄다가 그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민 페드로가 보였다.
“천사야, 이제 그만 가야지.”
아르페시스의 온기를 벗어나기 싫어 미적거리자 페드로가 조금은 엄한 어조로 말했다.
“곧 순찰병이 지나간다, 어서.”
그래, 외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타인이 봐서 좋을 게 없지.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아르페시스의 품을 벗어났다. 고작 몇 초가 지났을 뿐인데 어쩜 이리도 허전한지. 그의 손을 잡고 창틀에 올라 페드로에게 안겼다.
“아, 그리고…….”
페드로가 움직이기 직전, 아르페시스가 제 품을 뒤져 서신을 내밀었다.
“자르간 경 말로는 그대를 성내에서 만날 테니 그때 전달하려고 했다더군. 성내에 도착한 후에는 깜빡했고.”
불퉁한 얼굴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페드로가 있어 조금 망설여지긴 했지만, 마음을 정했으니 행동을 해야지. 그녀의 손은 서신이 아니라 아르페시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아?”
힘주어 당기는 대로 끌려온 순응 덕분에 그녀는 떠나기 전, 목표했던 것을 이루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아주 잠시간 닿았다 떨어졌다.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잊어버린 채 석상처럼 굳은 그를 보니 묘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를 골리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기도 했고.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그를 놔주었다. 그녀가 서신을 낚아채듯 가져오자 페드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가를 떠났다.
아르페시스가 시야 속에서 사라지자 그의 온기가 가려 주던 현실이 그녀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품에 안겨 다시금 루이자의 응접실에 돌아왔다.
바닥으로 내려서는 동안 소파에 누워 있던 루이자가 그녀를 반겼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에게 가식의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뺨을 매만졌던 때의 감촉. 조금은 거칠고, 까끌까끌한 느낌. 그는 백작 성에서 보았을 때보다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커 갈 것이고 사라진 시간 속에서처럼 훌륭한 사내가 되어 가겠지. 다음에 만날 때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
에스메랄다는 도제를 들여 달라며 득달같이 달려왔던 라그나를 떠올렸다. 그의 배타적인 성향은 변했으나, 기본적인 다혈질의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테노리엘 백작과 뜻을 함께하던 페드로는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그녀에게 다정했다.
사라진 시간과는 다른 영향을 받는다 해도,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특히나 그것이 아르페시스라면. 일전 그가 써 온 연설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를 만나는 순간 밀려났던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삐죽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마도, 다가올 것이 분명한 미래에 겁을 먹었기 때문에. 많은 일을 겪어 본 그녀는 머리로 그리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받을 상처를 정확히 알고 있다.
직접 겪어 보았던 상처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 겁쟁이가 되어 웅크리게 된다. 페드로의 사과에 응어리가 풀렸음에도 그에게 달려가 안기지 못했던 이유. 아르페시스에게 함락당하기 전까지 계속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던 이유. 그건 그녀가 겁쟁이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무시당하고, 손가락질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겁쟁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았다. 다가올 것이 분명한 비극을 기다리며 벌벌 떨기만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면 안 되겠지. 원하는 것이 생겼으면 움직여야 한다.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워, 실행을 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작은 손을 꽉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이후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의 루이자를 피해 도망치듯 응접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있는 죄책감의 가시덩굴이 굵어지기 시작했지만, 당장의 달콤함에 취한 에스메랄다는 인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