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8화 (18/45)

제18장

저항과 굴복

「서부의 회복.

아르페시스 황자 전하께서 이끄시는 서부 연합군이 마수들에게 짓밟힌 에렘의 영토를 되찾았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서남부 경계선이 무너지던 당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서부 영주들의 사병은……. (후략)」

1차 목표는 끝났으니 이제 저지선을 지키며 서부를 다시 마수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에 주력할 때다. 황제는 서부 연합군이 보고한 사실을 아르페시스만의 전공으로 보일 수 있게 교묘하게 포장했고, 그것을 신문이 대변했다. 이 부분은 그녀의 의도에도 부합하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할 건…….

「서부 연합군의 공로에 감사를 표하라.」

어쩌면 그녀의 뒤를 조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테노리엘 백작이다.

서부 연합군의 공식 발표가 있기도 전에 도착한 명령서에 따르면 곧 쿠베트 후작 성에서 연회가 열릴 것이다. 3차 물자는 병사와 기사들이 만찬을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양을 포함한 채 출발했다. 그녀도 곧 도착할 이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 미리부터 이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노리엘 백작은 해산 명령이 내려온 이후에나 출발했을 테니 오래지 않아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직접 오신단 말이지.”

현재 연합군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쿠베트 후작가의 사정은 좋지 않다. 남부에서 고립된 채 몇십 일이나 되었으니 물자가 부족할 터. 그 사정을 고려해 식자재나 주류 같은 물자 제공은 테노리엘이 하고, 저지선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쿠베트가 장소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구호 물자를 비롯해 연회에 쓰일 물자까지 함께 쿠베트성으로 출발한 상태다. 황제에게 테노리엘의 저력을 공개하는 일이라 달갑지는 않았다. 한 끼에 불과하나, 3만의 병력을 먹일 물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연회를 지원할 정도의 여력까지 가졌음을 알리는 꼴이니까.

하지만 요식 행위가 명분이 되어 주는 귀족들의 삶에서, 이번 연회는 꽤나 중요했다. 연합군이 해산하기 전 그들의 고생에 대한 치하와 감사 인사는 반드시 필요한 법. 이번 행사는 서부에서 마수를 몰아내었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도 했다.

연회에 참석하려면 서부의 영토를 타고 내려가 쿠베트령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 결국 귀족들이 직접 움직이게 만들어 서부에서 마수를 몰아내었음을 직접 보여 주는 셈이다. 그렇다고 백작이 그것을 위해 직접 영지로 돌아올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더욱이, 황도에서 미리 출발한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서.

에스메랄다는 테노리엘 백작의 귀환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고작 몇 초 만에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덕분에 무의미한 노력이 되어 버렸지만.

“아… 신년.”

매년 가족들을 피해 백작 성을 비우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올겨울에 유독 일이 많았구나.”

가족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바빴기 때문일 터.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내쉬며 구겨져 있는 미간을 문질렀다. 지금 와서 깨달았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다.

본래라면 가족들이 백작 성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는 즉시 떠났을 것이다. 그들과 교류를 하지 않으려면 애초에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이것저것 걸린 것이 많았다.

후방 지원을 전담한 그녀와 페드로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연합군의 성과를 축하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헐뜯길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그놈의 체면과 명분을 어찌나 따지는지. 진절머리가 났지만 귀족의 사회에서 사는 이상 분명히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다.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모로 모여들며 굴곡을 그렸다. 그러한 이유 외에도 연회에 초대된 일부 인사들의 이름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고작 이름 하나에 박동에 힘을 더하는 심장이 미울 지경이다. 분명 그녀의 것이 맞을 텐데, 이 심장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감정이 이성의 잣대를 들이밀어 붙이고 자를 수 있는 편리한 도구라면 지금과 달랐을까? 세상의 모든 일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을 칼같이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이렇게 답답하지 않을까? 세상을 창조한 신이 전능한 것처럼 말이다.

“하, 신의 영역을 탐하다니.”

어느 순간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이유를 알고자 하며 전지를 바라더니, 오늘에 와서는 그에 그치지 않고 전능을 원하고 있다. 그만큼 지금의 현실이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의 힘을 원해 볼 정도로.

에스메랄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서랍 속에는 아르페시스와 주고받은 서신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보낸 감사 서신에 당연하다는 듯 답신을 보냈고, 거기에 또 그녀 역시 계속 답신을 하다 보니 교류가 지속 되었다.

서신 속에 구구절절 적힌 말들은 멋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단조로운 글귀 속에는 그가 느끼는 감정이 모두 진솔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가 길지도 않은 서신을 읽고,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고야 마는 이유였다.

미련하게, 무시해도 되었을 서신에 왜 답을 했던 걸까? 당시에 느꼈던 설렘과 행복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후회와 자책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다시금 그 순간이 오면 설렘과 행복에 취해 버리니까.

“어차피 남부로 가야 할 사람.”

이번에 얼굴을 보고 확실히 정리하자. 다녀온 후에 저것도 모두 태워 버리고. 그 전까지는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일부터 해결해야겠지. 백작을 마주해야 할 테니 그녀의 뒤를 캐고 다니는 게 그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하아…….”

깊고 짙은 한숨이 그녀의 속내를 대변했다. 몰려오는 피로에 숨이 턱턱 막혀 버린다.

“지친 건가…….”

에스메랄다는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보고 나니 인지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던 모양이다. 평온한 휴식 없이 달리기만 해서 그런가?

“쉬어 본 게… 언제더라?”

에스메랄다가 커다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며 기억을 더듬었다. 시간을 되돌아온 3년 사이에는 없었고. 죽음으로부터 6년을 거슬러 가도 딱히 휴식이나 휴양이라 부를 시간은 없었다.

대부분은 종이와 잉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데 사용하고, 그 외의 날에는 황궁에 들어가 날카로운 혀를 휘둘렀지. 그게 아니라면… 귀족들과 황실, 그리고 신전의 뒷조사를 한다고 뛰어다녔나? 참으로 일관성 있는 기억들이다.

“나도 꽤나 지독한걸…….”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자조하면서도 그러한 삶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분명 어린 시절에는 이곳저곳을 뛰어놀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다른 사람의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하고 싶었고, 해야만 했던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남들이 다 가지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기보다 멀찍이서 구경하는 게 더 익숙해진 것이다.

“처음부터 외면했다면…….”

그렇게 했다면 지금 그녀는 평안했을까? 온실 속의 화초처럼 길러진 대로 살아갔다면?

평범한 영애들처럼 자신을 가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사교계에서 만난 사내들 중 누군가와 수줍은 사랑을 나누고 어느 순간에는 적당한 인물과 혼인을 했겠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가져 가문의 내정을 보살피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았자 무얼 하겠어.”

평온하고 조용한 온실 속을 뛰쳐나온 건 그녀 스스로인데. 누군가 온실 밖으로 그녀를 몰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온실의 유리 벽이 가려 줘야 할 세상을 너무나 많이 알아 버렸다. 그녀라는 꽃은 이미 온실이라는 좁은 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밖에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까.

“다 내 어리석음이지.”

그래, 모든 것은 그녀가 자초한 일이다. 과거를 후회하고 스스로를 탓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쉬는 건 모든 게 끝난 다음으로도 충분…….”

모든 것이 모조리 끝난 후 완전한 평온을. 그날이 올 때까지는 휴식조차 사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페드로와 함께 모친의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간. 적어도 그 순간의 행복과 평온은 진실이었으니까. 에스메랄다가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의 품을 그렇게 밀어내고 미워하면서, 또한 그의 곁을 편하게 여기다니.

인간이란 어째서 이토록 모순적인가. 홀로 조소하면서도 그녀는 페드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처럼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면 이 피로가 사라질까? 에스메랄다는 후작 성에서 다시 만날 페드로를 그리워해 보았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한 건지, 다른 생각으로 밀어냈던 아르페시스는 다시금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앉았다. 지금쯤 그는 페드로를 만났겠지. 에스메랄다는 선명한 은회색 눈동자를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애써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의 전쟁터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전장으로 돌아온 그녀를 반기는 소식이 도착했다.

「제가 다 먹었습니다. 이제 황도는 제 겁니다.」

깃펜을 얼마나 꾹꾹 눌렀는지, 짙게 물든 글귀였다. 황도 뒷골목이 그녀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제 그녀의 도움으로 성공을 쟁취한 포주가 그녀의 손밖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게 길들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가능하다면 루그레디안이 빨리 연락을 주었으면 했다.

멀리 있는 그녀가 단속해서 그에게 넘기는 것보다는 애초에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운 그가 시작하는 게 효율적이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그러니 낯선 전서구가 물고 올 소식을 기다릴 때였다. 에스메랄다는 창밖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가 보는 곳은 중서부 경계선이 있는 동쪽이 아니라 쿠베트 후작 성이 있는 남쪽이었다.

* * *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직후 기나긴 뿔피리 소리가 들리자 에스메랄다가 본성 앞으로 나왔다. 그녀가 집무실에서 내려오는 동안 뿔피리 소리와 함께 외성을 지났던 이들이 내성에 진입했다. 정원 너머의 멀찍한 곳에서 20기에 달하는 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말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이 땅의 주인인 테노리엘 백작이 귀환한 것이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에스메랄다의 앞에서 멈추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덤덤한 표정의 그녀가 가족들을 맞이했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았다.”

백작을 필두로 함께 온 일행들이 하나둘 말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가 치맛자락을 붙들고 살짝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오라버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페드로의 핑계를 그가 믿을 것 같지는 않지만, 굳이 저가 다 했노라 하고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오기 전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백작의 뒤를 따라 말에서 내린 형제들이 눈치를 보며 침묵 중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모두 훑어보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연합군 관련 내용은 따로 보고 받으시겠습니까?”

테노리엘 백작의 시선이 오롯이 에스메랄다에게 꽂혔다.

“아니면, 직접 보고드릴까요?”

“……직접 받으마. 올라가자.”

“예, 아버지.”

타인을 통해 서류만 전달받아도 되는 일에 직접 대면을 원하다니. 그녀에게 캐 볼 것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에스메랄다는 저울의 무게를 바꿔 달았다. 황제와 테노리엘 백작 중 후자에 추를 더한 것이다. 만약 백작이 그 일의 주동자가 맞는다면 북부의 금광 쪽으로 황제의 세작이 간 것은 순전한 우연일까? 에스메랄다는 표정 변화 없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본인에게 꽂힌 세 쌍의 시선을 매정하게 등진 그녀가 백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백작은 집무실 대신 응접실을 택했다. 영주 대리에 대한 예우였다. 하지만 이런 배려를 받는다고 그녀의 태도가 달라질 리 없다. 백작 역시 모르지는 않으리라. 에스메랄다는 서류를 응접실로 옮긴 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병력 피해 보고부터 드리죠.”

“그래.”

연합군에 소속된 테노리엘 백작가의 사병들의 피해 사항. 병들의 무구 수리나 개인 치료 요청에 소모된 금전적 지출 사항. 그 외에도 지원한 물자 중 테노리엘 백작령에서 징수된 것까지, 에스메랄다는 꼼꼼하게 모든 것을 챙겼다.

“이번 물자 징수로 내년부터 황실로부터 적지 않은 면세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세수의 상당량을 상계 활동에 투입해도 영지 관리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요.”

“상단의 규모를 늘렸으면 하는 게냐?”

테노리엘이 가문 차원에서 운영 중인 상단은 모두 3개. 병장기 및 가구나 장식품 등의 제조 활동에 치중한 2개와 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직물 상단이다. 오래전부터 영지민을 장인으로 육성을 해 온 덕분에 가능한 구조였다. 4대째 운영되고 있기에 현재는 3개 모두 대규모로 지칭될 만큼 성장한 상태다.

“활동 영역을 늘릴 게 아니라면 불필요한 투자 대상이지요.”

“……곡물 시장을 염두에 두느냐?”

“그건 제가 첨언할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테노리엘도 곡물 시장에 손을 댔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남부군이나 사병을 위한 병장기를 우선으로 두다 보니 경쟁에서 밀려 실패했다. 황제가 당시 테노리엘과 비등하게 경쟁하던 벨베크를 밀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패배의 대체 방안으로 자금을 벌어들일 장식품이나 직물 쪽을 차지했다고 보면 된다.

“저는 그저 보고 원칙대로 가능한 방안에 대해 함께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네 의사도 궁금하구나.”

“제 의사가 무엇이 중요할까요. 저는 대리에 불과한 것을요.”

보고서를 훑던 백작의 녹안이 에스메랄다에게로 향했다. 잠시간 그녀를 관찰하듯 살핀 그가 입을 열었다.

“검토 후에 따로 지시를 내리마.”

“예, 알겠습니다.”

그 후에도 확인할 내용은 꽤 많았다.

“깔끔하구나.”

“감사합니다.”

모든 사항을 보고 받은 후 진행된 대화는 곧 있을 연회에 대한 것이다.

“초청 소식과 공식 서한은?”

“연합군에게는 페드로 오라버니를 통해 전달했고, 서부에 남아 있는 소수의 영주들에게는 전서구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참석 인사의 규모는?”

전체 지휘관 인원 중 일부, 그리고 상급 및 중급 기사 일부. 그리고 서부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영주, 그들의 가신과 기사들.

“도합 60인 내외입니다.”

당장 지휘의 중요성이 줄어든 방어전 중이라고는 하지만 지휘권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녀가 황태자처럼 사리 구별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참석 인사의 선별은 연합군에게 일임했습니다.”

연합군의 목적 달성 후 열리는 연회 등의 행사는 결국 일종의 요식 행위다. 총사령관인 아르페시스가 참석하는 것에서 개최 이유가 충족된 것이나 마찬가지. 나머지 인원은 연합군 내부적으로 회의를 거쳐 선발하리라. 주로 그간 전투 횟수가 지나칠 정도로 많거나 잦은 부상 등으로 휴식이 권장되는 이들, 혹은 휘하 병력의 피해가 많아 재편성 전까지는 타 부대에 소속되어야 하는 지휘관들이 올 터.

“페드로 오라버니께서 내일 함께 쿠베트성으로 출발하실 겁니다.”

“너무 늦어서 좋을 게 없으니 우리도 내일 오전에는 출발했으면 하는구나. 준비는 끝났느냐?”

“예,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제 공무가 끝났으니 각자의 목적을 달성할 때가 왔다.

“그럼, 이만 일어나 보아도 되겠습니까?”

“괜찮다면 차나 한잔 들자꾸나.”

그 서두에 에스메랄다는 서늘한 미소로 답했다.

“오래 자리하지 못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드려야 할까요?”

“차 한잔할 시간도 없…….”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용건만 간단히 하시라는 의미였습니다.”

설마 백작이 그것을 못 알아들었을까. 본인의 용건을 은근슬쩍 돌려 물을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겠지.

“제게서 무언가를 떠보고자 이리 자리를 마련하신 것 아닙니까?”

백작이 소파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황제 쪽 인사가 금광에 등장한 건 우연, 혹은 아예 다른 이유 때문이고 뒷골목에서 이것저것 캐고 다니던 건 테노리엘 백작이다.

“하나만 물으마.”

“하문하시지요.”

“남부에서 일어난 일에, 네가 관련이 있느냐?”

아직 확신은 아닌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것과 똑같은 테노리엘 백작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방어적으로 발뺌을 해 두는 것이 이로울까? 아니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옳은가? 그녀는 오래가지 않아 답을 내렸다.

백작이 평생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거나 알아도 침묵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아득바득 부정해서 챙길 수 있는 게 없다. 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일이 그녀의 편의에 맞춰 행해지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차가운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있나.

지금의 상황을 보아하니, 백작은 에스메랄다의 행적을 계속 캐고 다닐 모양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들킬 일을 발뺌하며 숨기는 것보다 먼저 패를 보여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편이 옳다.

손발을 자르거나 발목을 묶어 두겠다는 의미였다. 그간 해 온 일을 백작에게 들켜도 대비할 방법이 있다면 충분한 법이다. 백작이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주저앉히면 될 일이 아닌가? 그녀가 지난 3년간 바빴던 이유는 뒷골목이나 전력의 보강 때문만이 아니었으니까.

“작위 승계법은 참으로 복잡하지요.”

“……뭐라?”

“겉과 속이 어찌나 다른지.”

백작의 콧수염이 씰룩거렸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눈매를 손으로 살짝 쓸어 보며 말했다.

“2년 전, 작위를 승계한 아만트 자작이 사실은 사생아라는 걸 아시는지요?”

아이가 생기지 않아 부인에게 허락을 받고 밖에서 데려온 아이.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에스메랄다는 알고 있다. 10여 년쯤 후에, 과한 낭비벽으로 자작에게 감금당하다시피 한 선대 자작 부인이 폭로를 해 버릴 예정이니까. 그로 인해 작위가 환수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그 폭로에 황실의 입김이 닿긴 했다.

그 무렵 에스메랄다가 루그레디안과 손을 잡은 상태였으니까. 아만트가 테몬의 봉신이기에 황실이 건든 것이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는 이가 많이 없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레스 오라버니를 제외하고, 다른 오라버니들은 어머니를 닮았지요.”

“네가 지금…….”

백작의 눈꺼풀이 경악으로 인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한 말은 모친의 부정을 암시한 것이다. 백작과 백작 부인 모두 비슷한 색채의 금발을 가진 이들이다. 하지만 눈동자 색은 달랐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모친의 눈동자를 빼닮은 3명의 형제들을 그녀의 부정한 자식들로 몰겠다고 협박한 것이었다.

억지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를 위해 만들어질 모든 증거들이 조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황제는 조작할 수 없으나, 가문의 내부인인 그녀는 조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귀족들은 가주가 밤을 함께 보낸 상대방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게 의무였다. 피가 섞였는지, 섞이지 않았는지 판별하는 증거가 되니까.

현 테노리엘 백작이 작고한 부인과 침실을 함께 쓴 일자 역시 모두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테노리엘 백작은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전선과 내륙을 오갔었다. 황도의 저택을 비우는 날이 1년의 대부분이었으니 관련 기록을 조작하는 게 숨 쉬는 일보다 쉬워진다. 일이 그렇게 되면 테노리엘을 짓누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황제가 그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까?

그 의미를 알아들었기에 테노리엘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화로 일그러지는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눈매를 찌푸리지 않기 위해 치맛자락에 가려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짧게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에 자국을 낼 만큼, 꽉.

3년 전 영주권을 빼앗아 올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지금 이렇게 속이 메슥거리는 건 아르페시스와 페드로 때문이겠지. 두 번 다시 이런 따듯한 감정을 모르길 바랐는데. 처음은 페드로, 다음은 아르페시스. 찰나에 불과한 그 짧은 순간에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자신은 대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을까, 하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속내를 감추고 덤덤한 말투를 위장했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해진 가식과 협박은 그녀의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완벽하게 숨겨 주었다.

“그렇게 되면 저와 아레스 오라버니뿐인데…….”

경쟁자가 한 명만 남는다면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레스가 과연 그녀를 해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백작과 에스메랄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녀가 화난 테노리엘 백작을 보며 생긋 웃어 주었다. 평온한 미소보다 이런 것들이 더 자연스러워지다니, 괴물이 되어 버린 스스로를 보는 기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말씀드렸지요?”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해야 하는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

“적당히 하시라고.”

가식의 가면으로 그려 낸 그녀의 미소는 차가운 뱀의 것을 닮아 있었다.

“제가 3여 년 전의 그 조잡한 것들로 이리 당당하다 여기지 마시기를.”

평생 숨길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거니와, 가능하다 해도 안전장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게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3년간 다른 일 외, 백작의 발목을 잡아 주저앉힐 수 있는 것들도 꽤나 많이 준비했다. 그것이 대부분 날조인 것은 분명하지만 주목할 점은 그것의 날조 여부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황제가 참으로 기껍게 반길 것이라는 점이지. 에스메랄다에게는 이득으로, 테노리엘 백작에게는 손해로 이어질 기꺼움 말이다. 그렇기에 테노리엘 백작을 옭아매는 데 더없이 훌륭한 밧줄이 되는 것이고.

“허황된 명예와 거짓된 고귀함으로 점철된 테노리엘의 작위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것이 되었다. 작위를 승계한 이후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눈앞에 있는 테노리엘 백작은 평생 알지 못하리라. 그 일이 있던 시간 속에서는 죽었고, 지금의 시간 속에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니까. 참으로 훌륭한 변명이고 근사한 명분이다. 기억이 없다니.

그 변명과 명분 덕분에 저렇게 다정하고 엄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것이겠지. 감히 그녀를 버린 주제에, 기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과조차 하지 않고서 말이다. 죄책감과 페드로의 사과 덕분에 허물어졌던 응어리가 다시 굳어 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 아팠지만 그녀는 냉혹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을 제가 쥐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에스메랄다!”

노성과 함께 심장이 뭉개지는 것 같았지만 에스메랄다는 알고 있다. 이런 통증은 심장에 실질적인 해를 가하지 못한다. 이렇게 아파도 심장은 멀쩡히 뛰어 인간을 살게 한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쳐도 죽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입 안의 살을 깨물어 당장의 고통을 참기만 하면 된다. 참기만 하면 죽지도 않는데, 못 할 이유가 어디 있다고.

“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메랄다가 자신의 부친에게 일갈했다.

“머릿속에 간직하신 그것을 밖으로 꺼내 보세요. 그럼 저 또한 그에 대한 답을 드리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응접실을 떠나 집무실로 돌아왔다. 카펫 위에 내려앉은 고요한 발걸음이 의자에까지 닿았다. 하지만 그 움직임의 주인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숨소리는 오래도록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후, 그녀의 집무실에서 전서구들이 날아올랐다. 포주와 건달들의 뒤를 캐고 다니는 이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가지고서. 황제 측 인사들이 아님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그녀의 터전을 들쑤시지 못하게 치워야지.

* * *

다음 날, 새벽같이 쿠베트 후작 성으로 향하는 이동이 시작되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에스메랄다가 있기에 낮 시간을 꼬박 쏟아야 했다. 예상 이동 일정은 이틀, 내일 저녁쯤에는 쿠베트 후작 성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동에서 테노리엘 백작과 그녀 사이에는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함께 이동 중인 세 명의 형제들도 느낄 정도로 노골적인 분위기였다.

“저기, 리디?”

에스메랄다는 마차의 창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도 눈을 감고 침묵했다. 아직 몸이 덜 자랐지만 이후의 기동성을 생각해서라도 승마를 배워야겠다는 계획을 짜면서.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훗날 반군의 수뇌부와 접촉할 때가 되면 마차는 짐이다. 머리는 승마를 기억하지만, 몸을 적응시키려면 직접 타고 다시 익힐 필요가 있다. 날이 풀리면 승마 일정을 집어넣어야 할 터. 에스메랄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귀를 닫았다. 멀미를 하는 체질도 아니건만, 속이 좋지 않았다.

“리디이…….”

“야, 그만해.”

밖에서 쌍둥이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두통이 이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일단…….”

“그렇지만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지난번 연회에서도 그냥 가 버리고!”

페르멘의 언성이 높아지려는 찰나 보다 낮은 음성이 그것을 막았다.

“너희 둘,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리 가.”

“……형.”

“어서.”

잠시간의 실랑이 후 마차 밖이 조용해졌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타닥, 타닥 일정한 말발굽 소리가 전부인 상태. 그나마 두통이 좀 가시는 기분이다.

이후로는 꽤나 순조로운 이동이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후방에 남아 있는 소수의 마수와 조우하는 등, 두어 차례의 가벼운 교전이 있었다. 하지만 전부 사람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서너 마리에 지나지 않았기에 위험한 일은 없었다.

후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마수가 있을 수도 있는 일, 일행의 호위는 20명의 상급 기사로 차출된 상황. 에스메랄다를 제외하고는 직계들도 모두 무위를 보유하고 있으니 100기의 소형 마수를 마주해도 대응을 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에스메랄다.”

쿠베트 후작 성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창문을 두드림과 동시에 아레스가 그녀를 불렀다.

“혹시 잠들었니? 후작 성에 곧 도착할 테니 준비해야 한다.”

혹여나 마차 내부에서 의복이나 머리가 흐트러졌다면 손을 보라는 소리였다. 다른 가문의 인사들에게 모습을 보일 때 외관을 챙기는 것이다. 고귀하고 우아하게, 흠 하나 잡히지 않도록. 혈육으로 묶인 가문이라고 해도 이득이 갈린다면 등을 돌리는 게 귀족이니까.

에스메랄다는 알겠다는 의미로 창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굳이 말로써 소통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레스의 용건은 그것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두 녀석에게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모양이다만…….”

에스메랄다는 아레스가 있을 법한 방향을 주시했다.

“내게는 가볍게 언질을 주셨다.”

어제의 대화를 이르는 것이겠지.

“내가 계승권을 포기하마. 페드로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고, 두 녀석이야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으니 금방 수긍할 게다.”

이 얼토당토않은 말을 가만히 들어 주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니, 네가 가족들을 멀리하는 이유가 작위 때문이라면…….”

진실로 맹세하건대, 그녀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에 단 한 번도 작위에 욕심을 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나요? 제가 작위를 탐낸다고?”

그딴 작위, 가족이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황제에게 수십 번도 더 팔아넘길 수 있었다. 그 이름을 욕심내는 이들에게 던져 줄 수는 있어도 가지고자 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을 잃음으로써 그녀가 약해지면 가족들의 죽음이 헛되게 일그러질까 봐, 그들과 자신이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까 봐.

백작의 장례식이 끝나고 피눈물을 흘리며 승계했다. 저주와 다를 바 없었던 그 이름, 테노리엘.

“하.”

조소를 머금은 에스메랄다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돌아보았다. 정말 이 지독한 감정들이 백성의 손에 맞아 죽던 때에 시작된 게 맞나? 어쩌면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가족들이 모두 죽었던 그 순간 이미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이다. 오멘과 페르멘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페드로의 죽음을 직면했을 때. 마수를 내륙에 들여와 돈벌이로 써먹던 서커스단을 목격했을 때.

그 정도로 오래되어야, 이렇게 퀴퀴하게 썩어 버린 악취와 색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언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는 감정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한때는 소중히 여겼던 백성과,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가족을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여길 수 있다니.

죽음의 순간에 가슴에 품었던 분노와 후회는 그녀가 살아왔던 모든 시간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만 그래도, 혹여 네가 필요…….”

“단 한 순간도.”

에스메랄다가 변명 조로 이어지는 아레스의 말을 끊어 냈다. 그녀는 이를 짓씹으며 진심을 토로했다.

“단 한 순간도 바란 적 없어요.”

그 무겁기만 한 이름을 그녀에게 내던지고 떠난 건 가족들이다. 뒤에 홀로 남은 그녀가 어떠한 심정일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행동이 그들의 죽음을 빌미로 짐을 떨쳐 내지 못하게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제 백작과의 대면에서 단단하게 뭉쳤던 응어리가, 오늘은 삐죽거리며 부피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따위 것을 짊어질 생각은 없으니 말이죠.”

“에스메랄다…….”

그녀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속에서 휘몰아치는 원망과 화는 그녀를 힘들게 만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어두운 감정들을 내려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용서와 관용? 직접 당해 보라지. 그럼에도 관용을 베풀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녀는 그 사람을 기꺼이 찬양하리라. 그녀와 같은 일을 겪고도 용서를 행할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무릎을 꿇고 앉아 경배할 것이다. 그녀의 시간을 직접 겪어 보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그녀에게 용서와 관용을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을 행할 수 있다면 직접 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에게 그 얼토당토않은 것을 강요하지 말고.

* * *

마차 문을 열고 내렸을 때 그녀를 맞이한 건 함께 이동한 이들이 아니었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페드로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보자마자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속에서 삐죽거리며 난동을 피우는 감정이 짜증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거부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다가오는 온기를 놓을 자신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모순을 돌아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동안 페드로가 물어 왔다.

“오느라 곤하지는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동안 부담스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에게 에스코트의 기회를 넘겨준 채 자신을 주시 중인 테노리엘 백작을 바라보았다. 뭐, 넘긴 것인지 빼앗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편한 마차를 타고 왔는걸요.”

어둑한 시간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각자의 목표물을 정확히 주시하고 있었다.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백작이었다. 성 앞까지 마중을 나온 쿠베트의 직계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으니까.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백발의 노신사가 후계들과 함께 테노리엘 일가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오랜만이군, 백작.”

그의 뒤로 테노리엘의 후계들이 한 명씩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후작님.”

“아레스, 한 10여 년 만인가? 몰라보게 자랐구나.”

그들을 모두 지나, 에스메랄다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고운 미소를 지은 채 후작의 앞에 섰다.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가 후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영애의 소문은 내 많이 들었지. 이리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

“저 역시, 서부의 방벽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부군이 머무는 군사 지역 바로 위에 위치한 영지는 아르텐 공작령이다. 하지만, 군사 지역이 아님에도 심심치 않게 마수가 넘어오는 영지는 쿠베트 후작령이다. 아비체룬과 국경을 접한 것도 아니고, 군사 지역도 아니지만 과거에 멸망한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통해 전선이 막지 못하는 마수가 넘어오고 그것을 막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서부의 방벽.

쿠베트의 저력을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후작가의 저력 자체는 대단하다. 중앙 정치를 등한시하고 영지에 모든 저력을 쏟는 가문으로 사병의 질과 규모도 상당하다. 문제는 그 아래의 봉신들이다. 이번 서남 경계선의 몰락을 보라. 해당 지역을 지켜야 하는 군수권자의 대부분이 북쪽으로 도주를 하지 않았나.

쿠베트가 거느린 10개의 봉신 가문 중 성과 영지민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이는 넷뿐이다. 나머지 영주들은 모두 마수가 북상 중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북부로 대피했다. 지금 서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면, 쿠베트 내부에서는 숙청이 있으리라.

“전하께서는 도착하셨습니까?”

“오후에 오셨네.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니 올라가지.”

귀족의 방문에 황족이 버선발로 나와 마중을 할 수는 없는 일. 그는 인사를 받기 위해 직접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 타인이 인사를 하러 오도록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그를 보면 정말 정리하자.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페드로의 곁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내성의 복도를 환하게 밝힌 마도구 전등 아래를 지나 넓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형제들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선 에스메랄다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테노리엘의 노만이 전하를 뵙습니다.”

“백작, 오랜만이군. 다들 한 번씩 본 사이니 인사는 짧게 하지. 앉게.”

차가 준비되는 사이 가벼운 인사와 서로 간의 공치사가 오갔다.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한 건 형식적인 대화가 끝물에 닿았을 때였다.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야를 한가득 채웠다.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했던 당시처럼 웃어 보이는 그를 보았을 때 어쩌면.

“영애도 오랜만이군.”

그 부름에 답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빤히 바라기만 했던 그때 어쩌면.

“백작 성에서의 일에는 다시 감사 인사를 전하지.”

대답이 없는 그녀의 태도에 그가 초조해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 순간에 이미 직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잘 지냈는가?”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탈했습니다.”

고작 대답 하나에 싱글벙글 피어난 미소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 * *

“급하게 준비를 해서…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곧장 말해 주세요.”

에스메랄다가 몸을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우물쭈물 말을 꺼낸 사람은 쿠베트 후작의 손녀였다. 기억대로라면 그녀와는 3년의 터울이 있다. 올해 15세의 그녀는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에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직계 가족이 직접 안내한다는 건 그만큼 손님을 예우한다는 의미.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게 아니라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정상이다.

“예쁜 방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그,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추측이 가능했다. 내성적이고 온화한 소녀인 모양이다.

“그, 그 정말 멋지다고, 멋있다고 생각해요!”

“……네?”

이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는 건 짐작하지 못했지만.

“여, 영애처럼 어린 나이에 영주 대리라니, 정말 너무 멋있다고 생각해요!”

어린 나이를 들먹여 시비를 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를 바라보며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그녀는 진심처럼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눈앞의 소녀가 어떤 인사인지 파악하기 위해 기억을 뒤져 보았다. 성과가 없어서 금방 포기해야 했지만. 사교계 시즌에 참석했던 각종 연회나 티 파티 같은 곳에서도 그녀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중앙 사교계에 방문하는 일 자체가 적었다는 의미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지라, 부끄럽네요.”

“대단하지 않다니, 정말 멋있다고요! 전 영애와 같은 나이 때 세수 장부도 읽질 못했는걸요? 지금도 어렵기만 하고요… 그래서 로렌스가 태어났을 때 정말 안심했어요.”

이제 3세가 되었을 쿠베트 후작의 손자를 이르는 것이리라. 그녀의 어린 남동생. 조용하고 내성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완전히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앗! 그러고 보니 정식 소개도 안 했네요. 저는 루이자라고 해요. 사 아그라 쿠베트 루이자!”

“……저도 인사가 늦었네요, 쿠베트 영애.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예요.”

“네, 네!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정말 반가워요!”

“……반겨 줘서 고마워요.”

에스메랄다는 순수한 호의를 보내는 루이자의 태도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로 인해 계속 한 박자 늦은 답이 흘러나왔지만 에스메랄다의 대답은 아무래도 루이자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에 후방 물자 보급을 담당한 것도 영애라고 하던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루이자는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에 에스메랄다가 흠칫거리려던 몸을 다독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다니……. 그녀는 신뢰하지 않는 인사에게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허락해 본 적이 없었다.

“……페드로 오라버니께서 도와주셨죠.”

“하지만 할아버지께선 영애를 언급하시면서, 몇 번이고 대단하…….”

“쿠베트 영애.”

그럴 리가 없다며 주먹을 불끈 쥐던 루이자가 에스메랄다의 부름에 멈칫했다.

“반겨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도 영애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우선 쉴 수 있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이동이 생각보다 힘들었나 봐요.”

“아, 미, 미안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아니에요. 내일 차라도 함께해요.”

길을 가다 안면이 있는 이를 마주쳤을 때 흔히들 하는 입에 발린 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에스메랄다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정말요?! 정말 기뻐요! 제가 준비할게요!”

“……네.”

“그럼 푹 쉬어요!”

“……고마워요.”

생각보다… 당황스러운 소녀였다. 에스메랄다는 루이자가 떠난 방에서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자 덕분에 잠시 상념에서 빠져나왔었건만, 혼자가 되자 조금 전 마주했던 아르페시스가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몸져누웠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오지 말았어야 했던 건 아닐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기분이다.

“피곤해.”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그녀가 눈을 감았다. 내일 연회만 잘 넘기면 된다. 이후에는 백작 성으로 돌아갈 테고 더 이상 그를 마주한다거나, 생각한다거나 하는 피곤한 일은 없을 것이다.

* * *

400일을 가득 채우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제 땅 위에 흐트러진 싸라기눈이 녹아 없어지고, 얼어붙은 땅이 풀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잠에서 깨어있던 에스메랄다는 베개에 등을 기댄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외부로까지 서류를 챙겨 가져오는 위험한 짓을 할 수 없는 일.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백작 성을 비우는 건 고작 사흘이고, 그사이에 큰일이 일어나진 않을 터였다.

당장 급한 일이 아니면 며칠간 보고를 미루라는 지시를 내려 두기도 했고, 긴급한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모두 세워 두고 왔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위해 조련석을 따로 챙겨 오긴 했다. 급한 보고는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방으로 찾아오는 전서구는 없었다. 분명 아무런 일도 없다는 의미이니 다행이지만 그녀는 지금 초조해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었던 건 아니었다. 괜히 손님방 내부를 서성여 보기도 하고 침대에 앉았다, 소파에 앉았다 위치를 바꿔 보기도 했다. 손이 허전하고 초조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 지 몇 시간, 에스메랄다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손 대신 머리를 쓰기로 했다.

“머저리가 안달이 나 주면 좋겠는데…….”

중부는 물론 각 지역의 신문이 모두 아르페시스의 전공을 언급했다. 아르페시스를 천하다 여기며 경멸하는 황태자가 그 내용에 자극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남부군의 최우선 문제로 대두되어 있는 대형 마수 토벌이 시작될 때, 홀로 공적을 독차지하겠다고 나서 주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약이라도 써 볼까?”

에스메랄다의 머리는 황태자를 충동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자 바쁘게 굴러갔다.

그 계략의 일환으로 나온 게 황태자에게 마약을 먹여 보는 것이었다. 마침 쓰기에 적절한 약물도 있다. 중형 마수의 피에서 나온 성분으로 만든 마약, 시모르타.

본래 그 시작은 병사들에게 사용할 목적의 각성제였다. 공포와 고통을 모르는 병사들을 양성하겠다나 뭐라나. 각성제로서의 효과는 좋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개발 자체가 폐기된 약품이었다. 중독성이 너무 강하다는 단점 말이다. 그에 따른 금단 증상 역시도 심하고.

분명 제조가 금지된 폐기 약물이었지만 약을 만든 마법사들 중 일부가 불법 제조 및 판매를 하며 돈벌이로 이용한 덕분에 암시장에 물량이 풀리고는 한다.

“그랬다간 들킬 가능성이 높은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시모르타는 고작 한두 번 복용한 것만으로도 중독에 이르러 금단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니까. 식은땀을 흘리고, 손끝이 아리는 증상을 시작으로 금단 시 보이는 신체 반응이 확연하다.

물론 사람마다 금단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최소 횟수는 다르다. 하지만 황태자가 몇 번의 복용 후에 금단 증상에 시달릴지 모르는 이상 이 방법은 자제를 해야 하는 악수에 가깝다.

아무런 성과 없는 시간을 보낸다는 최악보다는 나은 차악이지만, 쉽사리 시행하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면 술집을 위주로 아르페시스의 영웅담 같은 걸 흘려 볼까?”

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이 또한 그리 훌륭한 수는 아니었다. 그랬다가 괜히 황태자가 헛소문의 근원지를 찾겠다는 등의 태도를 취하면 건달들이 타격을 입을 수 있으니까.

그녀의 지시로 몸이 상하는 일이 벌어지면 이후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도 있는 일.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위험이지만 또 꼭 안고 가야 할 정도의 이득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에스메랄다는 생각의 관점을 바꿔 보고자 여기, 저기 사건을 끼워 넣어 보았다. 더 좋은 방법, 더 나은 수를 찾기 위해서.

“아가씨, 기침하셨습니까?”

시녀의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오전 내내, 아니 연회 전까지의 모든 시간을 그렇게 보냈을 것이다.

“들어오렴.”

이미 전날 밤 야간 시중을 위해 문 앞에 배치된 시녀에게 말을 전해 두었다. 자신은 조찬을 따로 먹지 않으니 차 한 잔이면 충분하다고. 그래서 시녀가 차를 가져온 건 당연했다. 차를 마신 후에 사용할 세숫물도 마찬가지. 하지만 찻잔 옆의 작은 접시는 당연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에스메랄다는 작은 접시 위에서 익숙한 모양새의 동그란 약을 발견하고 눈매를 좁혔다.

“테노리엘 페드로 경께서 차와 함께 올리라고 전해 주셨습니다만…….”

따로 챙겨 오지 않았더니, 그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페드로가 따로 챙겨 온 모양이다. 물자를 가지고 출발할 때부터 생각했던 거겠지.

시녀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얕은 한숨으로 수긍하며 약제를 입에 넣었다. 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에스메랄다는 따지면 단것을 선호했다. 맛도 그렇지만 당분이 피로 해소와 두뇌 회전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차와 약을 전해 준 시녀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였다.

“헛……!”

시녀가 두어 걸음 물러나는 사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은 페드로가 말했다.

“잘 잤니?”

“……네, 오라버니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럼.”

해사하게 웃은 그가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시녀를 내보냈다. 페드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서 눈치를 보던 시녀가 빠르게 사라졌다.

“약은 먹었니?”

빈 접시를 보고도 물어 오는 모습이 얄미운 건지, 못마땅한 건지… 에스메랄다는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꼬박꼬박 먹어야 효과가 있지.”

따로 알아보니 식욕 증진, 그리고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이었다.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와의 불필요한 신경전을 하는 대신 가만히 있기로 했다. 독도 아닌데 먹지 않겠다고 버텨 봐야 그녀만 피곤해질 뿐이다.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손을 뻗어 에스메랄다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전날 목욕을 하고 조금 덜 말린 채 잠들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부스스한 느낌이었다.

“연회 준비야 오후에 시작해도 될 테니, 오전에는 땋고 있어도 되겠는걸?”

에스메랄다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페드로가 앉은 채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오라버니!”

놀라 바동거렸지만, 위로만 해도 그녀의 두 배쯤 길쭉한 페드로의 힘을 어찌 이길까. 에스메랄다는 그의 무릎 사이에 앉아 머리카락을 내어 줘야만 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머리를 땋아 주겠다며 다투는 일이 많았던 아레스와 페드로였다. 유모에게 듣기론 그걸 위해 시녀들에게 따로 배우기까지 했다던가? 에스메랄다는 툭툭 치고 올라오는 추억을 그리지 않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자, 다 되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갈래로 깔끔하게 땋아졌다. 그것으로 용건이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에스메랄다가 세안을 하고 의복을 갈아입는 동안 잠시 밖에 나가 있던 페드로가 다시 들어왔다. 그는 대뜸 창문을 활짝 열어 보더니 말했다.

“날이 좋구나. 함께 산책이라도 나갈까?”

에스메랄다는 절대 빈말로도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 있는 관계로 자기 전 허리 마사지까지 따로 받을 정도. 걷는 것이라고 해 봐야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혹은 오찬을 먹은 후 하는 가벼운 산책이 전부다.

“해의 마지막 날인데 계속 안에 있으면 지루하지 않니.”

오늘이 해의 마지막 날인 것과 지루한 게 대체 무슨 상관일까?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삐죽 솟아올랐지만 얼마 가지 않아 페드로의 팔에 앉아 있었다. 몇 번 더 권유하던 그가 에스메랄다에게 자발적으로 나갈 의사가 없음을 깨닫고 덜렁 안아 든 것이다. 페드로의 반대쪽 손에는 그녀의 외투까지 들려 있었다. 에휴, 하는 한숨이 그의 목덜미에서 울렸다. 그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페드로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네 나이에 한숨이라니, 애늙은이가 따로 없구나.”

성을 나서는 동안 페드로는 계속 키득거렸다. 에스메랄다는 생각을 모두 관둔 채 그의 온기에 기대었다. 그녀의 무기나 마찬가지인 깃펜과 잉크가 없으니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페드로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이 귀찮은 산책에서 벗어날 방법도 없다.

“밖에 나와 햇볕을 쬐고 해야지. 실내에만 있으면 좋지 않다.”

“산책은 매일 하고 있어요.”

“고작 몇십 분 걷는 걸로?”

에스메랄다의 운동량이 페드로의 성에는 차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이러면 앉아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품에 안은 채로 외투를 입혀 버리는 페드로를 흘겨보며 말했다. 땅에 내려 주면 훨씬 수월하게 입을 텐데, 굳이 안은 채로.

“아니지, 내가 걸을 때마다 너도 흔들리잖니.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르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라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의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페드로의 품이 편했으니까.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집무실의 의자보다 페드로의 단단한 팔에 앉아 있는 것이 편하다니.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동안 페드로는 어느새 후작 성의 정원에 발을 들였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저를 데리고 나오신 거예요?”

“응?”

“꿍꿍이가 있으셨던 거잖아요.”

“하, 말하는 것 좀 봐라?”

어서 목적을 밝히라는 추궁에 페드로가 눈매를 좁혔다. 그는 반대쪽 손으로 에스메랄다의 코를 콱 꼬집으며 말했다.

“꿍꿍이라니. 누이를 생각하는 오라비의 마음인 것을.”

“거짓말.”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손을 밀어내며 아릿한 코를 감싸 쥐었다.

“거짓말은 나보다 네가 잘하면서 면박은 있는 대로 다 주는구나. 이거 슬픈걸.”

머리를 아프게 굴릴 필요가 없는 평온한 대화였다. 에스메랄다는 자연스럽게 페드로의 품에 기댄 채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그때 그 순간 그저 떠오른 말들. 입 밖으로 꺼낸 말이 가져올 일들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이런 시간 자체가 그녀에겐 휴식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연회복은 어떤 걸로 챙겨 왔니?”

“그냥 있는 것으로요.”

“그럴 줄 알았지. 집사에게 따로 준비해 보내라고 한 옷이 있다. 그걸 입자.”

“……왜요?”

“그 옷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흰색이니까. 내 의복도 흰색으로 골라 두었단다.”

그러니까 맞춰 입자?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페드로가 원래부터 옷을 맞춰 입는 걸 좋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연회나 티타임, 혹은 만찬이나 평범한 가족들끼리의 식사 시간에도. 그 덕에 그가 죽기 전까지는 페드로와 색이나 디자인을 맞춘 옷이 많았었지.

이게 그의 목적이었던 걸까? 왜 방에서 그냥 말하지 않고? 에스메랄다는 슬쩍 페드로를 흘겨보았다. 당장 조금 전까지 그녀를 침범하던 초조함이 없어져서일까? 그냥 원하는 대로 걸려 주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계속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싶었다. 흔들흔들, 일정한 박자로 흔들리는 페드로의 품에 있으니 어째서인지 잠이 솔솔 오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에스메랄다는 졸음에 취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달콤한 것처럼, 삭막하기만 한 그녀의 시간은 지금의 평온함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이대로 잠들면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의식의 수면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허공에 흩어진 알싸한 연초 냄새가 졸음을 몰아냈다. 에스메랄다는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녀가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연초를 태우기 때문이다.

“페드로, 에스메랄다.”

“형.”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정원 한쪽에 서 있던 아레스가 그들을 발견하고 서둘러 연초를 껐다. 그녀는 곧 시선을 거두고 페드로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쿠베트 후작 성으로 오며 아레스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 버렸다.

“산책 중이었니?”

“응, 천사가 통 활동이 없어서 운동을 같이할 겸.”

“……운동이라면서 그리 안고 있으면 안 되지.”

조금 불퉁한 목소리였다.

“천사가 허락해 줬으니까.”

페드로는 그렇게 말하며 아레스를 빠르게 지나쳤다.

“잠시…….”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을 아주 깔끔하게 떨쳐 주기까지 했다.

“형이랑 있는 걸 천사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너…….”

“그럼, 우린 이만.”

페드로는 조금 전의 나긋한 걸음 대신, 성큼성큼 걸어 정원을 가로질렀다.

“걱정 말거라.”

“……네?”

갑작스러운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에스메랄다가 되물었다.

“아버지께서 형이랑 두 녀석에게 주의를 주신 모양이다.”

“…….”

“네게 먼저 다가가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두신 것 같으니, 연회가 끝나면 마주칠 일은 없겠지.”

그녀가 가족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에스메랄다가 그 이외의 가족들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있나. 다만, 그것보다 우선순위로 두는 일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충동으로 내뱉은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에도 페드로는 답을 주었다.

“글쎄, 내가 가족들을 모두 사랑한다고 해서…….”

말꼬리를 흐린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너에게도 모두를 사랑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

아레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페드로의 걸음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다.

“사실 우리 집안이 이상한 것이다. 귀족들이 형제라고, 가족이라고 절절하게 아끼는 경우는 잘 없지.”

“…….”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도 있는데 무슨.”

그들은 어느덧 정원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한 말에 쓰게 웃었다.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라…….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테노리엘 백작이 정말 그녀를 방해할 경우 준비해 둔 계획을 실행할 수 있냐고. 분명 3년 전에는 할 수 있을 것이라 답했을 텐데 지금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전에 한 말은 결국 허풍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조금 전 평온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이 콱 틀어막혔다. 그들을 진심으로 미워하면서도 이렇게 어리숙하게 굴다니.

페드로의 품은 바로 어제까지 삐죽이던 응어리를 또 풀어놓았다. 어쩜 이렇게도 일관성이 없을까. 에스메랄다는 다시금 눈을 감고 페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대화가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흔들림이 완전히 멈추었다. 아마도 페드로가 어딘가에 앉은 모양이다.

“졸리니? 들어가서 낮잠이라도 잘까?”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기댄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기분이 좋았다.

“찬 공기가 좋으니?”

끄덕거리는 움직임은 미약했다. 페드로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곤하다면 한숨 자렴. 필요할 때 내가 깨워 주마.”

그 말이 악몽의 화마 속에 휩싸이기 전에 그녀를 꺼내 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악몽을 꾸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허황된 거짓말보다 그 약속이 더 든든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을 에워싸는 안도감에 에스메랄다는 수마에 순응했다. 그렇게 차가운 공기와 따듯한 페드로에게 둘러싸인 그녀가 잠들었다. 해가 환하게 떠 있는데도. 3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으으…….”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참고 참았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금 그의 앞에는 고롱고롱, 아기 고양이처럼 얌전히 잠든 에스메랄다가 있었으니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터져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조금 전 페드로와 함께 나타난 에스메랄다를 발견했을 때,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죽였다. 페드로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가 너무 귀여웠으니까! 눈앞의 광경에 소리를 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의 시야에는 오로지 에스메랄다만이 가득했다.

페드로가 조용히 하라는 듯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서신을 통해서 조금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분명히 사적인 친분이라 할 만한 것이 쌓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착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후작 성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그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답도 늦게 나오고, 그리 살가운 태도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다시 본 게 어딘가?

아르페시스는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이어 가며 잠든 에스메랄다를 눈에 담았다.

‘여긴 보는 눈이 많습니다, 전하.’

지난 저녁 페드로와 단둘이 응접실에 남았을 때였다. 후작 일가는 손님을 안내하기 위해서, 백작 일가는 손님방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는 통에 미리 도착해 방을 배정받은 그와 둘만 남은 것이다.

‘그중에 누가 황제의 눈을 자처할지 모를 일이지요.’

테노리엘 백작 성에서처럼 황제의 눈을 완전히 가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않아 이해하기에는 편했지만, 내용까지 편한 건 아니었다. 그녀와의 친분을 쌓기도 힘든데 그걸 황제에게 들키지 않도록 안달복달해야 하는 처지라니. 평범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면 달랐을까? 아니, 그랬다면 테노리엘의 직계인 그녀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아르페시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황족인 것에 감사했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잠들었더니 새벽녘에 꿈을 꾸며 깨어났다. 언제부턴가 꿈을 꾸면 항상 느끼는 이상한 족쇄마저 선명한 꿈. 페드로를 만난 후 다시 시작된 일이라 이제는 대충 언제 꿈을 꾸고 꾸지 않는지 확신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는 내용은 보지 못했지만. 오늘 꾼 꿈은 남부군 물자 소모가 얼마고, 돈을 아껴 쓰는 것이 어렵니 마니, 같은 시답지 않은 글을 써 내려가는 게 전부였다. 잠그지 않은 창문으로 몰래 들어와 있던 페드로에게 꿈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더니, 그가 대뜸 말해 왔다.

‘조찬 후에 천사와 산책이나 나갈까 합니다. 미로 정원이 적당하겠군요.’

그러고는 돌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에스메랄다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걸까? 그가 왜?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지만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야 무슨 상관인가. 그보다 실력이 좋은 페드로가 같이 있는 것이니, 주변에 사람이 오면 알려 주겠지. 그런 마음으로 아르페시스는 해가 뜨자마자 정원에 나와 서성였다.

기다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혹시 수풀로 만든 미로가 넓어 길이 엇갈린 건 아닌가 싶어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페드로가 오질 않기에 눈에 보이는 곳에 대충 앉았을 때 마침내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러고는 지금의 상황이었다.

사실 절절하고 애틋한 재회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아직 쌓은 게 없기도 하고, 정식으로 마음을 고한 것도 아니고, 또 특별한 관계가 된 것도 아니니까. 그저 미소 한 자락을 바랐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 정도의 미소라도 족했다. 그런데 눈앞에 놓인 결과는 그리 밝지 않았다.

얕은 한숨을 내쉰 아르페시스는 자꾸만 에스메랄다에게 손을 뻗었다. 조금이라도 더 닿아 보고픈 욕심으로. 그것을 저지하려는 듯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손을 쳐내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전하.”

속삭임 같은 부름에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페드로를 힐끔 돌아보았다. 페드로가 곧은 눈으로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천사를 좋아하십니까?”

직설적인 질문에 아르페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잠시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답은 솔직했다. 아르페시스는 주변의 기척을 살피려다 말고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보다 뛰어난 실력의 페드로가 그런 것 하나 확인하지 않고 저런 질문을 했을 리 없으니까.

“그 꿈 때문입니까?”

갑자기 페드로가 왜 이런 것을 물어볼까? 궁금했지만 아르페시스는 되묻는 대신 대답부터 하기로 했다.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답하는 아르페시스의 목소리 역시 페드로의 것처럼 속닥거림을 닮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잠들어 있는 에스메랄다가 깨지 않도록.

“그건 계기라고 할까?”

“계기라면?”

“……그녀를 주시하게 된 계기.”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빤히 바라보며 덤덤하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설명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말들이 내 속의 어딘가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고 하면 될까?”

페드로가 계속해 보라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사랑하는 소녀가 잠든 자리에서, 그녀의 오라비와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아르페시스는 나름 성실하게 답했다. 그게 사랑하는 이의 가족에게 보여야 하는 예의 같아서.

“나는 허울뿐인 황족이고, 황제에게 대항할 힘 같은 건 전혀 없지. 그가 빼앗으면 빼앗는 대로 내어 줘야만 하니까.”

“…….”

“여덟 번째 유모가 갑자기 사라지고, 마지막 유모가 왔을 때 깨닫게 되더군. 감정을 포기하는 게 내게 이롭다고.”

페드로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기가 찼으니까. 스스로가 본인의 태도를 저렇게 잘 인지하고 있을 줄이야. 그럼에도 저런 모습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페드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자신이 아르페시스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죽음을 위해 아비에게 거둬졌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나누거나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유년기를 보냈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혈육이라는 이들은 자신을 이용할 생각만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다면… 황태자보다 더한 패악을 부리며 세상 모든 것에 화를 풀지 않았을까?

어떤 면에선 아르페시스의 태평한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되지 않는데, 저렇게 차분하게 말하고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다니.

페드로가 보기에 아르페시스는 조금 어리숙한 모습이 있긴 하지만 평범했다. 그 어리숙함도 황궁 밖으로 나와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일 테니, 그냥 평범함 그 자체라고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의 상황에서 저런 모습이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난 타인에게 무언가를 기대해 본 적이 없다. 아예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으려고 했고.”

“…….”

“그런데 그녀에 대한 건… 어떻게 포기를 하거나 관심을 버리고자 하는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머쓱함을 느끼는 바람에 시선은 피했지만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냥…….”

그래, 그냥. 멈추거나, 포기하거나,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조차 한번 해 보지 못한 채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흘러가 지금에 도달해 버렸다.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내 눈은 언제나 그녀를 좇고 있었고.”

“…….”

“그녀가 했던 말들을 수십 번씩 곱씹다 보니, 그녀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그냥 이렇게 된 것이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페드로의 태도가 그의 처지를 지적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안다. 황제가 내 감정을 눈치채면 나와 테노리엘 사이를 의심하며 주시하겠지.”

끊임없이 귀족들을 의심하고, 그들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다고 여기는 황제다. 그런 그가 아르페시스와 테노리엘의 여식 사이에 생긴 것들을 단순한 친분으로 볼까? 그럴 리가. 그 자체만으로도 반역을 준비한다고 여겨 어느 한쪽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변명 같은 말을 하는 것이리라. 이 시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걸 어떻게 포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단 한 번도 포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들키지만 않으면, 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지도 알고 있다.”

“…….”

“하지만… 보고 싶은 걸 어찌하나? 이건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데. 그냥, 그냥 본래 내 몸이었던 것처럼, 당연한 내 것 같은데.”

페드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시스도 그를 따라 푹, 숨을 내뱉었다.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 같은 게 가능하다고 믿는 어린아이는 아니다. 그저 당장 기회가 있을 때, 훗날 그녀가 남부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그때, 잠시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최근처럼 계속 서신도 주고받고 싶고. 말로 정리해 내뱉고 나니, 새삼 자신의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 보였다. 주인을 다시 본 이후, 둥, 둥, 둥, 기분 좋은 울림을 내던 심장에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소년과 사내의 한숨이 섞여 텅 빈 겨울철의 정원에 퍼져 나갔다. 그들 사이에서 잠들어 있는 소녀는 듣지 못한 소리였다.

“그녀에게 거절당하더라도 마음은 고해 보고 싶다. 내 심장을 그녀가 가져갔노라고… 그 말 한마디는.”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거절을 당한다고 해도 이 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내가 여기에 있노라 존재감을 알리는 것만이라도 해 보고 싶다.”

진솔하고 절절한 말에 페드로가 혀를 차며 아르페시스의 말을 받았다.

* * *

오멘과 페르멘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썹을 들썩거렸다.

“저놈은 뭐지?”

“저놈은 뭐지?”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은 그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마주 닿으며 짝,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큰 소리는 내면 안 된다. 에스메랄다가 잠들어 있는 것 같으니까.

오멘과 페르멘은 종종 이런 식으로 서로 똑같은 말을 하며 서로 간의 특별한 유대감을 찾곤 했다. 모친의 배 속에서 300일 가까이 함께 있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린 시절에는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전음이 가능할 것이라 믿으며 눈을 부릅뜨고 서로에게 말을 걸곤 했다. 입으로 말고 속으로.

그와 같은 그들의 노력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오늘과 같이 종종, 같은 말을 동시에 할 때가 있었다. 대부분은 에스메랄다와 관련된 일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겠지. 그들이 서로의 특별한 유대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르페시스를 못마땅해하는 동안, 멀리서 페드로가 손을 까딱였다. 드디어!

‘바로 미로 정원으로 나가.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나 경비도 좀 서고.’

해가 뜨자마자 침실로 쳐들어온 페드로가 그들에게 통보했다. 반발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형의 권위에 눌려 투덜거리며 나왔더니 세상에, 에스메랄다가 있다!

안달복달,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미로의 중앙을 배회하기 시작한 건 몇십 분 전이고, 에스메랄다에게 자꾸만 손을 뻗는 놈이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몇 분 전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접근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페드로가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천사 깨우면 죽인다.]

형이 아우들에게 하는 말치고는 삭막했지만, 원래 사내 형제들은 이렇게 크는 법이다. 오멘과 페르멘은 삐죽거리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레스와 페드로에게 얻어맞으며 자란 그들은 아직 형들에게 대들 용기가 없었다. 일단 페드로가 아니었으면 에스메랄다를 볼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 오늘은 특별히 우리가 용서해 줘야지, 같은 변명 아닌 수긍을 하면서.

그들은 서둘러 각자의 외투를 벗어 페드로에게 내밀었다. 페드로가 그걸 에스메랄다에게 덮어 주는 사이 쌍둥이는 그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아르페시스에게 해야 하는 인사도 건너뛴 채 두 사람은 군사 목적에 따라 적진 잠입 시에나 사용하는 수신호를 엉뚱한 곳에 쓰며 파닥거렸다. 그들의 손에서 그려진 철자를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귀여워.]

[예뻐.]

[나도 안아 볼래.]

페르멘이 간절한 시선을 보내며 팔을 뻗었지만, 단호한 페드로에 의해 차단당했다. 페드로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페르멘이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치사하다. 80여 일 만에 만난 건데 페드로 혼자 에스메랄다를 독차지하고 있다니. 부친은 에스메랄다랑 얘기를 하지 말라는 이상한 명령이나 하고.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항하기엔 테노리엘 백작이 너무 무섭다. 엄한 부친은 대체로 자식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아버지는 대체 왜 그러시냐고.]

[리디는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말도 못 붙이게 하고.]

[이유라도 명확히 알면 좋겠는데.]

[나도 영지로 따라가고 싶었다고.]

그런고로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렇게 뒤에서 한탄하는 것이 전부였다. 뭐… 불만이 나날이 쌓여 가고 있는 상황이라 오래 참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페드로가 시무룩하게 풀이 죽은 쌍둥이를 보며 픽, 웃었다.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힐끔거리면서 풀이 죽어 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 멀리서나마 얼굴 한번 보게 해 주려고. 에스메랄다는 무력적인 측면에서 힘이 없는 철저한 약자다. 그러니 쌍둥이의 실력이면 재주껏 숨어 볼 수 있을 터. 겸사겸사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이 없나 경비도 좀 세우고.

에스메랄다가 잠든 직후에만 해도 이렇게 가까이 부를 생각은 없었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도 자지 못하는 그녀가 기적처럼 잠든 것인데, 자칫하다 깨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애처로운 눈으로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두 사람 역시 그의 동생인지라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부스럭거리지 마. 깨겠다.]

페드로가 다시 페르멘의 이마에 꿀밤을 놔 주며 의미를 전달했다.

[조용히 하고 있잖아.]

페르멘이 입술을 삐죽이며 손짓하자 오멘이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근데 우리 실전에서도 안 써 본 수신호를 여기서 써 보네.]

[뭐, 이렇게 연습하는 거지.]

그래도 매일 붙어 다니는 쌍둥이라 그럴까? 두 사람은 곧 저들끼리 대화를 하며 에스메랄다를 구경하는 데 심취했다.

[근데 올해는 남부에 안 가고 바로 영지로 와서 좋다. 리디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성벽 위에서 할 일 없이 전투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루해.]

[지금 남부 상태가 어떤지 몰라? 그게 할 말이냐?]

[남부가 그렇게 된 게 잘됐다는 의미가 아니잖아.]

페드로는 두 동생의 대화를 가만히 바라보며 잠든 에스메랄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바로 깨워 줄 생각이었다.

[넌 진짜 생각 없이 말하는 거 고쳐야 한다고.]

[난 그냥 바로 리디를 보러 온 게 좋다는 의미였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페드로는 자신의 품에서 꼬물거리는 에스메랄다를 내려다보았다.

“우음…….”

미간이 찌푸려진 게… 조금 더 재워야 하나, 깨워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었다. 페드로가 보기에 에스메랄다는 성장기에 필요한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런 기회가 많을 것 같지도 않아서 몇 분만 더… 라는 생각을 할 무렵.

“으…….”

에스메랄다의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하자 페드로는 그녀를 깨워야 함을 직감했다.

[가, 빨리, 데리고.]

페드로의 손가락이 맞은편에서 멀뚱멀뚱 앉아 있던 아르페시스를 가리켰다. 그에 페르멘과 오멘이 툴툴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드로가 건넨 외투를 챙긴 채 쌍둥이가 양쪽에서 아르페시스의 팔을 붙들었다.

“아?”

아르페시스가 얼빠진 소리를 내는 사이, 쌍둥이는 이미 그를 번쩍 들어 페드로의 시야를 벗어났다.

“천사야.”

그들이 사라지자 페드로가 에스메랄다를 불렀다. 울면서 깨어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필요할 때 깨워 주겠노라 약속하기도 했고. 아예 못 자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이런 쪽잠이라도 자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천사야, 일어나렴.”

그 부름에 에스메랄다가 흠칫 몸을 떨며 눈을 떴다. 품 안에 기대어 있는 작은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지만 거칠어진 숨소리도. 대체 그녀는 어떤 꿈속을 헤매기에 이토록 힘들어하는 것일까? 페드로는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삼킨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곤히 잘 자더구나. 종종 이렇게 낮잠을 자는 것도 좋겠어.”

낮잠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그녀의 수면 시간을 생각하면 문제 될 건 없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더 재워야 할 상황이다.

“오라버니……?”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누군가를 부른다기보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걸 느꼈기 때문에 답을 하는 페드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잠겨 있었다.

“그래.”

“오라버니…….”

“그래, 나는 여기 있다.”

옷깃을 붙들어 오는 손길에서 절박함을 보았다.

페드로는 욱신거리는 심장의 통증을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밖으로 꺼내 들어 토로하지 못한 감정은 속에서 응어리가 되어 간다. 페드로는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한참 동안이나 숨을 고르는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에스메랄다의 여린 등을 토닥이던 그는 자주 찾지 못한 신을 찾아볼 정도로 간절했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의존하지는 않으려 했던 페드로가 기도를 올려 볼 만큼. 그는 신이 자신에게 허락해 준 축복을 모두 에스메랄다에게 전해 달라고 간청했다. 부디, 그리하여 그의 작은 누이가 한 번이라도 더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사는 것에 바빠 성실하지 못했던 신도의 기도를 어디까지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바라 본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건만, 페드로는 나아지는 것이 없는 현실 앞에서 무력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 * *

믿기지 않았지만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수면을 취했다. 고작 몇십 분이 전부겠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꿈속의 처형대에 묶인 직후 깨어나서인지 평소보다 나른한 상태였다. 이렇게 자면 조금 더 평온한 수면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악몽의 존재를 아는 페드로에게 종종 이렇게 깨워 달라는 부탁을 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나른한 상태에서 어린아이처럼 페드로의 손을 잡은 채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직후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페드로가 열어 둔 창문을 타고 들어온 것인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작은 티 테이블 위에 뜻밖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전서구였다.

함께 돌아온 페드로가 문을 닫았고 그녀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 일거리를 가져온 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서신이 왔으니 답을 써야 할 터. 그는 에스메랄다가 서신을 확인하는 동안 종이와 깃펜을 준비해 줄 생각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당장에 그 전서구가 어느 지역으로부터 왔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무의미한 노력이었으니, 테이블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전서구의 깃털을 확인한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가져온 조련석은 6개. 북부, 동부, 남부, 중부의 관리자들에게 준 것과 백작 성의 전서구 방에 놓아둔 것, 그리고 루그레디안에게 준 것이다. 백작 성에서 대기 중인 전서구는 이번을 위해 특별히 검은색으로 깃을 물들여 두었다. 그러니 6개 중 마법 처리로 깃을 물들이지 않은 전서구가 올 만한 조련석은 하나뿐이다.

“테몬 후작…….”

방 한쪽에 있는 다용도 서랍에서 물건을 꺼내던 페드로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을 듣고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 서 있는 그녀는 이미 전서구의 발통에서 서신을 꺼내 들고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진 글귀를 훑는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부는 잘 전해 받았소. 그대와 내가 쓸데없는 말을 돌리고 비틀어 계산을 해야 할 사이가 아닐 것이라 믿으며 묻겠소. 어떻게?

루」

역시, 황도의 뒷골목에 사람을 보내 정황을 살핀 것은 루그레디안이었구나. 에스메랄다는 그의 반응에 전율하며 몸을 돌렸다. 답신을 보내야 할 테니까.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깃펜과 종이를 내미는 페드로를 보며 픽, 웃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편안한 수면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의 반응까지. 지금 그녀의 기분은 라그나를 손에 넣었을 때만큼이나 좋았다.

“감사해요.”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내민 것을 받으며 티 테이블 위에 허리를 숙이고 서둘러 글을 썼다.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 그녀는 안달이 난 스스로를 드러낼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어떻게’보다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 있을 텐데요?

디」

루그레디안이 충분한 시간을 둔 후에야 그녀에게 연락을 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뒷골목을 언급한 그녀가 정말로 그만한 노력을 들이고, 일을 성사시킬 실력과 저력이 있는지 확인한 것일 터. 말 몇 마디를 했다고 돕겠노라 달려들 만큼 쉽고 가벼운 일이 아니기에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해가 수용이 될 수는 없는 법. 계산을 하지 말자고 했으며 이미 그부터가 그녀의 실력과 노력을 계산하고 다가온 것이니 지적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 루그레디안이 정말로 그녀와 함께하길 원한다면, 지금 보낸 서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숙이고 들어와야 할 것이다.

서열 정리를 하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결국 에스메랄다가 요구한 선행 질문은 ‘어떻게’보다 ‘누가?’라는 것이 된다. 주도자는 어디까지나 에스메랄다, 그녀다. 세력 내에서 어린 나이를 들먹이며 트집을 잡고, 견제하는 등의 기 싸움이 없어야 한다. 이미 아브람 백작과는 한 차례 겪은 일이다.

“당신은 몇 번째 기회를 잡을까?”

백작은 그녀가 보낸 네 번째 서신을 받은 후 숙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에스메랄다가 짧은 글귀의 서신을 쓸어 보았다. 질문을 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녀는 루그레디안을 잘 알고 있다. 서열 정리는 이번 한 번으로 끝이리라.

어서 빨리 답이 돌아오길 바라며, 에스메랄다가 전서구를 날렸다. 창가에 서 있는 그녀의 손에서 반짝이는 빛이 나며 루그레디안이 보내온 서신이 불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무척이나.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페드로는 답을 보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를 때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오물거리는 버릇이 있다. 페드로는 유년기의 그녀가 케이크를 처음 먹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포크를 문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을 꼭 감은 채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는 정말로 작은 천사, 그 자체였으니까.

페드로는 쓰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분명 기분이 좋을 때의 버릇임에도 에스메랄다의 얼굴에선 미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 * *

한편, 페드로의 명령과 쌍둥이의 이행으로 쫓겨난 아르페시스는 꽤 난감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저도요.”

각기 왼쪽과 오른쪽을 짝다리로 짚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쌍둥이로부터 나온 말이었다.

“……그래.”

아르페시스는 테노리엘의 피에 상대방의 신경을 긁는 무례함의 기질이 흐르는가, 잠시 고민했다. 페드로는 물론, 눈앞에 있는 쌍둥이도 속을 살살 긁어 먹는 무례함이 아주 일품이다. 뭐, 아주 잠시 동안만. 그는 에스메랄다의 완벽한 예법과 우아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떨쳐 냈다. 어쩌면 테노리엘의 사내들에게만 그런 피가 흐르는 걸지도? 아니, 그렇지만 아레스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는데…….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저도요.”

그렇게 아르페시스가 헛생각을 하며 쌍둥이를 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눈썹을 삐죽거리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꼭 거울처럼, 서로 대칭되는 방향에서 저러니 좀… 오멘과 페르멘은 일란성 쌍둥이라 똑같은 그림 두 점이 꿀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일전 황성에서 만난…….”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헹, 하는 콧방귀 소리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이미 페드로라는 선행 학습을 했다. 그는 지금과 유사한, 그리하여 오묘한 무례에 적응한 상태였다. 덕분에 당황하는 대신 그저 눈을 끔뻑거리는 것으로 반응을 끝낼 수 있었다. 무난하다 못해 평온한 아르페시스의 반응에 쌍둥이가 이를 악물며 그를 쏘아보았다.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지 말래도 할 분위기인지라 그는 빨리 대답해 버리고 가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왜 리디를 자꾸 만지려고 하셨는지?”

“그거 굉장히 무례한 행동인데 말이죠.”

아르페시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형이 하지 말라고 손을 밀어내 드렸는데.”

“그걸 무시하시고 계속, 계속 리디에게 손을 뻗으신 이유가?”

분명 따로 말했는데 왜 말이 이어지는 것 같지? 아르페시스는 쌍둥이가 갑자기 서로를 돌아보더니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치는 걸 보았다. 또 왼쪽과 오른쪽. 저들은 저걸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 혹시 서는 자리를 정하고 다니는 게 아닐까? 그 전에 누가 페르멘이고, 누가 오멘이지? 에스메랄다와 페드로는 이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을까?

“대답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대답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이번에는 동시였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이 이유 모를 손바닥 치기가 반복되었다. 그걸 보면서도 아르페시스의 입은 꾹 잠겨 있었다. 페드로라면 몰라도, 두 사람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페드로의 눈동자에는 언짢음 이상의 것은 없었던 반면, 이 쌍둥이의 청록색 눈동자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걸 물어보는 것 자체가 그가 에스메랄다와 같은 장소에 있던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는 건데…….

페드로가 갑자기 손짓을 할 때는 의문. 그 손짓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쌍둥이를 보고는 혼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에스메랄다를 차지하려 드는 쌍둥이의 모습에서는 언짢음. 그리고 페드로의 축객에 반응을 보이지도 못하고 끌려 나왔을 땐 억울함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황까지. 아르페시스는 잠시간 본인이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고찰을 해 보았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이리저리 날뛰는 생각과 의문 속에서 결국 선택한 건 발뺌이다. 그녀와 닿고 싶어서, 그녀를 만져 보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고 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르페시스가 지난 16년간 갈고닦아 온 생존 본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앙?”

“하앙?”

황자에게 보이기 무례하다 못해 건방진 작태였지만 아르페시스에겐 그들의 행동을 지적할 여유가 없었다. 그건 상대방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르페시스는 쌍둥이가 다시 손바닥을 마주치는 것도 모른 채, 시선을 피하며 딴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잘못 본 것 같군.”

분명 다 자란 페드로와 있을 때와 달리 체격에서 밀리지도 않건만, 쌍둥이와 그는 셋 다 정말 고만고만한 체격인데 왜 이렇게 숨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아르페시스는 빨리 쌍둥이에게서 빠져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 나는 슬슬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돼서, 이만.”

재빨리 쌍둥이에게서 몸을 돌린 그는 성큼성큼 미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뒤에 따라붙은 이들 때문에 벗어나는 건 실패했지만.

“아니, 전하.”

“저희가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까?”

“대답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전하?”

쉼 없이 주고받는 말에 아르페시스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대답을 들어서 뭘 하겠다고 이러는 것인지,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조잘조잘, 말로 그를 괴롭히던 쌍둥이의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야!”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부름에 아르페시스가 흠칫, 멈춰 섰다. 앞에서 그를 건들 만큼 간 큰 이들은 없었기에 귀족들은 대부분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를 적자로 인정한 건 황제였고, 귀족들은 그런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그런데… 야? 그를 경멸하는 황태자에게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부름이었고, 호칭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아르페시스가 굳어 있는 사이 쌍둥이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보냐?”

“말 좀 놓았다고 불쾌하냐?”

이런 시정잡배 같은……. 아르페시스는 우아함의 상징 같은 에스메랄다와 이들이 한 핏줄임이 믿기지 않아 얼굴을 구겼다. 그런 그의 반응에 드디어, 쌍둥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 경고하는데,”

“리디 주변에 얼씬거리지 마라?”

“어디 감히,”

“우리 보물한테 눈독을 들여.”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손바닥을 마주쳤다. 기가 찬 아르페시스가 터트린 헛웃음 뒤로 페르멘의 삐죽거림이 이어졌다.

“사생아가 노릴 걸 노려야지.”

아르페시스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무언가 뾰족한 것이 심장을 찌르고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오멘이 사나운 표정으로 페르멘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야!”

노성과 함께 오멘의 손이 페르멘의 뒤통수를 때렸다.

“너 진짜,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하라고!”

페르멘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 실수…….”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쌍둥이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 처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저기… 그게…….”

“사생아가 그대들 주변에 얼씬거리는 것도 불쾌하겠지.”

오멘이 앓는 소리를 내었고 페르멘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적인 시간에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마지막일 것이다. 약속하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아르페시스는 다시금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자신이 사생아인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모친은 황제의 하룻밤 유희 상대였을 것이고, 본처인 황후가 보기엔 천하고 난잡하게 몸을 굴리는 창녀나 다름없었겠지. 배덕함과 부정의 상징이 바로 사생아의 존재 그 자체였다.

이를 악문 채 본성으로 돌아온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는 페르멘이 던진 말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에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다만 이제껏 아닐 것이라 밀어내 온 가정이 성큼 다가와 버렸기에 복잡한 것뿐이었다.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를 걱정해 주던 에스메랄다가, 다시 만날 날을 그리겠다던 그녀가 정작 이곳에서 다시 만난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 만약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긴 했으나, 결국 사생아라는 사실 때문에 멀리하려는 것이면?

이미 정해져 버린 부모와 태생은 바꿀 수가 없는데 정말로 그 행동의 이유가 이것이라면 어찌해야 하지? 한번 발을 들인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잠들어 있던 당시 페드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빨리 연회가 시작되면 좋겠다고.

* * *

결국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준비해 왔다는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쇄골과 목을 덮은 레이스에, 목 중앙에는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는 옷이었다. 그 아래로 가슴팍에는 에메랄드와 호박, 루비 같은 온색 계열의 보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금색 실과 적색 실이 덩굴과 테노리엘의 문양을 그리며 옷 전체로 퍼져 나갔다. 소매가 다른 옷들보다 길어 손등을 덮었고,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하늘거리는 천은…….

아무리 봐도 페드로의 취향으로 범벅된 옷이었다. 그가 평소 그녀를 부르는 그 민망한 호칭 그 자체랄까? 이 정도 옷을 제작하려면 최소 보름 전에는 주문을 넣었어야 한다. 어쩌면 연합군이 출정할 때부터 계획한 것일지도.

에스메랄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옷을 벗어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렇다고 진짜 벗어 던지자니…….

‘천사에게 잘 어울릴 텐데…….’

이 옷을 본 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챙겨 온 것을 입겠다고 했더니, 축 처져서 웅얼거리던 페드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귀나 꼬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게 있기라고 한 것처럼 풀 죽은 모습이라니. 그 모습이 가식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걸려 줄 수밖에 없는 건 그녀의 응어리를 풀어 준 것이 페드로뿐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꼴로 정리하겠다니…….”

감정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모습이 어찌 달갑겠나.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폭 내쉬며 머리를 손보려던 후작 성의 시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에스메랄다는 현재 디아나를 위해 전속 시녀 자리를 비워 둔 상태였다. 해서 후작 성까지 따라온 시녀가 없고, 그에 루이자가 그녀의 치장을 위해 시녀를 보내 준 것이다.

등허리에 있는 하늘거림 때문에 머리를 올리는 게 어울리겠지만 에스메랄다는 머리를 푼 채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아무리 페드로 때문에 입었다지만, 등의 이 천 자락들은 정말이지 뜯어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가리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신구는 평소 차고 다니는 마도구로 족했다. 더 이상 손볼 만한 것이 없자 에스메랄다는 거울 앞을 벗어났다.

“역시.”

침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드로가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색의 연회복을 차려입은 페드로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영애.”

손등에 내려앉는 온기와 찬사에 불편했던 심기가 조금 사그라지는 걸 보면, 그녀도 여인이긴 한 모양이다.

“머리는 왜 올리지 않고?”

“절대 올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너에게 어울릴 텐데…….”

휘둘리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에스메랄다는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럼 등 자락에 달린 것들을 죄다 뜯어 버릴 거예요.”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효과가 있었다. 페드로는 더 이상 그녀의 치장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모시겠습니다, 영애.”

키 차이가 훤칠하다 못해 과해 에스코트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저 오라비의 손을 잡고 가는 어린아이 정도의 모습일 터.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순순히 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페드로에게 에스코트를 받지 않으면 다른 직계 형제나 부친에게 받아야 할 테니까.

공식 연회도 아니고, 참석 인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입장자의 호명 같은 일부 절차는 생략되었다. 연회를 한 번 여는 데 작은 마을 하나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 든다. 간소하긴 해도 이 정도면 후작이 꽤나 무리를 한 편이다. 테노리엘이 지원한 건 식자재뿐이니까.

에스메랄다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 자연스럽게 홀에 합류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연회의 주인공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그다음은 주최자에게 얼굴을 비추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연합군 인사들을 만나 보는 게 좋겠지. 어디까지나 연합군을 위한 연회이니 최소한의 명분은 챙겨야 했다.

그리고 몇 없는 서부 영주들을 찾아가 이번 징수 물자 규모나 이후 면세 규모에 대해 떠보는 것으로 서부 정세를 살피면 될 것 같았다. 드디어 생긴 일거리에 에스메랄다가 활기를 되찾았다. 할 일 없이 침묵한 채 쉬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에스메랄다는 연합군 인사들과 함께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갔다.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건넸음에도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어야만 했다. 사교계에서는 이런 식의 반응이 상대방을 무시하고 모욕을 주는 행동에 가까웠다. 인사를 받을 가치조차 없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르페시스가 그런 의도로 행동한 건 아니겠지만 에스메랄다는 의도적으로 머릿속에서 그를 배제한 채 다른 생각을 이어 갔다. 연합군, 마수, 영지, 세수, 이후 면세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고 있었더니 오래지 않아 그의 답이 돌아왔다.

“그, 그래… 미안하군. 내가 잠시 홀… 아니, 그러니까…….”

아르페시스의 손은 계속 움찔거리며 잘게 떨고 있었다. 스치듯 그것을 본 에스메랄다가 서둘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머릿속에서 그를 쫓아내는 게 그녀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였다.

“다시 한번 연합군의 승전보를 경하드립니다.”

“……고맙군. 이 찬사를 연합군에서 함께한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돌려야겠지.”

“그들 역시 전하를 따를 수 있음에 영광이었을 겁니다.”

입에 발린 찬사와 무난한 답변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아르페시스의 얼굴 대신, 턱이나 목에 닿아 있었다. 나름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럼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그래, 그대들도 즐거운 시간 보내게.”

그에게서 등을 돌린 후에야 스스로가 숨을 죽인 채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몸에 긴장을 풀고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으니까.

“후작님을 뵈러 갈까?”

페드로는 그런 그녀의 상태를 못 본 것처럼 행동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굳이,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곧장 후작 내외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후작님, 후작 부인.”

페드로가 후작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대화의 서두를 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부인.”

“젊은 분께 찬사를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나이가 들어도 여인은 여인인가 봅니다.”

“시간이 흘러야만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는 법이지요.”

“어쩜, 경은 후에 부인에게 예쁨받겠어요. 후작님은 통 그런 칭찬을 해 주지 않는단 말이죠.”

노부인의 투정에 쿠베트 후작이 헛기침을 하며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내 테노리엘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그대들이 식자재를 지원을 해 준 덕분에 숨통이 트였어. 영애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지.”

수만의 영지민들과 함께 고립된 채 보낸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연회 물자와 함께 쿠베트 후작 성으로 구호 물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넘치도록 많은 양은 아니었다. 그저 채소와 과일같이 고립된 상태에선 구하기 힘들었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인간의 몸은 다양한 것을 먹어 영양소를 맞춰야만 하니까.

“그것을 어찌 은혜라 하십니까. 늦은 대처로 더 빠른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지요.”

이걸 노리고 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참에 아직 인가가 떨어지지 않은 일을 슬쩍 부탁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호렌 남작은 북쪽으로 도주했으니 그의 주인인 쿠베트 후작에게 요구해도 충분하다. 메리와 세리의 영지 이주 요청 말이다. 후작이 테노리엘에게 우호적인 상태니 몇백도 아니고, 두어 명의 이주는 어렵지 않게 해 주리라.

“아, 그렇지 않아도 영애가 오면 하려던 말이 있었네.”

다행히도, 굳이 그녀가 그 말을 먼저 꺼낼 필요는 없었다.

“호렌 남작령에서 구조한 아이들 말인데.”

“아, 예. 기억납니다. 그에 대해 이주 요청서를 보내 드렸지요.”

방금 기억해 낸 사람처럼 능청을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아직 아이들이 어린 것도 있고, 후견인으로 테노리엘의 가신이 나서 주었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더군. 내 영지 복구다, 병력 검토다, 바빠서 이틀 전에야 보았어.”

“후작님께서 바쁜 건 모두가 아는 일인 것을요.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렌 남작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인 듯해 내 선에서 인가를 해 놓았네.”

“자르간 경에게 소식을 전해 주어야겠군요. 아이들을 가엽게 여기는 듯했으니 기뻐할 겁니다.”

“……아이들을 거둬 주었음에, 내가 고마워한다는 말도 꼭 전해 주게.”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무얼 먹었는지, 대충 눈치를 챘구나. 어쩌면 최초 발견자인 헤롤이 나서서 보호하려는 걸 보고 확신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꼭 전하겠습니다. 아,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한 가지 청을 더 드려도 되겠는지요?”

“……이주 요청 건에 대해서는 이미 손을 써 두었으니 걱정 말게.”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줄 아는 것은 물론,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기까지 한 사람을 상대하면 이토록 편하다. 그 아이들이 왜 이주를 했는지, 같은 의문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이주 기록을 지워 줄 모양이다. 세리와 메리는 쿠베트령에서 테노리엘로 이주한 게 아니라, 태생부터 테노리엘 출신이 된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말하기도 전에 단속에 들어간 후작에게 에스메랄다가 무릎을 굽혀 보였다.

“나 역시.”

빠르고 편한 대화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후작 내외와의 대화를 마쳤다. 세리와 메리의 일 때문에 속에서 치솟는 이 구역질은 내일 새벽이 되면 씻은 듯 사라지리라.

“영애, 테노리엘 영애!”

높은 톤의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는 통에 그 감각을 오래 곱씹지 않아도 되었다. 홀의 반대편에서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채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루이자였다.

“쿠베트 영애.”

“헤헤, 또 보네요.”

오찬 이후에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며 보았다. 그녀는 어제 말한 대로 정말 준비해 두고 에스메랄다를 초대했으니까. 대부분은 그녀가 말하고 에스메랄다는 얌전히 앉아 웃어 주는 게 전부인 시간이었지만.

“난 아버지를 좀 뵙고 오마.”

루이자가 나타나자 페드로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영애는 정말 인형 같네요. 아니, 천사 같아요.”

루이자는 뺨에 손을 얹은 채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달갑지 않은 단어가 에스메랄다의 입꼬리를 경직시켰다. 정말, 등에 달린 이 천 자락들을 죄다 뜯어 버리고 나왔어야 했을까?

“……고마워요. 영애도 아름다워요.”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속이 거뭇하다 못해 썩어 가고 있는 에스메랄다와 달리,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니 예쁠 수밖에. 사실 루이자는 에스메랄다에게 대화 상대로 어려운 이였다. 얼룩 없이 순수하고 밝은 모습도 그렇고, 그녀에게 내어 놓는 찬사가 모두 진심인 것도 그렇고, 세 치 혀를 놀려 답할 거리가 없으니 에스메랄다의 말문이 막혔다.

“전하는 뵙고 왔어요?”

“네, 영애는요?”

“저도 할아버지께서 채근하셔서 다녀왔죠. 아버지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달리 제정신인 분이라고 하셨는데… 생각보단 조금 어려운 분이더라고요.”

정치적 동맹도,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데 그녀의 말은 모든 것을 드러낸다. 그런 순진한 모습 때문에 루이자가 꺼려진다.

“표정도 별로 없으시고, 대답도 간결하시고. 대화를 하기 편한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전 긴장해서 벌벌 떨다가 왔다니까요?”

“그렇군요…….”

“그래도 대단하신 건 인정해야죠! 저랑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신 거잖아요?”

“네에…….”

“세상에, 그거 알아요? 전하께선 딱 두 번 빼고는 모든 전투에 참여하셨대요. 웬만한 상급 기사들보다 참여 전투가 많다더라고요. 전하 홀로 잡으신 마수의 수가 네 자리를 넘긴다던데요?”

쿠베트 후작과 달리, 루이자와의 대화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에스메랄다의 말을 짧아지게 만들었다. 본래 몇 명 되지 않는 서부 영주들을 만나 대화를 해 보려던 에스메랄다는 오래도록 루이자에게 붙들려 있었다.

대화를 끝내고 빠져나갈 만한 기회가 없었다. 루이자는 정말 쉬지 않고 말을 했으니까. 에스메랄다가 루이자에게서 풀려난 건 그녀들의 의사라기보단 상황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인사가 도착했다고 여긴 쿠베트 후작이 연회에 선율을 더했다.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선명해지자 하나둘, 홀의 중앙을 채우는 이들이 늘어갔다. 차가운 주류와 따듯한 음식들이 연회장을 장식했고 오늘 연회의 주최자와 주인공이 홀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들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쿠베트 영애, 한 곡 허락해 주겠나?”

에스메랄다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빠르게 시선을 치웠다.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영광입니다, 전하.”

금방 올게요! 또 얘기해요! 라고 속삭이며 멀어지는 루이자를 보며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지었다. 이게 피로 때문인지 답답함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마주 선 채로 춤을 추기 시작한 두 사람을 잠시간 지켜보던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 일을 하러 가자. 그녀가 향한 곳에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연합군의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있었다.

* * *

연회의 참석 명분도 채웠고, 각 영지에 돌아갈 면세 규모에 따라 이후 그들의 행보를 떠보는 일도 마쳤다. 백작 성에 돌아간 후에 정보나 추측을 테노리엘 백작에게 보고하면 연회 업무는 완전히 끝난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그녀는 아직 어린 편이라 일찍 자리를 비워도 이상할 것이 없고.

에스메랄다는 곧장 후작 내외를 찾아가 먼저 자리를 떠나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이후 홀을 나서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던 그녀의 앞에 페드로가 불쑥 나타났다.

“쉬러 갈 생각이니?”

“네, 피곤해서요.”

그의 손을 잡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에스메랄다는 몇 걸음을 함께 옮긴 후에야 그의 손을 잡고 있음을 인지했다. 당장 손을 떨쳐 내는 대신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2층, 3층, 계단을 올라 인적이 드물어졌을 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페드로가 갑자기 멈춰 섰다.

“오라버니?”

에스메랄다의 곁에서 한쪽 무릎을 대고 자세를 낮춘 페드로가 말했다.

“도주가 나쁜 것은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순간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지.”

“……네?”

“그러니 외면하지 말고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렴. 내칠 것인지, 품을 것인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의문에 휩싸인 에스메랄다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는 사이, 페드로는 그녀의 뒤로 손을 뻗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힘에 밀려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오라버니?”

“오래는 안 됩니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자신의 뒤를 보고 하는 말을 들은 후 몸을 움찔 떨었다.

“……알겠다.”

곧장 따라 나온 대답을 듣는 순간, 그녀는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고개가 삐걱거리며 움직였고, 그녀는 자신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르페시스를 발견했다. 그녀가 홀을 떠날 때 아르페시스가 그곳에 없었던가? 홀에서 그의 모습을 보지 않도록 노력해서 모르겠다.

복도에서 희미하게 흘러들어 오던 불빛은 문이 닫히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은은한 광채를 내는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버렸고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놀랐다면 미안하다.”

“…….”

“그대와 따로 얘기를 해 보고 싶어서 페드로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좁혀 온 거리는 어느덧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손을 감싸 오는 온기가 뜨거웠다. 에스메랄다는 거부의 뜻으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울 것 같은 얼굴로 놔주지 않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모든 동작을 멈춰 버렸다. 그녀는 그 순간 심지어 숨을 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잠시만, 잠시만 내게 시간을 내어 달라.”

후작 성에 들어와 그를 보았던 때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금 기어 올라왔다.

“내가 그대에게 무언가 실수를 했는가?”

“…….”

“혹시 지난번에 보낸 서신 때문에 꺼림칙해 그러나? 한 번뿐이었다. 딱 한 입 먹은 것이 전부였고 앞으로는 먹지 않겠다.”

불안감의 위로 물음표가 그려졌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남부에서는 식용으로도 사용한다기에, 호기심에 딱 한 번 먹어 보았을 뿐이다.”

에스메랄다가 받은 그의 서신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의문 덕분에 불안감을 밀어낸 에스메랄다가 손을 잡아 뺐다. 이번에는 그가 순순히 놔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마지막 서신에 식용 마수 얘기를 적었는데, 받지 못했는가?”

“받지 못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자르간 경에게 부탁했는데…….”

아마도 아직 그녀에게 도착하지 않은 서신에 적힌 내용인가 보다. 마기에 잠식된 마수 중 일부는 인간이 먹을 수 있어서 남부에서 실제로 식자재로 사용되는 종이 있다. 아르페시스가 그걸 먹어 본 모양인데… 왜 그 얘기를 여기서 꺼낸 것이지?

“그간 정신이 없었을 테니 아직 발송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에스메랄다는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러면서도 거리를 벌리고자 했지만, 그는 그것을 기만하게 눈치채고 다시금 성큼 다가왔다. 아르페시스의 행동은 마치,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럼… 그것이 아니면 대체 왜?”

“…….”

“나는 영애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금의 친분을 쌓았다고 여겼다. 그대에게 답신을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는가? 나를 걱정한다는 글귀를 보고 내 심장이 얼마나 벅찼는데.”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조금은 거친 그의 글씨를 쓸어 보며 웃어 보았던 기억도, 그에게 보낼 답신을 공들여 쓴 기억도, 그 당시의 모든 것이 지금은 그녀를 방해하고 있다.

“그런데 기적처럼 다시 만난 그대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초조하다. 대체 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에 자물쇠가 채워지기라도 했나? 어쩌면 그녀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밖에 없는 복도에 숨 막히는 침묵이 깔렸다.

“혹시…….”

아르페시스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꽉 움켜쥔 그의 주먹이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지금 그의 말을 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직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대가 나를 피하는 이유가…….”

마른침을 삼킨 아르페시스가 눈을 꾹 감으며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사생아이기 때문인가?”

지금까지 해 온 생각이 모조리 사라지고 순식간에 울화가 치솟았다. 그가 이 버릇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에 속이 상했다.

‘혼인 생각은 없으십니까? 전선 안정화를 위해서라면 한번 시도해 볼 법한 일입니다.’

‘과한 상대가 아니라면 황제도 방해를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직 아르페시스와 그렇게 가까워지지 않았을 때 물어보았다. 그와 혼인으로 묶어 전선을 지원하는 데 끌어들일 만한 귀족들이 꽤 보였으니까.

‘나 같은 사생아에게 여식을 주겠다는 이는 없을 텐데?’

그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찍혀 버린 낙인. 에스메랄다는 종종 그 단어를 입에 담은 아르페시스의 버릇을 정말 싫어했다. 그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녀는 테브라를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보긴 하지만 경멸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경멸의 대상은 선대 벨베크 백작이다. 함부로 몸을 굴려 정조를 지키지 못한 건 선대이지 후손이 아니다. 죄를 묻고 질타를 받아야 하는 건 황제고, 그의 행동에 휘둘려 태어난 아르페시스가 비난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나오는가 말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결정을 내렸든 간에,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에게 가지는 존경심만은 부동의 감정이었다. 그는 진실로 훌륭한 인물이다. 에스메랄다가 황제의 부정과 악행에 박수 치며 찬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아르페시스를 낳았다는 것이 될 정도로. 그녀의 존경은 확고했다.

그런데 사생아, 사생아, 그놈의 사생아! 저 버릇은 여전하구나! 에스메랄다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순식간에 치솟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건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

“부정과 배덕의 죄는 황제가 지은 것이지,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심장이 어그러지는 것 같아서 언성이 높아졌다. 그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넌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로 폄하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아르페시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걸 보고야, 아차 싶었다. 말투도, 내용도. 목적을 위해, 그를 정리하고 거리를 벌리려면 차라리 조금 전 그 말에 수긍하는 게 옳았다. 상대방이 오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수월한 방법이기도 한데, 그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했다. 그 행동으로 인해 얻을 이득보다, 아르페시스에게 돌아갈 상처가 더 무겁게 느껴졌으니까.

“그리 말해 줘서… 고맙다.”

홍조를 그리는 아르페시스의 뺨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거기에 붙들리기 전에 다급히 몸을 돌렸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매정히 돌아서지 말라.”

그녀의 팔을 붙든 아르페시스에 의해 다시금 돌아보아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에스메랄다의 도주는 실패했다. 열기가 가득한 은회색 눈동자를 다시 마주했을 때, 그녀의 발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내게 굳이 그런 말을 해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걸 정리할 수 있다고?

“내게 이리도 다정히 대해 주는 이유가 있을 테지?”

열기와 희망에 범벅되어 직시해 오는 은회색 눈동자는 그녀를 버겁게 만들었다.

“제발, 대답을 좀…….”

말을 하다 말고, 아르페시스가 이를 앙다문 채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서로의 숨결이 부딪쳐 엉켜 들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채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걸까? 몇 번이나 심호흡을 거친 아르페시스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닿아 있지 않았음에도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심장의 박동 소리. 이건 아르페시스의 것일까, 그녀 본인의 것일까.

그가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에스메랄다의 숨이 얇게 조여지면서 가늘게 떨렸다. 너무 가깝다. 그녀의 코앞에서 마른침을 삼킨 아르페시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대답을 잘 하지 않아. 이리저리 피해 가면서 내 애간장을 태우기만 해.”

그녀의 숨결만큼이나 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또한 그대는 내게 웃어 주었고, 걱정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에게 훌륭하다는 칭찬까지 해 주지 않았나.”

허공을 타고 다가온 손이 에스메랄다의 뺨에 닿았고 아르페시스의 온기가 그녀를 파고들었다. 홀로 품은 감정도 아니고, 이렇게 답이 돌아오는 상황에서 정리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니. 진정으로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방금 전에 나를 위로해 주고 훈계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모자란 숨을 들이쉬기 위해 벌어진 입술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나에게 허락을 해 주고 있다.”

그녀의 패배를 선고하는 물음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괴로워. 이게 내 헛된 기대로 인한 착각인지, 그대의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미칠 것만 같다.”

“…….”

“나는 이미 그대에게 심장을 주어 버렸기에, 그대가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희망을 가졌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듯,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눈치챈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뺨을 대신해 입술을 쓸어내렸다. 조금은 거칠고 딱딱한 그의 손가락이 치아를 밀어내고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차지해 버렸다.

“내가 무엇을 숨기는 데 능하지 못해 아마 알고 있겠지만… 정식으로 고하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다. 그 말이 떨어짐으로써 하게 될 모든 생각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한, 듣고 싶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갈망했던 그 말을 원하는 것 역시 그녀의 본심이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해. 내 심장은 이미 그대의 것이다.”

“…….”

“그대는 어떠한가? 나는 그대에게 어떤 존재지?”

에스메랄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입술을 쓸어내리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의 호흡이 곧 끊어질 것처럼 흔들리게 되었을 무렵, 몇 번이고 떨리는 입술을 벙긋거리던 아르페시스가 다시금 에스메랄다를 재촉했다.

“그대가 대답하지 않으면 내 멋대로 믿을 것이다. 내가 사생아라 밀어내는 것이라고, 그래도 되는가?”

비겁하게 협박이라니!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게 싫다면 대답을 달라.”

머리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큰 아르페시스가 문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몰아붙였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데, 그대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공기는 희박해지기 시작했다. 서로가 거친 숨을 달래기 위해 빨아들이기 바빴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헛된 기대인지, 합당한 희망인지… 제발, 내게 알려 줘.”

이 간절한 애원을 떨쳐 낼 수 있는 여인이 어디에 있을까. 고작 하루 전에 다시 마주 본 그의 눈동자를 보고 직감했으나 외면했던 것을 인정할 때가 왔다. 저항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음에도 결국 그녀에게 도래한 것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에스메랄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저항했고 벗어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건 분명한 실패였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녹안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실패한 이의 오기인지, 반항인지, 그도 아니라면 원하지 않았던 희망인지.

분명 선을 그었다. 외면하고자 노력했다. 그녀가 했던 행동들의 의미를 아르페시스가 모를 리 없다. 문제는 몇 번이고 그녀가 흔들렸다는 거겠지.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애매하게 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면서까지 확답을 받고 싶었던 거겠지.

마주친 시선 속에서 곧 스스로에게 떨어질 선고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아르페시스의 호흡이 일순 멈춰 버렸다. 그녀의 노력을 외면한 채 계속 손을 내민 건 아르페시스 본인이다. 다가올 것이 분명한 두 사람의 비극을 막기 위해 노력한 그녀를 방해한 것 역시 그다. 화가 난 것인지, 기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도…….”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눈동자 속에서 전율을 발견하고 격한 숨을 들이쉬었다. 놔주고자 했으나 어리석은 사냥감은 결국 맹수의 발치 아래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맹수는 제 앞으로 직접 걸어와 무릎 꿇은 사냥감을 놔줄 정도로 자비롭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그를 향한 마음을 잘라 낼 수 없음을 깨달아 버린 이상, 사라진 시간과 달리 그가 떠나 버리지 못하도록 완전히 옭아매어 둘 것이다. 훗날 아르페시스가 그녀가 해 왔던 모든 일을 알게 되어 떠나고자 해도, 지금의 이 순간을 후회하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자 해도,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라.

“사랑, 해.”

억누르고, 짓밟고, 잘라 내기 위해 수백, 수천 번 노력했으나 결국은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힘들었다.

뚝뚝 끊어진 말은 호흡이 부족해서이기도 했고, 꺼내 든 것이 너무 무거워서 한 번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기어코, 10여 년 전부터 홀로 품어 왔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냈고, 동시에 커다란 온기가 그녀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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