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7화 (17/45)

제17장

성과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린 문을 지나 나타난 이는 당연히, 페드로였다. 에스메랄다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그를 반겼다.

“다녀오셨어요? 뿔피리 소리가 들리…….”

“바쁜데 괜히 마중을 나올까 싶어 불지 말라 했다.”

그의 귀환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중을 나가지 못했는데, 그가 그리 말해 주니 따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일찍 오셨네요.”

이제 해가 뜬 지 두어 시간이 지났다. 오늘 저녁쯤에나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건만, 아무래도 물자 이송을 담당하는 병력과 따로 귀환한 모양이다.

“네 생일이잖니.”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페드로의 왼손에는 금색 빛의 라퓨나가, 오른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천사야.”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이마에 내려앉은 페드로의 입맞춤을 받으며 답했다.

“감사해요.”

“내가 준비한 선물이다.”

그는 씩 웃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거기엔 약초를 갈아 만든 영양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선물이라고요?”

이 쓴 약제가? 설마,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매일 먹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 다 네 건강을 생각해 준비한 것이다.”

페드로는 그녀가 먹는 양이 지나치게 적다는 사실을 꼬집고 있었다.

“오라비의 마음이라 여기고, 하루에 하나씩 꼭 챙겨 먹으렴.”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쉬면서도 동그란 그것을 꺼내 입에 넣었다.

“착하구나.”

입 안에 감도는 떫고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이건 전하께서 보내셨다.”

그녀의 몸집만 한 크기의 라퓨나 꽃다발. 아르페시스를 언급하는 페드로 때문에 순간 에스메랄다의 행동이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드로는 꽃다발을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서신도 함께 주시더구나.”

페드로가 품에서 꺼낸 서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에스메랄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중요하지 않은 선물이니 눈앞에서 치워 버리라는 그 간단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품 안 가득 그것을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살짝 떨리는 그녀의 손길에 따라 꽃잎이 살랑거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난 우선 씻고 오마.”

“……네.”

페드로가 발길을 돌리자 집무실에는 에스메랄다 홀로 남았다.

“선물이라니…….”

사라진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생일 선물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들 사이에 신뢰와 전우애 같은 사적인 감정이 쌓이기 전에는 황제에게 ‘남부 전선의 안정화를 위한 협력’ 이상의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하느라. 후에는 그런 사사로운 일들을 따로 챙기기 버거울 만큼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나 자금은 물론, 감정까지.

그래서일까? 에스메랄다는 묘한 울렁거림을 토해 내는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서신을 집어 들었다.

「직접 전하지 못해 미안하다.

그대의 탄생을 축복하며.

아르페시스.」

고작 몇 글자에 불과한 문장이 이토록 버거울 수 있다니. 그런 연설문을 써 왔으면서 변할 것처럼 굴 건 뭐란 말인가.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들어 그녀를 괴롭히려는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이 지긋지긋한 감정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사소한 계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에스메랄다가 친구, 전우, 혹은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아르페시스를 사내로 인식한 건 리퀘나로 향해 아르페시스를 만났던 18세의 여름이었다.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마수들의 사체가 썩어 가며 악취와 병을 몰고 오는 시기.

그 당시 그녀는 황궁의 재무부 관료로 근무하고 있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물자에 악귀들의 손에 닿지 않도록 바동거리던 나날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와중에도 해마다 두세 번씩은 방문했던 전선에서 일어난 일.

예정된 일정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그녀는 언제나처럼 리퀘나에 도착해 물자를 인계하기 위해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아르페시스에게 내륙의 상황을 전해 주고, 혹여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없는지 들을 생각이었다.

사령관실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르페시스가 땀에 젖은 채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나?’

반가운 미소와 함께 그녀를 맞이한 그는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연무장에 있다가 소식을 들어 조금 늦었다. 미안하다.’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상시 준비되어 있는 물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에스메랄다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벙긋거리는 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훈련을 하다 온 거면… 나중에 대화를 해도…….’

‘아, 훈련은 아니었다. 그저 기사들이랑 내기 대련이라는 것을 하던 중이었지.’

‘내기……?’

‘나도 이번에 처음 해 본 것인데 이게 생각보다 재밌더군.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주머니가 두둑해지니까 자꾸만 걸게 되더라고. 왜 도박에 중독되는 이들이 있는지 알겠어.’

‘……그런 생각을 했다면 괜찮을 거야.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식 속에서 뒹군 2년여간의 경험이 그것을 도와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천천히 이동을 시작해 찻잔을 찾았다. 당연하게 의자를 끌어 와 곁에 앉는 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 행동이 땀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르페시스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냄새가 많이 나는가?’

에스메랄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땀 냄새란 그녀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페드로가 살아생전, 걸핏하면 땀에 젖은 채로 그녀를 안아 들곤 했으니까. 그러니 그녀의 반응이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 것은 분명하다.

‘급한 소식이 없다면 씻고 오겠다.’

‘으응…….’

‘그… 거친 이들과 계속, 그러니까 오래… 어울리다 보니 생각이 짧았다. 정말 미안하군.’

겸연쩍은 표정의 아르페시스가 씻으러 간 후에야, 에스메랄다의 뺨에 홍조가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사내라는 것을 인지했다. 고된 훈련으로 만들어진 근육과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얻은 흉터들. 조각 같이 다듬어진 몸 위로 흐르는 땀방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떨렸다. 그 품에 안기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의 흉터를 쓰다듬으며 함께하지 못한 통증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모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를 향한 존경과 감탄, 찬사 위에 설렘이 덧그려졌다. 그와 입을 맞추고, 마음을 고해 보는 것도 모자라, 마음의 답을 받아 보는 상상. 홀로 뺨을 붉히며 행복에 잠겨 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 당시를 떠올린 에스메랄다가 눈을 감았다. 상상만으로도 행복에 취하게 만들었던 강렬한 감정. 그것을 잘라 내기로 결정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더라? 기억해 내라.

페드로, 오멘, 페르멘,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까지. 그녀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을 잃었던 당시의 감각들을 되살렸다. 휑하니 비어 버려 삭막해진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며 상실감을 곱씹었다. 그로 인해 잃었던 수많은 이득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자신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은 그의 처지를 매일 떠올렸다. 그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져 비참해질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어렵게, 어렵게,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우고, 언제 죽을지 모를 그의 미래를 생각하며 흐느꼈다.

다시 한번, 세상의 한 축을 잃고도 버틸 자신이 없어서 자신이 먼저 버리고자 했다. 그렇게, 다시는 소중한 이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리하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

에스메랄다는 이 감정이 사람을 얼마나 쉽게 휘두르는지 알고 있다. 이미 휘둘리고 있기까지 했다. 그 어떤 마약보다 끈질기고, 그 어떤 감정보다 강렬한 감정.

“왜…….”

그에게 자신의 생일을 언급한 건 딱 한 번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챙기다니. 그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심장이 요동친다. 그의 관심과 신경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고작 몇 글자에 불과한 그 생각이 가져오는 충만한 만족감이란.

“이렇게 군 적 없잖아.”

그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달콤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이런 것들을 바라며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을 때도, 아둔하게 눈치조차 채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이성으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편안하게, 친근하게 대했을 뿐이면서 지금은 왜.

에스메랄다는 앓는 소리를 내며 꽃다발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에스메랄다는 미래에 해 보았던 것처럼 최악의 상황들을 애써 가정해 보았다. 이런 감정을 품어서 좋을 게 없다는 의견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출정 전 그가 가져온 연설문을 떠올렸다. 그의 신념을 보여 주었던 그 종이.

지키고자 달려 나갈 아르페시스.

죽이고자 달려 나갈 에스메랄다.

그로부터 받은 비난을 꺼내 든 채 스스로에게 상처를 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고르는 것이다. 수단을 위해 목적이 퇴색된다면 그게 어찌 옳은 일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죄를 덮기 위한 변명이다.’

‘잘못은 그놈들이 했는데 목숨은 어째서 남부의 백성들이 내어야 하나!’

‘그 미친놈들을 치우겠다고 무고한 이들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거기서 멈춰.’

마음을 헤집었던 비난을 또다시 듣고 싶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모습을, 그리하여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또 하고 싶으냐고. 그가 연락을 주지 않았던 1년의 기억을 곱씹어 본다.

“하, 우스워라.”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포기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놈의 비난 따위가 뭐라고 이토록 겁을 먹는가.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다. 에스메랄다는 라퓨나의 꽃송이 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기억이 있었으면…….”

그에게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 확인했기에 이러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가 라그나와 페드로처럼 변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또다시 비난할 것이다. 이성이 외치는 말에 심장이 반박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가 가져왔던 연설문을 봐.”

페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알지 못했던 모습이 있을 수도 있어.

“오라버니의 경우와는 달라.”

대체 뭐가? 라그나와 페드로가 달라진 것처럼 그 역시 변할지도 모르잖아? 그는 벌써 그때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그런 기대는 감정이 만든 망상일 뿐이야.”

망상이면 어때? 이토록 달콤한데.

“현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가 죽지 않길 바라잖아? 솔직해져.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라고.

“제발…….”

자신을 침범해 오는 이 감정들이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다. 에스메랄다는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한참 동안이나 중얼거렸다.

천천히 줄기를 뻗어 심장을 옥죄어 오는 덩굴은 끈질기기만 했다.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었다.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지금의 시간에서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했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텐데.

* * *

“제발…….”

집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시녀에게는 들리지 않겠지만 마나로 오감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페드로에게는 들렸다. 애처로운 목소리, 절박한 중얼거림.

아르페시스에게 이상하게 반응하는 에스메랄다를 알고 있다. 해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맹세코, 이런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후우…….”

페드로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다독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렇게 감정을 밖으로 꺼내며 말을 하는 건 그녀가 지금 혼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들어가는 순간 그녀는 또, 벽을 세워 감정을 감출 터였다.

“대체 그놈과의 사이에 있는 게 무엇이기에.”

에스메랄다가 듣지 못할 질문을 해 보았다. 답답하다.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건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대로 계속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 봐 초조해진다. 그저 에스메랄다가 예전처럼 웃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것이 어째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미치겠군.”

지하 보관소에서의 조사를 계속해야 하나? 거기서 뭐가 나오기는 할까? 하지만 당장 그런 헛짓거리라도 하지 않으면?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다고? 다시 한번 최면초를 챙겨 볼까? 그리했다가 또 들키면? 이번에는 용서해 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럼 쫓겨날 것이고,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게 될 터. 일이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한 무력감에 잠식되겠지.

‘서두르다 모든 것을 망치느니, 신중한 것이 낫다.’

한때는 그를 분노케 했던 부친의 말을 이토록 절절하게 실감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젠장.”

페드로는 집무실 앞을 떠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딛는 발걸음은 그의 속내처럼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또다시 지하 보관소였다. 조급함이 그를 재촉했다.

* * *

중형 마수를 처음 마주한 산자락을 넘는 데 7일이 걸렸다. 평소 그 산을 지날 때 10시간 내외가 걸린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지독히도 느린 걸음이었다. 인근의 지형이 문제였다. 동쪽은 짧은 산맥으로 인한 분지, 서쪽과 남쪽은 다시 평지. 서쪽 평지 지역은 별동대로 빠진 일부 병력이 1부대와 협동해 마수를 소탕했다.

아르페시스가 직접 이끄는 대부분의 본진 병력은 1만 이상이 모여 있는 분지 지역의 마수를 완전히 소탕한 후 남하를 지속한 상태. 그 결과, 2시간 전 산자락 인근의 루게논 자작령에 도착했다. 지금은 자작 성 주변에 있던 마수들과의 전투가 막 끝난 참이다.

“아직 버티고 있었군.”

일전에 지나온 호렌 남작 성은 이미 무너져 있었는데 말이다. 말을 마친 직후 그는 큼, 큼거리며 잠긴 목소리를 풀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며 외성을 훑어보았다. 외성 밖의 건물들은 이미 건물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황폐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 돌무더기 사이사이에는 마수의 시체가 가득 널브러져 있고.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죽은 마수의 사체를 저렇게 방치하다니. 성문을 열고 나와 저것들을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서구에 문제가 생겼던 것일까?”

그래서 고립 소식을 북쪽으로 전하지 못한 것이냐는 질문을 마친 아르페시스가 다시금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벨페의 사체가 보이니, 시도했으나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헤롤이 한쪽을 가리키며 답했다. 아르페시스는 매를 기원으로 하는 마수, 벨페의 사체를 확인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공을 활보할 수 있는 마수가 전서구를 잡아먹었을 확률이 높다.

마기가 변화시키는 짐승은 종을 구분하지 않는다. 포유류는 당연하고 조류와 파충류, 혹은 갑각류 같은 절지동물도 포함된다. 육지보다 분포는 적지만 바닷속이나 하늘 위에도 마수가 있다. 3국이 채 막지 못하는 넓은 해상이나 상공을 통해 북상하는 마수가 있기에 후방국들의 원조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나마 마수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과연 후방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있긴 했을까?

아르페시스는 가정해 보았자 별 이득도 없는 생각을 금방 접었다.

“개문을 요구하라.”

큼, 큼, 그가 목을 가다듬는 사이 노란색과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며칠 사이 해쓱해진 데미안과 그의 부관인 아스터에게 닿았다.

‘그것이 누구든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저들은 해내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이틀 전, 중앙군 인사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한 그들을 비롯, 700여 명의 기사들을 연합군에 정식 배치했다. 그들에게 드리워져 있던 탈영병의 의혹을 공식적으로 거둬들였다는 말이다. 그 외에는 다시 한번의 탈주로 인해 즉결 처형당하거나, 전사한 이들이었다.

“기사 6백과 창병 1천 2백의 기마 병력을 차출, 3개 조로 편성해 인근 거리를 정찰하며 소수의 개체를 토벌하라. 중형 마수 조우 시 교전은 불허, 퇴각을 우선으로 한다.”

“예, 총사령관님.”

아르페시스는 아스터의 답을 듣고 다시 자작 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문이 열리는 동안 휴고가 안장 옆에 매인 짐에서 하얀 망토를 꺼내 건넸다.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착용하자 근위 기사들은 장창에 깃발을 매달았다. 황실의 것과 서부 연합군의 것. 각 지역의 영주들은 연합군이 창설될 때를 대비해 40여 년 전 결정된 연합군의 기를 보관해야 한다. 지금 저것은 테노리엘 백작 성에서 보관 중이던 깃발들이었다. 기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아르페시스가 추가 지시를 내렸다.

“보병들은 사체 처리를 시작하고 이후 동쪽 성문 인근에 병영을 구축한다.”

“예, 총사령관님.”

서부 연합군 소속의 지휘관들이 아르페시스의 명령에 따라 흩어졌다. 저 성을 지나면 서남 경계선 너머에 위치한 쿠베트 후작 성까지 평지다. 지휘부 회의에서 예측한 서부 영토의 회복 기간은 도합 25일 내외. 인간의 발로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를 되찾기 위해 열 배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중 절반가량이 지났으니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될 터.

“입성한다.”

“입성한다!”

큼, 목을 매만지는 아르페시스의 뒤를 30여 기의 말이 뒤따랐다. 근위대를 포함한 호위 기사 20명, 그리고 본진 병력에 배치된 수석 지휘관 일부였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음?”

경보 속도를 유지하는 말 위에서 목을 가다듬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헤롤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계속 헛기침을 하시기에.”

“아… 그제부터 조금씩 목소리가 잠기는군.”

아르페시스는 또다시 큼,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감기 기운은 없는 것 같은데…….”

목에 무언가 낀 것처럼 갑갑했다.

“변성기가 오시나 보군요.”

헤롤이 그런 아르페시스의 상태를 곧장 알아보았다.

‘지식을 글로만 알고 있는 녀석이다. 본인 몸에 변화가 생겨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바로 알아채지 못할 테지.’

‘어깨가 탄탄한 것치고 키가 아직 덜 자랐어. 없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창 자랄 나이니 성장통이 있을 수도 있다. 뼈마디가 욱신거리기라도 하면 전투가 버거울 터, 미리 머릿속에 넣어 두고 그런 일이 생기면 부상을 입지 않도록 자네가 좀 챙기게.’

엿새쯤 전에 돌아간 페드로가 남긴 말이었다. 테노리엘의 직계 두 명이 왜 아르페시스를 챙기는지는 모르겠지만 헤롤은 그들을 모시는 기사다. 하라면 해야지.

“변성기라고?”

“예.”

곧 목젖이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미성이 남아 있던 목소리는 낮아질 것이다. 수염이 나고, 손가락 마디를 비롯한 신체의 모든 뼈마디가 굵어질 터. 소년이 그렇게 사내가 된다.

“혹시라도 뼈마디가 아리시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아가씨께 연락을 넣겠습니다.”

“……왜, 영애 얘기가 나오지?”

아르페시스가 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10대 초중반의 종자들이 성장통으로 훈련을 버거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쓰는 약제가 있습니다.”

“아…….”

“물론, 통증을 완화시킬 뿐이고 신체 발달에는 영향을 주지 않도록 개량된 것이기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롤은 그렇게 말하며 고갯짓했다.

“저도, 저 뒤에 남아 있는 이들도 모두 그 약제를 쓰면서 훈련했습니다. 계속 개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저희 때보다 더 좋아졌을 겁니다.”

“그렇군…….”

“종종 성장통 없이 키가 훌쩍 커 버리는 이들도 있지만… 전하께선 현재 전장에 계시고, 익숙하지 않은 통증에 주춤하시는 사이 부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잠시간 헤롤의 고갯짓을 따라 뒤로 돌아갔다. 본진 병력에 남은 테노리엘의 기사들을 찾아보려는 행동이었을까?

“반드시 성장통이 있는 것은 아니나,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문제이니 감추고자 하지 마시고 알려 주십시오.”

“……알겠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호의였지만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식이 에스메랄다에게 전해지는 것 자체가 달가웠다. 이런 얘기가 그녀에게 전해지면 사내로 여겨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흑심이 가득하군…….”

그 생각 자체가 그녀를 향한 흑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예?”

아르페시스의 중얼거림에 헤롤의 반문이 돌아왔지만 그는 굳이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작령의 외성을 지나는 건 금방이었다. 이곳을 안정화시켜 놓으면 앞으로 남은 일정 동안의 보급은 지금보다 더 수월하리라. 성문을 지나는 아르페시스의 등 뒤로 새하얀 망토가 펄럭였다.

금실로 그려 낸 사자가 겨울바람을 타고 포효한 그 날로부터 이틀 후. 남쪽에서 붉은색, 노란색, 그리고 파란색 연기가 함께 피어올랐다. 퇴각을 권고할 정도의 대규모 마수 집결 신호였다.

* * *

카 80일, 에렘 제국 동부 최남단 부소네 공작령 소속 로그트리만 자작령. 얼굴과 상체 곳곳에 흉터를 달고 있는 건장한 남성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방금 아끼는 부하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 때문에.

“내 뒤를?”

“예.”

소식을 들고 온 부하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형님이 언제부터 자작령에 있었는지, 뒷골목 유흥가를 전부 먹은 게 언젠지 이런 걸 캐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지금 어디 있는데?”

“이 소식을 물어 온 놈이 운영하는 여관에 있습니다.”

부하가 손에 쥐고 있던 금화 하나를 팅, 하고 허공으로 튕겨 올렸다.

“요거 주고 물어보더랍니다.”

“금괴 하나 꺼내다 물려 줘. 너도 몇 개 꺼내서 먹고. 적당히 가져가라?”

“예엡.”

“아, 괜히 애들 붙이고 그런 건 아니지?”

남자의 질문에 부하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제가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굴렀습니까? 그냥 위치만 파악해서 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휘휘 내저어 부하를 방에서 내보낸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책장이었다. 힘을 주어 책장을 밀자, 뒤의 벽면에서 나무판으로 막아 둔 공간이 나타났다. 남자는 그 속에서 한 무더기의 종이를 꺼내 뒤적였다.

「행동 지침」

2년여 전쯤, 기가 질릴 만큼의 자금력을 자랑하며 접근한 이가 준 것이다. 그 이후 후드는 물론, 복면까지 착용해 얼굴을 가린 놈이 비정기적으로 남자를 방문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놈. 대화도 모두 필담으로 나누기에 목소리도 모른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얼굴 모를 놈이 마나를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놈을 보낸 건 필시 귀족이겠지.

뭐,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그쪽에서 제시한 돈의 규모가 어마무시해서 금방 넘어갔을 터였다. 그래, 남자는 과거 에스메랄다가 금력으로 굴복시킨 뒷골목 포주 중 한 명이었다.

“보자, 보자. 분명히 이럴 때…….”

남자는 종이에 빼곡히 들어찬 글을 훑기 시작했다.

「은밀한 접근을 발견할 경우.」

오래지 않아 그는 원하던 내용을 찾았다.

“하나, 무력적인 습격 및 침입이 없다면 직접 대면은 불허.”

절대 먼저 접근하거나 괜히 들쑤셔서 일을 수면 위로 올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들이 접근 자체에 대해 눈치챘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침묵 상태를 유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둘, 상대의 주도적 행동으로 접촉이 진행될 경우 적대적인 태도는 불허.”

그다음으로는 약자의 입장에서 돈과 권력에 굴복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셋…….”

만약 상대방이 먼저 접근해 올 경우, 마나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으니 무력적 충돌은 최대한 피하라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뇌물과 같은 금전적 요구가 있을 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쯧.”

필요한 내용을 모두 읽은 남자는 혀를 찼다. 그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이 지역 뒷골목의 큰손 중 한 명이었다. 2년여 전부터는 수식어가 ‘유일한’으로 변했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남자는 자작에게 꼬박꼬박 뇌물을 먹여 왔다. 반반한 처녀가 들어오면 반드시 자작에게 진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속으론 무슨 욕을 해도, 겉으로는 일단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상황. 그러니 자작이 그를 굳이 건들 이유는 없다. 즉, 이런 상황에서 그의 뒤를 캐는 놈이 있다는 건…….

“밖에서 온 놈이라는 말인데…….”

남자가 공을 들여 둔 이 지역 인물이 아니라 외부인이라는 소리.

“흐음…….”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종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주변 놈들은 다 갈아 치워졌거나 나처럼 숙인 놈들이란 말이지.”

의문의 큰손이 동부 뒷골목 포주들을 집어삼키고, 연대시키기 시작한 지 2년이 넘었다. 종종 이상한 지시가 내려올 때마다 다른 영지 놈들이랑 마주치기도 하니 확실하다.

돈에 무릎 꿇지 않는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빤히 아는데 괜한 헛짓거리로 들쑤실 간담 큰 놈은 주변에 없다. 그들은 마나를 다루는 귀족과 대립해선 안 된다는 절대적인 원칙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뒤를 캐는 겁 없는 건달이 아니라, 부자 양반의 뒤를 캐는 다른 귀족의 하수인이겠지.

종이와 책장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린 그가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이렇게 순순한 이유는, 인간이 학습을 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얼마를 주려나.”

누군지 모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서 손해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의 재산은 배로 늘어났다. 앞으로는 더 늘어날 터.

흉악한 겉모습의 남자가 작은 전서구용 종이에 글을 써넣기 시작했다. 그에게 돈을 주고 있는 부자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미 실테르에 건물도 몇 개 사 두었고 빼돌려 둔 금과 보석도 상당하다. 시키는 대로 하면서 돈을 받아먹고, 뭔가 좀 싸하다 싶으면 튀면 된다. 남자는 큰 그림을 그려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이유 모를 행동에도 관심이 없다. 그저 당장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흥, 흐응.”

밝고 경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린 남자가 전서구의 발통에 서신을 집어넣었다. 전서구가 향하는 방향은 자작령의 북쪽.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나 답신이 올 때까지 가장 짧게 걸린 시간이 이틀이니 동부의 어느 곳이리라. 빨리 부자 양반이 수고비나 챙겨 줬으면 좋겠다.

* * *

「초록색 일부 지역, 건물 주인이 소유한 붉은 지붕의 개수, 소유권 이전 시기 파악 중.」

여기서 단어 하나가 변한 서신이 이틀의 간격을 두고 도착했다.

「파란색 일부 지역, 건물 주인이 소유한 붉은 지붕의 개수, 소유권 이전 시기 파악 중.」

동부와 북부에서 뒷골목 포주들의 행적이나 규모, 집권 시기 같은 것을 캐고 다니는 이들이 나타났다.

“황제가 벌써 움직이나?”

에스메랄다로서는 귀족의 사고방식을 알기에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계기가 없지도 않고.

알라반을 약탈한 일로 인해 그녀의 조직은 추상적인 존재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운반과 관련된 이들 중 사라진 사람이 많으니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 거기에 더해 그 일과 관련된 남부 폭동의 선동자들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을 테니 뒷골목을 의심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능성이 낮을 뿐.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남부와 중부에서 소식이 없다. 그것도, 황제가 가장 빠르게 훑을 수 있는 황도가 조용하다. 소식이 없는 지역은 서부 역시 마찬가지. 상대 세력의 인력 부족, 혹은 의도적인 배제나 그녀가 내린 추측의 오류.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놈이 아직 길이 덜 들어서 누락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에스메랄다는 혀를 차며 짧은 서신을 작성했다. 황도에서 확인할 것이 생겼다.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놈을 발견하면 충돌을 피하고, 보고부터 할 것.」

라그나가 틈틈이 전서구용 실드 마도구를 만들고 있다. 중부와 남부를 오가는 전서구 중 반수 이상은 벌써 목줄 형태의 마도구가 채워져 있었다. 황도 뒷골목에서 키우고 있는 이가 아직 암호 체계를 습득하지 못했기에 필요했고. 남부는 현재 황태자 건으로 위험한 내용이 오갈 확률이 높기에 달아야만 했다.

에스메랄다는 마도구와 발통을 찬 전서구가 날아가는 것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누가 뒷골목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일까? 포주들이 뒷골목을 장악한 시기를 파악하는 이유는? 무언가와 그 시기를 비교하기 위함일 확률이 높다. 그 무언가가 그녀의 행적과 연관이 있다면…….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중서 경계선을 막고 서 있는 그녀의 부친도 의혹 대상에 포함된다. 누군가는 부스러기처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정보지만, 어떤 누군가는 그것을 파고들어 조사를 시작할 수도 있는 일. 테노리엘 백작은 그녀가 영주권을 겁박해 빼앗은 후 곧장 행한 일이 무엇인지 안다.

“아버지를 떠봐야 하나…….”

3년 전, 백작이 굳이 공표하지 않기도 했고 해당 서류를 승인한 황실 역시 주시로 그쳤다. 그녀에게 영주권을 위임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건 고작해야 작년 여름쯤이었다. 즉, 에스메랄다가 영주권을 위임받은 정확한 시기를 아는 건 테노리엘 백작과 황실. 현재 뒷골목의 세력 판도를 조사하고 다니는 유력 용의자들과 일치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일이 늘어난다. 앞으로도 더해지면 더해졌지, 덜해지지 않으리라.

“양쪽 모두 고려한 상태로 움직여야겠어.”

당장 다행스러운 건, 5할 이상 지역의 포주들을 금력으로 포섭했기에 교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물밑으로는 통합되어 있지만 외부적으로는 둘, 혹은 셋으로 분할된 것처럼 보이는 지역도 있다.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되는 북부와 중부는 위장 업무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서부, 동부, 남부는 이미 심혈을 기울여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두었다.

의심을 확신으로 굳힐 만큼의 완벽한 물증이나 심증을 얻긴 힘들 것이다. 이쪽이 알아차리고 곧장 숨어 버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뜸 건달들을 고문하거나 해서 정보를 캐내는 강수를 두지도 못할 터. 우선 황제의 세작들과 테노리엘 백작가가 거느린 세작들의 동태를 파악해야 한다.

“또 일거리군.”

에스메랄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빈 종이를 찾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황제의 세작들의 집결지에 대해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정보는 제 마음대로 집무실을 오가는 페드로에게 보여 줄 수 없기에 사용할 때만 머릿속에서 꺼내곤 했다. 아니면 책상 아래의 비밀 공간에 넣어 두거나.

“천사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에스메랄다는 덤덤한 표정으로 반쯤 써 내려간 종이를 접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위치한 반지가 반짝, 하고 빛을 내며 그 종이를 태워 버렸다.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페드로에겐 조금 전 도착한 전서구 서신을 태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이상함을 감지했다고 해도 어쩔 것인가? 이미 종이는 타 버리고 없는데.

“식사해야지.”

생일 선물을 대뜸 약제로 주더니, 요즘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식습관에 관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가 끌고 들어온 트레이 위에는 채소와 육류, 각종 과일까지 가득했다. 집무실을 아예 식당으로 만들 작정인 모양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먹어 보자.”

“저는 제 몸에 맞게 먹고 있어요.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거북해요.”

“아니, 넌 너무 적게 먹는다. 그러면 키가 크지 않는다고.”

에스메랄다는 잠시 반항했지만 빠르게 포기를 선언했다. 저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페드로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으니까. 그저 곱게 일어나 소파로 향하는 게 상책이다. 에스메랄다는 식후 다시 해야 할 일을 메모하고 책상을 등졌다.

“물론, 나는 천사가 작고 귀여운 것도 좋지만… 그래도 사내들 눈에서 눈물 쏙 뺄 만큼 어여쁘게 자란 모습도 보고 싶단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소파에 앉은 에스메랄다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났으면서.

그가 주는 온기를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또 가족들에게 가졌던 원망이 모두 흩어진 건 아니었다. 속이 답답했다. 이대로 식사를 하면 체할 것 같은 기분이다.

“네게 날개가 달린 건 알고 있다만, 그래도 새 모이만큼 먹는 게 말이 되느냐?”

물론, 아주 잠시 동안만 느낀 감정이었다. 또 왜 능글맞은 모습으로 변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린 시절에는 저 찬사에 수줍어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에스메랄다에게 있어 10여 년도 훌쩍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머리가 다 자란 지금에 와서는 민망할 수밖에.

에스메랄다는 눈을 꾹 감고 음식을 씹으며 생각했다. 제 오라비의 입을 좀 틀어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누가 저 낯간지러운 말을 들을까 싶어 불안할 지경이었다.

에스메랄다의 무시 아닌 무시와, 페드로의 찬사 아닌 찬사 속에서 진행된 식사는 불시에 들려온 노크 소리로 인해 잠시간 중단되었다. 서재로 이어진 곁문이었다.

“아가씨, 전서구가 왔습니다.”

3년 전부터 전서구 방에서 일하게 했던 시종이다. 히나가 없어 최근에는 그들이 모든 서신을 가져온다. 발신인은 헤롤. 두 아이가 그의 사저에서 지내는 중이라고 서신을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신인가? 에스메랄다는 손을 뻗어 전서구를 받았다.

“나가 보렴.”

시종을 내보낸 에스메랄다는 곧장 서신을 봉해 둔 인장을 뜯었다. 입을 헹구기 위해 반대 손으로 물잔을 든 그녀는 첫 줄을 읽자마자 굳었다. 아니, 고작 몇 단어를 읽자마자. 그에 따라 잔이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졌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물을 쏟아 냈다. 카펫이 소리와 물을 함께 먹어 치웠다.

「황자 전하께서 부상을…….」

심장이 쿵쾅쿵쾅 굉음을 토해 내며 뛰었다. 어제 남쪽에서 올라온 신호는 에스메랄다도 보고 받았다.

붉은 연기, 노란 연기, 파란 연기. 그 세 가지 색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최소 2만 이상의 수가 집결할 때이다. 대부분의 경우 중형 마수들이 자신의 분대를 합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중형 마수들이 모여들 만큼, 서부에 들어온 마수가 늘어났다는 의미였다.

퇴각 권고가 있을 만큼의 대규모 마수 집결. 그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면 심각한 수준일까?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거지? 중상을 치료할 수준의 신력을 가진 신관이 파견되어 있나?

그녀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그를 향한 걱정으로 변질되었다. 당장 거울을 보지 못했기에 그녀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억지로 떨림을 누르며 평온을 가장하려는 모습도 선명하게 보였다. 커다란 손이 그녀에게서 서신을 빼앗아 갔다.

그사이 에스메랄다는 억지로 숨을 고르며 옆자리에 앉아 있는 페드로를 의식했다. 아르페시스의 부상 소식에 당혹을 내보이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후속 조치는 큰 효과가 없었다.

“진정하렴. 곧장 신관이 병영으로 이동해 전하를 치료했다는구나.”

페드로는 서신을 빠르게 훑고 내용을 요약해 전달했다. 그에 에스메랄다가 이를 악물며 호흡을 골랐다.

“무사하시다. 호위 기사들의 적절한 조치 덕분에 지금은 아무런 이상도 없으시고.”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듣지 못하게 속으로 혀를 찼다. 첫 문장을 이렇게 적은 헤롤을 욕하면서. 그러면서도 그는 아르페시스의 부상 소식 하나에 격하게 동요한 에스메랄다를 주의 깊게 살폈다.

“돌… 려주세요.”

에스메랄다는 심호흡을 하며 페드로에게서 서신을 돌려받았다. 내용인즉, 아르페시스가 부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치료받았고, 이 부상의 이유가 나이대로 인한 성장통 때문인 듯하니 가문의 약제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에 놀라 난동을 부린 이 미련한 심장을 어찌하면 좋을까. 에스메랄다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그는 집무실 밖에 상시 대기하는 시녀에게 약제를 준비하라 전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10년 가까이 끈질기게 살아남은 감정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효과를 바라선 안 되지만 지금의 동요를 페드로가 보았다는 점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더더욱. 다른 것으로 바빠 의식의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 몇몇 의뭉스러웠던 점들이 퐁, 퐁, 하고 수면을 벗어나 떠올랐다.

“아직 어제보다 덜 먹었구나.”

그의 앞에서 아르페시스의 부상 소식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페드로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간다? 에스메랄다의 이성은 이건 페드로가 보여야 하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님을 경고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왜 물어보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리가.

결국 그녀 역시 방금 전의 일을 모르는 척 넘기며 포크를 들었다. 술이나 최면초 사건도 그렇고, 그가 새벽녘에 아르페시스의 침실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그녀가 짚고 넘어가지 못한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걸 파 보아야 하나? 지하 보관소에 들어가는 것도 관련이 있나? 아르페시스와 무슨 관계지? 테노리엘의 직계가 황자와 친분을 나눌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또, 또, 또.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은 어째서 끊이지를 않나. 에스메랄다는 이 문제를 파헤쳐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덮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오라버니.”

그리고 페드로에 대한 신뢰가 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찌 부르느냐?”

그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제게 해가 오는 행동은 하지 않으실 거지요?”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내 모든 것은 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을.”

지금도 충분히 머리 복잡한 일이 많다. 페드로의 일까지 붙들어 피로를 자처할 여유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녹을 듯 부드러운 그의 미소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니 바쁘지 않은 일은 미뤄 두자.

“믿을게요.”

“그래.”

“최면초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명심하마.”

방긋 웃는 모습이 왜 이리 얄미운지. 에스메랄다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포크를 들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는 아르페시스의 부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지질 않았다. 다친 것은 그이건만, 어째서 아픈 것은 그녀의 심장일까.

* * *

카 85일, 에렘 제국 북부 최북단 디오니세트 공작령 소속 에그몬트 자작령 외곽 야산. 자정에 가까운 시간,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낮처럼 환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마나를 눈에 두른 이들.

[습격합니까?]

암석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가 반대편 암석에서 볼 수 있게 손짓했다.

[확인, 감시 주력.]

[확인, 명령 전달.]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암석 사이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목이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무리가 복면을 쓴 채 조심스럽게 이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이나 오르막길을 거슬러 올라간 의문의 이들이 어느덧 멈추어 섰다. 자신들이 주시받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 중 한 명이 복면을 걷으며 고개를 쭉 뺐다.

“이거… 풀무질 소리야.”

그들이 멈춘 곳 인근에는 몇몇 불빛이 어두운 산속을 밝히고 있었다. 천막과 오두막,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물론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풀무질 소리까지.

“풀무? 일반적으로 풀무를 쓸 일이 어디에 있다고? 여기에 대장간이라도 있다는 건가?”

“그러기엔 조련 과정에 필요한 소리가 안 들리는데…….”

“기습?”

“감시?”

복면을 쓴 이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에 하늘 높게 솟아오른 암석 틈에 숨어 그들을 계속 주시하던 남자, 테란이 확신을 내렸다. 훈련받은 이들이다. 테란이 다른 곳에 있는 수하들에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제압.]

[확인, 명령 이행.]

그사이 복면인들의 시선을 받았던 남자가 입을 열었지만.

“우선 뭘 하는지 알아내 보…….”

말이 끝맺히는 일은 없었다. 복면인들의 위에서 뛰어내린 이들이 그들의 목에 검을 들이댔으니까.

“반항하면 목숨은 없다.”

조금 더 먼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목 뒤에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닿았을 때, 복면인들이 몸을 비틀며 빠르게 반응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병장기들이 마찰하는 것답지 않게 쾅,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양쪽의 병장기 모두에 마나가 실린 탓이다.

“마나?”

반격을 시작했던 복면인들의 얼굴에 단체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전 복면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테란이 눈을 부릅떴다. 복면을 끌어 올리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아니까!

과거 그의 신분이 황제에게 속해 있을 때 알던 이다. 황제에게 직접 선발되어 다른 곳으로 빠진 기사단 동료였다. 세작의 얼굴을 알아본 테란은 숨을 한 번 들이쉬기도 전에 판단을 마쳤다.

“벙어리!”

그는 그들만의 언어로 명령을 내리며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그에 반응한 동료들이 복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전원 상급 기사로 이루어진 복면인은 5명. 상급 기사 3명과 중급 기사 6명으로 구성된 습격자는 9명.

“놓치지 마라!”

가장 먼저 한 명의 목을 딴 테란이 외쳤다. 한 놈이 도주 중이다. 등허리에 꽂혀 있는 단검을 꺼내 투척하는 테란의 행동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미흡함도 없었다. 도주 중이던 세작의 등에 단검이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확인 사살!”

“확인 사살 이행!”

단검에 꽂힌 세작의 자세가 무너진 사이, 그를 놓쳤던 이가 서둘러 달려가 목을 그어 버렸다.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끝났다. 습격 위치와 인원수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건이 나빴다면 세작이 아닌 그들에게 피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테란, 에스메랄다에게 고용된 전직 황성 기사단 출신의 그가 혀를 찼다.

“부상은?”

“경미합니다.”

다행히도 전력 손실은 없다. 테란은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을 한곳에 모았다.

“황제의 세작들이다. 인근 지역을 수색해 추가 인원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에 중급 기사 실력을 가진 6명이 2인 1조로 자리를 떠났다. 이후 테란이 시체의 품을 뒤지며 혀를 찼다. 그의 손에는 제국 내에서 얻은 정보를 정리해 둔 보고서와 신분 패가 들려 있었다. 필시 높은 확률로 위조 신분 패이리라.

“세튀스를 오가는 세작을 잡았나 보군.”

그들이 있는 곳은 국경이 있는 영지, 그러니 황제의 세작들이 활동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놈들의 이동 경로에 여기가 포함되는 겁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다. 황제의 세작들은 주기적으로 집결지를 바꾼다고 들었으니까.”

황실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근무했던 당시 주워들은 말이었다.

테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빛이 일고 있는 지역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정체는 에스메랄다의 비자금 조성지였다. 광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채굴을 진행 중인 곳. 이 지역 영주에게 들키면 무조건적인 사살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짓이다.

이곳에서는 캐낸 금을 운송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장 금괴로 만들어 반출하는 일이 행해지고 있다. 테란은 에스메랄다가 직접 이곳의 책임자로 보낸 인물이었다.

“보고부터 올려야겠다. 당분간 생산 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광산 입구를 위장한다. 불을 끄고 천막을 거둬라. 오두막 역시 허물어 자재를 광산 내부로 숨긴다. 시체는 국경 지역으로 운반할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수색을 위해 떠난 이들 외에, 상급 기사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지웠다. 테란은 자신들이 머물던 주둔지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종이와 잉크를 찾은 그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1여 년 전부터 교육받은 암호 단어로 서신을 작성했다.

제국 곳곳에 퍼져 있는 황제의 세작들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세밀하게 연대한다. 다른 지역의 세작들과도 그러한데, 하물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세작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실종된 세작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고 수색 작업을 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 전 테란 일행이 사살한 세작들이 국경에서 주로 활동한다는 것. 세튀스 세작들에게 그들이 살해된 것처럼 꾸밀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미 세작을 처치한 후 복귀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갔을 확률이 높다는 거겠지. 쯧, 테란이 짧게 혀를 차며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접면 부분에 녹인 촛농을 붓고 숫자 1이 새겨진 원형 인장을 찍자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테란은 그렇게 에스메랄다와 아드리안에게 보낼 두 장의 서신을 작성한 후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당분간은 겁에 질린 짐승처럼 자세를 낮추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촌각을 곤두세워야 할 터였다. 황제에게 이곳의 존재를 들켜선 안 된다.

* * *

아드리안은 한밤중에 도착한 서신을 확인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잠을 자던 중 깨어난 터라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서신을 밀봉한 인장에는 1이라는 숫자가 떡하니 찍혀 있었으니까. 긴급한 대처를 요하는 소식이다.

「갈색 머리의 무리로부터 습격, 자산 손실 전무, 습격 대처 성공, 보석 상자 제작에 문제 발생, 현재 제작 활동 일절 중단, 갈색 머리의 무리를 수색 중.」

뒷골목 포주들을 조사하는 놈들이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비자금 생산처에 문제가 생기다니.

“단장, 애들 깨웁니까?”

“그래.”

“준비시킬게요.”

아드리안을 깨운 용병이 다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대부분 신전을 향한 악감정을 가진 이들이 모인 용병단, 붉은 하늘의 단장이자 에스메랄다가 가장 먼저 접선해 연결점을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긴급을 요하는 것이니 아드리안을 거치지 않고 곧장 서부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터. 따로 보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외부에서 의뢰를 수행 중인 단원들에게 국경 주변으로는 가지 말라는 연락을 돌려야 했다.

마나를 사용하는 용병 무리라니,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보는 것만으로 마나의 사용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기에 직접 대적하지 않은 이상 문제는 없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충돌을 할지 모르고, 그 과정에서 마나 보유 사실을 들킬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건 아예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자금이 묶여 금력을 과시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그럴 경우 이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은 포주들을 꼽아 보고, 당분간은 그들을 주시할 용병을 파견해 두어야겠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포주들을 옭아매고 있는 건 금력과 무력이지, 충성심이 아니니까.

자다 깨어나 피곤한 와중에도 아드리안은 불평 한번 하지 않고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보호받아야 해요.’

그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학대를 받다 죽은, 그의 동생 같은 아이들이 더는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장 필요한 조치를 모두 마무리했을 때, 아드리안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일렁거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타리안…….”

여덟 살이나 어린 동생이 신력을 가지고 태어난 태생 신관임을 알았을 때, 그의 마을에선 축제가 벌어졌다. 주신께서 이 마을을 지켜보고 있노라고, 그래서 이 마을의 아이에게 신력을 내려 주신 거라고. 그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줄도 모르고, 마냥 기뻐했더랬다.

소식을 전달받고 아이를 데리러 온 신관들에게 동생을 안겨 주었다. 병신같이, 신전 내부가 얼마나 잔혹한 곳인지도 모르고. 없는 형편에 돈을 조금씩 모아, 1년에 한 번씩 동생이 들어간 신전으로 갔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접견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신전 내부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외부인과 만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수련 중이라 외출을 자제하는 중입니다.’

‘개인 기도 중이라 접견 요청을 거절하더군요.’

‘대신관님을 따라 순례에 나섰습니다.’

그와 가족들은 그 말이 정말인 줄 알았다. 신관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사라진 시간에서도 에스메랄다가 신관들을 재판장 위에 세우기 전까지 백성들은 신전의 비리를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과거의 아드리안도 신전의 타락을 알지 못했다.

그의 동생은 고귀한 태생 신관이니, 신전에서도 귀한 보살핌을 받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나지 못한다 해도 잘 살고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러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태생 신관인 동생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드리안에게 부고가 전해졌다. 그의 동생이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 소식이었다. 신이 베푼 생명을 스스로 저버린 불경한 죽음이기에 가족에게 시체를 양도하지 않고 소각했다는 내용과 함께.

“후우…….”

오래전 일을 떠올린 아드리안의 얼굴에 비통함이 서렸다. 가진 힘이 없기에 가져야만 하는 무지는 죄인가? 아니면 그러한 무지함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함이 죄인가?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분명한 건 있었다. 아드리안은 무지했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경우에는 그것이 죄였다.

아드리안은 신전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슬퍼하기만 했다. 아드리안이 감춰진 진실의 편린을 엿보게 된 건 그보다 더 훗날의 일이었다. 노쇠한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 먹고살기 위해 몸을 쓰는 용병이 되었던 시기.

‘실례합니다.’

스물을 넘겨 서른을 바라보고 있던 나이의 어느 겨울밤, 동료 용병들과 의뢰를 수행하던 중 야영지의 불빛을 나눠 달라 청하는 순례 신관을 만났다. 30세는 되어 보일까 말까 한 그 젊은 신관은 비쩍 마른 몰골이었다. 신관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 아드리안과 동료들은 당연히 겨울의 한기를 피할 수 있는 불과 자리를 내어 주었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지요. 신의 보살핌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신관은 신력으로 용병들의 자잘한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의뢰비를 받기 전이라 많지는 않았지만 아드리안과 동료들은 없는 돈이라도 모아 내려고 했다.

신관에게 치료를 받으면 돈을 낸다. 제국법은 금전의 대가를 내지 않는 행위를 절도죄와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신관은 쓰게 웃으며 거절했다. 신에게 받은 힘을 사용하고 대가를 받는 건 죄라면서.

그때 신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갑자기 침묵했고, 또한 갑자기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그토록 분개했을까? 신관이 돈을 거절한 통에 당황하고 있던 용병들은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 속에서 침묵했다. 신전 내부의 폐해, 돈을 받지 않고 선행을 베푸는 신관들의 실종, 그리고 아드리안이 알지 못했던 태생 신관들의 대우까지.

신관은… 꼭 고해 성사를 하는 것처럼 야영지 한쪽에 웅크린 채 엉엉 울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그들은 악마입니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건만, 그 순례 신관은 감정에 취해 용병들이 들고 있던 돈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본인의 무력함에 절망해 울었던 게 아닐까? 그날 이후의 아드리안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와 그걸 생각해 본들 달라지는 건 없지만 아드리안은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들은 탐욕에 물들어 타락한 악마입니다.’

‘차라리 의원을 찾아가세요.’

‘신의 말씀을 더럽히고, 신께 죄를 짓는 신관들을 찬양하지 마세요. 그 역시 죄입니다.’

다음 날 새벽, 퉁퉁 부은 눈으로 홀연히 떠나려는 그 신관을 붙들고 물었다. 태생 신관이 신전 내부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는 거냐고. 그는 이제 와 숨겨 뭐 하겠냐고 중얼거리며 모두 얘기해 주었다.

보통의 신관들은 어린 시절 사제로 들어가 교리를 배우고, 기도와 수련을 통해 조금씩 신력을 발현한 이들이다. 하지만 태생 신관은 달랐다. 단어 그대로, 그들은 사제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관이다. 그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정화할 수 있을 정도의 신력을 가지는 태생 신관은 장래에 대신관이 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 날 때부터 신의 선택을 받아 나날이 신력이 강성해지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기존의 대신관들이 위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힘없는 어린 태생 신관을 학대함으로써 대신관의 눈에 들고자 하는 신관들의 악행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

순례 신관 본인이 본 학대만 해도 여섯 번이 넘는다고 했다. 그들 중 두 명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동생이, 어린 동생이 태생 신관이라 신전에 들어갔다가 자살을 했다고 말했을 때, 그 당시 순례 신관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자살 위장이면… 아마 폭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폭행 이후 방치되었거나 폭행 도중에 죽었겠지요. 그 어린 신관의 몸에 타박상 흔적이 가득했을 테니 시체를 신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을 겁니다.’

신관은 신력으로 치료받을 수 없다. 또한 죽은 자의 상처 역시 신력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

‘부족한 신의 종이 간청합니다. 부디, 신전을 멀리하세요.’

그 말을 남긴 신관은 잠든 용병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 후로는 신관들을 볼 때마다 저놈이 자신의 동생을 죽였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분개했다. 하지만 힘없는 용병이 무엇을 하겠나? 신관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내려지는 형벌은 무겁기만 한데. 그저 무언의 반항으로 다쳐도 신관을 찾지 않는 정도. 신전에 미사를 가지 않고 성금을 내지 않는 정도.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다. 동생이 죽은 지는 20년도 훌쩍 넘었고. 그렇게 무력감 속에 침묵하던 어느 날, 서부에 위치한 신전에서 생활하는 태생 신관 한 명이 산행을 갔다가 발을 헛디뎌 추락사했다는 내용의 서신이 그에게 도착했다.

이걸 뭘 어쩌라고? 라는 심정으로 발신인도 분명하지 않은 서신을 훑어봤다. 뒷장에는 그 태생 신관이 함께 산행을 나갔던 신관에게 등 떠밀려 추락한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이 서신의 목적이 뭔지, 혹시 신전에 적대감을 가진 불온한 이들을 찾아 없애려는 수작은 아닌지, 별별 망상을 다 했더랬다. 그렇게 괜히 자신을 지켜보는 자가 있나 싶어 예민해져 가던 어느 날, ‘만약 나와 달리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이라면?’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전의 폐단을 알고, 그것에 침묵하는 대신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 한번 빠져든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점차 고양되기를 며칠, 조련석과 함께 또 다른 서신이 도착했다.

‘난 그들이 정말 싫어요. 그들이 모두 죗값을 치르게 만들 거예요.’

아드리안은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자신이 이날을 기다리며 살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그 서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돕고 싶다는 답을 적어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마흔에 가까워진 나이에 심장에 불을 지피고, 신념을 품어 보았다. 자신의 동생 같은 피해자를 더는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

서신의 주인공은 이름이 가득한 목록을 보내며 그에게 용병단의 규모를 키우라고 했다. 이후 아드리안은 에스메랄다가 보내 준 이름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동료로 포섭하며 3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야 신전 내부에 눈을 만들기 시작한 상황.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항시 같이 온다더니, 지금이 딱 그 상황인 모양이다.

화폐는 황실이 소유한 주조소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함부로 찍어 낼 수 없다. 해서 편법으로 화폐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금괴와 은괴를 만들어 비축하거나 사용하는 상황. 타국에 있는 것을 들여오려면 관세를 물어야 하기에 당장은 사용하지 않고 모으기만 하고 있는데, 국내에 있는 광산에서 황제의 세작들과 마찰이 생긴 것이다.

“쯧.”

5세 무렵에 운용법 마법 진을 심장에 새기는 귀족들과 달리, 그의 용병단에 속한 이들은 가장 빠른 사람이 16세였다. 대부분은 20세가 넘은 상황에서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혹독하게 훈련해 기존 기사들과의 격차를 좁혀야 하는 상황에서 용병들을 밖으로 돌려야 하다니. 어째서 시간은 항상 부족한 것일까.

동부와 남부, 서부는 각지의 관리자들이 알아서 단속할 터. 그가 맡은 곳은 북부다. 아드리안은 북부의 각지에 용병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우연으로라도 그들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몸을 사려야 한다.

* * *

지금 에스메랄다가 깃펜을 들었다 놓는 행동을 반복하며 입술을 짓씹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페시스에게 받은 생일 선물에 대한 답신을 쓰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전의 부상에 대해서도 상세한 소식을 듣고 싶었고.

공식적인 선물이 아닌지라 이대로 입을 다문다 해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벌써 몇 분이 넘도록 쓰려는 시도와 쓰지 않으려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시하라는 이성의 경고는 이미 그녀의 침실을 차지하고 앉은 금색의 라퓨나를 보고 나오는 아침마다 흐려진다. 꿈에서 깨어날 때 그 꽃을 보고 있노라면 평소보다 빨리 안정을 되찾곤 했다.

에스메랄다는 다시금 무겁기 그지없는 손을 들어 깃펜을 쥐었다. 아르페시스에게 보낼 답신을 쓰고 있는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 타인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어리석기는…….”

끝을 알면서도 헛된 희망을 품어 제 발로 불길에 들어가는 꼴이다. 그와의 거리를 벌린 것이라면 사적인 연락은 금하는 것이 옳다. 그가 보였던 호감을 기억하고 있는 에스메랄다로서는, 그를 자극할 만한 일을 해선 안 된다. 분명 알고 있음에도 서신은 완성되었고 전서구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렀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창가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세 마리의 전서구가 순차적으로 도착했다. 북부에 있는 테란으로부터는 황제의 세작과 마찰이 있어 금괴 생산을 중단했다는 보고가. 남부의 에반스로부터는 그가 운영하는 상단의 일꾼으로 위장한 히나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가. 동부의 아브람 백작으로부터는 실테르의 세작을 포착했으나 한발 늦어 구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그녀의 결정과 후속 조치가 필요한 일이 몰려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초조함이 이는 것은 그녀의 계획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결코 아르페시스로부터 빨리 답장이 오길 바라서가 아니다. 제발, 그래야만 한다. 에스메랄다는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생각을 이어 갔다.

일전 뒷골목을 조사하던 것이 황제인가? 북부의 광산 쪽에서 세작을 마주친 건 그 일과 연관이 있을까? 테노리엘 백작을 이 문제에서 제외해야 하나?

속을 갉아먹던 것을 치우지도 못하고 또 다른 고민거리를 짊어 든다.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 외에도 신경 쓸 건 많았다. 연말이 10여 일 남은 시점이니 공문을 돌리는 등, 행정권에서부터 징집 절차가 시작될 터.

쿠그스 발병 이후 서부와 남부에서 시행된 두 차례의 징집. 그리고 다음 해의 3차 징집까지. 지난 2년간 병사들의 사망 숫자는 남부군 평균 사상자의 두 배를 웃돌고 있다. 그리고 내년에는 이 문제에 엮여 한 가문이 멸문한다.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니 일자를 확신할 수 없다.

당장 비자금 생산이 중단된 터라 감시 역으로 용병들을 내보낸 상황이지만… 이쪽도 중요하다. 북부 벨베크 백작의 봉신인 앙그리트 남작. 그의 영지에 사람을 보내 놔야 한다.

“인력은 뭘 어떻게 해도 왜 항상 부족한지…….”

기사들을 병사들처럼 빠른 시일 내에 양성할 수 있다면 정말 편할 텐데. 에스메랄다는 불가능한 현실을 그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놈의 권력이 뭐라고.”

제국이 이 모양인데 마나 운용법을 움켜쥐고 유출을 감시하는 꼴이라니.

에스메랄다는 마나 대륙 전역에 존재하는 마나 운용법을 공개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야 일반 병사들도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고, 그건 남부의 피해를 줄여 줄 테니까. 하지만 그놈의 권력이 뭐라고. 에렘을 비롯한 모든 나라의 귀족들은 마나 운용법을 꽁꽁 감춘다.

에스메랄다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인사들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각 나라의 국법으로 처벌이 명시된 짓을 할 만큼 열성적이진 못하다. 미래에서도 그 법을 폐지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실패에 일조한 이들 중 반황실 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결국 그녀가 하는 일을 그녀의 세력이 반대한 꼴이다.

“쯧, 당장은 마나 운용법이고 뭐고 급한 게 아니지.”

에스메랄다는 혀를 차며 머리를 쥐어짰다. 앙그리트 남작가의 멸문은 그들이 황제에게 필요한 수단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벨베크 백작가의 봉신이라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 해야 할까?

벨베크가 소유한 제카 상단은 유통하는 수입 곡물의 4할 이상을 반드시 남부군에게 판매해야 한다. 황실과 제카 상단 사이에 직접 체결된 이 계약은 현재 제카가 곡물 시장에서 지금의 규모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4할 고정 판매를 대가로 황실이 제카 상단의 수입 관세 중 일부를 감세해 주었고, 그 덕에 곡물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제카 상단은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근 20여 년 전의 일이고, 감세의 특혜는 이미 끝났지만 그 영향으로 벨베크의 제카가 곡물 수입 곡물 시장의 큰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카가 유통하는 곡물의 4할, 남부군에게 판매되는 그 곡물은 무조건 황실에서 지정한 금액으로 거래된다. 보통의 경우 시중 곡물의 물가를 고려해 그보다 살짝 낮은 금액으로 책정되곤 했다.

황제는 권력에 집착하며 자신을 위해 아랫사람의 피를 주저하지 않는 잔혹한 자이지만, 그의 유능함은 절대 의심해선 안 된다. 남부군의 예산과 물자 지원으로 목줄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존속을 위해 많은 제도와 거래, 그리고 행정법을 바꿔 온 이가 바로 현 황제다.

이번 문제에서 주목할 주체는 황제가 아니라 벨베크 백작이다. 황실이 정한 산정 금액으로 하는 거래가 유동적인 시장에의 거래보다 수익이 적은 건 당연한 일. 백작은 그게 참 많이도 아까웠던 모양이다. 그는 제카의 곡물을 시장에 풀지 않음으로써 공급량을 줄였고, 자연스럽게 곡물 가격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난가을의 추수 이후 줄곧 그 짓을 해 온 덕에 현시점에서의 평균 가격은 1.5배가량 상승했다. 일반 물가가 상승하면 황실이 지정하는 지정 금액 역시 늘어날 터. 더욱이 팔지 않고 움켜쥐고 있던 곡물도 가격이 올랐을 때 더한 이득으로 처분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벨베크 백작은 황실을 두고 돈 놀음을 한 것이다.

황제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본다면 그가 황권에 집착하는 폭군이라 불리지는 않았을 테지. 오히려 신하들에게 뜯어먹히는 어리석은 황제, 힘없는 호구라고 불렸으면 모를까. 물론 중립인 벨베크 백작가를 직접 건드렸다가 반황실 세력이 되기라도 하면 좋을 게 없다. 백작은 관직에 앉아 있는 중앙 귀족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제 허락도 없이 돈 놀음을 시작한 벨베크 백작을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우회적인 방법으로 타격을 주는 것이다. 결국 황제는 곡물 시장을 가지고 노는 벨베크 백작에게 경고하기 위해 봉신 중 하나를 건드렸다.

‘본인의 영지민들을 징집 목록에 올리지 않기 위해,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였다.’

이게 기록에 남은 앙그리트 남작의 죄목이었다. 물론, 누명임은 두말할 것 없고.

이건 과거 시리스의 본가인 록첸 자작가가 멸문한 방식과 아주 유사하다. 윗선을 건드리는 방법으로 힘없는 아랫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황제에게 거슬릴 만한 일을 저지른 윗선은 아랫사람의 목숨을 내주고 한 번의 경고로 사건을 덮어 내는 셈이다. 황제는 이번 일로 황실을 기만한 죄를 봉신에게 뒤집어씌우며 다시 한번 황실과 귀족 가문 사이의 서열을 주지시킬 것이다.

아무리 잘난 가문이라 해도 황권 앞에선 약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간접적인 경고. 황권 강화를 위해 신하들의 목숨으로 핏길을 닦아 내는 황제답다. 아마 그렇게 정립한 서열을 통해 황제는 한층 더 직접적인 경고도 할 것이다. 과거의 감세에 만족하고 더 이상 곡물 시장을 건들지 말라고. 조만간 백작이 황제를 따로 만나겠지.

“기록에 따르면 당시 파견된 황실 기사단의 행적을 눈치챈 앙그리트 남작이 하나뿐인 딸을 빼돌리지. 목표물을 놓쳤다… 라고 했던가?”

그 딸이 바로 에스메랄다가 원하고 있는 사 게만 앙그리트 디아나였다. 훗날 에스메랄다에게 사문서 위조를 위한 필체 모방을 가르쳐 주는 게 그녀다. 본래라면 도주에 성공한 후 숨어 살다가, 4, 5년 후에 만들어질 예정이었던 반군에 합류하는 인물.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전에 에스메랄다가 디아나를 낚아채 올 생각이었다.

“내 판단이 옳다면 이 기회에 다른 우군도 얻을 수 있겠지.”

남겨진 기록으로 판단하건대, 앙그리트 남작은 신임할 수 있는 인사다. 그리 부유하지 않음에도 연에 100여 명 정도의 사병을 남부에 자원군으로 파견하곤 했다. 그런 부친 아래에서 큰 디아나가 유능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에스메랄다는 이번에 남작도 함께 낚아챌 예정이다.

“내가 너무 어릴 때 일어난 일이었으니…….”

원래라면 이 시기의 에스메랄다는 어려서 그 일이 황제의 술수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에스메랄다는 북부로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미래에는 죽었던 앙그리트 남작이 살아남아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심하면서.

징집병의 파병이 완료된 후에야 서류 행정에서의 폐단이 발견된다는 기획일 테니 빨라 봐야 신년이 지난 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 전에는 히나가 가 있는 남부의 일에 조금 더 촌각을 기울여야 한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시키려면 전서구를 포획하는 일이 선행되는 게 좋다. 죽이는 게 아니라 포획. 그리고 그 전서구가 가져가는 황태자의 명령서를 바꿔치기할 생각이었다.

용병들은 남부 전역으로 퍼지는 전서구를 담당할 만큼 수가 많지 않다. 그러니 지금까지 뒷골목에서 따로 키우고 있던 전력을 꺼내 들 때가 되었다. 그녀는 뒷골목 중에서도 약자들을 선별해 세작으로 키워 왔다. 죽음 외에 그 어떤 선택지도 가지지 못했던 나단과 같은 입장의 아이들을 말이다.

각지로 파견되어 있는 용병들이 각자 일정 인원수를 선별하는 것이 첫 번째. 그다음은 그렇게 선별된 이들을 백작령으로 데려와 에스메랄다가 직접 만나 보고 최종 선별을 하는 식이었다. 3년 전 일을 시작할 당시 가장 큰 아이가 15세, 작은 아이는 8세였다. 지금도 꾸준히 그들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조금 더 여물었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으려나.”

몇 년만 더 지난다면 더 유용해지겠지만, 그들의 첫 활동은 이번 일이 될 것이다. 히나에게 상세한 내용이 적힌 문서를 들려 보냈으니 에반스가 벌써 시작했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된 보고를 받아 두어야 마음이 편하리라.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할 테니까.

한참 깃펜을 놀리던 에스메랄다는 별채 방향에서 들려온 희미한 펑 소리에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라그나가 또 마나 수식을 터트린 모양이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전서구용 실드 마도구 생산이 너무 느리다. 연구도 좋지만 생산에도 집중해 줬으면 하는데 말이다.

“천천히, 급한 것부터 하자고.”

에스메랄다는 시녀를 불러 라그나에게 서신을 전했다.

「전서구용 실드 마도구 생산을 최우선순위에 둘 것.」

그 서신이 보내진 후 30분 만에 라그나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집무실에 발을 들인 라그나를 바라보는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이런 건 도제를 들여 달라고 했잖아! 연구랑 제작이 뚝딱하고 한 번에 되는 줄 알아?!”

정말이지, 저 성질머리하고는. 화가 났다고 씩씩거리며 달려올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만들면 얼마나 좋은가?

이미 이와 관련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기존 수식이 정립된 마도구는 도제를 들여서 만들게 해 달라고. 에스메랄다는 쓸 만한 도제를 찾아보겠다고 답해 주었다. 물론, 그녀의 마음에 드는 인물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는 말도 함께.

가문의 마법사를 붙여 주기엔 테노리엘 백작이 걸리고, 새로 사람을 찾자니 백작 성에 들어온 후에, 그들이 하는 일을 눈치채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을 만큼 절박한 이여야 한다. 그래서 기다리라고 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달려오다니.

“이렇게 찾아올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만들어 가져오게.”

“나는 마나 보유량이 적다고!”

“마석을 보내 주지 않았나. 그걸로 채우며 만들면 될 일이 아닌가?”

심장에 고인 마나를 다 쓰면 자연적으로 다시 모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다시 채우는 방법이 있으니, 마나가 형상화되어 굳어진 마석의 마나를 빨아들이면 된다. 해서 라그나에게 마도구 제작을 위한 마석을 상당량 제공했다. 뷔비르의 상단에는 하품 마석 광산도 하나 있으니까.

“이건 혹사야! 착취라고!”

에스메랄다는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아랫사람들에게 엄해졌었다. 그들을 자애롭게 다독이면서 가기에는 가던 길이 너무 험했으니까. 상벌을 분명히 한 것은 당연했고, 요구하는 능력치도 높았다. 지쳐 나가떨어진 이들도 적지는 않았지만 쫓아오며 성과를 낸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고로 에스메랄다는 익숙한 태도로 라그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본디 당근과 채찍은 함께할 때 효과가 좋은 법. 며칠 전에는 나단의 일로 당근을 잔뜩 주었으니 오늘은 채찍질이다.

“내가 주는 것은 누리면서,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익…….”

“잔말 말고 돌아가서 일하게. 적당한 이를 찾는 대로 도제를 들여 줄 테니 그 전까지는 진득하게 좀 기다리고.”

에스메랄다의 작은 손가락이 라그나의 뒤에 있는 집무실 문을 콕, 하고 가리켰다. 라그나는 분을 못 이기겠는지 몇 번이고 가슴을 치다가 돌아갔다.

“쯧.”

그를 쫓아낸 에스메랄다는 오늘과 같은 상황이 이걸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마 며칠 지나지도 않아 또 같은 일이 벌어지겠지. 저 옹고집 노인네를 손에 넣은 건 좋지만 라그나가 가진 최악의 단점은 다혈질이라는 것이니까.

“다시 생각해도 열이 오르네.”

앞으로 그로 인해 받을 정신적인 피로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미래에서도 절대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 사이로, 그녀의 한숨 소리가 낮게 깔렸다.

* * *

이런 게 삭신이 쑤신다는 것일까? 아르페시스는 그제부터 시작된 욱신거림에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헤롤의 말이 씨가 되기라도 했는지, 관절이라는 관절은 모조리 쑤시는 게 앓는 소리가 절로 날 정도다. 체중이 실릴 때는 무릎이 부서질 듯 아프기도 했다. 애초에 이 생소한 통증 때문에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무릎이 지끈거려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서 힘을 빼 버렸었다. 그렇게 잠시 비틀거렸더니 상대 중이던 마수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방울뱀을 기원으로 하는 소형 마수, 아트라스의 꼬리에. 그 결과 갑옷 하나가 일그러져 못 쓰게 되었고, 갈비뼈가 똑 부러졌지만 다행히도 뼈에 장기를 찔리는 등의 심각한 부상은 피해 갔다.

부상을 입은 즉시 호위 기사들이 그를 후방으로 빼냈고,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등의 대처를 했기에 심각해지지도 않았다. 이후 신관의 치료를 받아 멀쩡해졌다. 하지만 이놈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어디 앉아 있거나 서 있으면 무릎이나 허리가 지끈거렸다. 고로, 아르페시스는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 침대에 늘어진 상태였다. 빨리 헤롤이 말한 약제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던 중 방문한 헤롤에 의해 아르페시스는 통증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뭐라 했지?”

잠시간 굳은 채로 눈을 끔뻑이던 아르페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마르지 않아 축축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혹여나 구겨진 곳이 있나 싶어 옷매무시도 가다듬었다. 흡사 손님을 맞이하기 전 의복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헤롤의 시선에 조금의 흡족함이 떠올랐다.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 황자 전하께.」

정갈한 필체로 수신인이 명시된 서신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헤롤의 천막에 얌전히 앉아 있던 전서구가 가져온 서신이었다. 군의 우편부에 서신을 의탁해 연락을 주고받기엔 번거롭다고 판단한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내어 준 사유 전서구였으니, 발신인은 당연히 에스메랄다였고.

아르페시스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고, 헤롤은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내게? 정말인가?”

“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의 모습은 40대가 넘은 헤롤에게 꽤나 재미난 광경이었지만, 그 감정의 대상이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라는 점이 못마땅해 말이 짧아졌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그런 헤롤의 변화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오롯이 손에 들린 작은 종이에 집중되었으니까. 밀봉된 접면을 떼어 내자, 유려한 필체로 쓰인 문장이 그를 사로잡았다.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조금 늦었으나 진심을 담은 감사를 전해 봅니다.

매일 잠들기 전 눈에 담곤 하니, 오래도록 피어 있을 수 있게 공을 들여 볼 생각입니다.

저는 연합군의 노고 덕에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으나 일전 전하의 부상 소식을 전해 들어 평온한 일상이 무겁게만 다가오는군요. 무탈하신지, 언제나 걱정입니다.

부디, 저의 평온이 전하와 함께하기를 바라며.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

매일 잠들기 전에 본다면… 침실에 라퓨나를 장식해 주었다는 의미일까? 추측에 불과한 생각임에도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며 널을 뛰었다.

더욱이 걱정한다니! 에스메랄다가 그를 걱정한다니! 답을 바라서 그녀에게 선물과 서신을 보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신에는 그를 기쁘게 만드는 글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이건 분명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이겠지? 아니,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냥 윗사람이 보내니 억지로 답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몸 전체로 퍼져 그를 붉게 물들였다. 이유 같은 건 솔직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보낸 서신을 읽는 것만으로 행복에 도취되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당장 책상으로 향해 깃펜을 들었다. 머릿속에 든 것을 모조리 쏟아 내다 문득, 흠칫 몸을 떨었다. 글을 갓 배운 아이도 아니고. 이 단순하고 볼품없는 문장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에스메랄다가 보낸 서신에는 짧지만 우아한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비교되지 않나!

사랑은 때때로 많은 것을 왜곡시킨다. 그리 길지도 않은 간결한 서신 속에서 우아함을 논하는 아르페시스를 보라. 그것이 자신만의 견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그가 새 종이를 찾았다. 경박스러움 대신 품위 있게. 아니, 근엄해 보이는 게 좋겠다. 매력적인 사내로 여겨질 수 있는 그런 답신을 쓰자.

……그런데 그걸 어떻게?

“으으…….”

아르페시스는 일전 경험한 바 있는 문학적 소양의 부진함을 실감하며 끙끙거렸다. 종이를 세 번쯤 갈아 치웠을까? 답신을 받아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헤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헤롤의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라.”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헤롤이 천막을 나서자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조금 전, 에스메랄다의 서신으로 인해 발그레해졌던 것이 흥분과 기쁨 때문이라면. 이번에는 애처럼 안달복달,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서 오는 수치심 때문이었다.

설마, 헤롤이 지금 본 것들을 에스메랄다에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전하는 건 아니겠지? 아르페시스는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린 채 헤벌쭉하게 늘어졌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가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몰랐으면 좋겠는데. 훌륭하고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는 손부채질을 시작하며 한참 동안이나 얼굴에 오른 열을 식혔다. 이후 두어 시간 정도 다시 이어진 시작한 답신 쓰기는 그에게 자괴감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새로 펼쳐 든 종이가 열네 장에 달했을 때. 그는 자신에게는 글재주가 없음을 인정하며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쓰기로 했다.

「그대에게 답신을 받게 돼서 무척 기쁘다. 라퓨나를 매일 밤 잠들기 전 본다고 해 주어서 또 한 번 기쁘다.

조금의 사고가 있었지만 나는 무탈하다. 그대의 축복 덕분인 것 같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혹여나 그대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언제나 걱정된다.

부디, 그대도 무탈하기를 바라며.

아르페시스」

이 삭막한 서신이 그의 최선이었다. 차라리 얼굴을 보고 말을 하면 이보다는 괜찮을… 것이라고 확신은 못 하겠다. 아르페시스는 백작 성 내부에서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도망쳤던 자신을 상기하며 침울해졌다.

“하아.”

그는 얕은 한숨과 함께 인장을 꾹 눌러 찍었다. 천막을 나서는 그의 손에는 방금 완성한 서신이 들려 있었다. 달콤한 감정에 이성이 조금 마비되긴 했지만… 완전히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에스메랄다 사이의 친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황제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움직여야 한다. 헤롤의 천막 앞에 멈춰 선 그는 쭈뼛쭈뼛, 천막의 입구를 젖혔다. 왜 이렇게 민망하지?

“자르간 경 있나?”

“예, 전하.”

침상에 누워 있던 헤롤을 비롯해 천막 내부의 인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그들 모두가 취침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녀에게 보내는 답신인데…….”

모든 일과를 마친 기사들이 이후 할 일이라곤 누워서 눈을 감는 게 전부였다. 할 일이 없으니 갑자기 등장한 아르페시스를 쳐다볼 여유가 넘쳐난다는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에게 고정된 다섯 쌍의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헤롤의 천막은 테노리엘 출신의 기사들만 쓰는 곳이다.

“늦지 않게 발송하겠습니다.”

“……고맙군.”

귀가 벌게진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꼭, 연서를 주고받는 모습을 타인에게 들킨 것처럼 쑥스러웠다. 속이 간질거렸고 조금 전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무릎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아으…….”

아르페시스는 살짝 다리를 절며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 * *

페드로는 오랜만에 온몸을 땀으로 적신 상태였다. 지하 보관소에서 나름의 조사를 계속하던 그는 본인의 성질머리를 이겨 먹지 못하고 연무장으로 나와 버렸다. 인간을 좀먹는 불안감, 초조함, 그리고 무력감.

“다음.”

며칠 얼굴을 보이지 않아 흐트러지지 않을까 했더니 그 정도로 부족한 놈들은 아닌 모양이다. 페드로는 자신 없이도 기존의 훈련 일정을 철저히 지킨 용병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는 지금 마음을 다스릴 겸 몸을 쓰는 중이다. 겸사겸사 진척이 없는 현실에 대한 분풀이도 할 겸.

부정적인 감정을 대련으로 푼다는 점에서 매우 건전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페드로를 상대하는 이들은 건전함이라는 단어에 동감하지 않을 터였다. 대련 중에 목숨의 위협을 몇 번이나 느꼈으니까.

마나를 두른 검이 부딪칠 때마다 귀가 아플 정도의 굉음이 일었다. 페드로가 쳐올린 검이 상대방의 복부를 훑었다. 만약 서둘러 상체를 뒤로 넘기지 않았다면, 배가 갈라져 장기가 쏟아졌으리라. 등을 타고 내리는 땀이 긴장감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격한 움직임으로 인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흡!”

페드로는 상대방의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린 것을 노려 몸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어지는 검이 하체로 향하자, 상대방은 뒤로 걸음을 물리며 검으로 페르도의 검을 막았다. 그렇게 검이 막힌 사이, 페드로의 주먹이 상대방의 턱을 가격했다.

“다음.”

몸을 움직여도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페드로는 열댓 명의 용병들은 물론, 자신의 종자들까지 한 번씩 상대한 후 검을 늘어트렸다. 아무래도 이런 방식으로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모양이다.

떡 벌어진 페드로의 어깨가 오늘따라 조금 처진 듯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그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연무장을 벗어났다.

본성으로 향하던 그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실내의 따듯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속이 더 답답해질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성내로 들어가는 대신 걸음을 돌려 본성 주변을 거닐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상념과 함께.

“꿈… 테노리엘…….”

아직 그 어떤 연결점도 찾아내지 못한 단어들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푸드덕거리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린 건 꽤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나는 곳이 집무실 근처임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검게 물든 구름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하늘이 가장 먼저 시야를 사로잡았다.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날이 차가우니 진눈깨비가 될 수도 있고. 조금은 암울한 색채의 하늘 아래,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새가 보였다. 아무런 마법 처리도 하지 않아 갈색 본연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 전서구.

“헤롤에게 준 그건가…….”

아르페시스에게 건네줄 약제는 이미 사람을 통해 보냈다. 새가 그걸 들고 날아가긴 힘들 테니까. 헤롤과 무슨 말을 주고받기에 저 새가 다시 하늘을 날아갈까? 페드로는 전서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천사나 보러 갈까?”

의문사를 고른 것이 무색하게, 그는 곧장 걸음을 옮겨 본성에 들어섰다. 에스메랄다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녀를 본다고 이 답답한 것이 풀릴 리는 없지만 적어도 아주 잠시나마 기분은 나아지리라. 성큼성큼 계단을 밟아 오르자 그녀가 있는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천사야.”

텅 비어 있는 집무실은 꽤나 어색했다. 페드로가 에스메랄다를 쫓아온 후 그녀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으니까. 그는 함께 식사를 할 때 사용하는 소파와 낮은 테이블을 지나 책상 앞에 섰다.

“전서구…….”

종이가 가득가득한 책상을 훑어보던 페드로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전서구들에게 내어 준 개인 서재였다. 곁문을 열자 역시나, 창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생각은 물론 감추는 비밀까지 많은 그의 누이. 페드로는 자신의 명치쯤에 겨우 오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저 조막만 한 몸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집어넣고 있는 것일까?

“천사야.”

그 순간, 페드로에게는 자신의 부름에 답해 뒤를 돌아보는 에스메랄다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예전이라면 저 부름과 함께 환한 미소를 보았을 텐데. 그리하여 그 또한 웃게 만들어 주었겠지. 속에 켜켜이 쌓인 근심과 불안 따위를 모조리 밀어내 주던 그 밝은 미소가 그립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예쁘니?’

기억 속에 남은 모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근데, 그런데 너무 작아요.’

‘우리 곁에 너무 빨리 와서 그래.’

‘왜요? 전 기다릴 수 있었는데…….’

‘우리가 보고 싶어서, 그래서 동생이 서둘렀나 봐.’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색, 색 작은 숨을 내쉬던 아기는 작았다. 어리고 어리던 그가 보기에도, 너무 작아서 걱정이 될 정도로. 그가 더 어린 시절 보았던 두 남동생은 쌍둥이였음에도 날을 다 채우고 태어나 에스메랄다만큼 작지 않았다.

페드로는 천천히 걸어 에스메랄다에게 다가갔다.

‘펠.’

‘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에스메랄다와 눈높이를 맞추었을 때, 그는 오래전 모친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동생이 너무 서둘러 오는 바람에 너희처럼 튼튼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에 행복할 수 있게.’

‘꼭 지켜 주렴.’

그 당부에 분명히 맹세했는데.

‘네, 어머니.’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그를 보면, 모친은 뭐라고 할까. 커다란 손이 붉은 홍조가 그려진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라버니?”

평소 그녀의 표정보다 조금 풀어진 듯 보이는 건 착각일까? 조금 전 날아간 그 전서구 때문에?

그는 아르페시스의 부상 소식에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힘들어했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아르페시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오면 그녀는…….

“또 울까?”

“네?”

자신의 품에 매달려 울던 그녀가 아직 생생한데, 또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페드로는 한참 동안이나 에스메랄다의 뺨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 * *

「그대에게 답신을 받게 돼서 무척 기쁘다.」

아르페시스는 귀족들이 말하는 우아한 화법을 질색했고, 비유적인 표현을 어려워했다. 문학적 소양을 쌓는 일을 등한시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머릿속에 든 생각과 마음이 느끼는 감정을 진솔하게 전하는 사람이었다.

“하아…….”

길지도 않은 서신에 이토록 마음이 동요하는 건, 분명 그걸 알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심임을 알기에, 약이라도 한 것처럼 몽롱해지는 것이겠지.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선 일전의 기억들이 쉼 없이 오갔다.

그가 틈만 나면 얼굴을 붉히던 것은 물론, 말 한 번 더 걸어 보고자 눈치를 보던 것도. 올곧게 마주했던 시선과 묘한 빛을 지닌 은회색 눈동자, 그 안에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모습까지.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짧은 서신을 쓰다듬었다.

“이래서 위험하다는 건데…….”

인간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고, 이성으로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번 그 감정을 잘라 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죽음으로부터 1년여 전의 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그녀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비난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정적들이 내뱉는 말은 모함이고 모욕이었지, 비난은 아니었다. 그런데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해 선택한 길을 비난받았다. 당시 유일하게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그 미친놈들을 치우겠다고 무고한 이들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에스메랄다가 그걸 몰랐겠는가? 당시에는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황태자를 황위에 올려선 안 되었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비난받았고, 이후 1여 년간 그가 연락을 하지 않는 단절로 이어졌다. 그 경험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그녀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후우, 후우…….”

에스메랄다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가장 믿는 이에게 처음으로 받았던 비난은 그녀의 심장에 자국을 남겼다. 커다랗게, 그리고 또한 지워지지 않게.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써 온 연설문이 그 가정을 확신으로 만들어 준다. 또 한 번 지키기 위한 싸움을 위해 죽음과 직면하겠지. 그에게는 그 방향이 옳은 길이기에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을 터. 결국 그와 함께하는 길에서 기다리는 건 그때와 같을 것이다.

그날의 비참했던 심정을 가져와 곱씹고, 곱씹었다. 그렇게 반드시 도래할 상처를 경험함으로써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깃펜을 쥐었고, 평소보다 공들인 필체가 글귀를 만들어 내었다.

“잘라 낼 때까지만…….”

에스메랄다는 종이의 접면을 봉하며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아주 잠시만…….”

그가 자신에게 주는 달콤한 감정을 누리자고. 고통을 향해 스스로 발을 내미는 어리석은 선택은 짐승에겐 불가능한 인간만의 특권과 같다. 인간은 눈앞의 길이 잔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고자 한다. 다가올 잔혹함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웃는다.

전서구를 띄우는 에스메랄다의 볼은 홍조로 물들어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날아가는 전서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가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답을 들고 올 전서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천사야.”

페드로는 언제나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에 에스메랄다는 놀라는 대신 그가 왔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하며 넘겼다. 다만 그답지 않게 침울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또 울까?”

“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페드로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페드로는 대답 대신 아련하게 웃기만 했다. 그 미소가 에스메랄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포근하게 웃던 그를 기억하기 때문일 터. 페드로에게 에스메랄다의 미소는 당연한 것이듯, 그녀에게도 페드로의 미소는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어 주던 이들이었으니까.

“글쎄…….”

페드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 주며 말꼬리를 흐렸다. 고요한 적막 아래 가라앉아 이리저리 뻗어가는 감정들. 서로가 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상대방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직시하지 못했다. 눈빛만 보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확신이라는 단어는 결국 추측을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먼저 적막을 벗어난 건 평소의 미소를 되찾은 페드로였다.

“어머니의 연주실에 들렀다지?”

그건 또 어디서 들었는지.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번쩍 안아 드는 페드로를 응시했다. 평소의 그다. 에스메랄다는 땀이 채 마르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주었다. 그에게 낯선 표정을 만들게 한 것이 자신인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빗속을 뚫고 달려왔던 그는 어느새 다시금 그녀의 세상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자신을 홀로 남겨 두고 떠났던 가족을 향한 원망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냉혹할 수는 없었다. 그녀도 결국 아르페시스를 두고 먼저 죽어 버린 죄인이었으니까.

그녀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우는 그녀를 안아 든 채 속삭여 주던 페드로의 사과 덕분이기도 했다. 처음 시간을 되돌아왔을 때, 가족들을 원망하면서도 사과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참 우습게도, 그 누구도 그녀를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으니까. 그 덕분에 그들에게 향하는 그리움을 잘라 내기 수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속 편하게 웃을 수 있어서 좋겠다고. 기억이 없어서 좋겠다고. 잔뜩 비꼬며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가족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른 이들은 그녀가 세운 벽을 넘어오지 못한 채 전전긍긍했지만, 페드로는 그것을 넘어와 사과를 해 주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기억조차 가지지 못했으면서.

“섭섭한걸.”

“…….”

“내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으면서, 라그나인지 뭔지 그 불순한 놈에게는 들려주고 말이야.”

별것 아닌 일로 투정을 부리고 농담을 건네며 따듯한 품을 내어 주는 가족. 그들을 원망하고 또한 사랑한다. 그들을 평생 미워하고 싶으면서, 또한 이제 그만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정을 말하지도, 용서를 행하지도 못했다.

페드로가 아무리 다정히 다가와도 에스메랄다의 심장 한구석에 뿌리를 박은 원망은 절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를 향한 죄책감은 원망을 완충해 주었을 뿐, 사라지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보았던 페드로의 모습을 자신의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에 새기기 위해서.

“나도 듣고 싶은데.”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청록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한때, 진실로 그리워했던 사람이 지금 그녀의 곁에 있다. 당시에는 죽었던 그가 살아 돌아오는 꿈을 꿀 정도로 그리워했었다. 그러니 지금 그가 곁에 있는 건 기적과 다르지 않았다.

“응?”

“…….”

“천사야, 응?”

“……잘 못 해요.”

사라진 시간에서는 열 살이 넘었을 무렵부터 틈틈이 연습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해 손가락이 굳어 있었다. 나단의 앞에서 해 준 건 그럴 필요가 있어서였지, 그녀가 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마저도 찬사를 받을 만큼 잘하지는 못했고.

“설마.”

“네?”

“네가 뭔가를 잘 못 하고 그럴 아이가 아닌걸.”

창가에 걸터앉은 페드로가 계속 그녀를 졸랐다. 그에 먼저 항복기를 든 것은 에스메랄다였다.

“조금만이에요.”

“그럼, 그럼. 딱 한 곡만.”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품에 안겨 다시 모친의 연주실에 들어섰다. 이제 그의 품은 제 자리인 것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과거의 한때처럼 피아노 앞에서도 그녀는 페드로의 무릎 위에 앉은 채였다.

어색함을 두른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고, 선율이 공기 위에 올라탔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의 에스메랄다가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설명하지 않았고, 페드로 역시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아는 곡을 따라 흥얼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조금이라고 말한 에스메랄다도, 한 곡이라고 말한 페드로도. 그 누구도 그만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연주실에는 꽤나 오래도록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연주가 멈춘 건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춰 주었을 때였다.

“행복하구나.”

“…….”

“너는? 너도 행복하니?”

귓가에서 울리는 속삭임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행복? 그게 어떤 것이었더라? 그녀 역시 자신의 입으로 행복을 말하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어느 순간부터…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몸과 영혼이 닳아 버릴 정도로 버거운 감정을 짊어지고 걸어온 시간이 있는데. 그럼에도 다시 그때처럼 행복해질 수 있느냐고. 지독했던 격동의 순간들을 모두 겪었는데도, 그 순간의 행복을 다시 겪는 게 가능한가?

아니, 그 시절의 행복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나도 선명한 답이었다. 어떠한 이견도 없이 그건 불가능했다.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저는…….”

그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행복을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에스메랄다는 보지 말아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모두 보고 들었다. 그로 인해 그녀가 변해 버렸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기억 속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전 아르페시스를 향해 보내는 서신을 들고 날아가는 전서구를 보며 분명히 설렜다. 그것도 행복의 한 종류겠지. 또한 지금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차디찬 공기와 그 밖으로 보이는 진눈깨비 같은 눈송이를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등 뒤에 닿은 따스한 체온. 귓가에 스며들어 온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 벽난로에 불을 지피지 않아 차게 식은 손을 감싸 주는 손길. 그 시절과는 다르지만 분명히 과거와 다른 형태의 행복이 존재했다. 본래의 미래와 달리 변해 버린 아르페시스와 기꺼이 달려와 품을 내어 준 페드로 덕분에 가능한 행복.

망가질 대로 망가진 스스로가 아직까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고. 마음속에 키우고 있는 원망이 너무나도 생생해 화가 났다. 조금 전 보았던 페드로의 표정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것 같아 죄스러웠다. 그를 밀어내지 못한 스스로의 나약함을 원망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밀어냈다면, 조금 전과 같은 표정은 보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아르페시스를 떨쳐 내지 못한 스스로의 나약함에 안도한다. 그를 향한 감정을 정말로 잘라 내었다면, 조금 전의 설렘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나약함을 탓해야 하는 건지, 기꺼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에스메랄다는 문득,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겨웠다. 그녀 스스로가 조금 더 강건한 사람이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저도 행복해요.”

맑은 물방울이 에스메랄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모진 행동에도 불구하고 달려와 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런 것뿐이라니. 못나고 못난 누이의 행동에 상처받았을 그에게 미안했다. 그럼에도 페드로가 미워서 사과를 할 수가 없었다. 지독한 감정이다.

“그래?”

다시 한번 정수리를 감싸는 온기에 취한 에스메랄다가 몸을 돌려 페드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사과라는 건 고작 이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행이구나.”

“…….”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번에는 페드로가 그녀에게 연주를 들려주었다. 큼지막한 손이 투박한 솜씨로 건반 위를 뛰어놀았다.

* * *

익숙함이란 방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논리는 아르페시스에게도 적용되었다. 처음 전장에 발을 들여 바짝 긴장했던 때와 달리, 며칠간의 반복 노동에 적응한 그는 방심했다. 그 결과가 지금 그의 오른쪽 팔을 가득 차지한 자상이었다.

“긴장을 놓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지.”

갈비뼈가 부러진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다. 아르페시스는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롤의 말에 어정쩡하게 답했다. 그러는 사이 도착한 신관이 아르페시스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야는…….”

“제한적이지. 그렇기에 전투 시 항상 후방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시야에 담지 못하는 방향의 기척까지 신경 쓰라고 했다.”

“한데 왜 그러셨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마치고 천막에 돌아오고 싶었으니까. 전방에 보이는 마수에게 계속 달려들다 호위 진영을 벗어났고, 측면에서 마수가 근거리까지 다가왔다. 급히 팔로 막기는 했지만, 견갑과 갑옷을 뚫은 마수의 발톱이 그를 쓸고 갔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빨리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가 지극히 사적이었으니까.

“잘못… 했다.”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부상이 완치된다고 해도 당분간은 움직임을 최소화하시길.”

아르페시스가 멀쩡한 왼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다.”

지금 헤롤이 하는 꾸중의 모든 것이 그에 대한 걱정 때문임을 안다. 어쩌면 그로 인해 걱정할 에스메랄다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고. 그렇기에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식의 꾸중을 들어 본 적이 없기에 지금의 상황 자체가 어색한 것뿐이었다.

“내일 전투는 불참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아르페시스는 연합군이 정식 출정한 이후 꾸준히 전선에 섰다. 그 사실을 휘하 병력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연합군의 사기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명령을 하는 윗사람이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전장에 선 덕분이다. 해서 사기를 위해서라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르페시스의 생각이었지만…….

“자상이 작지 않으니 신력으로 인한 회복에 기력 소모가 심하실 겁니다. 하니 최소한의 휴식을 권해 드리겠습니다.”

신력은 부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빠르게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만큼 몸에 부담이 가고, 신력 치료 이후에는 체력을 염두에 두어 식사량과 수면 시간을 늘리는 게 보편적이다.

아르페시스는 천막 내부에 들어와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휴고는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헤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현재 헤롤의 행동은 조금 과한 면이 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행동의 거취를 강요하고 있으니까. 휴고를 비롯한 근위대는 그 누구도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고로 아르페시스는 이런 식의 간섭 자체를 처음 받아 보았다.

“……알겠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게, 사실 조금은 기쁜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장에 나서지 않으면 천막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유에 비중을 둔 그가 헤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천막 밖으로 나가자 아르페시스는 곧장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상처는 모두 아물었지만 혹시 몰라 사용을 최소화하라는 말을 들어서 왼손으로 서랍을 뒤적거린 그는 원하는 것을 금방 찾았다.

「무사하시다는 소식에도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세요.」

「눈이 쌓일 만큼 많이 내리는 지역은 아니나, 그럼에도 땅이 얼어 있으니 항시 조심하시길.」

「오라버니들께서도 훌쩍 커 버리셨죠. 다시 만나 뵙게 될 때는 놀랄지도 모르겠어요.」

「전하를 위하는 마음을 담아 인편으로 약제를 보냅니다.」

처음 받은 서신 이후로 에스메랄다와의 사적인 연락은 계속되었다. 그 시간이 지속될수록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헤벌쭉, 하게 풀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이것 때문에 빨리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고 싶었다. 그녀가 보내온 무수한 글귀 모두가 그를 고양시키지만 그중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아주 짧은 단어였다.

「에스메랄다.」

친분이 없는 이들은 예법에 따라 본인이 가진 이름을 모두 기재한다. 자신의 태생과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당위성을 심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몇 번의 답신을 주고받은 후 그녀는 태생과 출신을 담는 단어를 거두고 이름만 적어 보냈다.

장족의 발전, 그녀와 조금은 친해진 것이다! 그 변화가 기꺼운 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 같았기 때문이다. 뭐, 그게 아니었더라도 그의 기분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녔겠지만. 사랑에 빠진 사내는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글을 어찌 이리도 곱게 쓰지?”

아르페시스가 녹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서신을 받은 후 그의 하루 일과에 새로 끼어든 것이 있었는데, 그녀가 보낸 서신들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실실거리는 일이었다. 천막을 혼자 쓰니 누군가 그걸 볼 걱정도 없다. 그는 히죽, 히죽, 제멋대로 올라가는 입매를 매만지며 서신을 정독했다.

“아으, 이것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책상에 엎드린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그의 들뜬 감정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었다. 무거운 현실과 삭막한 가족사를 내려놓았기에 아르페시스로부터 진실된 모습이 튀어나왔다. 눈앞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그는 남은 시간은 모두 서신을 다시 한번 정독하는 데 쓸 생각이었다.

어차피 서부 연합군은 이미 서남 경계선에 도착했다. 진군을 위해 새로운 마수를 찾아 나서는 대신 올라오는 놈들만 막아서기만 하면 된다. 병영과 저지선을 구축하고, 인근에 있는 쿠베트 후작 성과의 연결로를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한 상태. 그 외에도 쿠베트 후작령 바로 옆, 록스 백작령에 주둔 중인 남부군과의 연대도 시작했다.

이후 남은 건 남부군 병력과 연합해 저지선 주변의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전부다. 현재 중부를 통해 물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길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남부군 중에는 경계선과 먼 곳에 병영을 꾸린 부대들도 있으니까. 그것까지 모두 완료하면 서부 연합군의 존재 목적 중 하나인 영토 탈환은 끝나는 것이다. 예상에 따르면 내일 중이면 대강의 일 처리가 완료된다.

「다시 뵐 날을 그리며.」

그를 들뜨게 만드는 짧은 문장. 아르페시스는 웃는 모습 그대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 끝날 테니 남부로 가려나…….”

황태자가 남부에서 연회를 열었다가 친 사고로 인해 남부군의 지휘부들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산처럼 달아오른 상태. 하지만 황제의 단속하에 들어가 감추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고로 아르페시스는 아직 황태자가 남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전해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남부군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는 상황임을 몰랐다. 그저 남부에 가면 이곳보다 마수의 수가 많을 테고, 지금보다 더 힘들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이렇게 딴생각을 할 여유가 있는 것이겠지.

“못 보고 가겠지?”

그녀를 다시 만나는 건… 아마도 시간이 지나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남부의 리퀘나를 수복한 이후. 그것도 그녀가 남부에 와야만…….

“아!”

아르페시스는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꿈속에서 보았던 오래된 책상이 있는 낯선 방. 그 방의 창을 통해 보았던 테노리엘 가문의 마차와 훌쩍 자란 에스메랄다.

“그녀가 남부로 오는 건 확실한 모양인데…….”

그럼 그 방이 남부군 총사령관실인가? 분명 그때 창틀에 기댄 채 손을 흔들어 그녀를 맞이했었다.

“그런데…….”

대륙력 1440년 라 57일. 아르페시스 본인이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던 때에도 리퀘나에서 만나고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문제는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게 그 자각 이후의 일 같다는 것이다. 휴고와의 대화에서 마음을 고하니 마니, 하는 얘기가 나왔으니까.

그럼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남부에 방문하나? 설마, 40년이 첫 방문인 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대체 몇 년도부터, 한 해에 몇 번이나 그녀를 볼 수 있는 것이지?

“이게 정말 예지몽이 맞기는 한 건가…….”

아르페시스는 책상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예지몽이라면 왜,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다른 것일까? 꿈속에서는 1440년, 현실에서는 1432년.

“어쩌면…….”

꿈속의 일들은 아르페시스 본인이 꿈을 꾸지 않았을 경우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 꿈의 꾸는 지금은 그 영향을 받아 현실이 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꿈에서 보는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에스메랄다의 끝이 화마와 함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보다 귀한 발견이 있을까? 미래는 변할 수 있다. 며칠 후면 페드로가 3차 물자를 가지고 도착하니, 이에 대해서 논해 봐야겠다.

“그런 것이라면 내가 벌써 마음을 자각한 게 얼추 설명이 되겠지.”

하지만 그럴듯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럼 그 연회복을 입고 있던 꿈은 뭐지?”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꿈속의 그녀는 지금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 당시, 후원에서 에스메랄다를 만나지 못했다. 꿈속에선 아레스가 에스메랄다를 데리러 왔지만, 현실에서는 아레스가 그녀를 찾고 있었다.

“기왕 보여 줄 것이면 그냥 한 번에 제대로 보여 줄 것이지…….”

그가 믿지도 않는 신이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개꿈과 다를 바 없는 것인지. 골머리가 깨질 것 같다.

“대체 그녀가 남부로 오는 게 언제인지, 그걸 보여 주어야 할 게 아닌가!”

신은 역시나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존재한다면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외면할 리가 없으니까. 자신의 불손함은 생각하지 않고,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신을 매도하다니. 신을 향한 아르페시스의 불신은 더 깊어졌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최악을 가정할 때, 8년 동안 그녀를 못 볼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므로, 아르페시스는 애써 희망적인 상황을 그려 보기 시작했다.

“일단… 최소한 그녀가 성년은 되어야 운신이 자유로울까?”

제국은 사내의 경우 18세를, 여인의 경우에는 16세를 성년으로 인정하니 4년이 남은 셈이다. 아니, 곧 해가 바뀌니 3년하고 고작 며칠.

“3년이나 못 본다고?”

말도 안 돼!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까마득한 숫자에 침울해지기 직전, 그는 테노리엘 백작가에 대해 주워들은 말이 떠올렸다.

“아! 백작이 자제들을 데리고 매년 연말 전선을 방문한다고 했었나?”

그럼 당장 내년에도 볼 수 있나?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들뜬 기색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외부 방문이 가능하려면 리퀘나를 비롯한 성벽들이 수복되어야 하는데…….”

어린 자제들에게 전투를 관전시키려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해야 할 터. 성벽이 없는 지역의 병영은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테노리엘 백작이라지만 지금 엉망이 된 남부로 자제들을 데려가지는 않으리라.

“1년…….”

8년보다, 3년하고 며칠보다 1년이 나은 것은 당연한 일. 그는 잘만 하면 당장 내년에라도 에스메랄다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했다. 실제 에스메랄다의 경우 아홉 살부터 가족과의 교류가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백작을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없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그 오류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열심히 해야겠군.”

어차피 그가 남부군에 들어가면 황태자는 부상이니, 후계 교육이니 명분을 대고 돌아갈 터. 다른 지역도 아니고, 같은 지역에 황족이 둘이나 있는 건 낭비다. 결국 리퀘나 수복은 그가 남부군 총사령관직에 임명된 이후에 진행되겠지. 아르페시스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홀로 다짐했다. 진짜 열심히 해서 다음 해 여름이 끝나기 전 리퀘나를 수복하겠다고. 그래서 그해 다시 에스메랄다를 만나고야 말겠다고.

하지만 아르페시스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재회는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서부의 영토 회복을 공식적으로 황실에 보고한 한 날로부터 이틀 후, 쿠베트 후작 성에서 3시간 거리에 새로운 병영을 설치한 날의 일이었다.

“전하, 테노리엘 페드로 경이 도착했습니다.”

아르페시스는 천막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곧장 답했다.

“들라.”

천막 안으로 들어선 페드로는 인사를 마친 다음 3차 물자 지원과 영토 회복 이후의 일정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뭐라… 했지?”

아르페시스는 예상치 못했던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쿠베트와 테노리엘의 주최로 다가오는 연말, 서부의 영토 회복을 축하하고 연합군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한 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해서 이번 지원 물자에 테노리엘이 보낸 추가 식량이 포함되어 있으니 연합군에게 제공하시면 될 듯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페드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연말은 코앞이니 며칠 내로 그녀를 볼 수 있다!

물론 연합군 소속의 모든 이들이 연회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남부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남 경계선에 세워진 저지선을 지킬 병력이 있어야 한다. 연회에 초대되는 인사들은 서부 연합군에 소속된 귀족들이다. 그것도 일부만. 나머지는 전선에 남아 병력을 통솔해야 하니까.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3차 보급과 함께 도착한 식자재로 가벼운 정찬을 즐기게 될 것이다.

“영애가 제안한 것인가?”

기대감이 가득 담긴 질문에 페드로는 기꺼이 그것을 배반해 주었다.

“중서부 경계선에 주둔하고 있는 중앙군에게 해산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존재 이유가 없는 병력을 오래 유지해 보았자 군수 물자의 낭비로 이어질 뿐이다. 이 때문에 황제는 서부 영토가 회복되자 중서부 경계선의 병력을 해산시켰다. 즉…….

“그 덕에 영지로 돌아오고 계신 아버지가 명하신 일입니다.”

“아, 그런 것이군…….”

“이미 쿠베트 후작님과 일정 조율을 마치셨다고 하시더군요.”

아르페시스의 어깨가 바람 빠진 공처럼 푸쉬식, 아래로 꺼졌다. 그러나 곧 에스메랄다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기뻐하며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이 연회는 연합군의 사령관인 그가 참석하는 게 이상하지도 않다. 에스메랄다와의 사적인 친분을 의심받을 일도 없고. 황제의 눈에 그녀가 특별히 부각되는 일이 없으면서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류와 함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가시지요.”

페드로는 먼저 자리를 이탈하며 행정관 천막으로 향했다.

“연회가 열리는 곳은 쿠베트 성인가? 아니면 테노리엘 성?”

“지원은 테노리엘이, 개최는 쿠베트가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후작 성으로 이동은 언제 시작하면 되겠나? 영… 테노리엘 일가는 모두 참석하는 것이겠지?”

예전이라면 연회에 치를 떨었을 텐데, 이제는 그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한발 늦게 따라붙은 아르페시스는 어느새 페드로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다리처럼 입도 함께 놀리면서.

페드로는 그런 아르페시스를 힐끔, 살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쌍둥이와 하는 짓이 똑같았다. 그걸 실감하고 나면 매번 깨닫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아르페시스가 고작 열여섯 살이라고. 페드로는 저 나이에 성인들의 철저한 보호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대체 왜, 아르페시스가 서 있는 곳은 전장인가.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만 같았다.

“글쎄요.”

“글쎄? 글쎄라니? 그건 무슨 의미지? 테노리엘이 거든 연회에 영애… 아니, 일가의 직계가 참석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페드로의 목에 걸렸던 이물질은 아르페시스가 줄줄이 쏟아 내는 말 때문에 오래지 않아 속으로 넘어가 버렸다.

평범한 직계도 아니고, 영주 대리를 위임하며 후방 지원을 담당한 에스메랄다가 참석하지 않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녀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 괜히 눈꼴셨다. 이렇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페드로는 말을 이리저리 돌리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천사가 워낙 바쁜지라, 저도 모르겠군요.”

“그건… 그건 그렇지만 연합군을 치하하는 중요한 자리가 아닌가! 후방 지원을 담당한 그녀의 공도 치하받아 마땅하거늘, 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럴 것이라면 연회가 아니라 정찬을 개최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녀도 사람이니 식사는 해야 할 테니, 연회보다는 참석할 확률이 높아지겠지. 아니… 그녀는 천사라서 식사를 할 필요가 없나? 잠시간 혼자만의 헛생각에 빠져 있던 아르페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무슨 해괴한 생각인가. 이건 전부 에스메랄다를 천사라고 부르는 페드로의 영향이다.

그는 헛생각을 털기 위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답을 재촉했다.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온 기회에 안달이 났으니까.

“그럼 일정은? 정확한 일정은 어찌 되지?”

쿠베트 성까지 오기만 한다면, 그녀도 최소한 하루는 머물지 않겠나? 다음 해에나 가능할 줄 알았는데!

행정관의 천막에 도착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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