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미래를 향한 갈림길
“일반적으로 건조한 평원이나 덤불이 있는 지역에서 서식하며, 수컷의 경우 풍성한 갈기를 가진다. 한 마리의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거느리며 생활하는 이 동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가, 갈기가 뭐야?”
나단은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라그나는 꾹꾹 눌러 참는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헤에… 그, 그게 뭔데?”
“사자잖아, 사자!”
나단은 버럭 하고 튀어나온 라그나의 말에 움츠러들었다.
“……그게 뭐, 뭔데?”
에스메랄다가 내 준 속칭 상식 문제를 풀며 벌써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었다. 이미 10개의 문제를 읽어 주었건만, 나단이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직 30개 정도가 남았지만… 알 것 같지 않다. 라그나는 이마를 짚으며 끙끙거렸다.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후우… 나중에 그림 같은 거 찾아서 보여 줄게.”
“……응.”
지금의 무지가 나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속이 상해서 자꾸만 언성을 높이게 된다. 나단의 무지가 그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보여 주는 것만 같아서.
“다음 거.”
“…….”
“통상적으로 악기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현악기에 속하며 열 개의 손가락을 모두 이용해 희고 검은 건반을 누름으로써 연주가 가능한 악기의 이름은?”
“……관… 거, 건반? 소, 손가락은 아는데…….”
나단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쭉 뻗어 보였다. 라그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피아노. 아마 본성에 있을 거다. 나중에 보러 가자.”
“……응.”
그런 라그나의 반응에 나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40문제 중 나단이 아는 것은 고작 두 문제였다. 빵과 우유. 그것도 문제에 나온 단어를 몰라 라그나가 풀어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나단은 우유를 젖소에게서 짜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밀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 밀을 빻아 만든 게 빵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상한 속을 자꾸만 엄한 방향으로 풀어내는 스스로를 알고 있었기에, 라그나는 문제를 다 풀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괜히 나단에게 언성을 높여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라그나의 옆에 기웃거리며 누운 나단의 표정은 이미 좋지 않았다.
그는 라그나를 계속 힐끔거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라그나가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들 시켜 주겠다는 말을 취소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나단의 무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아는 삶은 매우 단순하니까. 잠을 자다가 깨면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때때로 유곽이나 술집에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먹기 위해 뒷문에서 기다린다. 어떨 때는 운 좋게 구걸에 성공한 어린아이들의 음식을 빼앗고 운이 좋지 않아 먹을 걸 손에 넣지 못하면 흙바닥 위에 고인 구정물이라도 먹는다.
그는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음악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본 건 라그나를 만난 후였다. 많이 움직이면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웅크린 채 보냈다. 그가 움직이는 건 오로지, 먹을 것을 구할 때뿐이다.
차라는 걸 알게 된 것도, 그걸 마셔 본 것도 라그나가 주워 준 이후였다. 그에게 있어 마시는 건 깨끗한 물, 더러운 물, 혹은 어쩌다 구걸에 성공해 받은 우유 정도니까. 빵에서 나는 냄새를 고소한 냄새가 아니라 배고픈 냄새라고 말하던 나단이다.
말을 하면 배가 고파지는 그의 삶에서 사람과의 교류는 사치였다. 애초에 그가 교류를 할 만한 사람이라곤 같은 지역에 버려진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과는 매일이 전쟁이었다. 그가 먹으면 그 아이들이 먹지 못하고, 그 아이들이 먹으면 그가 먹지 못했으니까.
2년이나 함께 생활했지만 라그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만의 연구를 위해 홀로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글자를 조금 배웠으나 글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나단은 자신이 너무 멍청해서, 라그나가 자신을 버리면 어쩌나 싶은 걱정뿐이었다.
그렇게 부자는 각자만의 우울함을 삭이며 밤새 잠을 설쳤다. 본인들의 걱정거리 때문에 옆에 누운 사람도 잠을 설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런 밤이었다.
* * *
실제 전투를 시작한 이후 휴고는 호위 총괄을 헤롤에게 넘긴 지 오래다. 그의 경험과 식견을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물론, 휴고를 비롯한 근위 기사들 역시 헤롤에게 마수와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 어련할까.
“삼각 호위 대형!”
그런 헤롤의 지시가 떨어지고, 아르페시스가 마른침을 삼킨 지 30분은 흘렀을 것이다. 오늘 전투는 예상치 못했던 요소로 인해 조금 더 길어지고 있었다. 전장의 후미에서는 남북을 기준으로 대각선 형태로 늘어진 세 개의 파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전 연락 없이 중형 마수를 마주했다는 신호였다.
그래, 남쪽에 포진시킨 정찰병과 관측병으로부터 어떠한 신호도 없었건만, 현재 본 부대가 토벌을 하기 위해 마주한 무리에 중형 마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본진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했던 정찰병과 관측병은 죽었으리라. 출몰 개체는 3기, 그중 1기가 이미 죽었다. 한 부대에서 놈들을 조우했다면 다른 부대도 방심할 수 없다.
인간이 체계를 갖추고 준비를 하는 동안 소형 마수는 물론, 중형 마수까지 경계선 지역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렇기에 중형 마수를 염두에 두고 전투를 지속하라는 의미로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물러나! 기사를 방해하지 마라!”
헤롤이 중형 마수 인근의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에워싼 호위 기사들의 곁에서 소형 마수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기사들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마수를 훔쳐보면서. 그가 참여가 아닌 관전을 하고 있는 건 헤롤이 중형 마수를 상대하는 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처음은 지켜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험이 됩니다.’
‘또한, 전하의 체중은 중형 마수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니 접근하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러한 논리로, 아르페시스는 처음 보는 중형 마수와 싸우는 대신 관찰을 하며 배우기로 했다. 인간보다 서너 배는 큰 게 소형 마수다. 마차와 유사한 크기의 괴물이 움직이며 생명을 위협하는 느낌은 상당한 압박감을 준다.
중형 마수는 그런 소형 마수의 서너 배는 더 크다. 거의 민가 건물 하나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거대한 몸체와 중량으로 인해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소형 마수보다 느리다는 것이지 인간보다는 훨씬 빠르다. 그리고 그 단점 같지도 않은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단단한 가죽을 보유하고 있다.
“중형은… 맹수과 짐승이 기원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마수란 호칭은 그들의 기원이 짐승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평범한 짐승이 마기에 잡아먹혀 태어난 존재, 어쩌면 진화한 존재. 짐승으로선 가질 수 없는 지능과 더한 무력을 가진 놈들. 일반적으로 소형 마수의 경우 짐승보다 조금 더 높은 지능을 가졌다고 본다. 상급 마수들의 지시에 따르고 인간을 비롯한 식량을 포획, 축적할 수 있는 정도의 지능.
놈들이 성체로 자라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4년 이하, 수명은 10년에서 15년. 번식력이 높아 마수 전체 중 8할 정도는 소형으로 구성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런 소형 마수들을 지휘하는 중형 마수들. 놈들은 대체로 5~10세 정도의 아이와 유사한 지능을 보인다고 정의된다.
성체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년 이하. 수명은 20년에서 25년. 놈들은 소형 마수를 분대처럼 꾸려 끌고 다닌다. 다른 중형 마수가 이끄는 무리와 연계하는 것은 물론,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가 나타나면 몸을 사리는 등의 행동도 보인다. 소형 마수와 달리 마기를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도가 급격하게 올라간다. 꼬리, 발톱, 이빨, 그들이 가진 모든 흉기에 새까만 마기가 뒤덮여 흉포한 위력을 더하곤 했다.
정말 다행인 건… 소형 마수 몇천 마리에 한 마리 정도의 분포를 보인다는 것이다. 저런 중형 마수가 소형 마수처럼 많았다면 인간은 이미 멸망했을 테지.
“좌측의 가장 큰 놈이 어떤 종인지 아시겠습니까?”
“일모트? 아니면 쉬모트 같군.”
“쉬모트입니다. 일모트의 경우에는 꼬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요. 꼬리의 개수가 많아지면 오래된 놈이니 나이를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지성이 뛰어나다고 보는 편이지요. 부상을 입은 척하며 기사들을 방심시키기거나, 미리 함정을 파 둔 경로로 도주하여 추격대를 몰살시키기기도 합니다. 일모트는 중형 중 유독 잔꾀가 많은 놈들로, 꼬리가 많은 개체를 상대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쉬모트와 일모트는 같은 고양이과 마수이지만 각기 사자와 호랑이를 모태로 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르페시스는 헤롤의 가르침을 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아 있는 2기 중 한 마리는 근방에 있던 상급 기사들이 달려들어 안정적인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고 있는 상급 기사들 대신 중급 기사 7명이 상대 중인 상황. 4명의 중급 기사가 쉬모트의 발목을 붙들고 다른 3명의 중급 기사가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던 상급 기사들이 지원을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들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소형 마수들 때문에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형 마수 때문일까? 놈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체계적으로 바뀐 것 같았다.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지시를 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 쉬모트는 중형 중에서도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읽은 적이 있다. 그게 호랑이를 기원으로 했기 때문이라지?”
“예, 모두 추정일 뿐이지만 알아 두셔서 나쁠 게 없습니다. 짐승일 때와 달리 외관상 큰 차이점은 보이지 않지만…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일모트는 무리를 이루는 사자를 기원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쉬모트와 달리 같은 종끼리 연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서 일모트가 상대하기 더 까다롭다는 평을 받고 있지요.”
“새겨 두겠다.”
이러한 특징의 중형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하다고 보는 대형 마수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놈들은 3국의 전선이 고착되어 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최초 목격으로부터 46년이 지났고 전선을 담당하는 3국에서 대형 마수가 목격된 것은 30여 번.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두 죽이는 데 성공했고 관련된 정보를 3국이 공유하고 있었다. 아비체룬이 문을 걸어 잠그기 전까지는.
하지만 서른 번이 넘는 교전을 거쳤음에도 인간이 알고 있는 대형 마수는 고작 일곱 종이다. 얼마나 많은 종이 더 있는지, 놈들의 정확한 숫자는 얼마인지, 성체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얼마인지. 인간은 대형 마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알아낸 것이라고 해 봐야 고작,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 정도.
놈들은 하급 마수들을 통솔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전술을 흉내 내기도 한다. 후방 기지를 공격해 인간의 물자를 끊으려는 시도는 10여 회 이상.
기사들이 적은 병영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경우도 있었다. 그 때문에 병사와 기사의 무장 상태로 그들을 구분하는 게 아니냐는 견해가 나온 적도 있고.
그 외에도 포위 진형이나 각개 격파, 혹은 별동대를 구성해 치고 빠지는 전술까지 구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상급 기사들이 마나를 신체에서 분리해도 유형화할 수 있듯, 대형 마수 역시 사물에 마기를 씌워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다.
이번에 남부군이 리퀘나를 포기하고 퇴각한 것도 그런 대형 마수 때문이다. 놈들은 리퀘나의 성문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졌다. 상급 기사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외피는 물론, 인간을 따라 하는 지능적인 행동까지.
반군의 이탈로 병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후방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고립의 위험을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뒤를 잡히기 전에 물러나는 것이 당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추정 분포는 중형 마수 1만 마리 중 한 마리 정도. 적다 못해 희박한 개체 수지만… 3, 4년에 한 번씩은 꼭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황실에는 그때마다 관찰 보고서가 작성되어 올라온다.
「쉴페므 남작령 주둔지 인근 출몰, 전투 불참, 후방에서 부동.」
「연기 신호 체계를 주시하는 모습을 목격.」
「후방 물자 부대 인근 출몰,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부동, 4시간 후 철수.」
「중형 마수 15기로 구성된 별동대를 대동. 교란 및 기습 작전을 연습하는 것으로 추정.」
「기사들의 시체나 갑옷에서 뿔피리 소실. 위치 특정 불가. 마수가 회수해 갔을 것이라는 추측.」
「인간을 관찰 중이라는 의견 다수.」
대다수의 학자들이 작성된 보고서의 내용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마수들이 인간을 관찰하고 있다는 말을 보며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중대형 마수들도 장기를 다치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이기에, 저런 식으로 외피를 걷어 낸 후 내장을 노리는 방식이 안정적입니다.”
헤롤이 아직 보지 못한 대형 마수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현실로 데려왔다.
“마나와 체력 소모가 심하겠군.”
“근접 거리에서 교전을 하다가 죽는 기사들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오래 걸리더라도 안정적인 전투를 하는 것이지요.”
병사는 짧은 시일 내에 양성이 가능하지만 기사는 아니다. 결국 지금의 방식은 기사의 부상과 사망 등을 방지하기 위한 소극적인 전략이다. 헤롤은 그 부분도 빠짐없이 설명하며 짧게 혀를 찼다. 소형 마수를 상대하면서도 기사들과 2기의 중형 마수의 전투를 지켜보던 아르페시스는 쉬모트라 불리는 마수의 꼬리가 중급 기사의 허리를 휘감는 걸 보았다.
“아!”
근처에 있던 기사가 꼬리를 잘라 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뒷발에 치여 날아갔다. 그사이 마기가 덧씌워진 꼬리에 잡힌 기사가 바닥에 몇 번이고 처박혔다. 마수의 주변으로 뿜어지는 검은 마기가 파란 마나를 덧씌운 기사들의 검을 약하게 만든다.
“크악!”
허리춤의 갑옷이 우그러지면서 마수에게 잡힌 기사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고작 꼬리인데, 당장이라도 인간의 허리를 끊어 낼 것만 같았다.
“꼬리를 잘라야 한다!”
다른 기사가 마수의 뒤로 돌아갔지만 놈은 쉽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은 기사를 방패처럼 앞세우거나, 휘두르기까지 했다.
“지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하께선 중형 마수를 상대하시기에 체중이 너무 가벼우십니다.”
꼬리질 한 번에 날아갈 정도로.
“마나 가중을 염두에 두었을 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체중은 90kg 이상입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현재 아르페시스는 성인 남성과 적게는 20, 많게는 40kg까지 차이가 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비교의 대상이 평범한 성인 남성이 아니라 우락부락한 기사들이기는 하지만… 그가 다른 이들보다 가벼운 건 맞다.
“그러면 자네들이라도…….”
“저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테노리엘의 직계분들 뿐이며, 저희가 현재 하달받은 임무는 전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허공을 가르는 파란 잔상이 마수의 엉덩이에 박힌 건, 아르페시스와 헤롤의 대화가 있던 도중이었다. 꼬리에 붙잡힌 기사가 피를 한 움큼 토해 내는 사이 마수가 주저앉아 버렸다.
아르페시스는 마수의 엉덩이에 박힌 단창을 한 번,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전투가 진행 중인 곳은 산악 지대였다. 산을 넘기만 하면 쿠베트 후작 성까지 완만한 언덕이 이어지기에 빠른 점령을 목적으로 진입한 곳. 지형의 특성상 암석이 많은 그곳의 근방에 위치한 절벽 위, 후방에 위치한 병영으로 돌아가는 방향에서 또 한 번의 단창이 날아왔다.
겨울의 청명한 하늘 사이로 그 단창이 날아온 암석 지대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나로 확장된 감각으로 인해 투창을 하고 있는 인물이 페드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손톱만 하게 보이는 까마득한 거리의 밖에서, 페드로가 단창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페드로, 그도 신체를 떠나는 무구에 마나를 담아 공격을 할 수 있는 상급 기사였다. 그것도 대부분의 이들이 20대 중반을 넘겨야 이루는 경지를 성년이 되던 해에 성취해 낸 우수한 기사.
저렇게 아득한 곳에서 던지는 단창에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다니, 그의 마나 운용력은 얼마나 섬세한 것일까?
“일찍 도착하셨군.”
“중형 마수 신호 때문에 오셨나?”
“중형이 올라왔으니 돌아가는 대로 장비를 대검과 단창으로 바꿔야겠네.”
“……갑자기 내 종자가 대검을 가져왔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 서부에서 중형을 볼 줄이야. 기가 막히는군.”
아르페시스가 페드로를 주시하는 사이 주변의 호위 기사들은 잡담을 나누며 소형 마수들을 베어 넘겼다. 붙잡혔던 기사가 후방으로 구출된 이후 마수의 하체에 공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른 중형 마수의 숨통을 끊어 놓은 상급 기사가 합류하자,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중형 마수는 모두 시체가 되어 늘어졌다. 소형 마수까지 모조리 죽인 것은 뉘엿뉘엿, 노을이 지는 시간이 되어서였다.
오늘도 검은 피를 뒤집어쓴 아르페시스는 진영에 돌아가는 길에 페드로와 합류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페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전투 지역까지 어쩐 일인가?”
“중형 마수 출몰 신호가 보이기에 살펴보러 온 참이었습니다.”
페드로가 오면 논의하고 싶었던 것이 있지만, 사람들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나누고 싶은 대화는 아니었다. 우선은 그와 함께 처리해야 하는 공무를 마무리 지은 이후에 주변을 물리고 해결하면 될 터.
진영에 돌아온 아르페시스는 곧장 뒤집어쓴 검은색 피를 씻었다. 그리고 향한 곳은 행정관들이 사용하는 천막.
“서류 보고는 받았다. 물자 상태는 어떤가?”
“징수 후 하자 품목에 대한 검수를 두 차례 진행했습니다. 시일이 지날수록 변질되는 품목들도 있으니 배급 시 추가 검수를 걸치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지별 징수 내역은?”
그 질문에 페드로와 함께 진영을 방문한 기사가 일단의 서류를 가져왔다. 테노리엘 기사단의 행정 업무는 이미 연합군 편성을 할 때부터 인정해 오던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아르페시스는 서류의 양만 아니면 일하기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식사가 준비되었다. 아르페시스는 한 손에 서류를, 한 손에 빵을 든 상태로 업무에 임했다. 서류는 지원 품목별로, 그리고 또다시 철자별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징수 일자와 그 당시 시장에서 형성된 시가 및 원가까지 깔끔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바로 황실에 올려도 될 정도군.”
“과찬이십니다.”
이제 이 서류를 한 부 복사한 후 원본을 황실로 향하는 맹금류과의 전서구에게 들려 보내면 된다. 아르페시스는 지체 없이 지시를 내렸고 페드로와 함께 처리해야 하는 공무는 금방 끝났다. 이제는 물자와 관련 없는 병영 업무다.
“후에 잠시 대화 좀 나누겠나?”
“예, 알겠습니다.”
페드로는 서부 연합군 소속이 아닌 외부인. 병력의 피해 같은 건 내부 정보이기 때문에 그가 있는 곳에서 다뤄선 안 된다.
“천막에서 기다리게. 자르간 경이 안내해 줄 테니.”
“예, 전하.”
어차피 헤롤이 두 아이에 대해 설명할 시간도 필요할 거고, 소개도 해야 할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페드로를 천막으로 보냈다.
연합군 내의 병력 변동 등의 사항을 숙지한 후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천막 내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4명을 볼 수 있었다.
페드로는 작은 돌을 손바닥에 놓았다가, 소매 속으로 집어넣으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헤롤은 그런 페드로의 옆에 기립해 있었고. 세리는 페드로의 무릎에 앉아 꺄륵꺄륵 웃었고, 메리는 페드로가 하는 손장난의 속임수를 알아내려고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아르페시스는 아이들과 놀고 있는 페드로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짠.”
짠이라니, 저 짧은 단어가 페드로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황땨님!”
지난밤의 일 덕분일까? 메리가 웃으며 아르페시스를 반겼다.
“잘 있었느냐?”
“네! 세리랑 노라떠요.”
그는 쪼르르 달려온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얼 하고 놀았기에?”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더군요.”
“퍼즐……?”
질문의 대답은 메리가 아닌 페드로에게서 나왔다. 병영에 퍼즐이 있다고? 그런 걸 누가 들고 온 거지?
아르페시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메리가 그를 퍼즐이 있는 곳까지 데려갔으니까. 거기에 있는 건 조각이 난 종이었다. 그가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실패작들. 이게 왜 여기에……?
그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휴고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각들은 온전한 형태가 갖춰진 상태였다. 아이들이 에렘어를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메리를 따라오느라 지나쳤던 페드로의 목소리가 답을 알려 주었다.
“아이들이 어려워하기에 제가 좀 도와주었습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르페시스는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 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헤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게.”
“예, 도련님.”
페드로의 말에 헤롤이 아이들을 안아 들고 천막을 나섰다.
“해서, 무슨 용건이신지?”
사람이 없어지자마자 짧아진 말투도, 다리를 꼰 채 삐딱하게 기울어진 자세도, 이제 페드로의 무례는 익숙하다면 익숙했다. 아르페시스는 종이 퍼즐이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게… 꿈을 전혀 꾸지 않는다.”
“무슨… 아…….”
이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사람은 페드로뿐이다.
“아니, 꾸긴 하는데… 본래의 색채만 가득한 꿈으로 변했다고 해야 하나?”
페드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천사를 만나기 전에 꾸시던 그 꿈 말입니까?”
“그래.”
“……전하의 용건이 끝나면 꿈에 대해 여쭤보고자 했는데, 해결되어 버렸군요.”
“그…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그는 백작 성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을 때부터 줄곧 이 생각을 해 왔다. 당장 대화를 나눌 페드로가 옆에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뿐.
아무런 정보 없이 색채뿐이던 꿈이 변한 건 에스메랄다를 만난 이후였다. 정확히는 그녀를 만난 날에. 실제로 황도에 있을 때 두 번은 그녀를 만난 후에만 꿈이 변했다. 백작 성에 있을 때야 매일 보았으니 당연히 변한 것이고.
그러한 추측을 내어 놓자 페드로의 얼굴엔 옅은 불쾌감이 떠올랐다. 아르페시스의 말이 에스메랄다와의 인연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불쾌한 건, 그 추측이 꽤나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반응이었다.
페드로는 여전히 아르페시스가 거슬렸다. 그가 백작 성을 떠나던 날 했던 행동 때문에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 간에 존재하는 이유 모를 연결점 때문에 그를 그녀 옆에서 치워 버리지도 못한다.
무엇인지조차 모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 지하 보관소에서의 조사는 지지부진하고, 지난 며칠간 아르페시스가 꾼 꿈도 추가로 없단다. 그 내용을 물어보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하고 물자를 가져온 것인데 소득이 전혀 없다니.
에스메랄다가 전선에 올 일은 없다. 당연히 아르페시스가 백작 성으로 돌아갈 일도 없고. 그러니 그의 추측이 정답이라면, 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헛걸음인가…….”
“뭐라고 했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별것 아닙니다.”
페드로는 인상을 찌푸린 그대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꾸지 않으셨다니 어쩔 수 없지요. 그걸 말씀하시고자 부르신 겁니까?”
“그런 셈이다. 난 논의를 했으면 해서…….”
아르페시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페드로가 조금 더 관심을 보일 줄 알았다. 이제껏 계속 그래 왔으니까. 그런데 지나치게 덤덤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건…….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의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적였다.
사실 고작 며칠이었지만 아르페시스는 꽤나 페드로를 친근하게 여기게 된 상태였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꿈에 대한 얘기를 한 것도 그렇고, 열흘 가까이 새벽마다 얼굴을 보았다. 꿈에서 깬 직후 오락가락할 때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친근감에 한몫을 보태었다. 그래서인가? 조금 허탈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섭섭한 것 같기도 했다.
“용건이 끝나셨으면 이만 일어나 보아도 되겠습니까?”
뺨을 긁적이던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속내를 발견하고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섭섭할 것이 뭐가 있다고. 페드로와 그의 친분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라.”
아르페시스는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포기했다. 애초에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감정과 시간을 투자해 친분을 나누지 않는다. 카덴이나 휴고같이, 몇 년이나 곁에 둔 이들과도 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황제에게 먼저 달려가 자신의 일과를 고자질하지 않기에 말과 태도를 편하게 할 뿐.
그는 이렇게 살아야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황족이라는 이름과 부를 쥐여 주었지만, 사람만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유모, 시녀, 시종, 스승들까지. 황족은 열 살이 될 때까지 유모를 곁에 두는데, 그 10년 동안 아르페시스의 유모는 아홉 명이었다.
말도 못 하는 아기일 때의 2년, 그리고 여덟 살 이후로의 2년은 유모가 바뀌지 않았다. 결국 6년 사이에 일곱 명이 바뀐 셈이다. 아르페시스가 마음을 주고 의지하기 시작하면 유모가 바뀌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빼앗기고 우느니 처음부터 마음을 주지 않는 방법을 익혔다. 혹시 주게 되더라도 빠르게 포기하는 방법도 함께 배웠다. 포기하지 않고 감정의 이유를 곱씹거나 매달린 것은… 에스메랄다와 관련된 게 유일했다.
“하아.”
그런 아르페시스의 감정 변화를 눈치챈 페드로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아르페시스는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저 포기하는 것에 능숙한 것뿐이기에 페드로가 읽기 쉬웠다.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꿈에 대해서 관심이 식은 게 아니었다. 성을 나서면 지하 보관소에 들어갈 수 없으니, 떠나기 전 이틀 정도 밤을 새워서 조사를 지속하다가 곧장 이동을 했기에 피곤한 것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르페시스에게 고정되었다. 본인에게는 당연했던 모든 것을 해 줄 사람이 없는 아르페시스.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의 나이가 16세라는 것을 상기한 페드로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그 나이대에 뭘 했더라… 같은 생각과 함께.
그는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아레스와 놀았다. 연무장에서, 저택 내부에서. 술도 그와 함께 배웠고, 승마 경주를 하기도 하고, 밤 시중 시녀를 통해 얻은 경험에 대해 쑥덕거리기도 했다. 때로는 싸워서 대련을 빙자한 난투극을 찍기도 했지. 아니면 어리던 에스메랄다를 서로 안아 보겠다고 아웅다웅하거나.
테노리엘 백작에게 달려가 내 잘못이니, 네 잘못이니 고자질을 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형제와 가족, 그리고 가신까지. 그는 아르페시스에게 허락되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피로가 쌓였으니 일찍 쉬고, 새벽녘에 들르겠습니다.”
그놈의 동정심이 뭐라고.
“아… 그런가? 알겠다.”
다시 오겠다는 말에 표정이 조금 상기되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피곤한 건 사실이니까.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페드로는 곧 아르페시스의 천막을 벗어났다. 그가 떠난 후 아르페시스는 청소를 시작했다. 그 청소의 대상이 세리와 메리에 의해 발견되고, 페드로에 의해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되는 종잇조각인 것은 당연했다.
“휴고…….”
반드시 소각하라고 일렀거늘.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행정 업무를 보는 동안 다른 호위 기사들과 교대해 휴식을 취하고 있을 휴고를 속으로 욕했다.
“황땨님!”
주섬주섬 종잇조각을 챙기고 있으니 메리와 세리가 돌아왔다. 아이들의 등장과 동시에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모 해요?”
이건 그의 치부인 동시에 아이들의 장난감이 아닌가. 이렇게 멋대로 치우면…….
“앗!”
메리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오던 세리가 아르페시스의 손에 들린 것을 보더니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러고는…….
“흐어어엉!”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어 버리는 게 아닌가? 말문이 트여 있는 메리까지 반이 넘게 사라진 종잇조각을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다급하게 아이들과 함께 들어온 헤롤을 돌아보았다.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헤롤은 아이들에게 다정했으니까. 더욱이 그는 이미 자녀를 두고도 남았을 나이다.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는지 알고 있으리라!
“그럼 저는 이만.”
하지만 헤롤은 웃음을 참으며 등을 돌렸다. 불혹을 넘긴 그의 눈에는 아이가 아이들 틈에 끼어 절절매는 게 꽤나 재밌어 보였다.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찬양하다시피 작성한 실패작을 읽어 본 후라, 조금 괘씸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 헤롤의 외면에 아르페시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세리는 이미 몸으로 종잇조각을 덮은 상태였다. 아르페시스가 종이를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 안하다, 세리. 내가, 내가 다시 맞춰 주마.”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라. 지난밤에도 우는 메리를 달래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가. 그는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고작해야 직접 눈으로 본 헤롤을 흉내 내는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다른 조각은 다 여기 있다. 내가 다시 맞춰 주마.”
세리는 히끅, 히끅 거리면서도 아르페시스가 종이를 내어 주자 손을 뻗었다. 결국 그는 종잇조각을 치우는 대신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장난감이 원상태로 돌아오자 메리의 표정도 풀렸다.
“근데 뉴구 땡일이에요?”
아이들이 울지 않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이런 질문을 듣길 바란 건 아닌데……. 아르페시스가 경직된 자세로 메리를 바라보았다.
“생일?”
“응! 반짝이눈 오빠가 요거는 땡일이래써요.”
반짝이는… 아마도 페드로를 말하는 것이겠지? 일단 그의 금발은 에스메랄다처럼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선명한 색이니까.
아르페시스는 메리가 가리킨 글자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페드로가 여기에 쓰인 내용을 다 읽었다는 말이렷다.
“그…….”
머릿속이 바빴다. 페드로에게 이 실패작들을 들켰다는 것도 막막한데, 메리의 질문에 답할 말도 찾아야 한다.
뭐라고 하지? 좋아하는 사람의 생일이라고?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보고 싶은데 못 보는 사람?
“무슨 떤물 줄 거예요? 나는 퓨나 바닫는데.”
머리의 생각이 아이들의 반응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몇 마디 나눈 건데 왜 이렇게 진이 빠지는지 모를 일이다.
“퓨나?”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아이들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눈 그거 조아해요. 반짝반짝한데, 그론데 금방 말라 버려요. 마봅을 먹는 꼬티라고 해떠요!”
마법을 먹는 꽃이라고? 아, 라퓨나를 말하는 거구나. 아르페시스는 메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라퓨나는 마나를 먹고 자라는 꽃이다. 번식을 할 수 있는 씨앗이나 꽃가루 같은 게 전혀 없는, 마나로 이루어진 꽃. 주로 마석 광산 근처에 자라는데, 특이한 점은 마석을 채굴 중인 곳보다는 채굴이 끝난 폐광산에서 피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것도 폐광이 된다고 바로 피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고작 한두 해 동안 핀 후 사라져 버린다.
그런 특성 때문에 원예로 키우는 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채집을 해도 운송을 하는 데 마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치품 같은 꽃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근방에 폐광산이 있는 모양이다. 마석을 캤었던.
“아빠가 준 곤데… 보고 시포요.”
방금 전에 라퓨나 얘기를 했는데 이제는 부모 얘기로 넘어갔다. 주제가 너무 휙휙 바뀌는지라 아르페시스는 그 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메리가 꺼낸 단어에 세리가 다시 울기까지 하자 아르페시스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빠아아아!”
“울지 마라, 세리. 울지 마.”
결국 아르페시스는 지난밤 메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세리를 안고 천막 내부를 서성여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메리가 허벅지를 껴안아 오며 훌쩍거렸기에 정신이 없었다. 헤롤, 대체 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이를 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고?
아르페시스는 두 아이의 머릿속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다른 것에 흥미를 가질 때까지 절절매야만 했다.
* * *
“하아…….”
깊은 한숨은 휴고로부터 나왔다. 자정이 되기 직전 대뜸 천막으로 찾아와 갈 곳이 있다고 한 아르페시스 때문에 생긴 한숨이었다. 야근이 빨리 끝났으면. 그게 지금 휴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의 전부였다.
아르페시스는 메리가 잠들기 전, 라퓨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알아냈다. 그리고 라퓨나가 꽤나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다는 일념하에 야간 외출을 계획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신만 덜렁 보내는 것보다는, 뭐라도 함께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동한 것은 휴고와 테베르뿐이다. 혹시라도 그의 이탈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아주 조용히 나왔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는 것이 관건이다.
메리의 고향 마을 인근에 있는 산자락에 그의 예상대로 폐광산이 있었다. 이미 남진을 하며 진영이 이동한 시점이었기에 말을 타고 한 시간이나 이동해 도착했다.
라퓨나가 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땅에 스며든 적당한 양의 마나다. 물도, 햇빛도 필요 없다. 아르페시스가 읽은 책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붉은색, 초록색, 흰색… 머금은 마나의 양에 따라 색색별로 반짝이는 꽃.
아르페시스는 광산으로 통하는 굴 내부를 가득 덮은 꽃밭 위를 걸으며 두리번거렸다. 가장 예쁘게 핀 것들을 골라 갈 생각이었지만 사랑에 눈먼 사내의 심미안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흔하겠나? 동굴 속을 한참이나 거슬러 들어갔음에도 아르페시스의 손에는 꽃 한 송이 들리지 않았다.
“전하, 귀환이 너무 늦어지시…….”
“알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금방 끝내겠다.”
그 금방이 벌써 몇십 분째 계속되고 있으니 말을 꺼낸 것이지. 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테베르 역시,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모시기 참 편했던 그들의 상관이 최근 정말, 번거로운 짓을 시작한 덕분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아르페시스는 광산이 막혀 버린 지형까지 들어간 후에야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금색의 라퓨나, 다른 것들과 달리 그걸 발견하는 순간 생각했다. 저걸로 하자. 그녀를 닮은 색채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곧장 자세를 낮추고 상한 것이 없는 꽃들만 선별해 꺾었다. 곁에 마석을 두거나 사람이 직접 마나를 흩뿌리면 알아서 빨아 먹기 때문에 시들 걱정도 없다. 돌아가는 대로 병영 창고에서 마석 하나를 꺼내 써야 할 것 같다. 군수 물자를 사사로이 쓰는 게 양심을 쿡쿡 찔러 왔지만 이후 장기 전투에서 마나 보충을 위해 사용하는 마석을 덜 쓰면 될 것이다.
그의 마나 친화력은 9개 등급 중 두 번째 단계인 최상. 배분만 잘하면 마석이 하나쯤 없다고 해도 전투에 큰 무리가 오진 않으리라. 별 볼 일 없지만, 그래도 에스메랄다가 이걸 받고 조금은 기뻐해 주길 바라며. 아르페시스는 한 송이, 한 송이 정성을 담아 꽃다발을 채웠다.
* * *
야밤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아르페시스는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가 휘두른 검에 중형 마수로 추정되는 놈이 죽어 나갔다. 시야가 높고, 검을 쥔 손은 컸다. 그의 주변은 사람이 내지르는 고함 소리와 마수의 괴성 소리로 시끄러웠다.
인간이 만들어 낸 병장기보다 거대한 마수의 발톱과 이빨이 드리워질 때마다 죽음의 공포는 선명해졌다. 주변에서는 고통으로 인한 비명, 죽이라는 절규, 살려 달라는 애원이 끊임없이 울렸다.
검고 붉은 피가 고인 땅 위에 밝고 보드라운 것은 없었다. 어둡고 질척한 것들만이 가득한 장소였다. 그 지독한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검을 휘두르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하는 발악이 그를 온전히 지배하던 순간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어느 순간, 아르페시스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느꼈다. 자신의 온몸을 칭칭 감은 커다랗고, 완벽한 족쇄와 쇠사슬.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응당 차고 있어야 하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억압당하고 있다는 반발은커녕, 오히려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통에 뿌리칠 수가 없었다.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겠다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리하여 계속 그것에 매여 있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족쇄였다.
피와 비명, 공포와 절망, 그리고 족쇄까지.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메리와 세리가, 침대 옆에는 페드로가 있는 공간이었다. 현실이다.
“어떠셨습니까?”
“아… 살아 있나 보군…….”
“예?”
“……내가 뭐라고 했지?”
침대 위에서 심호흡을 하던 아르페시스가 몸을 일으켰다.
에스메랄다를 본 날에만 꿈이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오늘도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르페시스는 대화 소리에 아이들이 깰까 싶어 천막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이 트기 전의 새벽. 그는 꿈에서 본 것들을 설명했고 그를 따라온 페드로가 경청했다.
“정말 그간 꾸지 않으신 겁니까?”
“분명히.”
“……갑자기 다시 바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페드로의 질문에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아직도 페드로를 볼 때면 심장이 쿵, 쿵, 쿵 아픈 소리를 내며 뛰곤 했다. 꽤나 익숙해졌기에 신경을 덜 쓰는 것일 뿐.
“사실…….”
애초에 그가 처음으로 이상 반응을 보인 건 에스메랄다가 아니었다. 아레스였지. 굳이 따지자면 에스메랄다가 가장 강렬하지만, 아레스나 페드로에게도 분명 반응하곤 했다. 문제는 그걸 말했다가 돌아오는 페드로의 반응인데…….
역시나,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얘기를 듣고 슬쩍 눈매를 좁히는 페드로의 태도에 이를 갈았다.
“설마 전하의 취향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니 그쯤 하지.”
“뭐, 아니시라니 믿어는 드리겠습니다.”
쯧, 아르페시스는 불쾌감을 가득 담아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뿐이지만… 테노리엘, 그대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 하나는 분명한 것 같군.”
까마득한 거리의 절벽 위에 있던 페드로를 당연하다는 듯이 발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꿈을 꾸는 이유… 변하는 이유… 테노리엘…….”
처음에는 미친놈 취급을 하더니, 그래도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을 해 주나 보다. 페드로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아르페시스도 찾지 못한 해답을 찾고자 생각을 곱씹었다.
“우선 저도 개인적으로 조사는 해 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꿈을 또 꾸게 되시면 기록해 두십시오.”
꿈을 꾸는 이유, 꿈이 변하는 이유, 꿈이 의미하는 것. 대체 왜? 라는 질문의 답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답은 대관절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생각을 공유하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견을 구해 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답을 찾지도 못했고,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 생기지도 않았다. 답답하기만 한 그의 속과 달리 겨울의 하늘은 청명했고, 멀리서 밝아 오는 여명은 눈부셨다.
“출발은 언제인가?”
“동이 텄으니 곧 출발할 생각입니다.”
“빠르군.”
“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인데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지요.”
아르페시스와 페드로는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천막에 발을 들였다.
“얘들아,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페드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나긋나긋한 부름에 응해 일어난 건 메리뿐이었다. 세리는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결국 페드로가 잠든 세리를 품에 안아 들었다.
“해가 떠서 병영이 분주할 게다. 나를 잘 잡고 따라오거라.”
페드로가 눈을 비비는 메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왜 메리까지 안아 들지 않고? 라는 의문을 느꼈을 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당당히 내민 손을 볼 수 있었다.
“뭐…….”
그는 세리를 안고 있지 않은 손을 내민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거의 매 순간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사람 때문에 그 행동의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손끝을 움찔거리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몇 시간 전 꺾어 온 라퓨나가 마석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는 책상. 한다고 했지만 원예를 해 본 적도 없고, 이런 식으로 직접 손을 써 무언가를 준비해 본 적도 없다.
꽃만 덜렁 묶어 보내기 뭐해, 모양을 낸다고 줄기 부분을 종이로 감싼 게 전부였다. 이게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니. 아르페시스는 새삼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본래부터 페드로의 편을 통해 보낼 생각이긴 했지만… 조금 쑥스러웠다.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따로 꺾어 온 몇 송이는 세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아르페시스로부터 꽃다발을 전달받은 페드로가 물었다.
“음?”
“서신은 없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결국 쓰지 못했다. 지난밤에는 라퓨나를 찾으러 가느라 시간도 없었고. 아르페시스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뺨을 긁적일 때 페드로가 말했다.
“잠시 정도면 기다려 드리지요.”
그러니 쓰라는 말일까?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를 힐끔거리며 책상으로 향했다. 볼품없다고 해도, 하나라도 더 전하고 싶은 게 그의 본심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간 정리한 말들도, 외운 시도 많은데 정작 쓸 수 있는 건 없었다. 깃펜을 들고 서 있기를 잠시, 아르페시스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짧은 말을 적었다.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맨 결과는 꽤나 허무했다.
선물로 보내는 꽃도, 축하와 찬사를 담은 서신도 이 모양이니 에스메랄다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아르페시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서신을 접고 봉투에 인장을 찍었다. 쭈뼛거리며 서신을 건네주자, 페드로는 덤덤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잘… 부탁한다.”
무엇을? 아르페시스는 말을 내뱉고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잘 전달해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페드로는 그런 아르페시스를 한 번 훑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황댜님, 안뇨옹.”
잠이 덜 깬 메리가 페드로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전 아르페시스가 쥐여 준 색색별의 라퓨나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그가 없는 사이 얘기가 다 끝났을 것이다. 그러니 저 어린아이가 이토록 이른 아침에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얌전하게 따라나서는 거겠지.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메리를 보며, 아르페시스도 어설프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꿈, 에스메랄다, 전투, 중형 마수, 아이들, 꽃, 생일, 테노리엘, 남부, 죽음……. 속에 남은 단어들이 그를 좀먹는 것처럼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흔적을 남겼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번민의 순간에도 몸은 움직여야만 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쏟아진다. 정리되지 않는 것들이 쌓여 무게를 더해 감에도 시간은 그 무게를 덜어 낼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 그는 문득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버겁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 했는데도, 아주 잠시간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아르페시스는 천막 입구까지 따라 나와 아이들과 페드로를 배웅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페드로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청록색 눈동자가 오래도록 아르페시스를 주시했다.
멈춘 걸음 때문일까? 곧 페드로를 따라 메리도 뒤를 돌아보았다. 활짝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붕붕 흔드는 작은 아이를 보았을 때, 아르페시스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잔뜩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막막하던 것들이 밀려났다.
땅 위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 저러할까? 아르페시스의 기억 속에 저것과 닮은 미소가 있었다. 그는 지금의 메리처럼 예쁘게 웃는 사람을 알고 있다. 평생을 웃음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온 그조차 자연스럽게 미소 짓게 만드는 것. 멀어져 가고 있는 메리처럼 웃던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꿈으로 본 적이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메리가, 에스메랄다가, 평생을 저렇게 웃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무표정보다, 눈물보다, 그게 그들에게 더 잘 어울리니까.
페드로와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휴고가 그의 식사를 챙겨 왔고, 병영에 머무는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남쪽과 남동쪽에서 두 가닥의 노란 연기가 각각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1만이 넘게 집결 중인 마수들을 상대하는 날이 되리라.
중형 마수가 나타났으니 평소보다 더 힘들겠지. 꿈에서 본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꿈과 현실에서 본 미소들을 기억 속으로 집어넣으며 갑옷을 챙겨 입었다. 출정 준비를 할 시간이다.
* * *
“꽤나 걸리겠군.”
나단이 푼 문제지를 확인한 직후,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문제를 제시한 문장 곳곳에는 동그라미와 함께 물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함께 도착한 라그나의 쪽지에 의하면 나단이 모르는 단어들이라고. 종류나 범위가 무척이나 넓었다. 갈기, 풍차, 건반, 현악기, 관악기, 군마…….
아마 서커스단이 데리고 다니는 맹수들을 본 적이 없으니 사자를 모를 것이고, 음악을 흔하게 접해 보지 못했을 테니 악기의 외형과 이름을 모르는 거겠지. 나단이 아는 지식은 식품 쪽에 치중되어 있는 상태인 듯 보였다. 그것도 빵, 고기, 우유같이 구걸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종류들로.
“후우…….”
얕은 한숨을 내쉰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었다. 만찬 시간에 나단과 함께 본성에 방문하라는 글이 적혔고, 그것은 곧 시녀의 손에 들려 별채로 향했다. 집도, 부모도 없이 뒷골목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모두 이렇지는 않다. 건달이나 창녀들의 수발을 들거나 그들 중 한 명이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세상을 배우는 이들도 있다.
나단은 정말, 정말 최하위 먹이 사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그의 인생은… 강자에게 이기지 못했기에 약자에서 최약자로 밀려나는 상황의 반복이었을 터. 그렇게 경쟁에서 처지니 먹지 못했을 것이고, 먹지 못하니 몸이 자라지 못하고, 체격이 작으니 거리 아이들이 흔하게 되는 건달조차 되지 못했겠지.
“이 정도면 살아 있는 게 용한 것인데…….”
길거리에서 나단의 위치가 에스메랄다가 생각하고 있는 그쯤이라면 그는 굶어 죽었어야 정상이라고 봐야 한다. 아마도 그 전에 라그나에게 거둬졌기에 살아 있는 것이겠지.
“피아노를 언제쯤 쳐 봤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군.”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과 함께 생각을 곱씹었다. 이 정도면 하루 몇 시간의 교육 같은 방법으로는 너무 오래 걸린다. 하루 온종일 나단의 곁을 지키며 그가 모르는 세상의 당연한 것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좋겠다. 굳이 역할을 꼽자면 전속 시종 정도가 적당하리라.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존재를 사방팔방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이고, 연구하는 마도구가 어떤 것이고 같은 건 굳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새로 고용한 연구 마법사가 있다, 수준이면 충분하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수식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발음이 설명될 테니까.
그러니 라그나와 그의 가족을 보살피면서도, 시시덕거리는 농담거리로 타인에게 그들과 함께한 얘기를 하지 않을 사람이 좋다. 하루 온종일 붙어 보살펴야 할 테니… 시종이나 시녀 중에 사리 분별이 밝고 입이 무거우며, 그녀가 말하면 지키려고 최선을 다할 정도의 인물.
에스메랄다는 시종 중에 레오라는 이름의 사내를 불러오라 시켰다. 겸사겸사, 만찬 준비에 대한 지시를 내리기 위해 시녀장도 함께. 레오는 일전 아르페시스가 머물 당시 그의 야간 시중을 들던 청년이었다.
아르페시스가 발작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았고 곧장 에스메랄다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그 일을 계기로 그녀의 눈에 띈 것이다. 체격이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니 사람과의 교류에 익숙하지 않은 나단에게도 큰 위협으로 비치지 않을 터. 더 작은 체격의 시녀 중에도 몇몇 괜찮은 이들이 떠올랐지만…….
“라그나가 남자니까.”
나단이 보호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라그나다. 그와의 공통점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이 접근을 하기엔 더 수월할 수도 있다. 만약 이게 오판이라면 며칠 안에 거부 반응이 보일 것이다. 그때 시녀로 바꾸면 될 일.
응접실에서 레오를 만난 에스메랄다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해 주는 게 좋겠구나. 아이가 모르는 걸 듣고 놀라거나 신기하게 바라보지 말거라. 내 서재에 어린 시절 쓰던 동화책이나 백과사전, 동식물 전집 같은 것들이 있을 테니 그걸 별채로 옮겨 가 교육 자료로 쓰렴.”
“모두 옮길까요?”
“그래도 상관없다.”
“네, 아가씨.”
레오는 해야 할 질문만 하며 에스메랄다의 선택이 옳다는 걸 증명했다. 그가 물러간 후, 에스메랄다는 시녀장을 마주했다.
“어머니의 연주실 옆에 별실이 하나 있었던가?”
“예, 아가씨.”
“오늘 손님들과 거기서 식사를 했으면 하는구나.”
“정찬으로 준비할까요?”
“그래, 어린 손님이 있으니 후식에 신경을 쓰고.”
“예, 아가씨.”
이후 집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언제나처럼 종이와 잉크에 파묻혀 있었다. 정오에 도착한 전서구가 그녀를 헤집어 놓기 전까지는.
「이러한 이유로 두 아이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하는바, 염치 불구하고 아가씨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헤롤이 보낸 서신이었다. 쿠베트 후작령에서 생존한 두 아이에 관한 설명과 그로 인해 필요한 도움에 대한 내용이 빼곡한.
그 참혹한 내용을 모두 읽었을 때, 에스메랄다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구역질을 누르기 위해 숨을 참아야만 했다. 그 아이들이 모친의 시체를 먹음으로써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는 서부에 발을 들인 마수들 때문이다. 그 마수를 불러올린 게 에스메랄다였으니 결국… 모두 그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번 피어난 후 사그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죄책감이 그녀의 앞길을 방해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발목을 움켜쥔 죄책감을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속삭임과 닮은 다짐이 텅 빈 집무실을 떠돌았다.
그녀의 최후를 안식이 아닌, 비참함으로 장식하게 만들었던 이들이 호의호식하는 꼴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패배로 인한 절망 대신, 기만으로 인한 모욕을 선사한 그들을 나락으로 밀어 넣어야 비로소 이 복수가 끝나리라.
에스메랄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옭아매는 죄책감에 저항했다. 그녀가 걸어온 지난 3년은 이따위 감정에 발목 잡혀 주저앉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옥 속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놈들과 함께하리라. 그 과정에서 흘러야 할 무고한 피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한 짓이 이 세상에 멸망을 불러온다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재촉하는 채찍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 악문 에스메랄다가 벌벌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잠에 빠져들어 악몽을 다시 마주한다면 짓밟힐 감정이다. 그녀는 억지로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정리했다. 열어 둔 내문을 통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곧 곁방에 대기 중이던 시종이 서신을 가지고 왔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들려온 날갯짓 소리. 에스메랄다는 먼저 받은 서신을 열어 보았다.
「제작 그림 배달 완료.」
테브라는 곧 부친의 사생아인 자신을 학대하고 멸시하던 벨베크 백작이 본인의 사생아와 함께 웃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수정 마도구를 통해서.
에스메랄다는 그 짧은 보고서를 읽으며 조금 더 늦게 도착한 서신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가져온 시종에게 말을 전하면서.
“집사에게 영주민 이주 신청을 할 테니 서류를 준비해 두라고 전하렴. 쿠베트 후작가와 교류가 가능해지면 곧장 보내고.”
“예, 아가씨.”
그녀는 해야 하는 일로 눈을 돌리며 죄책감을 외면했다. 헤롤이 부탁한 일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그런 사소한 일이 아니다.
「당분간 꾸준한 선물을 보낼 것.」
한 번은 충격, 두 번과 세 번은 분노가 되어 주겠지. 그 감정들이 쌓이고 쌓일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녀의 손은 이미 다음 서신을 뜯어보고 있었다.
「사치 소모품 공개, 귀부인들 주목, 테뷔르와 부소네가에서 장신구 주문.」
암호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상단 쪽 서신이기는 하지만 슬슬 보안을 위해 전서구에 마도구를 달아 주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라그나를 조금 더 재촉해야 할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추가 지시를 내렸다. 신생이기는 하나 물건이 괜찮은 상단이라는 평판을 받아 내고 귀부인들이 소모 사치품에 빠져들게 만들면 1차 작업은 끝난다.
재력이 탄탄한 이들을 빚더미에 올리는 건 오래 걸리는 일이니 급한 마음을 먹어선 안 되겠지. 그들의 빚을 대신해 상단의 거래처를 받아 내려면 서류를 조작해야 하지만……. 우선, 빚이 가문의 돈으로 무마가 불가능한 수준까지는 가야 조작을 할 일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거래가 늘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한동안 복수에 집착하며 일에 전념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나 해가 진 후였다. 나단과 라그나가 올 시간이 되어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허리를 폈다. 오래도록 연주를 해 보지 못했으니 조금 이르게 가서 손을 풀어 볼 생각이었다.
“라그나가 오면 내게로 데려오렴. 어머니의 연주실에 있으마.”
“예, 아가씨.”
본성 입구로 시녀를 내려보낸 에스메랄다는 모친이 살아생전 사용했다는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사용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관리되어 있는 곳. 에스메랄다는 부러 문을 열어 둔 채 그곳에 발을 들였다.
띵, 띵, 띵, 작은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자 맑은 소리가 들렸다. 에스메랄다는 모친이 해 주는 연주를 직접 들어 본 적은 없었다. 테노리엘 백작 부인은 에스메랄다를 낳은 후 1여 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오래전에 만들어진 수정 마도구에 기록된 것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아레스가 태어날 무렵에 소리와 영상을 함께 기록할 수 있는 마도구가 만들어졌고, 덕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것 외에도 종종 테노리엘 백작이나 형제들이 그녀를 위해 연주를 해 주곤 했다. 검과 창을 쥐는 투박한 손으로, 어설프게나마 갈고닦은 솜씨로. 에스메랄다 역시 틈틈이 연주를 배워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다. 피아노의 음 하나하나는 그녀의 속에 묻힌 그리움을 자극했다.
만약 기억을 잃고 돌아왔다면 그 시절로 돌아갔을까? 미래에 직면하게 될 일을 모른 채 그 순간에 허락된 행복을 누리며 때로는 어리숙하고, 또한 때로는 즐겁게.
“그것도 나름 끔찍했겠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끔찍한 나날의 연속이다. 후회와 비참함으로 점철되어 복수라는 지독한 목줄을 매고, 죄책감이라는 가시덩굴을 찢어발겨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힘겨운 시간.
하지만 기억이 없었다면, 그 역시도 힘든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미래에 겪었던 모든 일이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면, 그녀는 또다시 같은 길을 걸어갔을 테니까. 그 길의 끝에서 무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그 길이 옳은 것이라 믿으면서.
에스메랄다는 조소와 함께 손가락을 놀렸다. 어둡고 음습하게 가라앉는 기분과 달리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 태어난 소리는 경쾌했다. 아직 손이 작아 종종 선율이 끊어졌지만 전문 연주자의 것처럼 유려한 연주를 하려던 건 아니니까.
한 곡, 두 곡,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악보를 꺼내 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재도, 응접실도 아닌 이곳에 올 사람이야 뻔하지.
“통상적으로 악기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로 구분되지. 그중에서 현악기에 속하며 열 개의 손가락을 모두 이용해 희고 검은 건반을 누름으로써 연주가 가능한 악기를 피아노라고 한단다.”
에스메랄다는 말이 끝난 후에야 건반에서 손을 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림으로 그려 낸 것 같은 유려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비록 그녀의 눈이 10대 소녀의 것이라 보기 힘들 만큼 날카로웠다고 해도, 서로를 물어뜯던 정적 앞에서조차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던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지금 내가 연주한 악기가 바로 그 피아노고.”
“어어…….”
라그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던 나단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리 오렴.”
에스메랄다는 옆으로 비켜 앉으며 나단에게 손짓했다. 라그나가 머뭇거리는 나단의 등을 떠밀었고, 에스메랄다는 주춤주춤 다가온 나단을 옆에 앉히며 말했다.
“이 악기가 뭐라고?”
“……아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피아노란다. 한번 쳐 보렴.”
“에?”
에스메랄다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선율을 찾아볼 수 없는 음계들의 소리.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건반이나 누르고 있으니, 나단이 쭈뼛거리며 손을 뻗었다. 연주실에선 세 살배기 어린아이들이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에스메랄다는 함께 노는 것처럼 나단을 이끌었다. 피아노를 만지게 하고, 살펴보게 하고, 뒤편에 있는 현을 구경하게 했다.
“현악기라는 건 줄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의미지.”
“그, 그럼 관짝? 그, 그건?”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던 라그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말투를 지적하는 대신 아이의 질문에 답부터 해 주었다.
“관악기.”
에스메랄다는 나단을 데리고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과 오보에 같은 각종 악기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중 플루트를 꺼내 나단에게 쥐여 주었다. 나단은 구멍에 손가락을 넣거나 휘둘러 보며 관심을 보였다.
“관악기는 입으로 부는 거란다. 이렇게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을 관이라고 하고, 그 내부의 공기를 진동시켜서 소리를 내는 것이지.”
“이, 입으로 부, 불어? 빰빰거리는 거?”
“그래, 트럼펫도 관악기의 일종이란다.”
“그, 막, 빠암 하고 시, 시끄러운 소리 나, 나는 그게 트, 트름이야?”
“트럼펫이라고 부른단다.”
한 번, 두 번, 나단의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어도 답해 줄 사람이 없고, 궁금해해도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죽은 채 방치되어야 했던 것.
지적 탐구를 원하는 호기심은 인간이 가진 수많은 탐욕 중의 하나다. 지금의 시간이 누군가의 눈에는 시간을 낭비하는 헛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단의 호기심을 되살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방금 그는 악기에 대해 배웠고, 그건 나단이 볼 수 있는 세상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걸 인지하게 된다면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더욱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겠지. 그렇기에 지금의 이 과정은 현실에 막혀 있던 나단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 선행되어야 한다. 아이의 발달에는 호기심만큼이나 도움 되는 건 없는 법이니까.
“트럼펫… 트럼펫…….”
에스메랄다는 나단에게서 플루트를 받아 소리를 내 보았다.
“어, 얘는 야, 약한 소리다.”
“모든 악기는 다른 소리가 난단다. 그렇기에 종류가 많은 것이고.”
“그럼 저, 저건 무슨 소, 소리가 나?”
“들어 보겠니?”
“응!”
악기를 만지고, 소리를 들어 보고, 이름을 외우는 행동이 꾸준히 반복되었다.
“배고파…….”
한참 동안이나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며 에스메랄다를 따라다니던 나단이 중얼거렸다.
“슬슬 식사를 할 때구나.”
에스메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라그나와 몸을 웅크리려는 나단을 데리고 이동했다.
식사 시간에도 호기심을 이용한 학습이 계속되었다. 포크와 나이프, 접시의 크기별로 담기는 음식의 종류, 액체를 담는 잔의 종류까지.
대화가 길어짐에 따라 연주실에 도착한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라그나도 한두 마디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상 화를 내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가르치는 건 불가능했을 터. 에스메랄다는 어떤 식으로 나단을 가르쳐야 하는지 보여 준 셈이었다. 애초에 나단에게 베푸는 모든 호의가 라그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라그나는 나단의 앞에 끊임없이 음식을 덜어 주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나단의 모든 질문을 라그나가 답해 주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피아노를 다시 보고 싶다는 나단을 연주실로 데려다주었다.
“그… 저기…….”
“신경 쓰지 말게.”
에스메랄다는 나단을 따라 연주실로 들어가는 대신 문가에서 라그나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그래도 저놈 말투가 그게…….”
“신경 쓰지 말라는데도.”
“…….”
“갓난아이에게 달리기를 시킬 수는 없지 않겠나.”
두어 시간 동안 나단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발음이 어눌한 단어가 꽤 많다. 아마 그가 아는 단어는 에스메랄다가 사용하는 단어의 3할도 되지 않으리라.
5세, 10세 같은 유년기에 대화나 책을 통해 수천, 수만 개의 단어를 학습하며 완성되었어야 할 언어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예법에 맞춰 경어와 호칭을 강요해 봤자 좋을 것이 없다. 혼란만 가중시킬 뿐. 모든 것은 시기와 때가 있는 법.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무례와 무지에 반응하는 대신 묻어 두는 것을 택한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라그나가 나단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고맙수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라그나를 올려다보며 설핏 웃어 주었다. 정작 본인의 행동은 조심하지 않을 정도로 무신경하면서 나단이 말투나 행동거지로 인해 화를 입을까 봐 눈치를 보다니.
인간이 가지는 부정과 모정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가능케 한다. 사람을 바꾸기도 하니 어련할까. 라그나는 애초에 간덩이가 큰 사람이다. 일이 어떻게 되든, 될 대로 되라 같은 방관자적인 사고가 익숙한 사람.
어쩌면 본인은 그런 태도를 취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스메랄다의 총애를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그녀는 그가 건방지게 굴어도 다 받아 줄 생각이었다. 이미 그런 그의 태도에 익숙해져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나단에 대한 건 다르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필요한 능력이 없기에 라그나처럼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받지 못한다. 그 때문에 지금 라그나가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것이리라. 에스메랄다는 그 부분을 잘 이용해 라그나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뭘?”
“테노리엘은 따르는 이들에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고.”
그들이 보이거나, 혹은 보여야 할 충성에 대한 보상이고 답례였다.
“오늘의 일도, 앞으로의 일도.”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전부 눌러 보고 있는 나단에게 닿았다.
“자네와 저 아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이니 마음 편히 받게.”
“…….”
“자네가 계약서에 서명을 했을 때부터 그건 자네의 권리가 되었으니.”
이후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준비를 마친 레오를 불러다 인사를 시켰다.
“앞으로 레오가 자네들을 많이 도와줄 것이네.”
“라그나 님께 인사드립니다.”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와 레오가 인사를 나눈 후에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나단에게는 자네가 인사 전해 주게.”
“……알겠수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돌아가면 또다시 쉴 틈 없이 글자들과 놀아나야겠지. 집무실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라졌다.
다음 날부터 테노리엘 백작 성의 별채에선 펑펑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나단에게 있어 타인이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라그나를 제외한 그 어떠한 성인에게도 보호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냉대나 괄시, 혹은 폭력이 더 익숙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빵 한 조각의 동정을 베풀어 주지만 대체로 그는 성인에게 얻어맞거나 걷어차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단이 위협을 느끼지 않는 타인은 보호자인 라그나뿐이다. 최근에는 그 목록에 레오라는 이름이 올라가기 직전이지만.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나단의 다리가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그는 지금 에스메랄다가 서너 살 때 읽던 동물 전집을 보고 있었다.
“나단 님, 가공 마석을 드실 시간입니다.”
웅얼웅얼, 그림과 글을 보고 있던 나단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하얀 손수건 위에 파란 구슬을 올린 채 다가온 레오가 있었다. 며칠 동안 해 본 일이라 나단은 곧장 손을 뻗었다.
심장에 마나를 모을 수 있는 마법 진을 새기기 위해 마석을 가공하는 방법. 그것을 마나 운용법이라 불렀고, 현재 나단이 하루에 하나씩 먹고 있는 마석이 바로 그 운용법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체질과 운용력의 자질에 따라 각 운용법과의 상성이 다르지만 평범한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마법 진을 세 개까지는 새길 수 있다.
“우으… 뜨끈뜨끈해.”
물론, 나단에게 있어서는 먹으면 가슴이 따끈따끈해지는 구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만약 그가 먹는 가공 마석 50개가 3층짜리 석재 건물을 사고도 남을 가치인 걸 알면 이렇게 태평하지는 않겠지만… 뭐, 그는 그것을 모르니까.
“나단 님의 심장에 마법 진이 새겨지고 있어서 그렇답니다.”
레오는 어떻게 봐도 다 자란 청년이었기에 처음에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게 불가능했다. 다섯 걸음 이내에 있으면 안절부절못하고,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일쑤. 혹시라도 목욕 시중이나 의복 시중을 위해 몸이 닿으면 히익, 하는 괴성을 내며 도망가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하는 의문에 답을 해 줄 사람이 레오뿐이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애초에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라그나는 요즘 그녀가 마련해 준 연구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굴 보는 것도 식사 시간이 고작이다. 빨리 똑똑해져서 라그나에게 버림받지 않고 싶은데 최근 며칠 나단의 지식욕을 채워 줄 사람이 전속 시종으로 배정받은 레오뿐이었다. 결국 조급함을 참지 못한 나단이 하나둘,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레오는 성실히 답을 해 주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이, 이거는 어떻게 우, 울어?”
나단이 동물 전집을 들이밀며 쭈뼛쭈뼛 물었다. 아직 낯선 레오가 무섭지만, 그보다는 빨리 똑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렬했다. 레오는 전집 속에 그려진 동물이 늑대라는 것을 확인한 후 곧장 대답했다.
“늑대군요. 아… 아우우, 하는 소리를 냅니다.”
대답이 바로 나오긴 했지만, 조금 더듬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향년 22세의 젊은 레오는 자신이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 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으니까.
“아우우?”
나단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는 호랑이였지. 레오는 어흥, 어흥거렸던 과거의 자신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나단이 닭의 울음소리를 알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고.
최근 나단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건 동물이었다. 그에 레오는 동물을 흉내 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단이 늑대에게 꽂혀 울음소리를 따라 하던 도중, 위층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빽빽거리는 소음. 수식 연구 도중 하나를 터트린 라그나가 성질을 부리는 소리였다.
“아, 또 터, 터졌다.”
나단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많아 봐야 몇십 일에 한 번 저런 소리가 들렸는데, 요즘은 하루에도 몇십 번씩 들리고 있다. 저런 소리가 날 때 라그나를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단은 최근 라그나의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빨리 똑똑해져야 해서 시간이 없기도 하고.
“얘도 고기를 먹네…….”
“예, 육식 동물이지요.”
“으응… 육식 동물. 그리고 초, 초식 동물은 푸, 풀을 먹는 애들. 우유를 만드는 소, 소도 초식 동물인…가?”
“맞습니다. 젖소지요.”
오늘도 똑똑해지기 위한 나단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책을 더듬거리며 에렘어를 읽던 나단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무… 이를 이룬다? 이, 이거 무이 마, 맞아?”
나단이 레오의 눈치를 보았다.
“무리라고 읽습니다. 쉽게 설명드리자면 여러 마리가 모여 사는 것이지요.”
“아, 사, 사자도 같이 산다고 해, 했는데. 가, 같은 거야?”
“예, 맞습니다.”
글공부 시간에는 에림어는 물론, 에렘어도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산수 공부도 하게 되었다. 라그나가 수식이 어쩌고, 마법이 어쩌고 하면서 배우라고 했으니까. 숫자를 왜 그렇게 더했다, 뺐다, 이리저리 굴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라그나가 하라고 했으니 하고는 있다. 그래야지 계속 아들을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나단은 뭐든 할 생각이었다.
나단은 초췌한 모습의 라그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뺄셈 문제를 풀며 끙끙 앓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자.”
“이, 이제 나와도 돼?”
“먹고 다시 들어갈 거야.”
나단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라그나를 쫓아갔다. 이걸 만들라고 내준 거냐, 가능하긴 한 거냐 같은 중얼거림이 들렸지만… 말했듯, 나단은 펑 소리가 난 이후에 라그나를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쫄래쫄래 라그나를 따라 걸었다.
“뭐 하고 놀았냐?”
“나, 나 고, 공부했어! 아, 안 놀았어!”
“그래그래, 놀이 공부.”
히죽거리며 웃는 라그나의 행동에 나단의 어깨가 축 처졌다. 똑똑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라그나의 눈에는 차지 않는 걸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똑똑해지지?
그는 식탁 의자에 앉아 고기를 포크로 쿡쿡 찌르며 고민했다.
“실례합니다, 라그나 님.”
나단이 몇 번 본 적 있던 중년 여성이 식당에 나타났다.
“시녀장님.”
라그나가 고개를 숙이는 몇 안 되는 사람. 나단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그나와 시녀장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어쩐 일로 별채까지…….”
“아가씨께서 나단 님께 선물을 보내셨기에 가져왔습니다.”
“나단… 에게 말입니까?”
나단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빠르게 끔뻑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아가씨면… 그 반짝반짝거리는 작은 여자애가 아닌가?
나단은 몇 번 보지 못했던 에스메랄다를 떠올렸다. 그보다도 작으니까 약할 게 뻔한데,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설설 기는 여자애. 그래서 나단 본인까지도 무섭게 만드는, 태어나 처음 보는 귀족. 그리고… 옆에 가면 달달한 냄새가 나는 신기한 애. 반짝거리는 금발도 신기하고, 하얗기만 한 피부도 신기하고, 듣고 있노라면 귓가가 간질간질거리는 목소리도 신기하다.
나단이 에스메랄다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시녀장과 함께 들어온 시종이 식탁 위에 나단의 몸집만 한 나무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등장했을 때처럼 휙 하니 돌아가 버렸다. 라그나가 나단에게 상자를 들이밀며 말했다.
“열어 봐, 네 선물이라잖아.”
“내 꺼?”
나단이 주춤주춤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색색의 물감으로 칠해진 동물 조각이 들어 있었다. 딱 손에 쥐고 놀기 편한 크기의 장난감.
“우와!”
나단은 조금 전까지 눈치를 보던 것도 잊은 채 상자 속의 장난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은 라그나는 평소보다 식당에 오래 머물렀다.
“야, 야, 닭이 어떻게 개를 이겨? 개가 닭을 물어야지.”
“이, 이길 수도 있지!”
“늑대는 다른 동물들이랑 안 어울려. 지들끼리만 뭉쳐 다닌다고.”
“그걸 어, 어떻게 알아! 봤어?!”
나단이 식탁 위에 늘어놓은 동물 조각들을 가지고 같이 노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