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5화 (15/45)

제15장

행복과 불행의 거리

에스메랄다는 지난 3년간 뒷골목 세력을 장악했고, 동시에 그곳을 관리할 이들을 한 명씩 선발했다. 남부의 에반스, 북부의 아드리안, 동부의 아브람 백작, 그리고 서부의 뷔비르까지.

관리자들 외, 실제 뒷골목을 이끄는 수장들의 경우에는 돈과 무력에 무릎 꿇거나, 그녀의 계략에 의해 기존의 수장을 치고 윗선에 오른 이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뒷골목 수장들을 각 관리자들에게 쥐여 주었고, 이후 대부분의 보고를 관리자들로부터 받아 왔다.

급박하거나 반드시 보고해야 하는 사항들은 관리자들이 에스메랄다에게로 직접 보고하는 형식을 취한 지 3년. 최소한의 조직적인 형태가 갖춰진 후 에스메랄다가 신경 쓴 것은 보안 부분이었다.

머지않아 전서구 사냥이 시작될 터이니 차근차근, 단어 하나, 문장 하나씩 암호화해 사용하도록 교육한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에스메랄다의 손에 들린 서신이었다.

「본선 1척과 소형 선박 2척, 예상외의 화물을 싣고 무사히 목적지 도착. 화물 정보는 별첨, 최종 항해 종결.」

남부에서 온 전서구는 황태자와 남부군을 이간질하기 위한 계략의 결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배가 운항을 시작했다는 보고는 진즉에 받았으니, 이 보고는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회가 개최되도록 황태자를 부추겼고, 그 연회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듣기 위해 마련했던 구멍을 통해 무사히 얘기가 빠져나왔다. 결국 본선 1척과 소형 선박 2척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과 다르지 않다.

예기치 못한 화물이 함께 딸려 왔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는 내용이었다. 화물이라는 단어가 선정되었으니, 이 보고를 올린 에반스가 이득이라고 판단한 사건을 일컫는다. 피해로 여길 만한 사건이었다면 선박이 파손되었다고 표현했겠지.

해서 그녀는 흡족한 마음으로 별첨이라 표시된 작은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 속에 적힌 문장을 모두 읽었을 때는 직전의 흡족한 마음이 모두 바스러져 버렸지만.

에스메랄다는 종이 속에 적힌 글자를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시적 문구처럼 표현되었으나, 그 뜻은 황태자가 앙뷔 남작의 뺨을 올려 치고 그의 딸을 비롯한 몇몇 여성을 겁탈했다는 의미였다.

황태자가 미친놈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건만, 설마 남부군의 주요 지휘관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이런 식의 사고를 칠 줄이야. 황제가 분명 그를 단속해서 보냈을 텐데……. 술을 취해 이성을 잃은 것일까?

“하.”

애초에 연회가 열리도록 황태자를 부추긴 건 그와 남부군 사이를 틀어지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해당 사건은 분명 이득이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의 마음은 처음 보고를 받을 때와 달리 흡족하지 못했다. 앙뷔 남작의 이른 귀환은 에스메랄다가 미리 손을 써 둔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주랑 준남작이 이끄는 부대가 물을 길어 오는 얕은 계곡의 상류에 마수의 시체를 놔두었다. 좋지 않은 것이 섞인 물을 길어다 마셨으니 주랑 준남작의 부대는 배탈을 앓거나 고열에 시달리는 등,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 힘든 상태였으리라.

그의 퇴각에 깔린 배경은 모두 에스메랄다의 손을 거쳤다. 실제 자주는 아니더라도, 남부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주둔지 인근에 있는 식수원을 관리하고 주변을 순찰하는 건 그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러니 병력의 건강 상태가 나빠진 원인이 밝혀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남부에 나가 있는 에스메랄다의 용병들이 한 짓이라는 건 알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은 앙뷔 남작이 연회 도중 주둔지로 돌아갈 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일로 에스메랄다가 바란 건 황태자와의 작은 마찰이었을 뿐이다.

고작 해 봐야 저가 베푸는 연회에 감사할 줄 모르는 남부군 인사들의 태도에 언짢아진 황태자가 폭언을 하는 정도. 그리하여 남부군이 황태자에게 가지는 반감을 조금 더 키워 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맹세코 이런 식의 사건을 바란 건 아니었으나, 이 사건이 에스메랄다의 탓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연회가 열린 것도, 앙뷔 남작이 연회 도중 황태자를 찾아간 것도, 모두 에스메랄다가 의도한 일이었으니까.

그녀의 실책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괴롭히는 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던 죄책감이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무어… 순항을 했으니 된 것이겠지.”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애써 그것을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바라지 않았다 한들, 황태자의 과한 행동이 에스메랄다에게 이득이 되어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이 일로 남부군이 황태자에게 가지는 반감은 에스메랄다가 바랐던 수준보다 더 커다랗게 자라났을 터, 분명 이득이다.

에스메랄다는 과정을 지워 내고 결과만 보기로 했다.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정적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니까. 죄책감 따위, 짓밟고 무시해 주리라.

에스메랄다는 에반스가 보내온 서신과 별첨 종이를 태우며 다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남부의 일이 마무리되고 보고가 올라오는 동안 북부에서는 벨베크 백작이 본인의 사생아들을 찾아오는 장면을 무사히 수정 마도구 속에 담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것을 제카 상단의 단주인 테브라에게 보내 그를 분노케 하면 되는 일이다. 각 지역의 관리인들이 서신을 암호화해 주고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터. 모든 게 순조롭다. 모든 게.

“아가씨.”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시녀장이 전해 준 말은 순조로움을 넘어 완벽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르페시스가 출정한 지 나흘째인 오늘.

“말씀하셨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라그나가 도착했다.

“미리 언질해 둔 대로 별채로 안내하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데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귀한 손님이니.”

“예, 명심하겠습니다.”

“여정이 곤했을 테니 우선은 쉬고, 만찬 시간에 내가 찾아가겠노라 전해 두렴. 함께 온 용병들은 이리로 불러오고.”

“예, 아가씨.”

이미 그의 신분을 세탁해 줄 새로운 신분은 물론, 그가 머물 별관까지 준비해 두었다.

시녀장이 나선 후 에스메랄다는 황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치품 상단들의 보고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아르페시스를 머릿속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를 쫓아낸 후 두 번 다시 머릿속에 들이지 않는 것에도 계속 성공하고 있었다.

사라진 시간과 달리 지금의 그녀에게 아르페시스는 필요한 인물이 아니기에, 그래야만 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니 앞으로도 큰 무리 없이 성공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런 다짐 자체가 이미 아르페시스를 머릿속에 들여 준 것과 다르지 않은데, 그녀는 그걸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곧 에스메랄다의 부름을 받은 용병들이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본래부터 그녀가 라그나에게 붙여 두었던 용병 둘, 아브람 백작이 추가로 붙여 준 기사 둘. 도합 4인.

“고생했다. 우선 목표물에게 있었던 습격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후 시리스에게 가 보도록. 자네들이 없는 동안 훈련 일정이 바뀌었으니 그가 지도를 해 줄 것이다.”

“예, 아가씨.”

용병 둘을 빠르게 내보낸 후에는 기사들을 응대해야 했다.

“경들, 고생하셨어요. 아브람 백작님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죠.”

“치하에 감사드립니다.”

“긴 여정에 곤하실 테니 오래 붙잡을 수는 없겠지요. 본성에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피로부터 풀도록 하세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피로를 푼 후 내일 오전, 곧장 동부로 돌아가겠다고 언질을 해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때까지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모두 제공하겠다고 답했고, 만찬 시간에는 자리를 피해 줄 것을 부탁했다.

본디 손님이 왔으면 식사 한 끼 정도는 직접 합석해 대접하는 게 옳다. 아르페시스가 백작 성에 온 다음 날 만찬을 함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라그나의 경계심이 어디까지 풀려 있는지 모르는 데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오겠다고 한 것인지 추측만 하는 정도이니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배제한 채 라그나를 만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괜히 타인이 끼어 그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대접에 소홀한 것 같아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저희도 따로 쉬고 싶었습니다.”

“괜찮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길.”

“배려에 감사드리죠.”

아브람 백작의 기사들은 묵례 후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만찬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일을 하고, 후에는 라그나를 만나면 될 일이다. 모든 것은 완벽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 * *

에스메랄다가 별관에 도착했을 때 라그나는 이미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주시해야 할 나단이라는 소년과 함께.

동행한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의자를 빼 주었고 그녀는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상석으로부터 좌측에는 페드로가, 우측에는 라그나와 나단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라그나.”

첫 만남과 달리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에게 하대를 사용했다. 그때는 그녀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에… 뭐.”

라그나가 정문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그들과 동행한 용병이 안내한 대로, 백작 성의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왔지.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별관에 있는 테노리엘의 문장을 따로 가리지 않았으니까.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 현재 테노리엘 백작님의 명령에 따라 영주 대리직을 위임하고 있네.”

“예에…….”

“이분은 내 오라버니 되시지.”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다. 구면이군.”

“예에… 라그나입니다.”

히끅, 하는 딸꾹질은 나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을 보며 넌지시 말했다.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아들이 건강해진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실제로 나단은 예전보다 살집이 오른 상태였다. 아브람 백작 성에서부터 이동하는 내내, 평소보다 잘 먹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라그나는 에스메랄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들이 아니라며 손사래 치던 지난 반응과 달랐다. 그의 심리 상태에 변화가 있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런 라그나의 태도에 나단의 딸꾹질이 심해졌다.

“조, 죄송… 합… 히끅.”

에스메랄다는 나단의 사과를 듣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돌리며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대화는 천천히 해도 될 테니, 식사부터 하지.”

그녀의 손짓에 공들여 만든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법에 서툰 나단이 있기에 에스메랄다는 정식 만찬 대신 정찬 형식으로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 시중까지 물린 정찬의 경우, 음식을 덜기 위해 손을 뻗을 일이 많기에 소매가 좁은 정찬복을 입고 왔다.

전채 요리와 메인, 후식 순으로 이어지는 정식 만찬 대신, 준비해 둔 각종 음식들을 테이블에 두고 덜어 먹는 정찬이 나단에게는 훨씬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신경을 쓰라 지시해 두었지만… 밖에서 먹는 음식에는 한계가 있지. 많이 들게. 나단, 너도 마음 편히 즐기렴.”

“……감사합니다, 영주 대리님.”

“가, 감사합, 히끅, 합니다.”

에스메랄다는 먼저 식기를 들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나단의 딸꾹질이 멈출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서 기다려 주었다. 한참이 지나도 대화가 오가지 않자, 긴장이 풀린 것인지 나단의 딸꾹질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제야 나단의 시선이 앞에 놓인 음식으로 향했다. 서툰 손짓으로 열심히 포크질을 하던 나단의 옆구리를 라그나가 팔꿈치로 찌르는 일이 있었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들에게 식사 예법에 대한 그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 귀족으로서 그들 앞에 섰지만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아직 어린 나단은 모르겠지만 귀족 가문과 연이 닿은 적 있는 라그나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천천히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대화는 함께 식사를 한 페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야 진행될 예정이었다.

“먼저 일어나 보마, 천사야.”

“네, 오라버니.”

손님을 대접하기로 한 사람이 에스메랄다였기에 같은 직계로서 손님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만찬에 참석했던 페드로였다.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본인의 일과를 위해 돌아가는 것이다. 최근 기본적인 체력 훈련 외의 모든 시간을 지하 보관소에서 보내는 그이니 목적지는 뻔했다.

“즐거운 식사였다. 라그나, 나단.”

“……예,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테노리엘 경.”

“아, 안녕히 가세요.”

대접은 에스메랄다의 몫이다. 그럼에도 페드로는 두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인사를 건네었다. 그 사소한 행동에 라그나의 표정이 안도감으로 풀어지는 게 보였다.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할 테니 따로 얼굴을 보기는 힘들 게다.”

페드로는 내일 후방 지원을 위해 출발해야 한다. 2차 보급과 물자 조달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아르페시스가 있는 본진 병영을 방문하는 것이다. 테노리엘이 그로부터 후방 지원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사실 그가 직접 갈 필요는 없다. 행정을 처리할 기사는 충분하니까. 그럼에도 그가 자원했기에 굳이 막지는 않았다.

“네.”

언제나처럼 그녀의 이마에 온기를 남긴 페드로가 식당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에스메랄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긴장할 것 없네. 자네들이 머무는 곳은 별관이니 오라버니와는 마주칠 일이 별로 없을 게야.”

“……다행이군요. 저분은 좀 무서운지라.”

“나는 무섭지 않고?”

“……적어도 아가씨께선 저를 필요로 하시니 말입니다.”

침묵 속에서 긴장이 풀린 건 나단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의 말문이 트였다.

“그래, 부정할 수 없겠군. 나는 자네의 재능을 높이 사거든.”

“저는 불법 마법사에 불과합니다만… 무슨 이유로 그리 높게 평가하시는지?”

“그대가 숨어든 이유를 알기 때문이지.”

물잔을 쥐고 있던 라그나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대가 숨어들지 않고 정석대로 마탑에 이름을 올렸다면… 황제가 애지중지, 품에 끼고 살았을 것이네. 그 정도로 대단한 재능이니 내 평가에 의문을 가지지는 말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본디 주관적인 견해는 그리 믿을 게 못 되는 법이지 않나?”

“아가씨께서 내리신 견해도 결국 주관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성질이 나오는군. 에스메랄다는 한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라그나의 모습에 슬쩍 미소 지었다.

“적어도 난 자네의 재능을 재단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으니, 자네보다는 객관적이겠지.”

“근거… 말입니까?”

“그래. 나는 마탑에서 활동하는 연구 마법사들의 수준을 근거로 들어 자네의 재능을 높게 사는 것이라네.”

라그나가 귓가에 속살거리는 칭찬에 큼큼, 헛기침을 반복했다. 에스메랄다는 그 모습을 보며, 지금의 라그나는 칭찬에 약하다는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손발 달린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만한 것을 업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켜세우는 이들을 보고 자란 나네. 그런 내가 자네의 마도구를 보자마자 감탄했으니 이것을 어찌 주관에 의해 편파된 견해라 할까.”

“뭐… 생각하는 건 본인의 자유니까……. 크흠.”

사라진 시간에서보다 훨씬 대하기 쉬워진 건 맞지만 어색함 때문에 미간이 좁혀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그나의 태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나단에게로 향했다.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며 눈치를 보던 나단의 노란 눈동자가 에스메랄다와 마주쳤다. 시선이 스친 직후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케이크에 돌려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만하면 내가 자네를 탐내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한 것 같은데, 어떤가?”

“크흠.”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라그나는 콧구멍을 씰룩거릴 뿐,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온 것이니 이런 대화는 이쯤 하지. 자네는 그저 여정의 피로를 풀며 푹 쉬기만 하면 돼.”

“……당장에라도 일하라고 부려 먹을 줄 알았더니.”

웅얼거리기는 했지만, 명백히 들으라는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무시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그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 버리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황태자의 인장을 만들어 남부에 보내고 싶기에 더더욱. 하지만 때로는 조급함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먹잇감이 저가 걸어 들어갈 길이 맹수의 입 속임을 알지 못하게 안심시키고, 후에 그 속으로 들어온 먹이를 문 채 입을 다물어 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면, 그곳이 안전하다 착각해 들어온 먹이는 맹수의 입을 벌리고 밖으로 나갈 힘이 없으니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것이다.

“자네에게 필요한 것과 내게 필요한 건 피로를 푼 내일에 다시 얘기하면 되겠지.”

“뭐… 그렇게 해 준다면야.”

은근슬쩍 말이 짧아진 걸 보면 확실히 긴장감은 다 털어 낸 모양이지. 에스메랄다는 그의 방만한 태도까지 너그럽게 넘어가는 인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가 자신의 품을 완전한 안식처로 여길 수 있도록, 그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아들은 나이가 어찌 되나? 이름 말고는 아는 것이 없군.”

이쯤에서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을 슬쩍 어루만져 주면 지금 느끼고 있는 안락함이 목적을 위한 선택을 미화시킬 수 있으리라.

그런 계산을 하며 나단을 슬쩍 대화 주제로 올렸으나, 에스메랄다는 이어지는 대화에 잠시간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네가 몇 살이냐?”

라그나의 질문에 케이크를 조각째 입에 넣고 있던 나단이 우물거리며 답했다.

“저, 정확히는 모, 모르는데…….”

“그러니까 대충 때려잡으면 얼마냐고.”

“……모, 몰라, 한 여, 열일곱? 열여, 여덟?”

잘 쳐줘야 10대 중반으로 정도로 보이는 나단이 자신의 나이를 대충 셈해 답했다.

먹지 못해 덜 자랐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18이라는 숫자가 나올 줄이야. 아이의 태를 벗어 청년이 되어 가야 하는 나이임에도, 나단은 여전히 아이에 가까운 소년의 모습이었다.

상대방이 불쾌해하지 않을 반응을 찾기 위해 에스메랄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렇다는데?”

“……장성한 아들이군.”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머리가 바쁘게 일을 한다고 적당한 답이 나올 리가 있나. 에스메랄다가 침묵을 피하기 위해 집어 던진 말에 라그나가 귓구멍을 파며 대꾸했다.

“다 알고 왔으면서 무슨. 친아들은 아니오.”

하지만 분명 아들이기는 하다는 의미를 담은 말에 나단의 고개가 테이블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귀와, 움찔거리는 볼살이 지금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닌 척하면서도 그런 나단을 살피는 라그나를 보며 설핏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뭔 상관이야!’

‘관심 꺼.’

사적인 질문을 꺼냈다 하면 날카롭게 반응하던 벽창호의 모습보다는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았다.

“그럼 그와 관련된 서류도 준비해 두어야겠군.”

“……뭐, 그래 주면 좋고.”

와인잔 대신 물잔을 집어 홀짝인 라그나가 우물거리며 답했다.

“그래, 아들에게도 마법을 가르치고 있나?”

그건 차마 생각해 보지 못했는지 라그나가 나단을 힐끔거렸다.

“그건 아닌 모양이군. 그래도 혹시 계획에 있다면 말하게. 테노리엘은 그 이름에 충성하는 이들에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니.”

“그럼…….”

“우선은 아들과도 대화를 해 보고, 후에 내게는 결론만 알려 주면 되네.”

“……뭐, 알겠수다.”

에스메랄다는 오늘의 만찬이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누겠지만 라그나의 합류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쉬라고 말하면서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우습겠지. 나는 그만 일어나 보겠네.”

“……내일 찾아가면 되겠수?”

“오전 중으로 부르겠네.”

“뭐, 그러든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에스메랄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라그나와의 시간을 끝냈다고 해서 그녀의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가 집무실로 돌아왔을 땐 라그나와 함께 귀환한 용병들이 올린 보고서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꼼꼼하게 살폈다.

「습격 과정 및 처리 과정 보고서

보고자 : 보호진 알파, 베타.

- 카 52일 새벽, 거처로 급습해 들어온 습격자 4인과 응전. (습격의 원인은 전날 밤 발생했던 마도구 제작과정의 충돌 폭발로 추정)

- 목표물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동안 덤이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 발생.

- 최소 6회 이상의 타격이 덤에게 가해지는 동안 목표물의 과격한 반응 발생.

- 베타를 주축으로 덤의 구출에 주력, 구출 및 안전 확보 성공.

- 습격자 중 3인 사살, 1인 도주.

- 베타 개별 보고, 도주자 추격 및 완전 사살 성공.

- 알파 개별 보고, 기절한 덤으로 인해 목표물로부터 과격한 감정 발생.

- 알파 개별 보고, 덤의 치료를 통해 목표물의 안정이 필요하다 판단.

- 알파 개별 보고, 아브람 백작 성으로 이동, 지원 요청.

- 알파 개별 보고, 신관을 동원한 치료 직후 목표물 안정화 성공.

- 베타 개별 보고, 추적 및 사살 후 아브람 백작 성으로 합류.

- 해당일 자정, 수면 중인 덤의 옆에서 목표물 침묵.

- 목표물로부터 아브람 백작과의 접견 요청 발생.

- 목표물이 아브람 백작에게 본진의 정보를 요구했으나 반려.

- 목표물이 합류 요청, 본진의 대략적 위치 제공.

- 목표물의 강경한 합류 요청.

- 아브람 백작, 본진 허가 요청 발송.

- 덤 정상 활동 개시.

- 본진 허가 이후 카 55일 09시, 이동 시작.

(중략)

- 카 71일 17시, 목적지 도착.」

라그나의 심리 변화를 추측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보고서를 내려놓은 후 다시 깃펜을 들었다. 내일 라그나와의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기 전까지 마무리해 둘 서류가 새로 생겼으니까.

* * *

라그나는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오는 나단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나단이 거품을 물고 기절하던 순간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들.’

분명 지난번 만남에서 그 단어를 부정했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당연하게 그 단어를 사용했다.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이곳에 왔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에 조금 민망할 정도였다.

에스메랄다의 예상대로, 라그나의 심리 상태가 변한 건 나단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나단이 죽을 뻔한 위험으로 인해, 라그나가 그에게 가지는 보호 본능이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말로는 그가 인정해 오지 않았던 부정(父情).

수식 연구에서 충돌 폭발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마도구를 만들다 실패해 충돌 폭발이 일어날 경우, 라그나는 매번 거처를 바꿔 왔다. 이번에는 그럴 새도 없이 습격을 받는 바람에 사달이 난 것이다. 용병들이 있어서 조금 안일하기도 했고.

나단이 신관에게 치료를 받은 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제조 수식을 새겨 넣는 게 아니라 연구를 해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얼마나 많은 사냥꾼을 불러들일까? 그 작은 소녀는 이걸 알고 용병을 붙여 준 건가? 아니면 이걸 노리고 이따위 거지 같은 의뢰를 던지고 간 건가?

에스메랄다가 남겨 두고 간 용병들은 라그나의 안전을 최우선시했다. 당연한 일이다. 에스메랄다가 의뢰를 한 건 라그나였지 나단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후의 습격에도 나단이 무사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나?

‘아들.’

분명 인정하지 않았었는데, 골목길 안에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나단을 주워 온 지 2년. 어느새 오래전 딸과 함께 죽어 버렸던 부정이 살아나 있었다. 그것을 인정한 후에는 나단의 안전에 대한 것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지난날 딸을 잃었던 것처럼, 아들까지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아서.

‘지금은 안전한가요?’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에 당신을 찾아내는 사람은 나처럼 거래로 만족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계속 이런 습격에 시달려야 한다면 제대로 가려 줄 지붕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직접 찾아와 의뢰를 할 정도에, 기사를 용병으로 위장해서까지 붙여 준 걸 보면 그에게 매기는 가치가 높다는 의미겠지? 적어도 밑으로 숙이고 들어가면 안전은 보장해 주지 않을까? 그럼 나단이 위험해지는 일도 더는 없을 텐데.

에스메랄다가 연결해 준 장소가 무려 아브람 백작 성인 것을 보고 라그나는 결단을 내렸다. 아브람 백작에게 의탁하지 않은 건… 그가 라그나 자신에게 거는 가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직접 걸음 할 정도의 가치를 매겨 주었지만 아브람 백작도 그러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어쩌면 같은 귀족인 에스메랄다의 부탁으로 인해 호의를 베푸는 수준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은 물론 나단의 안정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허가 없이 마법을 써 온 불법 마법사다. 걸리면 황실의 눈 밖에 날 죄인을 품어야 하는 상황. 사실 에스메랄다가 거둬 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해 보고 후회하자 싶어 아득바득 악을 썼더니 며칠 후에는 이동할 거라는 통보를 받았고, 또 며칠 후에는 어느덧 서부에 와 있었다.

마수 때문에 난리가 났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조용한 것에 놀라기도 잠시. 그는 별채에 발을 들이자마자 쪼그라들어야만 했다. 제국의 주인도 아니면서 제국의 백성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 그 이름의 유명세만큼이나 유명한 문장이 별관 입구에 떡하니 새겨져 있는데 어찌 위축되지 않을까.

명성이 어마어마해서 좀 위축되었지만 에스메랄다가 자신에게 거는 가치를 보고는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손에 넣고 싶은 것이다. 어떤 지출을 감행해서라도. 이 정도면 그가 불법적인 신분이라 해도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해 주겠지. 그거면 된다. 그거면 되는데…….

‘이만하면 내가 자네를 탐내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한 것 같은데, 어떤가?’

어느 누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표할까. 라그나는 자꾸만 으쓱거리려는 어깨를 내리누르며 뚱한 표정을 가장했다. 그는 자신이 맹수의 입 속으로 기쁘게 걸어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나단을 힐끔거렸다.

삐쩍 마른 건 알고 있었지만… 추정 나이가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라그나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나단이 제 나이를 어림짐작으로 털어놓을 때 상당히 놀랐던 것이다. 어릴 때 뭘 얼마나 안 주워 먹었으면 10대 후반에 가까운 나이에 애처럼 보이냔 말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따가운 것일지도 모른다.

불법 마법사인 라그나로서는 음지에서 전전하며 돈을 버는 게 다였고, 그러다 보니 수익이 일정하지 않았다. 벌지 못할 때를 대비해 아껴 써야 했으니 먹을 걸 넘치게 쥐여 준 적도 없고…….

“저, 저기, 이봐.”

나단이 라그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아저씨 정도? 2년이 넘게 이런 식으로 불려 왔지만 최근 들어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분명, 그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기 때문이겠지.

“왜?”

“그 자, 작은 여자애 이, 있잖아. 그, 금색 머… 악!”

나단의 용건은 완성도 되기 전에 끊어졌다. 라그나가 그의 뒤통수를 딱, 하니 때려 버렸으니까.

“왜, 왜 때, 때려!”

“아가씨.”

라그나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에스메랄다와 맞먹었다는 걸 잊은 사람처럼 잔소리를 했다.

“어, 어?”

“아가씨, 라고 불러 이놈아.”

2년 전에는 글도 읽지 못하던 놈이다. 아니,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어서 발음조차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벙어리인 줄 알았을 정도다. 사람과 부대껴 살지 못해 사교성도 없고, 머리에 든 지식… 아니, 상식도 없다. 상단의 존재를 몰라 식료품 가게에서 식자재가 뚝딱 나오는 줄 알고 있었으니, 어련할까.

‘혹시 계획에 있다면 말하게. 테노리엘은 그 이름에 충성하는 이들에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니.’

언제까지 나단을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의 품 안에만 끼고 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식보다 부모가 먼저 떠나는 건 당연한 일, 라그나는 자신이 죽어도 나단이 제대로 된 삶을 살기 바랐다.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게 보듬고 가르쳐야지.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해 주는 일이 아니던가. 지금은 에스메랄다가 그를 원하니 나단을 함께 보호하지만 20년, 30년 후에 그가 죽으면?

오늘 본 에스메랄다가 홀로 남은 나단을 팽하니 버릴 만큼 냉혈한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2, 30년 후에도 배운 지식이나 능력이 없다면 끽해야 성의 하인 정도로 거둬 주겠지. 아니면 마구간지기? 창고지기? 음… 정원사일지도?

라그나는 제 아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 살길 바라지 않았다.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위치에서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심은 그에게도 있었으니까. 제대로,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그러려면 나단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 아가씨? 그렇게 부, 부르면 되는 거야?”

“그래.”

“그 여, 영주 개, 개미는?”

“영주 대리, 영주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그건 주로 외부인이 부르는 거야.”

청년이 분명한 페드로도 아니고,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에스메랄다가 영주 대리라니. 분명 처음 들었을 땐 의문을 느꼈지만 그녀가 하는 행동을 보고는 납득했다. 저 같아도 저런 딸이 있으면 믿고 시키겠다 싶어서.

“외부인?”

“정확히는… 다른 가문의 귀족이, 이쪽 가문의 권한을 가진 사람을 대우해 주기 위해 부르는 호칭이라고. 내부인이 외부인에게 주의를 줄 때도 사용하긴 하는데… 일단 우리랑은 상관없어.”

그들은 귀족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위에서 살게 하려면 예법도 조금 가르쳐야 할 텐데…….

“……재, 대무? 호깅?”

아직 더듬더듬 동화책도 읽지 못하는 아이에게 뭘 바라겠나. 라그나는 제 침실로 들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을 따라 들어오는 나단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또?”

“……어?”

“네 침실로 가. 마차를 오래 타서 피곤해. 쉴 거야.”

“어…….”

나단은 여전히 문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라그나는 얕은 한숨을 다시 한번 쉬며 말을 이었다.

“바로 옆방이잖아.”

나단이 침실의 위치를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려 주기까지 했다. 움찔거리던 나단은 곧 문밖으로 나갔고, 라그나는 부른 배를 붙잡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래도 테노리엘인데, 중급 정도는 주지 않을까?”

라그나는 내일 에스메랄다를 만나서 나단에게 가르칠 마나 운용법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말을 흘려 놓았는데, 설마 주지 않겠다고 뻐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마나를 배운다는 것은 결국 힘을 가진다는 것과 같았다. 마나는 귀족의 힘. 하나뿐인 아들인데, 제 몸 지킬 능력과 힘은 주어야지.

“아니, 아니지. 괜히 크게 불렀다가 까이면……. 하급도 새겨 두면 마나는 계속 모이니까…….”

혼자 얼마나 중얼거렸을까? 20일 가까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느라 누적된 피로가 그의 생각을 자꾸만 방해했다. 어차피 내일 할 말, 내일 생각할까……. 같은 중얼거림 뒤로 라그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그가 선잠에서 깨어난 건 으슬으슬한 추위 때문이었다.

“뭐…….”

이불이 없다. 아니, 있긴 한데 거의 침대 끝자락에 걸려 있었다. 벽난로의 불이 희미하게 시야를 밝혀 주었기에 곧장 알 수 있었다.

라그나는 찬 기운에 오한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제 잠버릇이 이렇게 심했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이불을 집기 위해 몸을 돌린 직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침대 밑 귀퉁이에 웅크린 채 이불을 둘둘 두르고 있는 나단을 발견한 것이다.

“나단.”

“우음…….”

대체 언제 건너온 거지? 그리고 왜 멀쩡한 침대를 두고 바닥에서 자는 건데? 몸을 조금씩 떠는 걸 보면 추워서 저러는 것 같은데…….

카펫이 깔려 있다고 해도 별관 자체가 석재 건물이라 냉기가 풀풀 올라올 것이다.

“나단.”

라그나는 조금 더 선명한 목소리로 나단을 불렀다. 몇 번이고 그렇게 부른 후에야, 나단이 눈을 끔뻑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음?”

“거기서 뭐 하냐?”

“어…….”

눈치를 보듯 곁눈질을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리 다정한 성격이 아닌지라 2년 동안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한 게 못내 미안했다.

“올라와, 인마.”

“어?”

“올라오라고. 이 큰 침대를 두고 왜 거기 누워 있는 건데?”

그렇게 미안하면서도, 또 틱틱대며 말하는 자신의 입을 좀 틀어막고 싶었다. 나단이 꾸물거리는 동안 라그나는 바닥을 덮고 있던 이불을 다시 끌어 왔다.

“잠이 안 오디?”

옆자리를 툭, 툭 치며 말하자 침대 끄트머리에 구겨져 있던 나단이 살금살금 기어 왔다.

“그, 그냥…….”

“그냥?”

“……너, 너무 커서.”

얕은 한숨과 함께 라그나는 나단을 곁에 눕혔다.

“넓은 게 싫냐?”

작은 방을 달라고 해야 하나, 라그나는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게…….”

“말을 해.”

“……그, 그쪽이 안 보이니까… 버리고 가, 갈까 봐…….”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의해 무의미한 고민 대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나단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 길에 있었고, 구걸을 하거나 자기보다 약한 어린애들의 것을 빼앗으며 살았다고 했다.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눈만 끔뻑거리기에 라그나가 지어 주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얼 할까.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은 적이 없던 아이가 낯선 곳에 와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제대로 설명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했으니……. 저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에 곁에 누워 눈치를 보던 나단이 움찔 몸을 떨었다. 몸을 옆으로 돌린 라그나가 그런 나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아들에게도 마법을 가르치고 있나?’

‘우선은 아들과도 대화를 해 보고, 후에 내게는 결론만 알려 주면 되네.’

아들. 그래, 아들이다. 이미 인정하지 않았던가.

“너 내 아들 할래?”

“어?”

어둠 속에서도 붉게 달아오르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할래?”

“……해, 해도 돼?”

“어.”

“……하, 할래.”

만약, 모두가 잠들어 적막한 밤이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대답이었다.

그거면 된 거지. 라그나는 나단을 품으로 당겨 안으며 말을 이었다. 고작 이런 접촉에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몸이 너무 작아서 속이 쓰렸다. 이게 어딜 봐서 10대 후반에 달한 소년의 몸인가. 지난 2년간 못 해 준 것들이 가슴에서 사무쳤다.

“마법은? 배우고 싶냐?”

“마, 마법?”

품에서 고개를 올려 자신을 쳐다보는 노란 눈동자가 왜 이리 예쁜지……. 라그나는 시답지 않은 생각에 픽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심장에 고인 마나가 혈관을 타고 흘러 그의 손끝에 맴돌았다.

“이런 거.”

라그나의 손에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단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아니면 기사? 종자부터 시작하면… 아니, 열여덟 살에 이 체격이면 테노리엘 기사단은 힘들라나. 뭐… 악기나 그림도 괜찮겠지? 부탁하면 웬만한 건 다 해 줄 것 같은데, 너 뭐 하고 싶은 거 없냐?”

“……마, 마법.”

“대충 대답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인마.”

“그, 그쪽이 하는 거 나, 나도, 나도 하고 시, 싶어.”

그쪽. 라그나는 지난 2년의 시간을 후회하며 나단을 품에 꼭 껴안았다. 해 준 것도 없으면서 많은 걸 바라면 안 되겠지.

그에게는 나단이 소중해졌지만, 나단에게도 그가 소중할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그의 잘못이 명백하니 이 문제에 대해선 죄인으로서 기다려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인정했으면 좋으련만. 그럼 더 잘해 줬을 텐데, 그를 행복으로 이끌 그 짧은 단어를 진즉에 들었을 텐데. 라그나는 나단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울었다.

부자간의 몽글몽글한 시간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날이 밝았을 때, 두 사람은 지난밤의 일을 홀라당 까먹은 것처럼 굴었다.

“그냥 있어.”

“왜, 왜!”

“내가 놀러 가는 줄 알아?!”

“가서 가, 가만히 있을게!”

홀로 본성에 가려는 라그나와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나단의 대화였다. 이것도 분명 지난밤의 영향을 받은 일이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단은 라그나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기만 했을 테니까.

“따라오긴 어딜 따라와!”

딱! 두 사람의 언쟁은 언제나와 같이 라그나가 나단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으로 끝났다. 나단이 뒤통수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동안, 라그나는 홀로 별관을 나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 * *

대화를 엿듣는 사람이 있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에스메랄다는 라그나를 독대하기 전 집무실 주변을 비웠다. 정확히는 집무실이 위치한 복도를 모두. 그리고 용병들을 배치했다. 주변에 얼씬거리는 이들이 없도록. 지금 에스메랄다와 라그나 사이에 차와 다과를 내려놓고 있는 시녀들도, 이 방을 나서는 순간 용병들의 감시하에 복도를 빠져나갈 것이다.

라그나와의 독대는 집무실 옆에 있는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다. 에스메랄다가 앉은 상석 소파의 옆, 작은 협탁 위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넓적한 상자 두 개와 수십 장의 종이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쪽 소파에는 방금 전 응접실로 들어온 라그나가 착석했다.

“밤사이 평안했나?”

“……뭐, 잘 잤수다.”

에스메랄다는 시녀가 준비한 찻잔을 받아 들었다. 곧 시녀들은 응접실을 나섰고, 라그나도 차를 홀짝이며 에스메랄다와의 거래를 준비했다.

“알다시피 시간은 금보다 비싼 법이지.”

“흠, 용건만 간단히 하자는 거요?”

“그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 내가 바쁘기도 하거니와 곧 자네도 바빠질 테니.”

“흥.”

이미 넘어올 생각이 만발이면서, 아닌 척 새침한 표정을 짓는 라그나라니. 에스메랄다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려는 것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패를 나부터 까라는 거요? 아가씨가 나보다 절박할 텐데.”

몸값을 높이고 싶다? 그걸 원한다면 당연히 들어주어야지.

“그럼 나부터 말해 볼까?”

“해 보쇼.”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자네가 내게 복종하길 바라네.”

긴장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라그나는 벌써 차 한 잔을 홀라당 비운 상태였다. 목이 타는 모양이다.

“복종?”

“그래, 복종.”

에스메랄다는 두어 모금 비운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라그나를 직시했다.

“내가 만들라는 건 무슨 수를 써서든 만들어 낼 것. 그게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복종이라네.”

“그건 억지 아니요? 내 능력 밖의 물건도 있…….”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본인의 재능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데도?”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아닌 척해 봐야 다 보이는 것을. 에스메랄다는 싱긋 웃으며 순서를 라그나에게 넘겼다.

“이제 자네 차례군.”

빈 찻잔을 채워 주기 무섭게 들이켜던 라그나가 켁켁거리며 찻물에 덴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가 머리를 굴리고 굴려 요구 사항을 꺼낸 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무조건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내가 죽게 되더라도 자네와 아들의 신변만은 안전할 것이라고 장담하네.”

“아니, 뭘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에스메랄다는 협탁 위에 준비해 둔 서류 중 일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자신과 그의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자 라그나가 관심을 보였다.

“뭐요?”

“새로운 신분.”

“……엉?”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는 동안 그가 사용할 제국의 연구 마법사 신분과 그녀가 죽게 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타국의 연구 마법사 신분. 모두 실존하는 사람의 것을 사들여 개명을 해 둔 것이다.

해당 영지의 행정관에게 뇌물을 먹여 해당 신분의 마법사가 사망했다는 서류를 없애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반문에 설명을 해 주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서류를 더 올려놓았다. 신분이 왜 두 개인지는 그를 집어삼킨 후에나 설명해 줄 생각이다.

“이건 자네 아들의 출생 증명 서류와 양자 입적 서류, 그 아이의 출신지는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해서 새로 만들었네. 애초에 출생 기록이 없는 듯 보였으니 기존의 것을 사는 것보다 새로 등록을 하는 게 그 아이에게도 좋겠지. 그리고 테노리엘의 행정 처리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라 이쪽이 빠르고 안전하기도 하고.”

그 위에 또다시 서너 장의 서류.

“그리고 이건 자네의 사망 증명서.”

다시 그 위에 대여섯 장.

“사체 소각 확인서와 불법 마법사 라그나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냥꾼들의 진술서.”

그리고 마지막 두 장.

“새로운 라그나가 테노리엘 소속의 연구 마법사로 고용되었다는 계약서까지.”

“…….”

“모두 내가 딱 한 번의 손짓만 더 하면, 모든 게 사실이 되는 서류들이지.”

“……그 말은.”

에스메랄다는 서류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라그나에게 확언했다.

“더 이상 불법 마법사 라그나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라네. 대신 합법적인 자격을 가진 연구 마법사 라그나만이 존재하게 되고. 이미 자격이 있으니 굳이 황실 마법사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겠지.”

“…….”

“만약 족보 기록을 보전하고 싶다면, 자네의 사촌 누이가 시집갔던 남작가의 족보를 사서 방계 기록에 자네 이름을 기재해 줄 수 있어. 뭐, 그 전에 기존의 이름은 사망 처리하고 새로운 라그나라는 이름이 올라가는 거지만……. 결국 두 사람 다 자네이니 달라질 건 없겠지.”

이미 대가 끊겨 황실에 작위가 회수된 가문이라 있어도 별로 쓸 곳은 없겠지만 귀족 가문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증명할 수는 있을 터였다. 조금 번거로운 일을 거쳐야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정말 그가 원한다면 해 줄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니까.

하지만 라그나는 그런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까진 필요 없소. 남작님이 남겨 준 유산을 받긴 했지만… 사실 그분 얼굴 본 것도 고작 두어 번이라 받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거든. 대가 끊긴 가문이라 쓸 곳도 없을 거고.”

“그렇다면야.”

얼떨떨한 표정의 라그나를 보며 에스메랄다는 숨죽였다.

어서, 어서 네 발로 걸어 들어와라. 맹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먹잇감을 통째로 배 속에 가둘 준비가.

“이렇게…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는 적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어릴 적엔 마법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그 후에는 평생을 숨어 자격 없는 마법으로 돈을 벌며 살아온 라그나. 그에게 합법 위에 올라서 제 마음껏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조건이리라.

모두가 그렇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양지로 나서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에는 과시욕이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늘 아래 숨어 사는 이들은 그런 욕구가 거의 충족되지 못하기에 양지에 활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선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더욱이 라그나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이들의 속살거림을 들어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계속 그의 가치를 언급하며 띄워 주는 이유였다. 그의 실력이 진짜이기도 하지만, 그 실력을 언급하며 그를 들뜨게 만들기 위해서. 본디 차분한 상태의 사람보다 하늘 위의 구름에 올라간 것처럼 들뜬 사람의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니까.

“더 필요한 게 있나?”

“나단이 그…….”

에스메랄다는 우아한 손짓으로 서류의 아래 깔려 있던 넓적한 상자 두 개를 집었다. 이전의 것들은 하나하나 들춰 주며 확인시켜 주지 않았으나, 이건 달랐다. 그녀는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손수 뚜껑까지 열어 주었다. 상자 속에는 마나 운용법에 따른 가공을 거친 마석 50개가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테노리엘이 보유한 운용법 중 다섯 번째로 좋은 것이네. 위의 두 가지는 직계나 혈족에게만 공개되고, 그 아래 두 가지는 가신들 중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만 제공되지.”

“…….”

“이건 공로가 없는 가신에게 제공할 수 있는 운용법 중 가장 좋은 것이라네. 중상급 평을 받은 것이니 하나는 자네가 가지고, 다른 하나는 아들에게 주게.”

에스메랄다는 상자를 닫아 옆으로 치운 후, 가장 위에 올라가 있던 두 장의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어떻게 할 텐가?”

계약서를 라그나의 앞으로 밀어 주는 것은 물론, 손수 잉크를 찍은 깃펜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는 잠시간의 침묵 후 곧 두 장의 계약서에 서명을 새겨 넣었다.

그에 참거나 자제할 틈도 없이 에스메랄다로부터 나른한 숨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두 손을 쭉 뻗어 라그나와의 사이에 두었던 서류들을 모두 자신 쪽으로 당겨 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단의 신원을 테노리엘에 복속시키는 일부터 진행했다.

나단의 출생 증명서에 영주 대리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혔다. 라그나의 발목을 옭아맬 약점이 그녀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때가 왔다. 맹수는 자신의 목구멍까지 들어온 사냥감을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닫았다. 이제 사냥감이 맹수의 입 밖으로 도망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거군, 그렇지?”

“뭐… 그렇지.”

그럼 계약도 했겠다, 이제 일거리를 주어야지. 에스메랄다는 소매 안주머니에 넣어 놨던 종이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마나 수식이었다.

“자네의 첫 번째 일거리네.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 주면 되고.”

“응? 지난번 의뢰는?”

“잠시 미뤄 두게. 그보다 급박한 일이 생겼으니 우선순위를 바꿔야지.”

여전히 조금 멍한 표정의 라그나는 그것을 받아 들자마자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이 수식이면 인장 마도구인데… 아가씨가 쓸 거요?”

“나는 가주가 아닌 것을. 영주 대리일 뿐이지.”

영주 대리의 인장은 가문이 존속하는 한 항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영주 대리가 있든 없든. 그러니 새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럼 테노리엘 경?”

“오라버니께서는 서명으로 대신하시지. 가주가 아니시니까.”

인장 마도구는 개인이 사용하는 게 아니다. 가주나 특정 관직의 인물이 사용하는 것이지. 수식을 빤히 노려보던 라그나가 슬쩍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럼 누가 쓰려고? 왜 이렇게 복잡해? 일반적인 것보다 서너 배는 꼬인 것 같은데?”

라그나가 만드는 모든 마도구는 기밀로 다뤄질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유용함을 황제가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라그나도 마도구들이 어디에서, 누가 쓰는지 알아야 입조심을 할 수 있으리라.

대략적인 정황은 언급해 두어야 훗날 그 물건들을 반군이 쓴다는 소식이 들려도 펄쩍 뛰며 달려오지 않을 터. 자신이 만든 물건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것은 물론, 거기에 함부로 마크를 새기는 짓을 사전에 막으려면 어느 정도의 언질은 해 주어야 한다.

이건 라그나가 읽어 보지도 않고 서명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조항이기도 했다. 이래서 계약서에는 함부로 서명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에스메랄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무얼 숨기겠나? 이제 그는 그녀의 배에 올라탔는데. 그는 조금 전부터 내부자가 되었다. 멋모르고 들어왔다고는 하나, 자신이 들어온 곳이 어딘지는 알아야 제대로 된 협력을 하게 될 터. 죽기 전에는 라그나라는 패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그가 자신의 품 안에 적응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아, 그건 황태자의 인장이라네.”

“……아?”

구시렁구시렁, 더럽게도 복잡하다며 불평불만을 하던 라그나의 표정이 일순간 멍청하게 변했다.

“황태자의 인장에 쓰인 수식이니 위조를 하는 셈이 되겠지.”

“……화, 화, 황… 그걸 왜…… 위조를……?”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녀의 속을 무던히도 긁고, 가끔은 쥐어 패 버리고 싶을 정도의 옹고집을 부리던 라그나.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보니 솔직히 통쾌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말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같은 말을 할 때나 쓰일 평의한 어조로.

“그야 필요하기 때문이지.”

“……왜, 뭐, 왜 때문에?”

“이런, 제대로 설명한다는 것이… 내가 깜빡했나 보군.”

라그나의 표정이 삐걱거리며 기괴한 형태를 취했다. 그와 반대로 에스메랄다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계속 짙어졌다. 비록, 그녀의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해도 말이다.

“황태자의 명령서를 위조하려면 꼭 필요하다네, 내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지라.”

슬며시 벌어지는 그의 입을 보고 있노라니…….

지난 10여 년 동안 그를 회유하려다 실패하고, 모욕을 당하고, 제멋대로 거처를 이동하는 바람에 찾아 헤매야 했던 정신적인 피로를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멍청해 보이던 얼굴이 점차 붉어져 노기가 서리는 모습이 이리도 자극적인 쾌감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라그나의 유능함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에게 당한 것이 많은 에스메랄다였다. 그가 곤란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에스메랄다가 폭발 직전으로 달아오른 라그나를 콕 찔렀다.

“어찌 그리 놀라나?”

그에 라그나가 펑, 하고 터져 나간 건 당연한 일.

“이, 이, 이런 게 어디 있어! 이건 사기야! 안전을 보장해 준다며!”

“그대의 안전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이! 그! 아아악!”

저가 들어온 곳이 맹수의 배 속임을 뒤늦게 알게 된 라그나가 발악했지만, 퇴로는 없다. 에스메랄다는 가장 위에 올라와 있던 계약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신분 위조야 아래의 행정관이 뇌물을 먹고 행한 일이라고 꼬리를 자르면 될 일. 직접 신고를 했으니 황실이 그녀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즉, 허튼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그녀의 배가 가라앉으면 함께 탄 두 사람도 가라앉을 터. 그러니 열심히, 영혼을 갈아 넣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를 담아 보았다.

“자네는 방금 내게 고용되었지. 그리고 그 고용에 사용된 신분이 위조되었고, 그 당사자가 자네라는 증거까지 모두 여기 있다네.”

배가 부르다 못해 터져 나갈 것 같은 기분이 이러할까? 아득한 포만감이 그녀를 찾아왔다.

“우리는 한 배를 타지 않았던가?”

“이, 이, 일이 틀어지면? 네가 실패하면 나까지 반역죄로 엮여 들어가잖아!”

“그래서 신분을 두 개 만들어 주지 않았나.”

“뭐?”

애초에 그에게 두 개의 신분을 준비해 준 건 에스메랄다에게 그와의 거래를 착실하게 지킬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도 전에 그걸 알려 주었다간, 겁을 집어먹은 사냥감이 도주할 테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본디 협상이란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과 함께 불리한 점을 잘 숨기는 능력도 필요한 법이다.

“내가 요구한 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의 복종이지.”

식식거리는 라그나의 시선이 매서웠지만 그 정도에 겁먹을 에스메랄다가 아니다.

“그날이 다가올 무렵에는 두 번째 신분으로 갈아타 세튀스로 넘어가게. 그곳은 에렘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니 무어, 정착이 힘들지도 않을 테지. 곧 자네의 이름으로 에렘에 입국한 기록이 남을 게야. 그러니 나중에 출국할 때도 문제가 없을 걸세. 서류가 준비되는 대로 새 신분을 쥐여 주겠네.”

“……허!”

“내가 그대와의 거래를 어긴 적이 없으니, 그대도 나와의 거래를 이행해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이건 무효야! 당장 여기서 나갈 테니 그 계약서 이리 내!”

라그나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손을 뻗었다. 에스메랄다는 족쇄나 마찬가지인 계약서를 순순히 내어 주었다. 대신 다른 종이를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주었다.

“그대가 잊은 것 같아 말해 주는데, 나단은 이미 테노리엘 출신이라네. 나나 아버지의 허가 없이는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없어.”

라그나가 길길이 날뛰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시리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나단의 출생증명서가 라그나의 손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기념으로 가져도 좋겠지. 이미 영지민 관리소에 똑같은 서류가 보관되어 있으니까.”

라그나가 성질을 부리는 것은 꽤나 오래도록 이어졌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털썩 주저앉을 때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대체 왜 그리 성을 내나?”

“그걸 말이라고 해?!”

“이것 참… 모르는 이들이 보면 마치 내가 자네를 납치해 왔다고 생각하겠어.”

그 말에 라그나가 굳었다.

“자네가 직접 제 발로 찾아와 놓고, 왜 내 탓을 하는가?”

“이, 이……!”

발을 들이는 곳이 어딘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들어온 건 라그나 본인이다. 책임은 그에게 있다. 그런데 사기꾼이라며 역정을 내다니,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반항을 가볍게 일축했다.

라그나가 버럭거리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며 손을 내젓자, 시리스가 조용히 응접실을 나섰다. 에스메랄다는 주워 든 종이를 다시 라그나에게 쥐여 주었다.

“자, 그럼 괜히 힘 빼지 말고 이제 돌아가 일을 하게.”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는 라그나에게 에스메랄다는 친히, 운용법 마석이 든 상자와 그가 서명한 계약서 두 장 중 한 장을 쥐여 주기까지 했다.

“열심히 해 줄 것이라 믿네.”

그러면서 라그나의 손을 토닥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온 후, 이토록 즐겁기는 처음이었다.

소파에 늘어져 있는 라그나를 등진 그녀는 집무실과 연결된 내문을 통해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라그나의 목숨 줄과 같은 위조 서류가 가득 들려 있었다.

집무실 의자에 앉은 에스메랄다는 바로 깃펜을 드는 대신, 잠시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잠시만이라도 지금 느끼고 있는 만족감을 더 누리고 싶었다.

그가 만들어 주는 마도구를 이용하면 앞으로 더 수월하게 황제와 귀족들의 눈을 피할 수 있겠지. 또한, 그녀가 필요로 하는 수많은 마도구들을 더 빨리 손에 쥘 수도 있을 터. 에스메랄다로부터 고롱고롱, 만족을 담은 울림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만족감을 동반한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희미하게 들린 문소리에 에스메랄다가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라그나가 응접실을 나선 모양이다. 그녀를 들뜨게 하는 만족감을 충분히 누려서일까? 에스메랄다는 감정 대신 이성으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어떤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없었던 라그나가 지금은 제 발로 굴러왔다. 에스메랄다는 그 변화가 나단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여기는 중이었다. 딸을 한 번, 아들을 한 번, 그렇게 자식을 두 번이나 잃었기에, 사라진 시간 속의 라그나가 타인을 배척하고 정을 주지 않고자 노력한 것일 수도 있다.

에스메랄다가 알던 라그나의 방어적인 태도가 정말로 나단의 죽음 때문에 생긴 변화였다면… 지금의 시간에서 그녀가 끼어들어 보호하는 이상, 나단이 죽을 일은 없다. 그러니 지금 에스메랄다의 추측이 모두 진실이라면 라그나의 미래는 이미 변했다.

원래라면 지금 시점에서 그의 인생에 에스메랄다라는 존재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이미 라그나에게 개입했으니 그의 미래는 분명 변한 것이 맞다.

“내 존재 자체가 세상의 변수가 된 셈이겠지.”

툭, 툭, 툭, 고용 계약서에 기재된 라그나의 서명 위에서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경쾌한 박자를 타고 움직였다. 역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가 변한 것도, 반군의 창설 시기가 앞당겨진 것도, 페드로와 라그나의 변화까지 모두. 미래를 겪고 돌아온 에스메랄다라는 변수로 인한 발생한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에스메랄다는 깨달았다. 이미 3년간 그녀 스스로가 다른 행동을 해 왔기에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미래가 변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수많은 이들이 모여 만드는 세상의 미래도 변하게 된다는 의미.

“그 작은 변화들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나도 무지할 수밖에 없어.”

그녀가 보고 온 미래에서 그녀 스스로는 지금과 다른 행보를 보여 왔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변하는 미래는 에스메랄다에게도 처음 가 보는 길이 되는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속에서 만족감 대신 경각심이 피어올랐다.

“그 영향이 황제에게까지 미치면…….”

그리하여 그의 생각과 판단이 변해 버린다면, 에스메랄다의 계획의 일부는 쓸모가 없어진다. 그로 인해 미래에 얻을 쓰임새 있는 퍼즐 조각들을 모으는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 또한, 그렇기에 지금 라그나의 경우처럼 가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퍼즐 조각을 손에 넣을 수도 있게 되겠지.

“득실을 어떻게 따져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군.”

황제의 머리를 똑하니 쪼개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지금의 변화들이 황제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머릿속을 차지하고 앉은 이 고민을 전부 떨쳐 내고 달리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쉬이 깨달을 수 있었던 문제건만. 미래를 알고 있다는 자만심이었을까? 아니면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이 바빠서? 이유가 어찌 되었건…….

“너무 늦기 전에 깨달은 거라면 좋을 텐데…….”

라그나를 손에 쥐고 구름 위에 오른 것처럼 즐거웠던 기분은 어느새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그녀의 계획을 얼마나 손봐야 하는지 계산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왔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른할 만큼 기뻤건만, 그 감정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그 한숨 위로 섞여들고자 하는 잡생각을 밀어내기 위해 부러 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라그나와 페드로가 그녀의 바뀐 행보로 인해 변해 버린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변할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애써 밀어내었다. 헛된 기대, 불가능한 희망, 그런 것에 발목 잡혀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아르페시스가 써 온 연설문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변하더라도, 그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피곤해…….”

아직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커다란 의자의 등받이에 콩 하고 머리를 기댄 에스메랄다로부터 얕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 * *

에스메랄다가 라그나를 먹어 치우고 부른 배를 쓰다듬었던 그 날 밤, 아르페시스는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종이를 와락 구기며 집어 던지자 깊은 한숨 소리가 뒤따랐다.

“전하, 이러다 오늘도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한탄 섞인 말에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신경질이었다.

“나도 알고 있으니 보채지 말라!”

보내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또 한 번 삐끗거리는 바람에 글씨체가 흐트러진 종이를 구겨 던졌다. 평소엔 잘만 써지는 글씨가 왜 이때만 되면 개발새발, 못나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가안을 작성해 봤을 때는 분명 그럴듯해 보였는데, 정작 완성을 해서 보내려고 하면 모조리 덜떨어져 보이는 것은 또 어떻고!

에스메랄다가 읽은 후 감동할 만한 찬사와 글귀를 만드는 게 어려워 미칠 것만 같았다. 나흘 후면 그녀의 생일인데, 제대로 된 선물도 마련하지 못하고, 직접 가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의 마음을 대신할 글귀나마 멋들어진 것으로 보내고 싶었다. 뭐… 그게 마음처럼 잘되지는 않고 있지만.

망할, 망할! 아르페시스는 시를 비롯한 모든 문학적 소양에 소홀했던 과거의 자신을 패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문학 시간에 전술 책은 왜 보고 있었단 말인가!

“때론 짧은 문장이 진심을 전하기에…….”

휴고의 조언이었지만 아르페시스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휴고를 노려보았다. 조언이 조언처럼 들리지가 않았으니까.

당장 그녀의 생일 선물을 위해 근방의 상단에 연락을 넣으면? 당연히 황제의 귀에 들어가겠지. 그동안 황실 내정에서 나오는 사비를 쓴 적이 없기에 더더욱. 그가 에스메랄다와 사적인 교류를 한다는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 보았자 좋을 게 없다. 정말 단 하나도. 자칫하다간 황제가 그와 테노리엘이 접선을 하며 일을 꾸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지 않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처지에 그게 가당키나 한가?! 선물도 보내지 못하고, 직접 가지도 못하지 않나! 더군다나 그녀도 내가 사생아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테노리엘의 적통인 그녀의 눈에 내가 차겠느냔 말이다! 잘 보여도 거절당할 판에 짧게 쓰라고?”

“……무조건 짧게 쓰시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 원래 근위 기사가 이런 종류의 감정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자리였던가? 휴고의 깊은 한숨이 그 모든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한껏 예민해져 있는 아르페시스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첫사랑에 빠지면 다들 저렇게 멍청하게 구는 법이지. 그래, 그런 법이지.

……그렇기는 개뿔, 휴고는 지난 고행을 떠올리며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이틀 전, 근위 기사들에게 배정된 공용 천막에서 쉬고 있던 휴고는 아르페시스의 부름을 받았다. 그를 불러들인 상관의 용건인즉, 에스메랄다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괜찮은 글을 쓰게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쭈뼛거리며 첫사랑에 빠져 안달복달하는 아르페시스는 꽤나 귀여웠다. 휴고가 요구를 곧장 수용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하지만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이 시도 싫다, 저 시도 싫다, 이 문장, 저 문장 다 싫다고 징징거리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짜증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그런 휴고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페시스는 다시 한번 자신이 완성한 서신을 검토했다.

「친애하는 영애에게.

직접 그대의 앞에 무릎 꿇고 그대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음에 이렇게 서신으로서 축하를 대신한다.

그대의 고운 손에 귀한 보물을 안겨 마음을 표하고 싶으나, 또한 출정을 변명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후략)」

분명 쓸 때는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는 왜 이렇게 형편없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주절주절, 전부 변명 같다.

‘친애하는’이라는 단어도 수십 번의 교정 끝에 선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귀애하는’으로 바꿀까 싶다가도 너무 노골적인가 싶어 기각. ‘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쓸까 하다가도 낯이 뜨거워져서 기각.

아르페시스는 결국 연서 작성 이틀 차인 오늘도 완성했던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아르페시스의 뒤에서 휴고는 이 지겨운 짓을 내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제발, 대충 좀 써서 보내 주면 좋을 텐데. 전투가 끝나면 아르페시스의 천막으로 불려와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이건 아닌 것 같다, 저건 좋은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내일의 전투를 위해 더 이상의 지체는 안 되겠다 싶어 아르페시스를 침대에 밀어 넣은 후에도 추가 업무가 있다.

아르페시스가 쓴 실패작들을 주섬주섬 주워서 소각시켜야 한다. 청소나 마찬가지인 이 행동을 무려, 근위대의 조장인 휴고가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보자면……. 이 낯 뜨거운 연서를 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상관의 명령 때문이랄까?

정신적인 피로가 너무 심했다. 이제 제발 좀, 밤에는 배정받은 자신의 침대에 드러누워 쉬고 싶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이 고문은 최소 이틀, 그도 아니라면 76일이 되는 날 끝날 것이다. 그 후에는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을 테니까. 휴고는 아르페시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인내심을 붙들었다.

* * *

이제 난전 중에도 딴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마수의 기척을 읽을 수 있게 됨에 따라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반응하게 된 것이다. 그 덕에 아르페시스는 전투에 임하면서도 에스메랄다에게 보낼 ‘생일 축하 서신’의 글귀를 고심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던 그대에게.’는 어떤가? 아니, 너무 아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눈이 멀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그대에게.’ 이건?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이다. 그녀가 정말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낯 뜨거운 말을 정말 그녀에게 전한다면 수치심으로 인해 수치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최소한 오늘, 내일 중으로는 보내야 늦지 않게 도착할 텐데. 이걸 어쩐단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답답함을 마수에게 풀었다.

그의 전투가 끝난 건 정오 무렵이었다. 아르페시스는 마수가 바글거리던 마을 내부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이런 식으로 남진하는 방향에서 마을을 발견하면 추가 업무가 생긴다. 정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식량이나 물자 및, 그보다 있을 가능성이 더 희박한 생존자 수색.

병사들이 마수의 사체를 마을 밖에 모아 불태울 준비를 하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근위대를 비롯한 호위 기사들과 함께 수색을 시작했다. 두어 번, 오늘처럼 마을을 지나치는 경우 해 왔던 일이지만 지금까지 생존자를 발견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아르페시스는 생존자를 찾겠다는 생각보단, 전투 중에도 열심히 하던 글귀 생각을 반복했다. 눈에 이상한 게 보이지 않았다면 계속 그 생각만 했을 것이다.

“음?”

마수가 헤집어 놓은 것인지 외벽과 지붕의 절반 이상이 무너진 건물의 앞을 지날 때였다. 아르페시스는 무너진 벽돌이 널브러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벽돌들을 쓸고 지나간 것처럼 길이 나 있는 곳, 그곳에 길게 이어진 핏자국. 마수에게 물린 사람이 질질 끌려간 흔적 같은데…….

정말 아주 사소한 이질감이 아르페시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만 그 핏자국이 이상해 보이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지하 창고의 입구같이 보이는 바닥의 나무판과 그 주변의 피. 창고와 바닥을 구분하는 나무판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고, 그 주변에만 혈흔이 가득했다. 마치 이 나무판이 닫히기 전에 피가 흩뿌려진 것처럼. 이미 갈색으로 변색되다 못해 굳어 바스러지기까지 하는 핏자국을 쓸어 보던 아르페시스가 나무판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전하?”

호위 문제로 근방을 벗어나지 않고 있던 헤롤이 그런 아르페시스를 부르며 다가왔다. 녹이라도 슨 것인지, 나무판과 바닥의 이음새에서 끼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윽!”

그 나무판을 들어 올린 아르페시스는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올라오는 악취에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쾌쾌하고 시큼한 악취였다. 지금이 겨울인데도 이런 냄새가 난다는 건…….

“전하, 제가 먼저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헤롤의 만류가 있었지만 아르페시스는 기묘한 감각에 집중하느라 말을 듣지 못했다. 지하에서 이상한 기류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헤롤이 막아서기도 전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았다.

피가 가득 뿌려진 계단을 타고 내려간 그는 지하실 바닥에 발을 딛기도 전에 굳은 듯 멈춰 서야만 했다. 계단의 끝에는 하체 없이 늘어진 인간의 시체가 보였으니까.

“아…….”

계단의 끝자락에는 잘려 나간 몸에서 삐져나온 장기가 어설프게 걸쳐져 있었다. 구불구불한 내장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참으로 처참했다. 의도치 않은 순간에 인간의 몸속을 들여다보고야 만 아르페시스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생겼다.

아마도 이곳으로 대피하려던 도중에 하체를 마수에게 먹히고 떨어져 내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위에 있던 그 기묘한 핏자국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 상반신의 시체가 이곳으로 떨어진 후 나무판이 닫힌 모양이다.

“전하.”

원인을 찾았음에도 아르페시스는 쉽게 지하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상반신뿐인 반쪽짜리 시체가 위에서 본 핏자국처럼 그에게 의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시체는 여인의 것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시체의 머리카락이 긴 것을 보고 그것을 파악했다. 만약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저 시체가 여인의 것인지, 사내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으리라. 상반신밖에 남지 않은 시체는 여기저기 거죽과 살점이 뜯어져 뼈와 내장이 훤히 보이는 상태였으니까.

입김이 나는 한겨울에 시체가 쉽게 썩을 리도 없고… 뭐지? 쥐가 파먹은 걸까?

아르페시스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진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입구 사이로 들어온 빛이 닿지 않는 구석. 대여섯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작은 지하실은 나무 장작이 반쯤 차 있었다. 그리고 먹을 것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 그 삭막한 공간에 떨림을 담은 울퉁불퉁한 그림자가 있었다.

논리적인 이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장작을 보관하는 지하 창고. 반쪽만 떨어진 채 살점이 뜯겨 나가 뼈와 내장이 보이는 시체. 그 공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 서부의 남쪽이 마수에게 침범당한 지 20일 가까이 지난 시점에, 이 좁은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게 있다는 건…….

“자…….”

아르페시스가 자신의 떨림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 자르간 경…….”

하지만 목소리의 떨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아르페시스의 눈은, 빛이 완전히 밝혀 내지 못한 구석에 있는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겁먹은 짐승처럼 떨며 아르페시스를 직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 그 눈동자의 주인이 품에 꽉 껴안고 있는 작은 그림자.

마수가 들어갈 만한 크기가 아닌지라 위험한 일은 없다고 판단, 외부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헤롤이 아르페시스의 부름에 곧장 지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역시 아르페시스가 본 것을 확인했다. 굳어 버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아르페시스와 달리 헤롤은 상황 판단을 마치자마자 움직였다.

그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풀어 반쪽짜리 시체를 덮어 버렸고, 자세를 낮춘 채 무릎걸음으로 그림자가 있는 구석으로 다가갔다.

“히익!”

그림자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괜찮다.”

그에 헤롤은 자세를 더 바짝 낮추며 거의 바닥을 기듯이 움직였다.

“괜찮다.”

그는 누군가를 세뇌시키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잔뜩 웅크린 그림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괜찮으니 이리 오거라. 나는 테노리엘의 기사다. 너희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맹세하마.”

“기, 기…….”

“라 울 자르간 헤롤,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 내가 너희를 지켜 주마.”

“흡…….”

“괜찮다.”

아르페시스는 무력하게 그 모든 것을 보기만 했다. 작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있던 큰 그림자가 헤롤의 품을 파고들었다.

“끅… 끄윽…….”

“괜찮다. 괜찮아.”

그에 작은 그림자 역시 억눌린 울음을 터트리며 헤롤에게 매달렸다.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더듬더듬 물었다.

“내가 뭘… 하면…….”

“호체르트를 불러 주십시오.”

헤롤의 대답에 아르페시스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과거 황제가 보낸 근위 기사들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던 바 루가 호체르트 세드릭을 불러 지하실 내부로 들여보냈다.

“흔적이 남아선 안 된다.”

“예, 자르간 경.”

짧은 대화 후 세드릭이 헤롤의 망토째로 시체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아르페시스의 귓가에, 지하실로부터 올라온 소리가 박혀 들었다.

“고생했다. 너무 늦게 와 미안하다. 이제 전부 내게 맡겨라.”

“흡… 끄윽……!”

“살아 주어 고맙다, 고마워.”

그 다독임 뒤에 붙어 오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고맙다, 그 한마디가 아르페시스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혀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돌아온 세드릭이 품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지하실 내부에 빵가루나 비쩍 마른 과일 껍질, 쥐의 시체 같은 것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아르페시스에게는 그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다. 세드릭이 일을 끝내고 사라진 후에야 품에 아이들을 안은 헤롤이 지하실을 나왔다.

“생존자다!”

헤롤의 음성에 별다른 기대 없이 주변을 수색 중이던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 * *

「1432년 카의 달에 발발한 서부 대란은 에렘 제국의 서남 경계선에서 퇴각한 병사들로 인해 마수가 서부의 남쪽 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사건이다.

서부 연합군의 활동 지역에 포함되어 있던 호렌 남작 성은 반파되어 생존자가 없었으며, 남작령의 남쪽에 있던 루게논 자작 성은 연합군과 합류하기 전까지 고립된 채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에렘 제국 서부에서 활동한 연합군이 성벽이 없던 소규모 마을에서 구출한 생존자는 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수에게 침범당했던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마을 주민 9천여 명 중에 고작 7명. 역사가 재앙이라 기록했으며, 주신께서 직접 적이라 명명한 마신의 파수꾼을 따르는 마수와의 전쟁은 이토록 참혹했다.

마룡과 마수는 재앙의 출현을 알리는 신탁으로부터 124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대륙에 존재했고, 지금의 우리는 선조들이 핏물로서 그 재앙을 몰아냈기에 평화를 누리고 있다. 분명 전쟁과 악행, 폭압과 폭정같이 수많은 폐단이 존재함에도 일부 학자들이 당 시대의 지도층을 무조건적으로 폄하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분명 부패했었다. 그러나 또한 분명하게 마룡을 몰아내었다. 지금의 말은 마룡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당시 부정과 부패에 물들어 있었던 각국의 귀족과 신전의 고위 신관들의 업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저평가하거나 폄하하지 않기 위함이다.

마룡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부패한 이들이 아니라 부패하는 대신 청렴하고, 비겁한 대신 의로우며, 탐욕보다 대의를 보았던 소수의 제대로 된 지도층이 희생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업적이었다. 그중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그들 중 누구라도 없었다면 불가능했노라 단언할 수 있는 인물은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마룡과의 전쟁에서 선봉에 섰던 에렘 제국의 15대 황제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라 할 수 있다. 그가 없었다면 마룡은 여전히 건재하여 인간을 잡아먹거나, 혹은 이미 인간을 멸망시켰을 것이다. 16세부터 마수와의 전장에 선 아르페시스 황제는 당 시대에 에렘을 지키던 기사였으며, 지금의 시대를 있게 한 영웅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후방국이 토벌전에 참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창기사, 카 시몬 라시나트 엘리나 공작이다. 마룡 토벌전에 참전한 그녀는 아르페시스 황제의 목숨을 구했고, 그 덕에 아르페시스 황제의 검이 마룡의 목을 잘라 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성국의 건국 후 누구보다 엄격하게 신관들을 이끌었던 초대 교황도 손에 꼽아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 살펴볼 인물은 그들이 아니다. 본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이들 모두가 있어도 이 한 사람이 없었다면 인간의 승전은 불가능했노라 단언할 만큼, 깊은 존경을 품고 있다.

그 사람은 아르페시스 황제만큼이나 유명하다.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성녀로 오해받고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당 시대를 지탱한 기둥이자 이 세상을 존속하도록 한 구원자였던 그 사람의 이름은…….

(후략)」

- 라 주브 아르텐 라그모베니안 『마수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들』 中 발췌.

* * *

아르페시스가 행정관들의 보고를 받기 위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었다.

“본진을 포함한 4개 부대의 야간 전투에서 발생한 병력 피해 보고서입니다. 내일 오전에는 오늘의 주간 전투에서 발생한 피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연합군 편성에서부터 아르페시스의 행정 업무를 보좌하던 테노리엘의 기사가 한 뭉텅이의 서류를 내려놓았다. 서류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건 현재 후방으로 이송된 중상자들의 치료 경과와 그들의 복귀 예상일에 따른 기사들의 규모 변화입니다.”

이미 두어 번 해 봐서 그 규모와 업무 처리 순서를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건 현재 후방에서 중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신관들에게 지급된 서부 연합군 예산 금액과 추가로 소모될 금액의 결재안입니다. 오늘 중으로 총사령관님께서 확인하시고 승인해 주시면 내일 저녁부터 예산 금액을 추가 투입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건 내일 중으로 도착할 2차 물자 내역이고, 또 이건 각 부대에 배부될 2차 물자의 예상 내역서입니다.”

이걸 읽고 숙지하면 저녁 시간을 넘어 10시쯤 될 것이다. 이후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 에스메랄다에게 보낼 서신을 쓰려고 노력하겠지. 자정이 넘을 무렵에는 휴고의 압박 아닌 압박을 받으며 침대에 눕게 될 것이고. 특별할 것 없이, 앞으로 서부의 영토를 회복하는 내내 반복될 그의 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반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아르페시스에게는 앞에 놓인 서류를 제대로 숙지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반쪽짜리 시체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나무 장작을 보관하던 지하 창고. 창고 속에 있던 시체. 시체와 함께 있던 두 아이. 그 창고에 식량 부스러기들을 배치하던 세드릭. 아이들을 안고 품에서 내려놓지를 않던 헤롤까지.

다른 곳에 살짝 정신을 팔고 있느라 평소보다 행정 업무에 많은 시간이 들었다. 결국 아르페시스가 몸을 씻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온 건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에스메랄다에게 보낼 서신을 써야 하는데……. 조금 전에 숙지한 수치들과 전 부대의 변동 사항들을 복기해야 하는데……. 오늘 헤롤을 비롯한 호위 기사들에게 배운 실전 지식도 다시 한번 되짚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해야 할 일은 넘치게 많건만, 아르페시스는 어딘가에 앉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생각이 잘 이어지지가 않았다. 울렁거리는 게 심장인지 위장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그렇게 현실이 아니라 기억 속에 얽매여 있을 때, 병영에서 들어 보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주둔지에서 그가 머무는 천막은 총 4개의 천막에 둘러싸여 있다. 20명의 호위 기사들이 5인 1조로 하나의 천막을 쓰고, 아르페시스를 24시간 호위하기 위해 교대로 휴식과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아르페시스가 듣고 있는 울음소리는 그런 호위 기사들의 천막에서 나온 것이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측하는 건 쉬웠다. 지금 이 병영에 이런 식으로 울 만한 인물은 헤롤이 품에서 떼어 놓지 않던 두 사람뿐이니까.

울음소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오늘도 잔여 업무를 예상하며 따라 들어온 휴고가 슬쩍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계속 커지기만 하는 울음.

“자르간 경이 발견한 그 아이들인 모양입니다.”

아르페시스는 휴고의 말에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그가 한숨과 함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울음소리는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커졌다. 아르페시스는 천막 안에 우두커니 앉아 밖에서 들리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기, 기사님 자, 자못해써요. 세리가 안 울 게 할 수 이떠요.”

“메리, 너희를 혼내는 것이 아니다.”

“그, 그티만…….”

어린아이의 목소리 속에 칭얼거리는 울음기가 덧붙여져 있었다.

“너희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응?”

들어 본 적 없는 헤롤의 다정한 음성도, 어눌한 발음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반복하는 아이의 음성도 그의 복잡함을 달래 주지 못했다.

“전하, 라 울 자르간 헤롤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르페시스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헤롤을 안으로 들였다. 아이와 함께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밖에서 다른 이와 함께 있는 모양이다.

헤롤은 천막으로 들어온 직후 휴고를 물려 달라 청했다. 그 덕에 아르페시스는 그가 무슨 대화를 하고자 이곳에 온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요청대로 휴고를 물린 아르페시스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몇 가지 청이 있어 뵙고자 했습니다.”

몇 가지?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충격적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이기에?”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한 물방울이 아르페시스의 남청색 머리카락에 이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마치 식은땀을 흘리는 것처럼.

“오늘 전하께서 보신 것을 침묵해 달라는 주제넘은 부탁이 첫 번째입니다.”

한마디로 입단속을 하기 위해 왔다는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콧수염이 인상적인 헤롤을 빤히 바라보다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하지. 그게 전부는 아닐 텐데?”

“다름이 아니라…….”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런 운을 띄우나? 아르페시스는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부득이하게 저희 천막으로 데려왔습니다만…….”

작은 아이는 고작 서너 살이 되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렸다. 그러니 헤롤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되나?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반문 없이 헤롤의 말을 경청했다.

“아시다시피 두 아이 모두 여자아이이고, 저희 천막에는 사내들만 다섯이 있으니… 세리가 겁을 먹어서인지 울음을 그치질 않는 상황입니다.”

“세리?”

아르페시스의 반문에 헤롤이 둘 중 작은 아이라고 설명했다.

“아… 그런데?”

“해서 두 아이가 이곳에서 이틀 정도 머물 수 있을지, 그에 대한 청을 드리고자 왔습니다.”

두 아이의 생존 배경을 아는 데다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뿐인 아르페시스의 천막. 다 자란 사내들보다 체격이 작은 아르페시스는 아이들이 보기에 덜 위협적일 터. 헤롤이 생각하기에 이곳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으리라. 아르페시스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래서 치솟아 오르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이들을 데려와도 되겠습니까?”

“……그래.”

은혜, 아르페시스는 용건을 마친 후 돌아가려는 헤롤을 붙잡았다. 속에서 켜켜이 쌓여 가는 이 무언가를 털어놓고 싶었다. 이걸 계속 품고 있다가는 곪아 갈 것이다.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의 말에 천막을 나서려던 헤롤이 멈추어 섰다.

“무엇을 이르시는지요?”

“그 아이들이 먹은…….”

시체, 그 짧은 단어가 혓바닥 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차마 그것을 소리 내어 발음할 수가 없었다.

“자네와 호체르트 경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처럼 굴더군.”

“혹시나 하여 준비해 두었던 것뿐입니다. 그 준비가 헛된 것이었다면 더 좋았겠지요.”

“나는… 나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일이라…….”

만약, 만약에… 자신이 두 아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아르페시스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어렵다. 지금 북받쳐 오르는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아르페시스로서는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극악한 선택지로 밀려나 그런 방법으로나마 생을 연장한 아이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식인이었다.

“혹여 아이들이 꺼림칙하시다면, 청을 물리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자네들이 너무 침착해 보여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천막 입구 부근에 멈추어 서 있던 헤롤이 다시 안쪽으로 걸어왔다.

“그 아이들이 사람의 시체를, 그것도 모친의 시체를 먹어 생을 연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메리… 큰아이의 말로는 그 사체가 제 어미의 것이라더군요. 그것을 너무 쉽게 말하기에 아이들이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지 걱정되어 곁에 두고자 한 것입니다.”

“…….”

“저는 그것을 가볍게 보아 넘기는 게 아닙니다.”

아르페시스는 덤덤하게 대화에 임하는 헤롤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침묵을 선택하고 침착한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연극?”

아르페시스로서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배운 지식에는 이런 순간의 대처 방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메리는 고작 다섯 살이라고 하더군요.”

“…….”

“그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겠습니까? 제 동생에게 같은 것을 먹일 때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

“꺼림칙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복잡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헤롤이나 세드릭 역시 이 일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휘둘려 아이들을 내치기보다, 어렵게 살아남은 그 아이들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식인은 대대로 이도교적인 행위로 심판받아 왔다. 일반적인 도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아르페시스에게는 그러했다.

“전하께선 그 아이들이 그곳에서 굶어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모친의 시체를 먹고 살아남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굶어 죽느냐. 애초에 그들이 그런 가혹한 상황에 처한 이유는 사병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기 때문이 아닌가.

“영주의 사병이 존재하는 이유는, 치안을 유지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영지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

“잘못은 그 의무를 지지 않고 도주한 이들에게 있는데, 죽음은 어찌 그 아이들이 감당해야 하는지요?”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지금의 그들은 노력하고 있지만 현재의 노력이 과거의 잘못을 없애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고 처벌할 것인가?

그 의문에서 처벌을 논하기엔 이미 시간이 흘러 버렸지만, 비난마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헤롤은 그들을 비난하며 아이들을 보듬길 택했다.

‘모두가 공포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전하처럼 단번에 그것을 해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에게는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에스메랄다가 했던 그 말을 지금에 와서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마수로 인해 느끼는 공포에 얼마나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계속 그들을 지켜봤고,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토록 복잡한 모양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어려운 용기를 내고 있는 병사들을 더 이상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르페시스는 울렁거리는 속을 심호흡으로 달랬다.

“두 아이… 메리와 세리의 이후 처분은 어떻게 되나?”

“우선 내일 도착하시는 페드로 도련님께 신변 보호를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아가씨께도 전서구를 보내 보아야지요.”

“이주 요청인가?”

지금 서부 연합군이 있는 지역은 테노리엘 백작령이 아니다. 그곳은 출정 반나절 만에 빠져나왔다. 연합군은 현재 백작령의 남쪽, 서부와 남부에 걸쳐 있는 쿠베트 후작령에 있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쿠베트 후작이나, 그 후작의 봉신으로서 이 마을을 직접 영지로 관리하고 있던 호렌 남작에게 두 아이의 신변 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 후작님이나 남작님께 연락을 넣어 신변을 인계하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라… 아가씨와 도련님께 부탁드려 볼 생각입니다.”

“……자네가 그 아이들을 거둘 생각인가?”

“예.”

사실 헤롤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두 아이는 테노리엘 백작령의 영지민이 아니기에 테노리엘의 기사인 헤롤이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게 아니니까.

“저는 그 아이들을 지켜 주겠노라 맹세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르페시스의 앞에 서 있는 헤롤은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처하고 있다.

“테노리엘 일가에서 나서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예.”

너무나 확고한 믿음 앞에서 아르페시스는 쓰게 웃었다. 휘하의 기사가 한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나서 주는 주군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주군을 믿는 기사라니. 황실에서 나고 자란 그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 보면, 조언을 받아 보면 조금 나아질까 했는데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복잡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페시스는 복잡한 속내를 모두 숨기고 침착한 척 연극을 시작했다. 헤롤이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연극의 무대 위로 오른 아르페시스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새겨졌다.

아이들이 발견된 마을은 그가 영주들의 사병과 합류하여 퇴각을 결정한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하루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만약 그가 과거에 그곳에서의 응전을 택했다면? 저 아이들은 그 선택지로 내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당시 그런 선택을 했다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셨을 겁니다.’

이성은 그것을 이해하지만 심장은 아리기만 했다. 그녀가 한 말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보다. 감정에 휘둘리고 다가올 피해에 겁먹어 그릇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전장에서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니까.

그는 앞으로 계속 군부에 몸을 담고 병력을 지휘할 것이다. 그러니 만일, 후일에 지금의 것과 같은 결과가 도래할 일을 마주한다면……. 감정을 포기하고, 최선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데 할 수 있을까? 이런 감정을 알게 되었는데 최선에 의해 휘둘릴 그들을 냉철하게 버릴 수 있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떨어트린 사이, 헤롤이 천막 밖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세리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메리는 헤롤의 손을 붙든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처음부터 준비를 해 온 것인지, 헤롤은 아이들이 덮을 모포까지 따로 챙겨 왔다.

“인사드려야지. 황자 전하이…….”

“되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예를 받아 무얼 하겠다고.”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인사를 생략한 헤롤이 아이들을 침상 아래의 바닥에 눕히려 했을 때였다.

“누가 같이 쓴다고 해서 저 넓은 침상이 닳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편히 잘 수 있도록 하라.”

천막에 놓인 것이라 해도 황자가 사용하는 것이다. 족히 두 명은 편히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침대였다. 그의 허리에도 오지 않는 작은 아이 두 명을 눕힌다고 좁아지지 않는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난 할 일이 남았으니 자네가 재워 주게.”

“예, 전하.”

헤롤이 두 아이들을 침대 위로 올려 보냈다. 아르페시스는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재우는 헤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내일이면 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테노리엘의 대표로 페드로가 올 것이다. 인계가 끝나면 늦어도 모레 떠날 테니 그 전에 에스메랄다에게 전할 서신을 완성해야만 했다.

“흐읍… 끕…….”

“울 것 없다. 여긴 안전해.”

작은 몸을 토닥여 주는 소리가 얼마나 울렸을까? 울음 대신 들려오는 새근거림이 아르페시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이 고요한 소음이 너무나도 가혹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시선을 텅 빈 종이에 고정시켜 두고 귀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향해 활짝 열어 놓기를 잠시. 아르페시스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 서신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느새 아이들을 재운 헤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전하,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시 한번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은혜랄 것이 어디에 있다고. 아르페시스는 쓰게 웃는 것으로 답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날 밤 아르페시스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침대에 몸을 눕혀야만 했다. 내일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한 그가 깨어난 건 꿈 때문이 아니었다. 색채만으로 이루어진 꿈은 밖에서 들려온 이질적인 소리에 사라졌다.

아르페시스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위에 있어야 하는 존재가 보이지 않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세리는 깊게 잠든 것인지 여전히 새근새근, 고요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잠에서 깨운 건 침대 위에서 보이지 않는 메리일 터.

그는 침대 밖으로 상체를 기울였고, 그 아래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메리를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상상도 못 할 가혹함에 떠밀렸던 아이를 어떻게 다독여야 하나. 아르페시스는 한참의 망설임 후에 어렵게 손을 뻗었다.

“어찌 그러느냐?”

등을 쓸어 주려 했건만, 그는 자신의 손이 닿자마자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메리를 보며 이름을 찾아내지 못했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스스로가 타고난 운명이 너무 지독해서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느껴 볼 일이 없었던 감정, 그건 연민이었다. 최선의 결정을 위해 배제당한 채, 무력하게 휩쓸려 버린 이들에 대한 연민.

“속이…….”

바닥에 웅크린 채 덜덜 떠는 저 작은 아이를 향한 연민이 넘실거렸다. 아르페시스는 망설임이 남아 있던 손을 쭉 뻗어 아이를 안아 들었다.

“물을 좀 마시겠느냐?”

침대에서 일어나 어설픈 손으로 품에 안긴 아이를 다독였다. 지난밤 보았던 헤롤을 흉내 내었다.

“혹시 악몽이라도 꾸었느냐? 자장가… 자장가를 불러 줄까?”

그가 아는 자장가는 하나도 없지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를 안아 든 채 얼마나 서성였을까? 아르페시스는 제 옷깃을 꽉 움켜쥔 채 흐느끼는 메리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 엄마아…….”

작은 손에서 나온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아귀힘이었다. 그의 옷깃을 움켜쥔 메리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타인을 향해 처음 느껴 보는 연민이 너무나도 지독하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앉았다. 토닥토닥, 어설픈 위로가 메리의 등에 닿았다.

“괜찮다.”

아르페시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날 보았던 헤롤을 따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품에 안긴 메리를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정말 고생했다.”

흐느낌은 울음이 되고, 울음은 통곡이 되었다.

“으아앙, 어엉!”

“살아 주어 고맙다.”

그 좁디좁은 지하 창고에서 이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 헤롤이 했던 말이다. 그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게 아니라, 헤롤이 그러했던 것처럼 덤덤한 척 넘기고 아이들의 상처부터 살폈어야 했다. 그게 이 작은 아이들을 가혹한 선택으로 내몬 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울다 지친 메리가 잠들기 전까지 계속 속삭였다.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헤롤이 했던 말 중 한 가지는 입에 담지 못했다. 사과란 그 행동의 잘못을 인정하고, 두 번의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의 말이기에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아이들을 그 창고에 버려둔 채 퇴각했던 그 선택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 어렵다.

아직 그는 답을 보지 못했고, 결론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너무, 힘들다. 무엇을 골라도 끔찍할 테니까.

다음 날 그답지 않게 해가 뜰 때까지 기척이 없는 아르페시스 때문에 휴고가 움직였다. 황성에서야 시종들이 그의 시중을 들지만, 전장에까지 그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올 수는 없다. 결국 전장에서 아르페시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건 그의 호위 기사들이고, 휴고는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천막 내부를 둘러보던 휴고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슬슬 식사를 하고 출정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야간 전투 병력과의 교대 시간에 늦는다. 하지만 휴고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침대 맡에 그대로 멈추어 서야만 했다.

“우움…….”

아르페시스의 반절도 되지 않는 작은 아이들이 그의 품을 파고든 채 잠투정을 하고 있었다.

“쉿.”

아이들에게 품을 내어 주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그가 적진에 잠입할 때나 사용할 법한 수신호로 전달한 말은 간단했다.

[식사를 가져오라.]

휴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에스메랄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라그나 앞에서도 여유로웠다.

“역시, 자네는 유능해.”

라그나가 황태자의 인장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다. 다른 마법사들이라면 사나흘 정도는 소모했을 텐데, 라그나는 그 절반도 되지 않아 성과를 들고 왔다. 다 만들었으니 시간을 내 달라는 전언을 받고 그를 막 집무실 안에 들인 참이다.

“그냥은 못 주지.”

속았다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라도 했을까?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손을 내민 채 뻣뻣하게 구는 그를 보며 서랍을 열었다.

“하나는 다른 이름으로 준비했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네의 신변이 노출될 가능성도 있으니 같은 이름을 쓰는 건 피하는 게 좋겠다 싶더군.”

“빨리 내놔!”

서랍 속에서는 각기 4장의 서류와 신분 패가 들어 있는 상자가 나왔다. 상자 옆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까지 함께.

“자네 아들의 나이는 내 임의로 기재했네.”

나단은 본인의 나이를 10대 후반이라고 언급했지만,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15세의 신분을 쥐여 주었다. 아무리 보아도 십 대 후반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외관과 신분 패의 나이를 맞춘 것이다. 이곳에서 지내며 식사와 운동을 꾸준히 챙기면 곧 나이에 맞춰 몸이 자라나겠지.

“자네가 외출할 때는 내 휘하의 용병들이 항시 동행할 것이고, 자네와 아들이 머무는 별관 역시 그들이 번갈아 가며 경비를 설 거네.”

상자를 책상 맞은편으로 쭉 밀어 주자 라그나가 그것을 가만히 노려보며 되물었다.

“……감시하겠다는 거요?”

“보호하겠다는 의미라네.”

에스메랄다는 상자를 눈앞에 두고 식식거리는 그에게 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위험한 것이지. 내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노력하겠지만, 황제의 저력도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니… 미리 조심을 해야지.”

“물러 줄 생각은 없는 거지?”

“절대로.”

라그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 가며 화를 표출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건, 이건 사기야.”

“나는 자네에게 선택지를 주었어. 먼저 합류를 요청한 건 자네이고.”

계속 이런 식으로 반발하며 억울하다는 마음을 먹으면 좋지 않다. 지금 달래 두어야 훗날의 평화와 협조가 가능하리라.

“그렇다고 해도 내가 침묵으로 자네를 기만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

“그러니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네.”

라그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테노리엘이 명예를 운운하며 맹세를 하고 있으니까. 실상 그녀가 무슨 짓을 해 왔건, 테노리엘의 명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그나에게는 지금의 맹세가 세간에 퍼져 있는 테노리엘의 이름만큼 무겁게 다가가리라.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는 놔주겠네. 그때가 되면 앞으로 자네를 보호할 이들이 국경을 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맹세하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어렵고 위험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녀는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답은 없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라그나가 위험에 처하기 전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로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녀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만약 신분을 하나만 준비했다면, 라그나는 에스메랄다의 약속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도망칠 길이 어디에도 없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녀가 쥐여 준 신분은 두 개. 훗날을 기약하며 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 곧장 손에 들려 주었으니 궁지에 몰렸다는 압박감은 피해 갔으리라.

“이제 되었나?”

“……테노리엘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거야.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고!”

“내 맹세가 진실된 것인지는, 훗날이 도래했을 때 알게 되겠지.”

에스메랄다의 손길을 따라 상자 위에 동그랗게 말린 종이가 올라갔다.

“이건 앞으로 자네가 개발해야 할 마도구의 목록이네. 가장 앞에 있는 숫자는 우선순위를 의미하고, 마도구의 이름 옆에 그려진 표시는 난이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수식을 개발하기 어렵다는 거야?”

라그나는 삐죽거리면서도 상자와 목록을 모두 챙겼다.

“아마도. 나는 연구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밖에 제시할 수가 없네. 상세한 것은 자네가 해 주어야 해.”

다행스럽게도 불가능한 탈출에 대해서는 빠르게 포기를 한 모양이다. 하긴, 테노리엘의 본진에서 아들까지 데리고 무사히 빠져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한 것이지.

“안전은 책임지는 거지?”

“당연히. 그 안전에는 자네 아들이 배워야 할 교육도 포함될 거네.”

“……엉?”

지난 이틀 동안 에스메랄다는 별관에 배치한 사용인들을 통해 두 사람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에스메랄다로서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라그나를 더 빠르고 완벽하게 포섭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라그나도 백작 성에 발을 들이며 그 정도 생각은 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더라도 이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들어왔을 거고.

“지난번 보았을 때 사교성이 부족해 보이더군. 아마 오래도록 타인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건…….”

“상식 수준은 아직 내가 모르니, 한번 확인을 하고 진행해야겠어.”

라그나는 얕은 한숨을 쉬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을 어떻게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난 것은 맞지만 일단 이곳을 안전하다고 여겼던 만큼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에스메랄다는 이 정도면 초반 성과가 좋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아니, 식료품 가게에서 파는 식자재가 가게 내에서 뚝딱 나오는 줄 알더라니까? 상단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흥분할 일은 아닌 것 같군.”

라그나의 말에 따르면 나단은 뒷골목에서도 최하층에 속했던 존재다. 누군가 버린 음식 쓰레기나 그 자신보다 약한 이들의 음식을 약탈함으로써 생을 연명해 온 아이.

그는 평범한 이들이 당연하게 보고, 듣고, 배우며 자란 세상의 상식을 보고, 듣고, 배우지 못했다. 상식이란 단순히 자라기만 해선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자라나는 순간에 보호자에게, 교육자에게 당연하게 배워야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단은 철이 광맥 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물론 말의 수명이 몇 년인지, 대륙 위에 몇 개의 나라가 있는지,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이 얼마나 다양한지도 알지 못하리라.

아는 만큼 보는 법이니 아마도 나단이 보는 세상은 무척 좁을 터. 이 판단은 에스메랄다가 사용인들에게 받은 보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입욕제가 뭔지 몰라 입에 넣으려고 하기도 하고, 라그나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 증세를 보이며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기도 한다.

에스메랄다가 보기에, 나단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별채가 좁은 것도 아닌데 그곳을 구경하기 위해 돌아다닌다는 보고는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근방의 정원이나 본성에 방문한 적도 없다.

그는 자신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라그나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보호자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다.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배워야 하는 사교성이 부족하기에 안전하다고 여기는 보호자 외의 타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라그나는 나단을 아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아들이라 칭할 정도로.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그가 나단을 그 상태로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문제와 관련해 도움을 제공하면 라그나의 호감을 얻으면서,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데 도가 튼 에스메랄다에겐 쉬운 계산이었고, 정답이었다.

“마지막 장은 시험지라고 생각하게.”

에스메랄다는 최대한 온화하고 나긋나긋한 태도로 라그나를 대했다. 그를 손에 넣은 직후 고압적으로 나갔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달래야 할 때다.

“자네 아들이 세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겠지. 오늘 돌아가서 풀어 보라고 하게.”

나단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필요에 의한 것이다. 모두 라그나의 호감을 위해 계산된 행동이다.

“걘 아직 에림어도 다 못 뗐어.”

“자네가 아들에게 문제를 읽어 주면 될 일이 아닌가?”

라그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시험지를 훑어보았다. 설마 이런 것을 모를까, 같은 표정이긴 했지만……. 아마도 그는 오늘 별채로 돌아가 충격받을지도 모르겠다. 뒷골목의 약자들이 어떤 상태인지 그도 짐작만 하는 수준일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이미 뒷골목에서 선별해 세작으로 훈련시키고 있는 이들 덕분에 그 부분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라그나의 성격상 몇 년 같이 살았다고 해서 옆에서 이것저것 알려 주었을 리도 없고.

에스메랄다의 입장에선 라그나가 나단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라그나가 나단의 옆에 앉아 한 글자, 한 글자 가르치고 있는 모습은……. 미미한 소름을 느낀 에스메랄다가 평온을 가장하며 라그나의 말을 되받아 주었다.

“내일 돌려주면 되나?”

“다 푸는 대로 보내 주면 적당한 교육자를 찾아보겠네.”

“……뭐, 알겠어.”

라그나는 상자와 몇 장의 종이가 있던 자리에 에스메랄다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았다. 성인의 엄지 두 개를 붙여 놓은 크기의 인장 마도구. 전체를 사파이어로 만든 저 물건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라그나는 모르리라.

“고생하게.”

“흥.”

에스메랄다는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돌아가는 그를 배웅했다. 라그나 덕분에 황태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 * *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에반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겨울이 끝나고 여름이 오면 남부군은 리퀘나 탈환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다음 겨울에도 리퀘나가 없다면 피해는 커질 테고, 남부에 있는 각각의 영지들은 고립을 벗어나지 못할 터.

수십만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질 수도 있는 일이니 다음으로 미룬다는 선택지는 그들에게 없다. 남부군은 마수가 주춤하는 여름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겨울이 끝난 직후 미리 내려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더군다나 지금 남부에는 토벌하지 못한 대형 마수까지 있다. 그놈을 치우지 못하면 안전한 전투가 불가능하니, 남부군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대형 마수 토벌이 되리라.

남부군의 향후 움직임은 예정되어 있는바, 에스메랄다는 거기서 황태자에게 무능의 꼬리표를 달아 줄 생각이었다. 그에 대한 상세한 계획서와 그 계획을 위해 필요한 인장 마도구까지. 두 가지를 챙긴 히나가 용병들과 함께 말 위에 오르고 있었다.

계승권을 가지지 못했으나 루실 자작가의 성을 쓰는 방계로서, 황성의 하급 관료로 들어갔을 만큼 영민한 에반스이니 충분히 잘해 주리라. 남은 건 히나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그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것이다. 한마디 할까 했지만… 에스메랄다는 침묵을 택했다. 경고와 조언은 이미 넘칠 만큼 했다.

모든 것을 그녀가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히나가 그녀에게 유리한 선택을 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일을 잘해 낸다면 다음 역할을 받을 것이고, 해내지 못한다면…….

“거기까지인 것이지.”

만약에 대비해 히나를 호위할 용병들에게 언질을 해 두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행동은 그녀에 대한 불신으로 비칠 뿐이다. 복수를 위해 뭉친 이들 사이에 낯간지러운 배웅 따위는 필요 없는 법 아니겠나? 그들이 떠나는 시각 에스메랄다는 집무실의 창가에 서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해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을 파고들며 멀어지는 그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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