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4화 (14/45)

제14장

격동하는 겨울

“감히 황제 폐하의 백성을 해한 죄를 물어, 죄인들에게 단두 처형을 선고한다.”

망설임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끝나자 기사들이 검을 빼어 들었다. 남부 중앙군 주둔지에서 발생한 탈영병 가족 살해 사건의 범인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범행 시간의 행적, 목격자의 증언, 동기까지 완벽했다. 그럼에도 억울하다며 바득거리기에 입에 재갈을 물려 두었다.

‘가서 탈영병 놈들의 가족을 들쑤시고 다닌 것이나 해결해라.’

‘그 외엔 가서 앉아만 있어라. 괜히 나서서 남부군을 들쑤시지 말고, 그들과 충돌할 생각도 말라. 이제껏 해 온 게 있으니 네놈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잘 막을 게다.’

페라노스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서 앉아만 있다가 돌아오라던 황제의 지시가 못마땅했다.

남부군이란 자고로 여름에는 전선을 밀어내고, 겨울에는 다시 밀리는 짓만 하며 제국의 국고를 갉아먹는 놈들이 아닌가. 이 기회에 자신의 능력으로 모자란 남부군을 이끌면 단번에 대륙 남부를 수복할 수 있을 텐데, 그걸 하지 말라니.

황제의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직은, 아직은 이를 드러낼 때가 아니다.

‘짐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가 죽은 듯이 살아야 할 것이다.’

남부군이나 반황실 세력을 견제하느라 바쁘다고는 해도 황제는 황제다. 그가 손에 쥔 중앙군은 가벼이 볼 수 없었다. 페라노스가 황제의 뒤를 이어 제국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 하나, 황제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손에 쥔 권력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본인의 죽음 전에 그 권력을 탐하는 자가 있다면 황제는 기꺼운 마음으로 도전자를 제거할 것이다. 그게 설령, 다음 제위를 약속받은 아들이라 해도.

“어차피 놈은 늙어 버릴 터.”

버둥거리는 문제의 기사들을 보며 페라노스가 중얼거렸다. 황제가 늙어서 국정을 이양하기 시작하면 그때,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하리라. 그럼 비천한 피를 타고났으면서도 그와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놈은 필요가 없어지겠지.

서부 연합군의 소식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비천한 놈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가 남부까지 내려온 상태니 더 이상 놈은 가치가 없다. 이 기회에 마수의 먹이나 되어 버리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황후를 배출한 디오세네트 공작가를 필두로 이들은 모두 그를 지지한다. 약혼을 통해 끌어들인 솔루베르 공작가 역시,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나머지 놈들도 그가 늙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차지할 수 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파이를 몽땅 먹을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성급하게 일을 그르칠 수야 있나.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다.

“크큭.”

페라노스는 훗날 자신의 발아래에서 기어 다닐 황제를 생각하며 웃었다. 그가 손짓하자 시종이 와인을 건네주었다. 남부 특산물이라는 이 와인은 10여 일 전 생일 선물을 미리 진상하겠다는 상단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이 와인을 가져온 상단주는 은근슬쩍 연회 얘기를 꺼내며 다른 물자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 페라노스는 가난한 남부군이 화려하고 풍성한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이미 임시 관저로 명명된 루소멜 백작 성에서 연회 준비가 한창이다.

“집행하라.”

와인잔을 쥔 페라노스의 입에서 간결한 음성이 나오자 기사들이 검을 치켜들었다. 죄인들의 입에서 재갈을 타고 뭉그러진 비명이 들려왔다. 마나를 실어 한 번에 잘라 낸 목이 바닥을 굴렀다.

정면에 목이 잘려 나간 시체를 두고도 페라노스는 와인을 홀짝이며 웃었다. 관저에 주둔하는 남부군 지휘관들이 눈살을 찌푸린 건 오만한 페라노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부로 내려온 지 20여 일 만에 황제가 시킨 일을 해결했으니 이제는 휴양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면 될 일. 페라노스가 손짓하자 시체가 치워졌다.

“문제가 해결되었군. 이번 일로 죽은 백성에게 심심한 위로를 하는 바이다. 앞으로는 선별에 더욱 박차를 가해 저런 불량품이 중앙군의 이름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하지.”

와인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소음 같았다. 그 적막은 페라노스를 기쁘게 했다. 황태자인 자신의 앞에서 겁에 질린 개처럼 꼬리를 말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남부군의 하찮음을 실감하게 해 주지 않나.

“문제를 일으킨 주범들이 처리된바, 독자적 행동으로 민간 백성을 살해한 중앙군 기사의 사건을 종결한다.”

페라노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와인잔을 비웠다. 피를 봐서인지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무료하니, 연회가 열리기 전까지 계집이나 품을 생각이었다.

“해산하라.”

그 한마디에 처형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남부군과 백작령의 영지민들이 자리를 떠났다. 페라노스 역시 관저로 사용하고 있는 루소멜 백작 성으로 돌아갔다. 그 단출한 처형식이 있은 후 노란 깃으로 물든 전서구가 서부를 향해 날아갔지만…….

「카 66일, 신항로 개척 성공. 기존 항해 종결. 순항 기념 축제에 사용할 주류 조달 완료. 개척로를 이용한 2차 항해 시작.」

페라노스는 그 사실을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 * *

페드로의 입술은 찢어진 채 상처가 나 있었고, 턱 주변에는 퍼런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왼손은 무언가를 가격한 것처럼 욱신거리는 중이니 페드로의 얼굴에 저걸 만든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그래.”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정확히는 언제 잠에서 깬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에스메랄다를 품에 안고 울고 있었다. 그렇게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기억 속에서 선명한 건 에스메랄다, 그녀뿐이다.

기억은 나지 않으면서 감정은 어찌나 선명한지. 꿈에서 느꼈던 어둡고 질척한 절망과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후 느꼈던 환희까지. 그 감정을 곱씹으면 몸이 떨려 왔다.

“오늘은 무슨 꿈을 꾸셨기에 그리 난폭하셨는지?”

페드로가 평이한 어조로 그를 비꼬았다. 난폭이라는 말에 발끈하며 고개를 쳐들었지만…….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보다 더 푸르스름해진 것 같은 페드로의 턱을 보고 반박을 포기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페드로를 저렇게 때린 것인가.

“무슨 꿈을 꾸셨는지 여쭈었습니다만.”

기억에도 없는 행동을 반성하고 있을 무렵 페드로가 다시 물어 왔다. 답을 하려고 입을 열자 감정이 울컥하고 치솟아 올랐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거칠어지는 호흡은 버겁기만 했다.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는 손써 볼 틈도 없이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가렸다. 고작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절절해지나. 그녀가 그리워서, 너무나도 그리워서 비참하기까지 했다. 고작 몇 분 전에 보았는데도 말이다.

훌쩍 자란 모습의 그녀가 처형대 위에 묶여 있던 모습이 선명했다. 발치에 고인 핏물과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돌,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악의. 그녀가 화마 속으로 사라지던 순간을 떠올리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지던 모습이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녀가… 죽는 꿈을…….”

이게 미래라고? 이 지독한 것이 훗날 현실이 된다고? 아르페시스는 어느새 다시금 울먹이고 있었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만이 적막한 새벽녘의 침실을 채웠다.

“그녀를 불렀는데…….”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가져다준 물잔을 받아들며 어렵게, 어렵게 설명을 이어 갔다.

백작의 처형을 알리던 테베르, 근위 기사들과 사흘 밤낮을 내달려 도착한 황도, 그 황도에 도착한 후 그녀를 영애라고 부르던 기사들, 분명 연결되는 꿈이다. 그 외에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무수한 돌과 높디높은 단상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이들까지. 모두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자 애썼다. 얘기가 끝났을 때 아르페시스의 얼굴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고 눈매는 잔뜩 부어 있었다.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곧 출정식이지 않습니까?”

페드로가 어느새 가져온 얼음주머니를 내밀었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받아 들며 한 차례 심호흡했다.

“대체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

“…….”

“이게 정말 예지몽이면…….”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에스메랄다의 최후가 그런 것이라니, 대체 그날이 되기 전까지 무슨 일들이 벌어지기에?

“전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소식을 가져온 기사가 천사를 백작이라 불렀다는 게 분명합니까?”

“……아마도?”

아르페시스는 도로 침대에 누우며 눈가에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내가 황도로 돌아갈 일이 몇 번이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도착해서 보게 된 것들도 그렇고.”

“……글쎄요.”

페드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르페시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다독이는 동안 침실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단호한 목소리가 그 침묵을 가르고 나타난 건 새벽이 지나 천천히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딴 것이 천사의 미래일 리 없습니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는 간절함도 함께 담겨 있었다.

“천사가 작위를 승계했다면 저희 형제가 모두 죽었다는 말인데…….”

테노리엘 백작은 험난할 것이 분명한 백작 위의 길을 에스메랄다에게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그녀가 작위를 승계한다면 그건 그녀 외에는 테노리엘의 이름을 이을 후계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페드로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저는 전선으로 향할 생각이 없고, 그곳이 아니라면 제가 죽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의 미래가 그딴 것일 리도 없지요.”

그에 아르페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저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 미쳐 가는 것일 수도…….”

흔들리는 목소리에는 숨겨지지 않는 불안감이 함께였다.

“후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꽤나 멀쩡해 보이셔서 말이지요.”

아르페시스는 이를 악물며 침묵했다. 자신이 미친 것이라면 에스메랄다의 미래가 그런 것이라는 추측이 틀린 거겠지. 그리고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면 지금 꾸는 모든 꿈이 정말 미래의 일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곧 출정입니다. 늦지 않게 준비하시기를.”

아르페시스는 자리를 떠나는 페드로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텅 빈 침실에서 홀로 남은 그는 처음으로, 그냥 자신이 미친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루 종일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그녀의 끝이 그런 끔찍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서.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꿈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 보았다.

* * *

“이미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아직 보지 못한 이들도 있을 테지.”

확성 마도구를 통해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외성 밖에 세워진 병영 곳곳에 퍼져 나갔다.

“오랜 시간 마수에게 시달린 남부는 소규모의 영지라고 해도 외성이 쌓여 있고, 외성이 없는 지역에선 백성이 거주하지 않는다.”

그가 없는 다른 부대에서는 총사령관 휘하의 부대 사령관들이 미리 전달한 연설문을 읽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부는 사정이 다르지. 성벽 없이 마을을 이루고 살던 수백, 수천의 백성들 중 제때 대피를 하지 못한 이들은 며칠 전 남부와 서부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난 후 모두 죽어 나갔을 터.”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에스메랄다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탈영을 했던 병력들을 모아 구성한 진영이었다. 중앙군 출신의 탈영병 2천여 명은 본진에, 서부 사병 출신 탈영병들은 각 부대에 분산 배치했다. 그 속에서 그는 누구를 보고 있을까?

서부 연합군의 편성이 완료되고 드디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출정을 앞두고 있는 순간. 에스메랄다는 서부 연합군이 치를 전투가 아니라, 몇 시간 전 그의 침실에서 보았던 광경을 곱씹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를 부여잡고 흐느끼던 아르페시스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보지 못한 이들은 곧 내가 한 말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이 그걸 보며 깨닫기를 바란다.”

그의 눈물과 절박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에스메랄다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 보았다. 아르페시스의 온기가 매달려 있던 그곳에 모든 신경이 매달렸다.

“너희가 마수 앞에서 등을 돌리는 순간, 공포에 굴복해 저항을 포기하는 순간.”

본진에 배치된 1만 3천 명의 눈동자가 모두 아르페시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지선의 뒤에 위치한 또 다른 영지들도 그렇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대다수의 병사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자세를 비틀었다. 그 덕에 단상 옆에서 군영을 바라보고 있던 에스메랄다에게는 사람이 만든 잔잔한 물결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너희의 이웃이, 친구가, 그리고 가족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라. 그리하여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외면하지 마라.”

아르페시스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지금의 말을 써 내려갔을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 어느 누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을까.”

병사들에게 하는 저 말이,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은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희들이 해내길 바란다. 내가 해내었듯 너희도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에 가득 찬 것은 복수가 아니라 아르페시스였다. 그의 눈물, 자신을 가득 채우던 온기까지.

“쉽지는 않겠지만 결코 포기하지 마라.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그 모든 행동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침실 밖에서 기다리다 만난 페드로는 무슨 일이냐는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사라졌으니까.

그 후 출정식 준비로 바빠졌고, 치장을 마치고 외성으로 나올 때까지 아르페시스를 만나지 못했다.

“너희를 집어삼키는 공포에 저항하라. 옆에 있는 전우들과 함께 스스로가 아닌 뒤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라.”

그의 눈물이 피부에 스며들어 체내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간질거리던 목덜미가 뻐근해지고,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엇박자를 타기 시작한 바람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너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버텨라.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도 공포에 굴복하지 말라! 그리하여 우리의 뒤에 남을 모든 것을, 마수가 짓밟으려 드는 것을 지켜라! 고향과 이웃을! 친구와 가족을!”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부여잡고 울던 아르페시스를 떨쳐 내지 못했다. 그의 눈물은 커다란 해일이 되어 그녀를 덮쳐 왔다. 스스로의 어리석은 희망을 인지하고 그것을 억눌러 왔던 에스메랄다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새벽에 보았던 아르페시스의 눈물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다독여 보기 위해 눈을 감자 그의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서부 연합군.”

기사들이 뿔피리를 들어 허공에 치켜세웠고, 그들을 이끌 사령관이 선언했다.

“출정이다.”

수백 개의 뿔피리가 같은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선두 부대가 진군을 시작했다. 군을 이끄는 책임자라고 해서 항상 모든 이들의 앞에 서는 건 아니다. 특히나 습격의 위험이 있는 이동 중에는 선두가 아니라 중앙에 자리를 잡은 채 이동하기 마련.

그러니 아르페시스가 출발하기 전 한두 마디를 나눌 여유는 있지만 에스메랄다는 그와 따로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 눈물 한 방울에 동요하는 스스로를 알고 있기에 그를 외면하고 피하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떠 단상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보았을 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간 테노리엘이 행한 모든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출정 전 치하를 위해 다가온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부딪쳤다. 은회색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데 이골이 난 에스메랄다조차 읽기 힘들 만큼 복잡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노골적으로 선명한 감정이 하나 있었으니, 티끌 하나 묻지 않고 선명한 호감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내뱉은 숨은 가파른 박자를 탔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그것을 입김으로 만들어 내 타인의 눈에 비춰 주었다.

“그리고… 출정 후에도 후방 상황을 알아야 해서,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시금 입을 연 직후, 고개를 숙인 채 발치를 바라보고 있는 아르페시스만이 그런 에스메랄다를 보지 못했다.

“서, 서신을… 보내도 되겠나?”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호감에 설레고, 헛된 희망을 외면하기 위해 얼마나 버거웠는가. 그런 와중에 전신을 옭아매다 못해 그녀의 숨통을 조르는 감정을 마주한 결과는 뻔했다.

에스메랄다는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채 본능에 충실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후에 정신을 차리게 되면 지금의 순간을 또다시 후회하리라.

“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에스메랄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그녀가 두 손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아르페시스의 곁에 서 있던 휴고가 속삭였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손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거친 숨결과 떨림이 그 속삭임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부디,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며.”

에렘 제국의 영토에 전선이 생긴 이후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사지로 떠나는 이의 귀환을 바라며 창칼을 쥘 그들의 손에 축복을 내리는 것이다. 그와 사이가 돈독해진 이후로는 전선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해 주었던 축복이자 기도였다.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아르페시스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뻣뻣하게 굳었던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과 함께 휴고가 다시 속삭였다.

“전하, 축복의 답례를 해 주셔야 합니다.”

에스메랄다의 머리 위에서 아르페시스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을 이루겠노라 약조한다.”

그녀가 쥐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에스메랄다의 금발을 파고들었고, 금빛 물결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흐트러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이었지만 에스메랄다는 그게 자신이 누려야 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손길에 기대었다.

차갑게 언 그녀의 뺨에 아르페시스의 거친 손이 닿았고 그는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에스메랄다를 따라 아르페시스의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리고 서툴지만 노골적인 손길이 에스메랄다의 뺨을 타고 움직였다.

그녀는 뺨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에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홀린 게 분명했다. 아르페시스의 눈물이 몸에 스며들어 그녀를 중독시킨 것이다. 그의 눈물은 해독제가 없는 독약이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껏 그를 멀리하고 그의 감정을 외면하려던 노력을 등지고 이토록 쉽게 무너져 내릴 리 없다.

그의 손은 에스메랄다의 뺨을 쓰다듬고, 살결을 타고 내려가 앙증맞은 입술에 닿았다. 굳은살로 딱딱해진 엄지가 에스메랄다의 작은 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리고 입술의 안쪽에 숨어 있는 은밀한 살을 훑어 냈다. 탐이 난다는 듯 노골적인 손길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이들이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길 정도로 은밀한 접촉이기도 했다.

“큼.”

페드로의 헛기침 소리에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던 기묘한 공기가 산산조각 났다. 아르페시스의 거칠어진 호흡이 한순간 끊겼고 에스메랄다는 그가 거둔 온기를 아쉬워하며 탄식했다. 두 사람 모두, 숨이 넘어갈 것처럼 절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이만…….”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아르페시스는 붉게 물든 얼굴을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에스메랄다는 눈을 내리감은 채 숨을 헐떡였다. 새벽녘에 보았던 아르페시스의 눈물이 아직도 목덜미에 고여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전과 달리 적나라한 호감을 보이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설렌다. 자신에게 말 한번 붙여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그를 볼 때면 기쁘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그의 눈물이 환각제라도 되는 것처럼 취하고야 만다. 달라지지 않은 그의 모습은 흐려지고,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은 강렬해졌다.

이성은 감정에게 굴복했고, 헛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움켜쥐고자 하는 탐욕이 혀를 날름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르페시스가 떠난 장소에서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심장에 똬리를 틀고 앉은 탐욕을 발견했다.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며 원하는 것을 집어삼키려는 지독한 탐욕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었다.

“부디.”

그에게 기억이 없는 것이 기회가 되어, 사라진 시간 속에서는 비난받았던 모든 행위를 이해하고 용납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해 준다면 그를 밀어내지 않고 다시 한번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이고, 서로에게 칼을 겨눈 채 만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한순간, 그러나 분명하게 탐욕에게 집어삼켜졌다. 다시 한번 희망에 굴복해 헛된 것을 꿈꾸었다.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결말을 가져오는지 알면서도 그 순간, 그 찰나에는 분명히.

“네가 변해 주기만 한다면…….”

그녀의 곁에서 속삭임과 닮은 중얼거림을 지켜보는 청록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전송한 카 67일은 남부에서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 * *

정식 출정이 있기 이틀 전부터 남진을 위한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어 왔다. 그 결과 테노리엘 백작령의 남쪽으로 반나절 거리에는 소수의 마수들만 어슬렁거릴 뿐, 대규모의 집결이 일어날 만큼의 개체 수가 없는 상태였다.

출정 전 영주 성과 반나절 거리에 천막을 비롯한 새로운 주둔지가 세워진바, 아르페시스는 1부대의 남쪽에 설치된 본부대의 진영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1부대를 본진의 서쪽에, 그리고 2, 3부대를 동쪽에 둔 채 각 부대 간의 연대 전투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한 배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진을 하며 마수가 침범한 서부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일정이 시작되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딴생각을 하기 바빴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손등에 닿았던 말캉거리고 부드러운 감각만 생각하는 중이랄까?

서신을 보내도 된다는 답을 듣지 못해 초조해지던 중 에스메랄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뭘 하려는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제국에 전송 문화가 있다는 건 알지만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곧장 연관시키지 못한 것이다. 보통 전송이란 혈육이, 혹은 배필이, 그도 아니라면 연인들 간에 주고받는 것이니까.

혼인을 하지 않은 아르페시스에게 배필이 있을 리 없고, 그의 혈육이라고 해 봐야 미친 황태자와 황제뿐. 전송을 해 줄 만한 모친은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황제의 손에 죽었다. 그런 와중에 연인이나 약혼녀도 없으니…….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전송을 받아 볼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전하, 검을 주로 쥐시는 손에 축복을 받으시면 됩니다.’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들려온 휴고의 속삭임. 아르페시스는 홀린 듯 에스메랄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어진 기도와 축복, 부드러운 감촉, 황홀감이라는 단어를 그토록 절절하게 실감할 순간이 또 올까?

손길을 피하지 않고 그에 순응하던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환영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손에 닿았던 그녀의 뺨은 보드라웠고, 손가락으로 훔쳐 본 그녀의 입술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살결은 또 어떤가!

아르페시스의 얼굴은 줄곧 붉게 물든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리기 바빴다. 그렇게 하면 그곳에 닿았던 온기와 감촉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고작 몇십 분 전의 감촉을 잊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계속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마음은 고하셨는지요?”

혼자만의 세상에 있던 아르페시스를 현실로 데려온 건 휴고였다. 옆에서 말을 몰던 그가 던진 질문에 아르페시스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시선이 휴고에게로 향했다.

“무슨 소린가?”

아르페시스는 휴고가 멀뚱, 멀뚱,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왜 자신을 저렇게 쳐다볼까?

“테노리엘 영주 대리에게… 말입니다.”

“마, 마음이라니!”

호감을 가진 것으로 무슨 그런 거창한 짓을, 아르페시스는 전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더듬었다.

“훗날에 그녀를 사, 사… 훗날에 할 것이다.”

거절당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꿈과는 달리 다시 만나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 그녀를 사랑하게 된 상태라면 고백은 해 볼 생각이었다.

“……예?”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꺼낸 말인데 이 얼빠진 반문은 뭐지?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시 휴고를 찾아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왜… 훗날을?”

“호감 정도로 마음을 고하기엔… 과하지 않은가?”

의문을 표하는 아르페시스 앞에서 휴고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는 의문에 더해 당황하기까지 했다.

“호… 예?”

그렇게 노골적으로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굴었으면서, 고작 호감이라고? 휴고는 말문이 막혔다. 테노리엘 영주 성에서 보았던 아르페시스의 행동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사, 사, 사…….”

아르페시스가 말을 더듬다니. 그를 모신 지 어언 5년. 휴고는 낯설기만 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털털하고 직설적인 사람,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 휴고가 보는 아르페시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궁으로 납치당했던 날 이후 다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 사랑이라는 건 언제쯤 시작되나?”

그 당혹감 속에서 다시 한번 날아든 질문. 휴고는 그걸 듣고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아르페시스는 사랑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받아 본 적 없고, 주어 본 적이 없으니까.

에스메랄다에게 호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인지하지만 그게 사랑이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으리라. 그러니 저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거겠지.

그때 휴고는 아르페시스가 결여된 사람이라는 걸 인지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건 휴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 외에는 이런 호감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분명 그녀를 사, 사, 사… 그렇게 되겠지? 그게 언제쯤일까?”

휴고의 상식선에서 아르페시스의 질문은 기괴한 것이었다. 사랑을 하면 하는 것이지 언제쯤 사랑하게 되냐니. 그런 질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오늘 처음 알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벙긋거리던 휴고는 도움을 요청하듯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곧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귀를 기울이며 흥미로운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다른 근위 기사들의 표정이 자신의 것과 판을 박고 찍어 낸 것처럼 똑같았으니까.

이 대화의 포문을 연 자신이 해결까지 해야 한다. 휴고는 그것을 직감했다. 그는 본인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는 아르페시스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그럴 수도 있지. 아르페시스의 성장 배경을 떠올린 그가 자신을 다독였다.

모두가 당연하게 아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휴고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륙 최북단에 있는 데녹 제국은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한다. 1년의 400일 내내 하얗기만 한 나라.

그리고 지금은 멸망했으나 과거, 대륙의 남부 중심지에 있던 멜 왕국은 땅에 물기가 없어 손에 쥐면 가루처럼 흐트러지는 모래가 가득하다고 했다. 사막이라고 했던가?

듣고 읽음으로써 알고는 있지만 직접 본 적은 없기에 추상적이기만 한 것, 아르페시스에겐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리라.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 덕분일까? 휴고는 진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개인마다 다른 법입니다만…….”

그냥 속 시원하게 넌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하고 말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휴고는 얕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충동을 털어 냈다. 어쩌면… 아직 사랑이라고 표현하기 묘한 감정일 수도 있지. 아르페시스가 직접 말했듯이, 타인에게 그런 호감을 가지는 게 처음이라지 않나. 그러니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과한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의 눈에 사랑처럼 보인다 해서, 무작정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건 옳지 않다.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지금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소년에게 지나친 충격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시점이었다.

“전하께선…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아르페시스가 망설임 하나 없이 명료한 답을 내어 놓았다.

“대단한 것이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닌데… 휴고는 앞길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테노리엘 영주 대리께 어떤 호감을 느끼시는지?”

“어떤 호감이라니? 호감에도 종류가 있나?”

지금 하는 말이 아르페시스에겐 사랑에 대한 정의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을 잘해야 한다. 휴고는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음, 그러니까, 영주 대리에 대해… 언제,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휴고는 아르페시스가 눈을 끔뻑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뒤에 이어지는 말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은 하루 종일 한다만?”

“…….”

“행정 업무를 보다가도, 훈련을 하다가도… 그리고 식사를 할 때도. 온종일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 그리고 눈앞에 없으면 보고 싶어진다. 지금도… 솔직히 보고 싶고.”

아무리 사랑을 막연한 것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이건,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전부이십니까?”

휴고는 처음으로 아르페시스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 그녀와 거리낌 없이 닿을 수 있는 페드로를 보면 부럽다. 조금 거슬리기도 하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일전에 내가 모르는 용병과 그녀가 함께 있는 걸 봤는데, 무척 친근한 사이 같더군. 그게 불쾌하기도 했지. 한데 그녀가 그건 아니라더군. 그래서 기뻤다.”

질투인데. 휴고는 다시 한번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르페시스를 사이에 두고 양옆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테베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알 수 있었다. 지금 주변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모든 근위 기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말을 마친 후 잠시 생각을 곱씹는 듯 보이는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휴고는 그런 그를 보며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

“그녀가 웃어 주거나 칭찬을 해 주면… 기쁘다. 심장이 간질간질하게.”

아닐 수도 있기는 무슨.

“그리고 일전에, 그녀를 대상으로… 그러니까, 그녀를 생각하면서 꿈을…….”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휴고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무, 물론 성숙하게 자란 모습이었다.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데 혹시는 무슨! 진정해라, 진정해. 휴고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훅, 훅, 훅 호흡을 다듬었다. 일단, 당황하고 놀랐을 그를 달래 주어야 한다. 휴고 자신의 부친이 그러했던 것처럼.

“경… 하, 드립니다. 이제 어엿한 사내, 가 되셨군요.”

하지만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도 삑, 하고 목소리가 이탈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페드로의 조언이 없었다면 아르페시스는 그 일을 절대 타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휴고는 페드로가 이미 혼란스러워하던 아르페시스를 한 차례 달래 주었다는 것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겠나?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순수함이라니. 아니, 이것을 순수함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 이건, 감정에 대한 무지가 아닌가.

휴고는 다시 한번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구원병이 등장했다.

“겨, 경하드립니다. 전하.”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축하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전하께서 벌써 사내가 되셨군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제가 다 자랑스럽습니다.”

휴고와 비슷한 표정이던 근위 기사들이 모두 너도나도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다들 기사도를 배우고, 그것에 충실한 인생을 사는 기사였다. 여인들을 보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닌 성욕을 느낀다는 것에 한 번쯤은 고뇌를 했던 사내들.

그들이 황제의 권력에 알랑거리지 않고, 제대로 된 기사도를 배워 왔기에 가능한 광경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제대로 된 기사였기에 출세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이유로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들은 이 문제에 있어 접근하는 방식이 매우 유사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축하 인사에 아르페시스의 입꼬리는 춤을 추듯 움찔거렸다. 휴고는 무척이나 뿌듯해 보이는 그를 보며 아득한 감각을 느꼈다.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사랑이 언제 시작되냐니…….

“그, 그 정도면 이미… 영주 대리를 마음에 품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벌써?”

벌써라니? 휴고는 또다시 튀어나온 상식 외의 질문에 혀를 깨물 뻔했다.

“난 그녀를 제대로 알게 된 지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 사랑이라니?”

“……사랑에 어찌 시간을 조건으로 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이들도 수두룩한 것을요.”

“첫… 눈에?”

그 반문 직후 아르페시스는 어딘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근위 기사들이 아르페시스와의 거리를 좁히며 첫 경험이나 첫사랑, 자신의 연인과 있었던 일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을 때 휴고는 반대로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당연하게 깨닫고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을 누군가가 가르쳐 주고, 정리해 주고, 설명해 주어야지만 인지하게 되다니.

‘어서 머리를 조아려라.’

‘형님께선 자비로우시니 자네가 용서를 구한다면 웃어 넘겨 주실 것이다.’

‘모자라긴 하지만 그래도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이가 아닙니까? 형님께서 아량을 베푸시지요.’

그 일 이후 소속된 곳에서 지독할 정도의 괴롭힘이 이어졌고 휴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숨을 구해 준 아르페시스의 근위 기사로 자원했다. 승인이 떨어진 다음 날 황자 궁에서 아르페시스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게 진짜로 될 줄이야…….’

‘뭐, 그대도 살길이 생긴 것이니 나쁘지는 않겠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오비텐 경.’

그 후에는 매일이 똑같은 아르페시스의 일과를 따라다녔다.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물건이나 사람도, 친분을 나누는 인사도, 믿고 따르는 스승이나 부모도 없는 아르페시스의 무채색 삶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황태자처럼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도 않고 권위를 내세워 결핍된 것들을 채우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황제가 시키는 일과를 소화하며 덤덤하게 시간을 채워 나갔을 뿐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아르페시스가 결여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휴고는 티가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헛소리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는 자신이 당연하게 가져 왔던 것이 타인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날 때부터 강탈당한 아르페시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본인이 빼앗긴 게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그렇게 아르페시스를 중심에 두고 빙 둘러싸고 있는 근위 기사들이 한참 사랑에 대한 주제로 대화에 열을 올릴 때. 그들보다 한 겹 밖에서 아르페시스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호위 기사들이 있었으니. 아르페시스의 출전에 함께했던 테노리엘의 기사들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서부 사태를 일단락시킬 때까지는 계속 기사들을 내어 주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아르페시스의 호위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마나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아르페시스와 근위 기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러니 다들 이렇게 살벌한 눈으로 무리의 중심에 있는 아르페시스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겠지. 그중 헤롤은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괘씸한…….”

감히, 테노리엘의 기사들은 본인들의 아가씨를 화두에 올리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 * *

에스메랄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한순간의 탐욕에 휘둘려서 이로울 것이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아르페시스가 떠난 후,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일으키는 페드로의 손길이 있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 뒤로는 자책과 후회만이 남았다. 놓아 버렸던 이성을 다시 붙잡으며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상기한 덕분이다.

“하.”

거리를 둬도 모자랄 판에 아르페시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전송을 했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가 건네는 손길에 길이 든 고양이처럼 뺨을 내주기까지 하다니.

“머저리 같으니라고.”

이를 악문 탓에 발음이 뭉개졌다. 그렇게 후회와 자책을 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뺨과 목덜미를 계속 문질렀다. 아르페시스가 남기고 간 온기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어 그녀에게 새겨진 상태였다. 그 결과가 어떨지 빤히 알면서도 더, 더 닿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그녀는 이 탐욕이 어떤 감정을 먹고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경험해 보기까지 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또다시 잘라 내는 데 실패했다. 숨 한 번 내쉬는 순간,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그동안 저항했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무의미해졌다.

달콤하고 매혹적인 꿈의 향연. 그를 생각하며 설레고 그와의 미래를 상상했을 때 얼마나 강렬한 행복에 젖어 들었던가.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의 부고가 아니었다면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심장에서 커다랗게 부푼 그 감정을 아르페시스에게 고했을 것이다. 현실을 잊고 꿈속에서 살게 만드는 그 감정은 지독한 것이었다.

감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함에도 그녀는 쉽게 발을 빼지 못했다. 그때와 달리 아르페시스가 노골적인 호감을 표한 후였으니까. 홀로 마음을 품고 정리를 다짐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녀가 응하기만 하면, 그렇게만 한다면.

“으음…….”

에스메랄다의 입술을 타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달아서 혀의 감각이 마비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살랑거렸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손을 뻗으면 된다는 유혹. 마치 그것에 저항하는 그녀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것에 순응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에스메랄다는 어렵게 호흡을 골랐다. 머리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르페시스가 그녀에게 다른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억지로 손을 뻗고, 억지로 깃펜을 쥐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눈앞에 끌고 왔다.

지금 느끼는 유혹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되었다. 경각심을 느꼈으니 자제할 수 있을 것이다. 버텨 낼 것이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나 하자. 우선은 히사르 상단과 관련이 있는 귀부인들의 허영심을 자극해야 할 때였다.

에스메랄다는 황도에서 활동하는 사치품 상단으로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그녀가 쓴 글씨는 평소보다 조금 뾰족했다.

「테뷔르 후작 부인, 부소네 공작 부인, 솔루베르 공작 부인.」

미래를 알고 있다는 말은 사교계의 여인네들이 언제, 어느 것에 열광하는지 알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귀부인들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건 이골이 나 있다.

아직 중소 규모에 지나지 않으나, 미래에 이름을 날렸던 세공사들과 장인을 미리 포섭한 덕분에 이 사치품 시장에서도 곧 성과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겨 필요한 인물에게 먼저 사치품을 선보이기로 했다.

유일한 것, 앞서 나간 것, 특별한 것, 그 수식어가 여인네들의 심장에 불을 붙여 주겠지. 더욱이 인근에 위치한 영지 때문에 줄곧 신경전을 해 온 세 개 가문의 여인들이라면, 더 쉽게 타오를 터. 부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그녀들의 심리를 조금만 자극해도 엄청난 경쟁이 시작되리라.

“금과 보석으로 만든 가루를 연회장에 뿌리며, 돈을 쏟아붓게 만들어 주마.”

에스메랄다의 지시 아래, 본래라면 5년 후쯤에야 유행하는 식용 금가루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본디 장신구는 한 번, 소모품은 지속적으로 돈을 소모하게 만드는 법. 그들은 티 파티 한 번에 장신구값을, 연회 한 번에 건물값을 내게 된다 해도 멈추지 못하리라.

수입 곡물 상단의 상권을 가져오기 위해, 그 상단의 뒷배가 되어 주는 가문의 재력을 깎아 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금에 타격을 주면서 훗날 금력 경쟁을 했을 때 우위를 점할 준비를 해 두어야 했다.

1년, 아니 2년, 그 이상도 걸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사이 제카 상단의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면 곡물 시장에 침투해 몸을 웅크릴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억지로 생각을 이어 가고 일을 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그녀가 글을 읽는 속도는 평소보다 느렸다.

「보물 상자 4개 모두 위치 및 상태 확인 완료. 상자 주인의 방문을 기다리며 화가 준비 완료.」

북부에서 용병들이 보내온 서신이었다. 벨베크 백작의 사생아들을 찾은 것이다.

「상자가 보관된 내부의 광경을 화폭에 담을 것, 그 외에 상자의 내용물, 겉 금박, 크기 등, 그림에 담을 수 있는 건 모두 기록할 것.」

그날 하루는 일에 투입하는 시간에 비해 속도가 지나칠 정도로 느렸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깃펜을 내려놓지 않았고 그날 밤, 한 통의 서신이 추가로 도착했다.

「일은 순조롭습니다. 가게 대여섯 개만 정리하면 끝납니다. 그런데 어제 이상한 사람이 접근을 했는데, 일단 귀족 같아서 굽신거려 줬습니다. 제 뒤를 캐는 것 같아서 주고받은 서신도 전부 태워 뒀고요. 인상착의는 붉은 머리카락에 조금 보라색인가, 자색 같은 눈동자였습니다. 키는 185 전후였고 검을 차고 있었고, 체격 좋았고, 말투를 보니까 귀족 같았습니다. 돈을 주면서 어제 방문에 대해 침묵하라고 하길래 일단 알겠다고 하고 받아 뒀습니다. 금화 50개쯤 됩니다.」

붉은 머리카락, 자색 눈동자, 180이 넘는 키. 에스메랄다는 루그레디안이 후작이 되기 전부터 그를 따르던 호위 기사를 떠올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 때문일까?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추후 동일 인물이 접선할 시, 동봉한 서신을 전달할 것.」

아르페시스를 쫓아낸 덕분에 그녀의 글씨는 다시 정갈해졌다.

「루에게 안부 전해 줘요.」

루그레디안이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에스메랄다보다 파악하기 쉬운 뒷골목에 먼저 접근했을 확률이 높다.

에스메랄다는 이번 서신을 단순히 동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도구를 꺼냈다. 서신에 금박을 입혀 사전에 누군가 뜯어보지 않았는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도구였다. 이게 달려 있으면 건달이 열어 보더라도 루그레디안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접근을 해 왔다는 건 훗날의 동맹을 기대할 수 있는 징조, 후에 그에게 물어 확인을 하고 건달이 뜯어본다면 처리할 생각이었다. 앞서 서신을 보내온 이가 금화의 숫자까지 언급한 걸 보면 더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 에스메랄다는 상단에서 사용하는 수표에 금화 100개를 적었다.

이렇게 유통할 수 있는 자금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 주면 계속 오늘처럼 외부 접근을 보고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미 계속 이런 방식을 취해 온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보고가 올라온 것이니까.

이 보고서 같지도 않은 서신을 보낸 뒷골목 건달은 이제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 돈을 주며 접근하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리면, 그녀는 그보다 더한 금액을 줄 수 있다.

이 서신을 받아 가는 이가 그녀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기를 바라며. 에스메랄다는 총 세 장의 종이를 전서구의 발통 안에 밀어 넣었다.

* * *

에스메랄다가 루그레디안의 접근을 인지했던 그 시각, 남부 루소멜 백작 성에서는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한창이었다.

“빨리 가지고 가!”

황태자가 주최하는 연회, 그게 루소멜 백작 성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음식은 식기 전에 새로운 것을 내어 가야 했으며, 술이 비기 전에 새로 채워 넣어야 했다. 트집 잡힐 만한 실수를 하지 말라는 루소멜 백작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에 주방에서 일하는 이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하지만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과 달리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움직임은 고요했다.

보통의 연회라면 응당 음악 소리 아래 간드러지는 여인들의 웃음과 호방한 사내들의 웃음,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따라와야 하건만.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로지 음악 소리뿐이었다. 페라노스는 그곳에서 표정을 잔뜩 굳힌 채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그의 욕구를 만족시킬 만한 요소들이 연회장 내부에 가득했겠지만……. 지금 연회가 열린 장소는 남부였다. 넘쳐나는 술과 식었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질 음식, 반짝거리는 장식들을 사치라 여기는 이들이 가득한 곳.

남부군의 지휘부는 이런 연회가 아니라 붕대와 약제, 그리고 신관에게 지급할 치료비로 돈을 쓰는 데 익숙한 이들이다. 평민들은 에스메랄다의 간섭으로 이 연회가 남부군 공금으로 열린 것인지, 황태자의 사비로 열린 것인지 쑥덕거리지만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은 오늘의 연회가 황태자의 사비로 열렸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따위 사치에 버릴 돈이 있는 황태자가 남부군에게 원조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이러한 이유로 연회장 내부에는 표정이 굳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남부군 지휘부와 그런 그들을 따라 방 안의 장식품처럼 서 있는 자제들뿐이었다.

일평생을 자신에게 아양을 떨며 품어 달라 속살거리든 여인들과 그녀들을 제 품에 끼워 넣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던 중앙 귀족만을 상대해 온 페라노스였다.

간드러지는 여인들의 웃음소리.

드레스 틈으로 보이는 여린 속살.

은밀하게 기대어 오는 가슴까지.

그중 아무것도 없는 연회라니.

페라노스는 자신과 벽을 쌓듯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모여 앉아 술과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이들이 아니꼬워 미칠 것 같았다.

일전 남부에서 활동하는 상단주 하나가 그의 생일 선물을 미리 진상하겠다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정성이 갸륵해서 잠시 만나 주었더니 하는 말도 흡족했었다. 생일 연회 물자도 자신이 조달할 수 있다며, 위대하고 고귀한 그의 생일 연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 뭔가?

‘곧 위대하신 분의 탄신일이니, 은혜를 베푸심이 어떠신지요?’

‘남부의 가난뱅이들이 언제 호화를 즐겨 보았겠습니까?’

‘전하께서 남부의 불쌍한 이들에게 좋은 술과 음식을 내려 주시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겁니다.’

‘남부의 사정을 가련히 여겨 성대한 연회로 그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시면, 다들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를 겁니다.’

페라노스는 그 상인의 아첨에 동의했다. 해서 빈곤한 것들을 불쌍히 여겨 친히 연회를 열어 주었건만. 그가 루소멜 영애와 첫 춤을 추었음에도 이어 가는 사람은 없었고, 그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다가와 대화를 청하는 이도 없었다.

연회가 시작된 이후, 페라노스가 남부군 인사들과 나눈 대화는 생일을 축하하는 인사와 답례, 딱 그 정도였다. 아무리 누릴 줄 모르는 빈곤한 놈들이라 하나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 덕에 감미로운 술과 풍요로운 음식을 누리고 있는데.

그런 아니꼬움을 제 성질머리대로 풀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황제가 남부군 인사들과 충돌을 피하라고 했던 말이 페라노스의 이성을 붙들었다. 그는 트집을 잡지도, 말꼬리를 물지도 않은 채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속으로는 놀 줄 모르는 남부군의 어리석음과 멍청함을 욕하면서. 뭐… 불만을 술로 달랜 덕분에 그 최소한의 이성마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

“더 가져오라!”

와인잔이 비자마자 신경질이 가득한 페라노스의 음성이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평소 술을 즐겨 찾던 그이건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전혀 맛이 없었다. 그런 페라노스 앞에 시종이 술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다른 이들은 아직 처음 쥔 와인잔조차 비우지 않았기에 다음 술을 찾지 않았다. 유일하게 페라노스만이 계속 술을 비워 가고 있었다. 그는 새로 집은 잔에 든 과실주를 냉수 마시듯 들이켜기 시작했다.

홀의 가장자리에 마련된 좌석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들의 표정은 더 딱딱해지기만 했다. 그들 중에는 라 게만 앙뷔 베헤타도 있었다. 현재 루소멜 백작령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세그만 자작령에 주둔하는 5천 병력의 지휘권자. 고위 귀족의 봉신이 되지 못해 영지는 없으나, 작고한 부친을 따라 2대째 남부군에 종사하며 군권을 쥐고 있는 앙뷔 남작가의 가주.

그는 썩어 빠진 중앙 귀족들과 달리 스스로가 제국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앙뷔 남작은 연회장에 들어선 직후부터 역한 메슥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난장판이 된 남부로 저 악단을 불러들이기 위해 쓴 돈은 얼마일까? 열기가 식어 테이블에서 치워지고 있는 음식은 어디에 버려지나? 훈련과 전투에 지장을 줄까 무서워 마시지 못하는 이 술을 들여오는 데는 또 얼마의 돈이 들었는가!

지금 연회장을 구성하고 있는 돈을 남부군 지원금으로 썼다면? 수천의 병사들이 부상을 치료할 약제를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손쓸 수 없는 부상을 입은 기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신관들을 불러올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일국의 황태자라는 이가 남부군이 보는 앞에서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연회장에 들어와 숨을 들이쉬는 것마저 역해 물도 입에 대지 않고 있는 앙뷔 남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한 다급한 발걸음이 시작된 건 페라노스가 와인을 몇 잔이나 더 비운 후였다.

“지휘관님, 주랑 준남작께서 퇴각하셨다고 합니다.”

사 울 주랑 에뷔라노, 세그만 자작령의 남쪽에 주둔 중인 4천의 병력을 통솔 중인 지휘관이었다.

당일 전투가 예상될 만큼 마수 무리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그는 전투를 핑계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퇴각을 했다는 건 그가 예상했던 전투에 집결한 마수는 최소 동수 이상이라는 의미다. 해당 전투에서 살아남은 잔여 마수가 주변의 마수와 합류하여 북진하면 자작령에서의 전투는 불가피하다.

불참에 대한 트집이 잡히기 싫어 참석했던 앙뷔 남작은 차라리 그처럼 전투를 핑계로 오지 말 것을, 같은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이래서 이따위 연회에 시간을 빼앗기기 싫었던 것인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시 상황에 보좌관도 아니고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미친 짓을 제국의 황태자가 하다니.

앙뷔 남작은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으로 함께 연회에 참석한 아들 로실과 딸 로웨나가 뒤따랐다. 로실은 이미 종자 생활을 끝내고 기사 작위를 받았고, 로웨나 역시 앙뷔 남작의 종자 신분으로 남부군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 세 사람 모두 밀색 머리카락에 짙은 자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남부군 정복을 입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하.”

군에 소속된 이상 그들은 페라노스를 사령관이라 칭해야 한다. 하지만 남부군 인사들 중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이는 없다. 그저 황태자에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지. 술잔을 기울이며 흐리멍덩한 눈을 치켜뜨는 저 사내가, 에렘의 미래라고. 앙뷔 남작은 꽉 움켜쥔 주먹을 등 뒤로 숨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현재 세그만 자작령 근방에서 퇴각 신호가 있었습니다. 자작령에 주둔한 군의 전투가 불가피한 상황인지라 서둘러 돌아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연회가 끝나기 전 불가피하게 자리를 떠야 할 경우, 주최자에게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앙뷔 남작은 꼬투리가 잡히지 않도록 예법대로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는 황태자가 끽해야 불쾌해하면서도 돌아가 보라는 듯 휙, 휙 손을 내저을 줄 알았다. 전시 상황에 주둔지에서 전투가 있을 것 같다는데, 누가 잡겠는가. 그게 남부군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게 페라노스의 상식은 아니었다.

“하.”

헛웃음 뒤로 페라노스가 집어 던진 잔이 연회장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돌아가겠다고?”

앙뷔 남작은 페라노스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은 후에야 의미를 이해했다. 발음이 잔뜩 뭉개져 있었으니까.

앙뷔 남작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했을 무렵, 페라노스의 시선이 좌우로 흘렀다. 남작의 곁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로. 그들 중 로웨나를 발견한 그가 사악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구합니다.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지휘해야 하…….”

앙뷔 남작의 말을 자른 건 짝, 하고 울린 이질적인 소리였다. 악단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각자의 보좌관들에게서 주랑 준남작의 퇴각 소식을 전해 듣고 있던 다른 지휘관들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감히, 감히!

페라노스에게 뺨을 얻어맞아 고개가 돌아간 앙뷔 남작과, 그의 뒤에 기립해 있던 두 명의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감히 자리를 뜨겠다고?”

킬킬킬킬, 남부군의 인사에게 모욕을 준 이가 내뱉어선 안 되는 웃음소리였다. 적막 속에서 울리는 그것은 남부군에게 치욕을 알려 주었다.

“감히, 내 은혜에 감사조차 표하지 않은 채 돌아가겠다고!”

“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부에선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 그래서 그 누구도 상식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 페라노스가 앙뷔 남작의 뒤에 서 있던 로웨나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로웬!”

로웨나의 옆에 서 있던 로실이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는 근위 기사들이 망설임 한 점 없이 검을 빼어 드는 것을 보고 굳어 버렸다.

“아, 내 눈이 어두웠군. 남작이 직접 진상품을 가져온 것도 모르고 말이야. 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주지!”

로실과 앙뷔 남작의 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가 아닌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페라노스가 바닥에 널브러진 로웨나의 위로 올라탔다. 그런 페라노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그 행동에 익숙하기까지 한 근위대가 두 사람을 둘러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분노로 인해 얼굴을 달군 로실이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분노에 돌아온 답은…….

“태자 전하께서 여식을 품어 주겠다 하셨으니, 이는 앙뷔 남작가의 영광이오. 남작은 감사를 표하시오.”

영광? 영광이라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로실이 괴성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연회장에 검을 차고 들어올 수 있는 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기사 서임을 받은 이들이다. 그렇기에 군부 인사들이 모이는 연회장에는 검을 찬 인물들이 가득한 법. 날이 없는 예장용 검이라 해도 마나 사용자에겐 흉기가 된다.

함께 분노한 남부군 인사들이 문제의 그 장소로 모여들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로실을 제외한 그 누구도 검을 뽑아 들지 못했다.

“경은 지금 황태자 전하를 위협하는 것인가?”

정당한 분노가 위협이라는 단어로 폄하당했다.

“앙뷔 남작, 자네의 아들이 행하고 있는 행동을 황실을 향한 반기라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그 얼토당토않은 말이 오가는 와중에도 근위 기사들이 둘러싼 곳의 안에서는 로웨나의 비명과 천이 찢어지는 적나라한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딸의 비명 소리 앞에서 앙뷔 남작은 선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이면서.

근위 기사들의 틈으로 옷이 모두 찢겨 나간 채 황태자에게 능욕당하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연회장에서, 거칠어진 황태자의 숨소리와 고통 섞인 로웨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흐윽, 윽!”

“하아! 제법 맛이, 좋은데.”

퍽, 퍽, 퍽. 꼭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소리가 거듭되었다.

“간드러지게 울어 보라. 하면 자주 찾아 줄 테니.”

“윽!”

킬킬,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조롱이 이어졌다. 앙뷔 남작은 이를 악문 채 위태롭게 흔들리는 로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밖으로 훤히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희롱하며 이를 세웠다. 게걸스러운 입맞춤에 탐스러운 젖가슴이 타액으로 젖어 갔다.

그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앙뷔 남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 나서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제 모든 걸 내걸어 눈으로 말하고 있는 딸의 뜻을 어길 수가 없었으니까.

그사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몇몇 이들이 날뛰는 로실을 붙들어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너와 남작님까지 위험해진다!”

“나서면 안 된다!”

그를 잡아끈 기사들이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이들 중 누구도 로실에게 그 말이 닿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누이가 겁간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그것에 정당하게 분노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오라비에게 그 어이없는 말이 들릴 리 없지 않은가.

“로웬!”

로실이 내지른 비통한 절규가 성을 가득 채우고, 그 사이사이로 사내의 역겨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서둘러 함께 참석한 여식들을 홀 밖으로 빼내기 시작했고, 그에 다른 이들 역시 빠르게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날 페라노스에게 농락당한 여인은 로웨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 * *

텅 빈 연회장을 치우는 이들의 움직임은 다급했다. 다들 몇 시간 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었으니까. 그들 중 유독 다급하게 움직이는 이가 있었으니.

‘동생의 약제를 사 줄게.’

처음 보는 여인의 말이었지만 그건 하녀에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쿠그스 역병이 발병한 당시 부모는 죽었고, 그녀에겐 약한 몸으로 인해 꾸준한 약제 복용이 필요한 동생이 있으니까.

평민치곤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백작 성의 하녀로 취직했음에도 약제는 너무 비쌌다. 제때 약을 먹이지 못해 동생의 건강은 조금씩 악화되던 날들. 그런 상황에서 별것도 아닌 일을 해 주는 대가로 그 약제를 구해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게 무슨 일이건 하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유일하게 남은 가족, 어린 동생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누군지 모를 여인이 부탁한 일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끝난 후, 그녀가 보고 들은 모든 얘기를 전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하녀는 연회장에서 멀지 않은, 하지만 구석진 곳을 찾아들며 품을 뒤졌다. 며칠 전부터 옷 속에 계속 넣고 다녔던 종이와 휴대용 깃펜을 꺼내 든 그녀가 빠르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종이를 접어 마찬가지로 품 안에 보관하고 있던 봉투에 집어넣었다. 이후에는 약속된 장소, 주류 창고에 가져다 놓았다.

한창 바쁜 와중에 자리를 비운 그녀는 시녀장에게 잔뜩 혼이 났지만, 백작 성을 나선 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거실에 떡하니 놓여 있는 동생의 약제를 볼 수 있었다. 몇 달은 쓰고 남을 정도의 양, 그거면 되는 것 아닌가?

* * *

주류 창고에 발을 들인 남자는 초조한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남자는 불과 한 계절 전만 해도 푼돈으로 가끔 즐기기만 했던 도박이 그의 인생을 궁지로 몰아넣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마셨고, 평소보다 조금 더 승률이 좋아 들떴던 것뿐인데.

슬슬 판을 접고 돌아가려던 그때 초대를 받지만 않았어도. 아니, 초대를 거절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판돈 좀 키워 볼 생각 없나?’

도박장이 있던 지하실을 나오던 계단에서의 만남이 잊히지를 않는다. 충동적으로 애꾸눈의 노인을 따라가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술김에 혹해 그 노인을 따라간 날, 남자는 평소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그 맛에 홀려 한 번, 두 번, 계속 애꾸 노인을 만나다 보니 거액이 오가는 도박판만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며칠 동안 벌어들인 돈은 순식간에 털리고 빚으로 남았다. 처음 한 번 잃기 시작했을 때 손을 놨어야 하는데!

다음번에는 딴다, 다시 하면 된다, 어째서 그리도 무모한 생각에 돈을 쏟아부었는지…….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금액이 도박 빚이 되어 나타났을 땐 참담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 빚을 갚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도박 빚을 도박으로 갚기 시작했다. 하지만 빚은 줄었다가, 늘었다가… 숫자만 바뀌었을 뿐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도박 중독으로 인한 파산의 길을 걷던 중,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 그의 채무를 모두 샀다며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던 여자.

‘봉투 하나만 가지고 나오면 돼. 그럼 이 종이는 네 거야.’

그 순간을 회상하고 있는 남자의 눈에, 낯선 여자가 말했던 봉투가 보였다. 평범하지만, 주류 창고에선 보기 힘든 종이봉투가 정말로 있다.

남자는 다급한 손길로 그 봉투를 낚아채서 품 안에 쑤셔 넣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며칠 전 만난 여자가 흔들던 그 종이와 바꾸기만 하면 된다. 빚더미만 없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 빚만 없으면 조급하지도 않을 테니, 차근차근 다시 돈을 딸 수 있으리라.

루소멜 백작 성의 술 창고 관리자인 남자는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고, 헐레벌떡 달려 백작 성에서 빠져나왔다. 평소 그와 알고 지내던 사용인들이나 경비병들이 어딜 그리 급히 가냐고 불렀지만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미리 약속했던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저벅저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빚! 도박! 청산! 저 빚만 없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큰돈을 따면 누구보다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도박으로 지금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금 도박으로 팔자를 펼 생각을 하고 있는 창고지기였다. 그는 이미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빠져나갈 곳이 없는 기나긴 미로에 발을 들인 건 본인이다.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기적 때문에 흥분한 남자가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이글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건대, 남자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나타난 사내가 품을 뒤져 종이를 꺼냈다. 창고 관리인은 성큼성큼 그에게 달려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종이를 쥐는 것보다, 사내의 손에 목이 졸리는 게 먼저였다.

“커억……!”

“봉투.”

창고 관리인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 제 품에 챙겨 온 봉투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낚아채 간 남자는 본래 들고 있던 채무증을 바닥에 던지며 창고 관리인을 놔주었다.

“켁, 켁……!”

“또 보자고.”

짧은 한마디를 남긴 남자가 몸을 돌린 시간으로부터 몇 분 후, 노란 깃의 전서구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지만 그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남부에선 널리고 널린 게 색색별로 물든 전서구였으니까.

* * *

출정 이틀 차인 오늘 소규모 전투는 여섯 번, 대규모 집결로 인한 전투도 한 번 있었다. 본진에서만 해도 이틀 만에 도합 일곱 번의 전투가 있었고 각 부대를 모두 합하면 서른 번을 훌쩍 넘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진 중인 마수를 밀어내기 위해 인간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 했다. 그런 식으로 마수들이 모여드는 것보다 빨리 제거해야 인간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 그중 야간 전투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참전한 아르페시스는 다급히 뒤로 구르며 주변을 휙, 휙 돌아보았다.

“다음 가시지요.”

아르페시스는 여기서 하는 모든 전투와 경험이 훗날 자신을 살릴 것임을 알기에 직접 참여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진정으로 그를 보호하며 가르쳐 줄 보호자들이 있는 전장이 아닌가? 그는 더더욱 열심히 하고자 했다.

“헉!”

하지만 그러한 생각으로 직접 참여한 전투는 연합군 편성이 완료되기 전 치렀던 전투와 달랐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마수, 정확히는 호위 기사들이 그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마수를 데려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르페시스는 상대하고 있던 벌레 형태의 마수를 잡자마자 다른 마수를 들이미는 헤롤을 보며 검을 치켜들었다.

“이런, 이런… 벌써 지치신 겁니까?”

그것밖에 되지 않는 거냐? 라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르페시스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쉴 틈 없이 마수를 들이미는 게 누군데! 그래 놓고 위험한 것 같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구해 주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뭐라고 따져보려고 해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입을 열어 나불거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러야 했으니까.

벌써 이틀 차, 이런 식으로 두세 번의 난전을 치르고 나면 해가 진다. 야간 전투를 담당하기 위해 낮 시간에 휴식을 취한 이들과 전방, 후방을 교대하면 하루 전투의 결과를 보고 받는다. 부상자, 사상자, 소비된 물자, 지금의 속도로 남진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까지.

그 후에는 그를 위해 준비된 막사로 돌아가 하루 온종일 뒤집어쓴 피를 씻고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진다. 그러면 드디어! 이틀 전의 충격적이었던 순간을 곱씹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첫눈에 반하는 이들도 수두룩한 것을요.’

아르페시스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격한 버둥거림을 반복하던 그의 몸이 한순간 축 늘어진 것처럼 풀어졌다.

연회장 복도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던 찰나, 심장의 박동이 멈추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겠지. 심장의 주인이 바뀌던 순간이었으니까. 이전까지 모시던 주인을 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의 적응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에스메랄다에게 가진 호감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감정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예지몽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의 자각이었다. 사랑이 뭔지 몰라 막연하게 상상만 해 보던 그에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알려 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 사랑이라니, 이런 게, 이 감정이 이미 사랑일 줄이야.

아르페시스의 심장은 그가 에스메랄다를 생각할 때마다 주인이 반갑다는 듯, 쿵쿵쿵 시끄럽게 울었다. 벅찬 박동이었다. 제 숙주가 감정을 자각했다는 걸 아는지, 이 망할 놈의 심장은 제 주인을 보고 싶다고 아르페시스를 닦달했다.

손에 닿았던 그녀의 뺨을 다시 한번 쓸어 보고. 꿈에서 홀로 누렸던 그 은밀한 입맞춤도 해 보고. 황도의 시가지에서 보았던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걸어 보고 싶었다. 고작 이틀이 지났는데 그립다. 보고 싶다. 이 벅찬 감정을 그녀에게 모조리 털어놓고 내게도 네 심장을 허락해 달라 간청하고 싶었다.

“에스메랄다…….”

사랑이 이런 것일 줄이야. 앓는 소리 뒤로 현실의 막막함이 그를 쫓아왔다.

자랑스럽지 못한 태생. 황제가 걸어 준 목줄. 죽음을 위해 이용당할 인생까지. 현실을 구성하는 것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그를 들뜨게 만든다. 마지막 순간 그의 손길을 즐기듯 기대어 오던 온기가 있었으니까.

제멋대로 그녀의 뺨을 쓸어 보는 것은 물론, 파렴치하게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을 눌러 보는 것까지 모두 그녀가 허락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는 덜해도 그녀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 준 게 아닐까? 그래서 위험한 길을 향해 가는 자신에게 전송을 해 주고 손길을 허락한 것일 수도?

만약 이 생각이 맞는다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을 가져 주지 않을까? 그가 가진 감정만큼 절절하지 않아도 되니까, 한 자락이라도……. 정말 마음 구석에 작은 자리라도 내어 준다면 행복할 텐데.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도 없는 희망이 현실의 비참함과 쓰라림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어쩌면 그 희망이 너무 달콤해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

오늘은 어떤 꿈을 꾸게 되지? 기왕에 꿀 것이라면 글자 대신 그녀가 나오는 꿈을 꾸고 싶었다. 그의 손에 생겨난 상처를 안타까워해 주고, 그 상처에 손수건을 매어 주던 그 꿈처럼…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런 꿈을.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꿈에서라도 그녀를 보고 싶다고 바랐다. 그가 첫눈에 반한 것이 분명한 그녀. 그의 손길에 뺨을 내어 주던 그녀. 고작 이틀 만에 사무치게 그리워진 에스메랄다를.

하지만 수마에 빠져들어 마주한 꿈은 아르페시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꿈은 다시 색채만이 가득한 과거의 악몽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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