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영혼에 남은 흉터
에스메랄다가 빠르게 몸을 빼낸 만찬 이후 아르페시스는 개인 훈련을 하고, 페드로는 개인 용무를 보기 위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페드로의 개인 용무란 최근 그가 살다시피 하고 있는 지하 보관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찾는 기록은 대부분 꿈이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것들이다. 예지몽을 꾸었다고 주장한 자들이나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변한 과거의 인물에 대한 기록.
400여 년 동안 테노리엘은 많은 것들을 이곳에 쌓아 왔다.
정복한 타국의 왕성에서 빼돌린 기록도 있고, 황실의 보존 서고에서 필사해 온 것이나 영지전에서 승리한 후 패전한 영주들이 보관하던 사기록도 있다. 그리고 대대로 가문의 가주들이 자신의 세작들을 통해 확보한 것을 정리해 두기도 한다. 간혹 화재가 난 신전에서 슬쩍 챙겨 온 기록물이 나오기도 하고.
좋게 말하면 기록 보관소인 것이고, 실상은 잡다한 기록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범위도 제각각, 필체나 기록 방식도 제각각…….
찾고는 있지만, 그가 찾는 것이 있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나으니까.
“이렇게 뒤진다고 나오려나 모르겠네.”
자정이 넘었으니 에스메랄다가 잠들 시간이다. 페드로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몇 시간 전 만찬 시간에 실패한 일을 다른 방향으로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이상을 눈치챈 에스메랄다가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 전에, 지금 당장.
한 치의 빛도 들지 않는 보관소를 밝히고 있던 마도구 전등이 하나둘, 꺼졌다. 남은 것이라곤 촛대에 끼워진 촛불 하나였다. 페드로는 그 여린 불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고생해라.”
“예, 도련님.”
페드로는 지하 보관소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을 지나 계단을 밟았다. 그의 생각은 점점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이상한 꿈을 꾸고 있다고 주장하며 잠에서 깨면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아르페시스와 매일 밤 울면서 깨어나는 에스메랄다.
꿈, 꿈, 꿈……. 그 무의미한 매체가 무슨 역할을 하기에? 두 사람의 연결점은 왜 그런 허상적인 것에 엮여 있을까?
페드로는 꿈을 꾼 적이 별로 없다. 고된 훈련 후 기절하듯 잠드는 일이 많았기에 머리가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기껏 해 봐야 잠에서 깨면 곧장 잊어버리는 가벼운 꿈 정도?
반면 그가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은 그 꿈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르페시스는 꿈에서 봤다고 주장하는 글귀들을 적어 낼 정도고, 에스메랄다도 자신이 울며 깨어나는 이유를 숨기는 것처럼 보이니 기억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게 그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페드로는 며칠째 계속 잠에서 깬 후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떠올렸다.
열기에 달뜬 숨을 내뱉기도 하고, 식은땀에 절어 끙끙거리다 깨어나기도 하고,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절절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꿈… 예지몽…….”
두통이나 의문점이 남지 않은 간결한 답은 그가 미쳤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과 공포, 암울한 하루하루가 전부이니 그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받아야 했으나 결국은 받지 못한 유년기의 애정으로 인해 올바르게 자라지 못한 소년이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해 미친 거라면 가볍게 여기고 무시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페드로는 자신의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거슬릴까.”
머리로 생각하기엔 그것이 가장 명확한 해답인데 심장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럴 땐 대체로 심장의 답이 옳은 법, 나름 20여 년을 살며 깨달은 지혜였다. 심장이 느끼는 이 꺼림칙함이 떨쳐지지 않는 한 페드로는 눈앞에 놓인 명확한 답을 집어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가 아르페시스의 침실에 가서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 시간 때의 그를 보고 있노라면 미친 것이다, 라는 답을 집어 들 수가 없으니까.
계속 의문과 찝찝함이 남는다.
페드로는 지하 보관소에서 나와 자신의 침실에 들렀다. 오늘 오후 주치의에게서 받아 둔 최면 초를 챙긴 그가 향한 곳은 에스메랄다의 침실이었다.
“천사는 자느냐?”
“예에… 한 시간 전쯤에 불을 모두 끄셨습니다만…….”
속닥속닥. 작은 목소리로 묻자 에스메랄다의 침실 앞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천사가 자는 것을 잠시 보고만 나올 테니 그 아이에게는 아무 말도 전하지 말거라.”
“하, 하지만 도련님, 아가씨의 침실에… 아가씨께선…….”
“넌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 천사가 네게 처벌을 하게 되어도 내가 대신 받을 테니.”
페드로는 자신의 행동을 막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하는 시녀를 두고 직접 문을 열었다.
달빛과 별빛만이 희미하게 시야를 비춰 주는 시간.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언제든 쓸 수 있게 항시 배치되어 있는 발화 그릇 위에 챙겨 온 최면 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져온 촛불로 그것을 태우려던 그때.
“아무리 오라버니라지만…….”
이런, 페드로는 기울였던 초를 다시 바르게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에스메랄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숙녀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시는 것은 자제하시는 게 어떨까요?”
제대로 걸렸다. 이미 들켜 버린 것, 페드로는 최면 초를 따로 숨기거나 감추는 대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네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수면 초라도 태워 줄까 했지.”
“주치의가 근래 수면 초를 처방한 건 전하가 유일하다 했는데…….”
그새 주치의까지 만났구나. 그가 직접 입단속을 했으니 아는 것을 탈탈 털어놓지는 않았겠지만 영주권을 가진 에스메랄다가 묻는 말에 거짓말을 하기도 힘들었을 터. 그러니 지금 에스메랄다가 최면 초라는 단어를 곧장 언급하지 않은 것이겠지.
페드로는 이쪽, 저쪽에 치이며 살길을 도모했을 주치의에게 전해지지 않을 사과를 하며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여 그의 퇴로를 막아 둔 상태다. 과연 어디까지 막아 두었는지 알아봐야 할 테니… 떠봐야겠지.
“그럼 내가 들고 온 것이 무엇일까?”
“제게 술을 먹이려고 하신 이유를 곱씹어 보자면, 지금 그 발화 그릇 위에 놓인 건 최면 초겠죠?”
침대에 누워 있던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어둠 속에서 촛불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녹안을 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제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그러실까요?”
모조리 읽혔구나. 페드로는 발뺌도, 변명도 소용없음을 확신했다. 이럴 때는 괜한 술수로 신뢰를 더 깎아 먹느니 있는 그대로 말해 남은 신뢰라도 챙겨 두어야 한다. 그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네가 말해 주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요?”
“너를 울게 만드는 악몽이나…….”
페드로는 최대한 나긋한 어조로 말하며 에스메랄다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네가 웃지 않는 이유,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게 왜 궁금하실까요?”
“네가 걱정되니까.”
그녀는 이제 손을 뻗어도 피하지 않았다. 동부로 가던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태도지만 아직 모든 것을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다. 3년 전에 가지고 있던 유대감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는데 무슨.
“걱정이라는 변명이 죄를 덮어 주지는 않는답니다.”
“이런, 죄라고 불릴 만큼 나쁜 짓이었을까?”
“제게 몰래 나쁜 짓을 하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죄지요.”
확실히 예전보다는 길게 대화가 이어지지만 알맹이가 없는 것은 여전했다. 페드로는 입 안이 썼다.
“섭섭해서 그러지. 나는 네게 다 털어놓았는데 말이야.”
“그건 오라버니께서 자진하신 것이고 제가 부탁한 적 없는 일방적인 행동이었죠. 오라버니께서 하셨다고 저도 따라 해야 하나요?”
“……그렇게 나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만.”
이렇게 계속 주변을 뱅뱅 돌기만 해야 하나? 페드로는 말없이 에스메랄다를 주시했다. 어떻게든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다시 웃기를 바란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완패를 할 줄이야.
“미안하구나, 정말로.”
“……이런 식으로 저를 괴롭히실 거라면 황도로 돌아가세요.”
“미안하다.”
“제 통제에 따르지 않는 기사가 필요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아요.”
“다시는 이러지 않으마, 내가 나빴다.”
실패했으니 에스메랄다의 경계심은 더 단단해지겠지.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 에스메랄다의 속내와 그녀에게 벌어진 일을 직접적으로 캐 보는 일은 요원해졌다. 페드로는 자세를 낮추고 싹싹 빌었다. 이대로 쫓겨날 수는 없으니까.
“내부에서 저를 찔러 보는 검은 필요 없답니다.”
“날이 없는데도?”
“네.”
어쩜 이리 단호한지. 페드로는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빌고, 빌고, 또 빈 후에야 다시는 이러지 말라는 말과 함께 용서받을 수 있었다. 당사자에게 직접 캐내는 정면 돌파가 실패했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할 것 같다.
* * *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 백작 성에 도착한 것은 카 51일의 해 질 녘, 연합군의 편성이 완전히 마무리된 건 그날로부터 약 보름이 지난 카 65일이었다. 아르페시스가 도착하기 전부터 전령들이 출발했기에 이토록 빠르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각 부대의 지휘권자와 소속 기사, 병력의 규모와 병과를 보기 쉽게 정리한 후 서류 업무의 종결을 알렸다.
“필요할 때 보시기 쉽도록 정리해 두었습니다.”
“아…….”
아르페시스는 오전 내내 힐끔거리며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보느라 업무에 통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를 외면하며 공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럴수록 어제 본인의 침실에서 있었던 그녀의 냉대를 기억하고 있는 아르페시스는 더욱 눈치를 보는 일의 반복.
“이제 출정식 이전에 각 지휘권자에게 전달하고, 본진 병력 앞에서 하실 연설을 다듬어 보도록 하죠.”
“연설… 그런 요식 행위를 굳이 해야 하나?”
“요식 행위라 생각하십니까?”
“그래, 황도에서 출정할 때도 황제의 연설이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불필요한 일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나?”
요식 행위라……. 연설은 단순히 시간을 잡아먹는 불필요한 행동이 아니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명분이지. 그는 연설이 무엇을 가능케 하는지 모르기에 저렇게 반감을 표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연설을 통해 본인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거겠지.
이 일에 반감을 보이는 그를 대신해 그녀가 효과적인 연설문을 대필할 수도 있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 그리고 악수에 가깝다. 아르페시스의 행보를 지켜보는 병사들은 언젠가 그것이 그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생각한 말이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은 아니겠지만 위화감 정도는 눈치챌 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 서부 연합군은 아르페시스에게 감화되지 못한다.
에스메랄다는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아르페시스가 이 일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을까, 고심하며 말을 골랐다.
“전하께서는 마수를 처음 보셨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한다.”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다행히도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질문을 듣고 곧장 반응을 보였다. 이대로만, 그가 지금처럼만 대화에 참여한다면 많은 것을 얻어 가리라.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내가 배워 온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모든 인간이 마수를 보며 그런 공포를 느낍니다. 저 역시 처음 마수를 보았을 때 무서웠습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대화에 집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주목에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페넬로프 경을 기억하십니까?”
“카 루그 페넬로프 아스터, 그를 이르는가? 중앙군 차석 지휘관?”
“예, 스스로를 낙오병이라 주장하던 그의 태도도 기억하시는지요?”
아르페시스는 답이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본 그의 심리 상태를 간략하게 언급했다.
“저의 주관이 들어갔기에 객관적인 평가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헤도라 준남작과는 다른 인사로 스스로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는 듯 보였죠.”
“음…….”
에스메랄다의 말이 지속될수록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공포에 잡아먹혀 도망간 이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글쎄.”
“그는 중앙 군부에서 지휘관을 오래도록 배출해 온 명문가 출신으로, 기사도를 배운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페넬로프 경이 자신의 탈영에 부끄러워하고,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책이라…….”
“그는 평화로운 곳에서 인간과의 경쟁 때문에 검을 들어 온 사람입니다. 마수가 주는 공포 앞에서 맞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생존과 투쟁을 위해 검을 들어 본 적이 없지만… 평생 검을 휘둘러 온 기사이기도 합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언젠가 마수를 마주하면 당연하게 맞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마수를 글과 그림으로만 보았을 테니 실상이 어떤지 몰랐겠지요. 눈앞의 마수가 주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을 테고요.”
평범하게 검을 들고, 평범하게 기사도를 배우고, 평범한 도덕심을 가진 기사. 아마 그는 마수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당연하게 그것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마수가 어떤 존재인지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의 막연한 상상보다 잔인했을 것이고, 그 잔인한 현실에서 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해 도망갔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건, 아스터가 그렇게 한 번 도망을 쳤다고 해서 앞으로도 평생 똑같을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을 고하지 않았다.”
“자신이 평생 쌓아 온 것들이 무너지는 게 무서웠을 겁니다. 마수에게서 도망쳤던 그때처럼 말이지요.”
“……무서워했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
“그렇지요. 하지만 모두가 공포를 앞에 두고 굳건하게, 한 번에 버텨 낼 수는 없습니다. 페넬로프 경은 버티지 못한 사람, 전하께서는 버틴 사람으로 나뉜 것뿐입니다.”
아르페시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에스메랄다가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반발심이었다.
“모두가 그러할 수 있었다면 그건 결국 흔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그의 표정을 다른 것으로 바꾼 건, 역시나 그 표정을 만들어 낸 에스메랄다였다.
“전하께서 생각하시기에 마수를 앞두고 도주하지 않은 일은 칭송받을 만한 행동인가요?”
“그렇다. 공포 앞에서 등을 돌리지 않고 창검을 든 이들의 용기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만약 그것이 흔하고 당연한 일이었다면, 과연 그것을 칭송하셨을까요?”
만약, 모두가 타인을 우선시하며 희생한다면? 대의를 위해 공포에 저항하고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행위는 고결한 것으로 보일까?
아니, 그저 누구나 해내는 당연한 일이 될 뿐이다. 누구나 하는 숨쉬기를 대단하다고 치켜올리는 사람은 없다.
특정한 행동과 말이 칭송받을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려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힘들고 험난한 것. 특별하지 않은 것은 칭송받을 수 없다.
“테노리엘의 사병이 도주하시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아니, 내가 본 그들은 누구도 도주하지 않는 용맹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용맹했을 것이라 여기십니까? 그들은 평범하지 않고 특별하기 때문에요?”
에스메랄다는 공포와 혼란이 사람을 갉아먹는 전장으로 향할 아르페시스가 이것에 대해 이해하고 가기를 바랐다. 전장에서 믿고 따를 수 있는 지휘관의 유무는 전투의 승패를 가른다. 이끄는 자와 몰아붙이는 자의 차이는 절대 메꿀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그들 역시 과거에는 평범했습니다. 지금도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은 마나를 배우지 못했으니까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병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2년 이상의 근무 경력을 가지고 있는 테노리엘의 사병은 모두 자원병으로 남부에 파견된 적이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마수의 공포에 맞설 수 있었던 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마수를 만났을 때 어떻게 공포에 저항해야 하는지 이미 배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제국의 황자 전하께 용맹하다 평가받는 훌륭한 병사들이 되어 있지요. 전하께서 그들을 보시기 전, 누군가가 그들에게 공포에 저항하는 방법을,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특별한 일을 해내라고 몰아붙이기만 하는 지휘관은 원망받는 반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지휘관은 충성을 얻는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충성을 얻길 바랐다. 그 충성이 전장 속에서 그를 살려 줄 테니까.
힘으로 억누르는 통제는 인간의 한계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장은 한계까지 힘을 쥐어짜 저항하지 않는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모두가 공포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전하처럼 단번에 그것을 해내지는 못합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눈에 새길 것처럼 강렬하게 바라보는 아르페시스에게 조언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든…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테노리엘의 사병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서부 연합군 역시 훌륭해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 에스메랄다가 심장 한구석에 품었던 신념은 재가 되었건만, 지금 이곳에서 아르페시스를 위해 말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사령관이 해야 하는 일이고 제가 연설을 권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르페시스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들을 이끌어 함께 가셔야 합니다. 홀로 앞서나가시면 전하를 따라가지 못한 많은 이들은 뒤처져 죽을 것이고, 전우의 죽음을 본 병사들은 대표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겠지요. 내 탓보다 쉬운 것이 남 탓이니까요.”
그들이 아르페시스 앞에서 화를 내며 하극상을 일으킨다는 말은 아니나 마음 깊은 곳에 원망을 품은 채 그를 바라볼 것이다. 네가 내 전우를, 나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책임자를 원망하는 군대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전장에 서는 모든 순간에 원망받아선 안 된다. 오로지 충성만을.
“한번 고심해 보시죠.”
물자 보급 행정관들 간의 체계가 정리되기까지는 하루 정도가 더 소모될 터. 에스메랄다가 생각하기에 가장 빨리 잡을 수 있는 출정일은 모레, 카의 67일이다. 아직 여유는 있으니 생각이 길어지는 그에게 하루 정도의 시간은 줄 수 있으리라. 에스메랄다는 내일 오찬 시간에 만나 연설문을 다듬어 보자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에스메랄다와의 대화는 아르페시스의 심장 깊은 곳에 남아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녀는 또다시 아르페시스의 존경심을 한 움큼 훔쳐 갔다. 며칠 동안 딴생각을 하며 정신을 팔고 있던 스스로가 어찌나 한심한지…….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르페시스는 현재 백작 성 밖으로 나와 홀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에스메랄다가 고심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 지 고작 두어 시간이 지난 시점. 사령관실에 앉아 빈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 막막해서 자리를 털고 나와야만 했다.
그녀가 권한 출정일은 이틀 후. 아르페시스는 정식 출정을 앞두고 자신만의 휴식을 취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평민으로 변복하고 아무 곳에나 대충 앉아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만의 휴가.
백작 성의 시종에게 평민이 입을 법한 옷을 요구했고, 그들은 아르페시스의 마음에 쏙 드는 옷을 구해 왔다. 조금 해지고 닳은 것까지 완벽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옷을 갖춰 입고 백작 성을 나선 아르페시스의 손에는 평소와 달리 이질적인 것이 들려 있었다. 몇 장을 겹쳐서 접어 둔 종이와 휴대용 잉크 통, 그리고 소형 깃펜.
한쪽 무릎을 세운 아르페시스는 그 위에 종이를 올려 두고 휴대용 잉크 통을 열어 깃펜을 담갔다. 그렇게 또 두어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내일 오찬 시간까지 연설에 쓸 만한 내용을 정리해 오라는 에스메랄다의 숙제, 하루의 반이 훌쩍 흘렀는데 진척 사항은 전무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오래도록 허옇기만 한 종이를 노려보았다. 뭘 써야 할지 몰라 답답하기만 하다. 이렇게 노려본다고 쓸 만한 말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긴 한숨이 입김을 타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뿌연 입김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하는 고민도, 앞날에 닥쳐올 고난도 전부 지금의 입김처럼 허공에 흩어져 사라져 준다면 홀가분할 텐데.
결국 그는 빈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화창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길을 찾지 못한 고민 대신 다른 것으로 생각의 방향이 흘렀다.
속을 게워 냈던 지난날, 그녀가 보였던 냉대는 여전히 그의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페드로가 아니라고 했고, 그에게 위안을 얻기도 했지만 그녀의 냉대는 착각도, 거짓말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속이 새까맣게 타는 기분이었다. 시가지의 대로 한쪽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그를 누가 황자로 볼까.
백작령의 영지민들은 그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바쁜 길을 오갔다.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무관심 속에서 우울함을 곱씹었다.
혹시 며칠 내내 그녀를 피해 다닌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볼품없고 머저리 같아 보였을 테니 호감을 가지는 게 이상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또 맞는 것 같아서 속이 답답했다.
“티를… 너무 많이 냈나?”
그가 보이는 호감을 눈치채고 그것을 미리 거절하기 위한 태도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현기증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에스메랄다에게 느끼는 호감이 평범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으니 그것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도 알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런 두근거림이 지속되고 관심이 이어지면 분명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이 될 거라는 것도.
자신의 감정을 차근차근 따져 본 아르페시스는 반대로 에스메랄다의 감정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가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졌다고 해서 그녀도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 처음으로 ‘거절’이라는 것을 생각의 범위에 집어넣은 것이다. 몸에 돌고 있는 피가 전부 싸하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번 하고 나니 거절에 대한 가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진 권력도 세력도 없는 허수아비 황자. 죽을 날을 위해 부친에게 거둬진 사생아. 전선에서의 유배를 위해 길러진 소모품.
일기의 내용에 썼던 그대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누가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을 가져 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 내에서 에스메랄다가 보인 냉대의 가장 그럴듯한 원인을 찾아냈다.
“나라도 내가 별로인데……. 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더욱이 테노리엘은 오래전부터 황실과 척을 지며 그들을 경멸해 오지 않았나. 황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와 사적인 연을 맺는 게 달가울 리 없다.
거기에 더해, 만약 아르페시스와 에스메랄다의 관계가 이성적인 관계로 발전한다면 황제가 그것을 순수한 감정의 교류로 볼까?
아르페시스로서는 자신보다 현명한 에스메랄다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여기기 힘들었다. 엮여서 좋을 게 없고, 엮이고 싶지도 않으니 그가 보이는 호감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 거겠지. 테노리엘의 본진을 위험에서 빼내기 위해 협업을 하는 중이니, 꼬리가 잡히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면…….
심장이 아렸다. 아르페시스는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내뱉은 한숨은 땅을 꺼트릴 정도로 깊었다.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은 온통 에스메랄다로 가득 찼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해진 일이랄까?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이 이상하다고 봐야 한다. 페드로의 말을 듣고 조금은 회복되었던 기분이 다시 바닥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 앞에서 조금 그럴듯하고 멋들어진 모습을 보였다면 혹시나, 하는 기대라도 해 볼 텐데. 보여 준 것이라고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도망 다니는 일이나 무례하게 그녀의 손을 쳐 내고 도망간 일뿐이다. 그런 볼품없는 짓을 하고 그녀의 호감을 바라는 게 웃긴 일 아니겠나. 망했다.
‘영민하십니다.’
멋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서 그녀의 칭찬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다면……. 어느샌가 그것을 바라고 있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오늘도 오전 내내 얼빠진 모습만 보여 주지 않았나. 아르페시스는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경시해 오던 연설의 중요성을 알려 주던 에스메랄다를 떠올렸다.
그의 어깨에 겨우 닿을까 말까 한 작은 키, 빛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언제나 반짝거리는 금발, 보고 있노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녹안까지. 지난 보름여 간 그녀가 해 주었던 말들은 모두 심장 깊숙한 곳에 각각의 자리를 잡고 남았다.
수많은 사람과 대화라는 걸 해 보았지만 그녀처럼 모든 말을 기억에 남긴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를 처음 보았던 때 느꼈던 아득한 감각.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벅찬 심장과 매일 밤 꾸는 꿈.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배운 것들.
아르페시스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백작령에 머문 기간은 대략 보름.
“고작…….”
고작 보름이었을 뿐인데, 그녀의 존재감이 지난 16년간 보고 만난 사람들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 그녀와 함께한 시간, 그리고 그녀를 보며 느꼈던 모든 감정들.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하늘을 떠나 전방으로 향했다. 에스메랄다가 뿌리를 내린 땅. 그녀와의 관계가 시작된 곳.
입김을 내뱉으며 열심히 발을 놀리는 사람들.
달그락거리는 짐수레와 당나귀.
한가득 짐을 지고 있는 보부상.
해진 목도리와 외투를 걸친 채 장을 보고 돌아가는 여인들.
그들의 틈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전시 상황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평화로움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날 느꼈던 평화는 여전했다. 문득 마차의 속에서 보았던 아이가 떠올랐다. 건물의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천진난만하게 웃던 모습.
‘대부분의 소형 마을이나 중소형의 도시는 궤멸했을 겁니다.’
지금의 평화가 당연한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에스메랄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했던 말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집어삼키며 떠올랐다. 한때는 이곳 같았으나 지금은 핏자국만 남았을 마을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잔혹한 말을 덤덤하게 꺼냈을까.
‘궤멸.’
출정 직후 하루를 묵었던 마을의 모습은 생생했다. 무너진 건물과 길게 이어진 핏자국, 분명 살아 있던 사람의 것이었을 팔다리와 을씨년스럽던 분위기. 그 삭막한 광경이 기억 속에서 사라질 날이 올까? 마치 당장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기만 한데.
하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곳은 그 마을이 아니라 평범하고, 평화로운 도시였다. 테노리엘 일가가 뿌리를 내린 채 버티고 있는 곳, 그들이 지키는 땅. 아르페시스는 이 평화로운 곳이 그때 보았던 마을처럼 변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은 사라지겠지. 그들의 일부였던 팔다리는 마수들의 이빨에 짓이겨 몸에서 떨어지고 바닥을 나뒹굴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핏자국은 사방팔방,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뿌려질 터. 서부의 저지선 남쪽으로 마수를 밀어내는 데 실패하면, 그리하여 저지선이 뚫리고 마수들이 계속 북상한다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피를 흩뿌린 것처럼 붉었던 노을.
그 속에 휩싸여 있던 소녀.
성벽의 뒤로 보이던 백작령 내부.
아르페시스에게는 이곳의 모든 것이 이미 에스메랄다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곳을 잃은 그녀라니……. 싫었다. 그녀의 일부가, 그녀의 것이 훼손되는 게 싫었다.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의 상상이 현실이 되어 버렸을 남쪽의 마을들,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평범함을 잃어버린 곳.
성벽이 없는 마을에서 과연 몇 명의 사람이 죽었을까? 그것을 숫자로 기록해 읽어 본들 실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보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영지가 있다면…….
‘저 역시 처음 마수를 보았을 때,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겠지. 죽고 싶지 않아서. 그가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쓰게 웃었다. 마수 앞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테노리엘 백작도, 페드로도, 아레스도 마수를 보고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처럼, 에스메랄다처럼, 아스터와 수많은 탈영병들처럼.
‘하지만 그것이 누구든…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 특별한 일. 에스메랄다가 했던 말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며칠 전 응접실에서 만났던 아스터와 데미안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공포를 느끼는 건 잘못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 그 역시도 마수와의 첫 조우에서 공포를 느꼈으니까. 문제는 그 공포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아닐까?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을 자극하는 공포에서 도주를 택하는 사람들, 맞서기를 택하는 사람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나? 인성? 성장 배경? 실력?
짧은 겨울의 해는 이미 하늘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확답을 알려 준 것도 아니건만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던졌던 질문의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이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갔다. 꿈속에서 보았던 글을 쓰는 것처럼 천천히.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빈 종이에 검은 자국을 남겼다.
곧 있을 출정에 실패하고 저지선이 뚫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단호한 결심이 아르페시스의 심장에 뿌리를 박았다. 에스메랄다가 그를 어떻게 보든, 그가 에스메랄다에게 가지기 시작한 호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홀로 글을 쓰기 시작한 아르페시스의 뒤로 짙고 붉은 노을이 땅과 하늘을 물들였다. 곧 흘러내릴 핏물처럼 붉게. 부친에게 죽음을 강요당하고, 그에 맞서 발버둥 치며, 수만의 병력을 이끌기 위해 생각을 곱씹었던 아르페시스의 나이는 고작 16세에 불과했다.
* * *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 불가능의 이름을 가능으로 바꿔 기적을 만들어 낸 영웅.
에스메랄다의 기억 속에 있는 그를 말로써 수식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저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정작 위의 단어들을 수식어로 갖기 위해서 필요한 건 쉽지 않았다.
마수의 이빨에 짓이겨지기 직전의 전우를 보고 망설임 없이 달려들 수 있는 용기. 황실의 견제와 부족한 지원 속에서 버텨 낼 수 있는 기재. 공포와 이기심에 취한 휘하의 사람들을 다독이고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지도력. 성과나 명예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 결단력. 과거에 잃은 것을 심장에 묻고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위해 일어날 수 있는 비장함.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지독하기만 한 현실을 버텨 냈을 때, 그제야 그 사람은 영웅이라 불릴 수 있다.
에스메랄다에게는 아르페시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 그가 서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사랑하고야 말았던 그 모습 그대로.
아르페시스는 정해진 기한보다 빨리 연설문 초안을 만들어 왔다. 에스메랄다는 만찬 시간이 훌쩍 넘어 집무실로 찾아온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고 지금 함께 앉아 있었다.
한번 정리를 해 온 것인지, 고쳐 쓴 흔적 없이 멀끔한 글귀는 심장에 닿는 것들이었다. 신념을 잃고 복수에 얽매인 에스메랄다의 차가운 심장이 오래전의 그때처럼 뜨거워질 정도로 진실된 말들. 에스메랄다는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에 글귀를 한 번 쓸어 보았다.
“이상… 한가?”
모두 다 타 버려 잿더미가 된 신념과 그녀가 백성들을 사랑했던 이유, 그것이 여기에 담겨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도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훌륭하십니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입꼬리를 움찔움찔 떨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를 빤히 주시했다.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그는 사라진 시간과 달리 낯선 행동을 하곤 한다. 동시에 그 시간과 달라진 것 없는 동일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달라진 에스메랄다의 행보로 인해 페드로와 라그나는 변했다. 아르페시스 역시……. 분명히 변한 부분이 있었다. 기쁜 것을 감추기 위해 입매에 힘을 주고 있는 그는 낯설었지만, 그가 써 온 이 연설문은 낯설지 않았다.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이 모여 있게 된 지금, 에스메랄다는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기억의 유무를 확실하게 재어 볼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꺼내 드는 순간 그녀에게도 기억이 있다고 선전을 하는 방법이라 쓰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건 아마도…….
“초안이 훌륭하니 다듬는 것은 금방일 겁니다.”
에스메랄다는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할 것까지야.”
그렇게 말하는 아르페시스의 입꼬리는 조금 더 선명하게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수줍은 미소를 본 적이 없기에 계속 시선을 빼앗기고야 만다. 한때 간절히 원했던 것을, 지금에 이르러.
그녀는 복잡한 심정으로, 내일 다듬은 연설문을 가지고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페시스를 보고 있노라면 계속 복잡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응접실에서 집무실로 돌아온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아르페시스가 써 온 연설문을 다듬는 동안 깊어지기만 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외면하지 마라.」
몇 번이고 글씨가 일그러져 새 종이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너희가 해내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고뇌와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은 추억을 불러왔고, 그 추억은 그때와 달라진 스스로를 관철하게 만든다. 버거운 감각들.
「쉽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 마라.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에스메랄다는 문체를 강인하고 기품 있게 가다듬던 도중 결국 깃펜을 놔 버렸다. 어느새 그녀의 호흡은 달음박질을 한 것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공포에 저항하라.」
「스스로가 아닌 뒤에 있는 이들을 생각해라.」
「너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버텨라.」
의무감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가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또한 무엇을 위해 그것을 행해야 하는지 인지시키고 있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으리라.
이것이 누군가의 대필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라는 점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이 결과물을 위해 그에게 조언을 했건만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음에도 뿌듯하지 않았다. 그와 그녀가 속에 품은 뜻이 완전히 대치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바로 이 글이다.
“내 꼴이 이렇게 우스울 줄이야.”
언제부터 다시 시작된 것인지 모를 죄책감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멈춰 선다는 선택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때때로 이대로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망설임은 있었다. 그녀가 직접 뽑아낸 백성들의 피를 먹고 자라난 가시덩굴이 발목을 잡으니까. 하지만… 매일 밤 그녀를 찾아오는 악몽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복수를 향한 갈증을 만든다.
발목을 옭아맨 덩굴을 끊어 내고, 덩굴의 가시에 긁힌 상처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득바득 기어 나가고야 만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연설문을 다듬은 후 침실로 돌아갔다. 오늘도 살기 위해 잠이 들면 그날의 꿈을 꾸겠지.
페드로가 준 온기도, 아르페시스의 변화로 인해 받는 영향도 모두 외면하게 만드는 악몽. 어둡고 검은 복수에 집착하게 만드는 그 악몽 때문에 그녀는 복수를 포기할 수 없다.
* * *
남자의 본명은 시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남자는 그저 아구토라고 불릴 뿐이다. 그의 목에 난 상처는 가로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한 번씩 힐끔거리곤 했다. 지금 아구토에게 다가가고 있는 카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경비병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다리에 힘이 빠진 것처럼 주저앉던 아구토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이봐! 자네 부인이랑 애가 살아 있다는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던 그를 어떻게 보았는지 소식을 알려 주었던 병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었지.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자네 부인이 앞이 안 보이나 봐.’
눈이 안 보이는 부인과 벙어리가 된 남편에, 태어난 지 1년이 된 아이까지. 고작 보름 전에 이 영지로 온 아구토의 가족은 동부에 있는 에렘에서 넘어온 마수 때문에 고향을 잃은 난민이었다.
마을 몇 개가 불시에 마수에게 습격당했고, 사방팔방으로 몇백 명이 도망쳤음에도 그날 살아남은 이들은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가지고 온 돈도 없고, 당장 신관들이 신전에 잘 없는지라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도 할 수가 없다. 참 불쌍한 인생이다. 이게 다 멍청하게 마수를 전선 너머로 들인 에렘 놈들 때문이라고, 카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뭐라도 도와줄까 말을 건넸더니, 마침 아구토가 본래 하던 일이 목공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에 카토는 망설임 없이 그를 제 목재소에 고용했다.
“오늘도 일찍 나왔네?”
가장 먼저 출근해서 먼지를 닦고 있던 아구토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말을 건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의 격한 반응이라 카토는 잠시 눈치를 봤다. 하지만 불쾌해한다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구토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힘겹게 미소를 지은 그가 카토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 난리에서 얼마나 무서웠으면, 옆에서 무슨 소리만 들렸다 하면 저리 겁을 먹을까. 카토는 찡해지는 코를 문지르며 아무것도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부인은 어때?”
쓰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과도하게 끄덕거리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거 우리 애가 어릴 때 입던 건데,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니, 그가 대단한 일이라도 해 준 것 같지 않나. 그저 쓰지 않는 것을 가져온 것뿐이다. 카토가 방금 건넨 상자 속에는 아기들이 입는 옷과 신발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아구토는 그걸 받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거참, 부담스럽게. 카토는 한동안 그렇게 굽혀진 채 펴질 줄을 모르는 아구토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너무 그러지 마. 내가 부담스러우니까.”
눈매에 촉촉하게 매달린 눈물 때문에 괜히 그도 찡하지 않나. 감사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싫은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렇게 진심이 담긴 감사라면, 받는 사람마저 기뻐지지 않나. 카토는 앞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 * *
아비체룬으로 넘어간 시나가 정착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내일로 다가온 서부 연합군의 출정식을 준비 중이었다.
연설이란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이미 그것을 위해 길러진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황족의 이름을 달고 자라 온 아르페시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곧은 자세, 정확한 발음, 귓가에 정확히 도달하는 성량까지.
마도구를 사용할 예정이지만 모기만 한 목소리의 중얼거림과 우렁차게 뱉어진 목소리의 결과물이 같을 리 없다. 그러니 필요한 모든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교육받아 온 아르페시스의 연설 준비는 순조로울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다듬어 온 연설문을 그에게 쥐여 준 채 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오늘, 아르페시스에게 기억이 있는지 확실하게 판별할 생각이었다. 힐끔거리는 시선 끝에는 연설문을 붙들고 중얼거리고 있는 그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될 줄이야. 긴장감을 풀기 위해 숨을 길게 빼어 낸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아시스에게 내가 찾는다고 전해 주렴.”
히나에게는 대충 말을 맞추라고 지시해 두었다. 히나는 알겠다는 답과 함께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응접실을 나섰다. 말을 꺼낸 순간부터 히나가 나가기까지, 에스메랄다의 신경은 온통 아르페시스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말을 꺼낼 때 잠시 시선을 주는 것 같았지만, 당장은 기대한 반응이 없다.
기억이 없다, 라는 가정에 무게가 기운다. 그에게 기억이 있다면 방금 전의 이름을 듣고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그녀가 모르는 일을 겪어 그가 감정을 숨기는 연기에 통달했다면 얘기가 달라지기에 확신은 이르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기다렸다. 그사이 그는 다듬어 온 연설문을 10여 분 만에 모두 숙지했다. 이제는 연습을 할 차례다. 에스메랄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아르페시스에게 말했다.
“대중 속에 있다 한들 그들은 모두 전하를 보고 있습니다. 그들과 시선을 맞추는 것을 반복하시는 게 좋습니다.”
마수의 이빨 속으로 뛰어들라는 아르페시스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려면 그들이 그의 말에 감화되어야 한다. 눈동자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 주는 창문, 진심을 전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눈을 바라보며 호소하는 것이다.
준비는 순조로웠고 연습은 성공적이었다. 에스메랄다는 평가를 바라는 듯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연습이 끝났음을 알렸다.
“훌륭하십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씰룩거리는 입매를 쓰다듬은 아르페시스가 자세를 풀었다.
“출정 시각은 확정되었나?”
“예, 오전 8시에 각 부대의 책임자들이 오늘 전달한 연설문을 읊으며 출정할 것입니다.”
“……이제야 시작이군.”
황도를 떠난 지 약 20여 일. 아르페시스는 이제부터 진짜 전투를 하게 될 것이다.
“황도에서 출정식을 가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여기서 또 하게 될 줄은 몰랐군. 차라도… 한잔하겠나?”
그와 거리를 두려던 에스메랄다였지만 오늘의 권유는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호응에 두 사람이 함께 있던 응접실에는 곧장 다과가 준비되었다.
“오늘 새벽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서부의 남쪽 지대를 장악한 소형 마수들의 추정치는 8만 정도라고 하더군.”
현재 남부군은 리퀘나가 있는 군사 지역이 아니라, 중남부 경계선과 맞닿은 록스와 루소멜 백작령까지 빠진 상태다. 덕분에 그 영지보다 아래에 있는 남부의 아르텐 공작령과 헤르토크, 랑그루발 백작령, 그리고 동부의 최남단인 부소네 공작령은 마수로 가득 찼을 것이다.
군사 지역과 맞닿은 4개 영지는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고립되었을 테고, 서남 경계선을 지켜야 할 사병들이 자리를 떠나 버리는 바람에 아르텐과 록스와 맞닿은 쿠베트도 뚫렸다. 쿠베트는 본래 전선이 아님에도 과거 멸망한 나라와 국경을 접했던 지역이기에 자체적으로 마수를 막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르텐을 지나오는 마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옮길 여력은 없다.
“예, 보고 받았습니다.”
본래는 서남 경계선에서 마수를 붙들어야 남부군이 그들과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미끼로 마수들을 빠르게 불러오기도 했고, 경계선의 사병들이 퇴각을 하며 후방까지 넘어와 버렸다.
결국 본래 쿠베트를 향해 퇴각하던 남부군은 후방에 마수를 둔 채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쿠베트의 영지민들이 대피할 최소한의 시간을 번 후에는 록스로 빠졌다. 남부군이 쿠베트가 아닌 록스에 주둔하는 이유이자, 현재 서부에 마수가 계속 넘어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부에 들어온 마수를 몰아내지 못하면 남부군은 록스에서 움직일 수 없다. 후방에 마수를 남겨 두고 움직이는 건 너무 큰 피해를 불러온다. 록스에 있는 것은 남부군 전 병력이 아니라 총 3개 부대로, 후방에 적을 둔 채 밀고 내려갈 만한 전력이 되지 못한다.
연합군이 할 일은 지금 테노리엘과 레트몬령까지 들어온 마수를 토벌해서 남부군이 다시 내려갈 수 있도록 후방을 정리하는 것이다.
“연합군의 2배를 웃도는데 이것도 내일이 되면 더 늘어나겠지.”
“중형 마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요.”
“고작 20여 일 만에 8만이라니… 리퀘나와 맞닿아 있는 남부는 더 처참하겠군.”
에스메랄다는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었고 아르페시스는 찻잔 대신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가 긴장했을 때나 나오는 버릇이었다.
“루소멜 백작 성을 관저로 사용 중이라고 했으니…….”
남부의 북쪽에 있는 루소멜 백작령은 중부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곳으로, 현재 황태자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중남부의 경계선에도 마수들이 출몰하고 있을 겁니다.”
성벽이란 영지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일자로 쭉 뻗기보다 원형에 가까운 형태가 대부분이다. 그런 성벽들이 있는 지역으로 저지선을 형성한다 해도, 사람의 손으로 광활한 영토를 어찌 다 막을까. 그 뒤로 넘어가는 마수들이 있을 수밖에.
서부의 경우는 아직 소형 마수들밖에 없지만 서부보다 마수의 분포가 네다섯 배는 많은 남부는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영지는 성벽 내부에서만 생활하는 상태로 영지 간의 상행위가 어느 정도 막혔을 터. 마수들을 뚫고 지나갈 무력을 갖출 수 없는 이상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게 불가능할 테니 비축해 둔 식량으로 남은 겨울을 버텨야만 한다.
그런 와중에 군권을 손에 쥔 황태자가 연회를 벌인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어떤 분위기일지 눈에 훤하다. 에스메랄다는 내일로 잡혀 있는 황태자의 생일 연회를 떠올리며 속으로 조소했다.
이미 남부군 수뇌부에게는 초대장이 모두 전해졌다. 본인의 생일을 축하하러 오라는 황태자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으니 임시 관저 근처에 있는 이들의 참석은 확정되어 있다.
연회라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투의 끝에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연회는 열려야 마땅하다. 실제 남부군은 매년 여름, 치하와 위로를 위해 성대한 만찬회를 개최한다. 다만 시기와 장소가 문제였다. 남부가 엉망이 된 지금, 마수 떼를 뚫고 백성을 구하러 가라는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하라니.
다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을 것이다. 그 분노는 훗날, 에스메랄다가 황태자의 인장으로 분탕질을 쳤을 때 분명 도움이 되어 주리라.
그녀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면서도 아르페시스와의 대화에 소홀하지 않았다. 지금 에스메랄다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뷔비르의 건으로 홀에서 만났던 새벽녘에 보인 태도는 물론,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표하는 것과 저돌적인 면모를 가진 그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슬슬 반응이 와야 하는데…….
“헌데… 그…….”
연합군과 마수, 지긋지긋한 주제로 만들어진 대화가 끝나자 아르페시스가 말끝을 늘렸다.
왔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짓 하나, 목소리의 높낮이, 시선 처리 같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했다.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녀가 정적들에게, 정적들이 그녀에게 보내던 시선. 문제는 에스메랄다가 보내는 집요한 시선이 아르페시스의 심장에 무척 해롭다는 것일까?
“그, 그러니까…….”
“하문하십시오.”
아르페시스는 결국 에스메랄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거두었다.
“조금 전에…….”
시리스에 대해 의문을 표하던 이니, 본인이 모르는 이름이 나오면 또 한 번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아르페시스는 그녀의 예상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누구를 찾는 것 같던데… 급한 일인가?”
“무엇을 이르시는지요?”
에스메랄다는 귓가를 발갛게 붉히기 시작한 그를 시야에 담은 채 놔주지 않았다.
“아시스… 라는 자를 찾는 것 같던데. 다른 의미는 없고, 혹여 급한 일이 있는데 내가 그대를 붙잡고 있는 건가 싶어 물어보는 것이다. 그자도 일전 보았던… 용병처럼 가까이 두는 자인가? 그러니까, 음… 신임하는……?”
아주 잠시간, 에스메랄다의 숨이 멈추었다.
‘아시스!’
웃으며 손을 흔들던 기억이 선명하기에 지금 그가 보이는 반응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그저 종종 일을 시키는 사람일 뿐입니다.”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 두 사람만이 공유하던 이름을 듣고도 평온을 유지한다니. 정말로 그 이름을 오늘 처음 듣는 이의 반응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이름을 본인이 아닌 타인과 연관시키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애칭과 별칭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아르페시스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부르는 이름도, 그가 불리는 이름도 특별하게 여기던 사람이었다. 본명을 부르면 부루퉁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본인의 기분이 나쁠 때는 그녀의 본명을 부르며 티를 내기도 했다.
아르페시스에게는 기억이 없다. 있다면 지금 꺼낸 이 이름 앞에서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드디어 확답이 떨어졌고 에스메랄다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확신 아래에서 피어난 것은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는 기대감, 혹은 희망이었다.
기억이 없는 아르페시스는 라그나나 페드로처럼 다른 길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녀가 가는 길을 이해하고 용납하여 함께해 줄지도 모른다는, 구차한 희망.
우습지도 않지. 직접 그 희망을 시궁창에 던져 버려놓고 이제 와 이런 것을 바라다니. 어리석은 스스로를 비난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했다. 지금 그녀가 하는 모든 생각은 진심이기에 또 실망하고야 마는 것이다. 환청을 떼어 내기 위해 마음을 자르려던 노력은 다시 한번 더, 실패한 것 같으니까.
“영지를 관리하다 보면 골칫거리가 종종 생기지요. 시리스나 아시스가 그런 일을 도맡아 해 준답니다.”
“골칫거리라면?”
“뒷골목에서 성행하는 이들이지요.”
“아하, 그럼… 굳이 특별하게 아낀다거나, 신임한다든가… 그런 것은 아닌가?”
“그저 고용한 용병인 것을요.”
눈에 보이는 저 선명한 질투와 경계가 왜 이리 달콤한지. 에스메랄다는 스스로를 향한 조소를 감추고 아르페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엇이 달라졌기에, 기억이 없는 그는 지금 그녀의 앞에서 저토록 선명한 호감을 보이나. 어째서 함께 걸으며 곁을 내어 주었던 그때가 아니라, 반대로 걸으며 서로를 해쳐야 하는 순간에. 아니, 그가 변한다는 확신만 있다면 적대하지 않을 수도…….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스스로가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써 온 연설문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기는.
에스메랄다의 볼일이 끝나 버렸기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용건이 없는 이 앞에서 사사로이 시간을 낭비할 만큼 에스메랄다가 무르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오래지 않아 인사를 남긴 후 응접실을 벗어났고,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은 아르페시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문가를 바라보았다.
“조금… 변한 것 같은데…….”
자신을 대하는 에스메랄다의 태도가 조금 유해진 것 같았다. 혼자만의 착각인가?
하지만 분명히 노골적이고도 집요한 시선을 받았는데…….
그가 하는 질문에도 감추는 대답 대신 정확한 정보를 담은 대답을 해 주지 않았나? 혹시 그녀도 그에게 관심이 생긴 것일까? 너무 희망을 섞은 생각인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의 태도가 변한 건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며 사적인 친분을 쌓고 싶을 정도였다. 언젠가 꿈꿔 봤던 것처럼 손을 잡고 여기저기 걸어 보고 싶기도 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평소엔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가 모르는 에스메랄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서부를 정리하는 대로 남부로 가게 될 테니 에스메랄다를 다시 볼 날은…….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따끔거렸다.
‘내륙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를 계속 만나러 와 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내가 갈 수 없는 내륙으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겠지.’
꿈속의 일기에서 보았던 그 말을 이토록 절절하게 실감할 줄이야.
“마지막… 인가……?”
작은 중얼거림이 텅 빈 응접실에 맴돌다 사라졌다. 이제야 그녀의 태도가 변했는데, 더 이상의 기회 없이 마지막이라니.
누군가 심장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심장을 쥐어짜면 이런 통증이 느껴질까?
아르페시스는 그녀에게 가지는 호감과 자신의 처지, 그리고 조금 전에 본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하는 건 이골이 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아쉽고, 씁쓸하고… 그리울까. 그가 에스메랄다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황제의 장기 말에게는 테노리엘 백작령에 머무는 그녀와 공유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마셨다. 내일이면 그녀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평소보다 차가 쓰게 느껴졌다.
* * *
이글거리는 화마를 비집고 들어온 건 이제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환청이었다.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는 그리운 목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흐…….”
흐느낌이 섞인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녹안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3년, 지긋지긋하게 긴 시간 동안 꾸었는데 아직까지 눈물이 흐른다. 눈의 부기를 빼기 위해 물수건을 얹어 둬야 할 정도였다. 에스메랄다는 침대 옆에 준비된 대야에 무명천을 넣어 물수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워 눈 위에 그것을 올려 둔 채 10분 정도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한다. 매일 아침 그녀가 행하는 하루의 첫 일과였다.
오늘은 하사르 상단의 상권을 공격하기 위한 밑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황도에서 활동하는 사치품 상단을 움직여야 할 테니 그곳에 서신을 쓰는 것으로 시작하자. 그리고 황도 뒷골목의 일이 마무리되어 가니 단속을 해 둘 필요가 있다.
황도에 있는 상단 인물들에게 따로 지시를 해서 테몬 후작가의 동태를 좀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한데…….
테몬 후작 저에 상단 인물을 들이려면 어떤 구실이 좋을까? 뒷골목에서 반반한 창녀나 창부를 구해 보는 건?
그러려면 뒷골목 일이 완전히 마무리된 후가 좋을 터, 다음 계절로 미뤄야 할까? 그 전에 루그레디안에게서 연락이 와 주면 좋을 텐데. 그리고 서부 연합군이 가져갈 1차 보급품이 다 떨어지기 전, 각 부대에 보급할 물자의 징수도 시작해야겠지.
유제품이나 육포 같은 식품의 생산량을 늘리라는 공문이 내려진 후이니 남은 겨울 동안의 보급은 편할 것이다. 현재 연합군이 행하는 징수권의 효력이 미치는 영지는 테노리엘, 레트몬, 라히크, 오르테메스 백작령과 라크테스 공작령. 그리고 그곳에 속한 수십 개의 남작령과 자작령.
테노리엘 백작령보다 남부에 있는 쿠베트 후작령은 물자를 조달할 만한 상황이 아니니 제외하더라도 수가 많다. 실제 징수 업무와 행정 업무까지 포함하면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업무량이다. 수입 곡물을 건드는 것은 조금 미뤄야 하나 싶을 정도.
“하아.”
생각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온다. 에스메랄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다 말고 움찔 몸을 떨었다. 성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린 것은 듣는 이를 위축되게 만들 만큼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에스메랄다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가에 올라가 있던 물수건이 툭, 소리를 내며 침대에 떨어졌다. 침대 옆에 달린 설렁줄을 당겨 시녀를 불러들인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더냐?”
“저, 저도 잘…….”
에스메랄다처럼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놀란 시녀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 속에 틈틈이 비명 소리가 끼어들었다.
“어서 가서 알아 오렴.”
대체 성내에서 이런 소리를 낼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심장 한구석이 서늘했다. 멀리서 울려 퍼진 그것은 익숙한 음성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얼마 가지 않아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던 시녀가 다른 시녀와 함께 돌아왔다. 새파랗게 질린 다른 시녀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화, 황자 전하의 침실에서… 지금 페드로 도련님이 출입을 금하시고 계신데, 그게, 그러니까 저도 잘은… 레오가 아가씨께 소식을 전해 드리라고 해서 서둘러 온 참입니다.”
아르페시스의 처소에서 들린 비명 소리.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지난날 그의 구토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뱉어 낸 걱정은 그녀의 머리가 만들어 낸 이성을 잡아먹었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침실 쪽으로 내달렸다.
* * *
고작 20여 일 전에 보았던 곳이다.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며 등졌던 곳이 아닌가. 그 의문을 느낀 후에야 아르페시스는 지금 이 장면이 지난번의 꿈과 이어지는 것임을 눈치챘다.
그는 산과 들을 지나 황도의 외성을 보았던 꿈을 기억해 냈다. 그때 분명 테노리엘 백작의 처형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섰던 것 같은데…….
‘막아라!’
아르페시스의 생각은 고막을 강타한 외침에 끊어졌다. 외성 앞에서 그들을 가로막는 무리가 있었다.
‘뚫어라! 지나가야 한다!’
옆에서 달리던 휴고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아르페시스는 검을 빼어 든 자신의 손도, 그 검이 황도 치안대 문장이 그려진 기사를 베어 내는 것도 보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땐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 의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꿈속에 동화되었고 지금의 광경이 자신이 보고 있는 현실이라고 여겼다. 피가 흩뿌려지고 외성의 출입을 검문하는 장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르페시스는 빠르게 검문소를 지나쳤다. 빨리, 빨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길가를 오가는 사람들이 말발굽에 치이는 건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64일, 빠듯하게 달려 남부에서 황도까지 3일 만에 오는 기함을 토했음에도 당일이다. 그가 남부를 이탈했다는 소식을 가져갔을 전서구만큼 빨리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일찍은 아니었다.
황제가 붙여 둔 근위 기사들이 따라붙지 않은 것도, 중앙군 기사들이 추적해 오지 않은 것도 기적이지만, 늦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높게 떠오른 태양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처형식 도중에 난입을 해서라도 구해야 한다.
이곳까지 함께 온 20여 명의 근위대는 그들을 뒤쫓아 오는 황도 방위군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붙잡혔지만 아르페시스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말을 재촉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비명과 함께 시작된 혼란의 끝에서 그는 보았다.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황태자와 그 주변을 채운 객석. 그곳의 중앙에 마련된 이상한 구조물과 그 주변을 빼곡하게 채운 채 쉴 틈 없이 무언가를 던져 대는 백성들. 그리고 중앙의 구조물에 묶여 있는… 숨이 막혔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에스메랄다!’
절박한 부름은 수백의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파묻혔다.
‘신이시여, 구원을!’
‘희망을!’
그녀가 흘린 피는 그녀의 발치에 고여 웅덩이를 만들어 낸 상태였다. 그녀의 몸 곳곳에 남은 상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허공을 가르는 돌이 만들어 낸 것이다. 감히 너희가!
‘에스메랄다!’
‘테노리엘 영애!’
‘구해라! 백작님을 구해야 한다!’
어느덧 뒤따라온 근위대가 아르페시스처럼 그녀를 부르짖었다.
‘마녀를 탈취하고자 하는 이단이다! 악의 무리다! 화형을 거행하라!’
그녀의 몸에 불이 붙었다.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탐욕스러운 불꽃, 지옥의 염화가 있다면 바로 저것이리라. 화염에 뒤덮인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에스메랄다!’
말로, 글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 아르페시스를 찾아왔다.
‘--!’
아니다,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처형대 위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를 노린 검이 쇄도했다. 그것의 주인들을 베어 앞으로 나갔지만, 사흘 밤낮을 제대로 쉬지조차 못한 몸은 기사들에게 짓눌렸고 결국 바닥에 처박혔다.
그의 얼굴이 내리꽂힌 곳은 피 웅덩이 위였다. 달려가면 대여섯 발자국은 될까? 고작 그 거리인데, 고작 몇 걸음인데!
그가 발버둥 치는 사이 불길 속에서 바스러진 형체가 후두둑, 바닥으로 무너졌다. 불과 함께 지금의 아르페시스처럼 피 웅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린 그것을 보았을 때, 그의 사고는 완전히 끊겼다.
“으아아아악!”
그 소리를 그저 단순한 비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진 이가 내뱉는 절규였다.
방금 전 그건 단순히 타인이 죽어 가는 단순한 광경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었다는 그런 슬픈 광경도 아니었다.
그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이유.
살아남는 것에만 집착하며 인간의 꺼풀을 뒤집어쓰고 있던 인형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든 존재.
그가 일평생 유일하게 갈망했던 사람.
그에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신념과 열망, 나아가 탐욕을 가르친 여인.
아르페시스가 존재하는 것을 넘어 살아가게 만들었던 그의 유일한 세상이 무너져 내린 광경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쳐온 절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발악했다.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떨쳐 내기 위해. 그리고…….
“전하!”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아르페시스가 발작을 일으키자 반사적으로 다가온 페드로는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발작 도중에 혀를 깨물지 않게 손으로 입을 벌리려던 찰나 아르페시스가 마나를 사용해 가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비명 소리에 놀란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것을 차단하기까지 해야 했다.
“내가 부르기 전엔 누구도 들이지 마라!”
이제 곧 서부 연합군을 이끌 황자의 발작이 소문나서 좋을 게 어디 있다고. 페드로의 일갈에 레오가 다급히 문을 닫았다.
“전하!”
다급한 음색으로 그를 불러 보았지만 비명과 발작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페드로의 머릿속에 형체를 이루지 못한 의문이 쌓였다. 그럴수록 아르페시스의 몸부림은 심해지기만 했다. 위에서 아래로 아르페시스를 제압 중이던 페드로 역시 마나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마나가 아니었다면 발버둥 치는 그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해 나가떨어졌으리라.
“윽!”
뭐, 그 과정에서 아르페시스에게 몇 대 얻어맞아야 했지만 말이다.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상황이 진정될 것 같지 않자,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뺨을 때려 보기도 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몸을 크게 뒤틀며 빠져나가려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이 더 거칠어졌을 뿐이다.
침실 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열린 건 그때였다. 페드로는 시종이 자신의 말을 어겼다 여겨 사납게 돌아보았지만…….
“오라버니? 이게 대체 무슨…….”
거기에는 침의 차림의 에스메랄다가 서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를 보자마자 페드로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르페시스가 마나를 사용해 가며 힘을 행사하고 있는 지금 만에 하나라도 그를 놓치면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리해서 에스메랄다에게 영향이 미친다면? 안 될 일이다.
“나가 있어라! 안으로 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에스메랄다에게 위험이 뻗치는 일이 없도록 하려던 페드로가 돌연 말을 멈췄다. 그의 아래에서 버둥거리던 움직임이 잠잠해졌으니까.
페드로는 고개를 휙 돌려 아르페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옆으로 돌아간 고개, 문가에 고정된 시선,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까지. 아르페시스의 얼굴을 확인한 직후, 페드로는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한 힘에 얻어맞고 침대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큭!”
불시에 들어와 허용하고야 만 주먹질에 얼굴이 아렸다.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덕분에 잠시간 균형 감각을 상실했다.
“물러나!”
그럼에도 페드로는 침대에서 뛰어내린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딱 한 걸음을 내디딘 후 굳어 버렸다. 그보다 먼저 움직인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를 껴안은 채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이럴 때 아르페시스가 조금 전처럼 발작이라도 한다면……. 페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아르페시스의 체중 때문에 그보다 작은 에스메랄다는 함께 아래로 무너졌다. 무릎을 꿇은 채 품에 에스메랄다를 가둔 그에게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뭐라고 중얼거리기는 하는데… 말로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페드로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에스메랄다와 그를 떼어 놓기 위해 틈을 보았다. 에스메랄다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던 아르페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란 것인지, 에스메랄다는 굳어 버린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페드로는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아르페시스의 두 손이 에스메랄다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에스메랄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아, 아, 같은 단말마를 내뱉으면서.
“전하?”
흐느낌 위로 내려앉은 음성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아르페시스의 분위기가 변했다.
“아……?”
음절의 꼬리가 올라갔고 페드로는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천천히, 천천히, 그의 손이 아르페시스에게 뻗어졌다.
“여기는……?”
에스메랄다에게 고정되어 있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주변으로 돌아갔다. 페드로는 그런 그의 오른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페… 드로?”
꿈에서 깬 직후의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몇 번 보았기에 익숙했다. 페드로는 그 틈을 타 두 사람을 떼어 내고자 했다. 작은 에스메랄다를 등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밀려난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에게 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에스메랄다의 팔을 낚아챘다. 그에 페드로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오른쪽에 이어 왼쪽 손목까지 움켜쥐었다.
“윽……!”
강한 압력에 아르페시스가 통증을 호소했고, 반사적으로 힘이 빠진 그의 손을 에스메랄다에게서 완전히 떼어 낼 수 있었다.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나가 있어라.”
뻣뻣하게 굳은 에스메랄다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가 있으라는데도!”
마나를 써 가며 힘을 휘두르는 데 거리낌이 없던 아르페시스 때문에 페드로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페드로는 조심스럽게 그를 뒤로 밀어낸 후 서둘러 에스메랄다를 안아 들었다. 그녀 역시 제정신은 아닌 듯 입술을 벙긋거리며 당혹감을 드러내기 바빴다. 그러는 사이 페드로는 본인의 목적에 충실했다.
그녀를 쫓아내듯 침실 밖으로 내보내고, 문까지 걸어 잠근 후에야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었다.
“그녀가… 왜……?”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난…….”
뚝, 뚝, 눈에 고이지도 않고 떨어져 내리는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우선 뒤로 물러나십시오. 침대까지.”
페드로는 문을 가로막고 선 채 아르페시스를 뒤로 물렸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을 에스메랄다에게 접근시킨 실수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아르페시스가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진정이 된 것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다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