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2화 (12/45)

제12장

추적

뷔비르가 대리 운영을 하던 상단은 주로 광석을 취급했다. 일반 철과 그보다 강도가 3배쯤 뛰어난 흑철, 구리와 금, 은, 때로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보석을 중점으로 유통한다. 그 상품은 대부분 차후 10여 년 동안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는 광산에서 나왔다.

에스메랄다는 10세부터 줄곧 그런 광맥들을 비밀리에 매입했고, 그 과정에서 사용된 이름을 모두 조작하는 것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테노리엘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유령 상단을 만들고, 뒤에서는 은밀하게 테노리엘의 자금으로 광맥이 있는 부지를 매입. 그것을 뷔비르가 운영하는 상단에 되파는 과정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뷔비르가 상단 활동으로 내는 수익을 가져와 광맥 부지 매입에 사용한 가문의 자금을 다시 채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단 활동에서 뷔비르는 실질적인 상단주일 뿐, 상단의 법적 서류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신분의 인물이 상단주로 올라가 있다. 서부의 테노리엘도, 테노리엘의 영지에 사는 뷔비르도, 그 어떠한 연결점도 찾지 못하도록 많은 신경을 써 두었다.

3여 년간 광석 상단을 키우는 데 주력했기에 다른 상단들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주로 전쟁에 관련된 물자를 취급하는 상단으로 약초나 붕대, 기름 같은 것들이 해당된다. 단주들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인수가 불가능할 경우 우호적인 친분을 다지는 것으로 그쳤고.

황실의 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에스메랄다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다른 귀족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했다.

“전부 끌어 오면 60일가량 3만을 유지할 수 있으려나…….”

에스메랄다는 서류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유사시 지금의 자본으로 유지가 가능한 병력의 규모였다. 일개 가문, 아니 개인이 3만 병력을 유지할 수 있다니. 그녀가 바라는 내전의 승률이 올라가고 있다. 이외에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발굴 중인 광맥 중 몇 가지는 금과 은이 매장된 것들이었다.

에렘 내부에는 금광 하나뿐이지만 대륙 전역에는 몇 개가 더 있다. 어디서 난 것인지 추적할 수 없는 완전한 비자금들이 그곳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훗날 반군에게 사용하거나 내전에 소모될 군수 물자를 조달할 때 사용될 자금이었다. 그렇게 모으고 있는 금괴와 은괴는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하지만 불법 금과 은이 유통되면 화폐 가치가 낮아져 물가가 오를 수 있기 때문에 화폐를 조금씩 뒤로 빼내는 일도 병행되어야 한다.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해 버리면 황실 재무부가 변화를 인지해 버릴 테니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건 당장 급하지 않으니까.”

현재 얽히고설켜 있는 상단들은 서부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었다. 제국 각지, 때로는 타국의 영토를 오가며 활동한다. 그런 상단의 단주들은 해당 지역의 뒷골목과 연계하여 정보를 물어 온다. 가문에서 키운 세작들을 돌리는 고위 귀족들과 달리, 거미줄처럼 대륙 중부 곳곳에 퍼져 있는 그들이 에스메랄다에게 많은 것을 집어 오고 있는 것이다.

권력욕이나 출세욕에 들끓는 상단주들은 당연히 황도에도 몇몇이 배치되어 있다. 주로 직물이나 그것을 가공한 보석, 그리고 뷔비르의 상단이 제공한 보석을 가공해 장신구 같은 것들을 판매하는 사치품 상단이다.

그들을 통해 황도 치안대에 뇌물을 먹이는 것쯤은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 소규모 남작령에서 거둬들이는 세수 정도면 해당 구역의 담당자를 매수하기에 충분하다. 그들의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사이 황도 뒷골목은 매일매일 피를 흘려 대는 중이다.

암살 혹은 습격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 주먹질을 하거나 허접한 날붙이를 들고 매일 상대 세력을 썰어 내고 있는 상황이다. 황제가 밑에서 일어나는 난리 통을 모를 리는 없지만 그에게는 누가 위에 앉건 상관이 없으니 관전하는 것뿐일 터. 귀족들에게 뒷골목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요한 날이 생기면 쉽게 짓밟을 수 있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 역시 본래의 미래에선 그 가치를 업신여겼으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돌아오자마자 뒷골목부터 손을 댄 이유였다. 황도의 일은 차질 없이 진행 중이니 이제는 남부의 황태자, 그리고…….

“신전을 파고들어야겠구나.”

아브람 백작처럼 황실에 원한을 품은 인사들을 모으느라 미루어 두었던 일이다. 제국 내의 뒷골목을 대부분 손에 넣은 지금,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미래에 신전의 영향력을 깎아내리고 그들을 제국법 내에서 처벌하기 위해 파헤친 것이 가득이다. 그 사건과 증거들을 들먹여 재판장에 세운 신관들만 해도 수백이 넘는다. 그렇게 에스메랄다의 폭로로 감춰져 있던 신전의 비리와 타락이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작은 사건들로 공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무너트릴 수 있도록 증거를 꾸준히 모아 둘 생각이었다. 그 증거들을 세상에 공개했을 때, 백성들이 충격을 받고 신전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에스메랄다는 가장 안전하고, 그렇기에 가장 많은 신관들이 머무는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도의 일이 진행되는 동안 북부의 뒷골목은 이미 장악이 끝났다. 그들은 그녀의 돈과 용병단의 무력에 짓눌려 굴복했다. 테몬 후작령이 북쪽에 있기는 하지만 테몬 일가는 황도에서 기거하는 중앙 귀족이다. 그런고로 루그레디안과 연이 닿는다고 해도 북부의 뒷골목을 맡길 수가 없다.

루그레디안 외, 북쪽의 안일한 귀족들 중에는 손을 잡을 만한 이들은 없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애초 생각했던 대로 용병단의 우두머리에게 북부의 뒷골목을 넘겼다.

“아드리안도 잘해 주겠지.”

평민 출신이나 신전에 관한 증오가 상당한 이였다. 그의 동생이 신력을 타고난 것이 불행이었다. 그의 사정은 에스메랄다가 미래에 신전의 세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래서 40여 명으로 구성된 작은 용병단을 이끌고 있던 아드리안에게 접근했었고, 결과적으로 지금 용병단은 200명가량의 규모까지 성장했다.

용병단에 속한 이들 역시 모두 작든, 크든 신전과의 악연이 있는 자들이었기에 결속력도 강하다. 그녀가 제공한 마나 운용법을 배우고 있는 그들은 아직 페드로도 모르는 에스메랄다의 은밀한 전력이었다. 아드리안을 비롯한 용병들은 에스메랄다가 신관들의 폐단을 바로잡는다고 믿으며 따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들을 무너트리는 게 목표일 뿐이다. 그 후 개혁은 알 바가 아니었다. 북부는 제국 내에서 기거하는 신관들의 절반 이상이 머무는 지역이니만큼 그들의 부정과 부패, 타락이 만연한 곳이다.

이제 뒷골목까지 장악한 200여 명의 용병들은 그런 신관들의 뒤를 쫓으며 증거를 수집할 것이다. 신관들이 유곽을 들락거리고 약자를 억압하는 모습을 수정구 속에 담겠지. 그들의 거처로 수백 개의 금화 상자가 들어가고 태생 신관들을 학대하는 장면까지 함께.

곧 라그나가 도착할 테니 이쪽에서 자체적으로 수정 마도구를 제작할 수 있다. 마탑에서 조달할 필요도 없이 숨어든 상태로 움직이는 기반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신전에서 일하나 신앙심이 흐리고,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돈에 쉽게 혹할 일꾼들을 포섭, 신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마련할 것.」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을 무너트리기 위한 첫 번째 포석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북부에서 손에 넣을 수많은 오물을 떠올리며 히나에게 서신을 건네었다. 신전의 일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남부에서는 아직도 반군의 주동자나 핵심 인사들을 추적하는 일이 지지부진. 그들을 빨리 찾아야 와해되기 전 지탱해 줄 수 있다. 퇴각 시 시체를 회수하지 못한 전사도 적지 않기에 정확한 명단이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반군은 결국 탈영병이다.

퇴각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이탈한 이들의 수배령은 이미 내려졌으니 활동이 제한될 터. 결국 소수의 이들이 민가로 내려가 노동을 해 번 삯으로 식량을 조달해야만 하는데…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속에 품은 신념이 어떠하든 결국 그들은 숨어 지내야 하는 입장이다. 보통은 세가 험한 산지나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삭막한 곳이겠지. 그런 곳에 똬리를 오래 틀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고, 폭력성이 커지기 시작한다.

굶주림이나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비틀어지는 이들이 산적이나 도적이 되어 힘없는 백성들을 약탈하는 등, 명확한 범죄에 연루되면 훗날이 문제다. 반군이 황실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는 약점을 가져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명분, ‘폭군에 반하는 정의’가 범죄로 인해 정당함을 갖추지 못하게 되기 전에 찾아서 지탱해 주어야 한다.

「반군 수뇌부 수색 시급, 머저리와의 마찰 계획 보고 필수, 남부군의 동태에 대한 주시를 소홀하게 하지 말 것.」

히나가 그 서신을 챙겨 집무실을 나선 직후 집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천사야.”

페드로였다. 이제 그가 노크 없이 집무실 문을 여는 건 너무 당연해진 일이라, 에스메랄다는 한숨조차 내쉬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직 새벽녘에 보았던 그의 행동에 대해서 감을 잡지 못했으니까.

“지하 보관소에 좀 들어갔으면 하는구나.”

웬일로 땀도 흘리지 않고. 에스메랄다는 젖은 곳 하나 없이 말끔한 페드로를 죽 훑어보았다.

“보관소에는 어쩐 일로요?”

“찾아볼 게 있어서.”

훈련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는 페드로가 아닌가. 분명 뷔비르의 일로 홀에 있을 때 그가 훈련을 위해 나가려던 것을 보았다. 한데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오전 시간에 그가 멀끔하다니…….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의심을 담고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실 거군요?”

“자고로 역사란 지식과 과오의 산물 아니겠느냐? 거기서 찾는 것이 무어 특별하다고.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무엇인지는 말을 하지 않는다. 페드로는 새벽녘의 에스메랄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확한 목적에 대해서는 언질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가주, 혹은 영주권을 가진 자의 허락하에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가문의 지하 보관소. 그곳은 역대 영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아 온 기록들이 있다.

타국의 것, 자국의 것, 혹은 이미 멸망한 나라의 것들. 테노리엘은 역사가 400년가량 된다. 에렘의 건국과 함께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기에 그 저력이 웬만한 공작이나 후작 가문과 맞먹는 것이고. 그 긴 역사 속에서 하나둘 모아 온 기록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겠다니……. 처음부터 제대로 된 언급을 하지 않았으니 캐내어 보겠다고 마음먹어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 에스메랄다가 종이 위에 글을 쓰고 그 아래 서명과 인장을 남겼다.

“여기요.”

영주 대리의 이름으로 보관소의 출입을 허락하는 허가증인 셈이다.

“고맙구나.”

“오늘은 새벽 훈련을 하지 않으셨나요?”

“바쁜 일이 있으면 으레 한 번쯤은 그러는 법이란다. 용병들은 제 훈련 분량을 채우라고 했으니 걱정 말고.”

허가증을 받은 후 페드로는 갈 길이 멀다는 듯 서둘러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자신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와 다른 행동을 계속하니 신경이 쏠리긴 했다. 오늘 새벽에도 이해 못 할 행동을 하지 않았나.

“지금의 오라버니는 통 속내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며칠 전 속에 있는 어둠을 털어놓던 페드로를 보았으니까.

에스메랄다는 결국 얕은 한숨과 함께 페드로에 대한 생각을 털어 냈다. 당장 페드로의 속을 캐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손이 상단 업무와 관련된 서류를 끌어 왔다. 반군을 찾는 데 성공하면 그들과 교섭하고 기본적인 물자를 제공해야 한다. 전량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의 곡물과 자체적으로 재배해 조달하기 힘든 육류나 유제품, 견과류 같은 것은 이쪽이 담당해야 할 터.

광석 분야 외의 다른 상단들의 규모가 작은 지금의 저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이제 곡물과 식자재를 취급하는 몇 개의 상단들을 키워야 할 시점이었다. 이미 곡물 시장을 꽉 움켜쥐고 있는 몇몇 거대 상단들을 무너트리거나 빼앗아야 하니 쉬운 여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니,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가올 달콤한 복수의 과실을 위해. 에스메랄다의 깃펜이 종이 위에서 빠른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 * *

몇 번이고 시야가 어두워졌고 얼굴에 거친 감촉이 닿았다.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 밖으로 뱉어 낸 날숨에는 차마 털어 내지 못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몸이 뜨겁다. 그 열기를 식히지도 못한 채 커다란 손이 낡은 깃펜을 쥐었다.

「대륙력 1440년 라 58일.

나의 우매함에 이토록 탄식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수없이 많은 시간을 --와 단둘이서 보냈건만, 그때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열기가 지금의 나를 지배한다.

--의 보드라운 살결에 고개를 묻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고 싶었다. 그녀의 향이 흩어지지 못하도록 들이쉬어 나의 폐부를 가득 채운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나는 --의 나신을 선명하게도 그려 냈다. 머릿속에서 떨쳐 낼 수가 없다.

부정하지 않겠다. 감정을 자각한 이후 --를 탐하고 싶다는 욕망이 넘쳐흐르고 있다.

그간 내게 이런 종류의 음욕이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고작 하루 전에 정리를 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이 마음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당장 내일을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당장이라도 --가 쉬고 있을 침실에 찾아가고 싶다. 혹시라도 내게 떨어진 통보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 충동을 부추긴다.

먼저 선을 그었다는 건 결국 --도 내게 마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가정하고 나면 지난해 --가 했던 행동에 나의 착각이 들러붙고야 만다.

갑작스럽게 팔짱을 껴 오던 것은 물론 느릿한 손길, 내 허벅지를 쓰다듬던 행동, 보란 듯이 치맛자락을 흔들며 다리를 보여 주었던 것까지. 평소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잘 입지 않는 --였는데, 유독 자주 그런 옷을 입었던 때가 있었다.

--가 나를 유혹했던 건 아닐까? 그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는 것들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머저리 같은 놈. 그때 눈앞에 기회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글자를 거칠게 휘갈기던 깃펜이 부러졌다.

─ 망할.

거친 욕설이 들렸고, 신경질적인 손길이 서랍 속에서 새 깃펜을 꺼내 들었다.

「굳이 변명을 한마디 적어 보자면, --가 나를 사내로 볼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보지 않았다.

사생아, 남부라는 창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장기 말, 볼품없는 외관…….」

손이 잠시 멈칫거리더니 시야가 움직였다. 마치 고개를 쭉 내미는 것처럼 책상 옆으로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방 한구석에 걸려 있는 거울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황제를 닮은 게 너무 분명한 외모라 솔직히 좋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본 후 다시 바른 자세로 돌아왔다. 그의 손은 이미 ‘볼품없는 외관’이라는 단어에 줄을 직직 긋고 있었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건 ‘장기 말이 아닌가?’ 하는 문장이었다.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나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사랑해 줄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가 질색을 하곤 했던 내 버릇은, 사생아라는 단어를 언급하던 그 버릇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열등감이 아니었을까?

미래가 없는 내게 --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고정관념이 내게 찾아왔던 수많은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한심하다. 그때 당장 --의 유혹에 함락되어 무릎을 꿇었어야 했는데 멍청하기는.

아니, 이런 생각도 결국은 나만의 상상에 불과하다. --는 사내 형제가 많은 사람이니 그저 친근함의 표현일 수도 있지 않겠나?

하지만 또 선을 그은 후에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게…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기준점이랄 것도 없다. 결국은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겠지.

내 생각이나 추측이 어떠하든, --는 한번 내린 결정을 되풀이할 만큼 무른 사람이 아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감정적인 충동을 막아서는 이유였다.

충동에 이기지 못해 침실에 발을 들이거나, 지금의 욕망을 들키거나, 혹은 자각한 감정을 고하는 순간. --는 선을 긋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거리를 벌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갈 수 없는 내륙으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겠지.

기회를 놓치고, 선수를 빼앗겼기에 감내해야 하는 대가는 지독하리만큼 힘겹다. 고작 한발 늦었을 뿐인데 너무나도 잔인하지 않은가.

이 열기를 어떻게 떨쳐야 하는지 몰라 괴롭다. --에게 지금의 충동과 감정을 들킬까 무섭다. 그럼에도 --를 원한다는 생소한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내게 욕망을 가르친 것도,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것도 전부 --다.

--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조금은 원망스럽다.

내일 --와 함께 시가지에 나가기로 한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함께 있으면 들켜 버릴 테니 외부 리퀘나로 시찰을 갈 생각이다.

일평생 도망치지 않기 위해 버텨 왔는데, 내일은 도망쳐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내 아둔함과 한심함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들끓는 열이 식지 않는다. 작고 여린 소녀가 아니라 훌쩍 자라 아름다워진 여인을 보았다.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던 그때 보았던 그 여인, 에스메랄다.

그녀에게 손을 뻗어 품으로 끌어당기고, 그를 유혹하는 탐스러운 입술을 삼켜, 음욕을 자극하는 그녀의 하얀 살결 위에 붉은 흔적을 남기는 상상을 해 본다.

풍만한 가슴을 제 손으로 움켜쥐고서 부드럽게 일그러지는 모양을 보면 얼마나 황홀할까?

그녀의 다리 사이에 감춰진 그 은밀한 곳에 입을 맞추어 핥아 보면 무슨 맛이 날까?

가녀린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쳐올리면 그녀는 어떤 소리를 내며 울까?

홀로 에스메랄다와의 정사를 상상할 때면 몸에 열기가 들끓었다. 아르페시스의 손은 의지와 상관없이 바지를 헤집고 있었다.

그의 성기는 이미 뜨거운 열기를 흘리며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예민해진 귀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단단한 기둥을 쥐고 흔들자 허리가 오싹해질 만큼 짙은 쾌감이 느껴졌다.

눈을 감아 버린 그가 보고 있는 건 언제나 홀로 상상해 보았던 에스메랄다의 나신이었다. 그 풍만한 가슴도, 가녀린 허리도, 아찔한 곡선과 함께 가려져 있는 음부도, 전부 탐해 보고 싶다.

그녀의 작은 입술 사이에 지금 문지르고 있는 성기를 물려 보는 상상을 한다. 그녀의 입 속은 대체 어떤 감각을 선물해 줄까? 제 두 손으로 감싸고도 남을 그녀의 머리를 잡은 채 허리를 흔들면, 그건 또 어떤 느낌이지?

아르페시스의 손짓이 다급해지며 그의 입에서 낮게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자 뜨거운 정액이 손과 바지를 적셨다.

─ 윽…… --!

“헉!”

오늘은 식은땀이 아니라 열기로 인해 달뜬 숨을 내뱉으며 깨어나야만 했다. 아르페시스는 적나라한 꿈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기겁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으헉!”

눈을 뜨자마자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페드로를 마주했으니까. 대체 페드로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간이고 심장이고 모조리 떨어지는 줄 알았다!

“혹시 몰라 말씀드립니다만.”

충격적인 꿈, 축축한 바지,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더불어 아직 식지 않은 몸까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르페시스의 얼굴은 터져 버릴 것처럼 붉어졌다. 그의 고개가 죄인의 것처럼 숙여졌다. 그런 아르페시스의 위에서 목을 좌우로 꺾기 시작한 페드로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전하께서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시는 일은 없겠지요?”

이미 다섯 장의 일기를 보여 주며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미래를 들킨 참이다. 그러니 이런 노골적인 질문을 받는 것이겠지.

“그, 그럴 리가 있나!”

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해 보았다. 비록 에스메랄다가 지금은 어리지만 언젠간 자랄 것이 아니냐고. 그때는 손을 대도 되는 거냐는 파렴치한 생각. 아니, 키워 먹겠다는 심보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스스로의 생각에 충격을 받은 그가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때, 페드로가 말했다.

“전하께서 어린 소녀를 상대로 발정하는 변태는 아닐 것이라 믿어 보겠습니다.”

“발정이라니,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

꿈에 나온 건 어린 소녀가 아니라 성숙하게 자란 여인이었다고! 지금의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단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 말을 했다간 매서운 시선을 넘어 날카로운 칼이 목에 드리워질 것만 같았다.

아르페시스는 이 대화 주제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지난 16년간 갈고닦아 온 생존 본능이 그에게 경고했다.

“경이, 경은 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가? 어찌 들어왔지?”

“문으로 들어왔지요.”

레오가 문을 열어 주었다는 말이다. 하긴, 그러니 노성이 들리는 와중에도 문밖에 있을 레오가 들어와 보지 않는 것이겠지.

손님으로 머무는 상황에서 침실 앞에 개인 사병을 호위로 배치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곳의 주인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어 버리기에 아르페시스는 근위대에게 침실 호위는 배제시킨 상태였다. 그러니 최후의 문지기를 당당하게 넘어온 페드로를 쫓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성이 난 건지, 억울한 건지, 그도 아니면 수치스러운 것인지 모를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그사이 페드로가 침대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뭐 하십니까?”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손님의 침실에 제멋대로 들어와 놓고 어찌 저리도 당당하단 말인가? 아르페시스가 이를 갈며 반문하자 페드로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적으십시오.”

페드로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고이 놓여 있는 종이와 잉크, 깃펜을 가리켰다. 호흡을 한번 내쉬기도 전에 열 뜬 몸이 식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왜, 왜, 왜! 그에게 괜한 꿈 얘기를 해 가지고는!

황제가 그에게 제한한 것은 제왕학뿐이다. 그러니 그도 기본적인 성교육 정도는 받았고,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이 뭐라고 불리는지도 안다.

2차 성징, 소년이 사내가 되어 가는 과정, 무려 에스메랄다를 대상으로 몽정을 했다! 아르페시스가 굳어 있는 사이 페드로가 허리춤에 매고 온 검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말했다.

“지난번의 꿈처럼 적으시라는데도요.”

절대, 절대 못 한다. 그 노골적인 단어들을 어떻게 적는단 말인가! 무엇보다 축축한 감촉이 선명한 와중에 이불을 들치고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의 말에 따라 일어나는 대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흐음.”

어째서인지 불안한 소리였다.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도 꺼림칙한 목소리를 낼까.

“천사에게 오늘 본 것을 그대로 전해…….”

아르페시스는 결국 페드로의 협박에 굴복해야만 했다. 이불을 들치며 상체를 일으킨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쓰면 될 것 아닌가, 쓰면!”

에스메랄다에게 지금 이 일에 대한 얘기가 흘러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녀에게 짐승으로 여겨지고 싶지도 않고, 그녀를 대상으로 파렴치한 꿈을 꾸었다는 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페드로 말대로 지금의 그녀는 어린 소녀이지 않은가. 잘못하다간 어린이들에게 욕정하는 변태 판정을 받을 것이다. 절대 안 된다! 아르페시스는 식식거리면서도 자신의 하체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일단……. 좀 나가지.”

“뭐, 뒤처리는 하셔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

페드로가 침실 밖으로 나갔지만 아르페시스는 일어나는 대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발버둥 치는 움직임이 처절한 한탄을 토해 냈다. 이렇게 수치스러울 데가 있나!

* * *

짧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천막 내부를 밝힌 촛불이 흔들렸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유일한 빛을 따라 일렁거리는 그림자는 테노리엘 백작의 것이었다. 어둠에 잠겨 제대로 보이지 않아야 하건만, 그의 얼굴 위에 서린 그늘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지금 테노리엘 백작이 있는 곳은 중부와 서부의 경계선이었다. 마수가 침범한 서부 지역을 봉쇄하기 위해서.

수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집결하는 마수들의 특성상 중부 경계선에서도 곧 대규모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저지선이 서부의 내륙에 있는 한, 그것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서부의 영토를 회복하기 전까지 마수들은 계속 늘어나기만 할 테지.

‘아차차, 알에게 그걸 쥐여 주어 보낸다는 게. 내 정신 좀 보게.’

얼굴에 그늘을 품은 테노리엘 백작이 기억을 더듬었다.

‘연합군 허가? 당연히 해 주어야지. 그럴 생각으로 알을 보낸 것인데.’

‘내가 남부 일로 정신이 없어서 누락한 모양이야.’

‘그래도 알이 이미 출발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사람보다 서신이 빠른 법이니 서부 문제는 큰 문제 없이 잘 해결될 게야.’

같잖은 변명이라니. 연합군 문제는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조금의 누락이 있었을 뿐이라는 말을 떠올리니 속에서 화가 끓었다.

“망할 놈.”

거친 욕설이 칭하는 인물은 에렘 제국의 황제였다. 가진 능력과 기재가 부족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제국이 아닌 본인의 권력을 위해 쓰는 버러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욕을 하고 있지만 테노리엘 백작의 기억 속에 있는 황제가 처음부터 그런 인사는 아니었다.

전란의 시대에는 다수의 세력이 절대적인 권력 아래 하나로 통솔되어야만 한다. 내부에서 이득 싸움을 하는 대신 외부와의 전쟁을 위해 뭉쳐야 하니까. 그것을 위해선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을 넘어 손아귀에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냉철하고 과감한, 그리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즉위 초기, 지금의 황제는 테노리엘 백작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 당시에는 테노리엘이 중립의 위치에서 반황실 세력과 황제를 위시한 세력의 균형을 맞추어 가며 황권의 강화를 도왔을 정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황제는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남부군에게 내려가는 군수 예산의 감축이 그 시작이었다.

예산 감축, 단어 하나만 보자면 별것이 없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황제는 남부군의 무력이 자신의 황권에 위협이 간다고 판단했기에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자금을 손에 쥐고 휘두른 것이다.

감축을 반대했던 테노리엘은 그 이후 반황실 세력이 되어 황제의 의사에 반해 왔다. 길고 긴 세월 동안 그런 식의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변하지 않았다면 연합군 문제를 가지고 장난을 칠 일은 없었겠지.”

변해 버린 황제가 연합군 창설을 제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그는 서남 경계선이 무너진 당시 황실을 주시했다. 역시나 황제는 출정하는 아르페시스에게 연합군의 지휘권을 쥐여 보내지 않았다. 결국은 테노리엘 백작이 뒤에 남아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뭐… 정확히는 그가 해결한 건 아니지만.

‘큰 문제가 되기 전 알려 주어 고맙군, 백작.’

‘요즘 내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네. 내가 놓친 것을 짚어 주다니, 자네 같은 신하가 있어 내 정말 든든해.’

‘알이 잘해 줄 게야. 내 아들이 아닌가!’

서부 문제는 아르페시스가 이끌 연합군이 해결할 테니 괜히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연합군 창설 건의를 받아들였던 황제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테노리엘 백작은 그 미소를 본 후에야 황제가 왜, 사람을 먼저 보낸 후 허가를 내린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보다 한발 늦었지만 테노리엘 백작 역시도 황제의 노림수를 읽어 냈다.

서부에서 영향력이 강한 테노리엘이 연합군을 쥐지 못하도록 그의 발을 황도에 묶어 둔 것이다. 출정과 연합군 창설의 순서를 바꾼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준비해 보낸 것들을 들고 황성에 들었을 때, 테노리엘 백작은 황제가 조금 당황한 것을 느꼈다. 자칫 조금만 더 빨랐어도 황제가 세운 계획이 어긋났을 테니 놀란 것이겠지. 황제는 백작의 빠른 대응을 보고 서늘하게 웃었으나, 그건 백작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에스메랄다의 작품이었다.

연합군 창설은 대뜸 해 달라고 해서 내려오는 게 아니다. 집결이 예상되는 병력의 수, 그들이 소모할 물자의 예상치, 그리고 연합군이 존재하는 이유가 해결되기까지 걸리는 추측 기간. 그 모든 것을 정리해 함께 보고를 올려야 한다. 이것은 황제를 위해 필요한 정보였다. 그래야 황제가 자신의 땅에서 활동하나, 자신의 것이 아닌 병력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훗날 그들이 헛된 마음을 품게 되면 얼마의 병력을 들여 제압해야 할지 계산해 보는 것이다. 그런 무력적인 반기가 일어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부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도 재어 봐야 하고.

또한 그들의 수와 존재 기간을 알아야, 황제가 허락한 징수권으로 얼마의 물자를 소모할 것인지 파악할 수 있다. 이건 영주들을 위한 정보였다. 그 부분이 명확해야 훗날 연합군이 해산된 후 서부의 영주들이 받는 면세의 규모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귀족은 결국 황실의 신하, 영주는 황제의 땅을 대리 통치하는 이들이다. 한마디로 서부 연합군이 지키는 땅은 황제의 땅. 그것을 지키기 위해 소모한 물자와 자금을 황제가 채워 주어야 한다. 그것이 면세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테노리엘 백작은 남부와 서부의 경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그것을 증명할 자료를 수집하고, 예상 수치를 내고자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 덕분에 그런 준비 시간이 사라졌다. 그녀는 서부 경계선이 뚫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훨씬 이전부터 그 자료들을 준비해 둔 것만 같았다. 테노리엘 백작조차도 남부의 잔류 병력이 그리 쉽게 뚫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황제 대신 다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웃지 않게 된 그의 딸. 그녀가 어떻게 웃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실제로 3년간 얼굴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니 어련할까.

테노리엘 백작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그가 없는 곳에서 있을 에스메랄다가 보이는 것만 같다. 그녀가 황제의 수를 읽기 위해 황태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는 것처럼, 테노리엘 백작도 그녀의 수를 읽기 위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보낸 연합군 자료를 확인한 이후, 그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남부 최종 저지선의 돌파, 서부 사병의 퇴각, 그로 인한 서부 남쪽 지대의 몰락까지. 에스메랄다는 너무나도 정확한 시점에 그것을 예견했다. 전선에서 구르며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테노리엘 백작조차 오차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떻게, 어떤 근거로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인가.

“그 아이에게 정보를 가져다주는 이들이 누구이기에…….”

초조함에 물든 음성이었다. 정보는 사방에서 생겨나지만 그것을 모으고 정리할 수 있는 건 결국 사람이다. 백작의 경우에는 가문에서 오래전부터 키워 온 세작들이 제국 여기저기에서 정보들을 모아 온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세력을 보유한 그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결국 그에게 들어오는 정보보다 그녀에게 들어가는 정보가 많고 정확하다는 의미겠지.

대체 누구로부터? 그 의문을 품은 직후 테노리엘 백작은 지금이 아닌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협박해 영주권을 빼앗아 갔던 그때를. 숨어든 에스메랄다가 영주권을 빼앗아 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그것에 집중했어야 했던 거다.

그녀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영주권을 빼앗자마자 행한 일과 관련이 있다. 백작은 오해에 가려져 있느라 이제껏 보지 못했던 뒷골목, 그곳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백작은 이미 황도를 나서기 직전 제국 각지에 머무르는 세작들에게 따로 명령을 하달한 상태였다. 해당 지역의 뒷골목 세력에 변화가 있는지, 있다면 그 시기가 언제인지 조사해 보고하라고.

뒷골목의 변화는 귀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누가 되었건 결국 그들은 머리를 조아려야 하니까. 뒷골목 세력은 결국 귀족의 군사력 앞에 무력하기에 세세하게 살피지 않는다.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변하면 변하는 대로 더한 악행을 못 하도록 단속하는 게 전부였다. 뒷골목은 절대 뿌리 뽑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의 추측이 정답이라면 제국 각지의 뒷골목은 3년 전부터 대격동을 치렀을 것이다. 그걸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면 누가 에스메랄다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것인지 확실해진다. 그리고 남부 폭동 때 백성들을 선동했던 이들, 폭동 직후 죽어 버린 것처럼 조용해진 그들이 뒷골목의 건달들이라면…….

남부 역병, 약의 강탈, 폭동을 선동한 자들, 반군까지. 모든 조각이 텅 빈 그림 속에서 자리를 찾는다. 에스메랄다의 행보를 생각보다 정확하게 되짚고 있는 테노리엘 백작이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끝을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과정을 훔쳐본 테노리엘 백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잘한 흉터와 그을린 피부 위로 나이답지 않게 위협적인 힘줄이 곤두섰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지?

그 방법이 아무리 필요하다 해도 백작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만은 절대로.

‘아버지께선 정당한 이유가 있어 침묵하고 계십니까?’

‘현실에 대한 순응일 뿐이지요.’

‘아버지께서는 묵인하고 계시면서, 외면하고자 하는 저를 비난하시는 겁니까?’

과거 에스메랄다로부터 받았던 비난은 비수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그의 심장에 박힌 채 그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제발 자신이 하는 모든 추측이 헛된 망상이기를, 그 작고 여린 아이가 지옥 길을 지나려는 게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에렘의 장정들이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기를, 그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맞이할 아낙네들도, 아이들도, 노인들도 생겨나지 않기를.

“주군.”

갑작스러운 부름은 천막을 젖히고 들어온 건장한 중년인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10년 넘게 그를 보좌한 기사였다. 테노리엘 백작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켜 있던 것들이 한순간 흩어졌다.

“연합군 3부대 정남쪽, 마수 집결 신호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흩어진 자리를 다른 것들이 차지하고 앉았다.

“기마병은 창과 활로 무장, 출정 준비를 시작한다. 연합군 3부대에게 전투 지원을 하겠다는 전서구를 보내라. 연합군과 합동하여 마수 토벌에 들어간다.”

“예, 주군.”

걱정과 울화가 넘실거리며 그의 그림자처럼 일렁거렸다. 연합군 편성이 끝나기 닷새 전의 일이었다.

* * *

오늘 오전,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출발 소식을 받았다.

「카 59일 05시 목표물 출발 예정. 호위 인원으로 사병 3명, 기존 용병 2명을 대동. 지시한 이동 경로에 따르면 카 72일 전후로 도착 예정」

황도에 들르지 않고 이동하면 거리가 단축되니, 아브람 백작이 언급한 대로 70일이 넘을 때쯤 도착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편성을 마친 서부 연합군은 남진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연합군 후방 지원을 돕기만 하면 되니 그를 대접할 시간은 충분하리라.

실제로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온 지 10일 차, 연합군의 편성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이미 영지를 잃어 사병을 더 내어 놓을 수 없는 이들을 제외한 서부의 영주들 대부분이 한계까지 병력을 짜냈다.

어제저녁 이후로 도착해 아직 배치를 받지 못하고 대기 중인 병력 3천. 아직 오고 있는 중인 병력 4천. 중앙군이나 서부군 가릴 것 없는 탈영병 출신의 6천. 그들에 대한 것만 마무리가 되면 연합군 편성은 완전히 끝난다.

에스메랄다는 막바지에 접어든 편성 업무를 마저 도와주기 위해 사령관실에 도착했다. 노크를 한 시종이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방문을 알렸다. 평소대로라면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먼저 안으로 들어선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소리 때문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의자가 넘어가기라도 한 것인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방문객을 들이거나 다른 곳으로 안내하라는 말을 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에스메랄다는 문 앞에 서서 눈을 끔뻑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아 다시 한번 노크를 해야 하나, 고민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움직이기 전에 사령관실 문이 열렸다. 조금 전 안으로 들어간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고 고개를 숙였다. 에스메랄다는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시종과 기사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채 초조해하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빠르게 훑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 그래. 왔나?”

인사를 나누는 사이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갔다. 에스메랄다는 언제나처럼 아르페시스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도착을 하지는 못했지만.

“저쪽, 오늘은 저쪽에 앉지.”

아르페시스가 자신의 옆자리가 아닌 책상의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이 하는 일의 특성상 글을 함께 볼 수 있는 위치가 편하다. 그런데 나란히 앉는 대신 맞은편이라니?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닿았다. 저 기괴한 반응은 또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예, 전하.”

그녀가 의자에 착석하자 기묘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휴고의 시선은 물론, 아르페시스를 힐끔거리는 테노리엘 기사들의 시선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채 종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입을 열 생각은 하지 않는 아르페시스까지.

“혹여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아니, 없다!”

단호하다 못해 갈급하기까지 한 답이 돌아왔다. 기이한 행동에 의문을 느낀 에스메랄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아르페시스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의 답이 거짓말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가 죄인 같아 보일 정도인데 무얼 더 말하겠나?

그는 본인의 앞에 놓인 서류 더미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처럼.

“어제 해 질 녘 이후로 도착한 사병들의 병과 보고는 받으셨습니까?”

“아직…….”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았나요?”

“그게 아니라…….”

에스메랄다가 아는 아르페시스는 할 말은 가감 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어물거리다니.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올라오기는 했는데…….”

그 말과 함께 아르페시스가 만지작거리던 서류를 그녀에게로 밀어 주었다.

“내가 아직 읽어 보지를 못했다. 어제저녁에는 개인 훈련을 하느라……. 원래는 오늘 오전에 곧장 진행하려고 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에스메랄다는 그가 내어 준 종이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더욱 가까이 잡아당기고자 했다. 그로 인해 종이 뭉치를 안으려는 듯 팔을 뻗은 그녀의 손과 그것을 밀어 주던 아르페시스의 손이 살짝 스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손에 의해 내쳐진 자신의 손과 토마토처럼 온몸이 붉어졌다가 곧장 새파랗게 질려 버리는 그를 시야에 담았다.

“미,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다급히 외친 그는 다시 얼굴을 붉혔으나 결국 말꼬리를 흐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후에는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에스메랄다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괴이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영주 대리.”

“……손님을 모시는 것은 제 의무랍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제게 언질을 해 주세요.”

“저도 정확한 것은 모르는지라……. 그저 전하께서 개인적인 고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휴고가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그럼 전 서류를 살펴보고 있을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휴고가 자진해 아르페시스를 쫓아가기로 했다. 뭐, 굳이 멀리까지 쫓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전하.”

문을 연 휴고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 에스메랄다가 있는 위치에서는 휴고가 바라보는 곳이 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보아 아르페시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휴고, 내가, 내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초조함이 가득한 음성이었다.

“전하.”

“이러면 안 되는데, 손이 닿는 그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아서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어린 그녀에게 이런 파렴치한 생각을 가지면 안…….”

“전하, 아직 문을 닫지 못했습니다.”

조급한 기색의 목소리는 아르페시스의 것이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휴고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말을 잘랐다. 뒤로 넘어갈 것처럼 격한 들숨 소리와 함께 문가에서의 대화가 뚝 끊겼다. 그것을 기점으로 여기저기서 안쓰러운 기색의 한숨이 터졌다. 사령관실 내부에 배치받은 테노리엘의 기사들이 내뱉은 소리였다.

에스메랄다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조금 전 아르페시스에게 내쳐진 손을 응시했다. 이 손을 만져 보고 싶었다고. 적나라한 단어들이 선택된지라 지금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에게 줄곧 호감을 표해 왔다. 이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방, 그리고 훌륭한 인재에 대한 것에 가까웠지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달랐다. 에스메랄다는 노골적으로 변해 가는 분위기에 당황했다. 그가 보이던 감정이 이성 간의 호감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으니까.

언제부터? 지금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지나치게 적나라해서 오해나 의문 같은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린 기분이었다.

“전하?”

휴고의 부름 뒤로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 소리가 멀어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휴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다시 사령관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자문 사항은 서류로 정리해 올려 주시겠습니까?”

발그레한 홍조를 띤 뺨보다 더 붉은빛을 품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심장이 울렁거리고 배 속은 조여들었다. 그녀는 곧장 답을 하는 대신 잠시간의 침묵을 지켰고, 휴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목이 누군가에게 졸려지는 기분이었다. 간절히 원했을 때는 오지 않더니 버리겠노라 다짐한 순간이 되자 손아귀 가까이 다가온다. 에스메랄다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고갯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감사합니다.”

휴고는 아르페시스를 뒤쫓듯 문을 닫고 사라졌다. 에스메랄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과묵함은 기사의 덕목이기도 하지. 다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 믿네.”

“명심하겠습니다, 아가씨.”

다섯, 테노리엘 기사단에서 차출해 아르페시스의 보좌로 붙여 주었던 기사들이 간결한 답을 꺼냈다. 그녀는 서류를 챙겨서 사령관실을 나섰다.

해가 진 이후 3부대의 남쪽에서 마수들의 집결을 알리는 노란 연기가 올라왔던 그 날부터 아르페시스는 노골적으로 에스메랄다를 피하기 시작했다.

* * *

“전서구가 왔군.”

가래가 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목을 혹사해 잔뜩 쉬어 버린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울렸다.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로 거친 목소리가 들린 직후 그 옆에서 종이를 한 장, 한 장 펼쳐 주던 풍만한 몸매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본래 있던 곳의 옆에 달린 작은 곁방에 들어섰다. 새가 앉을 수 있는 나무와 먹이, 물이 가득한 곳. 전서구를 관리하는 방이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사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전서구는 조련석을 끼워 넣어 만든 나무 막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서쪽에서 왔어요.”

“뭐라고 하시나?”

그 물음에 여인, 케니샤가 생긋 웃으며 서신을 가져다주었다. 케니샤는 불쾌한 목소리의 주인공, 왼쪽 뺨과 목덜미에 화상 자국을 가지고 있는 사내가 서신을 볼 수 있도록 펼쳐 주었다.

“후우, 그게 좀처럼 쉽나.”

“반군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니… 빡빡하겠어요.”

케니샤는 남자의 말을 받아 주며 서신을 접었다. 남자가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대신해 준 것이다.

“뭐라고 답을 보낼까요?”

“반군 수색은 노력 중이라는 답 말고 드릴 수 있는 게 없지. 그리고 일전, 처형 사건과 관련해 알려 주신 인물들에게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도.”

“네, 알겠어요.”

“아, 남부군이 전초 기지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있다는 것도. 머저리가 진군이 아닌 버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려 드려야지. 반군 처형 건으로 위증을 할 이들도 확보했으니… 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적고.”

“차근차근 적을게요.”

남자를 대신해 케니샤가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었다. 남부에서 서부로 가는 모든 서신은 이렇듯 그녀가 대필한다. 남자는 그것을 할 수가 없으니까.

“황도의 일은 여쭤보지 않으세요?”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내 손에 떡하니 남부 뒷골목을 쥐여 주셨는데 그것 하나 못 하시려고.”

“하긴… 그때로부터 벌써 2년이나 흘렀네요.”

손님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던 어느 날. 낯설어진 노크 소리가 그를 찾아왔던 어느 날. 남자의 인생이 희망을 손에 넣었던 그 날.

「사 루실 에반스 귀하.」

남자, 에반스는 아직까지 그 짧은 문구가 적혀 있던 서신을 받았던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서신에 답을 들려 보낸 지 정확히 보름 만에 온몸이 울긋불긋하게 물든 이들이 몰려와서 본인들을 소개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들 모두가 남부의 대규모 영지에서 왕 노릇을 하는 뒷골목 수장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 후로 에반스는 남부의 뒷골목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건달이나 포주들의 반발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돈과 힘을 모두 쥐여 준 ‘그분’ 덕분에 큰 사고로 번진 적은 없었다.

마나를 다루는 용병은 매해 수가 늘어나고 있고, 동부에서 발견한 마석 광산으로 인해 자금은 불어나고 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계속 합류하고 있는 소규모 상단까지. 재력과 무력을 통해 에반스는 남부의 권력을 위임받았다.

「황태자의 팔다리를 자를 수 있게 해 줄게요.」

악마의 속삭임이 그처럼 달콤할까? 아니, 이 세상에 그 간결한 문장보다 달콤한 것은 없으리라. 그건 고향으로 돌아와 절망 속을 헤매던 그에게 구원이고, 유혹이고, 희망이니까.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고작 10대 소년에 불과하던 황태자가 그의 팔다리를 앗아 간 지 12년. 술을 마셔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황태자를 이길 리 없는 황궁의 사용인들, 그리하여 술에 취한 악마. 실제 에렘은 미성년자의 음주를 금지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황태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실수로 함께 산책하던 개를 밟았다. 개는 깨갱, 소리를 질렀다. 만약에 말이다. 그 개가 밟히는 일이 없었다면, 아니면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 그의 사지는 멀쩡했을까?

개의 비명 소리가 황태자의 가학성을 부추기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개는 죽었다.

에반스는 개의 복부를 발로 짓누른 채 다리를 잡아당기던 황태자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인간이 동물의 사지를 맨손으로 찢어 버리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의 답을 보았다. 그리고 별로 궁금해한 적도 없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은 대가로 황성 말단 관료로 취직했던 에반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곤 한다. 왜 그 길을 지나갔을까. 그리 급한 결재 건도 아닌데, 5분, 10분 늦는다고 잘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왜, 조금 더 빨리 도착하겠다고 그 복도를 지났을까.

개를 죽인 후 에반스를 발견한 악마가 말했다.

‘재밌는 게 생각났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려던 에반스는 황태자의 근위대에게 잡혔다. 그날 에반스는 황태자의 손에 팔다리를 잃었다.

10대 초반의 소년이 검을 얼마나 잘 다루겠나? 한 번에 슥?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덜너덜, 뼈를 자르지 못해 관절을 쑤시던 그 검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기껏 잘랐는데 붙이면 아깝잖아?’

킬킬킬, 고통과 출혈 속에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분명히 들었다. 인간을 나락으로 이끄는 악마의 웃음소리를. 악마는 잘려 나간 에반스의 팔다리에 마시고 있던 술을 부었고 그 위에 불까지 지른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불이 몸에도 옮겨붙어 화상 자국까지 얻었다. 이러니 그가 ‘그분’이 내민 손을 움켜쥐고 매달릴 수밖에. ‘그분’이 황제가 직접 쉬쉬한 그 날의 일을 어떻게 아는지는 상관없다. 그놈의 팔다리를 자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후우…….”

에반스는 과거를 회상하며 거칠어진 호흡을 골랐다. 그날을 위해서라면 수천, 수만, 수십만… 아니, 대륙에 사는 모든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 해도 기꺼이.

에반스는 에스메랄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녀가 에반스의 경계심을 풀고 신뢰 관계를 쌓기 위해 직접 공개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그녀를 ‘그분’이라고 칭한다. 감히 자신에게 구원을 알려 준 그녀의 존함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말단 놈들보고 산행이라도 가라고 해야겠어. 어차피 술에 취해 늘어져 있는 놈들, 은화라도 쥐여 주고 써먹어야지. 식량을 조달하려고 내려온 반군을 추적하는 일에 조금 더 열심히 움직여 보자고.”

“머저리 쪽은 어떻게 할까요?”

머저리. 에스메랄다를 필두로 뭉쳐 든 이들이 황태자를 칭하는 은어였다.

“우선… 연회를 열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군. 상단주를 통해 술을 진상하면서 물자 납품을 언급해 보라 하셨으니, 진행해 봐야지.”

“머저리가 결정하지 않으면 결국 허사인데……. 아무리 생일이라지만 전선에서까지 그렇게 철없게 굴까요?”

에반스가 몸뚱이밖에 남지 않은 몸을 기울여 케니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될 거야. 우리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 상인들을 관저에 보내 부추기기만 하면 돼.”

뺨에 닿은 온기에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당신이 될 거라 믿는다면 나도 믿어요.”

에반스는 그 모습을 보며 슬프게 웃었다.

“내가 참… 당신에게 많이 고마워.”

한동안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토로하던 두 사람은 오래지 않다 다시 업무로 눈을 돌렸다.

* * *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술집에는 싸구려 맥주와 비위생적인 음식이 십여 개의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에 둘러앉은 채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어 대는 사람들 속에서 유독 큰 목소리가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거 아냐? 굶어 죽는 놈들이 허다한데?”

그들의 근처에서 각자 떠들던 이들의 시선이 슬쩍 모여들었다.

“언제 그런 걸 신경이나 썼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돈으로? 설마 남부군 재정으로 충당하는 건 아니겠지?”

“모르지. 나도 상단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들은 거야.”

분개한 듯 들고 있던 맥주잔을 테이블에 집어 던지듯 올려놓은 남자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버리는 남자가 함께 앉아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남부군 얘기가 나와?”

그들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관심을 보였다. 30대쯤 되었을까 싶은 그는 남부군에 소속된 병사였다. 그는 후방으로 퇴각한 부대와 함께 이동한 후, 비번을 맞아 술을 마시며 쉬던 참이었다.

“뭐, 황태자가 연회를 연다고 하더이다.”

“연회?”

고개를 저어 대던 남자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어느새 시끌벅적하던 공간의 소음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곧 지 생일이지 않소? 그래서 연회 물자를 사들였다고 들었소.”

“……그거 어디서 들었나?”

남자는 반쯤 빈 맥주잔을 집어 들며 정찰병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내 친구가 이번에 물자를 댄 상단에서 짐꾼으로 일하는데, 루소멜 백작 성에… 지금은 관저인가? 거기에 술을 배달했소. 상단주가 근위대랑 얘기하는 걸 들었다더군.”

술집은 조금 전까지 소란스러웠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연회를 열 돈이 어디 있다고?”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내가 상단이나 관저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지 사비로 하는지, 남부군 공금으로 하는지 알 게 뭐라고.”

말과는 다르게, 그 남자는 상단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황태자가 사비를 이용해 연회를 연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다른 사람에게 제안을 받았다. 연회에 사용되는 자금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척하면 금화 두 개를 주겠노라고. 그래서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누군가 진위를 밝히기 위해 그를 찾아도 그는 이 도시에 살지 않기에 본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술김에 본 사람의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 낼 만큼 기억력이 좋은 인물이 얼마나 된다고.

마수들의 습격에 대비해 용병들을 잔뜩 고용한 상단과 동행할 예정이니 귀환 걱정은 없다. 애초에 그는 루소멜 관저에 연회 물자를 납품하는 상단에 고용된 용병 중 한 명이었으니까.

“젠장, 사비로 한다고 해도 열 받는데. 그 돈을 남부에 쓸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전선에서 무슨 생일을 챙긴다고!”

“한두 번이냐?”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같은 테이블에 앉은 두 남자가 다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질문을 꺼냈던 병사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그는 한동안 식식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동화를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들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 얘기를 전한 두 남자도 조금의 시간을 더 보내더니 자리를 떠났고, 남은 이들은 조금 전 들었던 얘기에 대해 떠들어 댔다.

중앙군 1만 5천을 대동한 채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황태자의 생일 연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수십 개의 술집으로부터 퍼져 나갔다. 리퀘나 성벽이 뚫린 지 30일가량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 * *

에스메랄다는 바닥에 붙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뷔비르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이리 무능하게 구니 꺼내준 것이 후회되는구나.”

“조,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둠은 인간을 공포와 광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 뷔비르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흑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던 시간은 17일.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그가 생활한 곳은 눈을 부릅떠도 자신의 손과 몸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이었다.

그런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생각뿐이다. 몇 분, 몇 시간, 몇 날 며칠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시간 감각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처음에는 스스로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느냐에 대한 의문과 울분, 자신이 이곳에 있게 된 원인을 파헤치고 지금의 순간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불안해지고, 평생 여기에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모든 혼란의 소용돌이의 끝은 누구나 같다. 그저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본능, 나가게 해 달라는 애원만이 남는다.

어둠은 인간에게 그토록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원망, 분노, 불안과 절망까지 모조리 사라질 정도의 간절함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미치지 않고 나온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평가해야 할 일이었다.

실제로 에스메랄다는 정신 줄이 풀어지긴 했지만 미치지는 않은 뷔비르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뷔비르의 기본적인 평가는 개를 벗어나지 못하니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어차피 뷔비르를 앞으로 계속 쓸 생각도 아니고.

내년 봄, 황제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남부 인구 대신 서부와 동부에서 또다시 백성군을 징집한다. 세 번째 강제 징집, 거기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황제가 단속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남부와 동부의 뒷골목을 손에 쥔 에반스와 아브람 백작처럼, 개가 아닌 동지에게 서부의 뒷골목을 맡길 수 있게 된다. 시리스의 록첸 가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의 가문이 황제의 손에 멸문할 테니까.

“아직도 해결을 하지 못하다니.”

그녀가 일거리를 돌려준 건 고작 사흘 전이다. 뷔비르가 멀쩡한 상태라고 해도 이제야 결재가 끝났을 시간.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서늘한 눈동자로 그를 채근했다. 이런 사소한 냉대가 뷔비르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공포를 후벼 파 줄 테지.

다시 그곳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거기에 휘둘렸기에 뷔비르가 지금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찾아오는 일이 없게 하렴.”

뷔비르를 지하 감옥에서 꺼내 준 후 에스메랄다는 하루 온종일 훈련을 하던 용병들에게 다시 일을 시켰다. 교대 근무처럼 그들은 순번을 돌아가며 뷔비르의 거처에서 그를 감시하게 될 것이다. 뷔비르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에스메랄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희가 없는 자리에서 아랫놈들과 대화를 하거나, 너희를 따돌리려는 시도를 하면 망설일 것 없다. 더 이상의 재활용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니 치워라.”

“예, 아가씨.”

뷔비르를 힐끔거린 두 명의 용병이 곧 답했다. 에스메랄다는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고생해라.”

“그래.”

그녀의 뒤로 시리스가 따라붙으며 용병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영주 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후드를 벗었고, 시리스는 곧장 연무장에 가겠다며 방향을 틀었다.

집무실로 올라가 또다시 글과의 사투를 벌이기도 전에 그녀의 걸음은 홀에 붙들렸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 앞에 멈추어 섰다. 정확히는 그가 후드를 벗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다가온 것이었지만.

“외출을 했던 것이니?”

“네.”

기껏 재활용을 해 보겠다고 데려다 놓았더니 정신 줄을 놓고 있느라 일을 하지 않은 뷔비르의 목줄을 다시 한번 조여 주기 위해 나섰던 외출이었다.

“쯧, 부르지 않고.”

“뷔비르에게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시리스를 대동했고요.”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그가 나타난 방향으로 흘렀다. 며칠 전 시리스와 함께 뷔비르를 데리고 나왔던 통로였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을 때, 페드로의 손길은 겨울의 추위에 얼어 버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뺨이 식었구나. 어서 들어가자. 날이 차다.”

에스메랄다는 당연하게 자신을 안아 드는 페드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적응을 한 것이다. 내려 달라고 해 봤자 그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음을 깨달았으니까.

집무실과 가장 가까운 복도에 연결되는 중앙 계단을 올라가며 소소한 대화가 오갔다. 언젠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던 머나먼 과거의 한때처럼.

“오늘 만찬은 양고기를 올리라고 할까? 집사에게 들으니 우리가 영지에 돌아오기 전에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살찌지 못한 놈들을 많이 잡아 두었다던데.”

“구이라면 괜찮아요.”

“여전히 향이 강한 건 좋아하지 않는 것이지?”

“어느 정도는 먹을 수 있어요.”

“네 것은 사슴 고기를 올리라고 하자. 사냥꾼들이 몇 마리 진상하고 갔다 하니 그게 나을 것 같다.”

주제는 오늘 만찬 메뉴. 혹은 때가 되었음에도 전혀 배우지 않는 승마에 대한 걱정. 그 외에도 가정교사에게 배워야 하는 다양한 학문들에 대한 염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워야 할 때를 놓치면 고생은 훗날 하게 되지. 다 내 경험담이다. 어릴 때 너무 놀았어.”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거짓말은.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다고.”

그녀의 이마에 닿는 가벼운 손길이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콕, 하고 찍은 자신의 이마를 감싸 쥐며 시선을 피했다.

이미 다 배운 것에 시간을 할애해 다시 배우는 건 낭비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배우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것으로 비치겠지. 그 부조화가 불러올 오해는 달갑지 않지만 그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여유는 없었다.

“음?”

평범한 대화가 막을 내린 것은 아르페시스의 등장 덕분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페드로가 그에게 인사를 하며 에스메랄다를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은 중앙 계단을 타고 올라가던 중이고 아르페시스는 내려오던 중에 마주친 것이다.

“전하를 뵙습니다.”

에스메랄다 역시 페드로의 품에서 내려와 그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조우에 놀란 심장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아르페시스는 이틀 전 사령관실에서 본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를 계속 피해 다녔다. 에스메랄다로서는 그런 그의 행동이 달가울 정도였다. 아르페시스의 이상한 행동은 그녀에게 결코 이롭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보아도 그의 심리 상태는 쉽게 읽혔다. 첫사랑에 빠진 10대 소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누가 그것을 모를까. 붉어진 귓가와 목덜미, 시선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것은 물론,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까지.

심장이 울렁거리고, 배 속이 조여지자 에스메랄다는 그 감각을 밀어내고자 했다.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이성적인 호감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인사를 올린 두 사람 중 누구도 답을 듣지는 못했다. 아르페시스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얼굴을 붉히고, 창백해지고, 다시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나타났던 방향을 거슬러 왔던 길을 되돌아가 버렸다. 다급한 걸음으로.

페드로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사이 에스메랄다는 눈을 감으며 그의 잔상을 지워 버렸다. 그를 보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꽂히던 은회색 눈동자를 그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심호흡을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심장은 난동을 부렸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달갑다는 듯이. 어리석게도.

“왜 저러시나?”

“글쎄요.”

“……흐음?”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사라졌건만, 이번에는 페드로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스메랄다는 다시금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한 페드로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보신다고 알아내는 게 있긴 하세요?”

“허, 말버릇 좀 보게.”

에스메랄다의 뺨이 페드로의 손에 잡혔다.

“오라버니, 아파요!”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아 말랑거리는 그녀의 볼이 페드로의 손가락에 의해 짜부라졌다.

“벌이다, 벌. 오라비가 누이를 좀 볼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그리 타박을 주느냐?”

“꼭 흠을 찾아내려는 듯이 보시면서.”

“네게 흠이 어디 있다고? 그냥 궁금한 게 있었던 것뿐이다.”

페드로가 그녀의 뺨을 놔주었고, 에스메랄다는 살짝 찌릿한 뺨을 문지르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다시 페드로의 품에 안착했지만 말이다.

“신경이 쓰이면 말이라도 걸어 보지 않고? 왜 모르는 척 무시를 하는 거니?”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질문을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

“뭐, 그냥 창피해서 저러는 거 같긴 한데.”

“……창피요?”

그가 수치심을 느낄 일이 뭐가 있다고? 고개를 갸웃하던 에스메랄다는 순간 이성을 되찾았다. 외면하겠다고 다짐한 지 몇 초나 지났다고 관심을 보이나.

“역시 신경 쓰이는 것이지?”

“……아니에요.”

“정말이지, 거짓말은.”

페드로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도 피식 웃는 모습이, 그녀의 거짓말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흐음… 뭐, 알겠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뭘 알겠다는 말인가?

* * *

‘전하!’

다급한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낯선 공간을 둘러보며 의문을 느끼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 붉은색 머리카락이 익숙한 사람. 그의 근위 기사 중 한 명인 테베르였다. 아르페시스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분명 테베르다.

20대 중반의 그가 30대 중반은 되어 보이다니, 갑자기 왜? 며칠 사이 큰 고초라도 겪었나?

아르페시스는 머릿속의 물음표에 충실해 고개를 갸웃거리고자 했지만 그의 몸은 의지를 배반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만 했다.

‘무슨 일인가?’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물론 의식 속에서만. 그의 몸은 여전히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낯설었음에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 그가 의문을 느끼는 사이 창백하게 질린 테베르가 다급히 말을 이어받았다.

‘황도에서 처형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처형? 누구를?’

조금 이질적인 목소리에 경각심을 가졌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한번 꿈속에 동화되었다. 현실의 기억은 아득한 감각에 가려지고, 겪은 적 없는 일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또 엄한 귀족이 황제나 황태자의 심기를 거슬렀나? 아르페시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그는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64일 정오에 테노리엘 백작님을 처형한다고 합니다!’

뭐? 아르페시스는 머리도, 몸도 굳은 채 잠시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신탁이 그분을 의미한다고, 신관들과 황실 기사들이 후작가를 급습했다는 소식입니다. 백작님께서 끌려 가셨…….’

‘황도로 간다!’

절박한 목소리에 사령관실에 있던 이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페시스는 채비도 갖추지 못한 채 무작정 말에 오르면서도, 말에 올라 몇 날 며칠을 내달리면서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가야 한다, 그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온전히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다시 뜨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숲과 들판, 암석 지대까지 수없이 많은 길을 지나쳤다.

누워 잠을 자는 것은 사치였다. 다들 번갈아 가며 말 위에서 잤고, 잠을 자지 않는 동료가 말고삐를 잡아 말을 이끌었다. 쉬지 못한 말들이 입가에 거품을 물어도 멈추지 않았다.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낙오하는 이들이 생겼음에도 아르페시스는 계속, 계속 나아가기만 했다.

사흘 밤낮을 말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내달린 끝에 드디어, 저 멀리 10여 년 전 떠나왔던 황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 빨리 달린다 해도 7일은 걸리는 거리를 사흘 만에 지나왔다. 피로에 잠식된 그는 눈에 들어간 흙먼지 때문에 찡그리듯 눈꺼풀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르페시스는 또다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페드로를 마주했다.

“아… 윽…….”

이번에는 놀라서 몸을 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가슴께를 움켜쥔 채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애절함인가, 아니면 처절함인가. 몸이 덜덜 떨리는 게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아르페시스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꺽꺽거리며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또 조금 전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깨어난 후에도 방금 전 본 것이 지독하리만치 생생해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테노리엘 백작의 처형? 그것이 왜 이토록 사무칠까. 그를 만난 것이라 해 봤자 황실의 연회에서 몇 번이 전부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데, 어째서.

신탁이 그를 의미한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렇게 아프냔 말이다.

아르페시스가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자 결국 지켜보다 못한 페드로가 그를 흔들며 말을 걸었다.

“전하?”

아르페시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의 어깨를 짚은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돌연,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혼란으로 가득 차 있던 은회색 눈동자가 페드로를 확인하고 경악으로 물들었다.

잔잔하기 시작되었던 눈동자의 떨림으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진득한 것이 피어났다. 페드로는 그것을 직면하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감정을 느끼면 눈동자 속에 저런 것을 품을 수 있나.

“살아 있다고……?”

“예?”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하는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 전에 느꼈던 처절함에 환희가 깃들었다.

“테노리엘……!”

격양된 목소리가 눈동자에 담긴 것과 똑같은 것을 품었으나.

“……아?”

이윽고 사라졌다. 불현듯 의문을 표한 아르페시스가 혼란에 젖은 채 주변을 돌아보는 동안 페드로는 가만히 그를 주시했다.

그가 매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새벽마다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어떨 때는 식은땀에 젖어 깨고, 또 어떨 때는 이렇게 이상한 상태로 깨어난 것도.

하지만 오늘은 지난 몇 번과 달리 상태가 조금 심각해 보인다. 페드로가 괴이함을 느끼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자신에게 찾아온 혼란에 적응하기 위해 바빴다.

“그대가 어떻게…….”

분명 죽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하지만 꼬리가 달리듯 의문이 뒤따랐다. 그가 왜 죽었단 말인가? 하고. 꿈의 여파가 현실에 있는 그를 침범했고 아르페시스는 거기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페드로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스스로를 발견하고 혼란스러웠다. 아르페시스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페드로는 그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었다.

“우선 물이라도 드시지요.”

“아… 그래.”

페드로가 건넨 물잔을 받아 드는 순간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 이상한 광경이 떠올랐다. 남부군의 문장이 상단에 떡하니 박혀 있는 종이 위에는 물감이 번진 것 같은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장 아래, 유일하게 선명한 글귀가 보였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바 51일」

간결한 글을 써 내려가는 깃펜. 그 깃펜을 쥐고 있는 손. 날짜의 뒤에 이어 무언가를 더 첨부하기 위해서일까? 깃펜이 다시 종이에 닿았다. 하지만 그 빈자리에 무슨 글자가 들어가는지는 보지 못했다. 순간 머릿속을 장악했던 그 괴상한 광경은 사라졌다.

아르페시스는 찌릿하게 울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바… 51일?”

희미한 중얼거림에 페드로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제 생일입니다만?”

생일이라고? 아르페시스는 왜 자신이 그의 생일을 손으로 쓰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래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저 껄끄러운 사내의 생일을 직접 손으로 쓰고 있단 말인가? 종이에 찍힌 남부군의 문장은 뭐고? 축하 서신 같은 걸까? 남부군의 문장을 사용해 생일 축하 서신을 보낸다고? 차분하게 의문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몸이 깊은 지저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과 함께 아르페시스는 쥐고 있던 물잔을 떨어트렸고, 그와 함께 빈속까지 게워 냈다. 해조차 뜨지 않은 이른 시간, 전날 먹은 음식이 모두 소화되어서 올라오는 것이라곤 시큼한 위액뿐이었다. 손에서 놓친 물잔과 위액 때문에 이불이 젖어 들었다.

“전하!”

페드로가 그답지 않게 조금 다급한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서 대기 중인 시종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의원과 신관을 불러……!”

하지만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아르페시스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으니까.

“되었다!”

신관, 신관, 신관……! 그 단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역겨움을 이끌어 냈다.

황족인 그로서는 훈련 중의 부상 등을 이유로 황도에 있는 대신관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 고로, 그가 신관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했다. 신을 찬양하면서 그 신이 준 힘으로 돈벌이 궁리만 가득한 놈들을 향한 한심함. 딱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강렬한 혐오감이 일렁거렸다.

왜, 도대체 왜. 답을 찾지 못하는 의문이 매일매일 쌓여만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그곳에서 벗어나는 방법 역시 보이지도 않는다.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의 메슥거림과 달리 몸이 썩어들어 갈 것 같은 역겨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어 앉은 그는 맨발에 닿는 카펫의 감촉을 느꼈다. 아르페시스는 그렇게, 침대에 앉은 채 한참 동안 거친 호흡을 골랐다.

* * *

에스메랄다는 언제나처럼 차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뭐?”

오늘은 그 차를 내어 온 시녀가 가져온 소식도 함께였다. 조금 전, 잠에서 깬 아르페시스가 구토를 해 의원이 불려갔다는 소식. 심장이 삐걱거리며 엇박자로 뛰었다. 그 순간 에스메랄다를 지배한 것은 어떠한 이질적임도 없는 순수한 걱정이었다.

새벽녘에 깨어 구토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 것일까? 어디가 어떻게? 갑자기 안 좋아진 건가? 왜 언질을 주지 않았나?

중앙 계단에서 만난 그를 외면하고자 했던 다짐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머리는 결코 심장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어찌 된 일이더냐, 상세히 고해라.”

아직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는 그녀에게선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잠에서 깨신 황자 전하께서 구토를 하셨고, 그에 페드로 도련님께서 의원을 부르셨다 합니다. 조금 전 주치의가 전하의 침실에 도착해 진료를 시작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의원을 부른 게 페드로라고? 이 새벽에 그가 왜 아르페시스의 침실에 있단 말인가? 머릿속에 물음표를 채운 상태에서도 그녀의 걸음은 점점 더 급해졌다.

“신관은 언제쯤 도착한다고 하더냐?”

“그것이…….”

그 물음에 소식을 가지고 온 시녀가 눈치를 보았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성에는 직계를 위한 주치의가 항상 대기 중이니 외부 신전에 있는 신관과 의원이 도착하는 속도가 다른 것은 당연했다. 황족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데 페드로가 의원만 불렀을 리는 없다. 신관들이 가진 신력은 진짜였으니까.

더욱이 테노리엘은 타락한 신관들에게 경멸을 숨기지 않았기에, 그들의 영지에 있는 신관들은 속물적이기는 하나 악행을 자행하고 다닐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었다. 아프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달려오고 볼 정도의 도덕심은 가지고 있는 인사들이다. 환자가 돈을 낼 수 있다 싶으면 가격을 조금 높게 부르는 정도의 속물적인 신관들.

“황자 전하께서 신관의 방문은 거절하신 터라…….”

“전하께서?”

꾸준한 복용이 있어야 효과를 보는 약제보다 한 번의 치료로 성과를 내는 신력이 훨씬 빨리 몸을 호전시킨다. 그런데 신관을 거절했다? 에스메랄다의 걸음이 텅 빈 복도 위에서 덜컥 멈추었다. 순수한 걱정으로 삐그덕거렸던 심장이 숨소리를 죽였다.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남부 신관들은 모조리 그 미친놈과 연이 닿아 있더군. 그놈이 내 부상을 어떻게 그리 빨리 알아채는지 궁금했는데, 그 답을 신관들이 가지고 있었다.’

경멸과 환멸을 숨기지 않던 글귀가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태자에게 뇌물을 먹고, 그에 아르페시스의 부상을 방관했던 신관들을 욕하던 서신. 그가 신관들을 향해 품었던 적대감과 혐오감, 그것이 문득 떠올랐다.

에스메랄다는 걱정으로 일렁이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런 기시감이 그녀의 확신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다. 속 시원히 물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에스메랄다의 녹색 눈동자에 그늘이 스며들었다.

최근 들어 보이는 순진한 반응은 그가 기억이 없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 준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시감이 들 때마다 저울추는 다시 제자리를 되찾곤 했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정말 수월할 텐데.

원한다고 온몸으로 소리를 질렀을 때는 관심 한 톨도 주지 않더니, 반드시 서로를 방해할 미래를 마주한 지금은 왜 그녀를 이성으로 보느냔 말이다.

그녀는 어느덧 아르페시스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시종이 문을 열어 주자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베개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있는 아르페시스를 빠르게 훑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앉겠나?”

“영광입니다.”

아르페시스의 말이 끝나자 침대 옆에 서 있던 페드로가 직접 의자를 가지고 왔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페드로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또 왜 당연하다는 듯 여기에 와 있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이런 두통은 겪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몸은 어떠신지요? 소식을 듣고 놀라 달려왔습니다.”

“……괜찮다. 그저 꿈자리가 사나웠을 뿐이니까.”

창백했던 아르페시스의 뺨에 옅은 홍조가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리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열여섯의 소년이 맞는 것 같은데, 조금 전 신관을 거부했다는 말이 계속 심장 언저리에 남아 그녀의 의혹을 부추겼다.

“곤하셨던 것 같으니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잠도 푹 주무시고요. 꿈자리가 사납다 하시니 수면초를 처방해 드리지요. 잠들기 한 시간 전부터 피워 두시면 깊게 잠드시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다.”

“그리고 복용 약도 지어 드릴 터이니 매일 식사 후 한 알씩, 몸에 좋은 것이다 생각하시고 꾸준히 챙겨 드십시오.”

진단과 처방을 마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메랄다는 가문의 주치의가 침실을 나서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모심에 있어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다급하게 반박한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덕에 에스메랄다는 며칠 만에 그의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밤하늘에서 빛나던 달처럼 묘한 광채를 가진 은회색 눈동자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색채였다.

에스메랄다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래전, 그의 눈동자를 독차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만족감이 다시금 그녀를 채웠다. 동시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치가 떨릴 만큼 싫었으니까.

그의 호감에 순수하게 기뻐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에스메랄다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온 스스로의 행동을 질타했다. 이곳에 와서 뭘 어쩌겠다고.

“그리…….”

악물린 잇새에서 흘러 나가는 말에 아르페시스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너의 건강이 악화된 게 내 탓이 아니라면 되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시니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가냘픈 소녀가, 아리따운 여인이 되기 위해 3년 동안 이를 악물었던 게 아니다. 남부의 백성들을 죽이면서 그녀의 미래가 행복하고 찬란할 것이라 여겼던 적도 없다.

“그럼, 부디 몸조리에 힘쓰시길 바라겠습니다.”

시답지 않은 일로 건강을 해쳐 자신을 부르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르페시스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표정에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침실을 나온 그녀는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득거리는 이물질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춰 서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말에 앞뒤 잴 것도 없이 달려오다니. 어리석고, 미련해, 종내 멍청하기까지 했다.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을 충동질하는 이 쓸모없는 감정들을 모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 *

“제가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래서 에스메랄다가 저렇게 날카롭게 구는 건가? 페드로의 질문이 번역을 거쳐 아르페시스에게 닿았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 같았다. 시리스라는 용병과 함께 있던 그 새벽녘. 한순간 경계와 적의를 품었던 그녀의 눈동자와 비슷했다. 그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과 한탄이 깃들어 있었다.

실상은 그녀 스스로에게 던진 감정이었지만 아르페시스가 그걸 알 리 없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경멸받았다고 생각했다. 비참했다. 그녀의 경멸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짐작돼서 더더욱. 그 파렴치한 꿈에 대해 그녀가 안 것이 분명했다. 그것 말고는 그녀에게 경멸받을 일이 없으니까.

최근 대부분, 아니 모든 순간에 그 꿈을 되새기던 아르페시스였기에 자연스럽게 지금의 일도 그것과 연관되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아니다. 그녀의 생각을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타인의 행동을 해석한다. 그게 인간이고 에스메랄다나 페드로 역시 똑같았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니까.

“그대가 말한 것인가?”

저절로 날 선 반응이 튀어 나갔다. 에스메랄다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 외에 페드로뿐인데.

“말한 적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 그녀가 날 저렇게 쳐다볼 이유가 그것 외에 무엇이 있다고!”

화가 났다. 앞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뒤에서는 그녀에게 달려가 쫑알거리기나 하고. 입막음을 위해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글도 보여 줬는데!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이 아니면 그녀에게 그 말을 할 사람이 없지 않은가!”

“아니, 천사가 왜 그 일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그 일이 아니면 그녀가 날 경멸할 이유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기가 찬다는 듯한 페드로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르페시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일단 그녀를 따라가서 오해를 풀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해가 아니라 다리가 풀렸다. 아르페시스는 방금 박차고 일어났던 침대에 털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풀어야 할 오해가 어디에 있다고. 그녀를 대상으로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뜨거운 열기와 쾌락 속에서 깨어났던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했다.

죄인처럼 위축된다. 욕망을 참지 못하고 꿈속에서 그녀를 탐한 모든 과정이 수치스러웠다. 자신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내라는 것이 부끄러웠고, 그럼에도 꿈에서 겪었던 모든 과정을 다시 한번 바라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약혼도, 혼인도 하지 않은 이에게 음욕을 품다니. 창녀에게 허리를 흔들고 다니는 한심한 사내가 된 것 같아 자괴감이 계속 크기를 키웠다. 가학적인 행동을 하며 여인들을 품는 황태자와 같은 피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음을 상기했다. 몸에 오물이 달라붙은 것같이 끔찍한 감각이었다.

머리를 감싸 쥔 채 끙끙거리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페드로는 속에서 치솟는 짜증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에스메랄다를 떠올리지 못했다면 짜증을 누르는 대신 뱉어 냈을 것이다.

‘……창피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던 목소리와 눈동자. 에스메랄다가 저 덜떨어진 놈을 신경 쓰고 있는 건 분명했으니 손을 써 놔야 했다.

“애초에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들, 천사가 전하를 경멸 어린 눈으로 볼 이유가 없습니다.”

“없기는 왜 없나! 난, 나는 파렴치한 짓을…….”

페드로의 눈썹이 위로 삐죽 솟아올랐다.

“그것을 정말 파렴치한 짓이라 여기십니까?”

“하?”

아닌 척하면서도 분명히 그를 걱정하던 에스메랄다였다. 지금 이 행동은 아르페시스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합리화한 페드로는 속에서 치솟는 짜증을 목을 좌우로 꺾으며 풀어냈다.

“그건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뭐라?”

아르페시스의 형제도, 부친도 아닌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싶은 자괴감이 들었다. 대체 어쩌다가 성교육을 하게 된 것인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짜증을 참기만 했던 페드로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흔들리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한 직후였다.

아르페시스는 아무런 말 없이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그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페드로 역시 첫 몽정 이후 기사도에 반하는 자신의 성욕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는 테노리엘 백작에게 위로받았고 그것이 부정한 일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확답을 받았다.

그 후 아레스가 직접 보내 준 밤 시중 시녀를 품으며 소년에서 사내가 되었다. 페드로는 그렇게 쾌락을 좇고자 하는 본능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법을 부친과 형제에게서 배우며 사내가 되었다.

그것을 인지하고 나니 짜증의 옆에서 동정심이 피어났다. 페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당연한 것을 알려 줄 형제도, 부친도 없이 홀로 끙끙 앓고 있는 아르페시스의 처지를 실감해 버렸으니까.

“사내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수치라 여기지 마십시오.”

“아…….”

얼빠진 태도의 아르페시스를 보고 있노라니 짜증은 그의 주변에 있는 성인 남성에게로 향했다. 근위 기사들은 대체 이것 하나 알려 주지 않고 뭘 했단 말인가?

아르페시스가 그들에게 꿈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데 페드로는 무조건 근위대를 욕했다.

“전하께서도, 저도, 그리고 이 땅 위를 밟고 사는 모든 인간은 그렇게 태어납니다. 남녀의 정사는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신성한 일입니다.”

“난…….”

“그런 신체 반응 자체는 수치스러운 것도, 파렴치한 것도 아닙니다. 쾌락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이지요.”

페드로는 황도에 있을 두 동생을 떠올려 보았다. 호적으로 따지면 아르페시스가 1년 늦게 태어난 것이 되지만 쌍둥이와 아르페시스는 같은 해에, 그것도 같은 계절에 태어났다. 그리고 쌍둥이는 벌써 이런 과정을 거쳤다. 아레스가 그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그가 두 동생에게 밤 시중 시녀를 보내 주기도 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아르페시스가 늦은 것이다. 열여섯이 끝나 가는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겪은 것이니까. 아마도 이런 쪽으로 눈을 돌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페드로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저도, 제 형님과 부친께서도, 이 땅 위를 거니는 수많은 사내들이 모두 거치는 과정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그런 과정을 거쳐 여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자랑스럽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짜증 나는 눈동자 색은 그대로였지만 아르페시스가 황제나 황태자와는 다른 인간임은 분명했다. 그들은 기사도에 반하는 신체 반응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약자와 여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텐데 무슨.

위축되듯 내려앉아 있던 아르페시스의 어깨가 조금 펴진 것이 보였다. 페드로는 자신을 주시하는 은회색 눈동자를 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밤 시중 시녀를 보내 드릴…….”

“필요 없다.”

페드로의 눈썹이 다시 삐죽 솟아올랐다. 단호한 거절 뒤에 따라붙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그녀뿐이다.”

침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물론 곧이어 고개를 갸웃거린 아르페시스가 내뱉은 말 때문에 아주 잠시간 지속되었을 뿐이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공격에 화가 난 페드로가 뚝뚝, 다시 목을 좌우로 꺾었다.

동정심이니 뭐니 알 게 뭔가. 아무리 남녀의 결합이 신성한 것이라지만 감히 한 여인의 오라비 앞에서 네 누이와 살을 섞고 싶다, 같은 말을 내뱉고 있는 놈은 죽어도 싸다. 그 누이가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아, 그러십니까?”

서늘한 청록색 눈동자가 아르페시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 * *

지휘권을 가진 기사들의 경우에는 초상화를 제작할 정도의 인상착의를 그려 수배가 가능하다. 그러나 몇만에 달하는 병사들의 인상착의를 모두 그리는 건 불가능한 일. 그에 현재 반군은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은 일반 병사들을 외부로 돌리며 식량을 조달하고 있을 것이다.

뒷골목 건달이나 창녀들은 호의를 베푸는 척 그들과 접선 중이고. 여기서 뒷골목 인사들의 역할은 주도자가 아니라 지지자였다. 반군처럼 앞장서서 황실에 반할 용기도,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대의도 품지 못할 하찮고 비겁한 존재. 하지만 황실의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는 반군의 용기를 지지할 만큼의 타협이 가능한 존재.

그들은 숙소를 제공하거나 검문을 피할 개구멍을 알려 주고, 맥주 한두 잔의 호의를 베푼다. 창녀들은 돈을 받지 않고 하룻밤 온기를 나눠 주기도 하고. 이러한 태도가 반군의 말단 병사들에게 잘 먹히고 있다. 그 덕에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반군과 뒷골목 인사들 간의 접점이 늘어난 상태.

그들의 뒤를 밟아 주둔지를 찾아내고, 그중 어디에 반군의 머리 역할을 하는 주동자가 있는지도 캐어 내야 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반군과의 제대로 된 성장이 가능해지리라.

「목표물 및 덤, 안전 이동 중.」

에스메랄다가 반군을 수색하고, 훗날 그들을 지탱하기 위한 상단 쪽 일에 주력하는 동안 라그나는 순조롭게 이동 중이었다. 그가 도착하면 제작해야 할 마도구의 광석도 마법 처리에 들어갔다.

에반스가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겨울 동안 버티기를 선택한 황태자 역시 그녀의 의도대로 연회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남부군의 주요 인사들에게 이미 연회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했으니 남부에 심은 독주머니는 라그나가 도착하기 전에 터져 그들을 병들게 할 수 있을 터. 그 일이 일어나면 봄이 찾아왔을 때 시작될 영토 탈환이 삐그덕거려 줄 테지.

에스메랄다는 라그나를 보호하고 있는 용병이 보내온 서신을 옆으로 치우고 깃펜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유려한 글귀가 쓰이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군사 용어, 부대 호칭 및 숫자, 변칙적인 버릇이 들어가는 단어들까지 모두 적어야 했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수십 장의 종이에 글을 빼곡히 적은 에스메랄다가 히나를 불렀다. 그녀의 책상 옆에 마련한 간이 책상에서 필사 연습을 하던 히나가 곧장 에스메랄다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턴 이 필체만 연습하렴. 흠결 하나 찾을 수 없도록 완벽히 숙지해야 한다.”

“네, 아가씨.”

“카의 달이 끝나기 전, 남부로 떠나야 할 테니 일정이 지체되지 않게 미리 준비해 두고.”

“……남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종이 뭉치를 집어 들던 히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남부에는 그녀의 원수인 황태자가 있으니까.

“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생각은 말거라.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보아 넘기지 않을 테니.”

“…….”

“누구도 볼 수 없게, 그날이 다가올 때까지 너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심연 속에 그 감정을 숨기렴.”

“……예, 아가씨.”

단단하게 맞물린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답은 무거웠다. 원수를 가까이에 둔 채로 다음을 기약한 채 물러나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옳다. 실패할 것이 분명한데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모든 것을 망치느니 속이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 지금의 에스메랄다가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복수를 하겠다는 이가 시간을 허비할 여유도 있어 보이는구나.”

에스메랄다는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히나를 힐난했다.

그녀들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길거리에 널린 부랑자나 평범한 백성이었다면 이런 대화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지 않은가. 철옹성 속에서 수만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이가 그녀들이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저렇게 시간을 흘려보낼 여유가 어디에 있다고.

히나가 꽉 깨문 입술 위로 핏방울이 맺혔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에게 위로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 검고 어두운 복수심에 눈먼 인간에게 그런 하찮은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수에 한발 다가갈 수 있는 채찍질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녀를 외면한 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전념했다. 머뭇거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베껴 쓰라는 압박이기도 했다. 히나가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 뭉치를 들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조금 전과 같은 시간이 길어지다 못해 계속 이어졌다면 히나는 뒤처졌을 것이다.

복수를 꿈꾸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감히 그 과실을 취할 자격이 있을까. 겉으로 복수를 부르짖으며 피를 토해 내는 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복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다.

절망과 슬픔에 취해 원망과 분노를 쏟아 내며 늘어져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감정에 발목 잡혀 주저앉는 대신 일어나 달릴 것인가.

히나가 자리로 돌아가자 에스메랄다는 곡물 상단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수입 곡물 시장부터 건드려놔야 편하겠지…….”

그와 관련된 상단의 정보들을 나열하는 것이 계획의 첫걸음이다.

3할을 움켜쥔 바란, 그보다 규모는 작으나 수입 곡물의 한 축을 담당하는 히사르, 제카, 테메프까지. 4개의 상단이 그 대상이었다.

북부와 동부 전체를 아우르며 활동하는 바란 상단은 솔루베르 공작가의 것. 활동 범위는 공작령의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7개의 남작가와 5개의 자작가, 도합 12개의 봉신 가문을 거느린 솔루베르. 그 가문의 영지는 동부의 북쪽과 북부의 남동쪽에 걸쳐져 있다.

“바란의 영역이 실테르와 롤베르만, 그리고 세튀스까지인가…….”

솔루베르의 바란은 2개국과 국경을 접한 영지의 특성과 혼인 동맹을 이용한 영역 확대까지 모두 마친 거대 상단이다. 세튀스 왕국과 국경을 접한 디오세네트 공작가와 2대 전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그 덕에 총 3개국을 활동 영역으로 삼을 수 있는 상황. 현 황후가 디오세네트 공작가 출신임을 감안했을 때, 같은 파벌 내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손을 잡은 셈이다.

“확실히 규모가 클 수밖에 없네.”

곡창 지대였던 남부가 마수들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후, 제국은 자국에서 소모하는 곡물을 모두 자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급한 대로 서부의 라그테스 공작령과 동부의 소템 백작령 등. 몇 개의 영지에서 산을 깎고 들판을 만들어 농작을 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상황.

그럼에도 후방국의 원조는 곡물보다 재화에 치중되어 있다. 굳이 비율로 환산하자면 3:7이다. 곡물보다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돈이 더 유용하니까. 덕분에 제국은 한 해 곡물 소비량의 5할 정도를 타국에서 수입해 와야 한다. 그 양을 방금 언급한 4개의 상단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아비체룬이 국경을 걸어 잠근 지금, 에렘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은 세튀스, 롤베르만, 실테르까지.

“랑뒤르 왕국도 있지만…….”

랑뒤르는 섬나라이고, 배가 필요한 상업은 여러 제약을 받는다. 선박, 항해로, 전문적인 선원, 그리고 항구까지. 자고로 항구는 바다 위에 만들어지는 법 아니겠나? 에렘 내에서 해안가를 접한 영지는 고작 3개인지라 쉽지 않은 영역이다.

에렘의 내지에는 어업을 할 수 있도록 깊은 강은 많으나, 남부를 제외하면 산악 지대가 주를 이루는 영토의 특성상 대형 선박이 오갈 만큼 폭이 넓은 강은 드물다. 그렇기에 선박 운송은 대부분 해안에서 대형 선박의 물품을 소형 선박으로 옮겨 이동해야 한다.

선체 하나를 더 가지는 건 상단에 큰 부담으로 돌아간다. 고로 남은 3개국과 모두 교역이 가능한 바란 상단이 수입 곡물의 3할 이상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들을 함부로 건들 수는 없다. 이번 대에 황실에까지 연을 댄 솔루베르를 도발했다가 일이 틀어진다면?

“주요 인물들이 솔루베르 공작가와 친인척 관계에 있어서 전면전은 힘들어…….”

타격을 받는 건 뒷배를 드러낼 수 없는 이쪽 상단이다. 그쪽은 확실한 준비를 마친 후 한 번에 공격해야 한다. 그러니 에스메랄다의 목표는 그 아래에 있는 3개의 상단. 그들이 외국을 통해 들여오는 곡물의 양은 수입 시장 전체에서 5할이 넘는다. 결국 바란 상단과 히사르, 제카, 테메프 상단이 제국의 외부를 통해 유입되는 곡물의 8할 이상을 움켜쥐고 있다는 말이다.

에스메랄다가 보고 있는 종이 위에 그들의 신상 명세가 기재되어 있었다.

「히사르 상단

- 상단주 : 라 에타 도미르베체 퓌니르(도미르베체 백작의 사촌 동생)

- 주요 인물 : 사 아그라 테뷔르 실리아(테뷔르 후작 부인, 도미르베체 백작의 동복누이), 사 에타 도미르베체 아리아나(도미르베체 백작 부인, 봉신 체손 자작가 출신)

- 활동 지역 : 제국 북부와 세튀스 왕국 남부 일대.

- 주요 취급 물자 : 밀, 견과류, 건과일.

- 주거래 지역 : 세튀스 왕국 남부의 카밀, 로드제타 백작령, 소밀 후작령.」

「제카 상단

- 상단주 : 사 테브라(벨베크 백작의 이복동생, 소템 백작의 매제)

- 주요 인물 : 바 에타 소템 로젤린(소템 백작 부인, 상단주의 손위 누이, 벨베크 백작의 누이)

- 활동 지역 : 제국 북부와 롤베르만, 실테르 왕국의 국경 일대.

- 주요 취급 물자 : 옥수수, 감자와 고구마 및 각종 구황 작물.

- 주거래 지역 : 롤베르만 서부 국경, 실테르 서부 국경에 위치한 도합 8개의 영지.」

「테메프 상단

- 상단주 : 사 아그라 테몬 랑그레니(테몬 후작가의 장남)

- 주요 인물 : 바 루그 세그라니 필립(테몬의 봉신 세그라니 자작), 바 아그라 테몬 아키세나(테몬 랑그레니 부인, 세그라니 자작의 쌍둥이 누이)

- 활동 지역 : 제국 북부, 랑뒤르 왕국 전역.

- 주요 취급 물자 : 일부 구황 작물 및 수수, 귀리, 호밀.

- 주거래 지역 : 랑뒤르 왕국 전역.」

대형 상단은 결국 귀족들을 뒷배로 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어느 평민이 힘 있는 귀족들을 제치고 타국의 영지와 거래를 틀 수 있겠는가.

현재 3개의 상단들이 연을 맺고 있는 고위 가문과 그들의 신상 명세, 사교계에서 교류하는 휘하 가문, 나아가 머릿속에 담겨 있는 그들의 정부나 첩, 자주 찾는 살롱이나 사치품을 위해 주로 거래하는 상단까지.

에스메랄다는 그녀가 정리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꺼내 들었다.

테메프 상단은 황도의 일이 정리된 후 루그레디안이 합류한다면 굳이 건들 필요가 없는 곳이니 우선은 미뤄 두어도 좋다. 만약 그곳을 건든다면 루그레디안의 합류가 어그러진 이후겠지.

에스메랄다의 기준에서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곳은 제카다.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의 법상 벨베크 백작가의 박해를 받고 자랐을 테브라. 그를 자극하는 건 탐욕과 보상으로 가능할 것이다.

반면 까다로운 것은 하사르 상단이다. 현 상단주 퓌니르는 도미르베체 백작과의 혈연이 공고하다. 그들은 사촌 형제이지만 현 도미르베체 백작과 퓌니르는 가문의 사내 형제가 그 두 사람뿐이었기에 우애가 남다른 편이다. 현 백작이 작위 계승권까지 가진 잠재적 경쟁자에게 봉신의 딸을 안겨 주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작위 계승권을 가진 경쟁자가 아닌 형제이자, 혈육임을 봉신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실제로 퓌니르는 현 백작과 함께 백작 성에서 기거하고 있을 정도다.

“이쪽은 이간질이나 배신을 유도하긴 힘들고…….”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제카 상단 쪽에는 회유를, 하사르 상단은 공격을 통해 상권을 빼앗아 올 생각이었다.

“우선 제카부터 해결해 보자고.”

벨베크 백작령은 북부, 솔루베르 공작령의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실테르 왕국과 물리적인 접점이 전혀 없는 가문이 실테르와의 무역을 틀 수 있었던 건 동부에 있는 소템 백작과의 연 때문이다. 벤자민이 있는 아브람 백작령의 바로 아래, 소템 백작령이 있다.

국경을 접하고 있지는 않으나 근방 영지라는 이점과 오랜 교류를 통해, 소정의 통행료로 국경 지역을 오갈 수 있는 상권 거래를 지속해 온 가문이 바로 소템이다. 즉, 현재 동부의 소템 백작가와 북부의 벨베크 백작가는 혼인으로 경제적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태다.

상단의 몰락을 바라는 게 아니니 가문 간의 거래는 유지해야 할 터. 그러면서도 상단주인 테브라가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들려면…….

“사생아는 참으로 다루기 쉽지.”

대체로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내고, 머리가 클 무렵에는 당연하게 직계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게 그들의 운명이다. 운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테브라는 운이 좋은 편이지만, 과연 그가 그것을 행운이라 받아들였을까?

만약에 말이다, 한평생 더러운 출생이라 비난받으며 자랐을 테브라에게 벨베크 백작의 사생아들에 대해 알려 주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존재다. 부친의 사생아는 경멸했으면서, 자신의 사생아는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품으려 들지 않은가. 만약 벨베크 백작이 본인들의 사생아를 냉대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은 자였다면 지금의 계획이 힘들었겠지만, 다행히도 에스메랄다의 기억 속에서 그는 본인의 사생아들에게 부정을 베풀던 귀족이었다.

“그 일 때문에 백작 부인과의 사이가 틀어졌었지.”

남의 자식 귀한 줄은 모르면서 본인의 자식은 귀하다 여기는 전형적인 인물.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강해 스스로의 소유라고 지칭되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유형이다. 에스메랄다가 보는 벨베크 백작은 소유욕이나 지배욕 같은 감정에 집착한다. 그녀는 기억과 기록을 더듬어 백작의 사생아들을 현실 위로 그려 냈다.

북부의 뒷골목이 해 줄 일이 생겼으니 지시를 내려야 할 터. 그녀는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게 당연할 만큼 오래도록 깃펜을 쥐었다.

사생아, 그 단어에 떠오른 은회색 눈동자를 애써 심연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 * *

북부의 용병단에게 벨베크 백작의 사생아들의 정확한 위치를 찾게 하고 그들의 생활환경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이후에는 히사르 상단의 상권을 강탈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일에 빠져 있었더니 페드로의 전언이 도착했다. 함께 만찬을 하자기에 에스메랄다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집무실을 나섰다.

식사 시중은 굳이 히나에게 받지 않기에 그녀는 집무실에 남겨 두었다. 일전부터 꾸준히 연습을 해 왔다고는 하지만 20여 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황태자의 필체를 다시 한번 검토하려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도 과하지 않다.

당장 만찬 이후 히사르 상단과 관련이 있는 두 명의 귀부인, 테뷔르 후작 부인과 도미르베체 백작 부인에게 덤터기를 씌울 준비도 해야 한다. 이후 그녀들이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을 때 상권을 빼앗아 오는 작업도 병행하려면,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중앙 관료 일부를 매수해야 하고.

예상 기간은 2년에서 3년, 함정을 파 두고 다른 가문의 상권을 강탈하기 위한 작업 때문에 피로가 가득했다.

“눈이 아파…….”

후에 있을 일을 위해 지금은 쉬어 줄 때다. 눈가를 문지르던 에스메랄다는 만찬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눈물 콧물 다 빼며 울고 난 후에는 사나흘에 한 번씩 이렇게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식사 시간 동안 눈의 피로를 풀고자 했던 그녀의 걸음이 멈춘 건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 때문이다. 식탁의 상석에 앉아 페드로와 대화 중인 아르페시스.

“혼자 생각을 하신다고 해결이 될 것이라 여기셨습니까?”

“그럼 그 얘기를 타인에게 했어야 한다는 건가?”

“전 알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건 경이 멋대로 알게 된 거지! 어떻게 내 입으로 그 얘기를 타인에… 아…….”

후다닥,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하리라. 그녀를 발견한 아르페시스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살짝 내렸다.

“여, 영애. 왔는가?”

“전하를 뵙습니다.”

페드로가 보낸 시녀는 아르페시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음에도 언급하지 않았다면 페드로가 입막음을 해서 보낸 것일 테고, 모른 채 용건만 전달했다면 그 역시 페드로가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일 터.

두 가지 경우 모두 페드로의 주도하에 아르페시스의 존재가 은폐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그의 이름을 들었다면 에스메랄다는 오지 않았을 테니까. 최악의 상황에는 페드로가 그녀의 심리 상태를 알고 있다는 가정을 해 두어야 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페드로를 힐긋, 살폈다.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네 오는 페드로의 모습은 꿍꿍이가 가득해 보였다. 그녀가 해 두었던 최악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전하께서도 식전이라 하시기에,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영광인 것을요.”

“다행이구나.”

에스메랄다가 착석한 후 뒤따라 앉은 아르페시스는 또다시 붉은 토마토가 되어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쉴 틈 없이 꺼내 보이는 감정을 외면했다. 심장의 울림까지도 함께. 제발, 어리석은 심장아, 주인의 말을 들어라.

“오, 오전에는 노, 놀라게 해서 미안했다.”

세상에, 아르페시스가 말을 더듬다니. 에스메랄다는 테이블 아래에 감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말 한번 붙여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감정이 길지 않은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탈하시니 다행이지요.”

“그래도… 그대가 바쁘다는 것을 아는데, 나 때문에 괜히, 괜히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그런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대체 이건 무슨 연극일까. 주변의 광경이 뱅뱅 도는 것 같았다.

만찬의 주인공들이 모두 착석하자 사용인들이 음식을 내어 오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가 식기를 들어 수프를 휘적거렸다. 에스메랄다 역시 수프와 함께 나온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거리기만 했다. 쓰디쓴 감정 때문에 입 안이 헐어 버린 것 같았다.

“양고기도 괜찮다 하셔서 전하의 식사는 제 것과 같은 종류로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내 것? 그럼 영애의 것은?”

“천사는 향이 강한 건 대체로 좋아하지 않지요. 양고기도 특유의 냄새 때문에 즐기지 않습니다.”

“아하.”

“한잔하시겠습니까?”

“와인? 음… 알코올은 다음 날 훈련에 지장을 준다고 하더군. 난 되었다.”

“저도 그 때문에 즐기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종종 마셔 주면 기분 전환이 되지요. 거절치 마시고 한번 마셔 보시기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페드로가 와인이라니. 에스메랄다는 일탈을 지속하는 페드로 때문에 골이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너무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일까? 페드로의 기행은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할 일이 태산인데, 이제는 하다 하다 함께 걷기로 한 페드로의 속내까지 캐 보아야 하나?

에스메랄다의 눈매가 미묘하게 가늘어졌을 때, 페드로는 이미 손에 와인잔을 쥐고 있었다.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르페시스의 앞에도 놓여졌고 말이다.

아르페시스는 태생적으로 술을 잘하지 못했다. 마시지 않는 버릇이 들어 더더욱. 페드로가 그것을 알 리는 없지만 술에 이성을 빼앗긴 아르페시스의 주정이 무엇인지 아는 에스메랄다는 이 불편한 자리를 빨리 벗어나기로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몫으로 나오는 음식을 비운 후 서둘러 돌아가자. 에스메랄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크에 찍힌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갔다.

“윽, 쓰군.”

“그럼 달콤할 줄 아셨습니까?”

그사이 아르페시스는 계속된 페드로의 권유에 기어코 와인을 마셔 보았다.

“책에선 그렇다고 하던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에스메랄다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황성에 가둬진 채 세상이 아닌 책 속의 지식만을 보고 자라 온 아르페시스의 말버릇 때문이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책에선, 글로 읽었을 때는, 같은 말을 해서 에스메랄다의 울화병을 키웠지. 아련하고, 또한 그리운 추억이 그녀를 찾아왔다.

“책 속의 글을 현실로 마주하시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요.”

아르페시스는 고작 한 모금을 마신 후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자리엔 물잔이 없었다. 보통은 두 개 모두 배치해 두거늘…….

에스메랄다는 이것 역시 페드로의 수작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도 물잔이 없었으니까. 어떻게든 아르페시스에게 저 와인을 먹일 심산인 거다. 그것을 깨달은 후 에스메랄다는 두 남자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도 식사에 박차를 가했다. 페드로의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이뤄지기 전에 이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쓰디씀이 달게 느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올 것 같진 않은데.”

와인잔과 페드로를 번갈아 보던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전하께서 아직 어리시니 그럴 수밖에요.”

“어리… 지는 않은데. 그대들은 내 나이를 알지 않나?”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의 눈치를 보면서 반문했다.

“평민들이야 황실의 발표대로 알겠지만……. 나는 곧 열일곱 살이 된다. 성년까지 고작 1여 년 남은 것을.”

“그건 내년이 되었을 때의 얘기지요.”

“……그건 그렇지만.”

“20대가 되어 보십시오. 10대 시절이 까마득한 애송이로 보일 겁니다.”

“애송이?”

에스메랄다는 없던 위통까지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런 대화를 왜 듣고 앉아 있어야 하나. 메인 요리가 나왔을 때도 두 사람의 이유 모를 괴상한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러는 와중 속이 탄 것인지 아르페시스는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페드로가 원한 대로 되어 가는 듯 보였다.

나이를 들먹이며 묘하게 애송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페드로. 에스메랄다는 물잔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주시하며 경계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메인 요리를 반쯤 먹었을까? 에스메랄다는 흠칫, 몸을 떨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몸에서 천천히 열이 오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혀를 동글게 말고 입으로 숨을 내쉬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숨결에 알코올의 향이 옅게 섞여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사나운 눈으로 페드로를 돌아보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먹은 음식에 술이 들어간 것이다. 향을 감추고 성분만 남겨 음식을 만든 것을 보니 페드로의 진짜 목적은 아르페시스가 아니라, 그녀에게 술을 먹이려던 것 같다.

아르페시스 쪽으로 그녀의 신경을 옮겨 둔 채 빈틈을 노린 페드로의 술수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음식에 술이 들어갔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에스메랄다는 식사를 관뒀다. 그리고 계속 물을 마시는 그녀의 그 반응에 페드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제국의 법은 미성년자에게 음주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대개 성년이 가까워지면 와인 한두 모금을 하며 술을 배우는 것이 에렘의 문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년에 가까워지면이다. 12세의 아이에게는 성장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술을 주지 않는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부모라면.

오늘 만찬 전, 페드로는 이미 사용인들에게 에스메랄다가 음주를 경험한 적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녀는 음식에 뭐가 들어간 것인지 너무나도 빠르게 눈치챘다. 그건 비정상적이지. 술이 뭔지 모르는 어린아이가 몸에 열이 좀 오른다고 해서 그게 뭔지 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페드로가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메랄다를 찬찬히 훑었다.

“본래 술을 마시면 이렇게 몸이 뜨거운가?”

그래, 저게 술을 처음 마셔 보는 이의 반응이지.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시종에게 물을 내어 오라 말하는 아르페시스와, 이미 물을 계속 들이켜며 체내에 들어간 알코올을 희석시키려고 하는 에스메랄다.

그녀는 대체 언제 술을 마셔 보았을까?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접시를 비우고 술기운이 돌면 은근슬쩍 조금 더 먹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술에 취한 에스메랄다에게 이것저것 캐 보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페드로는 더 이상 식사에 손을 대지 않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다른 쪽으로 손을 써야 할 것 같다. 페드로는 자신을 노려보는 에스메랄다에게 씩 웃어 주었다. 그의 속내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에스메랄다는 물잔을 비운 후 입을 열었다.

“전하, 아무래도 몸이 조금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찍 일어나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벌써? 몸이 좋지 않다는데 붙잡아 둘 수야 있나. 어서 올라가 쉬는 게 좋겠군.”

“감사합니다.”

시종으로부터 물잔을 받아 들던 아르페시스가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은 그런 아르페시스의 반응을 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페드로가 이상한 짓을 하고, 그 이상한 짓의 목표물이 누구인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이유는 아직 모른다지만 그렇다고 눈 뜨고 당해 줄 수야 있나. 페드로의 압박이 가해졌을 게 빤하니, 오늘의 만찬을 만든 주방장부터 불러올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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