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1화 (11/45)

제11장

흔적

대략 1만 마리가량이 집결했던 2차 전투는 수성이 아닌 난전으로 진행되었다.

첫 난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아르페시스와 함께 중앙군 인사들을 만난 직후 에스메랄다는 또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하루에 허락된 24시간 중 에스메랄다가 수면에 할애하는 시간은 4시간에서 5시간 사이다. 대부분의 식사는 주방장이 만들어 올리는 간편한 것들로 집무실에서 해결함에도 그녀에게 하루는 너무나도 짧았다.

뷔비르를 통해 관리하던 상단의 일을 직접 하는 것도 모자라, 황도 치안대에게 뇌물도 먹여야 한다. 치안대를 배치시킨 채 뒷골목의 싸움을 부추기고 그들을 집어삼켜야 하니까.

그리고 매일매일 쉬지 않고 올라오는 각 지역의 보고서를 훑어보는 것은 물론 재판 요청이나 분쟁 조정 등의 영지 업무도 해결해야 한다. 아비체룬으로 사람들을 보내 둔 것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숨소리도 죽인 채 기다려야 한다.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으니 당분간은 계속 이와 같은 기다림이 이어질 것이다.

그 외에도 남부에 있는 황태자를 방해하는 것도 해야 하건만……. 에스메랄다는 오래도록 글자를 헤집어 뻐근한 눈을 깜빡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머리가 깨지겠어.”

페드로가 말한 대로, 서부와 달리 남부군은 오래전부터 정규군이 설립된 채 틀이 잡혀 있는 상태다. 방해나 실수가 없다면, 그들의 경험과 실력으로 더 이상의 피해 없이 방어에 성공할 것이다.

리퀘나를 잃었으니 적극적인 공세는 힘들겠지만 지금은 겨울,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공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껍고 질긴 털과 가죽을 가진 대부분의 마수들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 약하다. 여름이 다가오면 마수들은 축 늘어진 채 겨우내 비축한 인간이나 식량을 먹으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기 마련이다.

물론, 건들면 반응하기에 그들이 차지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전투가 일어난다. 하지만 북상하기만 하는 겨울과 달리 여름이 되면 그들의 진군은 멈춘다. 그런 마수의 특성 때문에 현재 서부와 남부의 대처 방법이 다른 것이다.

서부는 중형 마수가 도착하기 전에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겨울임에도 진군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중형 마수까지 판을 치고 있는 남부는 겨울에 무리해 가며 진군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러니 남부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은, 겨울과 봄을 버티고 마수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하는 여름을 노려 최소한의 전투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최선을 황태자가 수용하느냐, 아니면 무리하게 전초 기지를 세우며 남하하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황태자는 미친놈이지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황족의 일원으로 능력을 갖추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머저리 놈이 그 능력을 발휘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에스메랄다는 그를 견제하거나 방해를 하기에 적당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놈이 출정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건만…….”

문제는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행할 수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탄 섞인 중얼거림이 집무실을 채웠다.

공식 서류에 사용되는 귀족의 인장은 마법 처리가 된 것으로 잉크에 마나를 심어 주는 역할을 한다. 마법 검열을 거쳤을 때, 인장을 사용해 찍힌 잉크에 스며든 마나의 양과 구조가 정확해야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황제나 황태자를 비롯한 황족과 모든 가주들이 사용하는 인장 마도구는 모두 그런 마법 처리가 되어 있다. 현재 에스메랄다가 사용하는 영주 대리의 인장도 마찬가지.

그 때문에 미래에서는 공문서를 위조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황실의 인장 마도구를 만든 후 은퇴한 마법사를 납치하는 데에는 시간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돈을, 그게 통하지 않자 협박과 고문에 노력을.

지금은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 낼 필요는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황실 인사들이 사용하는 인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마나 수식을 알고 있다. 그건 미래에서도 최상위 기밀로 다루던 정보였고, 루그레디안과 에스메랄다, 그리고 인장 마도구를 제작했던 라그나까지 단 3명만이 알고 있던 정보였다.

서류로 남기는 대신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는 머릿속에 넣어둔 채, 변질되지 않도록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기는 것으로 철저히 감추었다. 하지만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에스메랄다는 정작 인장 마도구를 만들지 못한다. 그게 지금 에스메랄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심장에 상급 마나 운용법을 새긴 그녀는 마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는 보유하고 있지만 마법사도, 기사도 아니었다. 그녀는 팔삭둥이의 미숙아로 태어났고, 그로 인해 심장이 타인보다는 조금 약했다.

병과 질환을 달고 살 정도로 허약한 것은 아니나 형제들처럼 심장 가득 마나를 담기는 힘든 체질이었다. 마나를 담아야 할 심장이 평범한 이들보다 약했으니, 거기서 마나를 꺼내고 훈련해 키울 수 있는 운용력도 대단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인장 마도구를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고 미래에는 그 일을 라그나가 해 주었다.

“라그나에게 인장 위조를 부탁하고 왔어야 했나…….”

기밀 중의 기밀, 그것도 황실이 걸려 있는 사항이라 완전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라그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황태자를 내보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급하지 않다고 판단했었다. 황성에서 나오지 않는 그들의 공식 문서를 가로채고 위조할 만한 여력도 아직 없었고.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해질 줄이야. 황태자의 출정이라는 변수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에스메랄다의 실책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라그나가 도착하는 즉시 그 인장 마도구를 위조할 수 있도록 광석을 기본 가공해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 하여 완전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잠시 홀로 생각을 곱씹던 에스메랄다는 날짜를 세어 보았다. 다가오는 카 67일은 황태자의 생일이다. 평생 동안 화려한 연회를 열고 여체를 품어 왔던 황태자이니, 작은 부추김만 있어도 에스메랄다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주겠지.

에스메랄다는 인장 마도구가 마련되기 전에 한 번 더, 황태자와 남부군의 사이를 이간질할 생각이었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사치와 향락에 젖은 황태자의 모습을 남부군에게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생각을 마친 에스메랄다가 다시 깃펜을 들었다. 평소보다 많은 글자가 빼곡히 들어간 서신에는 방금 생각해 낸 계획에 대한 지시는 물론, 지난날 반군의 가족을 처형한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까지 기재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의 아이답게 어느 순간 누구보다 맹렬히 타오르며 고귀해지기도 하나, 또한 악마의 속삭임에 휘둘리는 창조물답게 누구보다 비겁하고 잔혹해질 수도 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인간의 양면성을 이용해 그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녀는 반군의 가족을 처형하는 일로 남부군과 중앙군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골이 또 하나 생기길 바랐고, 그건 훗날 라그나의 도착 이후로 미뤄 둔 계획을 탄탄하게 받쳐 주리라.

이미 중앙군의 복장을 사칭해 탈영병의 가족들을 살해한 것 때문에 골이 있는 상황이다. 지금부터 할 일은 그 골을 더 깊고, 흉측하게 벌리기 위함이다. 서부의 악귀가 만든 서신은 전서구를 타고 날아가 그녀의 손발을 대신하고 있는 남부의 악귀에게로 향할 것이다.

“아가씨, 오늘이 16일째입니다.”

작성한 서신을 건네니 히나가 언질을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쯧.”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짧게 느껴질 만큼 바쁜데, 슬슬 뷔비르를 꺼내 줄 때가 된 것이다.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면 30분은 거뜬히 날아갈 터. 내일 새벽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할 듯했다.

* * *

아르페시스가 아스터를 비롯한 기사들과의 자리를 일찍 파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뻔히 다 아는 진실을 감추는 그들의 작태와 필요에 의해 그 거짓말에 속아 주는 척하는 모든 과정에서 정신적인 피로를 느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몇 시간 동안 난전에서 몸을 사용한 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육체의 피로 때문이었다.

출정한 본진 병력이 밤을 보낸 마을은 인간의 흔적이 핏자국으로만 남은 곳이었다. 치우기는 했지만 마을 곳곳에 피 냄새가 가득했다. 그것이 긴장감을 자극하는 바람에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정신도, 몸도 피곤하니 빨리 쉬고 싶을 수밖에.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에스메랄다가 그들이 할 말을 정해 주었고, 그것에 따라 앵무새처럼 말하는 그들과 오래 마주 볼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파한 후 침실로 올라온 그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밖에서 씻어 보았자 얼마나 깨끗하겠나. 검은 마수의 피와 먼지, 흙과 살점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기에 그것을 모조리 씻어 냈다. 그나마 그는 윗사람인지라 물로 씻기라도 했지 일반 병사들은 야전에서 천으로 대충 닦아 내는 것이 전부였다.

아르페시스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 씻고, 근육을 이완시키는 와중에 욕조 안에서 간단하게 요깃거리를 집어 먹었다. 이후 그가 욕실에서 나오니 시종이 말했다.

“아가씨께서 시녀들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시중을 드는 시녀와 시종들은 이미 10명이나 된다. 침구를 정리하고, 식사를 챙기고, 목욕물을 준비하거나 의복을 관리하는 이들까지. 모두 테노리엘이 그의 편의를 위해 보내 준 이들인데, 시녀들을 더 보낼 일이 뭐가 있다고? 설마…….

“……테노리엘 영애가?”

에스메랄다가 보낸 이들이 밤 시중을 드는 시녀인가 싶어서 아르페시스의 목소리가 살짝 굳었다.

전투 직후 피에 흥분한 사내들이 여인의 품을 찾는 일은 드물지 않다고 들었다. 그걸 알고 있는 소년, 그것도 2차 성징이 시작되어 혈기 왕성한 10대 후반의 소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했다. 그 무렵에는 모든 생각이 그쪽을 타고 흐르기 마련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몰라 굳어 있기를 잠시, 시종이 다시 한번 말했다.

“피로가 쌓이셨을 테니 안마를 받으신 후 수면을 취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

안마. 그 덕에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민망한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을 타인이 들여다보지 못함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혹, 다른 시녀를 원…….”

“아니다, 들여라.”

“예, 전하.”

뭐, 티가 나지 않게 숨기는 방법은 연습을 해야겠지만. 아르페시스의 단호한 거절 후, 시종은 더 이상의 말을 하는 대신 곧장 침실 문을 열었다. 여러 물건이 가득 올려진 트레이와 함께 시녀들이 아르페시스의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두 명의 시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고, 아르페시스는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침대로 향했다. 그에 시녀들도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향초를 피우고, 한껏 달군 돌을 담가 둔 물에 준비해 온 천을 적셨다.

은은한 향이 나는 향유가 그의 정신을 다독이고, 뜨거운 물에 담근 천이 그의 근육을 위로했으며, 시녀들의 부드러운 손길이 긴장감을 몰아냈다. 그렇게 온몸이 주물러지길 몇 분, 아르페시스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꿈은 이제 그에게 익숙하다 못해 당연해진 일이었다.

해가 진 시간,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과 웃음소리, 차가운 공기, 그리고 따끔한 통증.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 잠든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나 싶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고자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현실이라고 인지할 만큼 생생했다. 차가운 공기는 물론, 손에서 통증까지 느껴지니 어련할까.

그는 어느 순간 그것이 꿈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몸이 움직이는 대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그의 몸이 머리의 통제를 따랐다면 분명 그는 흠칫, 하고 떨었을 것이다. 손에서는 익숙한 상처와 함께 피가 나고 있었고, 몸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속이 울렁거리고 무언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역시 어디선가 느껴 본 감각이었다.

‘괜찮으신가요?’

그가 하얀 입김과 함께 거친 숨을 고르고 있던 그때,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하얗고 작은 손이 붉은 피로 얼룩진 손에 닿았다. 그는 그 손을 거칠게 쳐냈다.

‘걱정이 되는 마음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손을 벗어난 시야가 누군가를 담았다. 금발, 녹안, 단 하나의 보석도 없었지만 자수만으로도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드레스.

아르페시스는 잠시 멍해졌다. 에스메랄다였다. 그녀가 왜? 지금 여기가 어디기에?

멍한 머릿속과 달리 몸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왜 그녀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거지?

‘누구냐.’

‘인사가 늦었습니다.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가 인사 올립니다.’

치맛자락을 잡은 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무릎을 굽혔다.

‘테노리엘의 인사들이 암살자마냥 살금살금 다가오는지 몰랐군.’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가득한 적대감과, 한껏 날이 선 말투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내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목소리였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이런 적대감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아르페시스는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얼마 전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에 입었던 연미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때부터 혼란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 오늘 입은 게 아니라? 얼마 전에 입은 것을 왜 지금 또다시 입고 있나? 자신의 착각인가?

‘……지만, 생각이 깊으… 기다리던…….’

‘피가… 걱정이… 건을…….’

‘그곳에 가셔야…….’

‘……라고? 반쪽짜리 황자가 무엇… 아니면, 조롱을… 것인가?’

‘죽기 위해 태어난… 재밌…… 모르겠군.’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웅웅, 끊기기 시작했다. 그 스스로가 하는 말도 중간중간 끊어지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야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번진 물감처럼 일그러지거나, 긁힌 자국이 난 것처럼 드문드문 빈 곳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끊어지던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강렬해지고 시야에 보이는 장면들 역시 그림으로 그려 낸 것처럼 선명해졌다.

‘그럼 거래는 어떠신지요?’

짜증이 날 정도로 변덕스러운 현상 속에서 간절한 미성이 들렸다.

‘그곳에 필요하지 않은 저를 대신해서 그들을 살려 주신다면, 저는 전하께서 살아남으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진정으로 그것 하나만을 바랍니다.’

작은 손이 아르페시스의 손에 손수건을 감아 주었다. 따듯했다.

‘에스메랄다.’

‘오라버니.’

분명히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아레스였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본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처음 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젠가 성벽에서 보았던 잔잔한 미소가 아니라, 바의 햇살처럼 화사한 그런 미소였다. 아름다웠다.

아르페시스는 그 미소에 홀린 채 에스메랄다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추측대로 아레스였다.

‘테노리엘의 아레스가 인사 올립니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니.’

‘네가 안 보인다고 페드로가 황성을 들쑤실 기색이다. 돌아가자.’

아레스가 어서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스메랄다의 저 아름다운 미소를 당연하게 가진 그는 어떤 기분일까?

아르페시스는 단 한 번도 저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받아 보지 못했기에 저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아레스가 부러웠다. 그래, 부러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그의 아래에서 다시금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만남이 불쾌하셨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하나 부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의 청에 대해 고심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스메랄다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녀를 잡아 세워 왜 자신을 모른 척하냐고, 방금 그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거래는 뭐고, 그들은 누군지, 자신이 살아남게 돕겠다는 말은 또 뭐냐고.

그리고……. 자신에게도 아레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웃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손을 뻗는 대신 멀어지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몸은 머리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는데 곤하지는 않고?’

‘네, 괜찮아요.’

침묵하는 그와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아르페시스는 아레스가 그녀를 안아 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상처를 덮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갑작스럽게 눈앞에 보이던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헉……!”

식은땀이 체온을 앗아 갔다. 벽난로에서 타들어 가고 있는 불꽃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텅 빈 침실 속에서 일렁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체온이 떨어진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이 낯선 침실은 대체 어디지? 왜 자신이 여기에 누워 있단 말인가? 분명 조금 전에 에스메랄다와 아레스를 만났는데…….

황태자의 약혼 축하 연회에서 황제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 속이 거북해졌었다. 그래서 바람을 쐬기 위해 후원 쪽으로…….

“아……?”

아르페시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니다. 그날의 일은 몇십 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 여긴 테노리엘 영주 성이고…….

방금 그것이 꿈이 맞는지, 아니면 현실이었는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지나칠 정도로 모호했다. 조금 전까지 그게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지나치게 생생했다. 지금도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밖에…….”

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를 쥐어짰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 목소리가 노성으로 변하자 침실 문이 열리며 시종이 들어왔다. 그의 야간 시중을 위해 대기하는 시종, 레오였다.

“부르셨습…….”

“오늘, 오늘이 며칠이지?”

“……카 59일입니다. 새벽 4시쯤 되었습니다.”

그는 카 57일 정오 무렵에 출전, 58일 해 질 녘에 테노리엘 백작 성으로 귀환했다. 그제야 시녀들에게 안마를 받던 중 잠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무언가 필요하신지요?”

“아니… 아니다. 나가 보라.”

아르페시스가 손을 휙 내저었다. 레오가 나간 직후, 그는 침대에 앉아 앓는 소리를 냈다. 마치 정말 그곳에 서 있다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꿈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그날 에스메랄다를 만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후원에서 만난 건 아레스뿐이었고, 에스메랄다는 복도에서 우연하게 조우했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 전 그 꿈은 뭐란 말인가? 비슷한 상황이 미래에 일어나나?

서부에서의 일이 끝나면 곧장 남부로 갈 줄 알았는데? 황성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미성년자 출정 금지법을 폐지하는 데 성공한 황제가 그를 다시 황성으로 불러들일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틀린 추측인가? 황성으로 돌아가나? 아르페시스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날 연회에서 손톱이 파고들었던 상처는 이미 희미해져서 흉터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가 아무리 필요에 의해 족보에 올랐다고는 하나, 황자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뒤에서 하는 쑥덕거림이 있을지언정 그의 앞에 선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다.

그는 제왕학을 제외한 모든 교육을 최고의 것으로 받았다. 황족만이 사용하는 마나 운용법, 검술 훈련, 그리고 전략, 전술 교육까지. 그런 그가 연회에 같은 옷을 입고 나갈 리가 없다. 소모품에 불과한 그에게 그 정도 돈을 써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황실의 부는 거대하니까.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손의 상처와 익숙하던 옷은 또 뭐고? 그는 한참 동안이나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에 잠겼지만 답은 찾지 못했고, 그럴싸한 추측도 내놓지 못했다.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탁자에 놓인 물을 마시고 나니 자신의 몸이 차게 식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사이 축축했던 감각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식은땀이 전부 마를 만큼 긴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그는 벽난로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옷 방으로 향했다. 답답한 마음에 정원이나 연무장 쪽을 걸으며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외투를 걸치고 침실을 나서니 문 앞에 서 있던 레오가 따라붙었다.

“따라올 것 없다.”

그에 레오는 두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아르페시스는 중앙 계단까지 빙 돌아가는 대신 본성의 입구와 가장 가까운 측면 계단을 이용하기 위해 복도를 따라 걸었다.

텅 빈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밟아 내려갈 무렵, 새벽의 적막이 깨졌다.

“또 문제를… 어떻게… 까? 차라리… 이로 구하…….”

“……것도… 가르치려면… 잖니.”

모시는 이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할 사용인들조차 보이지 않는 시간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시스는 밟고 있는 계단이 끝나기 전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조금 전 꿈속에서 들었던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낯선 사내의 것과 함께였다. 페드로의 것도, 집사의 것도 아닌 낯선 목소리. 대화 사이사이로 가볍고 무거운, 극명한 차이를 가진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섞여 들었다. 거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쓸 수 있는 만큼은 써야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만…….”

대화가 선명해졌다. 아르페시스는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꽤나 떨어진 중앙 계단 쪽도, 맞은편의 또 다른 측면 계단도 아니다.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것이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이번 일로 철이 좀 들었겠지. 당분간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어련히 알아서 바꿀까.”

“네, 알겠습니다.”

무슨 대화지? 아르페시스의 고개가 목소리의 행방을 쫓아갔다. 측면 계단 아래,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좁은 복도에서 소리가 울리듯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왜 저곳에?

귀족과 그들을 모시는 사용인, 두 분류는 같은 건물에 기거하더라도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다. 거닐 수 있는 복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닿아 있는 저 좁은 복도는 귀족이 아닌 사용인들이 다닐 법한 가려진 길이다. 그것도 근접 시중을 드는 시녀나 시종도 아니고,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나 하인들이 밟는 곳 말이다.

주로 지하의 식자재 창고나 소모 물품, 사용하지 않는 가구나 시트 같은 것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니 확실하다. 오래된 고성의 경우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지하 감옥 같은 게 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에스메랄다가 왜 저쪽에? 라는 의문을 느끼는 사이 복도를 빠져나온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본성의 입구에서 열댓 걸음 떨어진 홀의 가장자리에. 어둠을 거부한 채 평소처럼 반짝거리는 금발과 어둠에 순응하여 본연의 색을 알 수 없는 머리카락.

아르페시스의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에스메랄다의 주변에 있는 이들을 모두 한 번은 보았다. 지척에서 귀족을 보필하는 전속 시녀나 시종은 그들의 손발이니 함께 다니는 것을 목격하기 쉽다. 집사나 시종장, 시녀장 같은 책임자들은 성이나 저택에 발을 들이는 순간 소개받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저 사내는 처음 보았다. 에스메랄다가 그를 대하는 말투는 격식이 없었다. 조금은 신경질적이기도 했는데… 짜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말에 담아낼 정도로 그들의 사이가 가깝다는 의미인가? 그렇게 가까운 인물을 왜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누구기에?

아르페시스가 처음 보는 사내는 무언가를 짐짝처럼 둘러메고 있었다. 곡물 포대 같기도 하고, 천 더미 같기도 하고…….

“다녀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구나. 내가 시킨 일이라고 해도 훈련에 늦으면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터, 서두르렴.”

“……예, 아가씨.”

훈련? 오라버니라면 페드로? 그의 종자인가? 그렇다면 저 사내의 훈련을 페드로가 봐 주는 것은 이해가 된다. 기사는 거느린 종자들의 스승이 되어 주어야 하니까.

아르페시스가 알기로 페드로는 차석 지휘권까지 가졌던 상급 기사이니 종자를 3명까지 들일 수 있었다. 중급 기사는 2명, 평기사는 1명의 종자를 받을 수 있는 게 에렘의 군법이었다.

하지만… 저 사내가 페드로의 종자라면 왜 에스메랄다와 함께 있는가? 기사도 아닌 종자가 가문의 아가씨와 함께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그는 에스메랄다와 아직 어떤 관계도 형성하지 못했는데, 저 이름 모를 사람은 그녀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르페시스의 미간이 희미한 굴곡을 그려 냈다.

사내가 본성의 입구로 나서는 모습을 바라보던 에스메랄다가 몸을 돌렸다.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관찰하던 그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단의 아래를 지나치려 하자 인기척을 내었다.

“흠.”

얕은 헛기침에 에스메랄다의 고개가 인기척이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둠을 더듬는 녹안이 섬뜩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긴장했다.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그녀를 마주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놀랐다면… 미안하다.”

“……전하를 뵙습니다.”

에스메랄다가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를 건네었지만 아르페시스의 긴장감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르페시스의 뒤쪽과 본성의 입구를 훑은 후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 사소한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확인한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방금 나간 그 사내를 보았는지, 보지 못한 것인지 그것을 확인했다. 마치… 그가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혹여 불편한 것이 있으셨습니까?”

그리하여 이리 이른 시간에 깨었냐는 의미였다. 주인은 손님이 편하게 지내도록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나온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다, 그저…….”

일찍 깬 이유라면…….

“그저 꿈자리가 조금 사나웠을 뿐이다.”

“하나 곤하실 텐데 더 쉬지 않으시고요.”

“무얼, 어제 만찬을 들고 바로 잠들었는데. 이리 오래 잔 건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다.”

이른 시간에 깨기는 했지만, 잠든 시간 역시 일렀기에 평소보다 푹 잔 상태였다.

아르페시스는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와의 물리적인 거리를 줄여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영애는 이리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인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조금 서둘러 보았습니다.”

덤덤한 표정, 평의한 어조. 아르페시스가 계단을 모두 내려와 홀을 밟는 순간 그녀의 대답이 끝났고, 동시에 그의 걸음도 멈추었다. 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그녀에게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어 버린 선 때문에.

조금 전 에스메랄다의 대답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할 일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이건 감추는 대화였다.

그는 귀족들이 말하는 우아한 화법, 그리고 골머리가 아픈 수 싸움이 끼어드는 대화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을 싫어한다는 말이 두 가지를 아예 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렵고 불편하지만 정말 최소한은 할 수 있었다. 평생을 황성에서 자랐으니까. 이런 식으로 정확한 언급을 피하며 모호하게 말을 하는 건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기에 행하는 화법이었다.

아르페시스의 입꼬리가 굳었다. 조금 전에는 그토록 따스하게 다가와 주었으면서. 손에 난 상처를 안타깝게 봐 주고 손수건을 매어 주었으면서.

순식간에 그런 생각과 함께 억울함, 섭섭함… 그리고 상실감을 느꼈다. 당연하게 손에 쥐고 있어야 할 무언가를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을? 아르페시스는 억지로 숨을 골랐다. 그건 현실이 아닌 꿈이었고, 그녀는 예의 바르게 굴지언정 친근하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

호위 기사 건으로 그녀가 추가 사병을 내어 주었지만 페드로가 말한 ‘기꺼이’의 의미는 그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이유였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황족과 귀족, 그 이상의 연결점은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그것을 깨달았다 하여 충격받을 이유가 없는데……. 어째서 이토록 입 안이 쓰고 허탈할까.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자신의 옷에 머무는 것을 보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그어 둔 선을 넘어가고 싶었다.

“많이 바쁜가? 난 산책을 나갈까 하는데… 함께 걷겠나?”

거절이 아니라 승낙을 받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로부터 어떠한 답도 듣지 못했다.

“천사야.”

그녀가 답하기 전에 타인이 끼어들었으니까.

* * *

겨울의 해는 짧다. 세상에 어둠이 창궐하는 시간이 길다. 그 어둠 때문에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르페시스를 보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의 주인이 그라는 것을 확인한 직후, 에스메랄다는 자리를 빠르게 벗어날 생각이었다.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함께 있던 시리스가 누구인지, 그가 뭘 들고 있던 것인지 같은 질문이 나오면 곤란했으니까.

타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자신들이 움직이는 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터. 그렇다면 시리스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았을 것이고 시리스가 짊어지고 있던 포대 역시 보았겠지.

그 안에는 보름이 넘도록 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뷔비르가 들어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음에도 전부 토설했다.

그 마법사를 죽이려다 실패했고, 대신 죽인 것으로 한 후 놔주면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입을 다물고 살겠다고 해서 놔주었단다. 그걸 받아서 다른 곳에 재투자를 해 불리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던가?

그저 딴 주머니를 채우고 싶었던 것이면서 거짓말을 하는 그 노력만큼은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아주 적당한 교육을 시작했고 오늘 새벽 끝을 내었다. 그런데 하필 뷔비르를 꺼내 주는 그 장소, 그 시간에 아르페시스가 나타날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타인에게 보여 좋을 게 없는 광경을 아르페시스가 목도한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가 오늘 본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많이 바쁜가? 난 산책을 나갈까 하는데… 함께 걷겠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르페시스가 함께 산책할 것을 권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상황, 그의 청을 거절하고 서둘러 집무실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스스로를 인지하고 난 이후 복잡하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휘둘리듯 그를 따라나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답을 꺼내기 전 기회를 빼앗길 수 있었다.

“천사야.”

그 부름과 함께 중앙 계단에서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이는 훈련복을 걸친 페드로였다. 그는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것일까.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경도 일찍 일어났군.”

“종자들의 훈련이 곧 시작되는지라 서둘렀습니다.”

싱긋 웃은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매번 물어보지만, 오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거니?”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얕은 한숨을 내쉬며 뺨을 내민 그에게 답례를 해 주었다.

“네 나이에 일어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야. 충분히 자지 못하면 키가 크지 않는단다.”

“충분히 자고 있어요.”

페드로는 설핏 웃으며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지적했다.

“정말이지, 왜 이리 능숙한지.”

입을 꿰맨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충분히 자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으니까.

“또 벙어리가 되었구나.”

한숨과 함께 시작된 그의 투정은 길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페드로의 앞에서 침묵으로 시선을 피했다. 곁에 떡하니 서 있는 아르페시스에게 자꾸만 신경이 쏠렸다.

“조금 전 나간 건… 시리스구나.”

굳이 아르페시스가 있는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페드로가 왜 이럴까? 에스메랄다의 미간에 작은 홈이 생겼다.

“시리스가 짊어지고 나간 건 포주 놈이지? 네가 구속구를 채웠던 그놈 말이다.”

“……오라버니.”

이미 뷔비르를 고문하던 것을 보았던 페드로다. 그를 지하 감옥에 가둘 때도 함께 갔으니 알아차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금 전에도 언급했듯이, 굳이 아르페시스가 있는 곳에서 그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오늘의 페드로는 다정한 오라비 대신 능글맞고 잔꾀를 부리는 오라비가 될 생각인 모양이다.

“보름쯤 되었나?”

“오라버니.”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식사량을 줄였을까? 그렇다면 체감은 보름 이상이었겠구나. 미치지 않았으니 꺼내 준 것이겠지? 아직 쓸 수 있겠더냐?”

페드로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에스메랄다는 그의 이질적인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그녀의 미간에 파였던 홈이 완연한 굴곡을 그리며 깊어졌다.

“조금 전 그대와 함께 있던 사내가… 시리스라는 자인가?”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를 흘겨보며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답했다.

“예, 전하.”

“……누구기에?”

포대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 아르페시스의 반응이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튀어나왔다.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의 그는 인간이 가져야 하는 도덕을 이론으로만 배운 상태다. 책 속의 지식을 세상의 것이라고 알고 나쁜 짓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시기. 지금의 그는 살기 위해 악행이 필요한 순간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소년이다. 그가 그 사실을 실감하고 인지하는 건 전선에 발을 들인 다음이다.

아직은 그에게 배신을 사전에 차단하는 행위보다 도덕적인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미쳐야 한다. 교류 초반에는 그의 천성적인 선함 때문에 답답해서 울화병이 날 정도였으니까. 성년을 갓 넘긴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책에선 그러면 안 된다고 했는데…….’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런데 왜 악행이라고 봐야 할 고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을까. 에스메랄다는 아직 확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가 기억을 가졌음에도 변해 버린 미래에 대해 파헤치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변해 버린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도 함께 변하는 것인지…….

지금의 행동은 그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저울추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고용한 용병입니다.”

“용병? 꽤나 친근…….”

“옷이 얇구나.”

아르페시스의 추가적인 질문을 막은 것은 페드로였다. 제 입으로 시리스의 얘기를 꺼냈으면서 막는 것도 스스로 하고 있다. 그 이중적인 행동에서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의도를 읽었다. 그는 지금 여기서 그녀를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이곳에 있으면 계속 시리스를 언급할 것이고, 자리를 비우면 방금 스스로 질문을 차단한 것처럼 입을 다물겠다고. 위협적이지는 않으나 신경 쓰이는 협박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미소를 짓고 있는 페드로를 흘겨보았다. 이 얄미운 오라비를 믿어야 하나?

“집무실에 벽난로는 지펴 놓았니?”

“……네, 히나가 먼저 들어가 있을 거예요.”

“감기에 걸리기 전에 올라가 보렴. 찬 바람을 오래 쐐서 좋을 게 없다.”

아르페시스와 굳이 불편한 대화를 지속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이해는 할 수 없지만, 빠져나갈 길을 만든 채 그녀를 몰아내고 있는 페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계속 있다간 페드로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모르고, 페드로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르페시스에게 휘둘릴 뻔한 스스로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올라가 보려고요.”

조금 전 함께 산책을 하자고 권했던 아르페시스에게 하는 답이기도 했다.

“그럼 전하,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아르페시스가 페드로를 흘겨보았지만 에스메랄다는 괜한 생각을 머리에서 털어 냈다. 올라가 할 일이 한가득이다. 그녀는 두 사람을 등지고 중앙 계단 쪽으로 향했다.

* * *

에스메랄다는 고용한 용병 중 마나를 다루는 인원이 총 92명이라고 했다. 일부는 그녀에게 합류하기 전부터 마나를 다루던 이들로 도합 51명이 중앙군, 혹은 황실 기사단 출신이다. 평민 출신에게는 에스메랄다가 진즉에 마나 운용법을 제공했다고 들었다.

92명의 인원 중 일부는 아비체룬의 일로 국경 마을에, 일부는 제국 각지에 숨겨진 광산이나 주요 인물 호위에, 또 각지에서 양성 중인 세작 교육에 투입된 상황.

실력이 좋은 이들 순으로 내보냈으니 영주 성에 남아 있는 이들은 시리스와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에스메랄다에게 합류한 후 마나를 익힌 자들이다. 그녀는 현재 안전한 영주 성 내부에 있으니, 밖에 나가 임무를 수행할 이들에게 더 신경을 쓴 것이다.

며칠 전부터 성내에 남아 있는 이들의 훈련을 총괄하고 있는 페드로의 일과는 일찍 시작된다. 그들이 나오기 전, 더 이른 시간에 시작되는 종자들의 훈련까지 봐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홀의 가장자리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페드로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아르페시스에게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다. 생각은 며칠 전부터 했지만 아르페시스가 출정을 해 버리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일과를 시작하자마자 그를 마주치다니, 일진이 좋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에스메랄다를 쫓아내야 했다. 그녀가 거북해하는 일을 부러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페드로의 손아귀에는 아르페시스의 어깨가 떡하니 잡혀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걸음을 돌리자, 저 역시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며 밖으로 나가려던 그를 잡았으니까. 페드로의 시선이 자신에게 붙들린 채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르페시스에게로 흘러갔다.

이 소년은 대체 뭘까? 드러난 관계라면 어떻게든 소문이 났을 것이고, 에스메랄다보다 사교 행사에 드나드는 일이 많았던 페드로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감춰진 관계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어떻게 파헤치나? 고민할 것이 어디 있나. 있는 그대로 떠보면 되지.

“천사와는 무슨 관계이십니까?”

“관계?”

“혹시 영지로 오시기 전에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런 것을 물어보지?”

페드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윽…….”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통증으로 인해 살짝 일그러졌다. 페드로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만나신 적이 있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내가 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답해 주시면 저도 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에스메랄다가 사라진 방향을 힐끔거리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페드로는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은회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역겨운 색,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품은 색을 그렇게 평했다.

옅은 청색 머리카락에 붉은 기가 감도는 자색 눈동자를 가진 황태자는 황제보다 디오세네트 공작가 출신의 황후를 더 많이 닮았다.

반면 2황자 아르페시스, 그의 모친은 대외적으로 한미한 자작가 출신의 황비이다. 진실과는 다르지만 표면적으로. 반쪽짜리라는 수군거림과 달리 적통인 황태자보다 더 황제를 빼닮은 게 눈앞의 소년이다. 짙은 남청색 머리카락에 희미한 광채가 맴도는 은회색 눈동자. 선명한 이목구비와 곧은 눈썹, 유려한 눈매, 날카로운 턱선까지.

아르페시스의 모든 것은 황제를 닮았다. 나이 있는 귀족들은 그를 두고 황제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다며 수군거릴 정도니 누가 봐도 부자지간임을 알 수 있는 외관이었다.

다행히도 페드로는 부친의 죄를 아들에게까지 물릴 정도로 치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덕에 아르페시스의 눈동자를 역겹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라는 사람 자체를 역겨워하지는 않았다. 아르페시스가 황제에게 낳아 달라 간청한 것도 아니니 그에게 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뭘… 답해 주겠다는 것인가?”

머뭇거림이 담긴 아르페시스의 물음에 페드로는 즉답을 꺼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아르페시스의 어깨를 다시 붙들고 있었다.

“전하께서 궁금해하시는 것 말입니다.”

묘하게 시리스를 신경 쓰는 듯 보였던 아르페시스다. 에스메랄다가 이토록 이른 시간에 따로 만나는 사람. 그녀가 가볍게 언급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려 했겠지.

“그 시리스라는 용병과 테노리엘 영애가… 두 사람의 친분이 깊은가? 꽤나 신임하는 자 같던데… 이런 시간에 함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역시나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내민 미끼를 냉큼 물었다.

“예, 천사가 꽤나 아끼는 놈입니다. 쓸 데가 많은지라.”

“아낀다고?”

저 꺼림칙한 표정을 보라. 페드로는 어느 기점부터 에스메랄다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 아르페시스가 거슬렸다.

첫 출전 이후, 그래, 첫 출전에서 돌아온 날부터 저 역겨운 눈동자 속에 선명한 호감이 피어올랐다. 페드로는 지난 오후 에스메랄다를 졸졸 쫓아다니던 은회색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꼴에 눈은 높아서. 그게 페드로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문장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시선을 떼지 못한다거나, 혹은 그가 3년 내내 보지 못했던 미소를 너무나도 쉽게 이끌어 낸 것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질투가 아니라 거슬림이다. 그럴 뿐이다. 정말이다.

“이제 제 차례입니다. 영지에 오시기 전에 제 천사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입이 열리기 전 답을 알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표정을 감추지 못한 덕분이다. 직접 대답을 듣기도 했고.

“한 번… 아니, 아마도 두 번? 만났다기보다는 본 것이지만…….”

이건 과연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인가?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답을 파고들었다.

“언제,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한 번은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에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페드로를 힐끔 훑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날 그대와 함께 있던 게 그녀라면, 두 번째는 광장에서.”

그렇다면 두 번 중 한 번은 접촉조차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페드로는 그때 아르페시스가 에스메랄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직접 차단했다. 그럼 연회 당시 무언가 대화를 나눈 것인가, 싶다가도 페드로는 부정의 답을 꺼냈다. 오멘과 페르멘에게 간략하게 들은 게 다지만 에스메랄다가 도중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는 건 안다. 따로 대화를 나누었을 리 없다.

“다른 교류 같은 것도 전혀 없었습니까? 서신을 주고받았다거나…….”

“테노리엘의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 없지 않은가.”

페드로는 조금 언짢음이 서린 아르페시스를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익명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수상한 짓을 했다가 전선에 나가기도 전에 죽어 나가게?”

하긴, 누군지도 모르는 이와 비밀스럽게 교류를 하다가 황제의 눈에 띄었으면? 그것도 그 익명의 주인이 테노리엘의 직계였다면?

황제는 그것을 반역의 기미로 보고 아르페시스를 전장에 내보내기 전 치웠을지도 모른다. 아르페시스가 황실의 족보에 오른 이유가 훗날의 ‘전사’를 위해서다. 그로 인해 황실이 얻는 이득이 아르페시스를 필두로 한 반정 세력의 성장을 감내할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지금 눈앞에 아르페시스가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그가 황제의 의도에 맞춰 바짝 몸을 낮춘 채 살아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페드로는 미궁에 빠진 의혹을 붙들고 생각을 곱씹었다. 관계가 쌓일 여지가 없는데 왜 에스메랄다가 그와 관련된 일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일까?

그가 자극을 좀 했기로서니 아르페시스에게 호위를 대뜸 내준 것 역시 이상했다. 황제의 인사들을 치우려고 굳이 그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뒤에서 해 온 일들을 알게 된 후 페드로가 느낀 점은 그녀가 굉장히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혹여나 황제가 기묘한 공격을 해 오는 세력을 인지하더라도 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추적할 수 없도록.

그런데 아무리 난전이라도 그렇지,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근위대를 제거하다니. 그들이 먹는 음식에 마나를 엉키게 만드는 독을 타 전장에 내보내면 알아서 자멸할 텐데 왜 그런 것일까? 페드로가 파악한 에스메랄다의 행보와 다르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곳에서 어쩔 수 없는 사고처럼 슬쩍 목표물을 제거하는 건 그녀보다는 페드로가 취하는 방법이었다. 아르페시스에게 호위를 붙여 주고 겸사겸사했다면 모를까, 주도적으로 그것을 목표로 하고 호위를 차출해 주었을 리는 없다는 것이 페드로의 견해였다.

“정말 그 아이와의 접점이 전혀 없으셨습니까?”

“없었…….”

포기하지 않는 자는 뭐라도 해내기 마련이다. 페드로 역시 쉽사리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신경질적으로 답을 꺼내려던 아르페시스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벙긋거렸다. 뭔가 있긴 있군. 페드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재촉했다.

“무엇입니까?”

“……별것 아니다.”

그렇게 답하려거든 애초에 틈을 보이지 말았어야지. 페드로는 눈앞에 나타난 흔적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질문은 하나밖에 하지 않았으면서 정작 받는 질문은 몇 개가 되든 전부 답하고 있다니, 순진하다 못해 단순하기까지 했다. 에스메랄다가 이 얼빠진 놈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면 싶었다.

“무엇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윽… 이것 좀 놓고 말하라!”

아르페시스가 페드로의 손을 어깨에서 털어 냈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토록 쉽게 빠져나가다니.

페드로는 새삼 자신이 잡았던 아르페시스의 어깨가 그 나이 때의 종자들보다 넓고 단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거슬림을 살짝 거두고 약간의 호감을 가져 줄 수 있다. 마수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무인이란 존중받아야 하니까.

뭐, 그 호감이 도주를 용납해 줄 정도는 아니었기에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페드로는 아르페시스의 도주로를 차단하듯 그의 앞을 막고 섰다.

“놔드렸습니다. 이제 말씀하시지요. 천사와 무슨 접점이 있으셨습니까?”

“접점이라기보다는…….”

아르페시스는 난감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며 망설였다.

“꿈을…….”

꿈?

“몇 년 전부터 꿈을 계속 꾸는데 거기에…….”

아르페시스가 말을 하다 말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

일을 무마하려고 구는 아르페시스의 태도에 페드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르페시스에게는 안타깝게도 페드로는 이런 상황에서 모른 척 일을 덮어 줄 만큼 무르지 않았다. 그게 에스메랄다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던 아르페시스가 다시 페드로의 손에 붙잡혔다.

“뭐냐고 물었어.”

겉으로나마 황자 대우를 해 주던 페드로의 태도가 변했다. 무언가 잡힐 듯, 말 듯 한 상황이 그에게 약간의 초조함을 안겨 주었다. 그에 더해 조금만 더 재촉하면 입을 열 것처럼 구니 강압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다.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뭐라……?”

“네가 발을 들이고 있는 이곳이 테노리엘의 것임을 생각하면 뭐가 현명한 선택인지 알 수 있겠지. 말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말해 봤자 헛소리 취급을 당할 텐데 해서 뭐……!”

페드로가 아르페시스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짝 당겼다. 순식간에 서로의 숨결이 스치는 곳까지 가까워진 상태에서 아르페시스는 서늘한 살기를 느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계속되는 추궁에 홀로 악몽에 대한 것을 고뇌하던 아르페시스의 인내심이 흔들렸다.

“말해.”

이런 기회가 온 김에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상담을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인내심 대신 수치심을 감내하게 만들었다.

“꿈을… 꾼다. 그녀가 나오는 꿈.”

“하?”

페드로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열이 몰렸다.

“예지몽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가 나온 적도 있고, 그녀가 언급되는 경우도 있는데…….”

아르페시스는 말을 하다 말고 꼬리를 흐렸다. 페드로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의 말이 흘러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뭔 개소리야?’라는 표정 말이다.

말하기 싫다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추궁한 게 누군데!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헛소리나 하는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 그냥 본래 생각했던 대로 털어놓지 말 것을. 고작 몇 초 전 괜한 충동에 흔들린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며 페드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구겨진 앞섶을 툭, 툭 터는 동안 페드로가 물었다.

“어떤 꿈을 이르시는지요?”

하, 아르페시스는 기가 찬다는 듯 페드로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자 취급은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위협을 해 댔으면서, 이제 와 다시 말투를 바꾸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짜증이 한가득 치솟았지만 이왕 저지른 일. 아르페시스는 얼버무리는 대신 말을 이어 나갔다.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말을 뱉었는데 얼버무린다고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터.

“그때그때 내용은 다르다. 아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원래는 테노리엘 영애가 불타는 꿈만 꾸었는데, 여기 온 후로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던 아르페시스의 입이 꽉 닫혔다. 페드로가 섬뜩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뭐? 누가 불에 타?”

또 하대라니. 자신이 아무리 허수아비 황자라지만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아르페시스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꿈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개꿈이라도 그렇지, 천사가 불에 탄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르페시스는 그에 겁먹는 대신 반발했다. 개꿈? 그 꿈에서 찾아오는 감정들과 혼란을 알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그리 궁금하면 따라오라!”

아르페시스는 식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꿈을 꿀 때마다 기록해 두었던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침실까지 순순히 따라온 페드로에게 그것을 보여 주기 직전에는 망설여야만 했다.

이걸 보여 준다고 개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까? 괜히 자신의 치부만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여기엔 그가 고백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차인다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들어 있지 않은가.

뭐, 괜한 고민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페드로가 종이들을 낚아채 갔으니까. 페드로는 다섯 장의 종이를 꼼꼼하게 훑어본 후 아르페시스를 돌아보았다.

“1444년?”

“……그것 때문에 예지몽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내가 미쳐 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생생하고. 또 꿈을 꾸고 나면…….”

“매일 꾸십니까?”

“그래.”

“그런데 왜 다섯 장뿐입니까?”

“……그런 글자가 나오지 않는 꿈도 있으니까.”

웅얼웅얼, 볼품없이 변명이나 늘어놓는 모습이라니.

그저 이른 시간에 산책을 나가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침실에서 페드로와 이러고 있나? 아르페시스는 짜증이 치솟았다.

“조금 전 분명히 달라졌다고 하셨지요? 여기 온 후로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녀를 처음 본 이후로 변했지.”

그래도 조금 전처럼 개꿈 취급을 당하지 않으니 다행인가? 아르페시스는 불퉁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는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그냥 핏물을 뒤집어쓰고 불길 속에서 사라지는 꿈이었다. 그 사람이 에스메랄다라는 사실…….”

“호칭에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실수했군. 영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었고. 그… 황성 연회에서.”

기묘한 침묵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에 잠겨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순간 시작된 침묵.

얘기를 꺼낸 후로 오늘 꾸었던 이상한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아르페시스. 그것을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숫자를 보며 의구심을 품은 페드로.

침묵은 페드로에 의해 깨졌다. 그는 눈앞의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래되셨습니까?”

“음…….”

그 질문을 듣고서야 혼자만의 상념에서 벗어난 아르페시스가 손가락으로 수를 세어 가며 답을 찾았다.

“얼추… 3년? 그 겨울쯤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꾸고 있었으니까.”

“3년?”

에스메랄다가 변한 3년 전 겨울부터 개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그것도 본인은 예지몽이라고 부르는?

페드로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금 얼룩덜룩, 고쳐 쓴 흔적이 가득한 종이를 훑었다. 헛소리, 개소리, 어이없는 소리였지만 기분 나쁜 이야기가 적힌 이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묘한 기시감, 그리고 불안감이 그를 장악했다.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이 죽었다는 내용과 에스메랄다가 했다는 말들.

‘내가 혼자 남겨지든 말든, 나를 비참하게 만들라고!’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인데.

‘돌아오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결국은 와 주지 않았잖아! 가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나만 남겨 두고 갔잖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데.

‘혼자서 그 악귀들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 뒀잖아!’

왜 찾아 헤매던 답의 발자취를 발견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일까? 페드로가 손을 꽉 움켜쥐자 아르페시스로부터 건네받은 종이가 우그러졌다.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바라보는 페드로의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내며 번들거렸다. 오늘 새벽 훈련은 불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으니까.

“어제는 다른 꿈을 꾸었다고 하셨는데 그건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헛소리, 개소리, 어이없는 소리였지만 페드로는 그것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정말 만약, 이 개소리에서 무언가를 찾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헛짓거리라고 해도 해 볼 가치는 차고 넘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