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10화 (10/45)

제10장

현실의 이면

테노리엘 백작가에 소속된 기사 중 남부 전선에 가 보지 않은 이들은 적은 편이었다. 기껏해야 기사 서임을 받은 지 1, 2년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들 정도. 사병을 자원병 형식으로 2개의 달 이상은 반드시 남부로 파견하기 때문이다.

또한 테노리엘 일가의 교육 방침 때문에 매해 전선을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 현 테노리엘 백작은 매년 연말, 영지로 돌아오기 전 10세가 넘은 자녀들을 데리고 남부에 들렀다 온다.

어린 시절에는 안전한 장소에서 마수들과의 교전을 관전함으로써 공포에 적응하고, 성년이 되면 테노리엘이 보낸 자원병들과 함께 생활하며 실전 경험을 쌓는다. 나이가 차지 않은 쌍둥이는 아직 실전 경험이 없었지만 아레스와 페드로는 이미 그렇게 실전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그럴 경우 전장에서 테노리엘의 직계를 호위하는 건 당연히 가문의 기사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실전 경험을 쌓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에스메랄다로부터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고 아르페시스의 호위로 차출된 헤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아레스를 호위하며 전선에 섰던 상급 기사다. 비록 전성기라 부를 젊은 시절은 지나갔지만, 그에게는 연륜과 경험이 가득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가씨의 명으로 전하를 모시게 된 라 울 자르간 헤롤입니다.”

“자르간 경, 반갑네.”

헤롤은 차출된 이들과 악수를 나누는 아르페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를 호출한 에스메랄다는 헤롤을 제외하고도 열 명의 기사를 더 붙여 주었다. 군법이 정한 것보다 많은 호위는 차후 어떤 빌미가 되어 발목을 잡을지 모르기에 전원이 아르페시스의 곁에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아르페시스의 근위대와 함께 움직이는 테노리엘의 기사는 그를 포함해 6명이 전부였다. 기존 근위 기사와 함께 딱 20명을 채운 셈이었다. 다른 이들은 연합군에 소속된 테노리엘의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중이다. 후에 합류할 예정이고. 자리가 비면, 말이다.

“출발하지.”

아르페시스가 말에 오르자 그를 호위할 20명의 기사들도 말에 올랐다. 헤롤 역시 주변을 쭉 훑어보며 말안장 위에 올라탔다. 에스메랄다가 굳이 숫자가 넘치는 10명의 기사를 붙여 준 이유가 있었으니까.

‘전하를 보필하다 보면 운 좋게 해충들이 사라지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헤롤을 집무실로 불러올린 에스메랄다가 남긴 말이었다. 난전을 틈타 기회가 온다면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을 제거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롤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행위 자체를 기사도에 어긋난다고 여기는 동료들도 있지만…….

그가 테노리엘 백작에게서 배운 기사도에는 개를 사냥할 때도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내용 따윈 없었다. 사냥은 본디 사냥감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면이 아니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직접적으로 나서서 황제와 붙어먹는 귀족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제물로 바칠 악함은 없으나, 누구의 희생도 없이 제거할 기회가 찾아왔을 때 망설이지 않을 정도의 혐오는 가지고 있는 사람.

테노리엘을 따르는 이들 중 그런 유형의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예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헤롤이었고 에스메랄다가 그를 비롯한 10명의 기사들을 차출한 이유였다.

헤롤은 조금 전 만났던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린 나이로도 가려지지 않을 기백을 가졌는데 어찌 소녀라 부르겠는가. 범에게선 범이 나는 법이라고, 헤롤은 훌륭히 자란 에스메랄다를 칭송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게 있어 에스메랄다는 한낱 소녀가 아니었다. 헤롤이 존경하는 테노리엘 백작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범이다. 그런 그녀가 시킨 일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헤롤은 손으로 콧수염을 쓸어 보며 말을 재촉했다.

함께 밀명을 받은 테노리엘의 기사들을 돌아본 그의 눈동자는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젊은 시절의 열기, 혹은 하늘 높게 떠오른 정오의 태양과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오라버니들이 배웠던 것처럼 안전하게 경험을 쌓으실 수 있게 도와드렸으면 하는군.’

난전을 틈타 임무를 수행하고, 부수적인 것도 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 * *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쫓아오는 마수의 발톱을 검으로 막아 냈다. 거친 숨과 떨림이 충돌음과 함께 퍼졌다.

계획대로 암석 지대로 마수들을 유인, 1차 피해를 입히고 활을 든 기사들이 원거리에서 2차 피해를 입혔을 무렵. 연합이 예정되어 있던 1부대의 기마병이 마수의 후방을 차단했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이끄는 본진 병력이 활을 버리고 창검을 들었다. 고작 10여 분 전의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막아 낸 발톱 사이를 파고들며 검을 깊게 찔러 넣었다. 마수의 턱에 파란 마나로 뒤덮인 그의 검이 박혀 들었다. 마차만 한 크기의 커다란 소형 마수가 축 늘어졌다.

“훌륭하십니다.”

간간이 그가 방어나 공격에 성공할 때면 시끄러운 고함과 괴성 사이에서 꼭 이런 말이 들려왔다.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말하기 때문에 주변의 소음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에게 곧장 닿았다.

아르페시스는 마수에게 꽂아 넣었던 검을 뽑아내며 그 목소리가 들린 곳을 힐끔거렸다. 그의 주변에는 테노리엘의 기사들은 물론, 그들과 손발을 맞추기 시작한 1조의 근위대가 있었다. 헤롤은 아르페시스가 한 마리를 처리하자마자 다른 한 놈을 데려왔다. 근방으로 접근한 것을 다른 호위 기사들이 죽이지 않고 잠시간 붙들어 두었던 것이다.

“어떤 종인지 아십니까?”

이 질문을 듣는 건 세 번째다. 노골적인 상황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도록 다양한 마수를 그의 앞에 끌어 왔다. 보호 아래 이루어지는 가르침. 그가 누려 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호의다.

저들은 자의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명령을 듣고 하는 것일까? 테노리엘 기사들이 상관의 명령 없이 독단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 상관에게는 이런 식으로 아르페시스를 배려해 줄 이유가 없었다. 분명 과한 호의다.

문제는 황제가 억지로 쥐여 준 황자의 자리와 달리 전혀 거북하지 않다는 점에 있겠지. 답을 하는 아르페시스의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 있었다.

“랑가, 이빨에 고열을 유도하는 독이 있으며 뒷다리 근육의 힘이 뛰어나 급작스러운 돌진으로 공격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황이 불리하다고 생각할 경우 도주를 시도해 놓칠 확률이 높은 종이다.”

“전투 시 주의점도 알고 계십니까?”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돌진에 대비해 몸을 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해독제가 없을 때는 이빨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도록 검을 항시 세워 둬야 한다.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서는 마주치는 즉시 이빨을 자르는 것은 물론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뒷다리에 부상을 입히는 방법도 권장되고 있다.”

헤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수를 붙들고 있는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아르페시스의 대답이 정답이라는 의미였다. 이론을 마쳤으니 실전에 들어가겠다는 신호. 아르페시스보다 두 배는 더 살며 배워 온 것들을 가르쳐 주는 어른, 보호자. 그의 16년 인생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머릿속이 혼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아르페시스는 생각을 잠시 접어 두었다. 헤롤이 곁에서 살짝 물러서자 기사들이 잡고 있던 마수 앞에 남은 것은 아르페시스 뿐이었다.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기에 마나 배분은 필수입니다. 각기 다른 소형 마수의 가죽을 효율적으로 뚫기 위해 필요한 마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확인하십시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도 몸에 밸 정도로 익히셔야 합니다.”

이건 전투보다 수업에 가까웠다. 아르페시스는 검에 한가득 일렁이던 마나를 거두고, 조금씩 늘려서 마수의 가죽을 긁어 보았다. 한동안 튕겨 나오던 검은 어느 순간 마수의 가죽을 베어 내었고, 또한 길게 자란 송곳니에 박혀 들어가기도 했다.

검에 마나가 조금 더 실리자 어깨를 노리던 마수의 송곳니는 그가 올려 친 검에 의해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아르페시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마수의 눈을 꿰뚫었다.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고통을 느낀 마수가 뱉어 내는 괴성으로 인해 바짝 붙어 있던 아르페시스의 몸이 울렸다.

그는 자신에게 튀는 마수의 침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돌연 굳어 버렸다. 마수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의 거리는 너무 가깝다. 크게 휘둘러지는 마수의 앞발에 그가 얻어맞기 직전, 헤롤이 끼어들어 마수의 발을 잘랐다. 마수의 검은색 피가 아르페시스에게 튀었다.

“눈을 노리실 경우에는 뇌를 헤집을 수 있도록 깊게 찌르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방금처럼 근접한 거리에서 반격을 당하실 수 있습니다. 찌르기 직후처럼 검이 잡혀 있게 될 때는 즉사를 노려야만 합니다.”

검을 뽑은 아르페시스는 옆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크게 내리그었다. 마수의 목덜미가 갈라졌다.

“주의하겠다.”

“무척 잘하고 계십니다. 아레스 도련님께서는 첫 전투 때 저희 도움 없이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셨지요.”

헤롤의 미소에 따라 그의 콧수염이 말려 올라갔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진심이 담긴 칭찬이라니, 그의 일평생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아니, 아니다. 분명 며칠 전에 들어 보았다. 에스메랄다에게서.

‘영민하십니다.’

헤롤이 했던 것처럼 진심을 담아, 마치 그가 자랑스럽다는 듯 웃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격한 움직임 때문에 날뛰고 있던 심장이건만, 생소한 박동이 끼어들어 통증까지 일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종을 상대해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휴식이 필요하신지요?”

헤롤이 말을 걸어오자 아르페시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전투 중에 딴생각이라니, 죽기 십상이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지.”

검을 흥건하게 적신 마수의 피를 털어 낸 아르페시스 앞에 다시 한번 기사들이 데려온 마수가 나타났다. 전선에 나가게 된다면 바닥을 구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살기 위해 발악하려고 했었는데, 이런 전투를 하게 될 줄이야. 분명 난전이 시작되었는데 그의 주변은 동떨어진 세상처럼 차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전투란 어떻게 보면 반복 노동에 가깝다. 적을 마주한다, 적을 제거한다, 다시 적을 마주한 후 또 제거한다. 그렇게 노동에 가까운 전투를 하다 보면 시간이 흐른다. 다치건, 다치지 않건, 혹은 죽었건, 살았건… 어떤 상태이든 공평하게.

거친 숨으로 달궈진 몸에서 난 열기가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아르페시스는 뱀과 닮았으나 비늘이 아닌 털가죽을 가진 마수를 피하기 위해 바닥을 굴렀다.

시야가 동그랗게 흩어지는 바람에 그를 둘러싼 호위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때마침 테노리엘의 기사가 마수를 피하며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이름이… 세드릭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데릭?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이름의 기사가 몸을 빼낸 방향은 마수와 응전 중이던 근위대 기사의 뒤쪽이었다.

마치 퇴로를 차단하듯 선 테노리엘의 기사가 등으로 근위대 기사를 살짝 밀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근위대 기사의 오금을 살짝 때려 무게 중심을 흔들기까지 했다. 찰나의 순간, 마수의 발톱이 무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 근위 기사의 눈을 지나 뒤통수를 뚫고 나왔다. 그 기사의 몸은 곧 인간의 살점과 악취, 핏물에 범벅이 된 마수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졌다.

아르페시스는 근위 기사의 상체가 갑옷째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순간 굳었고, 그를 향해 내려쳐지는 마수의 꼬리를 헤롤이 잘라 냈다. 동시에 휴고가 마수의 목을 쳐냈다. 그사이 마수에게 먹혀 하체만 남은 기사의 몸이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붉고 검은 핏물이 천천히 흙을 물들이고 있었다.

“사냥을 못 하신 건 처음이군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혹은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 것처럼 헤롤이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종으로 다시 해 보시겠습니까?”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마수가 아닌 인간에게로 향했다. 반토막이 나거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근위 기사는 총 3명.

기사들을 세워 놓고 얼굴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페시스는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주검이 되어 있거나 보이지 않는 이들은 모두 황제와 끈이 닿은 이들일 것이다.

오늘의 전투에서 테노리엘의 기사들의 목적은 그를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도 그들의 상관이, 그녀가 지시한 일일까? 아르페시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다시… 해 보겠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느 곳과 우호를 다져야 할지가 명확하다. 보아선 안 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정도의 현명함은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전투 중,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자. 아르페시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둘 죽어 버린 근위대 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전투가 끝나면 그의 주변에 황제의 인사들은 남아 있지 않으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다.

* * *

아르페시스가 본군을 이끌고 출전한 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에스메랄다가 숨을 고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의 안위에 계속 신경을 기울이는 자신을 질타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끊어 내려고. 그렇게 하루가 지났을 때 에스메랄다는 해가 지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영주 성의 내성을 지나고 있는 기사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갑옷에는 황금으로 만든 방패가 새겨져 있었다. 황제의 통솔하에 있는 중앙군이다.

중부는 황제만의 직할령. 황족의 피를 잊지 못했다면 그 어떠한 귀족도 중부 지역의 대리통치권을 위임받지 못한다. 그리고 황위를 계승하지 않은 황족이 중부의 도시나 땅을 하사받는다 해도 그곳을 지키는 건 황제의 군대다. 결국은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을 감시하는 것이다. 황제의 명령에만 따르는 중앙군을 이용해서.

에스메랄다는 말에서 내려 내성으로 들어오는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준비해 둔 공문을 붙이렴. 연합군에 합류한 영주들에게도 소식을 알리고.”

오늘도 열심히 필사 연습을 하고 있던 히나가 부스럭거리며 책상 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 백작령에 발을 들였을 무렵부터 작성해 두었던 공문이었다.

“중앙군에 관한 공문이 맞습니까?”

“그래.”

어딘가에 숨어서 벌벌 떨기만 하던 중앙군이 서부 연합군에 합류했다는 내용을 고상하게 돌려쓴 것이었다. 실제 행하지 않을 탈영병의 처벌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겨서 좋을 것이 없다. 해서 사람의 입을 타고 흘러 나가게 만들었지만, 그들의 불명예를 아예 기록에 남겨 두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공문의 사본은 영주의 권한으로 가문에 보관하기도 하니 훗날 내전 때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에스메랄다는 테노리엘 영주 성에 남은 기사가 자신을 부르러 오자 창가에서 돌아섰다.

“사 울 헤도라 베테론 외 4인이 도착했습니다.”

준남작 작위를 의미하는 울의 호칭을 듣고도 작위나 관직을 언급하지 않는 모습에서 소식을 전하러 온 기사가 그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볼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가 데려온 5천 중 2천이 도주했고, 지금 그중 약 1천 5백여 명이 돌아온 것이다. 반갑지는 않지만 마수의 발톱과 이빨 앞에 고기 방패 정도로는 써먹을 수 있으니 맞이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에스메랄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가신들이 모여 땅의 통치자인 영주를 대면하고,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논의하기 위한 알현실이었다. 왕의 그것처럼 단상 위에 마련된 영주의 의자 옆에는 평상복을 입은 페드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헤도라 준남작께서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합니다.”

에스메랄다가 홀에 들어섰을 땐 페드로와 헤도라 준남작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저는 영주권에 대해 그 어떠한 위임도 받지 못했습니다. 현재 영지의 통치를 담당하시는 분은 제 부친인 테노리엘 백작님께 정식으로 영주권을 위임받은 분입니다.”

페드로의 시선이 에스메랄다의 것과 마주쳤다. 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자세로 경례를 올렸고, 홀 내부에 배치된 다른 기사와 병사들도 그를 따라 곧장 경례 자세를 취했다.

“영주 대리를 뵙습니다.”

가문 내부의 사람이 굳이 그녀를 영주 대리로 칭할 필요는 없다. 그건 외부인을 위한 호칭이니까. 하지만 지금 페드로는 굳이 정확한 호칭을 사용해 에스메랄다를 불렀다.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겠지.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인사를 고갯짓으로 받아 주었다. 사뿐사뿐 걸어 단상 위로 올라선 그녀가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영주의 의자에 앉았다. 단상 아래에는 총 다섯 명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에렘에서 병력의 지휘권을 가질 수 있는 건 준남작의 작위를 가지는 상급 기사부터이다. 총사령관 아래에서 1천의 병력을 지휘하는 수석 지휘관, 그리고 그 수석 지휘관의 휘하에 복속되어 5백의 병력을 지휘하는 차석 지휘관.

페드로가 황실 기사단을 관두기 전까지 그는 차석 지휘관의 직급이었다. 수석 지휘관으로 올라 1천의 기사를 통솔할 수 있게 되기 전 관두어 버렸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온 기사들 역시 모두 지휘관이다. 그들 모두가 상급 기사이니 준남작의 작위를 의미하는 울을 쓸 것이다. 아니면 출신 가문의 계승권을 의미하는 이름을 쓰든가.

그중 헤도라 준남작은 아르페시스와 함께 출정한 중앙군 수석 지휘관 5명 중 한 명이었다. 뒤에 서 있는 4명은 그와 같거나, 혹은 그를 보좌하는 차석 지휘관일 테고.

에스메랄다와 시선이 마주친 헤도라 준남작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그 소문이 진짜였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드로의 눈썹이 들썩거리며 불쾌감을 표출했다.

“테노리엘 백작이 미…….”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주 대리!”

영주 대리는 영주가 아니다. 작위가 아닌 권한을 가진 것에 불과하기에 작위를 가진 이들에게 공경을 뜻하는 호칭으로 불릴 수 없다. 하지만 또한, 영주의 권한을 가진 권력자로서 작위가 없더라도 그에 준하는 대접을 받기에 작위 귀족을 공경하는 호칭으로 부를 필요도 없다.

에스메랄다는 다급하게 외치며 나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이름이 전해진 것은 헤도라 준남작뿐이었다. 그 말은 그들의 대표를 그로 정했다는 것인데… 그게 공정한 선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헤도라 준남작의 무례함을 사전에 차단하며 다급히 앞으로 나선 사내에게 말했다.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입니다. 현재 백작님으로부터 영주권을 위임받았지요.”

에스메랄다는 그들과의 만남에 대해 영광, 혹은 반가움 중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카 게만 아브세란 데, 데미안입니다. 아브세란 남작님이 제 큰형님 되시고… 저는 현재 중앙군 소속 수석 지휘관입니다.”

“아브세란 준남작이시군요.”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헤도라 준남작 대신 데미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방문객이 왔다는 소식에 들렀습니다만……. 무슨 용건으로 이곳을 방문하셨나요?”

손님이 아닌 방문객. 에스메랄다가 지금 영주 알현실에 발을 들인 다섯을 정의했다. 데미안의 표정이 어두워진 순간 헤도라 준남작이 이죽거렸다. 그는 앞으로 한 발 나서 있던 데미안을 밀쳐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출정 명을 받은 중앙군의 권한으로 군수 물자 징수에 대해 통보하기 위해 왔소, 영주 대리.”

“징수권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에스메랄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지만, 그녀의 눈매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헤도라 준남작께서는 중앙군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겁니까?”

“연식이 어려서 그런가? 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지 모르겠군.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서부를 지원하기 위해 온 우리에게는 정당한 징수권이 있으며,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오.”

헤도라 준남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행동에 홀에 배치된 이들이 모두 검을 꺼내 들었다.

“무, 무슨 짓이냐!”

겁먹은 쥐새끼처럼 놀란 헤도라 준남작 역시 검을 빼어 들었다.

영주 대리 앞에서 본 가문의 가주를 백작이라 칭하고, 하대를 섞어 사용하는 무도함을 보아라. 제대로 된 기사라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에도 신분과 계급에 따른 칭호, 예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법이다.

“안 돼! 뽑지 마!”

데미안의 뒤편에 서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다른 기사들을 말렸다.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잠시 그를 훑고 지나갔다. 그 사내의 제지에 데미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저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황제 폐하께서 임명하신 중앙군의 통솔권자는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 황자 전하이시지요. 현재 그분께서는 폐하의 허가하에 서부 연합군을 이끌고 계시며 서부 전역의 영주들에게 징수권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방금 전 대화에서 언급된 징수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황제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아르페시스뿐이다. 즉, 지금 헤도라 준남작이 테노리엘 백작령을 대상으로 행사한 징수권은 월권이다.

헤도라 준남작이 꺼내 든 검이 폭풍에 휘말린 나뭇가지처럼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를 정확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부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신 아르페시스 전하의 권한을 침해했으며 중앙군의 총지휘권자를 사칭한 저 죄인을 포박하고, 이후 전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 구금하라.”

“예, 아가씨.”

기사들이 성큼성큼, 헤도라 준남작에게 다가섰다.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이오, 영주 대리! 나, 나는 황제 폐하께서 임명하신 중앙군의 지휘관이오!”

이번 문제에서 차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황제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훤히 알 수 있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의 처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소속된 중앙군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된 것처럼 떠드는 헤도라 준남작에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멸과 조소가 들어 있었다.

“내가 전달받은 공문에 따르면, 헤도라 준남작은 서부 지원을 위해 출정한 중앙군의 수석 지휘관으로 총사령관이 아니지. 제국의 군법 그 어디에도 군의 수석 지휘관에게 징수권을 허락하는 법은 없으니, 헤도라 준남작은 현재 군법을 어기고 전하의 군권에 도전한 범죄자에 불과하다.”

방금 전 행동으로 탈영이 의심되는 군인을 넘어 총사령관의 권한을 넘본 범죄자가 된 헤도라 준남작, 에스메랄다는 더 이상 그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이것은 반역이다!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란 말이다!”

“반역은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한 자네가 한 거라네, 헤도라 준남작.”

두 명의 기사에게 제압되어 끌려 나가는 그는 황제에게 끈을 대려다 실패한 패배자. 그리하여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이로운 장기 말로 판정받은 소모품이다. 황제에게 헤도라 준남작은 딱 그 정도 가치밖에 없는 인물이다.

아마 그도 갖은 노력을 해서 중앙군의 지휘권을 얻었을 것이다. 뇌물과 아부, 그리고 지휘권을 얻을 수 있는 상급 기사로의 진급을 위해 훈련도 열심히 했겠지. 황제는 돈 몇 푼에 홀려 무능한 이들을 중앙군에 넣어 주는 머저리가 아니니까.

영지를 사고도 남을 만큼의 뇌물을 제시할 수 있는 고위 귀족이 아니라면, 중앙군의 기사는 무조건 실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헤도라 준남작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더 많은 돈을 가진 인사가 차고 넘친다. 그러니 지금 그가 서부에 와 있는 것이겠지.

“그럼 이제…….”

헤도라 준남작이 홀에서 끌려 나간 후,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 기사들을 말린 사내에게 한 번, 앞으로 나서 있는 데미안에게 한 번.

“아브세란 준남작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목적에 대해 들어 볼까요?”

조금 전 헤도라 준남작의 말을 끊고 직접 앞으로 나선 행동에 대한 그녀만의 해석을 내어 놓았다.

그들이 같은 일행이 아니라, 목적지가 같아 함께 온 동행으로 이해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이라면 지금의 길지 않은 말이 기회라는 걸 알아차리겠지. 아니라면 머저리처럼 굴다가 헤도라 준남작처럼 끌려갈 것이고.

데미안이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며칠, 전.”

긴장으로 인해 잔뜩 잠긴 목소리,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입가에만 미소를 그린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헛기침으로 잠긴 목소리를 털어 낸 데미안이 말을 이어 갔다.

“황자 전하와 서부군에 합류한 직후에… 그 후에 마수와의 교전이… 충돌… 아니, 마수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예, 전하께 전해 들었습니다.”

“그, 그때… 혼잡한 상황이라 저희 부대가… 본군에서 이탈을… 아니, 본군과… 그러니까…….”

수석 지휘관에 올랐으면서도 정치적인 명목 만들기에 그리 능한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한껏 긴장한 채 어렵게 말을 고르고 있는 그를 대신해 말을 정리해 주었다.

“본군과 헤어지신 겁니까?”

에스메랄다는 지금 탈영병이 확실한 저들에게 탈영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저들이 지금 주장하는 낙오병의 변명을 듣고도 거짓말이라 치부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말이다.

면책을 해 주지 않는 이상 그들은 탈영병이고, 탈영병은 군에 소속될 수 없다. 하지만 1천의 기사가 아쉬운 지금, 그들을 군에 배치하기 위해선 탈영병이라는 낙인을 찍어선 안 된다.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둬야 ‘훗날의 태도를 보고 그날의 일에 대해 판단하겠다.’라는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일전 아르페시스와 논의한 대로, 전공을 세운 후에야 면책해 주겠다는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였다.

“예, 예! 그렇습…….”

데미안을 주시하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영주 대리.”

기사들이 검을 뽑지 못하도록 말린 사내였다. 그는 얼굴에 긴장감과 경계심을 그려 넣은 후 데미안의 옆에 섰다.

“카 루그 페넬로프 아스터입니다. 페넬로프 자작께서 제 부친이시고 현재 중앙군 소속 차석 지휘관으로 아브세란 경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페넬로프 준남작이시군요.”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자신을 소개한 직책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데미안을 수석 지휘관이라 부르지 않았고, 아스터를 차석 지휘관이라 부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들이 군부에서 가지는 직책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름에 붙는 작위나 계승권 때문임을 명확하게 했다.

데미안은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 호칭의 의미를 아스터는 알아차린 듯 보였다. 그의 표정에 서린 긴장감이 짙어졌다.

“예, 아브세란 경께서 영주 대리 앞이라 긴장을 하신 것 같으니 제가 다시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의미인가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제가 정확하게 다시, 설명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에스메랄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미안과 그보다 훨씬 침착하게 말을 꺼내는 아스터를 훑어보았다.

무언의 허락을 받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부군과 합류를 했던 그 날 밤, 헤도라 준남작이 퇴각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약삭빠르군. 에스메랄다는 처음으로 눈꼬리를 접으며 아스터의 말을 경청했다.

겁을 먹어 도망쳤으면서 그 죄를 한 사람에게 모조리 넘기려는 심산이다. 대상은 방금 끌려 나간 헤도라 준남작. 이 자리에 없는 것도 모자라 이미 하극상을 일으켜 신뢰도가 깎인 그는 훌륭한 제물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안위를 보존하고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변론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에스메랄다가 그의 처지였다면 똑같은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데미안보다는 명분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의도한 대로 잘 쫓아오고 있었다. 본인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것뿐임을 깨달은 거겠지.

“당시 어둡고 혼잡한 상황에서 저희는 전하로부터 내려온 명령 신호를 보지 못했습니다만…….”

마른침을 삼키는 것처럼, 아스터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헤도라 준남작이 퇴각을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해서 그가 저희가 보지 못한 신호를 확인하고 전달하는 중이라 판단했습니다.”

“흐음?”

“그, 그에 휘하 병력에게 퇴각 명령을 전달했고, 빠르게 퇴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전투 지역을 벗어난 이들은 각기 다른 부대에 소속된 기사 전원과 1천에 달하는 병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페넬로프 준남작의 말이 맞는다면 어째서 남은 3천의 병사들은 퇴각을 하지 않고 연합군 창설 공문이 내려온 당일, 부대 편성을 받은 것일까요? 그들이 각 부대의 지휘권자인 여러분들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말이죠.”

아스터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에스메랄다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얼핏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니… 명령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진심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대꾸에 아스터의 말이 빨라졌다.

“예, 저희가 본군과 떨어지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드린 것 같습니다.”

이 주제로 심도 있는 대화를 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눈치챘구나. 에스메랄다는 아스터가 쓸 만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에는… 서부에 방문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지도를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본군의 위치를 특정하지도 못했기에 지속적으로 대기 상태를 유지하던 중, 황자 전하께서 테노리엘 백작령에 주둔, 연합군을 편성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하기 위해 길을 묻고, 물어 온 것입니다.”

빠져나갈 구멍을 제대로 파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예, 그래서… 현재 본군과 합류하지 못한 상황이라 물자 조달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책을 읽듯 단조로운 에스메랄다의 음성에 아스터의 입매가 떨리기 시작했다.

“예, 그러니 전하… 아니, 총사령관님을 만나 뵙고 사정을 설명하기 전까지… 식량을 포함한 군수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탈영병이 된 이후 그들은 작은 마을 근처에 터를 잡고 물자를 징수, 아니 약탈하며 버티던 중이었다. 에스메랄다가 그들에게 보낸 전령이 전서구를 통해 보고서를 올린 바 있다.

그마저도 연합군 창설과 탈영병의 처분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후부터는 눈치가 보여 마음껏 착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합군 사령관이 내린 임명장과 소속 부대가 없는 이상 직접적으로 물자를 징수하다 발각되었다면 약탈범으로서 현장에서 체포되었을 테니까.

이곳으로 이동하는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한 듯 보였다. 1천 명이 넘는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니 어련할까.

에스메랄다는 데미안의 말이 끝난 직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할 것 같군요.”

“…….”

“페넬로프 준남작은 명령을 받고 이탈한 것이라 했지만 실제 아르페시스 전하께서는 당일 그 시각, 퇴각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스터만이 유일하게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 있었고, 데미안과 다른 두 기사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채였다.

“또한 서부 연합군의 창설과 동시에 부대 배치를 받은 중앙군 병사들에게서 탈영병이 존재한다는 증언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즉, 그 부분이 명확해지기 전까지 이탈의 이유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은 여러분에게 테노리엘은 어떠한 지원도 해 드릴 수 없음을 알려 드려야겠군요.”

데미안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스터 역시 탈영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직후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귀한 군수 물자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넬로프 준남작이 정말로 오해로 인한 낙오병이실지도 모르나, 마찬가지로 준남작과 함께 집결해 있는 이들 중 문제의 그 탈영병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렇… 지요. 그 부분은 확실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니 말입니다.”

에스메랄다는 선을 그었다. 그들의 변명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탈영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도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지금의 문제는 황자 전하께서 판단하실 겁니다.”

“…….”

“어제 출전하셨으니 오늘, 혹은 내일 중으로 귀환하시겠죠. 탈영병이 아니라 하시니 제대로 된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어 보는 건 어떤가요?”

아스터가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되겠군요.”

“현재 위치한 장소를 알려 주시면, 황자 전하께서 귀환하실 때 전령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아스터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 방향을 힐끔 바라보더니 이를 악물었고, 데미안이 창백하게 질린 채 겨우 대답했다.

“여, 영주 성에서 북쪽으로… 30분 정도 거리를 둔 산의 초입에 병력이 모여 있습니다. 근방에, 그 근방입니다.”

“북쪽 말씀이시군요.”

에스메랄다가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위치를 다시금 언급하는 그 말이 그들에게 비수가 되었을지, 아니면 비꼼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보자면 전자로 받아들인 것 같다. 헤도라 준남작과 같은 처지이나, 그처럼 안하무인으로 자신의 죄를 전혀 인지하지 않는 쓰레기 같은 인사들은 아닌 모양이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수치심 정도는 느끼는 듯 보이니 다시금 다듬어 키울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다.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 서부에서의 일이 끝난 직후 그가 남부로 향할 때 따르는 이들의 질이 달라지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후에 그쪽으로 전령을…….”

에스메랄다의 말을 끊고 휴대가 불가능한 크기의 뿔피리가 내는 굵직한 음이 끼어들었다.

“다행히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래 기다리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중요한 손님, 혹은 영주 성의 주인 일가가 영주 성에 발을 들일 때 부는 뿔피리였다. 중부의 경계선을 막고 선 테노리엘 백작이나 황도에 있을 아레스, 쌍둥이 형제가 돌아올 이유가 없는 시점이니 저 소리의 주인공은 아르페시스다.

“전하께서 귀환하신 것 같군요.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 감사…….”

“감사합니다만 저희 중 일부는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달해도 되겠습니까?”

데미안이 반색하며 대답하려던 것을 아스터가 막아섰다. 그는 여전히 침묵하며 뒤에 서 있는 두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전 언급한 오해에 대해서는 곧 해결될 터이니 연합군 내 배치를 정식으로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럴 경우 병사들이 멀리 있는 것보다는 영주 성 근방에 있는 것이 나을 겁니다.”

사람을 보내 말을 맞추려는 것이겠지. 보유 중이던 지도 등의 증거도 인멸해야 할 테니 꽁지 빠지게 달려야 할 터. 에스메랄다는 웃으며 그리하라고 답해 주었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하고, 어떤 말을 맞추건 아르페시스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들은 곧 도착할 아르페시스를 마주하기 위해 영주 알현실을 나섰고, 에스메랄다는 네 명의 기사 중 유일하게 뒤를 돌아본 아스터를 가만히 주시했다.

인간, 아니 귀족의 말이란 참으로 간사하기 때문에 그걸 말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에게도 지식과 눈치가 필요한 법이다. 사람이 아무리 말을 해도 짐승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지 않는가? 다행히도 저 중 한 명은 아르페시스가 할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는 되는 모양이니 중앙군 출신의 탈영병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듯했다.

“아!”

아스터를 지켜보던 에스메랄다의 몸이 갑작스럽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놀라서 짧은 탄성을 내질렀던 그녀는 자신을 안아 드는 페드로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저런 놈들의 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라니.”

페드로는 혀를 차면서도 그녀를 한 팔로 받쳐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 그의 품을 달가워하기 시작했지만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까지 어린아이처럼 안겨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내려 주세요.”

“전하를 맞이하러 나갈 것 아니냐? 어차피 같은 방향, 좀 안고 가는 게 무어 문제가 된다고.”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거리감에 쉽사리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금 전에는 완연한 아랫사람의 자세로 곁을 지키더니, 또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을 해 온다. 뺨에 입맞춤을 바라는 날이 있는가 하면,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를 관찰하는 날도 있다.

“불편해요. 내려 주세요.”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너그럽고 다정하던 그는 잔꾀가 많아졌고, 또한 능글맞아졌다.

몇 번이나 내려 달라고 말하는 에스메랄다와, 그런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넘어가는 페드로. 두 사람의 신경전은 페드로의 승리로 끝났다. 어느새 영주 알현실에서 성의 정문까지 도착해 버렸으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르페시스와 함께 20여 명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황제와 연이 닿아 있는 다섯 명의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헤롤은 그녀가 시킨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 * *

분명 마을 주민은 모두 대피했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마을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남쪽에 있는 쿠베트 후작령에서 운 좋게 도망쳐 왔던 이들이 남긴 핏자국이겠지.

전투가 끝나고 근방의 텅 빈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르페시스는 테노리엘 영지로 돌아가는 동안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테노리엘 영주 성에 도착했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페드로의 제안대로 뒤로 남겨 둔 근위대 20여 명 중 10명이 넘는 인원이 죽었던 그 날. 당시에는 그 일에 대해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페드로가 근위대를 일부 떼어 놓는 행동 자체를 황제의 인사들에게 하는 견제, 혹은 신경전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전투에서 특정 소속 인물만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누가 죽을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신이 테노리엘을 돕는다고? 지금에 와서 되짚어 보면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찬 생각이었다.

테노리엘은 존재가 불분명한 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건 운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였다. 적대 세력이 제거되길 바라며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직접 제거한 것이다.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들을 전장 위에 세우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돌격 시 가장 위험한 위치에 배치했든가, 아니면 돌파력이 떨어지도록 충돌 직전에 근위 기사들 주변에서 살짝 벗어나거나, 그도 아니면, 아르페시스는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그것을 에스메랄다가 지시했는지, 페드로가 지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노리엘이 행한 것만은 분명하리라.

아르페시스는 겨우 하루 전, 테노리엘의 기사들이 은밀한 방해를 해 가며 남은 5명의 기사를 제거하는 것을 본 후에야 그 쉬운 사실을 깨달았다. 의문 없이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현실과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 이전의 그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보게 된 것이다.

테노리엘을 깎아내리거나 시비를 거는 귀족들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 적대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황제가 쉽사리 테노리엘을 건들지 못하는 이유. 그들이 정의롭고 당당해서? 위세가 대단해서?

그런 추상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테노리엘이 수많은 방법으로 쉽게 건들 수 없는 현실적인 견고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에는 정의롭지 못하고, 당당할 수 없는 것들 역시 포함되어 있겠지. 어제 보았던 것처럼.

그것을 깨달은 후에는? 스스로의 한심함을 곱씹었다. 티끌만 한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한 순백색이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는데, 눈에 보이는 흰색이 마냥 깨끗하다고만 생각했었다. 정의로운 행동, 청렴한 경력, 올바른 신념만으로는 현실의 견고함을 쌓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강하고 튼튼한 사람이라도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를 찔리면 죽는다. 그렇기에 진실로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뒤를 노려 오는 무수한 칼날을 막아 내야 한다.

더럽고, 치졸한 방법을 동원해 들어오는 것을 정정당당한 방법만으로 모두 막아 낼 수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건 몽상, 혹은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12세의 에스메랄다는 당연하다는 듯 살고 있는 그 현실을 이제야 발견한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또한 감탄했다. 그보다 어리고 작은 에스메랄다는, 그가 알지도 못하던 곳에 발을 들인 채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 속에는 조금의 씁쓸함도 있었다. 페드로가 언급한 ‘기꺼이’는 그가 만족감을 얻을 만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으니까.

에스메랄다가 기꺼이 추가 사병을 호위로 보내 준 것은 그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그 차출을 통해 난전 속에서 교묘하게 제거해야 하는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감탄, 경외, 존경, 그리고 그 감정들이 만들어 냈던 호감, 악몽이 만들어 냈던 그리움과 애절함……. 마지막으로는 섭섭함까지. 심장 속의 감정은 뒤섞였고 머릿속의 이성은 뒤엉켰다.

화마 속에서 사라지던 색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정말 죽는 걸까? 불에 타올라서? 핏물에 뒤덮여서? 대체 왜? 그녀는 무엇 때문에 죽는 것이지?

「--에게 돌을 던지던 그들, --의 죽음에 환호하던 그들, --를 죽음으로 내몬 그들.」

그들은 대체 누구기에? 그가 서 있는 곳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이 한가득 쌓였다. 하지만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들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기를 쓰던 미래의 그가 에스메랄다의 방문 소식에 들떴던 것처럼. 처음으로 변했던 악몽, 아니 예지몽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지금 그녀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아르페시스는 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모르겠다, 라는 답이 최선에 가깝다. 그는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무엇을 사랑이라 부르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존경심을 느끼고 있다. 그녀가 가르쳐 주는 것들을 배울 때마다 다시 한번 더.

아마 계속 이런 식으로 그녀에 대해 알아 가고, 그녀가 언급되는 꿈을 꾸다 보면… 미래의 언젠가는 그 질문에 그렇다, 라는 답을 내어 놓게 될 것 같았다. 그는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훗날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예지몽이 예견한 대로, 분명히.

하루 온종일, 그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 심지어 집중하고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야 할 전투 중에도 그녀를 떠올렸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녀와 친분을 쌓고 싶은 건가? 아니면 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르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가? 그녀를 사랑하고 싶은 걸까?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서? 어쩌면 꿈에서는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하고 싶은 것일지도?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은 난장판이었다.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채 혼란만이 가득했다. 그런 상태로 테노리엘의 외성과 시가지를 지나왔다. 그는 내성을 지난 직후 영주 성 앞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중앙군의 것이 분명한 갑옷을 입은 기사 3명, 다수의 사용인, 그리고 그 틈에서 아르페시스의 시선을 독점하는 금발의 남매.

아르페시스는 커다란 페드로의 품에 안겨 있는 에스메랄다를 보고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저렇게 작았나?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신은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했던 냉혹한 현실 위에 살고 있던 소녀가 저렇게 작다고?

건장한 페드로 때문인지 그녀는 마치 인형 같았다. 정말, 너무 작았다. 저 몸으로 대체 어떻게…….

아르페시스는 그 뒤에 붙을 말을 정의하지 못하며 심호흡했다. 그러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버둥거리기 시작했고 페드로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페드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준 후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았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빤히 보았다. 찰나의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중에 가장 선명한 것은… 그녀를 저렇게 안으면 어떤 기분일까, 라는 것이었다.

차마 다른 누구에게 이런 생각을 해 보았노라 말할 수 없는 그런, 파렴치한 생각이었다. 가문의 귀한 여식을 인형처럼 안아 보고 싶다니. 아르페시스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금발의 남매는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말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페드로의 품에서 버둥거린 탓인지 에스메랄다의 금발이 살짝 헝클어져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살짝 엉켜있는 그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긴 채로 반사적으로 답했다.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았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무난한 대꾸.

“그래.”

말을 하고 나서는 후회했다. 조금 더 살갑게 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보내 준 기사들에게 받은 도움과 가르침에 대해 말하고, 그에 대한 감사 인사를 다시 했어야 하는데.

어제의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달았는지, 어떤 감정들을 느꼈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알아낸 만큼,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말해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지시키고 싶었다.

그가 거의 매일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그녀도…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심장이 이상한 박자를 타고 뛰었다.

“무탈하신 모습을 뵈어 안심입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아쉽게도 그것을 낚아채지 못했지만.

페드로의 손이 느릿한 속도로 뻗어졌고,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아르페시스는 그 행동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 그래…….”

다른 것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얼빠진 것이었다. 아르페시스의 눈동자가 역할을 다 하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는 페드로의 손을 쫓아갔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친숙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 조금 전처럼 머리를 정리해 준다든가, 이마에 입을 맞춘다든가, 그녀를 천사라 부르는 것까지. 남매이니 당연하겠지.

아르페시스는 서부 연합군이라는 연결점이 없으면 에스메랄다와는 아무런 친분도 없는 타인이다. 반면 페드로는 그런 거리감이 없다. 에스메랄다와 가까운 사이, 친근한 사이인 페드로가 부러웠다. 순간의 깨달음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해 주길 바라던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세상에,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녀도 매일 자신을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니. 그녀가 본인의 생각을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마치 대가를 바라는 것 같은 사고방식이 아닌가!

유치하기 그지없는……. 아르페시스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고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 본능 외에 생소한 욕망이 그를 찾아왔다. 다음번에는, 다른 목적이 없더라도 그녀가 ‘기꺼이’ 사병을 내어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바람, 혹은 욕심.

“전하를…….”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 온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게 정말 그녀의 떨림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떨고 있기에 그렇게 들린 것일까?

아르페시스가 한참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에스메랄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를 뵙고자 찾아온 방문객이 있습니다.”

“방문객?”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르페시스는 뜬금없는 단어에 고개를 들었다. 웬 방문객? 그의 시선이 에스메랄다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이동했다. 그가 편성한 연합군 중 중앙군 출신의 병력은 모두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병사다. 기사는 없었다. 모두 며칠 전 마수와의 첫 교전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그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지휘관이던 그들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아르페시스는 그제야 그들을 존재를 상기했다.

“방문객 말이군.”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언짢음이 서리는 사이 세 명의 기사가 서둘러 경례를 올렸다.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아르페시스는 그 인사를 받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경들이 여긴 어쩐 일인가?”

제대로 된 답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는 그들을 대신해 에스메랄다가 입을 열었다.

“본진에서 떨어져 낙오한 상태로 대기하던 중,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을 맞추긴 했지만 실제로 그들을 눈앞에 두고 이런 말을 들으니 속에서 경멸이 치솟았다. 죽음의 공포와 맞서지 않고 도주한 이들이 군인이라니.

그날 중앙군의 기사들이 도주하지 않았다면 일반 병사들이 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인성이 어떠하든 마나를 다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도주했고, 그로 인한 병사들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그날의 일에 대해 해명을 하고 정식으로 연합군에 배치받고 싶다 합니다. 스스로를 낙오병이라고 주장하더군요.”

첨언을 하듯 속삭이는 목소리,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에스메랄다에게 돌아갔다. 속에 차 있던 불쾌한 감정들이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시야를 채운 그녀의 색이,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녀로부터 파생되었던 모든 충격과 감정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끝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들추어내 못나게 행동해서 좋을 건 없겠지. 아니, 사실은 이미 결정을 내려 놓은 문제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망쳐 그녀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못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녀처럼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해 비슷한 선상에 서고 싶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그녀가 증명하지 않았나.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아르페시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피곤하니 짧게 듣겠다. 들어가지.”

“모시겠습니다.”

에스메랄다와 페드로가 앞장섰고 아르페시스가 그들을 따라 걸었다. 그 뒤를 근위대와 세 명의 중앙군 기사들이 따라붙지만, 아르페시스의 신경은 뒤에서 따라오는 기사들이 아니라 앞서 걸어가고 있는 에스메랄다에게 쏠렸다.

페드로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거부하듯 그의 손을 내밀어 밀어냈다. 하지만 페드로는 그때만 잠시 손을 거두었고, 잠시 후에는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을 반복했다. 결국 에스메랄다가 그의 손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을 무렵, 그들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 * *

페넬로프 자작가는 고위 귀족의 봉신은 아니기에 영지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매 세대에서 지휘 기사를 배출해 온 덕분에 군부 쪽에선 명망이 높았다.

카 루그 페넬로프 아스터는 그 가문의 차남으로, 황실 기사의 종자로 6년간의 지도를 받은 후 18세가 되자마자 기사 서임을 받았다. 이후 꾸준히 훈련을 거듭해 중급, 나아가 상급 기사 서임까지 받아 중앙군 소속의 지휘 기사가 된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그는 차남이니까. 자작 위는 그의 형이 승계받을 것이고 그러면 그때부터 그는 계승권을 가진 귀족가의 일원이 될 뿐이다.

계승권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작위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은 건 당연한 일. 마침 집안도 꾸준히 군부에 종사했으니 아스터는 기사 서임을 받은 김에 단승 준남작 위까지는 받아 두기로 했다.

그리고 실제로 1년 전 23세의 나이에 상급 기사 서임과 함께 울에 해당하는 준남작 위를 손에 넣었다. 가진 작위와 계승권 중 가장 높은 것을 이름에 쓰는 관습 때문에 루그를 쓰지만, 그는 분명한 단승 작위 귀족이었다.

마나를 신체에서 분리해도 유형화할 수 있는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르는 평균 나이는 20대 중후반. 늦으면 30대 초반에 입문하는 이들도 있는 편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발을 들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좌절하는 문턱이 바로 상급 기사의 경지다. 그것을 고려할 때 아스터는 수재 반열에는 들 정도로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마나에도, 검에도.

특별한 출세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지금의 위치에 꽤나 만족했었다.

앞으로 적당히, 대충, 편하게 살 생각이었는데……. 대뜸 출정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그것도 황태자가 이끄는 남부 지원군이 아니라 사생아 황자가 가는 서부 지원군 명단에.

페넬로프 자작과 아스터의 형이 그와 데미안의 이름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결국 출정을 했고 지금에 이른 현재 아스터는 마수를 처음 본 그 날,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도망갔던 그때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젠장…….”

“아스?”

욕설을 내뱉었던 아스터는 불안한 기색으로 응접실을 두리번거리던 데미안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르페시스는 진즉에 대화를 마치고 응접실을 떠난 후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멍청아.”

공식적으로는 상관과 부관이나, 그들은 같은 기사 밑에서 종자 생활을 하며 성장기를 보낸 친구였다. 소심하고 착한 데미안, 까칠하지만 잔정이 많은 아스터, 그들은 꽤나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래서 먼저 수석 지휘관으로 진급한 데미안이 아스터를 부관으로 데려왔고, 줄곧 같은 지역에서 근무해 왔다.

“어…….”

“자칫하다간 작위 환수는 물론 처형당할 수도 있다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런 처지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죽을 확률이 높은 곳에 버림받듯 보내질 때만 해도 욕을 해 대며 짜증을 냈을지언정, 마수를 등지고 도망가 탈영병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처음 본 마수가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이 사달이 나 있었다.

아스터는 아직도 며칠이 지난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서부군과 합류한 직후, 각 사병의 책임자들과 통성명을 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는 ‘마수다!’라고 외치는 외마디 비명이었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고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선명한 붉은색 점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쩍 벌어진 지옥으로 삼켜진 병사 한 명이 붕 떠올라 피를 흩뿌리며 잘렸다. 그래, 잘렸다. 마수의 입 안에 들어서지 못한 그 병사의 몸은 동강이 난 채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스터가 처음으로 본 마수는 피와 비명,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공포와 인간의 죽음 속에서 나타났다. 인간이 너무나도 쉽게 죽어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근방에서 도망가라고 소리 지르는 걸 듣고 홀린 듯 그 말을 따라 도망갔다. 그 장소를 벗어난 후에야 도망가라고 소리를 지른 이가 헤도라 준남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의 위기라 인식했던 순간이 지나자 현실이 다가왔다. 자신이 탈영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특별한 출세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로 평생을 살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는 자신의 옆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데미안을 보며 생각했다. 망했다. 인생이 제대로 망했다.

평생 동안 휘둘러 왔던 검은 뽑아 보지도 못했고, 글과 그림으로 열심히 배운 마수에 대한 지식은 한순간 백지화되었었다. 그 마수의 종이 무엇인지, 상대할 때의 주의점과 안정적인 사냥 방법은 무엇인지…….

아니, 아스터는 아직까지 그날 보았던 마수가 무슨 종인지도 몰랐다. 정확한 외형은 기억나지 않고,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던 수많은 붉은빛과 당시에 느꼈던 공포감만이 선명했다. 분명 크기를 알고 있었는데, 그가 처음 본 마수는 그보다 배는 더 커 보였다.

마수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다무는 그 간단한 동작으로 인간의 몸이 동강 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인간이 고기를 먹을 때 입을 여닫으며 씹듯이, 마수가 입을 다물면 인간의 뼈가 조각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이론의 지식과 실전의 경험, 그 차이가 가져온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는 훌륭한 기사가 아닌 겁쟁이 인간을 만들어 냈다.

“망할, 젠장……!”

아스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현실에 대한 막막함으로 아르페시스가 있을 본진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다 보니 같은 처지의 이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합류하기 시작했다.

아스터는 그때, 탈영병들 사이에 중앙군 소속 기사 1천 명이 모조리 모여든 것을 보고 정말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무력감? 허탈감? 수치심? 아니면 경멸? 자괴감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 당시의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테노리엘의 깃발을 매단 전령이 그들을 찾아왔다. 연합군 창설과 총사령관 임명, 그에 따른 사병 차출에 관한 서신이 그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복귀에 대한 의사를 내비치며 면책에 대해 떠보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령은 서신을 전달한 후 떠났을 뿐이다.

이후 지휘권을 가진 기사들 간의 언쟁이 빈번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이들과 돌아가면 군법으로 처형될 것이라며 겁에 질린 이들이 싸우는 나날의 반복.

그 와중에도 먹고살겠다고 인근 마을의 식량을 약탈하고, 마을 주민들의 거처를 빼앗던 기사들이 행동을 자제하기 시작한 건 나름 다행이었다.

앞길이 막막해서 뭘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대로 본진에 발각되면 탈영에 대한 처분으로 단숨에 목이 잘릴까 싶어 공포에 떨던 나날들. 중앙에 자신의 탈영이 전해졌을까 싶은 걱정 때문에 식욕은 사라졌고, 잠이 들면 반드시 마수의 이빨에 잘려 나가며 죽던 병사의 모습을 악몽으로 보았다.

그러다 중앙에 전달할 탈영병들의 목록을 작성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테노리엘 영주 성에 발을 들인 후 헤도라 준남작이 당당하게 나갈 때부터 불안했다. 그들은 절대 당당할 수 없는 이들이니까.

수석 지휘관인 데미안을 두고 차석 지휘관인 자신이 나서기엔 애매해서 그의 옆구리를 열심히 찔렀다. 어떻게 좀 막아 보라고. 뭐, 결국엔 말주변이 없는 데미안이 헛소리를 하기 전에 나서야만 했지만.

비록 입매만 끌어 올려 웃는 에스메랄다에 의해 전의를 상실했고, 헤도라 준남작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며 겁을 먹었지만 데미안이 헛소리를 하는 건 막았다.

기사가 부족하다는 것은 제국의 고질병과 같기에 병력을 가지고 협상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나를 다룰 수 있어야만 기사가 될 수 있는데, 마나를 다루기 위한 운용법은 귀족의 핏줄이나 종자와 같이 내부 관계가 있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니까.

그 일을 언급하지 않으면 연합군은 1천의 기사를 얻게 될 테니 협상을 해 보자는 헤도라 준남작이 본래 계획했던 대로, 은근슬쩍 일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러지 않았다. 돌려 말하긴 했으나 탈영병이라고 의심 중이라는 사실을 전달했다. 군수 물자를 지원해 주지 않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녀는 탈영에 대한 면책을 내려 주지도 않았음에도 1천의 기사를 손아귀에 쥐었다. 탈영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덮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고 아스터를 비롯한 중앙군 기사들은 그 문제에 대한 오해를 해명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들을 당당할 수 없는 입장으로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 건…….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준비한 변명, 탈영을 했으나 용서해 준다면 부족한 기사 병력을 제공하겠다는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차단해 버렸다. 처벌에 대한 의사를 밝힘으로써 탈영병임을 자처하지 못하게 만들고, 대신 우회로를 뚫다니……. 당하는 입장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방법이라고 칭찬했을 텐데.

그 덕에 연합군 속에 정식으로 배치받지 못했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그들은 아직 탈영병이 아니라는 확정을 받지 못했다.

아스터는 조금 전 아르페시스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숨을 골랐다.

‘헤도라 준남작이 퇴각 명령을 전달했고, 그것을 본 후 이행했다? 그건 그대들의 주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가 하극상으로 나의 권한을 넘본 것처럼 그날도 멋대로 명령을 내린 것일 수 있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이 있나?’

‘우선 자네들이 탈영병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군. 또한 단순히 착오에 의한 낙오병일 가능성도 있고.’

‘이 문제는 훗날 그대들의 행실을 보고 판단하겠다. 그대들이 정말 탈영병이 아닌 착오에 의한 낙오병이라면 앞으로 있을 전투에서는 지난날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겠지.’

‘탈영 의혹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이상 정식 배치는 하지 않겠다. 단, 본진의 별동대로서 전투에 임하고 탈영병이 아님을 증명하라. 그럴 경우 의혹을 풀고 지금의 상황이 오해임을 인정하겠다.’

‘대화는 여기까지 하지. 의혹이 모두 풀리기 전까지 식량에 대한 지원만 하겠다. 다른 물자들은 사비로 충당하건, 부족한 대로 생활하건, 알아서 하도록.’

‘테노리엘 영애, 헤드로 준남작은 군법 집행에 따라 처형하고, 그 시체를 병사들의 주둔지에 효시해 주게. 정확한 죄명은… 하극상 및 탈영 주도로 하지.’

‘피곤하니 이만 일어나겠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또한 완전히 벼랑 끝으로 밀린 것도 아니다. 잘만 하면 살길이 보인다. 이토록 애매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든 건…….

아스터는 포근한 색채를 띠고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스? 이제 어떻게 해? 황자 전하께서 우리가 한 거짓말을 아시는 날에는…….”

데미안의 말에 아스터가 흠칫, 몸을 떨었다.

“사실, 사실 우리가 탈영을 한 건 맞…….”

아스터는 사색이 돼서 데미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과 나란히 앉아 있던 기사도 딱딱하게 굳은 채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아냐, 아니라고.”

이 대책 없이 순진한 친구를 어쩌면 좋나. 아스터는 죄책감과 회한,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허덕이면서도 억지로 말을 이었다.

“명령을 보고 그에 따른 것뿐이야. 우리 죄는 탈… 그게 아니라, 오해를 해서. 그래, 명령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이행한 죄밖에 없는 거다. 알아들었냐?”

데미안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아스터는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바랐던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평생 투옥되거나 수배자로 살 수는 없다.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지만 만회하면 된다. 아주 희미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방금 전 열리지 않았나. 그러면 된다. 이번에 찾아온 기회를 놓쳐서 정식으로 탈영병 딱지를 달면 그들의 인생은 끝이다.

모두가 입이 바짝 마른 듯 계속 입술을 핥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앞에 놓인 차에 손을 대지 못했다.

* * *

테노리엘 영주 성은 크게 영지민들이 머무는 곳을 감싸는 외성과, 그 속에 있는 영주 성을 감싸는 내성으로 나뉜다. 외성 밖에도 영지민들이 거주하는 소규모 마을이 곳곳에 있지만, 현재는 모두 외성 내부로 피난한 상태였다.

그 외성을 지나면 닿는 내성, 그곳의 안쪽은 오로지 영주의 일가를 위한 공간이다. 정원과 영주 일가나 그들을 모시는 시녀, 시종들이 머무는 본성이 있다. 그런 본성 뒤편은 대부분 기사들을 위한 공간이다. 기사단 숙소, 연무장, 그리고 마구간과 병장기 보관소까지.

그중에는 영주 일가와 그들의 측근, 예를 들면 직계들이 가르치는 종자와 그들의 호위 기사들이 사용하는 개인 연무장이 몇 개 있다. 에스메랄다가 시리스를 비롯한 용병들에게 내어 준 연무장이 바로 그곳이었다. 15명에서 20명 정도의 소수가 훈련을 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연무장, 그 한쪽에서 시리스가 노란 신물을 게워 냈다.

“우엑!”

산소가 부족해서 시야가 끊김과 동시에 폐가 쪼그라드는 고통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 혹사당했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일주일 중 6일, 시리스를 비롯해 에스메랄다가 데려온 용병들은 새벽 5시에 기상해서 5시 20분부터는 페드로가 주도하는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첫날, 페드로는 자신의 종자 셋을 데리고 와 그들에 대한 것을 기록했다. 키, 어깨너비, 팔 길이 등을 포함한 체형과 연무장을 뛰거나 근력 운동 등의 횟수로 파악하는 기초 체력까지. 그리고 1대 1 대련을 하며 무언가를 가득 적더니 다음 날 종이 한 장을 나눠 주었다. 훈련 일정표였다.

그 당시 시리스는 본래 자신이 하던 것보다 두 배는 늘어난 횟수를 보고서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마땅치 않아 하는 페드로가 훈련을 빙자한 폭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잡다한 기록이 끝난 후 정식 훈련이 시작된 이틀 차. 연무장을 돌고 바닥에 널브러졌던 시리스는 그 생각을 접었다. 페드로는 물론, 정식으로 기사 서임조차 받지 못한 그의 종자 3명은 그들보다 더한 훈련을 소화하고도 바닥에 널브러지지 않았으니까.

시리스는 자신이 바닥에 눕자마자 뒤집어진 모래시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물을 게워 내고,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돌아온 사이 그에게 허락된 휴식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 저 모래가 다 떨어진 후에도 이렇게 누워 있으면…….

“컥!”

진짜 폭력이 찾아오니까. 페드로에게 뒷덜미가 잡혀 일어난 시리스는 복부를 걷어차인 대가로 헛구역질을 했다. 조금 전 위액을 게워 냈으니, 더 이상 속에서 나올 것이 없기에 헛구역질을 한 것이다.

억지로 허리를 편 그는 페드로가 강제로 쥐여 준 납덩이를 쥔 채 자세를 잡았다. 그사이 페드로는 자신에게 허락된 휴식 시간 동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용병들을 일으켜 세우며 다음 훈련을 강요했다.

근력 운동, 기초 검술 훈련, 개인 대련 등, 쉴 틈 없이 짜인 훈련 사이에 허락된 휴식 시간은 5분에서 10분. 위액 대신 피를 토해도 이상하지 않을 훈련 양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양을 고작 종자들이 해내고 있었다.

열등감과 수치심, 이제껏 페드로가 그의 실력을 폄하하며 모욕을 주었던 모든 일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계속 거슬렸는데… 내 경고하마.’

‘내 천사를 볼 때는 존경심을 담아라.’

‘그따위 저급한 공포가 아닌, 존경심 말이다.’

바짝 다가왔던 페드로의 속삭임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황실을 무너트리기 위해 수백, 수천의 백성을 학살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던 에스메랄다 앞에서 저도 모르게 종종 긴장하고 공포를 느낄 때가 있었다. 그걸 알아본 페드로의 경고가 지금에 와서는 비수가 되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꿈꿔 보지도 못했던 복수의 길을 제시하는 것도 모자라 앞장서서 개척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곁에 서 있는 페드로와 자신 사이에 있는 격차가 열등감이 되어서 찾아왔다. 가문이 몰락하며 혼자 남겨진 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술에 찌들어 살았던 반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중앙군 소속의 상급 기사 하나 따돌리지 못할 것이라던 페드로의 평가를 부정할 수 없게 된 지금이 비참했다.

상급의 마나 운용법? 몸에 좋은 약제와 음식들? 그게 다 변명이라는 걸 눈앞의 종자들이 증명해 주었다.

종자들은 정식 기사 서임을 받기 전까지 최하급의 마나 운용법을 이용해 심장에 마나를 쌓는다. 친화력 외에도 운용법의 질에 따라 마나가 쌓이는 속도가 다르니, 양에서는 시리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페드로의 종자들과 순수한 검술 대련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10대 후반의 종자들은 20대 중반인 그보다 검술 실력도 기초 체력도 좋았다.

시리스는 훈련 3일 차가 되었을 때, 페드로가 자신을 못마땅해한 이유를 찾았다. 위험한 길을 가는 에스메랄다의 곁에 본인이 가르치는 종자보다 못한 놈이 붙어 있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겠지. 시리스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팔을 휘둘렀다.

페드로에게 훈련을 받기 시작한 후로 마실 수 있는 액체나 음식의 종류와 양이 철저하게 제한되었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고 육류, 채소, 과일 등이 주방장에게 전달된 식단에 한정되는 것은 물론 차도 함부로 마실 수 없다.

수면 역시 그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시간만 잘 수 있었다. 침실에 들어간 직후 잠들지 않고 조금만 딴짓을 해도 다음 날 훈련이 버거워진다. 인간이 아닌 기사를 만드는 과정은 금화 몇백 개가 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급 마나 운용법? 그런 건 급한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부지런하고, 조금 더 철저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검을 든 지 15년 만에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리스가 그것을 모르는 동안 테노리엘에 소속된 기사와 종자, 병사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행해 오고 있었다. 이러니 실력 차이가 날 수밖에.

시리스는 연무장에 다녀온 페드로가 매번 물속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차이를 메꾸고자 이를 악물었다.

에스메랄다가 가는 길을 어떻게든 쫓아가야만 했다.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해내면서 낙오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황제의 앞에 도달해 그놈의 심장에 검을 꽂을 수 있다. 지금 실력으로는 안 된다. 중앙군의 상급 기사 한 명도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은 짐이다. 그는 근육이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검을 내리그었다.

2권에 계속

주석

1) 이른 새벽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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