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기대감
테노리엘 영주 성이 위치한 서쪽의 끝에는 아르페시스가 직접 이끌 본진 병력이 모여 있다. 영주 성의 동쪽을 향해 순차적으로 1, 2, 3부대가 있고 게르간 자작을 필두로 한 3부대가 서부의 동쪽 끝 지점에서 저지선을 형성 중이다.
“충돌 예상지는 어떤 곳이지?”
충돌 지점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 받았지만 아르페시스는 서부 지리를 모른다. 그 지점에 어떤 지형이 형성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다시 구체적으로 물어야만 했다. 테노리엘 가문이 행정 업무 및 군사 업무 지원을 위해 붙여 준 기사가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답했다.
“마수들이 본진 방향으로 이동할 경우 라흐나 마을 인근, 1부대 쪽으로 이동할 경우에는 솔브 숲 내에서 교전하게 됩니다. 현재 라흐나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이곳으로 대피해 있는 실정이라 마을은 비어 있는 상황입니다.”
조약돌 대신 지도 위를 훑어 내리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기사가 가리킨 곳에 멈추었다. 노란 연기가 올라온 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인간의 발로는 20시간 정도는 걸어야 하는 거리다. 지휘부에서 예상하는 충돌 지역은 본진과 1부대에서 약 4시간 거리. 보병이 포함된 인간의 발보다 마수의 발이 빠르니 어쩔 수 없다.
작은 마을 두어 개가 위치한 지역의 근방, 아르페시스는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마수들의 돌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물들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인간들의 시야를 제한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교전을 하는 게 옳은 건가? 아니면 조금 후방으로 빠지더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지역에서 기다려야 하나? 그러다 퇴각을 하게 되면? 영주 성과 너무 가깝지 않은가?
어느 것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망설이게 된다. 경험의 부재가 그 망설임을 부추겼다.
“예상 지역보다 후방에서 진형을 갖추고 응전할 경우 가능한 전략은?”
“이동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함정을 준비하기엔 촉박합니다. 대신 지형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라흐나 마을 인근에는 솔브 숲과 연결된 암석 지대가 존재합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의 시선이 문가에 닿았다. 조금 전 돌아간 에스메랄다라면 어떻게 했을까.
“해당 지역에서 병사들을 미리 배치시켜 암석을 떨어트리면? 그것이 마수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나?”
“대다수의 암석이 소형 마수의 체격만 하니 마수들이 본진 쪽으로 이동한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합니다. 인근 지역에서 미끼로 마수들을 유인하면 해당 지역으로 유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럼 시도해 보지. 아직 병력 편성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교전을 유도해야 한다.”
“예, 사령관님.”
군사 지도 앞에서 곧 있을 전투에 대한 계획을 짜는 내내, 에스메랄다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숨결에서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입 속의 여린 살을 깨물기라도 한 것처럼. 아르페시스는 그 작은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말을 하기 위해 입 안을 깨무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말은 결국, 그 말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신보다 어린 소녀가 공포, 연민, 자책감을 알고, 그것을 외면해야만 하는 사령관의 자세를 알려 주기 위해 노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어떻게 이리도 강렬한 충격을 그에게 안겨 주는 걸까.
복잡한 와중에도 최종적인 교전 계획을 확립했을 무렵, 휴고가 무장을 끝마친 근위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에 아르페시스는 사령관실을 나섰다. 침실에서 관리 중인 갑옷을 걸치기 위해서. 근위대의 갑옷이 만드는 마찰음이 그의 걸음 뒤로 따라붙었다.
침실로 돌아와 시종들의 도움으로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한 아르페시스는 아직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에스메랄다를 지우기 위해 심호흡했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마수와의 전투이다. 딴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다.
출전 명령이 내려진다고 당장 갑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적군을 발견했다고 곧장 교전이 시작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찰병과 관측병이 존재하는 이유는 본 병력보다 적군을 먼저 발견하고, 대규모 군대가 전투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2인 1조로 움직이는 정찰병과 관측병으로부터 신호가 오면 전투를 할 병사들이 갑옷과 투구, 무기와 말 등 각종 무장을 챙기며 준비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투병이 준비하는 동안 지원병은 천막이나 약제, 식량 등의 물자를 챙긴다.
전시 체제에서는 그 모든 것을 1시간 내에 준비하여 출정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니 최소한의 여유는 남아 있었다. 갑옷을 완전히 갖춰 입은 후 아르페시스는 검을 집어 들기 전 노크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라.”
그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휴고가 용건을 읊었다.
“테노리엘 경이 방문했습니다.”
아르페시스는 뜬금없는 방문자의 이름에 살짝 놀랐지만 곧 페드로를 안으로 들였다. 간편한 복장과 땀으로 범벅된 모습을 보건대 연무장에 있다가 온 것 같았다. 휴고가 문을 닫고 나가자 페드로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어쩐 일인가?”
시종들의 손길을 거절하고 직접 허리에 검을 차던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직접 출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사령관이 후방에 숨어서 좋을 것이 어디 있다고. 아무리 불리했다 하나 퇴각으로 마수에게서 도망친 전적이 있으니 또 한 번의 회피는 군의 사기에 좋지 않을 것이다.”
테노리엘이 아르페시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들은 그들의 의무가 아니었다. 서부에서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에 적당한 거래 상대방이 아르페시스였으니 전적으로 돕는 것이겠지.
그것을 알고 있지만 테노리엘이 제공한 도움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영주들이 하지 못한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으니까. 이 때문에 아르페시스는 테노리엘이라는 가문 자체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에스메랄다가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직 연합군 창설조차 못 하고 어영부영, 물자만 낭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페드로는 그의 옆에 붙어 있던 황제의 기사들을 떼어 내 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것이 비록 테노리엘의 영토 안에 황제의 인사를 들여보내지 않기 위한 행동이라고 해도, 아르페시스가 도움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대뜸 찾아온 페드로와의 대화도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진 채 응하는 중이었다.
“호위는 근위대만 대동하실 생각입니까?”
“기사들의 수가 부족한데 내 안전을 챙기자고 따로 차출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테노리엘의 기사들을 데려가시지요.”
견갑을 차고 허리에 검을 매려던 아르페시스의 손이 뚝, 멈추었다. 그는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테노리엘은 이미 보유 중인 기사 1천 5백 중 1천을 연합군에 내어 놓았다. 실질적으로 국경과 영주 성을 지키는 병력 외의 모든 전력을 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들을 2백에서 5백에 맞추어 보내었던 다른 가문보다 많은 수였다. 그런데 거기서 더?
“테노리엘이 내 안전을 그렇게까지 위할 이유가 있나?”
지나친 호의다. 테노리엘의 인사들이 가진 훌륭함, 그들과 자신의 처지에 놓인 이해관계를 전부 따지더라도 지나치다.
그는 이유 없는 호의는 경계를 하는 버릇이 있다. 그 호의를 대가로 상대방이 무얼 요구할지 모르니까. 황제가 자신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이 훗날의 목숨값임인 것처럼.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 편한 시중, 훌륭한 무구, 그리고 황족이라는 이름까지. 그가 바라지 않았음에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택지조차 없이 받아 버린 것들의 대가로 미래를 빼앗기지 않았나.
아르페시스가 이제까지 테노리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은 건, 그들이 서부 연합군을 지원함으로써 얻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서부는 테노리엘의 영지가 있는 곳이니 그들 역시 지켜야 할 이유가 있다. 어찌 보면 테노리엘은 서부 연합군을 이용해서 자신의 터전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 호위 기사까지 내어 주겠다니? 그것은 이유가 없는 호의였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황자 전하이신데.”
머리 하나가 더 있다시피 큰 페드로를 올려다보던 아르페시스의 눈에 처음으로 경계심이 서렸다.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하겠다고? 고작 황제의 장기 말이 되기 위해 황자가 된 그를?
이 시대에 누가 그 헛소리를 믿을까. 테노리엘이 황실을 경멸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불필요한 호의는 거절하지.”
“불필요하지는 않으실 텐데요.”
페드로가 문이 있는 방향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난전이 시작되면 10명도 안 되는 기사로는 안전을 장담하기 힘듭니다. 그 기사들이 마수와의 난전에 경험이 없다는 것은 물론, 그 사이에 방해꾼이 끼어 있다면 더더욱 힘들지요.”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페드로의 것을 따라갔다. 입을 꽉 닫은 침실의 문,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을 이들은 완전히 잘라 내지 못한 황제의 검들이다. 명령이 내려오기만 하면 그를 지키는 게 아니라 죽이려 들 검.
“의심스러우시더라도 받아 가십시오.”
노골적인 단어를 선택한 대화였다. 의도와 목적을 숨기며 빙빙 돌아가는 대화보다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르페시스는 무턱대고 타인의 호의를 받을 정도로 다정한 세상에서 자라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난 필요 없…….”
“제 천사라면 기꺼이 내어 드릴 겁니다.”
분명히 거절하려고 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페드로가 저런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왜 그녀가…….”
“사실 제가 내어 드리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영주권은 그 아이에게 있기 때문에 영지에 귀속된 사병도 결국은 그 아이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지요.”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아래에서부터 쭉 훑어보는 페드로의 시선 앞에서 침묵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추가적인 사병을 기꺼이 내어 줄 거라고? 어째서?
“제 천사는 하루의 대부분을 영주의 집무실에서 보냅니다. 찾아가 보시기를.”
그 말을 끝으로 페드로는 침실을 나섰다.
* * *
황도에서의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는 중이었다. 돈이라는 먹잇감 앞에서 순한 강아지가 된 이들이 그녀의 손발이 되어 주고 있다. 아마 서부 연합군이 출정해 전투를 하고 있을 때쯤이면 마무리가 될 터.
「몰래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쪽은 제가 먹었고, 카르크 밑에 있는 놈으로부터 내부 정보를 들었습니다. 곧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면 제가 전부 먹을 수 있습니다. 독을 먹은 놈들도 지금 내분으로 난리가 나서 금방 삼킬 수 있고요. 문제는 최근 들어 황도 치안대가 끼어드는 일이 많은데, 그것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들쭉날쭉, 정갈하지 못한 글씨가 꽉 채워진 서신에는 귀족들이 잘 쓰지 않는 에림어가 적혀 있었다.
제국의 문맹률은 무척이나 낮은데, 이는 제국이 사용하는 에렘어가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말로써 하는 언어는 같으나, 글로써 쓰는 언어가 2개로 구분된다는 특징. 보통은 평민들이나 쓰는 에림어는 발음 그대로 쓰이나, 귀족들이 쓰는 에렘어는 접두와 접미, 특정 단어 중간중간에 다른 철자가 쓰인다. 그런 이유로, 에렘어보다는 에림어가 짧은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글자로서 정보를 통제할 수 있기에 귀족들은 평민들이 에림어를 배우는 것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귀족들이 평민들이 받는 최소한의 문자 교육을 묵인했기 때문에 에렘의 문맹률이 낮은 것이다. 그 덕에 황성의 말단 관료 중에는 평민들도 소수 포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림어가 에렘어보다 짧다고 해서 일반적인 서신보다 공간이 좁은 전서구용 서신에 이렇게 어미를 많이 붙이다니. 보고란 기본적으로 간결하고 명확해야 한다. 밑으로 귀속시키면 교육부터 시켜야 할 상황이다. 아니면 루그레디안에게 쥐여 주고 그로부터 총괄 보고를 받든가.
돈과 권력에 휘둘리는 건달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둘 수는 없다. 지금에야 눈앞에 놓인 뒷골목 수장이라는 먹잇감에 정신이 팔려 하라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받아먹지만…….
멀리 있는 그녀는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 먹잇감을 제시하면 배신을 할 수도 있다. 그들을 하나로 묶더라도 그 위에서 더 큰 돈과 권력으로 억눌러 줄 사람이 필요했다. 에스메랄다의 생각으로 거기에 가장 적합한 게 루그레디안이었다.
동부의 뒷골목은 아브람 백작의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황도의 뒷골목도 그렇게 만들면 좋을 텐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가 모르지 않을 텐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그가 있으면 지금 건달이 요구한 치안대의 문제도 조금 더 쉽게 해결이 가능할 것 같은데…….
「카 65일까지 해결 예정.」
짧게 끝난 서신을 책상 끝으로 밀어내자 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집었다. 이 서신을 옆방의 전서구에게 달아 날려 보낸 후 다시 돌아와 하던 일을 마저 하겠지.
에스메랄다는 찌그러진 글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루그레디안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협조가 없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다시 황도로 움직여 남부 출신의 반황실 세력을 직접 포섭해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 황제의 눈은 피할 수 없을 테고 반드시 그의 시야에 포착될 것이다. 숨어서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녀가 황제에게 노출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영주권 때문에 벌써 주시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더 몸을 사려야지.”
에스메랄다는 너무 어린 나이에 부친으로부터 영주권을 위임받았다.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시선을 끌 만한 일이었다. 가문 내부의 일이기에 황제가 간섭하지 못했을 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그녀가 부친과 형제들이 전선과 정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지를 전담한다, 정도지만.
만약 그가 에스메랄다의 행보를 생각보다 깊게 주시하고 있다면 영지 내에서 일어난 뒷골목 청소에 대해서 심도 있게 파헤치는 일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각 지역의 뒷골목이 정리,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테노리엘 영지가 정리된 후였으니…….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나, 찾고자 한다면 심증은 가질 수 있으리라.
“루그레디안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면 좋으련만.”
아직은 그녀가 직접 움직이기는 이르다. 그녀를 대신해 귀족들 앞에 서 줄 루그레디안이 필요하다. 어쩌면 너무 적나라한 접근이었기에 그가 조련석의 한쪽을 집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아…….”
골이 아프다.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갯짓 소리, 전서구가 오고 있다.
루그레디안의 것일까? 하고 내다보았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전서구는 그녀가 있는 집무실이 아닌 옆방으로 향했다. 그에게 건네주었던 조련석과 쌍을 이루는 것은 집무실에 있는데.
조금 전 옆방으로 갔던 히나가 방금 도착한 서신을 가지고 그녀에게 왔다. 공개하지 않은 금광에서 자금을 보냈다는 서신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루그레디안의 침묵에 초조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의 합류가 최선의 선택이지만 없다 하더라도 그녀가 세운 계획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과거로 되돌아온 그녀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천천히, 차근차근, 한 발자국씩 내디디면 될 일.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녀의 귀에 노크 소리가 닿았다.
“들어오렴.”
집무실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황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집무실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타인이 봐선 안 되는 수많은 서신들. 그녀의 입술을 타고 살짝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영주의 집무실 좌측은 개인 서재, 우측은 개인 응접실이니 아르페시스를 맞을 공간은 응접실뿐이다.
“응접실로 모시렴.”
“예,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아브람 백작에게 보낼 답신을 작성해 일어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히나에게 전서구를 한 마리 가져오라 할 것을. 며칠 동안 날아 도착한 전서구에게 줄 먹이, 물, 그리고 깃털 등을 서류가 가득한 집무실에 둘 수 없어서 옆 서재를 전서구 방으로 만든 것인데…….
발신을 하는 서신의 수가 많아질수록 번거로워지고 있었다. 라그나가 빨리 마법 전보를 만들어 준다면 편할 텐데. 챙긴 서신을 히나에게 쥐여 준 그녀가 말했다.
“동부로.”
“예, 아가씨.”
그녀가 집무실과 응접실이 연결된 내문으로 다가갔다.
“황자 전하를…….”
그곳을 지나 응접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아르페시스를 발견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공간도, 시간도 다르건만. 리퀘나성에서 그가 사용하던 사령관실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편안한 태도로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아르페시스의 모습이, 딱딱하고 낡은 사령관실에 앉아 있던 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뵙… 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왔나?’
반갑게 웃으며 새로이 장만했던 소파로 안내하던 그의 모습이 환상처럼 아른거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살짝 당혹감이 서렸다.
당황한 것은 에스메랄다 역시 같았다. 조금 전 사령관실에서도 그렇고, 지금 이 응접실에서도 그렇고. 이제는 보지 못할 그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다. 지워진 시간 속에서 나누었던 교류가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온다는 건… 그건 그녀가 그 순간을,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의미다.
앓는 소리가 흘러 나갔다. 그것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인지한 그녀는 생각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황성 연회에서의 그 마주침조차 없었어야 할 정도로, 물리적 거리를 확연하게 벌려 두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환청을 정리하며 그를 향한 그리움 역시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자꾸만 사라진 시간 속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 그와 공유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가 버린다.
“많이 바쁜가?”
“……괜찮습니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봐도 그녀는 괜찮지 않아 보였으니까.
고작 1시간 전쯤, 사령관실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그녀의 얼굴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이 업무의 과중함이 가져온 피로 때문인지, 다른 개인적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분하던 그녀의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그는 괜히 찾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도 기왕 찾아온 것, 말이라도 꺼내 보자 싶어 입을 열었다. 페드로가 쥐여 준 ‘기꺼이’라는 선물이 그 행동을 부추겼다.
“바쁜 것 같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겠다.”
에스메랄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계속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라 염치가 없다만, 그대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다.”
“어떤 부분을 이르시는지요?”
“근위대 문제다. 황제가 내게 붙여 준 간자들이 아직 있는 상황에서 내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9명뿐이지.”
“호위 문제 말씀이시군요.”
아르페시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노리엘은 이미 가장 많은 기사를 내어 주었다. 그런 와중에 개인의 안전을 위해 추가 차출을 요청하는 건 과했다. 할 만큼 한 테노리엘이 추가적으로 기사를 차출해 줄 이유가 없다. 그게 정상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르페시스는 여기에 와 있었다. 묘한 기대감 때문에.
말을 마친 후 답을 기다리는 아르페시스의 앞에서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살을 다시 한번 깨물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가면을 제대로 쓰기 위해 통증으로 채찍질을 하는 건 그녀의 버릇이었다. 지금 그녀가 억누르고 있는 것은 3년 전 직접 시궁창에 집어넣은 희망, 혹은 기대감이었다.
아르페시스가 지금의 용건으로 찾아온 것은 그녀에게 호감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기사를 한가득 내어 놓은 테노리엘에게 추가적인 기사를 요청하는 건 과했다. 에스메랄다의 눈에는 지금 아르페시스가 하는 행동이 이득과 관계없는 사적인 호의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에스메랄다가 침묵하자 아르페시스가 조금 쓰게 웃으며 먼저 말을 이었다.
“테노리엘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 내가 꺼낸 말이 얼마나 염치가 없는 것인지도 알고.”
아르페시스가 더 이상의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없던 얘기로 하지. 시간을 내주어 고마웠다.”
에스메랄다는 홀린 듯이 그런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와 달리 그는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의 안전을 위해 사병을 소모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그리움이건, 신뢰건 모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아 외면하는 것이 맞다. 미래와 달리 그가 일찍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와는 상관없다. 스스로를 타이르는 에스메랄다에게 지긋지긋한 환청이 들려왔다.
‘에스메랄다!’
에렘 제국에서 군대의 총사령관이 대동 가능한 호위의 수는 최대 20명. 그 아래로는 개별 병력을 통솔하는 수석 지휘관이 10명, 차석 지휘관의 권한을 가진 이가 5명의 호위를 대동할 수 있다.
이번 전투에 아르페시스가 대동하는 호위는 근위대 14명이 전부다. 모두 마수와의 난전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 그중 5명은 그를 지키기보다 감시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몸을 던지기보다 몸을 뺄 만한 이들.
아르페시스가 응접실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에스메랄다는 다급히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내어 드리겠습니다.”
입을 다물어라.
“근위대가 9명뿐이니…….”
충동으로 일을 그르치는 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에스메랄다의 의지는 말을 통제하지 못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자신을 마주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았을 텐데.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스메랄다는 은회색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보았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한때, 그의 시선을 홀로 독차지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순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정확히는… 14명이지.”
그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호의를 베풀어 주겠다면 거절하지 않겠다.”
“……늦지 않도록 준비시키겠습니다.”
“……고맙다.”
인간은 어째서 이리도 미련하고 어리석을까. 미래와 달리 그가 일찍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그럴 리가, 그가 자신과 다른 길을 가더라도, 자신의 일을 방해하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에스메랄다는 지워진 시간에서도, 새로이 시작된 시간에서도 아르페시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든 절대 변하지 않는 전제였다. 에스메랄다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리가 없다며 외면하고, 스스로의 착각이라고 꾸짖고 싶었다.
대체 이 지긋지긋한 감정은 어떻게 해야 잘라 낼 수 있지? 포기하고, 정리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여전히 품고 있다. 방금 전 그녀를 찾아와 사적인 호의를 바라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기대감을 품었던 것이 그 증거다.
“어리석기는…….”
아직까지 인간의 것을 속에 품고 있다니. 검게 불타오르는 복수심은 어째서 이런 괴로운 감정들을 쫓아내 주질 않지?
그녀가 다다르고자 하는 곳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도 가뿐히 갈 수 있는 순탄한 길도 아니건만, 어째서 계속 다른 것에 현혹되는 것인가.
불필요에 대한 이유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결국 몇몇 기사를 골라 집무실로 불러올렸다.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되어 버리자 그녀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대신 지금의 멍청한 행동에 변명을 덮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황제의 기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