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8화 (8/45)

제8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

이전의 두 번과는 달리 오늘은 그 어떤 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은 뿌연 시야에 비치는 것들은 사람, 가구, 어딘지 모를 공간. 아르페시스는 잠시 그 낯선 광경을 주시했으나, 곧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은 채 꿈에 동화되었다.

‘남쪽 성문을 지나셨다고 합니다.’

‘그래?’

문을 열고 들어온 휴고의 말에 들뜬 목소리가 반문했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낯선 목소리.

리퀘나 사령관저는 물론, 관저의 3층 중앙에 위치한 사령관실 역시 남쪽을 보고 있다. 그렇기에 정문으로 들어오려면 시가지를 살짝 돌아와야 한다. 애초에 중앙 리퀘나는 절벽을 등진 채 남쪽으로 나 있기에 북쪽 성문이 없는 곳이기도 했고.

리퀘나의 성문이 북쪽에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럼 북쪽 성문을 지난 마차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볼 수 있을 텐데.

아르페시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익숙한 위치, 익숙한 광경,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익숙한 마차 한 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린아이가 바라던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충만한 만족감이 그를 채웠다. 멀리서 보이는 마차는 내성의 성문을 지나 안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점차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147일 만인가…….’

‘대체 언제쯤 고하실 겁니까?’

‘……글쎄.’

반가운 미소 위에 씁쓸함이 덧그려졌다. 말하지 못한다. 말할 수 없다. 그랬다간 모든 것이 끝나 버릴 테니까.

마차는 그가 있는 건물의 앞에 멈추어 섰다. 아르페시스는 창문을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

마차에서 내린 사람의 시선을 독점할 수 있는 부름. 허리까지 굽이치는 금발이 햇살 아래에서 반짝거렸고, 그를 사로잡아 포로로 만든 녹안의 빛은 변한 것 없이 푸르렀다.

‘---!’

반가움에 흔든 손짓에 그 사람 역시 반가움이 담긴 손짓을 돌려주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지난 147일 동안 그에게 지독한 갈증을 선사했던 그리움이 저 미소 하나에 아주 잠시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지금 올라갈게!’

‘알겠다!’

빨리 와서 재회의 포옹을 해 줘. 그것으로 지독한 욕망을 채워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채워야 다시금 이 순간을 기다릴 수 있을 테니까. 말할 수 없는 본심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속으로 돌아갔다.

“헉……!”

아르페시스는 단말마 같은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누구지? 어디였지? 뭐가 어떻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다.

방금 그것이 정말 꿈이었는지, 아니면 현실에서 정말 벌어진 일인데 그 일 직후 기절을 해서 기억이 끊긴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글만 가득하던 장면을 볼 때보다 더 현실 같은 꿈. 그 길지 않은 문장을 떠올린 후에야 아르페시스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확신을 얻고 현실 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개꿈…….”

그는 식은땀으로 젖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화마와 색채뿐인 악몽이 또 변했다. 꿈속에서 느꼈던 그리움, 반가움, 그리고 그 지저에 깔린 음습한…….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이 기괴한 꿈은 대체 왜 그를 찾아오는 것일까.

“후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르페시스가 속에 가득 찬 답답함을 한숨으로 토로했다. 그의 손은 갑옷 속에 넣어 왔던 두 장의 종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대륙력 1444년 카 76일.」

「대륙력 1441년 라 2일.」

기가 막힌 숫자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은 물론, 거기서 그를 찾아오던 감정까지. 그리고 조금 전 꾼 그 이상한 꿈. 금발, 녹안, 그리고 앳된 티가 사라진 외관, 에스메랄다였다.

지금의 소녀 같은 외관이 아니라 어엿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한 그 감정들은 대체 뭐지? 그가 서 있던 공간은 또 어디고? 휴고의 모습이 지금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건 또 무얼 의미하나? 낯설고 낮은 목소리는 그의 것인가?

“미치겠군…….”

아르페시스는 풀어낼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땀으로 젖어 있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 * *

첫 전투는 난전이 아닌 수성이었기에 큰 피해 없이 끝냈다. 외성 외부의 건물 보수 및 마수의 사체를 처분하는 등의 후속 처리가 남았지만, 애당초 계획대로 병력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제는 북상하며 집결하기 시작할 마수들을 막고 점차적으로 밀어내 서부의 영토에서 마수를 제거하는 일이 남았다.

서부에 발을 들인 마수들 때문에 중부와 서부의 경계선 일부에도 중앙군이 포진된 상태.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무력하게 도망가서 중부가 엉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중서 경계선에 배치된 책임자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바 에타 테노리엘 노만, 중앙군 1만 5천의 지휘자로 임명. 중부 경계선에 저지선을 형성하기 위해 오는 카 56일 출정 예정.」

그녀의 부친이 직접 나섰다. 이로써 황제가 서부 연합군의 창설 허가를 미룬 이유가 명확해졌다.

황제는 아르페시스를 먼저 보내 둔 후 테노리엘 백작이 올릴 서부 연합군 청원서를 기다린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테노리엘 백작이 총사령관이 되는 일을 방해할 수 있으니까. 백작보다 더 적합한 황실의 인사가 이미 서부로 가 있는 상태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어느 정도 추측했던 부분이니 큰 문제가 없다. 에스메랄다는 마도구로 서신을 태워 버리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아르페시스가 도착하기 전 각 영지에 서부 저지선에 대한 소식과 사병 차출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제는 그녀가 원하는 반응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서남 경계선으로 출정했던 서부 영주들의 사병은 이미 탈영병이 되어 6할 이상은 위치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것도 일이다.

테노리엘 백작령의 동쪽은 레트몬 백작령의 영역. 이후 연합군은 테노리엘과 레트몬의 영지에 걸쳐 저지선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쿠베트 후작가의 봉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은 이미 마수에게 둘러싸인 상태니 그들의 추가 병력이 연합군에 합류하기 힘들다. 이후 연합군이 남하할 때까지 각자가 성내에서 버티는 방법밖에는 없다. 성벽이 없는 마을 단위는 궤멸할 테지.

연합군 편성에서 중요한 건 동쪽도, 남쪽도 아닌 북쪽이다. 테노리엘 백작가의 봉신들이 나눠 받은 영지는 백작 성으로부터 북쪽에 포진해 있다. 최소 하루, 최대 사흘 거리.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인 서부의 특성상 나흘 차부터는 다른 백후공의 봉신들이 나눠 받은 영지가 있다.

테노리엘의 봉신들에게는 황도에 요청한 아르페시스의 총사령관 임명장이 내려오기도 전에 징집 전령이 도착할 것이다. 시기가 맞지 않지만 그들은 두말하지 않고 병력을 차출해 보낼 것이다. 돈과 권력이 아닌 명예를 위해 테노리엘을 따르는 이들이니까.

반면 백작령의 북쪽에 있는 다른 가문의 봉신들, 그들에게 전령이 도착하는 것은 나흘 차부터다. 전서구가 백작령에서 황도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하루하고 반나절.

연합군이 창설될 경우 사병의 원활한 차출을 위해서라도 총사령관의 임명장은 연합군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는 지역의 영주에게 모두 보내도록 군법이 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늦어도 사흘에서 닷새 사이에 황실의 전서구가 서부의 영지 곳곳에 퍼져 나갈 것이다.

황실의 것이라는 황금 깃 낙인이 찍혀 있는 전서구가 하늘을 날아갈 때가 다가왔다. 이미 대다수의 서부 영주들이 서남 경계선으로 일정 규모의 사병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수의 병력이 황권 아래에 차출될 예정이다. 총사령관 임명장이 각 영지에 도착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에스메랄다가 보낸 전령들이 사병 차출 서신을 전달하는 이유였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시기를 맞춰야지. 황실의 임명장도 없는 상황에서 아르페시스의 이름으로 병력을 차출하면 황자가 황제에게 하는 월권 행위가 되고, 그건 반역이다.

서부의 영주들은 대부분 북부의 별장으로 이동했을 시기. 그들이 버리고 간 기사단 단장, 혹은 관료들이 결정권을 위임받았거나 전서구를 통해 명령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영지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보내도록 만들려면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 주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히나가 옆방에서 데려온 전서구의 발통에 서신을 끼워 넣었다. 시리스가 들고 간 조련석으로 길든 전서구였다.

아비체룬의 국경 쪽으로 향했던 두 명의 용병에게서는 이미 소식이 도착했다. 함께 출발했던 세작들을 경계 지역 너머로 보내는 데 성공한 그들은 이제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머물며 아비체룬으로 넘어간 세작들의 소식을 기다릴 것이다. 1년, 2년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릴 소식을.

이미 돌아가야 할 자리로 귀환한 그들과 달리 시리스의 귀환은 조금 더 늦어질 것이다. 사병 차출의 원활함을 위해 손을 조금 써 두어야 할 것 같으니까.

창문을 열어 새를 날려 보내자 그녀를 향한 질문이 날아왔다.

“이번 전서구는 누구에게 가는 것이니?”

“답해 드려야 할 이유가 없군요.”

영주 대리인 그녀는 본래라면 영주가 사용해야 할 집무실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페드로가 함께였다.

“내가 맞춰 보마.”

페드로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을 곱씹는 듯 보였다.

“북쪽에 포진한 서부의 영지.”

에스메랄다는 틀린 답을 내놓은 페드로를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과 그의 다정함에 흔들리고 있다는 본심까지 함께. 하지만 이어서 나온 말 때문에 페드로를 무시하기 힘들어졌다.

“해당 지역의 민가에 마수를 보내려면 그 용병 놈을 이용해야겠지. 그 녀석에게 가는 것이구나.”

“…….”

“아비체룬의 국경을 넘겼던 것처럼 마수를 위로 보내 벌써 북부로 도망간 영주들에게 경고하려는 것이지? 병력을 모조리 내어 주지 않으면 네놈들의 영지가 쑥대밭이 될 거라고.”

영지는 영주의 근간이다. 세금은 그들의 재력이 되고, 영지민은 유사시의 군력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근간이 망가질 것이라는 경고. 에스메랄다가 놓은 수를 페드로는 정확히 읽어 냈다.

날붙이처럼 날카로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에스메랄다는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펜을 놀렸다. 황도에선 그녀가 집어삼켜야 할 먹잇감들이 요리되는 중이다. 서부 저지선을 지키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떠벌리면 어찌하려고? 가령 아버지께 말이다.”

“뜻대로 하세요.”

그렇다면 에스메랄다는 테노리엘 백작의 방해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루그레디안이 테몬 후작가를 먹기 위해 했던 짓을 따라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 내가 아직 여기에 앉아 있겠지. 이미 나에게 들킬 만큼 들키지 않았니? 거짓말은 그만두려무나.”

“제가 왜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시죠?”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니까.”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깃펜이 과한 힘에 눌리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팍, 하는 단조로운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드로가 성큼성큼 다가와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아챘다.

“다치지는 않았구나. 조심해야지.”

펜촉 바로 위에서 부러진 깃펜이 그의 손길에 의해서 에스메랄다를 떠났다. 그녀는 입 속의 여린 살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스스로가 시리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한 감정에 흔들리지 말거라.’

‘앞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뒤돌아보지도 마라.’

이제 와 손에 묻힌 피를 씻어 낼 것도 아니면서 돌아봐 무얼 하려고. 그녀는 피로 만든 길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황실을 무너트릴 기반을 쌓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 할 생각이었다.

타인의 가족을 무참히 짓밟았듯 자신의 가족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세뇌라도 시키려는 듯이,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뒤에 닿아 있는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온기가 에스메랄다를 몰아붙이고 있다.

* * *

“뜬금없지만.”

에스메랄다는 하루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아르페시스와 만찬을 함께하기 위해 내려온 참이었다. 연합군 문제에 대해 그에게 보고해야 할 것도 있고, 황족을 손님으로 맞이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를 보는 건 괴로웠다. 연회장의 복도에서 그를 피해 도망쳤을 때처럼, 심장이 아파서 생각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엇 때문에 시작된 통증인지 알 길이 없어 무언가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속에서는 버거운 것들이 태풍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지만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고요함을 띠고 있었다. 10여 년의 정계 생활이 그녀에게 쥐여 준 가면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영애의 생일이 언제지?”

함께 자리한 페드로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에스메랄다는 보지 못했다. 초조하거나 어색할 때나 나오는 버릇,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딴 곳을 훑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긴장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벅찼다. 그렇다고 황자가 하문한 것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카의 76일에 태어났습니다.”

“……망할.”

아르페시스의 입에서 나온 욕설에 당황한 티를 내지 않은 건 역시나 오래도록 써 온 가면 덕분이었다.

“아… 영애에게 한 말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복잡한 일이 있어서. 미안, 미안하군.”

“……예.”

사용인들이 음식을 가져오는 동안, 아르페시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해 댔다.

그는 음식이 나온 후에도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팔짱을 낀 채 음식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불…….”

“……예?”

황족인 아르페시스가 식기를 들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툭, 튀어나온 말은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불이라니? 에스메랄다가 의문을 내비칠 때 아르페시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불에… 그러니까. 불에 다치거나, 둘러싸이거나… 뭐든, 불로 인해 위험해진 적이 있나?”

그 순간 에스메라다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딱딱하게 굳은 눈동자가 아르페시스를 주시했다. 불이라고.

페드로와 달리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 대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불을 언급하고 있는 아르페시스를 인지한 순간 깨달음이 그녀를 덮쳐 왔다. 아, 이거였구나. 심장이 쥐어짜지는 고통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찾았다.

어렵게 입술을 벌려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기만 했다.

“없… 습니다.”

“……그래?”

에스메랄다의 대답에 아르페시스는 다시 입을 다물고 음식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불이라니. 그녀가 불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딱 한 번이다. 처형대 위로 끌려갔던 그때. 그런데 아르페시스가 그녀와 불을 연관시켜 말하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감춰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스메랄다!’

그가 언급한 불길에 잡아먹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불길을 뚫고 들어왔던 지긋지긋한 환청과 함께.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말고. 정말 뜬금없겠지만 영애가 불을 조심했으면 하는군.”

심각한 표정의 아르페시스가 말했다. 그는 식기를 집어 든 채 음식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불… 말씀이십니까?”

“그래.”

“……담아 두겠습니다.”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아르페시스는 자신만의 생각을 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맞은편에 있던 페드로는 그녀의 반응을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식당을 채웠다. 가장 먼저 혼란을 뒤로 미룬 에스메랄다 덕분에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말씀드리기 송구하나, 전하께서 오시기 전 제 임의로 테노리엘 백작님을 통해 황성에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황성에?”

그도 나름 혼자만의 생각을 떨친 것인지 반문이 이어졌다.

“예, 정식으로 연합군을 창설, 전하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자의적인 이탈을 자행하는 군사들을 규합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허가는 내려왔고?”

“곧 정식 공문이 내려올 것이라 여겨집니다. 서부의 영토가 마수에게 침범당한 이상 사병을 규합할 책임자가 있어야 하고, 중앙군을 대동하여 오신 전하께서 가장 적합하십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에 이채가 서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건 지독히도 힘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시선을 살짝 비켜 내리며 평온을 가장했고, 떨림을 떼어 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한 저의 독단으로 전하의 이름을 사용, 북쪽에 포진한 서부 영지들에게 출정을 요하는 서신을 보내 두었습니다. 월권에 해당하는 행동이나 하루빨리 탈영병들을 다시 규합하고, 위험으로부터 발을 빼려는 이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음을 믿어 주십시오.”

“내 이름? 보내 두었다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전령이 출발했다는 말이겠군.”

“문책하시겠다면 처벌받겠습니다.”

“되었다. 문책까지야. 탈영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서부 저지선은 만들어지지 못할 테니……. 혹시 그 일이 훗날 문제가 될 것 같다면 지휘권을 받는 즉시 면책부를 써 주겠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 그것을 갖춘 것만으로도 그의 훌륭함은 칭송받을 만했다.

자신감이 오만으로 변질되는 수많은 인사들과 달리, 아르페시스는 언제나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며 타인의 의견을 들음에 있어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겸손은 남부군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죄를 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은혜는 무슨……. 따지고 보면 나를 비롯한 이들은 다 테노리엘 덕분에 산 것인데.”

“그게 어찌 테노리엘의 덕이겠습니까, 모두 전하께서…….”

“그건 아니지.”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페시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난 이곳에 발을 들인 것도 처음이고, 황도에 있을 때도 테노리엘의 인사들과 친분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건 절대 나와 연관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그대는 월권으로 인한 죄는 청하면서, 성과로 인한 보상은 등한시 여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을 하던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거나, 초조하거나.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대들의 훌륭함은 내가 직접 목격했으니 그 공을 내게 돌리지 말라. 마땅히 테노리엘이 가져야 하는 것이니.”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아직 임명장이 부재한 상황이 아닌가? 지금의 병력 차출은 잘못하면…….”

“시일을 맞추도록 주의했습니다. 모두 짐작은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도달하여 기록에 남는 일자는 임명 이후가 될 터이니 트집을 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대단하군.”

순수하게 감탄을 내비친 아르페시스가 주제를 바꾸었다.

“그리고 내 따로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하문하시지요.”

“퇴군 신호를 보고 준비한 건가? 어제의 퇴각 작전 말이다. 수성이라 해야 하나?”

“……예, 신호가 올라온 지역과의 거리를 추측할 수 있기에 미리 준비를 했습니다.”

“영애가 직접?”

“모든 이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입니다.”

아르페시스가 확인을 하려는 듯 페드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작전과 군사 배치는 제 누이가 행하였고 저희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페드로는 모든 것을 에스메랄다가 했다고 답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대단하군.”

순수한 감탄이 아르페시스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무언가 더 물어보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그가 했던 질문을 되짚으며 그 원인을 찾아냈다.

“굳이 첨언드리자면.”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답을 재촉했다.

“현재 테노리엘의 영주권은 제게 위임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군.”

그는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었다. 꽤나 후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차마 왜 페드로가 아닌 에스메랄다가 진두지휘를 하는지 물어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놓고 지휘권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긴 힘들었을 테니까.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남부의 영웅이었지만, 정치나 수 싸움처럼 말로 하는 것에는 재능이 없었다. 그녀를 보고 배우며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그는 성년도 되지 못한 소년이다. 그에게 기억이 없다면 미숙할 수밖에 없는 시기다. 기억이 없다면, 말이다.

“곧 테노리엘의 봉신들이 차출해 보낸 사병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을 시작으로 서부 연합군의 편성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미리 해 두자는 것이군. 어차피 임명장은 내려올 터이니.”

“예, 그렇습니다.”

“좋다. 내일부터 행정 업무에 참여하지.”

아르페시스의 의문점을 풀어 준 에스메랄다는 대화를 이어 갔다. 전투는 끝났을지언정 전쟁은 이제 시작이니까.

“테노리엘의 기사들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의견을 알려 주시면 그들이 행정 처리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고맙다. 정말 꼼꼼하군.”

“과찬이십니다.”

접시를 반쯤 비운 아르페시스가 불현듯 물었다.

“기사들이라고 하면… 그대는?”

“예?”

“그대는 편성 업무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인가?”

“예, 테노리엘의 기사들 역시 전하의 의사를 이루기 위해 보필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전하의 뜻대로.”

“내가 조언을 구한다 해도?”

에스메랄다의 입이 다물어졌다. 가능한 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아르페시스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살짝 비켜 간 시선 아래에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겠다.”

에스메랄다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잔을 집어 드는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나름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으나 나는 미숙하다. 지식은 있으나 경험은 없으니까.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 한들 그대처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해내었고, 그건 그대가 나보다 지식을 실전에 활용하는 실력이 훨씬 훌륭하다는 증거다.”

“……과찬이십니다.”

“겸손은 그만하면 되었다. 나는 영애가 직접적으로 편성 업무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만약 영주 대리 업무로 인해 시간이 부족하다면 틈틈이 자문을 구하는 방향으로 가도 좋다.”

“……전하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고맙군.”

아르페시스는 고민거리가 해결되었다는 듯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주들의 사병이 전부 집결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가?”

“보름 전후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그럼 테노리엘의 봉신들이 보내온 사병들을 우선적으로 주요 부대에 배치, 그다음 속속들이 도착하는 다른 영주들의 사병을 부속으로 배치하면 될까?”

“그리하실 경우 편파적인 인사라 하여 다른 영주들이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아르페시스는 조소와 함께 당당한 비꼼을 내어 놓았다. 보지 않으려 했건만 그의 조소에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아르페시스의 얼굴에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편파? 우습군. 실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꼭두각시에 불과한 황자라 한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

“대단하신 황제 폐하께 연합군 창설을 방해하는 반역도들이 여기 있노라 일러바치면 되니 말이다.”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 즐겁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것은 에스메랄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조소였다. 그는 그녀를, 그녀는 그를 닮아 가며 만들어졌던 것. 똑같이 버거운 현실 속에 살면서, 또한 똑같이 버티었기에 만들어졌던 흔적이기도 했다.

그건 에스메랄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고 버거운 현실을 버텨 내는 사람이 그녀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과 싸우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고, 고독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르페시스 덕분이었다.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악행과 음모에도 버텨 냈던 건 그가 지금처럼 자신과 같은 쓰디쓴 조소를 지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힘겹게 버티는 건 너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며 지탱해 주었으니까.

조금 전 찾아냈던 통증의 원인이 커다랗게 몸집을 불리며 그녀를 위협했다.

‘정말 뜬금없겠지만 영애가 불을 조심했으면 하는군.’

비명을 질러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평범한 반응이건만, 에스메랄다는 침묵을 선택해 생각의 가지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의 마지막과 관련된 불을 언급한 이유. 지금의 그가 가질 수 없는 조소를 보이는 이유.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의혹의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가 그녀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보이는 미숙한 모습들은 모두 연극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는 지금처럼 가면을 쓰고 하는 연기를 지독히도 못하던 사람이다. 정말 과거로 돌아오는 것이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되나?

그렇다면 그녀가 죽은 이후부터 아르페시스가 죽기 전까지 있었던 일이 중요해진다. 정치와 기만에 미숙하던 그가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는 의미니까. 그녀가 모르는 일로 인해 능숙해진 연극을 하며 그녀를 관찰 중인 게 맞는다면 기억이 온전하다는 의미가 되겠지.

심장의 통증을 삼킨 에스메랄다의 경계심이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3년간 사라진 시간과 너무나도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의 의혹은 확신만을 남겨 둔 마지막 단계일 수도 있다. 어쩌면 벌써 확신했을지도 모르지. 당장 남부군이라는 무력을 얻지 못했기에 침묵하는 것이고.

“제대로 된 자질과 실력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대에게 자문을 구하는 대신 내 고집을 부려 보지. 믿을 수 없는 이들에게 저지선의 한 축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딴생각으로 넋을 빼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겠군. 잘 부탁한다, 테노리엘 영주 대리.”

에스메랄다는 침묵으로 모든 감정과 말을 삼켰다. 지금은 아니다. 당장은 파고들 수 없는 문제다. 아르페시스가 연극을 하는 중이라면 그녀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사라진 시간 속에서 나누었던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잊지 않았다.

* * *

먹은 것을 모두 체하게 만들 만큼 불편했던 만찬이 끝났다. 에스메랄다는 자신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페드로를 힐끔거리며 식당을 나섰다.

연회장 복도에서 아르페시스를 보고 도망친 이유는 만찬장에서 불이 언급된 순간 명확해졌다. 심장을 옥죈 것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세상에 그를 홀로 남겨 두고 죽어 버렸다는 죄책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심장 속에는 분명 그 죄책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게 정말 싫었다. 페드로와 다른 가족들도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지금의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테니까.

그걸 알기에 에스메랄다는 예전처럼 일방적인 원망을 품는 것이 힘들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들의 입장 같은 건 전혀 살피지 않은 채 마음껏 원망만 할 수 있었을 텐데.

“바로 집무실로 갈 거니?”

허락도 없이 저를 번쩍 안아 드는 페드로에게 날카로운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식사를 거의 하지 않던데, 집무실로 뭐라도 좀 가져오라 할까?”

만약, 페드로가 스스로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면.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다.’

‘다시는 너를 두고 가지 않으마.’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우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을 그대로 해 주겠지. 진심을 담아.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힘들다.

가족들의 죽음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지 못했기에 원망은 사라지지 않건만, 그녀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가족들의 심정 또한 알아 버리기에 용서하고 싶었다. 이 죄책감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그들이 미워 죽을 것 같더니,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후에는 원망의 가시가 물러진다.

어찌나 간사한지. 에스메랄다는 쓰라린 조소를 지으며 자신을 안아 든 페드로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투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은 그녀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또 너를 울렸구나.”

그녀만큼이나 아픈 표정으로 다정한 온기를 내어 주는 페드로가 밉다. 그를 미워하는 스스로가 다시 한번 밉다.

참으로 우습다. 이 감정을 어째서 아르페시스를 통해 알게 된 것일까. 그가 에스메랄다를 비난하고 떠나 버린 것이나, 당시 그들의 사이가 어떠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르페시스는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그녀 스스로가 소중히 여겼던 이를 두고 먼저 죽어 버렸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아르페시스에게 가지는 죄책감을 알지 못했다면 페드로를, 가족들을 마음껏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가족들이 그녀를 먼저 떠나 버렸듯, 에스메랄다도 아르페시스를 먼저 떠났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가족들을 원망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 * *

황도로 서신을 보낸 지 정확히 사흘 만에 아르페시스의 총사령관 위임장이 도착했다. 테노리엘 백작이 직접 황제에게 인가를 받아 냈다는 소식과 함께. 황제의 인장이 찍힌 그 임명장은 황금 깃으로 물든 황실의 전서구가 가져온 것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 후로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백작령의 영주 대리로 대하며 대화를 통해 배움을 청했다.

서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지에서 보내오는 물자들과 속속들이 집결하는 사병의 편성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테노리엘 백작령보다 북쪽 지역으로 일단의 마수가 넘어간 것도, 그로 인해 인명 피해가 다수 발생한 것도 불운한 사고로 포장되었다.

“전하.”

아르페시스는 일전 목격했던 전투를 복기라도 하듯 외성을 자주 방문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 찾아온 참이었다.

그의 곁에는 황성에서부터 그를 따르던 근위 기사가, 그녀의 곁에는 영주 성을 나설 때마다 반드시 동행하기 시작한 페드로가 함께였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부름에 긴장하는 아르페시스의 모습을 티 나지 않게 살폈다. 본래 이 시기의 아르페시스는 출정 준비를 하며 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혐오감을 키울 뿐이다. 매일 죽음의 그림자에 시달리고, 그것을 버텨 내기 위해 이를 악물던 소년.

그렇기에 연회장에서 에스메랄다를 만난 후에도 경계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호적인 태도 역시 취해 왔던 것이다. 경계는 하나, 정말로 전선에서 사용할 물자를 원활하게 조달해 준다면 멀리하기보다는 가까이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호기심과 감탄을 날 것 그대로 내비치고 적극적으로 교류를 청해 온다. 대화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그녀가 본래 알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행동과 다르다. 다름의 이유를 확신할 수 없어 경계심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외성까지 어쩐 일인가?”

어째서? 왜? 페드로에 대해 전부 알지 못했듯, 아르페시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있었기에 생긴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처럼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조심하는 중일 수도 있고.

“탈영을 시도했던 중앙군 2천 중 집결해 있던 1천 4백여 명이 면책을 언급하며 전령을 떠봤다고 합니다.”

경계와 불안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에스메랄다는 감정 대신 이성을 앞세워 우선순위를 정했다.

“……찾은 것인가?”

“예, 테노리엘 백작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이틀 거리, 유스 자작령 근처에 집결해 소규모의 마을로부터 물자를 강탈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다니던 전령이 위치를 포착, 접선 후 눈에 띄지 않는 거리에서 관찰 중에 있습니다. 그 전령으로부터 온 보고입니다.”

서부 연합군 창설과 아르페시스의 총사령관 위임까지 공표되었으니 겁을 먹은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중앙군 소속이라 으스대며 살았으면서, 검을 들어야 할 때가 왔을 때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말았을 그들을 경멸했다. 의무에 대한 무게는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권리를 누리는 것에 취했던 어리석은 자들.

“하긴, 이대로 중부로 귀환해 봐야 그들에게 남은 미래는 군법 재판뿐이니.”

아르페시스가 미간을 좁혔다.

“군법대로라면 본래 탈영은 즉결 처형이 가능한 죄목이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에 소속될 수 있는 1천의 기사가 아쉬운 건 사실이지. 마찬가지로 탈영한 사병도 합하면 1만이 넘고. 그들을 버린다는 것은 전력을 버린다는 것이다.”

“그 또한 옳습니다.”

성벽 너머에 속속들이 세워지고 있는 천막, 다른 영지에서 보내온 사병들이었다.

그곳을 잠시 내다보던 아르페시스가 물었다.

“그대가 해 줄 조언은 없는가?”

어린 에스메랄다에게 조언을 구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고민의 흔적이 없었다. 어린 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감정 대신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의문은 훗날로, 지금은 해야만 하는 것을 할 때니까.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집결한 군대가 마수를 사냥하며 저지선을 밀어낼 때 그녀는 이곳에서 영지들을 쥐어짜 군사 물품을 조달할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불편해하면서도 때때로 대화를 청하는 아르페시스에게 응하는 이유. 그건 그에게 기억이 없다는 가정하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함께 가지 않을 것이기에 모든 것을 도와줄 수 없다. 전투가 다시 시작되면 결정과 명령을 하는 건 아르페시스다.

만약 그녀가 한 모든 추측이 틀린다면, 그리하여 아르페시스가 아직 10대의 애송이에 불과하다면 그를 다듬어 놔야 한다. 최선보다는 최악에 대한 대비가 중요한 법이다. 서부 연합군을 이끈 그가 남긴 전공이 남부에 있는 황태자의 모든 것을 깎아내릴 수 있도록.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강조했다.

해서 답을 알려 주는 대신 그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쉽게 가진 것은 쉽게 잃는 법, 어리숙한 그가 진실이라면 그는 스스로 답을 쟁취해 가며 배워야 한다.

“면책은 해 주어야겠지.”

성벽 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가 시선을 돌리며 곁눈질로 에스메랄다를 확인했다. 정답을 확인받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탈영하지 않고 버텼던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불만은 하늘을 향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반문 없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법적인 부분은 해결해 주어야겠지만, 내부적인 시선은… 그들이 탈영병이었다는 꼬리표는 달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행하시겠습니까?”

“전투가 시작되면 최전방에 세워야지. 그들이 받는 차별 대우나 적대적인 시선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득이 적은 방법이다. 내부적인 차별은 결국 반발을 불러온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과연 그것에 얼마나 순응할까? 부당하다 여기며 반발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잘못에 관대하고 타인의 잘못에 박하다. 이성을 유지해 자신에게 돌아온 불이익을 덤덤히 받아들일 만큼의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애초에 짊어진 의무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차별 대우를 받다 보면 어느 순간, 일단 돌아왔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벌을 받기 전과 받는 동안의 마음가짐이 같을 리 없다. 결국엔 자신들에게 이런 대우를 하는 윗선에 반발심을 느끼고, 내분을 조장하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에스메랄다는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그대가 생각하는 방법에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르페시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어리숙한 척을 하는 것인지, 어리숙한 것인지. 에스메랄다는 덤덤한 어조로 그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면책을 먼저 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그들이 면책을 조건으로 복귀를… 아.”

반문을 해 보던 아르페시스가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에스메랄다는 어느새 시선을 들어 그런 아르페시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방금 전의 문장에서 그가 읽어 낸 것은 어디까지일까.

“복귀는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군. 그들에겐 그것을 대가로 면책을 요구할 권리가 없어. 만약 복귀하지 않으면 연합군 창설이 공식화된 지금, 나는 사령관의 권한으로 그들에 대한 수배령을 지시할 수 있으니까.”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의 어리숙함을 증명한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깨우친 사람의 표정이었으니까.

“또한 탈영한 이들은 대부분 서부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사병, 그들은 연합군에 가담해야 할 의무가 있지. 중앙군은 애초부터 내 지휘권 아래에 있었고.”

에스메랄다의 속에 내재된 추가 처음과 다른 방향으로 살짝 기울었지만 그녀는 확신 대신 보류를 택했다. 다시금 본인의 의혹을 뒤로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페시스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그가 찾아낸 것은 정답이었다. 지금 탈영병들은 착각을 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 그들에게는 그 어떤 선택권도 없다. 그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남은 건 영주권이나 군법 아래에서 재판을 받거나 수배령을 피해 도주하는 일생뿐이다. 복귀는 그들의 의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전하의 뜻대로 복귀를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들을 별동대로 돌려야 하나? 외곽에 배치시키면 다시 도주할 가능성이 있겠지. 탈영이라는 꼬리표 대신 탈영일지도 모르는 의심으로 결론을 내린 후, 그들이 명령에 복종하고 전공을 세우면 그때 의혹을 거두고 정당한 대우를 해 주는 건 어떤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전공을 세울 때에 한해서, 죄를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을 때에만 제공될 것이다.

공식적인 서한이나 약속은 필요 없다. 사석에서 가볍게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에 떨며 본진에 합류한 이들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 생길 테니까. 또한 그런 희망을 품게 되면 탈영병들은 공포 앞에서 잠시나마 망설일 것이다. 다시 한번 도망가면 확실한 탈영병, 버텨 내서 전공을 세우면 면책.

면책을 받은 이들이 전장에 서는 것과 면책을 받기 위해 전장에 서는 것. 그 차이가 불러오는 결과는 같을 수 없다.

에스메랄다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에 보이는 어리숙함이 진짜라면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게 그의 훌륭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영민하십니다.”

그 칭찬에 아르페시스가 귓가를 살짝 붉혔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않은 눈동자가 에스메랄다의 미소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 반응을 본 후에야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으로 인해 만들어진 발자국을 물로 씻어 내듯, 그녀의 미소가 한순간 사라졌다.

“영민한 것은 내가 아니라 영애겠지.”

쑥스러움이 담긴 말을 끝으로 아르페시스는 다시 시선을 멀리 던져 버렸다. 에스메랄다를 계속 마주 보다간 얼굴까지 붉어져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았으니까.

그 모습을 본 에스메랄다의 심장이 엇박으로 뛰었다. 조금 전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드러내는 대신 덤덤한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면책에 대한 거래를 하지 않고서 그들의 복귀를 야기하실 계책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발견했다는 그들처럼 집결해 있는 이들이 많지는 않겠지. 실제 해 주는 것은 전공을 세운 후로 하고, 지금은 면책을 한다는 소문만 있어도 돌아오지 않겠나? 서부 곳곳에 소식을 흘리는 건 어떤가?”

“너무 공개적입니다.”

실제가 아닌 소문이라고 하나 탈영병들을 용서하는 사령관의 위엄은 깎이기 마련이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공포가 만연한 전장, 거기서 허수아비 사령관을 따르는 군대는 약해진다. 전력을 늘리기 위해서라지만 그런 종류의 피해는 감수해선 안 된다.

“……그대가 미리 보내 두었다던 전령은? 전서구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조련석을 들려 보낸 것이겠지? 공식 서한이 남지 않도록 은밀하게 말을 전달하는 것은 어떤가?”

“너무 은밀하지요.”

공식화된 서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들은 그 서신으로 이루어진 약속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은밀한 접선을 의심하며 돌아오면 처벌받을 것이라 여길 것이고, 그렇기에 선뜻 돌아오지도 못하겠지. 또한, 한 곳에 집결해 있지 않은 소수의 병력들까지 모두 찾아 접선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어려운데.”

“이미 답을 알고 계십니다. 면책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한 반문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아르페시스가 홀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아! 그럼 중앙에 탈영병들의 수배령을 전달했다고… 아니, 전달할 예정이라고 소문을 내면? 간접적으로 협박을 하는 셈이 되겠지.”

그리고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침묵에 답해 정답을 찾아내었다. 조금 전의 과오를 잊기라도 한 듯,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따듯하게 녹아내렸다.

“훌륭하십니다.”

진심이 담긴 칭찬에 아르페시스가 결국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무의식적인 반응, 그것도 두 번이나. 에스메랄다는 얕은 숨을 들이쉬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분명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녀는 가볍게 심호흡을 거쳤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거리를 벌리고자 했다.

아르페시스가 찾아낸 답을 구체적으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영주들이 보낸 사병의 명단과 실제 연합군에 합류해 있는 이들의 명단을 비교 중이며, 그렇게 파악한 탈영병의 명단을 각 영주와 중앙 군사부에 전달한다는 소문을 내야 한다. 그 소문에 겁을 먹은 이들은 속속들이 모여들겠지.

자신은 탈영병이 아니라고, 본진과 떨어져 길을 헤매던 중이었다고, 테노리엘령에 본진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 곧바로 돌아온 것이라고. 어떻게든 변명이라도 한번 해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면 자발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치를 보던 이들도 어쩔 수 없다. 그 시기를 놓쳐 버리면 탈영병의 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게 될 테니까.

애초에 탈영병과는 거래를 해서 불러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돌아온다는 선택지 외에 어떤 것도 가져선 안 된다.

“움직여 줄 수 있겠나?”

“곧 3만 5천의 연합군을 이끄시게 될 겁니다.”

예상 수치였다. 약 1만의 탈영병, 테노리엘이 가진 사병 6천 중 4천, 각 영주들이 추가로 보낼 5백에서 2천의 사병까지 합한 서부 연합군의 최종 규모.

“그럼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잠시 마주친 시선이 도망가듯 그녀를 피했다. 에스메랄다 역시 도망치듯 아르페시스를 등졌다.

마차에 올라 내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조금 전의 대화가 잔상처럼 그녀를 따라왔다. 가지고 있던 의혹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의 미숙함을 진실로 받아들인 후 성장에 뿌듯해했다.

아르페시스를 믿는다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가 현명한 답을 찾아내는 것은 그녀의 기쁨이었다. 그녀에게 아르페시스를 가까이하는 것은 진리와 같았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그의 어리숙함에 현혹되고, 그것을 떨쳐 자라날 수 있게 돕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좋지 않아…….”

사라진 시간에서 그녀는 황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아르페시스와 손을 잡았다. 마수의 먹이가 되는 이들을 줄이고, 그들의 희생 위에서 평화를 누리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현실을 가르치고자 했다.

반면 지금은? 그녀는 전선을 무너트려서라도 황실을 나락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사람. 아르페시스는 황실이 이득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처럼 아래에서 죽어 갈 이들을 지키고자 할 사람. 그와 그녀는 가고자 하는 길이 너무 다르다.

문제는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만이 아니다. 그의 목숨 줄은 황제에게 쥐어져 있다. 지금 당장은 아르페시스의 목에 채워진 황제의 목줄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가 테노리엘의 영토에 발을 들였을 때 페드로가 나서서 한 번 치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거해 줄 테노리엘이 없어진다면 황제는 다시금 그에게 목줄을 채울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남부에서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미래에서는 에스메랄다가 아르페시스를 돕는 것이 황제의 뜻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전선의 안정화. 어차피 황제는 아르페시스를 남부 전선에서 꺼내 줄 생각이 없으니, 언젠가 죽을 사람이 세운 전공은 모두 황실의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얻을 이익이 먹음직스럽다 한들, 아르페시스가 전면적으로 황실을 적대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방관과 참여.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 여기며 손을 놓고 있는 것과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겠노라 손을 쓰는 것만큼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를 남부 전선에 처박아 넣고 지원 물자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등. 죽음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아르페시스는 황제에게 반발할 수 없다.

현실은 이렇다. 미련한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스스로를 향한 경멸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르페시스가 있는 성벽을 바라보는 녹안은 복잡한 것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페드로가 그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 * *

외성의 안쪽 대로를 타고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아르페시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거의 매일 새로운 내용이 튀어나오는 악몽의 영향을 적나라하게 받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간 스스로가 미쳤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던 그 악몽. 하지만 오늘 깨어나기 전에 꾼 악몽은 그것이 예지몽이라는 추측에 무게를 더해 주었다. 더욱이 그 일기 같은 글을 내려다보는 게 본인이라는 확신까지 생겼다.

「대륙력 1440년 라 57일.

테노리엘 백작의 전사 이후 전선을 방문할 여유조차 없이 바쁘던 --가 1여 년 만에 리퀘나 성벽에 방문했다.

인정하겠다. 방문 예고에 며칠 전부터 들뜬 상태였다. 내일은 내 생일이니까, --가 그 시기에 맞춰 방문하는 것이 기뻤다. 공식 물자 전달 업무가 끝나면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시간까지 비워 두었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깨달았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1여 년 만에 만난 --는 무언가 각오를 하고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의 행동에 불안했고, 대화를 청해도 길게 이어지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는 답지 않게 어딘가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레스의 전사 소식에 망가지기 직전이었던 --를 기억하기에, 테노리엘 백작의 전사 소식을 들은 --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괜찮은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차라리 물어보지 말 것을. 그러면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고, 침묵하며 동의하는 척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평생을 어리석은 채로, 그 어리석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었을 텐데.

--는 쓰게 웃었다. 우리 둘 다 그 짧은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돌아온 것은 역시나 괜찮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마다 자신을 덮쳐 오는 끔찍한 감각들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는 그들이 생전 자리했던 저택, 연무장, 정원 등을 지나다 보면 불현듯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거기에 이어서 지금의 시대가 비참하다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더 이상 할 수 없을 거라고도.

난 --가 사령관실 밖을 내다보며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저들은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제국을 구하고 있는 영웅들이니까.’

--는 소중한 사람을 가지는 것 자체를 사치라고 말했다. 사치를 혐오하며 옷에 보석 한번 달지 않던 사람이 바로 --인데, 결국 그것을 누리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과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내게는 --가 바로 그런 사치였다. 우습게도 나는 --가 자진해서 벽을 세운 후에야 그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거기서 나는 싫다고, 너라는 사치를 누리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와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무서웠다.

지난 1여 년간 바빠서 오지 못했던 것과 달리 자의로 오지 않으려 할까 봐, 직접적인 거절이 두려워 입을 닫았다. 거절당한 후에야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다니. 나처럼 미련한 사내가 또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의 뜻에 따라 마음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가 내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내륙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를 계속 만나러 와 주기를 바라면서. 한심하고 어리석은 사내가 여기 있다.」

꿈속의 기록은 라 57일, 아르페시스의 생일은 라 58일이다. 그 일기 같은 글을 작성한 인물이 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더욱이 꿈을 벗어나 현실까지 따라온 애절한 감정을 타인의 것으로 밀어 버리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오늘 새벽 깨어나자마자 글을 기억나는 대로 받아 적은 그는 일단 부정을 해 보았다. 그냥 스스로가 미친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본인이 미쳤다는 것보다는 허황되었다 한들, 그냥 예지몽이라고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아서 방향을 틀었다.

이건 예지몽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외사랑을 깨닫지도 못하다가 무력하게 차여 버리는 예지몽. 상대방의 이름이나 호칭은 언급되지 않지만 아레스, 테노리엘 백작 등의 이름은 생생하게 언급된다. 그러니… 미래의 그가 인지하지도 못했던 사랑을 차 버리는 상대방은 에스메랄다일 확률이 높겠지.

“한심하기는.”

아르페시스는 미래의 자신을 흉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성벽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대며 생각을 곱씹었다.

하나, 악몽은 예지몽일 수도 있다. 10여 년 후의 시점을 보는 것 같다.

둘, 이게 예지몽이라면 미래의 그는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 그것도 고백도 해 보기 전에 차이는 외사랑.

셋,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이 죽는다. 전사라는 단어로 추측해 보건대 남부 전선, 혹은 그에 준하는 전쟁에서 사망한 듯 보인다.

넷, 에스메랄다는 황실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게 되는 것 같다.

다섯, 그런 에스메랄다는 죽는다.

여섯, 그녀의 죽음 이후 그는…….

“젠장.”

저절로 욕설이 나오는 미래다.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살아남겠다는 목표만으로도 벅차던 그의 인생에 어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인지.

여인이라니, 사랑이라니! 그는 여인의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고, 여인과의 정사 역시 당연히 가져 본 적 없…….

“아니, 아니지. 이건 너무 앞서갔지.”

중얼중얼, 얼굴을 손에 파묻은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다. 어린 그녀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파렴치한 짓이다.

곁에 서 있던 근위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아르페시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2황자의 근위 기사단, 3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던 그들은 현재 14명의 인원으로 줄어 있었다. 10인 1조로 구성되는 근위대의 특성상 며칠 전의 전투에서 생존한 5인을 제외, 아르페시스와 테노리엘 영주 성에 함께 입성한 9명의 기사는 1조가 되었다. 그 덕에 휴고는 1조의 조장이자 근위 단장으로 직책이 변경되었고.

휴고는 본래 한미한 남작가 출신의 기사였다. 실력은 괜찮은데 연줄이 전혀 없는 그런 기사. 황실 기사단에 입단한 지 2일 차, 복도 한가운데서 여인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황태자를 보고 반사적으로 막아서는 바람에 그의 인생은 완전히 꼬여 버렸다.

본래라면 그때 죽었어야 정상이지만 지나가던 아르페시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표면적으로 형제의 사이가 좋은 것으로 되어 있기에 황태자는 반쪽짜리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했다. 보는 눈이 적다 하여도 동생이 부탁해서 건방진 기사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소문은 나쁘지 않은 이득이니까.

휴고는 그날 밤 황태자 궁으로 납치당해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일단 황태자가 동생의 청을 받아 무례를 범한 기사를 살려 주었다, 로 되어 있었으니 죽일 수는 없었겠지.

황제나 황태자의 변덕과 잔인한 놀이로 인해 죽을 뻔한 거나,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써 황실 기사단에서 쫓겨날 뻔했던 이들. 그들이 바로 아르페시스의 안전을 책임지는 근위 기사단 3조, 아니 1조의 정체였다.

충성이라기보다는 죽음이나 불명예에서 그들을 구해 준 대가로 곁을 지키는 자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충성심을 품기 시작한 이들. 그들은 황자와 기사치고는 꽤나 편한 사이었다. 아르페시스가 권위를 내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그들이 모시는 아르페시스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래? 하고 넘겨 버리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고로, 그들은 현재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는 아르페시스를 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휴고가 함께 호위에 나선 테베르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왜 저러시냐고. 테베르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무언의 대답을 했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하지만 어려도… 태어나기도 전에 약혼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 그에 근위 기사들의 시선이 성벽 밖으로 흘러갔다. 에스메랄다의 마차가 멀어진 방향으로.

설마, 라는 생각을 하는 근위 기사들 옆에서 아르페시스는 고심했다. 그녀와 약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다는 것도 아니고. 테노리엘이 황실과의 결합을 받아들일 리도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해서 뭘 하나?

하지만 그녀를 잃은 직후로 예상되는 일기가 가져온 감정은 지독하리만치 깊었다. 지금 당장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님에도 주체되지 않는 눈물을 흘릴 만큼.

또한 고작 닷새를 지켜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아르페시스는 미래의 자신이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림에도 영민하고 지혜로우며 그로 인해 있을 법한 오만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것뿐인가? 차분하고 서늘한 분위기가 사람을 매혹시킨다. 아직 어림에도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움은 또 어떤가. 시간이 지나 소녀가 아닌 여인이 된다면?

백작령에 도착한 날 꾸었던 그 꿈에서 본 것처럼 말이다. 그때가 되어 조금 전처럼 살포시 웃어 주기만 한다면 사내들은 모두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간택을 받고자 할 것이다.

지성과 미모, 그리고 홀려 버릴 것 같은 매력을 가진 여인에게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한… 아르페시스는 생각을 하다 말고 자신의 뺨을 찰싹 내리쳤다. 근위 기사들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왜 자꾸만 이런 쪽으로 생각이 흐르나. 미래가 어떠하든 지금의 그는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굳이 그의 감정을 캐내어 이름을 붙이자면 경악과 감탄, 그리고 존경 정도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호감까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사랑 같은 게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자신이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련하게 자각도 못 하다가 차이지 말고 고백하라고? 아니면 벌인가? 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 가혹한 미래가 도래할 것을 알려 주는? 그도 아니라면 그녀가 신에게 사랑받나? 그래서 그녀를 구하라고…….

어쩌면 그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으니 미리 마음을 접으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부정하고는 싶으나, 예지몽이 아닌 그저 그가 미쳐서 하는 망상일 수도 있고.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아르페시스는 한숨이 내려앉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목표물이 안전을 대가로 합류를 요구 중. 본거지의 위치를 알렸으나 요구의 변동이 없는 상황. 며칠 전 목표물과 덤의 거처에 사냥꾼이 침입, 용병들이 직접 처리한 전적이 존재. 현재는 개인 사병으로 보호 중.」

에스메랄다는 아브람 백작에게서 온 서신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그나, 그가 이렇게 빨리 합류를 결정하다니? 더욱이 이 시기에? 굳이 따지자면, 지금은 마수가 경계선을 넘지 않은 동부가 더 안전하다. 그런데 굳이 그곳의 주인인 아브람 백작을 떠나면서까지 서부로 오겠다고?

용병들을 라그나 곁에 둔 것은 감시 및 보호, 그리고 그가 완성할 물건을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그걸 이용해 라그나가 아브람 백작에게 접선을 시도, 의사 표명을 한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깃펜을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라그나의 실력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아니까. 그리고 이동 계획을 제대로 세운다면 그의 안전 하나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중부를 가로질러 오는 시간을 고려하면, 라그나가 도착할 때쯤 서부 연합군은 편성을 끝낸 후 출정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원하는가 하면 그렇다. 당장 간절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재능은 반드시 도움이 된다. 가능한가 하면 그 역시 그렇다. 그의 안전을 위해 아브람 백작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아니면 추가적인 용병을 고용하든가. 하지만 납득이 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 나단이라는 아이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이 말고는 없다. 그녀가 아는 라그나 대신 낯선 그를 만들어 낸 변수, 나단.

그들이 합류하면 그 아이와 라그나 사이를 조금 저 세밀하게 주시해 봐야겠다. 라그나를 통제할 수 있는 약점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동 경로를 동봉, 합류 허가. 목표물의 안전을 위해 사병의 제공을 부탁하는바, 최소 2인 이상.」

아르페시스를 보내면 겨울이 끝나기 전 라그나가 올 것이다. 어디선가 그녀가 올라탄 배를 미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이 배를 어디까지 보낼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녀가 바라던 곳인지, 바라지 않던 곳인지.

* * *

펑펑 우는 그녀를 달랜 후, 선명하게 그어져 있던 선 안에 발을 들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페드로에 대한 경계심을 유지 중이었다. 황태자의 약혼 축하 연회가 있었던 무렵만큼 적나라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눈에 보인다.

그건 당사자인 페드로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경계심의 이유가 원망 같다는 것. 페드로는 에스메랄다의 눈물 속에서 지독하리만치 깊고 아픈 원망을 보았다.

“그런데 그놈에겐…….”

따듯한 물과 닿은 눈이 녹아 버리듯 한순간 사라졌던 경계심과 그 뒤에 자리 잡은 신뢰. 변하기 전의 누이가 보여 주던 따스한 미소까지.

페드로는 꼬고 앉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중얼거렸다.

“만난 적이 있나? 지난번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동부에서 영지로 돌아오던 때, 황도의 광장에서 아르페시스를 본 기억이 있다. 갑자기 에스메랄다의 마차로 달려들려고 하기에 걷어찼었으니까. 그 덕에 역겨운 색을 띤 눈동자를 보고 황자라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두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거나 교류가 있었다고 확신하긴 힘들었다.

“아니면 종종 언급하는 이상한 말과 관련이 있을 수도…….”

가령 떠난 적이 없는데 떠났다고 확정하거나, 버린 적이 없는데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것. 그녀가 가진 원망의 이유로 추정되는 그것. 페드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지만 에스메랄다에게는 진실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페드로는 그 말이 그녀가 갑자기 변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관찰 중이다. 에스메랄다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지만.

질투가 나서 아르페시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에스메랄다를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것이지 사내로서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외간 사내가 누이의 신뢰와 애정을 가져갔다고 질투할 이유가 없다. 정말이다. 그가 원하는 건 누이의 사랑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안녕과 평안이었다.

그녀가 3년 전 갑자기 변한 이유를 찾고, 위태로워 보이는 지금의 모습을 안정시키는 게 꼭 그여야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다면 하고, 하지 못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자격이 되지 않는 이가 과한 욕심을 부리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세 살짜리 아이가 창칼을 쥐고 마수와 맞설 수 없고, 사내가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 앞에 서는 그때까지 시기별로 할 수 있는 역할이 다르다. 그러한 다름은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분명히 예전처럼 웃었는데…….”

페드로의 중얼거림이 텅 빈 침실을 채웠다. 자신이기에 할 수 없는 역할, 절대 미치지 못할 영향. 그걸 아르페시스가 할 수 있다면? 에스메랄다의 평온에 그가 도움이 된다면?

“확인해 둬서 나쁠 건 없으려나.”

어느 귀족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애초에 페드로는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 그게 미친 짓만 골라 하는 황제나 황태자에게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한 2황자라고 해도 다를 건 없다. 황제와 황태자는 혐오. 황제에게 기만당하며 칩거 중인 황후는 경멸, 죽기 위해 황실의 족보에 오른 아르페시스는 조금 동정하는 정도.

페드로는 황족을 이용함에 있어 거리끼는 게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장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천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목숨이라 해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기사니까.

“원망은 어찌하지? 입에 발린 사과만으로는 다 풀어 주기 힘들 텐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내어 놓기만 하는 사과가 그녀의 원망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페드로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그의 누이가 자신을 믿어 줄까, 예전처럼 먼저 안아 달라고 팔을 뻗어 줄까.

‘남부로 향하던 치료제를 강탈한 것과 지금 남부에서 반군의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있는 것까지. 모두 제가 지시했습니다.’

‘무얼 더 알고 싶으십니까? 당신께서 사랑하는 누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음에 슬프십니까?’

페드로의 눈동자가 어둠으로 가려진 창밖을 주시했다. 대화를 하던 당시 에스메랄다는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어떻게 보면 그런 행동을 고함으로써 받을 비난에 대비하는 것 같아 보였다.

“잔혹한, 이라…….”

백성을 언급할 때마다 그토록 짙은 혐오와 증오를 보이면서도 결국은 그들을 죽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잔혹하다고 말하다니. 페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착해 빠져서 어쩌려고.”

잔혹함이란 인정이 없고 모진 행동을 의미한다. 그런데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이는 백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그런 단어로 정의하다니.

그들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고 모질게 굴고 있는 스스로의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비난받을 것을 각오한 것처럼 보이던 그 행동은, 스스로가 행한 것이 올바르지 못한 죄악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 잘못된 행동을 함으로써 느끼는 죄책감, 분명 그걸 보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위해 남부의 백성들이 전선을 위해 살도록 만든 황제는 그런 감정 따윈 느끼지 않는다. 본인을 위해 백성이 죽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목적에 충실해 도의로 인한 죄책감마저 완전히 외면할 수 있는 악귀였다면 좋았을 텐데, 왜 되다 말았는지 모를 일이다.

페드로는 작고, 예쁘고, 강단 있고, 또 묘하게 물러 완전한 악귀도 되지 못하는 에스메랄다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녀를 악귀의 늪에서 인간의 땅 위로 건져 낸 것이 자신의 온기인 줄도 모르고.

“그런 머저리들이 뭐가 예쁘다고 완전히 미워하질 못하니, 천사야.”

그래, 천사야. 페드로는 픽, 하고 웃으며 그녀를 부르는 애칭을 다시 입에 담아 보았다.

“천사야.”

지금의 그를 있게 하는 천사. 그녀는 천사니까 페드로 자신과는 다른 거겠지.

페드로의 긴 한숨이 차갑게 언 창문에 닿으며 뿌연 흔적을 남겼다. 현실에서 다가올 미래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앞날처럼, 뿌옇게.

에스메랄다는 백성들을 도륙한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페드로는 아니다. 그는 에스메랄다를 위해 하는 일에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는 달리 진짜 악귀가 될 수 있는 그를 에스메랄다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모습을 보여 주어도 되는 걸까? 그럼 그녀가 자신에 대한 경계를 조금은 풀까? 아, 어쩌면 너무 추악한 본심을 보고 경멸하게 될지도.

하지만 이대로 그녀가 계속 자신을 경계하는 건 바라지 않는데…….

경멸받을지도 모르는 일을 해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느냐.

‘제가 그리하라 지시했습니다.’

아비체룬의 일을 꺼내던 당시 이를 악물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도 자신에게 비난받는 것이 무서웠던 걸까? 페드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렇게 모질게 밀어내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진심을 보이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그 진심이 있는 곳까지 자신이 가면 될 일이다. 누이가 해냈는데 자신이라고 해내지 못할 게 무엇인가. 비난받더라도, 경멸당하더라도, 그게 그녀의 경계심을 무너트려 준다면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페드로는 이제껏 감춰 온 자신의 본심을 에스메랄다에게 보여 주기로 결심했다.

* * *

아르페시스가 백작령에 도착한 지 6일 차, 하루의 대부분을 영주의 집무실에서 보내던 에스메랄다의 일과가 변했다.

반군을 수색하고, 뒷골목 세력을 먹어 치우고, 황실에 반발하는 인사들과 기밀 서신을 주고받고, 각종 상단을 은밀하게 키우는 것 외에도 재판권, 행정권, 군사권에 관련된 영지 업무까지 행하던 그녀는 연합군 편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오전 시간을 비웠다.

직접적인 개입은 거절했고, 총사령관인 아르페시스의 협조 요청에 따라 조언을 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마저도 일이 적지는 않다. 에스메랄다는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아르페시스에게 내어 준 사령관실에 방문했다.

“아, 영애. 왔나?”

그는 각각의 영주가 차출해 보낸 사병의 수와 병과, 무장한 장비의 종류까지 빼곡하게 기재되어 있는 서류 더미 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번쩍 고개를 든 아르페시스가 그녀를 반겼다.

“그렇지 않아도 내 자문을 구할 것이 많았다. 어서 앉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녀의 자리로 마련해 둔 의자를 빼어 주며 재촉했다.

“사란, 도제르에서 각기 1천 5백. 밀레드가와 빌에서 각기 2천을 보내왔는데 이들의 배치가 모호해서 말이야. 현재 영주 성으로부터 1시간 거리에 각기 주둔 부대 배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사병의 병과 구분은 제대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밀레드가는 정확히 기재해 왔는데 다른 세 곳은 대략적인 구성에 대해서만 기재되어 있고 정확한 수는 없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덤덤함을 가장했다.

사라진 시간과 함께 없어져야 했던 것들, 그때와 다르지 않게 친근하게 구는 그의 행동에 심장이 울렁거린다. 지금의 그는 분명 지금 같은 친근한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친분을 가졌다, 라고 말할 만큼 가까워진 건 에스메랄다가 리퀘나에 몇 번이고 방문한 후였다.

“그렇다면 병과 구분을 제대로 한 서류를 다시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하고 현재까지 배치를 완료한 병력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도록 추가 부대를 편성하시면 수월하실 겁니다.”

에스메랄다를 데려온 아르페시스가 본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어제 사병 목록을 받자마자 전령을 보내었다. 오늘 내로 새로 올라오겠지.”

배우는 것이 빠르다. 그의 뛰어남을 확인하는 순간 조금 전의 울렁거림은 더욱 몸집을 키웠다.

“음… 그제 도착한 게르간 자작 말이다. 그가 직접 이끌고 온 2천 병력을 기준으로 현재까지 5천 5백의 병력이 편성된 3부대 쪽에 기마병이 넉넉하지가 않아. 기마병으로 절반을 채워 온 밀레드가의 병력을 합류시키면 될까?”

“그리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이 섞인 시선을 보며 에스메랄다가 답을 내어 놓았다.

“게르간 자작과 밀레드가 남작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밀레드가 남작이 직접 온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편성에 그와 같은 사정을 고려해야 하나?”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신경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밀레드가의 사병을 책임지는 이가 게르간 자작의 밑으로 들어가면 트집을 잡기 위해 공격적인 태세를 취할 수도 있다. 자작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며 명령 체계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걸 설명해 주니 아르페시스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전시 상황에 그런 신경전을 한다고?”

“인간은 개인의 감정과 외부의 환경에 따라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기도 하지요. 또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대의보다 개인의 이득을 선택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죠. 인간은 결코 하나의 단어로 정의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두 가문의 신경전이 금전과 연관되었기에 더더욱. 두 영지 사이에 있는 강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이들 간의 마찰이 영주들에게까지 미쳤기에 두 가문은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다. 포획량이 줄어들면 반대편 어부들이 많이 잡아가 그런 것이라며 헐뜯고, 싸움이 붙고, 그러다 보니 그 문제로 재판 요청이 매달 끊임없이 올라온다.

연합군에 함께 소속되었으니 지금은 그 문제를 잊고 협력하자, 라는 깔끔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냉철한 인간은 몇 되지 않는다.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는 불완전한 존재, 그들은 함께 있을 때 사소한 것으로도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연합군의 경우 그런 개별 가문들 간의 이해관계 및 우호 관계를 신경 써서 배치하는 게 효율적이다.

속내를 설명해 주니 아르페시스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마수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런 문제로 인한 신경전을 계속할 것이다? 하!”

그런 문제 외에도 굳이 3부대 쪽에 기마병을 추가 배치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다.

“중서 경계선으로 중앙군이 저지선을 만드는 중입니다. 3부대는 중앙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할 일이 많을 테니 기마 병력은 그쪽에 의존해도 충분합니다.”

“아… 경계선에 나오는 것이 테노리엘 백작이군.”

게르간 자작은 테노리엘의 봉신이다. 백작과 자작은 과거 함께 전선에 섰던 전우이기도 하니 합을 맞춰 잘 대처할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결국 밀레드가의 사병을 다른 부대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서부 영지들 간의 이해관계와 우호도를 설명해 가며 편성을 도와주던 에스메랄다는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들어오라.”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용건을 꺼냈다.

“사란과 도제르 남작가의 기사들이 방문했습니다.”

테노리엘 기사들에게 제출해 아르페시스에게까지 올라온 병과 기록이 부실해 새로 조사해 오라 명한 이들이다. 또다시 누락으로 인해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확인을 받은 후 돌아가기 위해 직접 온 것이고.

“빌 자작가는 아직인가……. 우선 들여보내라.”

급하게 마련한 아르페시스의 사령관실에 발을 들인 두 명의 기사는 도저히 기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비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쌍둥이 같은 그 모습은 그들이 개인 훈련을 얼마나 게을리했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검술 실력은 바닥을 기면서, 귀족으로 태어나 마나 운용법을 배운 것만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이들이다. 전쟁에서 짐에 불과한.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모습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경례를 올리는 그들을 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근육과 체격에 맞춰 평평하게 펴져야 할 갑옷이 볼록하다. 에스메랄다가 그 볼록한 갑옷 속에 있을 탐욕과 나태를 그려 보는 동안, 사령관실에 발을 들인 기사들이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물건을 감별하는 듯한 눈으로 아르페시스를 훑어본 이들이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서 있는 자세는 물론, 목소리와 시선 처리까지 마지못해 예를 차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세상 물정을 아예 모르는 지방 귀족은 아니다. 아르페시스가 사생아라는 얘기도, 그가 은연중 황제에게 배척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당장 눈치를 봐야 할 황제도 눈앞에 없으니 사생아를 멸시하는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서부 연합군의 책임자가 된 황족에게 저리 불순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지.

에스메랄다가 서늘한 눈으로 두 기사를 훑어볼 때, 아르페시스는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래. 병과를 기재한 세부 서류는?”

연합군에 소속되어 부대 배치를 받기 전 병력의 병과와 수를 구분한 서류를 가져오는 것은 군사 상식이다. 효율적인 배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아 결국 사령관이 제대로 된 서류를 가져오라 전령을 보내야 했던 이들이다. 그 수준이야 빤하지.

“여기 있습니다.”

가져온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두는 손길이 꽤나 건방졌다. 공손함도, 조심스러움도 없어 서류가 책상에 닿을 때 툭,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에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살짝 들썩거렸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아르페시스는 그 누구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아선 안 될 사람이니까.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그에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이런 식의 홀대를 받는 것을 보니 속에서 불쾌감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런 에스메랄다와 달리, 아르페시스는 그들의 태도에 불쾌감을 표하기는커녕 서둘러 서류를 챙겼다. 그의 관심은 저의 앞에서 불손한 기사들이 아니라, 그 기사들이 가져온 병과 서류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병력 규모, 병과 구분, 무장 상태 및 부대 편성 같은 자료를 점검해 누락이 없음을 확인한 후 말했다.

“오늘 중으로 그대들이 소속될 부대를 알려 주겠다. 내일 곧장 이동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진영 정리를 시작하도록. 돌아가 보라.”

“예, 알겠습니다.”

경례를 올리는 태도마저 불손하여 손이 이마에 채 닿지도 않았다. 에스메랄다의 녹안에 서늘한 한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몸을 돌리자, 에스메랄다는 붓으로 그려 낸 것처럼 우아하고 다정한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음성으로 그들을 불러 세웠다.

“경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입니다.”

“아… 뵙게 돼서 영광이군요, 영애.”

두 기사는 서부의 주축 세력 중 하나인 테노리엘의 이름값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쭉 훑은 후 곁에 함께 앉아 있는 아르페시스를 돌아보는 시선에 담긴 건 노골적이었다. 왜 이토록 어린 아이가 사령관실에 들어와 있느냐, 같은 의문과 설마 저 아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아니겠지, 같은 멸시와 무시였다.

그들의 태도를 고스란히 눈에 담은 에스메랄다가 웃는 낯을 유지하며 빈 종이 위에서 깃펜을 놀렸다.

“전하께서 확인하실 것이 있으니 잠시만 더 대기해 주세요.”

동시에 그들을 불러 세운 이유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자 아르페시스는 ‘내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말을 하는 대신 직전에 적은 글자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사병들 간에 사용하는 독자적인 명령 체계는 지휘의 혼선을 야기합니다. 사병들이 중앙군에서 공개하는 기본 명령 체계에 대한 학습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군사 기밀에 속하는 세부 명령 체계는 아니지만 진군, 회군, 분산 등의 가장 기본적인 하위 명령 체계는 공개되는 정보다. 제국법상 병장기를 착용함으로써 금전을 받는 모든 무장 세력은 공개된 중앙군의 기본 명령 체계를 배워야 한다. 용병에게도 적용되는 법이었다.

이는 국내에서 각 병력들이 협력을 하기 위한 것으로 현 황제가 즉위한 직후 상정된 법이었다. 사병 간의 연합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진 법이며, 실제로도 군부 인사들에게 효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공개되지 않은 기밀 명령 체계를 사용하기에 외부적 유출에 대한 걱정거리도 없는 편이다. 황제에게 유능한 국정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인간이 숨을 쉬는 것처럼 군인의 경우 당연하게 갖춰야 하는 기본 소양이기도 했다. 본디 확인할 필요조차 없는 사항이지만… 저들의 모습을 보라. 기사로서 제 몸을 단련하는 그 기본적인 부분도 완비가 되지 않은 이들이다.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훈련 사항을 준수했을 리 없다. 남부군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내륙의 평화에 찌든 것이지.

에스메랄다가 쓴 글을 읽은 아르페시스가 ‘설마 그렇게까지…….’라는 표정으로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연합군은 중앙군이 공개한 기본 명령 체계를 사용할 예정이다. 전시 상황에 명령을 이행할 정도로 충분한 훈련이 진행되어 있… 겠지?”

조금은 떨떠름한 음성이 불신을 담은 채 이어지자 두 기사가 몸을 떨었다. 그들의 반응을 본 아르페시스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저희는 다른 훈련으로 바쁘다 보니…….”

“영지 치안 문제로 바빠서…….”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군사 기본 교육에 속하는 사항이지 않나!”

이어진 변명에 기가 찼는지 결국 아르페시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게, 저들과 달리 대부분의 사병들은 중앙군의 명령 체계를 습득한다. 테노리엘과 봉신의 사병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지군만의 독자적인 군사 명령 체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병력과의 협력에 대비해 최소 2개 이상의 명령 체계를 추가로 교육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방금 언급한 중앙군의 기본 명령 체계, 그다음 남부 정규군이 사용하는 명령 체계가 포함된다. 자원병이 남부로 파병될 때를 위함이었다.

한데 지금 저들은 의무적으로 배워 왔어야 함에도 행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체격이 비대한 이들을 쓰윽, 훑어보며 곤란한 음성으로 말했다.

“각 병력의 책임자에게 교육 지시를 내려 출정 전까지 최대한 교육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벌써 예상한 병력의 4할이 집결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그에 아르페시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반박했다.

“갈 길이 급하다 하여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이들을 연합군에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는 집무실에 붙들린 채 남아 있던 두 기사에게 닿을 만큼 선명했다. 덕분에 그들의 몸은 또다시 움찔거렸다. 그 반응을 보지 못한 아르페시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중앙 군부에서 공개한 명령 체계가 아무리 기본적인 명령에 한정된다고 해도 30여 개가 넘는다. 며칠 만에 몇천이 넘는 병력이 전투 시에도 혼란 없이 반응할 정도로 훈련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에스메랄다는 졸지에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방해물이 되어 버린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말은 그녀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두 기사와 함께 온 병력을 급히 훈련시켜 보았자 큰 변화는 없으리라.

공포 앞에서 인간의 몸은 굳는다. 그런 순간에 처한 인간을 명령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하다. 머리가 생각을 하기 전에, 심장이 본능을 내뱉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만드는 반복 훈련 말이다. 고작 며칠의 교육으로 그게 가능해진다면 대체 왜 민간인과 훈련된 정예병을 구분하겠는가.

“그렇다 하여 계획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현재까지 배치된 병력으로는 저지선을 넘어가는 마수들을 모두 차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기가 늦어지면 그만큼의 피해가 커질 뿐입니다.”

시리스가 행동을 멈춘 후에는 저지선을 넘어가는 마수가 줄었을 뿐이다.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연합군의 저지선이 촘촘해지는 중이기는 하나, 한두 마리의 규모로 움직이는 마수들이 연합군이 세운 저지선을 넘어 민가를 습격하고 있다.

짐덩이들 때문에 생긴 문제로 연합군 전체의 준비가 늦어져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 지금의 불을 키워 낸 건 에스메랄다지만, 끄는 것 역시 그녀가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짐덩이들 때문에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손을 써야지.

에스메랄다는 저들과 함께 온 병력을 제대로 훈련시킬 생각으로 이 문제를 지적한 게 아니다. 그건 괜한 시간 낭비, 노력 낭비에 불과한 일이다. 해 보았자 몸에 익지 않을 것이고, 결국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명령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아군의 피해를 야기하겠지.

연합군을 이끌고, 정비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기 훈련을 시키는 척하겠으나 그뿐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최전방에 배치해 후방 병력이 마수의 공포에 적응할 시간을 버는 데 쓸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저 두 기사가 데려온 사란과 도제르 남작가의 사병을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의미였다.

그와 관련된 말은 아르페시스가 병력 배치를 하기 전에 슬쩍, 찔러 주면 될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에스메랄다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병력 배치에 적극 반영해 왔다. 병력 구성을 살펴서 그럴듯한 말로 꾸며 두면, 아르페시스는 이 또한 반영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테노리엘에서 교육관을 파견하겠습니다.”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르페시스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테노리엘의 기사들을 주둔지 쪽으로 보낼 테니 돌아가는 즉시 중앙군의 기본 명령 체계에 대한 학습을 시작하도록. 최소한 아군의 피해는 야기하지 말아야지.”

“예, 예에…….”

건방진 태도로 들어왔던 기사들은, 제 잘못이 수면 위로 불거지자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몰골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아르페시스가 읽고 있던 서류를 거칠게 내던지며 말했다.

“엉망이군. 저게 병력을 이끌고 온 책임자라고? 기사가 맞기는 한가? 얼마나 누워 뒹굴었으면 갑옷을 저렇게 볼록하게 만들어야 하냔 말이다. 재료를 낭비하고 있군. 말에 올라탈 수 있기는 한 건가? 기본 명령 체계도 모르는 것들을 연합군 병력으로 보내다니.”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황제의 권력 아래 완벽에 가깝도록 통제되고 있는 병력과 개인 영주들이 소유하는 사병의 질이 다른 것은 당연했다.

황제는 군사력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다. 그게 자신의 권력이 된다는 것을 아니까. 그럴 만한 돈도 있고. 그에 반해 지방 귀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금도, 인구도, 인재도 한정되어 있다.

실제로 영지를 보유하지 못한 영세한 귀족가는 10명의 기사를 보유하는 것도 버거워한다. 그들에게 줘야 하는 녹봉과 갑옷, 말, 각종 병장기를 구매,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유지비는 절대 푼돈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거액이다.

제국 전역에서 들어오는 돈으로 유지되는 중앙군과, 황제에게 세금을 낸 후 남는 돈으로 유지되는 사병의 질은 다를 수밖에. 영지와 상단에서 발생하는 총수익의 절반 이상을 군사력에 쏟아붓는 테노리엘이 특이한 것이다.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풀어낸 아르페시스가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후우, 이번에는 군수 물자인가…….”

그가 관련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사란과 도제르의 병력을 최전방에 배치하는 건에 대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자문서를 작성했다.

병과 서류에 적힌 사병의 구성과 병장기 상태 등, 갖가지 조건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는 건 금방이었다. 자문서를 작성한 에스메랄다는, 후에 아르페시스가 병력 배치를 할 때 볼 수 있도록 두 기사가 가져온 병과 서류에 끼워 두었다.

그녀의 일이 끝나자 그걸 기다린 사람처럼 아르페시스에게서 질문이 나왔다.

“영애, 본래 이런 식으로 후방에서 물자를 전량 조달을 하는 건가? 내가 배운 것과는 조금 다른데.”

이론과 실무의 차이는 미경험자에게 혼란을 준다. 이론은 언제나 똑같지만 현실의 상황은 이론이 정립한 것과 동일하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그의 기억이 없다는 것으로 추가 기울지만… 확답은 여전히 내리기 힘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어수룩한 구석이 남아 있는 아르페시스의 질문에 차분하게 답을 내어 놓았다.

지금 그가 읽고 있는 서류는 어제저녁 그녀가 작성해 올린 것이었다.

“본래는 그 서류처럼 전량을 후방에서 조달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남부군의 경우를 빗대어 설명하면 쉽다. 운송 중 훼손의 가능성이 낮은 병장기, 붕대와 약제 등은 물가가 안정된 중앙에서 구매해 전달한다. 반면 그 외의 곡물, 육류, 채소, 약초 등 운송 중 품질의 저하가 우려되거나 기름처럼 증발로 인한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품목은 해당 지역 경제권 내에서 현지 조달을 하도록 금전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식으로 남부군 행정 담당자들이 직접 몇 개의 남부 상단과 거래를 해서 물자를 확보하지요.”

“나도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그대가 올린 서류는 다르군. 연합군이 저지선 구축을 완료하고 경계선 쪽으로 진군을 시작해도 품질 저하, 손실 등이 가능한 물자까지 모두 후방에서 조달, 지원하겠다고 말이야.”

전투가 있었고 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 중인데 아르페시스가 이 간단한 이유를 모르고 있다. 아직은 그가 경험이 부족한 소년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가 그녀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의 무게가 다시 한번 줄어든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관찰하면서도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저지선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원활한 물자 조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째… 아…….”

경계선 근처에서부터 모여들었던 병력들이 탈영과 퇴군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눈치챘다.

“자경단 수준으로 치안을 유지하는 소규모 마을의 경우 마수의 습격에 대처가 불가능합니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전혀 없을 테니까.”

아르페시스의 얼굴이 굳었다.

“맞습니다. 그 외에 영주가 기사를 배치하는 규모의 대규모 마을이나 소규모의 도시는 소수의 마수가 습격해 온다면 버티겠지만, 지난번 보신 것과 같이 대규모 무리를 이룬 마수가 습격을 해 오면 도주 외에는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서부와 남부의 경계선을 넘은 마수 종은 대부분 기동성이 뛰어난 소형 종이지.”

“예, 인간의 발로 도망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지요. 기마병들이 간신히 따돌릴 수 있는 속도니까요.”

서남부 경계선이 아닌 서부의 영토 내에 형성된 저지선이 의미하는 것.

“그 말은, 외성 같은 수비 체계가 있는 지역이 아니면…….”

“대부분의 소형 마을이나 중소형의 도시는 궤멸했을 겁니다.”

남은 건 운 좋게 아직 마수들의 습격을 받지 않은 곳이 전부일 터. 시간이 지나 북상하는 마수의 수가 늘어나면 운 좋게 살아남은 지역도 망가질 것이다.

테노리엘 백작 성 주변의 마을 주민들은 퇴각 신호 이후 영주 성으로 대피했다. 마을 자경단이 모두 영지의 사병들이 사용하는 위급 신호에 대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피 신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쿠베트 후작령의 영지민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도 모른 채 그곳에 계속 남아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남하를 시작하면 현지 조달이 불가능하다는 가정하에 준비를 해야 한다.

마수는 잡식이다. 인간을 먹고, 인간이 먹는 식량은 물론 때때로 동족마저 잡아먹는다. 또한 인간을 곧장 죽이지 않고 그들의 후방으로 물고 가 한곳에 모아 두기도 한다. 살아 있는 싱싱한 먹이를 보관하는 식량 창고인 셈이다.

“돈으로 거래가 가능한 시장은 무너졌을 것이고, 마수가 휩쓸고 간 장소에 식량이나 멀쩡한 물자가 남아 있을 확률이 낮으니까……. 맞나?”

“예, 그러합니다.”

마룡이 태어난 이후, 마수들은 무리를 이루고 전략을 따라 움직이며 식량을 보존할 정도의 지능을 가지게 되었다. 80여 년 전, 첫 출몰 당시만 해도 무리를 이루지 않고 쉽게 격파당하던 마수들이 며칠 전 테노리엘의 성벽 앞에선 1만 가까이 모여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 세상의 재앙은 마수들을 만들어 내다 못해 통제할 수 있는 마룡이 알을 깨고 나오면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출정시켰던 사병 외에 영주 성이 있는 본토에 머물던 병력도 있을 테니, 일부 영지는 막아 내고 있겠지만 대부분 성문을 걸어 잠근 채 고립된 상태일 겁니다.”

서부 연합군 창설은 황실에서 직접 서부 각지로 공문을 보낸 사항이다. 그럼에도 본진으로 명명된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그들의 전서구나 전령이 오지 않고 있으니…….

시도했으나 실패했거나, 시도조차 하지 못할 만큼 피해를 입었다고 가정하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아예 황실에서 보낸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대비하지 않은 채 최악을 맞이하면 무너지니까.

“성벽이 있는 지역이라 해도 전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

“예, 그러니 남진하실 경우 해당 지역에서 물자를 자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규정한 후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후방으로부터 보급로를 형성하고 전 품목에 대한 지원 서류를 올린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야기한 것은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악행의 무게를 애써 무시했다.

“그러니 보급 문제는…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테노리엘이 책임지고 행하겠습니다. 만약 그 방법이 불편하시다면 각 부대의 지휘권자에게 가까운 후방 영지의 물자를 조달할 수 있도록 협조 공문과 함께 징수권을 허락하시면 됩니다.”

분명 남부의 반군 가족들을 해치라는 지시를 내릴 때만 해도 이런 방법이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거기서 멈춰.’

아르페시스에게 비난받았던 순간이 비수처럼 다가왔다. 그것을 무시하고 백성들을 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죄책감을 느끼다니.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향해 조소했다. 시리스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에게도 속삭였다. 괜한 감정을 느끼지 마라, 뒤를 돌아보지도 마라, 오로지 복수만을 보고 걸어라. 그 길이 피바다라 할지라도.

“그럴 경우 지휘권자들은 각 영지에 접선, 물자 징수를 위한 업무도 수행해야겠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예, 그렇습니다.”

“……전투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부과 업무까지 담당하라 할 수는 없지. 테노리엘이 괜찮다고 하면 후방 보급에 대한 전권을 일임하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시 사령관실이 된 집무실 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계속 힐끔거리는 휴고의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관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 보면 그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실례했다는 무언의 사과를 보내왔다. 몇 번의 마주침으로 불쾌함을 드러냈음에도 휴고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에 대해 지적을 하기 직전, 아르페시스가 입을 열었다.

“서부의 남쪽 지역이 궤멸한… 아니, 궤멸했을 거라고 추정하는 이유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퇴각 때문인가?”

에스메랄다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의 자세를 보고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속은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정확히는 해당 지역에 집결했던 서부 영주들의 사병이 퇴각했기 때문이지요.”

괜한 자괴감과 부담감은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느끼는 저 감정들을 털어 내고 가야 한다. 저 감정은 그의 전공을 드높여, 황태자가 생색내기조차 하지 못하도록 깎아내리길 바라는 에스메랄다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하께서 서부군과 합류하셨을 때는 이미 그들이 도주한 후였습니다.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도 퇴각에 동의했다. 만약 남은 병력이라도 다독여 전투를 감행했다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셨을 겁니다.”

전투는 한 지역에서 일어나지만 전쟁은 방대한 대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서부의 국경 지대부터 중부와의 경계선까지는 말을 타고 달려도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의 발로는 열흘은 거뜬히 걸리는 길을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모두 막아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보유 병력보다 많은 마수를 마주했다면 더더욱.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꽉 움켜쥔 아르페시스의 주먹에 닿았다.

“그곳에서 전투를 감행하셨다 해도 좌우 지역을 넘어가는 마수들을 막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러면 결국 고립되셨겠지요.”

후회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무력함에 보내는 분노일까. 에스메랄다가 아는 그라면 둘 다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병력을 보존하고 체계를 가다듬을 시간을 버신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전하의 선택이 최선이었습니다.”

아르페시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어둡고 습한 감정들이 에스메랄다의 속을 채웠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건 그녀이건만,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죄책감을 무시하려 하고 상황에 휩쓸려 지금에 달한 아르페시스가 그것을 감당하다니.

에스메랄다는 지금의 침묵이, 그의 죄책감이 자신의 행위를 꾸짖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받았던 비난이 그녀를 난도질하고 지나간다. 지금의 다른 태도가 미래에 도래할 그와의 적대 관계를 의미하는 것 같아 새삼, 쓰라리다.

에스메랄다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어 보았다. 입속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앞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처럼 그 생각을 반복했다.

“전하.”

악귀가 되어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했음에도, 아직까지 인간의 감정에 시달리는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어두운색으로 물들어 버린 자신과 달리 여전히 그때의 그 색을 유지하고 있는 아르페시스가 불편했다.

“망설일 시간에, 슬퍼할 시간에 다음을 내다보셔야 합니다.”

그게 명령권을 가진 총책임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원칙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적에게 물어뜯긴다.

페드로, 오멘과 페르멘, 그리고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까지. 그들을 잃은 직후 요동치는 감정으로 정신을 놓고 다닐 때.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결정을 망설이고 슬픔에 잠식되어 현실을 등진 채 추억에 잠기던 그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녀를 물어뜯었던가. 그녀의 세력은 또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가.

전쟁은 잡생각을 하며 이길 수 있는 체스 게임 같은 게 아니다. 전쟁 중에는 순번을 나누어 수를 주고받는 짓 같은 건 할 수 없다. 시간은 인간이 감정을 추스를 수 있게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감정을 포기하세요.”

슬픔과 동정, 그리고 자책까지. 그 감정들은 서부에서 마수를 모두 밀어내고 경계선까지의 영토를 회복한 이후에 느껴도 된다.

“전쟁에서 감정에 휘둘리시면 오판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오판은 아군의 피해를 불러오고, 그 피해를 입으면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소극적인 전술을 이용하게 되고, 그리하면 물자의 소모 기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물자가 제한적인 후방의 지원은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후방이 무너지면 병사들은 위축되지요.”

다음 날 먹을 음식이 없고, 다치면 치료할 약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움츠러든다.

“그러한 행동은 또다시 피해를 불러오는 법입니다.”

악순환은 무척이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그러니 전쟁을 앞두고 헛된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충고했다. 아니,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죄책감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그가 느끼는 죄책감마저 눈앞에서 치워 완전히 외면하려고 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바쁜 발걸음이 복도를 타고 와 노크 소리로 이어졌다.

“들어… 오라.”

허락이 떨어지자 테노리엘의 기사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다.

“영주 성의 남동쪽 하루 반나절 거리에서 황색 연기 두 가닥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노란 연기가 두 가닥 올라왔다면, 집결 중인 마수가 1만 이상이라는 의미.

“아직 이동을 시작하지 않았는지 추가적인 신호는 없습니다. 교전 지역을 확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르페시스의 몸이 긴장감으로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가 합류한 서부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본래 개별 활동을 하는 마수들이 다시 집결하고 있다. 서부 경계선이 뚫린 지 열흘, 테노리엘 영주 성 앞에서 1만에 가까운 마수들과 교전한 지…….

“엿새 만이군.”

아르페시스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수들의 집결 주기가 짧아지고, 집결 수도 더 많아질 것이다. 중형 마수가 나타난다면 더더욱 빠르게.

에스메랄다는 침묵으로 지금 상황에 대한 결정권이 아르페시스에게 있음을 표명했다. 아르페시스는 마음을 다잡는 것처럼 심호흡하고 곧장 말문을 열었다.

“보병이 출전할 경우 예상 충돌 지점은?”

사령관실에서 행정 업무를 돕던 테노리엘의 기사가 답을 내어 놓았다.

1부대는 저지선 가장 서쪽에 있는 테노리엘 영주 성의 동쪽, 도보로 반나절 거리에 있다. 말을 탈 경우 3시간.

“전투 전 휴식을 고려한다면 각 부대에서 남쪽으로 4~5시간 거리에서 조우하게 됩니다. 마수의 이동 방향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어느 부대가 교전을 하느냐에 따라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마병만 출진하면?”

“각 부대의 반나절 거리에서 교전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준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 이미 서부를 침략한 마수들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본진의 남동쪽이면… 1부대와의 사이인가? 아니면 2부대까지 포함되나?”

“1부대와 본진 사이입니다.”

“후우… 본진을 포함한 1, 2부대는 저지선 순찰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 출정 준비를 시작하라.”

아르페시스는 명령을 하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 시 지휘는 해당 부대의 책임자에게 위임하고… 마수의 이동 경로를 알지 못하니 3부대도 방어 태세를 취해 혹시 있을지 모를 전투에 대비하라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소식을 들고 왔던 기사가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수의 이동이 방향이 확인되지 않은 시점이니 어느 곳이 되었건 준비를 해야 한다. 훌륭한 판단이다.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가 다시금 크게 심호흡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근위대는 갑옷을 착용하고 출정 준비를 하라.”

“직접 가실 겁니까?”

“이런 전투는 결국 내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경험이다. 어차피 서부가 끝나면 남부에 가야 할 텐데, 기회가 생겼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배워야지.”

“명을 받듭니다.”

휴고가 대기 중인 근위대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아쉽지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수업… 말씀이십니까?”

아르페시스는 사지로 걸어 들어가기 전, 가벼운 농담으로 본인의 중압감을 털어 내곤 했다. 앳되었으나 미래와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녹안이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이 정답인가. 그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지 않은 것인가.

“내가 그대에게 많이 배우고 있지 않은가.”

픽, 하고 웃는 그의 얼굴 위에 훌쩍 자라난 청년이 된 모습이 덧씌워졌다.

“귀환하면 다시 진행하지.”

다음을 기약하는 희망의 말까지 같았다. 에스메랄다는 중앙 테이블 쪽에 펼쳐 둔 서부의 군사 지도로 다가가는 아르페시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기억이 없는 애송이라는 방향으로 기울었던 저울추가 다시금 평행을 이루며 무게를 바꾸었다.

“그대도 할 일이 많을 테니 오늘은 돌아가 보아도 좋다.”

“……예,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스메랄다가 몸을 돌렸고 아르페시스는 붉고 파란 조약돌로 병력의 규모와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응시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전서구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서구들 아래에는 말을 탄 채 외성을 지나 백작령으로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 * *

아르페시스의 사령관실을 나선 후 에스메랄다는 집무실로 돌아왔고, 자리에 앉아 펜을 들자마자 시리스의 귀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그를 곧장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보고를 받는 것은 물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 주어야 하니까.

“수고했다.”

시리스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마수들을 아비체룬의 국경 너머로 보낸 것은 두 번. 서부 연합군이 만들기 시작한 저지선 너머로 보낸 것은 일곱 번. 시리스는 에스메랄다의 명령을 완벽하게 완수했다.

“네가 없는…….”

그녀가 그간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입술을 열었던 그 순간, 집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이 성에서 에스메랄다의 허락 없이 저 문을 열고 들어와도 제지를 받지 않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천사야, 그놈이 귀환했다던데.”

갑작스러운 방문자는 매서운 겨울날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온몸을 적신 페드로였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책상 안쪽에 앉아 있는 자신을 한 번,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시리스를 한 번 훑는 것을 보았다. 성큼, 성큼 걸어와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페드로의 행동에 한숨이 흘렀다.

영주 성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가 외출을 할 때를 제외하면 연무장에서만 생활하는 페드로였다. 그런데 귀환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니. 시리스를 마땅치 않아 하는 그가 반가워서 달려왔을 리 없다.

“아예 쓸모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구나.”

해낼 것이라 기대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이 방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우회적인 모욕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뭐, 겨우 마수 몇 마리 유인하는 데 열댓 명이 우르르 몰려간 걸 보면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에스메랄다의 미간은 살짝 일그러지고, 시리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는 해명을 요구하는 듯이 에스메랄다를 바라보았다. 왜 페드로가 자신이 한 일을 알고 있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꽤나 건방진 눈이구나.”

에스메랄다는 설명을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다시 한번 페드로에 의해 방해받았다.

“계속 거슬렸는데… 내 경고하마.”

이번에는 말로 그칠 생각이 없는지, 페드로가 시리스에게 훌쩍 다가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 천사를 볼 때는 존경심을 담아라. 그따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에스메랄다는 그가 속삭이는 뒷말을 듣지 못했다.

“그만하세요.”

그녀의 만류에 페드로는 두말하지 않고 시리스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네가 꿈도 꾸지 못할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주의하도록.”

페드로는 그 말을 끝으로 시리스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에스메랄다가 자리를 잡고 있는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조금 전의 그 사나운 행동과 달리, 그녀를 돌아보는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남부에는 언제 손을 댈 생각이니? 서부와 달리 남부는 이미 저지선이 구축되어 있다. 봄이 지나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 손을 쓰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는 대로 성과가 쌓이겠지. 난 황태자 놈이 전공을 올리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만.”

감정에 잡아먹혀 해선 안 되는 말을 해 버린 대가가 도래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만든 과오의 결과물 앞에서 침음을 삼켰다.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마구잡이로 집어 던진 말을 챙기고, 그것을 텅 빈 그림 곳곳에 채워 넣었다. 그리하여 완성되지 못했으나 형태를 추측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까지 파악했을까? 에스메랄다는 눈앞에 서 있는 사내를 자신의 오라비가 아닌 노련한 정치꾼이라고 여기고 생각을 이어 갔다.

그녀보다 먼저 태어나 먼저 교육받고, 먼저 경험을 쌓아 나가던 이들이다. 테노리엘의 이름을 사용하는 그들 모두가 정치와 전쟁을 모두 할 수 있는 유능한 지략가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저놈을 쓰는 게 점점 힘들어질 게다. 내 생각대로라면 중앙군을 피해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길 텐데, 저놈 실력으로 그들을 따돌리는 건 무리야. 상급 기사가 투입되면 끝이다.”

황도 반나절 거리에 배치된 2만 병력에 속한 2천의 기사는 모두 상급 기사다. 그들은 마수와의 전쟁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을 상대로 한다면 강적이 된다. 최고의 것만을 누려 온 그들을 그저 그런 마나 운용법으로, 그저 그런 훈련을 해 온 시리스가 상대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시리스의 무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는 지방의 중급 기사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중하위권. 지방에서 고용된 중급 기사의 검술 실력은 황도의 평기사 수준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페드로는 그 점을 꼬집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말에 앓는 소리를 내었다.

중앙군과의 마찰까지 언급한다면 반군에 관련된 일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고 봐야 한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그들의 집결과 성장을 지지하는지도. 남부 참사, 반군의 가족 처형, 그것이 무엇을 위한 일이었는지 제대로 파고들었다는 의미다. 지금 서남 경계선이 무너진 배경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아비체룬의 국경을 넘어간 마수에 대해 언급했었으니까. 머저리같이 감정에 취해 입을 놀린 대가였다.

“네가 허락해 준다면 내가 손을 봐 주마. 1, 2년 정도면 중급 기사는 상대하고 상급 기사를 따돌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게다. 네가 묵인해 준다면 가문의 운용법 중에 쓸 만한 걸 가르칠 수도 있고.”

성과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제국법에 의해 마나 운용법은 그것을 보유 중인 가문과의 관련성이 없는 외부 인사들에게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테노리엘이 보유 중인 마나 운용법 가운데 중급, 혹은 상급에 속하는 것을 영주 성 내부에 들어와 있는 용병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명백히 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들킬 경우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 것이고, 관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명분으로 운용법 자체를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 위험을 제거하려면 용병들을 가문의 종자나 기사로 들여야 하는데, 그건 영주의 권한이 아닌 가주의 권한이기에 에스메랄다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제가 테노리엘 경과 무언가를 하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시리스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에스메랄다는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런 종류의 신경전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다니.

“저는 아가씨께 고용되었습니다. 테노리엘께서 제 실력이나 행동에 관해 지적을 하실 이유가 없…….”

“그 실력으로 내 천사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되니 하는 말이지.”

에스메랄다는 군인도, 기사도 아니다. 시리스에게 운용법을 제공하고 훈련 일정을 짜 주는 등의 지원은 가능하지만, 직접적인 지도는 불가능했다. 용병들을 제대로 가르칠 인물을 구하는 것 역시 그들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페드로는 지금 자신을 이 판에 끼워 달라고, 그리하면 그 역할을 자신이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지끈거리는 골을 문지르며 시리스에게 말했다.

“시리스, 얘기는 나중에 하자. 돌아가 쉬어라.”

“하지만…….”

“네 말대로 너를 고용한 건 나다. 나중에 다시 부르마.”

“……예, 아가씨.”

시리스는 사나운 눈으로 페드로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물러섰다. 페드로는 시리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사나운 눈으로 주시했다. 그는 시리스가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불순한 놈 같으니라고.”

에스메랄다는 그 중얼거림을 들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페드로가 어디까지 눈치를 챘는지, 앞으로 그를 어떤 식으로 배제해야 하는지,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모두 미루더라도 지금의 페드로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제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려 드시는군요. 방해입니다.”

“그럴 리가. 내가 어디 가서 방해를 하고 그럴 인재는 아니란다.”

저 환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 전의 사나운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 연무장에서 들으니 마수들이 집결 중이라지?”

능글맞게 웃으며 대화의 주제를 틀어 버리는 모습이 낯설다. 또한 지나치게 익숙했다. 그녀가 하는 행동과 유사했으니까.

“오전에는 전하와 함께 있었을 테니… 어찌하시려는지 들은 바가 있느냐?”

“……출정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흐음.”

에스메랄다는 자신 앞에서 웃고 있는 페드로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는 최근 그러했던 것처럼 더 잘 보라는 듯이 얼굴을 쭉 내밀어 주었다.

여전히 그가 밉다. 그의 뺨을 내리치고 소리를 질러 대고 싶은 충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가 집무실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면 나른한 숨이 나온다. 속에 꽉꽉 뭉쳐 있던 응어리의 일부가 풀어진 것이 느껴졌다. 아르페시스에게 가지는 죄책감 때문에 먼저 떠난 가족들의 심리를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우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내뱉은 허울뿐인 말에도 용서를 해 버리고 싶어진다. 고작 그런 것에도 품은 응어리가 녹아내릴 만큼, 그녀가 궁지에 몰려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변화가 있었으니 자꾸만 다가오는 그의 온기를 계속 갈구하게 된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 때문인지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미래의 에스메랄다는 평생 페드로가 보여 준 밝은 모습만을 보고 그것이 그의 본모습이라고 믿어 왔었다.

그 차이가 준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번 대화로 인한 변화 때문일까. 에스메랄다는 또 할 필요가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감정에 휘둘린다.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무엇이?”

“제 행동은…….”

에스메랄다는 말꼬리를 흐렸다. 진실을 알게 된 페드로가 방해도, 힐난도 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것도 상관없다며 여전히 사랑한다 말해 준다. 원망을 쏟아 내고, 사과를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복수를 좇으면서도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얻은 페드로가 전선으로 떠나지 않는 건 분명 기쁜 일이다.

이기적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아마 황성에서 아르페시스를 다시 마주쳤던 그때, 심장을 옥죄는 죄책감을 느꼈던 그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리라. 기사단도, 테노리엘 백작의 명령도 뒤로한 채 빗속을 달려 돌아온 페드로를 보았을 때도. 어쩌면 연미복을 입은 채 뒤쫓아 왔던 그를 마주했을 때도.

그 모든 순간을 거쳐 이른 지금,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를 밀어내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그의 다정함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고, 온기 속에 파묻혀 울고 싶다. 그가 하는 사과를 들으며 그를 용서하고 싶다. 하여 아르페시스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도 용서받고 싶다는 이기심이 존재했다.

그것을 인정해 버렸기 때문에.

가족의 품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손으로 죽인 수만의 백성들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아린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혐오하는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테니까.

페드로가 그녀의 복수심 위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던 물방울은 아르페시스를 향한 죄책감과 겹쳐져 얇은 물줄기로 변해 있었다. 큰 변화는 아닐지언정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했다.

“저는… 타인의 소중한 이들을 학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정말 자신을 계속 사랑하는 것이냐고, 그녀가 물었다.

“소중한 이들?”

페드로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웃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것처럼 어둠을 품고 있는 그 웃음을.

“테노리엘이 이전 3대에 걸쳐 가족을, 형제를, 전우를 잃을 때 그들은 무엇을 했더냐?”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울듯이 구겨졌다.

“그들이 나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무얼 했다고, 내가 그들의 소중한 이들을 지켜 주어야 하지?”

“…….”

“나는 아직도 숙부님이, 백부님이 돌아가시던 날이 생생하다. 그날의 나는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애송이였는데 가족을 잃었다.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매일을 불안에 떨어야만 했지.”

“…….”

“가난으로 인한 고난? 허기로 인한 아사? 그래, 힘들게 사는 이들도 있겠지.”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동화 한 잎 내지 못할 정도로 빈곤한 건 아니다. 하지만 테노리엘이 대대적으로 전선에 보낼 기금을 모으겠다고 선전한 5년 동안 기금을 낸 평민은 소수에 불과했다. 다들 저 살기 바쁘고, 자신의 소중한 이를 챙기기 바쁘니까.”

다급하게 숨을 들이쉰 건 경악 때문일까, 전율 때문일까.

“그것이 무어 어떻다고. 백성들은 저들이 누리는 평화를 위해 수만의 병사를 제물로 바치고 있다. 남부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군 시설에 팔아넘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

에스메랄다는 책상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이는 페드로를 보며 생각했다.

“그들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부당함에 순응하고 자식을, 남편을 팔아넘기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기는 하더냐? 그런 그들 앞에서 너는 왜 죄책감을 느끼려고 하느냐?”

이 사내가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오라비가 맞나? 아무리 반쪽뿐이었다지만 그녀는 페드로의 속에 저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분명 오지 않을 미래에는 그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았는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내 해명을 하마.”

다정한 손길이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난 그 기생충들이 싫다. 우리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아버지도, 그걸 그대로 따르는 형도 가끔 싫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뜻이 달라 싫어하는 건 별개이니까.”

“…….”

“그럼에도 내가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건 너 때문이다.”

에스메랄다의 눈동자에 경악과 혼란, 그리고 안도감이 함께했다.

“네가 안전하다면, 그 버러지들이 내 목숨에 빌붙어 살아남는 것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들의 비겁함을 묵인한 건 내가 정한 우선순위가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

“이제까진 테노리엘 중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오라버니.”

“가족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페드로는 속에 품은 어둠과 달리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도 끼워 주렴.”

“…….”

“네가 아무리 현명해도 검을 단련하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 아버지도 우리도, 너한테만은 검을 쥐여 주지 않으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부분은 내가 해 주마.”

지독한 시간과 원망을 품고도 가족의 곁을 바라는 스스로가 한심했으나 곁에 남아 주겠다는 페드로의 말이 기뻤다. 타인의 가족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었으면서 자신의 가족은 귀애하려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런 이기적인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사랑한다 말해 주는 오라비가 고마웠다.

타인의 가족을 학살했다는 죄책감에 허덕이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복수심을 직면했다. 십수 년 동안 알지 못했던 페드로의 속내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행한 짓을 알고도 꾸짖지 않는 그가…….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깊은 곳으로 몰아내며 말했다. 인형의 것처럼 삭막한 목소리였다.

“아직 황실의 시야에 들어설 생각은 없으니 천천히 해도 돼요.”

“역시.”

“신전도 함께.”

“나의 천사가 이렇게 멋질 줄은 몰랐는데.”

그 대화에서 에스메랄다는 문득 페드로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천사는 어느새 천사가 되어 있었다.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들을 수 없었던 그리운 부름. 그게 언제부터 변했더라?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제는 작다고 하지 않으시네요.”

“불법 마법사를 상대하는 걸 보고 그런 표현이 불필요함을 깨달았지.”

페드로는 씩 웃으며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고, 이어서 뺨을 내밀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행동에 에스메랄다는 미간에 골이 생겼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페드로의 뺨에 입맞춤을 남겨 주었다. 눈가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시킬 것이 있다면 말하렴. 물론, 네 근방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네.”

“연무장에 있으마. 내일부터는 그놈을 챙겨서 움직이면 되겠니?”

“네, 다른 이들도 함께 부탁드릴게요.”

“그래, 알겠다.”

불편한 동행이 아니라 함께 걸을 일행이 합류했다.

뛰어난 기사가 그녀를 지키고, 그녀가 갈 길을 닦아 주겠다고 나섰는데 어째서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숨통이 조여 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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