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7화 (7/45)

제7장

복잡한 재회

제국의 남부에 군사 지역이라 지칭되는 전선이 형성된 지 40년이 넘었다. 선황 시절 제국의 남부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페르데른 왕국이 멸망한 이후, 제국은 지금까지 꾸준히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 3개국 중 가장 넓은 전선을 가진 채 버티고 있는 그 저력은 감히 타국이 흉내 낼 수 없다.

제국을 포함해 실질적으로 남부에 전선을 보유한 세 개의 국가는 전선의 방어를 담당하며 북쪽에 위치한 후방국으로부터 매년 상당량의 원조를 받는다. 3개국이 무너지면 후방국들 역시 안전하지 못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원조는 결국 제국을 비롯한 3개국이 전선을 지키고 수호하는 대가였다.

원조 물품과 자금의 대부분이 황실과 귀족들, 그리고 신전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제국은 버티고 있다. 40년이 넘도록. 하지만 너무 오래도록 한 지역에 고착된 전선은 폐단을 불러왔다.

곧 제국이 멸망하겠구나, 하고 두려움에 떨던 백성들은 1년, 5년, 10년이 지나도 자신들의 터전까지 오지 않는 마수들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은 안일해졌고, 남부 전선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전제는 절대적인 진리가 되었다.

그 결과 남부에서 치열하게 목숨을 내걸며 싸우는 이들을 제외한 내륙의 인사들은 썩어 가기 시작했다. 중앙군을 비롯한 다수의 지역에 포진한 병력은 허울뿐인 이름을 가진 민간인과 다르지 않다. 전서구의 날개에 실려 백작령에 도착한 서신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영주를 비롯한 군수권자들 대다수 북부로 이동 중. 출정 명령으로 서부 경계선에 집결한 사병 퇴각 중. 탈영병 속출.」

보아라. 1440년 카 4일, 에스메랄다가 대형 마수 2기의 동시 출몰 소식을 전달받은 직후 전초 기지에서 후퇴하지 못한 수천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버리면서까지 리퀘나 성벽의 폐쇄를 강행한 이유가 그 짧은 서신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륙에서 훈련에 훈련만 거듭한 병력은 마수의 앞에서 공포에 떨어 본 적이 없고, 그 공포에 저항하여 생존을 쟁취한 적이 없다.

전쟁은 나무 막대기를 든 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의 장난이 아니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한 규칙이 존재하는 대련이 아니다. 내륙의 인간들은 마수와의 전쟁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이토록 쉽게, 지켜야 할 백성들을 등지고 마수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

마수에게 습격받고 서부 영지의 사병들이 응전 대신 퇴각했다는 서신을 확인한 에스메랄다가 눈을 감았다.

마수를 서부 경계로 유도한 건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서부 경계선에 위치한 영주의 사병들이 마수와 조우하자마자 도주할 정도로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

서남 경계선과 백작령은 고작 이틀 거리. 그곳이 뚫린 이상 테노리엘 백작령도 위험 지역에 포함된다. 아직은 테노리엘이 건재해야 하기에 영지를 버릴 수는 없다. 당장은 이곳을 지킬 필요가 있다. 테노리엘의 지리적 이점을 잃으면…….

“득보다는 실이 크지.”

아비체룬과의 연결점을 만들기 수월한 위치인 것은 물론, 그녀가 숨어야 할 그늘로 테노리엘보다 완벽한 곳은 없으니까.

사라진 시간에서 13세가 되었을 무렵부터는 위문품을 가지고 매해 두세 번씩은 전선에 방문하던 그녀였다. 그때마다 안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에스메랄다는 직접 전선의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고 마수가 짓씹는 인간의 고기를 보며 공포에 떨어 보았다. 그런 경험을 가진 상태에서 항상 전시 체제를 유지하며 물자를 구비해 두는 테노리엘의 본진, 수성을 위해 구축된 영주 성까지 있는데 마수 따위에게 질까 보냐.

불길이 타올라 그녀를 향해서도 번지기 시작했지만… 아비체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화상을 입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다.

그녀가 서부의 혼란과 중앙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던 때, 추가로 두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그것은 에스메랄다가 화상을 감내하고서라도 일을 강행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기도 했다.

「카 45일 오전, 미성년 출정 금지법 폐지 상정, 국정 회의에서 통과.」

황제는 몇 년간 반황실 세력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쟁취했다. 아르페시스의 이른 출전을 정당화시킨 것이다.

어떻게? 왜? 에스메랄다가 그 두 가지 의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각이 시작된 지 고작 두어 시간 만에 또 다른 전서구가 도착했다.

「황실 중앙군 2만 출정 발표. 남부로 파견될 중앙군은 황태자, 서부로 파견될 중앙군은 2황자의 통솔 아래 오는 카 46일 출정 예정.」

에스메랄다는 그 서신들을 확인한 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전서구가 날아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이미 출정식이 있은 이후다.

그녀의 의식은 깊은 곳을 파고들며 머릿속에 든 정보들을 이리저리 짜 넣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황족과 귀족을 구분하지 않는다. 황실을 향한 반발은 그대로 귀족들에게도 향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황제와 반목한다고는 하나 그들은 결국 귀족, 황실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근래의 사건으로 추락한 황실과 귀족들의 무능함에 대한 인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황태자를 출정시킨 것이 아닐까?

차남보다는 장남이, 그것도 차후 황위를 이을 후계자가 전선에 간다는 건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음 대의 황제가 우리를 위해 전선에 간다!’라는 명분이 백성들의 머리에 심어질 것이다. 귀족들에겐 백성들의 불만과 반감을 희석시킬 좋은 기회다. 그런 고로 황제가 법안 폐지를 위해 내건 거래 조건이 황태자의 출정이었을 확률이 높다. 장성한 장남이 있는데 어린 차남을 내보내기에는 명분이 부족했을 테니 함께 보낸다, 정도로 합의를 보았겠지.

귀족들은 법안 폐지에 동의하는 대신 황태자를 출정시키고, 그것으로 백성들의 반발심을 희석시킨다는 이득을 얻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황제는 몇 년을 더 기다려야 쓸 수 있던 아르페시스를 더 빨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7만이라는 병력으로 철옹성을 세우고 있던 중앙군의 일부가 밖으로 나온다.

이번에 황제가 내린 결정에 에스메랄다의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존재했다. 내륙에서 평화에 찌들어 있던 중앙군에게 마수의 공포를 가르쳐 줄 기회다.

여기서 병력을 깎아내리면 후에 황제가 손실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신병을 뽑을 때 중앙군 내에 그녀의 사람들을 넣을 수 있다. 출정한 중앙군의 피해를 늘려야 훗날 황제가 병력을 회복하려 할 때 내부에 그녀의 사람들을 집어넣기 쉬워진다.

어떻게 줄일까? 어떤 방법으로 병력을 깎아내려야 효율적인가? 얼마를 줄여 놔야 훗날 그녀가 원하는 만큼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에스메랄다는 2만을 내보내고도 견고한 5만의 중앙군, 그들이 있는 지역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밤이 깊어져 가고 있다.

* * *

서부와 남부 사이의 경계선에 집결했던 영주들의 사병이 퇴각한 것은 카 43일 자정에 있었던 일이다. 그녀가 백작령에 도착한 날 서남 경계선으로 이동한 영주들의 사병은 마수에게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다.

동부에 다녀오는 동안 남부의 일이 급격하게 진행되었기에 확인하고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밤늦게까지 이동을 반복하며 서두르지 않았다면 영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졌겠지. 그만큼 대응하는 것도 느려졌을 것이고. 분명 촉박하지만, 다행히도 늦지는 않았다.

그녀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카 45일에 두 황자의 출정이 발표되었고 고작 하루 후인 46일, 황도에서 2만 중앙군을 이끌 두 황족의 성대한 출정식이 열렸다. 이토록 빠르게 출정을 했다는 건, 법이 폐지되기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니 그토록 성대하고 화려한 출정식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겠지. 흩날리는 꽃잎, 기사들의 화려한 망토와 번쩍거리는 갑옷, 신관들의 축복, 그리고 백성들의 환호. 언론을 완전히 손에 넣은 황실의 포장으로 남부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백성들은 황실의 폐단을 알고 있음에도 화려한 출정식에 눈이 멀어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그들이 내지른 환호는 그런 의미였다.

카의 차가운 겨울날에 그 꽃잎을 휘날리기 위해 든 돈이 얼마인지. 남부군의 허름한 것들과 달리 화려하고 반짝이는 갑옷을 만들기 위해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 그들이 이동하며 흥청망청 사용하는 물자들이 남부에서 굶어 죽어 가는 이들을 숱하게 살려 낼 수 있다는 것까지.

백성들은 황태자가 직접 출정한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그 아래에 가려진 보잘것없는 진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황태자, 남부 최종 방어선으로 1만 1천, 기사 4천 대동, 남부군과의 예상 합류일 카 52일 밤. 2황자, 마수가 진입한 서부로 4천, 기사 1천 대동, 서부군과의 예상 합류일 카 51일 새벽.」

양측으로 이동된 정확한 병력이 확인되었을 무렵에는 또 다른 서신 역시 그녀를 찾아왔다.

「영지병 차출 명령서.」

테노리엘 백작으로부터 온 명령서였다.

「영지에 머물고 있을 페드로 테노리엘을 총지휘권자로 임명, 3천의 사병을 차출하여 중앙군을 대동한 황자 전하를 지원하라.」

그녀가 머물 테노리엘의 방어를 위해서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백작의 명령에 따라 영지병을 차출해 보내게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면 황태자가 가장 위험한 남부를 담당하고 2황자가 별동대를 구성, 남부보다는 문제가 심하지 않은 서부를 지원하러 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숫자를 자세히 보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 볼 수 있다. 황태자 곁에 남은 중앙군은 1만 5천, 그중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4천이다.

리퀘나 성벽에서 퇴각해 남부 끝자락에 저지선을 구축한 남부군의 전체 병력은 약 6만 1천. 각 영주의 협력 아래 모인 사병들까지 합하면 총 7만 8천. 거기에 중앙군은 1만 5천. 도합 9만이 넘는 숫자이다. 3만이 넘는 인원이 반군으로 빠지며 줄어들었지만… 지금은 낙오병의 일부가 복귀한 상황이다.

남부군과 중앙군을 합치면 기사의 숫자만 해도 1만 6천 이상. 실제로 남부군이 멀쩡했던 시기 기사의 수는 2만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 평상시보다는 적지만 그 정도 숫자면 수성용 성벽이 없어도 버티는 게 가능했다.

반면 아르페시스를 따라 서부 경계에 포진한 영주들의 사병과 합류할 중앙군은 5천, 기사 1천에 병사 4천이다. 아르페시스와 함께 움직이는 병력은 출정한 중앙군의 1/4에 불과했다.

“그리고 연합군…….”

무엇보다 서부에는 남부와 달리 황제가 허락한 정규군이 없다. 모두 영주들의 사병. 연합군 창설에 대한 황제의 허가가 나지 않으면 그들은 소수의 오합지졸이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없으면 서로가 책임자를 주장하며 타인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할 것이다. 명령을 받고 그에 응한다는 건 서열을 확정시키기 때문이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전시 상황을 눈앞에 두고도 이권 다툼을 할 사병들이 눈에 훤했다. 그런 식으로는 규합이 될 수 없다. 남부에 있는 중형 마수들이 서부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오합지졸 사병들뿐인 서부의 사정을 빤히 아는 황제가 연합군 창설도 허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작 5천?

누군가 먼저 요청을 올리기 전까지는 연합군 창설을 미루려는 행보다. 본디 급한 자가 손을 뻗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

“뭘 위해서?”

어차피 서부 연합군 창설 허가는 내려질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소수이기는 하나 병력을 이끌고 서부로 오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연합군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면, 황실과 관련된 인사 중 그 누구도 서부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연합군을 이끌 마땅한 인물이 없으니 선출하라 말하는 게 전부였겠지. 서부에 남은 귀족들은 연합군의 수장이라는 권력을 위해 서로를 물고 뜯었을 것이고 시간은 어영부영 흘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아르페시스를 보냈다. 그 수에 내포된 의미는 그런 것이다.

결국에는 허가해 줄 것이면서도 연합군 창설에 대한 것을 미룬 이유. 그것을 대가로 서부 영주들에게 받으려는 건 뭐지? 서부와 중부의 경계선? 그래. 거기다. 황제는 연합군 창설을 대가로 서부 영주들, 그것도 직접 그 안건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은 테노리엘 백작에게 그 경계선을 지키라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정확히는… 서부 연합군 창설을 요청하기 위해 테노리엘 백작이 황도에 남는 것.

그리하여 창설된 연합군의 전권은 미리 출발한 아르페시스에게 주고, 뒤에 남은 테노리엘 백작에게는 중부와 서부의 경계선을 맡기려는 것이다. 황제가 테노리엘을 싫어한다 해도 그들의 유능함만은 인정하는 사실이니까. 연합군 허가를 미룬 이유, 그건 테노리엘 백작이 자신의 영지로 달려가는 대신 황실의 안전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에스메랄다가 남부군이 형성한 새로운 저지선을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황태자로는 생색을 내고, 아르페시스로는 성과를 내려는 건가?”

아르페시스가 연합군을 이끌고 서부의 영토를 침범한 마수들을 몰아낸다. 그리고 서부보다 위험한 남부는 시기상 밀어내지 못하고 버티는 데 주력한다. 이 가정이 정답이라면 황태자가 출정을 했었다, 라는 명분을 가짐으로써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는 의도이리라.

서부에는 테노리엘이 있으니까. 그들이 연합군 건을 제의할 것이고 아르페시스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알아서 지금의 사건을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테노리엘을 필두로 한 서부의 공적을 연합군의 책임자로 앉힌 아르페시스에게 몰아주면, 황족의 전공을 자랑할 수도 있을 터.

그런 식으로 서부를 정리하면… 황태자는 부상으로 불러들이고 아르페시스를 남부로 몰아넣겠지. 미성년 출정 금지법까지 치웠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이라 해도 쉽사리 믿어서는 안 되는 세상에서 살아온 에스메랄다는 지금의 상황에서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가정을 내어 놓았다.

“남부와 서부의 영주들에게 편파적인 지원을 하지 않으려고?”

한 곳에만 황실의 손길을 내밀면 다른 곳에서의 반감이 강해질까 싶어 내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또한 남부로 향한 황태자에게 병력을 집중시켜 그의 전공을 살리려는 것일 수도 있고.

서부의 연합군 창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것을 보아, 서부의 실패와 남부의 성공을 비교하기 위함일지도?

그로 인해 황태자의 공적은 키우고, 아르페시스의 공적을 깎아 황태자의 지지도를 높이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서부로 향한 아르페시스가 죽으면 황실이 백성을 위해 희생했음을 의미하는 선전 도구로 사용하겠지. 본래 그들이 원했던 대로.

“그렇다면 그는 버림 패라는 의미인데…….”

수많은 가정이 세워졌지만 여전히 확정은 내릴 수 없었다. 답은 더 많은 정보들이 손에 쥐어진 후에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이번 결정에 담은 노림수가 하나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에스메랄다가 그려 본 추측이 전부 황제의 의도에 부합할지도 모르는 일.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가정을 전부 방해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기엔 시간도, 여력도 없다. 가장 유력한 것들을 방해하고, 황제의 뜻대로 된다 해도 이쪽에 타격이 크지 않은 것들은 묵인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황태자 전공은 무조건 헛물로 만들어야지.”

황태자의 전공은 지우고 아르페시스의 전공을 제국 내에 퍼트린다. 황태자가 생색조차 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해야 한다. 그러는 동시에 남부와 중부의 경계에서 남부군과 합류했을 1만 5천, 실전이라곤 구경조차 해 보지 못한 중앙군까지 함께 치워 버리는 거다. 훗날 그들의 빈자리에 에스메랄다의 사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죽어야만 한다.

에스메랄다는 군사 지도를 확인하면서 다른 자리에서 모조 필사 연습을 하고 있던 히나에게 말했다.

“집사에게 기사단 부단장을 데려오라고 전하고, 넌 곧장 오라버니를 모셔오렴.”

“예, 아가씨.”

영지에 도착한 이후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를 피해 왔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내니 그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마주칠 일도 없었고. 하지만 테노리엘 백작에게서 직접적인 명령이 내려온 이상 영주 대리로서 그 명령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오기 전, 집무실에 놓인 문서들을 뒤집거나 서랍 속으로 넣어 감추었다. 각 지역의 군 병력을 배치해 보았던 지도까지 접어서 한구석에 밀어 넣자 페드로가 도착했다.

“불렀니?”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에 발을 들인 페드로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테노리엘 백작의 명령서를 내밀었다. 비가 오던 그 날 안겼던 따듯한 품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아버지로부터 명령서가 왔습니다.”

“흠, 명령이라…….”

페드로가 명령서를 건네받을 무렵 에스멜라다는 집사가 불러온 부단장과 마주할 수 있었다. 가문에 소속된 기사단의 단장은 테노리엘 백작을 따라 황도에 있었고, 영지에 남은 병력을 관리하고 있는 것은 부단장 제논이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백작님으로부터 출정 명령이 하달되었네. 기사 5백, 병사 2천 5백을 차출, 3천의 병력을 이끌고 2황자 전하를 보필해야 한다. 총지휘는 페드로 오라버니께서…….”

“죄송하지만, 영주 대리.”

페드로가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메랄다로부터 건네받았던 명령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집무실 내에 갑작스러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정도였다.

“백작님께서 직접 하달하신 명령입니다.”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네가 바라지 않으면 출정하지 않으마.’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 그리 아프게 울지 마.’

설마,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백작의 명령에 불복하려는 것일까?

조금 전까지 중앙군을 괴멸시키고 황제가 노린 수를 박살 내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에스메랄다의 머리가 멈추었다. 대신 심장이 바쁘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책상 앞에서 곧은 자세를 취한 페드로가 답했다. 고작 그 대답 하나에 환호하는 심장을 직시한 에스메랄다가 이를 악물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직접 수천, 수만의 백성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면서 자신의 가족이 죽는 것은 배제하려 들다니. 그 가족을 원망하는 주제에.

에스메랄다는 스스로에게 깊은 환멸을 느끼며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백작님의 명입니다. 출정하세요.”

“거부합니다.”

“……불복에 대한 과정을 백작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사 울 체그라 제논, 사병의 통솔권을 위임할 테니 출정 준비를 서둘러라.”

“……명을 받듭니다.”

짧게 답한 제논이 떠난 후 집무실에는 에스메랄다와 페드로만이 남았다.

“말했잖니, 출정하지 않겠다고.”

어느새 책상을 돌아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페드로가 자세를 낮추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 녀석이 며칠 전 영지를 나서더구나. 매일 네 옆에 붙어 다니는 그 용병 말이다.”

에스메랄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언제든 기꺼이, 그 사랑을 버리고 떠날 거면서.’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정에 잡아먹혀 헛소리나 떠들고 다니다니……. 가장 먼저 곁을 떠났던 주제에, 이제 와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뒤흔드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국경 주둔지에 있는 기사들과의 인연은 내가 더 깊다. 네가 아직 걸음마를 할 때 난 그들과 함께 훈련을 했으니까.”

손을 뻗는 페드로가 밉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밀어내지 못했다.

“아비체룬에 재미난 일이 일어났다던데.”

깃펜을 쥐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손이 희게 질렸다. 너무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출발한 시리스는 성공했고, 그에 따라 국경병의 이동으로 생긴 빈틈을 파고든 두 명의 용병이 세작을 보호하며 국경을 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안전하게 경계 지역 너머로 보낸 후에는 돌아오겠지.

“그 시리스라는 놈이 영지를 나선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아비체룬이 마수의 습격을 받았다지? 마수들은 이제 겨우 서남 경계를 지났는데, 어떻게 우리 영지의 국경병을 피해 아비체룬까지 넘어갔을까?”

어차피 그녀에게 가족은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비난받는 것이 무어 그리 두렵단 말인가.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돌아올 멸시와 환멸, 어쩌면 경멸의 감정까지 별것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라고! 그들에게 미움받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제가 그리하라 지시했습니다.”

복수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을 것이고, 이미 발을 들인 핏길에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지요.”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공포를 버티고자 이를 악물었다.

“남부로 향하던 치료제를 강탈한 것과 남부에서 반군의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까지, 모두 제가 지시했습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실망과 환멸을 느낀 페드로가 떠나가게 만들자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제 입으로 감춰야 하는 정보를 토설하고 있다는 경각심을 느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그녀는 감정의 낭떠러지로 밀려 있는 상태였다.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 당신께서 사랑하는 누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음에 슬프십니까?”

페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그 침묵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을 이었다. 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듯이 사납게.

“이를 어쩌지요? 제게는 애초부터 사랑하는 오라비가 없었는데.”

그 충동으로 인해 생각한 것과 다른 말을 내뱉기 시작한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니 위선을 행하며 홀로 만족하시는 것, 적당히 하세요. 출정을 피하시는 게 저를 위함이라 여기십니까? 저는 바란 적 없는…….”

“그만, 그만.”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축축했다. 어째서?

“그렇게 울 정도로 아프면서, 견디지도 못할 모진 말을 왜 해.”

젖은 건 그의 손이 아니라 그녀의 뺨이었다.

“네가 어떻게 변했건, 네가 무슨 일을 하건, 말했지 않니.”

“…….”

“네가 나의 사랑하는 누이임은 변하지 않는다고.”

페드로가 의자에 앉아 있던 에스메랄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쉬이.”

입술을 깨문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에스메랄다의 등에 커다란 온기가 닿았다.

“네가 뭘 하든 상관없다.”

“…….”

“애초에 내가 전장에 가기로 한 건 네가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길 바라서였으니까. 네가 태어나던 날부터 너는 내 전부였다.”

잔인한 사람. 그녀에게 상실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으면서 이제는 다시금 가족을 향한 애절함을 가르치려 한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이, 가고 싶은 길이 어디든 상관없다. 원하는 걸 하렴. 내가 언제든 뒤에 서 있으마.”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예전처럼 매정하게 자신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원망을 녹이려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온기를 짓밟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을 했다 하면 너를 울리는구나. 부족한 오라비라 미안하다.”

에스메랄다는 어둠을 뒤집어쓰기로 한 자신에게 다시 빛무리를 쥐여 주려는 페드로가 미웠다. 그래서 자신을 감싼 온기를 밀어내고자 했다.

“내려 주세요!”

“……리디.”

“그만, 그만해요! 그냥 이전처럼 떠나요! 내가 혼자 남겨지든 말든, 나를 비참하게 만들라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페드로의 손이 순간 흠칫, 멈추었다.

“돌아오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결국은 와 주지 않았잖아! 가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나만 남겨 두고 갔잖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렸다.

“혼자서 그 악귀들에게 뜯어먹히도록 내버려 뒀잖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성으로 무장하고자 했으나, 그녀는 결국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잡아먹히는 나약한 인간이다.

모두가 잊어버린 미래 속에는 에스메랄다가 처음으로 가족의 부고를 접한 날도 있었다.

「바 에타 테노리엘 페드로, 바 51일 전사.」

전사 소식이 들린 지 열흘 후, 그녀에게 되돌아온 페드로의 시신은 여기저기 찢어진 것을 기워 맞춘 넝마와 다르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그의 몸 위에는 에스메랄다가 보냈던 생일 선물이 고이 놓여 있었다. 그는 본인의 생일에 죽었고, 그날을 위해 누이가 준비했던 선물을 되돌려주고 떠났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그것을 페드로와 함께 묻어야만 했다.

그들은 전쟁 중이었고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다르다. 처음 겪어 본 상실감,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끔찍한 감각. 가족, 친구, 연인, 이웃, 동료. 사람은 타인과의 교류에서 직접 겪을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듣는다.

그렇기에 여려 인간관계는 결국 한 사람의 세상이고, 누군가의 죽음은 그 세상이 무너져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족이 사람에게 쥐여 주는 세상은 특별하다. 태어나 처음 쌓는 인간관계가 가족으로부터 파생되니까.

에스메랄다는 그 특별한 세상을 다섯 번이나 잃었다. 두 번 다시 페드로의 품에 안기지 못하게 되었고, 아레스의 연초 냄새를 맡을 수 없었고, 만담처럼 주고받는 쌍둥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훈련과 교육에서는 엄했음에도 그 외의 모든 것에선 자녀들에게 져 주었던 다정한 부친을 영원히 잃었다. 그녀는 남은 일생의 모든 시간 속에서 형제들과 부친의 부재를 실감해야 했다.

그것들을 모두 겪도록 내버려 둘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곁에 남겠다니. 그들에 대한 애절함을 버리고 홀로 섰는데, 왜 이토록 괴롭히나. 잔인하다.

에스메랄다는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페드로를 작고 고운 손으로 몇 번이고 때렸다.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입에 발린 말로 사과하는 그가 너무나도 밉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품에 매달려 울었다. 그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었던 그 날처럼.

* * *

에스메랄다는 동틀 무렵 저 멀리 피어오른 붉은 연기를 확인한 후 다시 펜을 쥐었다. 옆에선 히나가 같은 내용의 서신을 베껴 쓰는 중이었다. 그녀가 지금 작성하고 있는 서신은 서부의 북쪽에 포진한 영지와 무단으로 전선을 이탈한 탈영병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테노리엘의 깃발을 매단 전령을 통해서. 그녀가 황도에 있는 테노리엘 백작 저로 보내는 서신은 백작의 손에 들려 황실에 들어서게 되겠지.

에스메랄다가 같은 내용을 담은 수십 장의 서신을 모두 작성했을 무렵,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곧이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페드로였다.

“일어나렴, 대피해야 한다.”

오늘은 카 51일, 아르페시스가 서남 경계선에서 도망친 서부군과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날이다. 그리고 조금 전 에스메랄다가 확인한 연기는 며칠 전 출정했던 영지의 3천 병사가 보낸 퇴각 신호였다.

그녀는 며칠 전의 일 이후 페드로를 빤히 응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페드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조금 더 잘 보라며서 얼굴을 내밀곤 했다. 자신에게 다가오자마자 버릇처럼 안아 드는 페드로의 손길에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내려 주세요.”

내려 달라는 한마디에 에스메랄다는 페드로의 손을 벗어나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어. 영지를 잃더라도 너는 무사해야만 한다. 그걸 위해 내가 아버지의 명령까지 어겨 가며 여기 있는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오라비 페드로는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우며, 부친과 뜻을 함께하던 기사였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가 보여 준 모습만을 알고 있던 것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녀가 알던 페드로는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페드로는 테노리엘 백작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그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고 난 후, 그녀는 미래에서 어른인 척, 덤덤한 척했던 것을 후회했다. 15세의 에스메랄다는 가족을 잃는 상실감을 상상으로만 알고 있던 어린 소녀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떠났던 페드로에게는 가지 말라는 애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돌아와 달라는 부탁이 전부였다.

반면… 오멘과 페르멘까지 잃은 이후의 그녀는 더 이상의 상실감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절박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테노리엘 백작과 아레스에게는 매달렸다. 가지 말라고. 그럼에도 버림받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에스메랄다가 처음부터 매달렸다면 페드로는 지금처럼 곁에 남아 주었을까?

그 시절의 시간은 모두 사라졌기에 지금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아직 낯선 자신의 오라비를 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테노리엘은 건재해야 합니다.”

에스메랄다는 책상 위에 가득한 서신 중 가장 두툼한 것을 집어 들었다.

“전령에게 들려 주어야 하니 모두 챙겨 나오렴.”

“예, 아가씨.”

히나가 가득 쌓인 서신 봉투를 챙기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문 앞에 서 있는 페드로를 지나쳐 집무실을 나섰다. 바로 옆방으로 이동한 그녀는 평소 그녀에게 오가는 개인적인 전서구보다 조금 더 큰 맹금류종의 전서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개인적인 전서구가 아니라 가문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언제나 황도 백작 저에 한 마리, 영지에 한 마리가 머문다. 맹금류종의 전서구는 서신을 담을 수 있는 가죽 가방을 목에 매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가져온 서신을 그곳에 넣고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새가 날개를 펼치며 창밖으로 날아갔다.

저 서신에 적힌 건 아르페시스를 서부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서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온 중앙군의 책임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연합군 창설 허가를 내리고 거기에 대한 총지휘권을 달라는 의미였다.

저것은 테노리엘 백작의 손에 들려 황성으로 들어가리라. 서부에 영지를 두고 있는 테노리엘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황제도 그걸 예상하고 있을 터. 일어날 것이 분명한 일을 미룰 필요는 없었다. 이미 일이 터졌고, 황실은 먼저 수를 두었다. 이제는 에스메랄다가 순번을 받아 수를 둘 차례였다.

이번 판에서 아르페시스는 황태자보다 더 대단한 전공을 쌓아야 한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황태자가 돋보이도록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황성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무능한, 이라는 꼬리표뿐일 것이다. 아르페시스의 전공으로 인해 황실에 대한 반감이 옅어질 수도 있지만 황태자로 인해 그리되는 것보다는 낫다.

“전쟁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지금이라면 충분히 대피…….”

“집사.”

서신을 보내고 다시 길을 나선 에스메랄다는 복도의 끝에서 급히 다가오고 있던 집사를 불렀다.

“예, 아가씨.”

“국경 주둔병을 제외하고 가용 가능한 전 병력을 집결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집사가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에스메랄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원망 어린 투정을 듣고 난 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 페드로. 그녀의 시선은 이미 그를 떠난 상태였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테노리엘은 건재해야 합니다.”

그녀는 페드로에 대해 곱씹는 대신 다가올 전투를 곱씹었다. 사사로운 고민은 급한 일이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우선순위를 착각해선 안 된다.

“고작 며칠 전에 제가 원하는 길을 가라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그것을 위해선 테노리엘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세요.”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페드로에게서 몸을 돌렸다. 차갑고 이성적인 모습이었지만, 사실 에스메랄다의 속내도 어지러운 상태였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어쩌면 그녀를 의심하며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르페시스가 오고 있었으니까.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그와 다시 마주할 줄이야. 에스메랄다는 동요하려는 스스로를 억누른 채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곧 집결할 가용 병력으로 함정을 파고, 수성 전투에 대비한 계획을 수립해야만 했다. 감정 따위에 동요할 때가 아니었다.

* * *

카 51일 01시, 밤새 발걸음을 재촉한 아르페시스가 서부군과 합류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1만도 남아 있지 않은 서부군과 합류한 직후 100여 마리 규모의 마수에게 습격을 받았다.

거의 일평생을 쉬지 않고 준비했음에도 아르페시스는 마수를 처음 본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그건 인간이 가지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 본능이 가져오는 공포. 그로 인해 서부군은 엉망이었다. 연합군이 창설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근방 영주들이 내보낸 사병들은 명확한 지휘권자조차 없이 각자 따로 놀기 바빴다.

각 영주들이 내린 출정 명령으로 인해 경계선 근처로 집결했으나, 마수를 발견하자마자 창칼을 버리고 도주한 병사가 절반을 넘는다는 보고를 들었다. 반복된 탈영으로 본진이라 부를 만한 주둔지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르페시스가 합류했을 무렵, 그들은 경계선 주변에 천막과 물자를 모조리 버려둔 채 도망가던 중이었으니까.

그와 함께 서부로 온 중앙군은 끈이 없는 이들이다. 예정보다 일찍 출정하게 된 그와 함께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들. 그런 중앙군 출신의 탈영병도 적지 않았다. 중부에서 서남 경계선으로 진군을 하는 동안 비장하던 그들의 눈은 마수를 마주하자마자 겁쟁이의 것으로 돌변했다.

그가 서부군과 합류한 직후에 벌어진 교전에서 직접 데려온 5천의 중앙군 중 2천이 추가로 탈영했다. 그 속에는 기사 1천이 모조리 포함되어 있었다. 본보기 처형도 한두 명이라야 하지. 군사 이동을 하는 것처럼 우르르 탈주를 하니 그들을 쫓아가 죽이다가 잔존 병력에 피해가 생길 판이었다. 이 모든 건 고작 3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능한 자들이 아닌가.

‘남쪽 하루 거리, 마수 무리가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추정 수는 대략 8천에서 1만으로 여겨집니다.’

다른 이들이 마지못해 군대 흉내를 내고 있을 때, 테노리엘에서 파견한 지원군의 책임자 제논은 유일하게 남쪽으로 정찰병과 관측병을 보내 둔 상태였다. 그는 100여 기의 마수와 교전 후 그 보고를 하며 영지로 퇴각할 것을 간청했다. 이미 반토막 난 병력은 1만도 되지 않았고, 그들로 1만의 마수를 막을 수는 없다.

이론적으로 소형의 마수 한 마리를 상대하는 정석은 1인의 평기사가 주도, 2인의 병사가 지원하는 형태다. 중형은 평기사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다. 무기에 마나를 씌우지 못하는 평기사는 중형 마수의 가죽을 뚫을 수 없으니까. 고로 중급 기사 5인 이상, 혹은 상급 기사 2인 이상이 필요하고 대형 마수를 상대하기 안전한 인원은 상급 기사 20인 이상이다.

만약 기사 없이 병사들만으로 소형 마수를 상대할 경우에는 5인 1조가 기본이다. 한마디로 마수와 인간이 1대 3의 비율로, 그것도 기사와 병사가 1대 2의 규모를 이룬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이었다.

경계선 인근의 영주들이 보낸 기사들을 다 합쳐도 2천에 조금 모자란 지금의 병력으로는 불가능했고, 한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 혼란 속에서 경험이 없는 아르페시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빠르게 제논의 의견에 동의, 퇴각을 시작했다.

약 12시간 전, 해가 뜰 무렵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속에서 치솟는 욕설을 애써 참아 보았다. 이렇게 빨리 전장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장에 있다. 몇 년간 열심히 반발하던 세력이 미성년자 출정 금지법 폐지에 그렇게 쉽게 동의할 줄이야. 남부에서 반군들의 가족을 처형하고 다닌 멍청한 중앙군 때문인지, 아니면 무너진 리퀘나 저지선 때문인지…….

이유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황제는 그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에 집착했다. 황태자를 패로 사용할 정도로. 차라리 대놓고 ‘가서 죽어라.’ 하고 말했으면 이렇게까지 열이 치솟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끝까지 고상한 척하던 황제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면에 함정 표식이 있습니다!”

“테노리엘은 앞장서라! 안전한 길로 아군을 안내하라! 기사들은 전하를 모셔라!”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시각,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테노리엘 백작령의 영주 성까지는 30여 분 거리.

아르페시스는 이를 갈면서도 자신의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싼 채 이동 중인 이들을 힐끔거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는 황성에서부터 데려온 황실 근위대 기사 30명이 있었다. 포효하는 사자를 표현한 황가의 문양을 가슴에 달고 황자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

아쉽게도 그중 20여 명은 황제가 붙여 둔 인사였다. 아르페시스의 세력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정확하게 9명뿐이다. 황태자가 거느린 근위 기사가 100여 명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숫자였다.

이러니 그가 황실에 대적하는 뜻을 전혀 보일 수 없는 것이다. 황제가 그를 필요 없는 말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저 20여 명의 손에 죽게 될 테니까. 저들은 감시자이자 칼이었다. 항시 아르페시스의 곁에 머물기에 누구보다 쉽게 그의 등을 꿰뚫을 수 있는 칼.

그들 외에도 똑바르게 세워진 양손 검 주변을 뒤덮은 덩굴, 테노리엘의 문장을 가슴팍에 새긴 기사들이 보였다. 선두에서 이동 중인 테노리엘 병사들이 곳곳에 끼워진 깃발들을 보며 함정이 없는 길을 안내했다. 아르페시스는 정상적인 군부 인사들에게 테노리엘이 칭송받다시피 하는 이유를 몸소 경험함으로써 깨닫는 중이었다.

질이 다르다. 그들 역시 서부 내륙에 있던 병사임은 분명한데, 눈동자에 담긴 공포가 선명한데 도주하지 않는다. 테노리엘이 보낸 3천의 병력 중 탈영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게 그 테노리엘의 명성이다. 처음 경험하는 긴박한 상황임에도 그는 몇 번이고 감탄했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르페시스의 머리에는 종종 지금의 것과 무관한 생각이 불쑥 끼어들곤 했다.

‘너를 내게 돌려 달라고, 너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영지에서 생활한다는 테노리엘 백작의 고명딸. 곧 황태자의 약혼 축하연에서 보았던 에스메랄다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출정하던 날 충동적으로 집어 온 두 장의 종이가 갑옷 속에서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한 장은 그녀를 직접 보았던 날, 다른 한 장은 페드로로 의심되는 사내를 만났던 날의 꿈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와 관련된 잡생각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 깨끗하게 이어지지를 않았다.

아르페시스가 생각의 고리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현실을 느끼기 시작한 건 후각에 강한 자극이 가해진 순간이었다.

“기름…….”

말이 밟아 지나가는 땅에서 기름 냄새가 풍겨 왔다. 가루처럼 흩어진 채 바닥을 덮은 눈이 무언가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게 보였다.

후방에서 괴성이 들려온다. 인간의 속도로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두고 회피를 택했는데, 벌써 마수들이 바짝 뒤쫓아 온 것이다. 마수의 기동성은 인간의 발로 뿌리칠 수 없다. 말이 전력을 다해 달리면 겨우 앞서나갈 정도. 보병과 함께 이동하느라 속도가 느렸으니 뒤를 잡힐 수밖에.

“함정…….”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테노리엘의 기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히 함정이라고 했었다. 그 함정에 걸린 마수들의 비명일까? 그의 의문이 길어지기 직전, 길고 긴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기마병!”

제논이 뿔피리 소리가 들리자마자 검을 빼 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아르페시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기마병은 체그라 경을 따르라!”

아르페시스는 곧장 반응했다. 중앙군을 대동한 채 도착한 황족, 나이는 상관없다. 황제가 보낸 책임자는 그 대상이 꼭두각시에 불과한 2황자라 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명령권은 아르페시스로부터 나와야 이상적이다. 명확한 윗사람이 있어야 규합이 되기 시작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지원 세력에 불과한 제논의 지휘에 응했다. 저 뿔피리 소리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아르페시스보다 제논의 판단이 더 명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제논의 선창에 따라 기마병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보병들은 인솔자의 명에 따라 침착하게 속도를 유지하라!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은 확실하게 피해라! 테노리엘이 길을 알려 줄 것이다! 테노리엘은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 믿어라!”

제논이 악을 쓰며 병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 말을 테노리엘의 기마병들이 따라 했다. 마치 재촉을 하듯, 조금 전과 똑같은 길이의 뿔피리 소리가 다시 울렸다.

보병을 뒤로한 기마병들이 속도를 높였고 그 속에는 말을 타고 있던 아르페시스가 함께였다. 듬성듬성 보이던 나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완만한 경사가 시작되었다. 서쪽으로 지고 있는 태양이 하늘에 피를 뿌린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

세 번째로 뿔피리 소리가 들렸을 때 아르페시스는 볼 수 있었다. 석양을 뒤로한 채 먼 곳에 집결해 있는 일단의 기마병을. 그리고 더 먼 곳에 점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성이 시야에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렸다. 산지를 등지고 남쪽을 향해 뻗어 있는 저 성이 테노리엘의 본거지이리라.

언덕이 조금 더 평지에 가깝게 완만해지는 지점에서 기마병이 그를 기다리듯 도열해 있었다. 뿔피리 소리를 처음 들었던 곳처럼 이곳에도 기름 냄새가 흥건했다. 백여 기에 달하는 기마병 뒤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색색의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제논.”

“도련님!”

유일하게 장창을 쥐지 않은 채 선두에 서 있던 사내를 보는 순간, 아르페시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심장이 덜컥거리는 것을 인지하며 이를 악물었다.

제논이 도련님이라 부르며 다가간 사내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황도의 광장에서 그의 복부를 걷어찼던 금발 사내, 아레스가 찾고 있던 페드로였다. 테노리엘, 대체 그들은 누구이기에 이렇듯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일까.

아르페시스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까지 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무시하고자 애썼다. 그러는 사이 제논의 안내를 받아 자신을 괴롭히는 금발 사내와 마주할 수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노리엘의 페드로가 인사 올립니다.”

“……반갑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후방으로 가시지요. 영주 성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만?”

“아, 가시기 전에 근위대를 포함한 기마 병력을 테노리엘이 통솔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장창을 제공할 겁니다.”

모든 단어를 우회적으로 돌리긴 했지만 뜻은 명확했다.

“호위를 담당하는 근위 기사의 일부는 따로 대동하셔도 무방합니다. 전부 데려가겠다고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현재 기마병 수가 여유롭지 않은지라, 손 하나라도 더 빌리고 싶은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황제의 인사들을 쉽게 들여보내 줄 생각은 없으니 네 사람만 챙겨 따라오라는 말이었다. 아르페시스는 페드로를 빤히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되짚었다.

황실과 테노리엘의 불화는 모두가 아는 사실. 그들의 뜻이 어떠하든, 아르페시스로서는 옆에 붙어 있는 이들과 떨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졌다.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휴고와 3조는 따라오라.”

“전하! 전하의 곁을 지키는 것은 저희 1조…….”

황제가 직접 명한 근위단장이 반발하려 했으나, 그보다 페드로가 빨랐다.

“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근위단장의 말을 잘라먹은 페드로가 먼저 앞서 나갔다.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지만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웃는 모습이 조금 거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말을 모는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발을 들인 전장에서 누구를 가까이 두어야 할지는 명확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임명한 근위 기사들만 챙기기로 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경험은 부족하고 식견은 좁다. 억지를 부리며 나서서 피해를 만들기보다, 자신보다 능숙해 보이는 이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되리라. 분수를 모르는 자는 다른 이들까지 나락으로 빠트리는 법이다.

“서부군은 지금부터 테노리엘의 지시에 따르라!”

불만 서린 얼굴들이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 체계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그들과 달리 아르페시스에게는 황제가 쥐여 준 황족이라는 힘이 있으니까.

“제논.”

떠나기 직전 아르페시스는 페드로가 제논에게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 중일까?

마나를 사용해 신체 감각을 확장시켜 보려 했지만 그 전에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 버렸다. 페드로가 먼저 출발하고 아르페시스는 함께 퇴각했던 2천의 기마병을 뒤로한 채 영주 성 쪽으로 이동했다.

줄을 맞춰 도열해 있는 기마병을 지나 성에 도달했을 무렵 멀리서 다시 한번 괴성이 울려 퍼졌다. 뒤를 돌아본 아르페시스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 피어오른 검은 연기를 보았다. 불이 붙은 모양이다. 그는 처음 기름 냄새를 맡았던 지역을 떠올렸다.

페드로를 조우한 후 다시 시작된 기름 냄새는 아직까지 가득했다. 흙바닥 곳곳이 얼룩덜룩 젖어 있었다. 그가 기름 냄새에서 벗어난 건 영주 성이 부쩍 가까워진 후였다. 불길이 치솟던 뒤를 돌아보고 있던 아르페시스는 다시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선을 넘어오는 소규모 마수 무리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남부는 외성 밖에 거주지를 비롯한 어떤 건물도 세우지 않는다. 반면 내륙 지역의 영지는 외성 밖에도 거주지나 상가 건물 등이 넓게 퍼져 있는 경우가 많다. 아르페시스는 외성 밖에 세워진 민가 건물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며 성문을 넘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성문 너머에 있던 병사들이 경례를 올렸고 페드로가 그를 성벽 위로 안내했다. 숨을 돌릴 시간조차 없이 성벽을 오른 아르페시스의 시야에 작은 인영이 들어온 순간, 그 작은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심장에 통증이 번졌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가 인사 올립니다.”

그를 괴롭히는 소녀가 치맛자락을 펼쳐 보이며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아르페시스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껴 가며 그녀를 눈에 담았다. 다시 보아도 맞다. 석양의 붉은빛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더 적나라한 색이었다. 악몽 속에서 화마와 함께 사라지던 건 그녀다.

“에스메랄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를 버겁게 만드는 사람. 아르페시스는 생소한 통증을 호소하는 왼쪽 가슴께를 움켜쥐고 싶었으나 갑옷이 그 행동을 방해했다. 대체 그 악몽이 무엇이기에 자신의 신체에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행사한단 말인가.

이를 악물어 보았음에도 스스로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웠다. 그녀는 대체 누구고, 자신은 왜 그런 꿈을 꾸는 것일까?

아르페시스가 조금 전 페드로를 보았을 때보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고 있을 때 함께 성내로 들어온 근위 기사들이 도착했다.

“오랜 이동에 지치신 모양이군요. 먼저 성으로 가시겠습니까?”

오래도록 침묵하는 아르페시스에게 에스메랄다가 권했다. 그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상태임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싫다. 이곳을, 그녀의 곁을 떠나라는 말에 짙은 거부감이 들었다. 스스로의 기괴한 반응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을 텐데.

“아가씨.”

곁에 서 있던 기사가 그녀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아르페시스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도리질을 치고 있을 때.

“곤하실 것을 알고 있으나, 상황이 급박하여 직접 모시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에스메랄다의 말에 아르페시스는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못 박힌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마병, 돌격 준비.”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곁에 서 있던 기사가 뿔피리를 불었다. 짧게 끊어진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뿔피리에 달린 소리 확장 마도구가 반짝거리는 빛을 내며 발동되는 것이 보였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성벽 너머로 향한 것도 그때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둔 채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개인적인 문제를 붙들고 고민할 때가 아니다. 자칫하면 그들이 끌고 온 마수가 테노리엘 영지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상황.

차라리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퇴각 대신 응전을 택해야 하지 않았을까? 경험이 없는 자신보다 나을 것이라는 이유로 제논의 의견에 너무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닐까?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는 마수 떼가 테노리엘의 성문을 뚫고 내부로 진입하는 끔찍한 상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런 최악을 상정하고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아르페시스는 마수 떼가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음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이들 때문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성벽 위의 명령권을 가진 것 같은 에스메랄다에게로 향했다. 작은 소녀가 건장한 사내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테노리엘의 차남이자 기사 작위를 받은 페드로가 있는데 지휘를 에스메랄다가 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작 10대 초반에 불과한 지휘권자를 두고 의문을 표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르페시스가 의문에 의문을 곱씹던 그때, 저 멀리서 퇴각하던 보병들이 대기 중이던 기마병들을 지나쳤다. 마나로 시야를 확장한 그는 보병과 기마병의 위치가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꽃이 선명한 지점을 빠져나온 마수 떼가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저 속도면 기마병이 포진한 장소까지 도착하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보병들을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되었을 때, 성벽 위에 서 있던 이들이 커다란 깃발을 흔들었다. 아르페시스는 그 깃발을 따라 선두에서 안내를 자처하고 있는 테노리엘의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테노리엘의 사병들이 사용하는 명령 체계.

보병들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 아르페시스가 지나온 남문은 물론 아직까지 폐문되지 않은 동서쪽의 성문으로 보병들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페시스는 그것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성문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계산하고 인원을 세 곳으로 분산한 것이다. 당연한 결정 같지만 아르페시스는 지금까지 보병의 퇴각을 보면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마수와의 전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명령권자가 얼마나 차분한지 보여 주는 단편적인 예였다.

“거창.”

에스메랄다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기사가 뿔피리를 두 번 끊어 불었다.

아르페시스는 저도 모르게 성벽의 난간으로 바짝 다가섰다. 페드로를 마주한 곳, 기름 냄새가 다시 시작되었던 곳, 의미 모를 색색의 깃발들이 꽂혀 있던 그곳.

눈을 가늘게 떴던 아르페시스는 그곳을 밟은 마수 떼가 한순간 아래로 훅,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도랑……!”

도랑을 파 둔 것이다. 그리고 안전한 지역을 깃발로 표시해 병사들이 지나가게 하다니. 마수와의 첫 교전에서 탈영을 해 대던 병사를 목격했던 아르페시스는 전율을 느꼈다.

제논이 영지에서 확인 가능한 퇴각 신호를 올린 건 고작 12시간 전이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함정과 지휘 계획이 그사이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땅에 생겨난 공간이 선두의 마수들로 채워지고 후미의 마수들이 그것을 넘기 시작할 무렵, 앳된 목소리가 적막한 성벽 위를 울렸다.

“돌격.”

짧고 강렬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정렬해 있던 기마병들이 중심부를 선두로 속도를 높였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수와 기마병들이 충돌하며 만들어 낸 굉음이 성벽에까지 닿았다. 약 4천으로 추정되는 기마병, 그들이 마수와 격돌한 것이다. 그 한 번의 격돌로 마수의 1/3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확연하게 수가 줄었다. 다른 영지에서 모인 기마병 2천이 새로 합류했는데 어찌 저렇게 완벽하게 움직인단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책과 글로만 배워 온 명령 체계와 지휘권의 중요성을 목도할 수 있었다.

기마병은 도랑을 지나온 마수들의 중심을 꿰뚫었다. 마수 무리가 쐐기꼴로 진군했던 그들에 의해 둘로 갈라졌다.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나올 다음 명령을 알 수 있었다.

“회군.”

“회군…….”

두 사람의 음성이 겹쳐졌다. 아르페시스의 시선은 에스메랄다에게,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전방에 고정되었다.

조금 전과 달리 길고 긴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아르페시스가 보병들과 이동하며 들었던 그 소리. 마수 떼를 뚫고 지나간 기마병은 어느새 양 갈래로 갈라졌다. 그들은 반으로 갈라낸 마수 무리를 빙 돌아 성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마병의 뒤를 마수들이 따라붙었지만 다행히도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초조하게 그것을 보며 물었다.

“폐문까지 얼마나 걸리지?”

“완전 폐문까지는 5분, 위협 요소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지기까지는 4분가량 소요됩니다.”

페드로의 대답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기마병이 성 내부로 회군한 후 폐문을 시작하면 늦는다. 4분이면 마수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보병들의 진입이 끝났다고 합니다.”

“남문은 폐문을 시작하라.”

“예, 아가씨.”

아르페시스가 밟고 서 있는 성벽이 진동했다. 여닫는 데 각기 5분이나 걸린다는 육중한 성문이 철그럭거리는 도르래의 비명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히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두꺼운 성문이 천천히 돌바닥을 긁으며 입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마수들과 가장 가까운 남문부터 닫는 것을 보면, 빠른 기동성을 가진 기마병은 마수들과 거리를 벌린 후 서문과 동문을 통해 복귀할 모양이다. 외성의 밖에 남아 있는 기마병들이 양 갈래로 갈라져 회군하고 있는 것에도 모두 이유가 있었다.

“기마병, 함정 지역 돌파 직전입니다.”

“궁수, 사격 준비.”

조금 전과 달리 새의 울음소리처럼 높은음을 가진 뿔피리가 세 번 끊어져 울렸다.

아르페시스는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의 성벽을 둘러보았다. 시위에 화살을 건 궁수들이 성벽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준비한 화살의 끝에는 석양의 빛과 구분되지 않는 시뻘건 불꽃이 매달려 있었다.

“기름……!”

아르페시스의 중얼거림 끝에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조준.”

두 번의 짧은 뿔피리 소리.

“사격.”

그리고 이어진 것은 단호한 명령이었다. 기마병이 돌격을 하던 그때처럼 짧게 울린 뿔피리 소리에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불화살이 붉게 물든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아르페시스가 태어나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기름이 뿌려진 땅 위를 벗어난 기마병들이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통증을 호소하며 거칠게 뛰는 이유에 혼란을 느꼈다. 악몽의 색을 가진 에스메랄다 때문인지, 처음 보는 장대함 때문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름을 먹은 땅 위에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 것 같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열기가 성벽에까지 닿을 정도로 강렬한 화마가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창궐했다. 그 속에 집어삼켜진 마수들이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그 화마를 벗어나 기마병의 뒤를 따르는 마수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마법사 준비.”

이번엔 뿔피리 소리가 아니었다.

“마법사 준비!”

그녀의 곁에 서 있던 기사가 선창하자 몇몇 이들이 그 말을 따라 했다. 도합 다섯 명. 에스메랄다의 지근에 서 있던 남자들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로브에 새겨진 문장은 테노리엘의 것이었다. 개별 가문에 소속된 마법사였다. 보병들을 이끌던 순간처럼,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한 녹색 깃발이 솟아올랐다.

“기마병, 퇴군 완료했습니다!”

“동문과 서문, 폐문하라.”

“폐문! 폐문하라!”

붉은 깃발이 펄럭이며 폐문 신호를 전달하자 멀리서 우르릉,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시스는 차분한 모습으로 전두 지휘를 하고 있는 에스메랄다를 멍하니 응시했다.

“3거리 함정, 발동.”

이번에는 그녀의 명령 뒤로 따르는 그 어떠한 소리도 없었다. 허공에 솟아나 있던 녹색 깃발이 크게 펄럭였다. 여기저기서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울리는 강렬한 폭음이 그 중얼거림을 뒤따랐다. 마수들이 가득 뭉쳐 있는 곳에서 폭발이 시작되었다.

“원거리 발동 마도구…….”

신음과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아르페시스는 책으로만 보아 왔던 전술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그건 16세에 불과한 그에게 가르침이었고, 배움이었다.

“2거리, 발동 준비.”

“2거리 발동 준비!”

눈대중으로 파악하건대 약 4천에서 4천 5백가량의 마수가 남아 있다. 그놈들은 불꽃이 옅은 곳으로만 움직이며 민가 건물로 접근했다.

“2거리 함정, 발동.”

그때, 선두에서 달려오던 마수들은 폭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폭발에 의해 마수들의 시체가 잔인하게 조각나 사방을 더럽혔고, 그들과 함께 비상했던 건물의 잔해가 땅을 두드렸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폭발 마도구를 사용하면 영지민들의 재산 피해가 심각할 텐데……. 아르페시스는 마수와 함께 파괴되고 있는 인간의 터전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1거리 함정, 발동.”

다시 한번 강렬한 폭음이 놈들을 집어삼켰고 직후 성문이 완전히 입을 닫았다.

다음은 다시 궁수, 아니 궁기사다. 아르페시스는 확답을 원하는 것처럼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 화살에 마나를 담아 원거리에서도 마수들의 가죽을 꿰뚫을 수 있는 상급 기사들. 그녀는 역시나 궁기사를 언급하며 뒤처리를 명했다.

“궁기사들을 필두로 잔존 마수를 처리한 후 개문, 정찰 및 관측병을 하루 반나절 거리까지 포진시킨다. 개문 후 선발로 나선 보병이 마수들의 확인 사살을 끝내면 사체 처리에 자원한 영지민들을 투입, 호위하라.”

“예, 아가씨.”

“제논 경에게 피해 병력 및 집결한 서부군의 정확한 수와 병과를 조사해 오늘 안으로 보고하라 전해라.”

“명을 받듭니다!”

그제야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선명하고 짙은 녹안, 악몽의 그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색. 분명 대화 한번 해 본 적 없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그리운 사람, 에스메랄다. 위급했던 상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아르페시스는 조금 전의 혼란을 상기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심에 있어 부족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아니다, 부족한 나로서는 식견을 넓힐 좋은 기회였다.”

“영광이나이다. 이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르페시스가 혼란스럽건 말건, 에스메랄다는 예의를 지킨 후 앞장서서 성벽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천사야.”

페드로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오자 겨우 그의 명치쯤에 올까 말까 한 에스메랄다의 걸음이 멈췄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인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체 처리는 내가 진두지휘했으면 하는구나.”

“…….”

“허락해 주겠니?”

“……뜻대로 하세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아르페시스는 두 사람의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분위기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에 대해 무지하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르시지요.”

“아… 그래.”

아르페시스는 먼저 마차에 올랐다. 에스메랄다가 페드로의 에스코트를 받아 그 뒤를 따랐다.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아르페시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남매들 사이에 불가능한 애정 표현은 아니겠지만 조금 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묘한 분위기가 다정한 모습에 이질감을 주었다.

페드로가 외부에서 문을 닫자 마차가 출발했다. 아르페시스는 복잡한 와중에도 마차의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았다.

폭음과 마수들의 괴성이 울린 전시 상황, 외성 내부의 시가지에는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 외의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건물 내부로 대피시킨 것일까? 아니면 내성으로?

잠시 고민을 하고 있노라니 민가로 보이는 건물의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리를 통제하고 있는 병사들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외성에서 내성까지 향하는 길은 꽤나 멀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 보았던 어린아이처럼 창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영지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본 평화로운 풍경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전시 상황임에도 그는 영지민들의 얼굴에서 공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광경을 통해 그들을 보호하는 영주 일가가 얼마나 큰 신뢰를 받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에스메랄다에게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느긋한 속도로 움직이는 마차의 덜컹거림이 몇 시간 동안의 긴박했던 순간이 끝났음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고요한 적막, 평화로운 풍경, 그리고 빠듯한 이동 일정으로 인한 피로까지.

황도를 나선 이후 줄곧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근육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억지로 치워 냈던 상념들이 그에게 되돌아왔다. 악몽, 테노리엘, 아레스, 페드로… 그리고 에스메랄다.

이제껏 그저 개꿈이라 여겼던 악몽은 대체 뭘까? 정말 예지몽인가? 꿈이 테노리엘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녀와 그 형제들에게 반응하는 거지?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름이 왜 이렇게 애절하게 느껴지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그녀를 마주하던 순간부터 계속 곱씹던 의문을, 드디어.

“혹시 나를… 기억하는가?”

“…….”

“이상한 의도로 물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그저… 그러니까…….”

무어라 말을 이어 보려던 아르페시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는 혀를 차며 바쁜 이동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악몽이니 뭐니, 거기에 휘둘려서. 당연히 기억을 하겠지. 연회장 복도에서 떡하니 마주쳤었는데! 아르페시스는 몰려오는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의 약혼 축하연이 있던 날, 잠시 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오늘의 기회를 빌려, 그날 전하께 저지른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황성에 방문한 것이 처음인지라 긴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르페시스는 그제야 에스메랄다가 소개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상기했다.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녀를 만났다는 것 자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 괜찮다. 그리 괘념치 않으니 신경 쓸 것 없다.”

“너그러운 용서에 감사드립니다.”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늘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억지로 긴장감을 끌어 올리려 해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저도 모르게 탄식과 같은 숨을 내뱉으며 만족감에 취해 버린다.

아르페시스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했다. 정말 미치겠다. 그 악몽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고작 두 번 보았고, 대화는 오늘이 처음이다. 에스메랄다가 기이할 정도로 그를 동요시키긴 하지만 그것이 변하지는 않는다. 악몽을 제외하면 그녀에 대한 연결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성으로 내린 결론과 다르게 자신의 몸은 이토록 기이한 반응을 보이는가. 아르페시스는 에스메랄다를 훔쳐보며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에 괴로워했다.

그날 밤, 1만에 근접하는 마수를 막아 낸 테노리엘이 보고해 올린 피해는 고작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숫자였다. 사망자 36명, 부상자 107명. 아르페시스는 책으로도 그런 숫자를 본 적이 없었다. 보병을 출정시켰을 경우 발생할 인명 피해를 재산적 피해로 막아 냈기에 가능한 숫자였다. 폭음이 난무하는 곳에서 왜 영지민들의 얼굴이 그토록 평안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더욱이 사망자 36명 속에는 그가 그토록 떨구고 싶어 했으나 하지 못했던 황제의 개, 근위 기사 1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이 테노리엘을 돕는 것인가? 그들의 피해는 경미했고 그들이 적대하는 이들의 피해는 컸다.

* * *

「대륙력 1432년 카 51일은 당해 겨울에 발발한 서부 대란에서 테노리엘 백작가의 주도하에 제대로 된 저지선이 세워진 날이었다.

또한 훗날 창기사 카 시몬 라시나트 엘리나와 함께 대륙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에렘 제국의 15대 황제, 라 록트 에렘 아르페시스가 길고 긴 마수와의 전쟁에 발을 들인 날이기도 했다.

당시 황자였던 아르페시스 황제가 고작 16세였을 때 있었던 일이다. 그의 용기와 전공은 수많은 전설이 되어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략)」

- 사 주브 자간 『평화의 시작 : 아르페시스 황제의 업적』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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