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6화 (6/45)

제6장

지름길

세상에 완벽한 계획이란 없다. 수없이 많은 변수를 계산에 집어넣고 계획을 짜도, 그것은 언제나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그렇기에 변수로 집어넣은 상황 외의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절벽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가 끊어져 고립됨으로써 아사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밭을 일구기 위해 구입한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돈을 벌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그 변수를 이용하거나 적절히 대응해서 본래의 계획을 유지, 보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인간은 그런 이들을 유능하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볼 때, 에스메랄다의 유능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목적을 위해 무자비해질 수 있는 잔혹함마저 갖추고 있다면 그 유능함이 더하면 더해졌지, 덜해질 리 없다.

「리퀘나 돌파로 반군 동요, 이탈로 인한 병력의 부족이 현 상황을 야기했다고 여기며 복귀에 관한 의견 대두. 일부 부대 병력 증가 확인, 복귀 병력 규모 취합 중.」

그 유능함 덕분에 그녀의 손에 들어온 변수를 계획에 도움을 주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능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 수월하게.

에스메랄다가 대형 마수 출몰로 인한 리퀘나 퇴각을 보고 받은 건 동부에서 황도로 이동 중이었을 때였다. 그 사건이 지금 반군을 꿈꾸며 탈영한 병사들을 동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반군은 아직 아무런 힘도 없다. 이제 태어난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이니 클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 그들은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 세력을 확장하고, 그들과 뜻을 함께할 귀족들과 차근차근 합류하면서, 훗날 중앙군을 상대하기 위해 백성을 병사로 받아들여 키워 내야 한다. 그런데 죄책감으로 인한 복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은 결코 남부군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반군의 싹이 트자마자 뽑혀 버리게 둘까 보냐.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목숨은 황실 중앙 귀족, 신관들의 안위를 보전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황제와 황태자, 그들에게 아첨하며 권력을 탐하는 귀족, 그들의 옆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고 탐욕에 허우적거리는 신관들의 몸을 물어뜯고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마차의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깃펜을 들었다.

「미리 준비해 둔 중앙군 복장을 착용 후 반군의 가족들을 처형할 것. 명분은 본보기 및 분풀이. 이미 군을 이탈한 병사들이 죄책감으로, 아직 군을 이탈하지 않은 이들이 책임감으로 망설이는 일이 없도록 잔혹하게 그들의 가족을 처형한 후 훼손시킨 시신을 전시해 두도록. 그것을 전해 듣거나 직접 목격한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반군에 잔류, 합류할 수 있도록 유도할 것. 후속 조치는 일임.」

펜촉이 살짝 흔들렸지만 에스메랄다는 기어코 그 서신을 완성했다.

이미 치료제를 약탈하고, 당시 경비 업무에 관련되었던 마법사와 병사들을 처리한 일 때문에 황실에서는 의문의 세력에 대한 경계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몸을 사리며 주의해야 하는 시기지만 이번 변수로 인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지도록 둘 수는 없다. 안전한 길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 때로는 위험도 감내해야 한다.

그녀가 더러운 일에 익숙하다 해도 그것은 황실과 신전을 상대하는 것에 한정되었다. 가령 황제가 그러했듯 다른 귀족을 음해한다든지, 증거를 조작하고 날조해 정치적 공격에 맞선다든지 하는 것들. 때로는 그들의 금고를 터는 범죄까지.

대륙력 1442년, 그녀의 나이가 22세였을 때 있었던 테몬 후작의 재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루그레디안이 패륜을 저질러 작위를 확보한 건 사실이기에 선대 후작의 살해 죄목으로 재판이 열렸다. 에스메랄다는 증거를 조작하고 증인과 재판관을 매수하는 등의 일을 행했다.

당시 루그레디안과 에스메랄다가 동일 세력은 아니었다 해도, 우호 세력이었던 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대 세력을 무너트리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 외에도 이 일과 관련이 없는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있다.

발통에 서신을 담은 전서구가 빗속을 뚫고 멀어져 갔다. 에스메랄다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손쉽고 확실한 길을 두고 왜 그리도 멀리 돌아갔을까, 하고.

철이 들기도 전부터 반목했던 그들이 그토록 강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이들이 멀고 구불거리는 길을 돌고 돌아 겨우 도착하는 동안, 그들은 피로 깎아 낸 지름길을 타고 먼저 도착해 있었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스스로가 했던 모든 행동에 후회가 찾아왔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진즉에 이렇게 살 것을.”

그리하면 모든 일이 지나치게 쉬워지는데, 멍청하기는.

본래라면 해가 져 버려 쉬어야 할 시간이지만 에스메랄다는 이동을 지시했다. 남부가 생각보다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일이 급박하게 돌아갈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정까지는 이동하고 동틀 무렵까지 휴식, 그 뒤에 이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영지로 귀환해야 한다. 계속 이렇게 움직인다면 곧 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리퀘나가 뚫렸으니 마수들이 남부 내륙을 차지하게 될 터, 그것들이 남부를 뒤덮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탄 배는 순풍을 맞이하게 되리라.

제국의 영토는 일그러진 물방울 모양을 닮았다. 남부가 동서로 길쭉하다면 동부와 서부는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다. 그렇기에 에렘에서 북부라 불리는 지역의 정확한 방위는 사실상 북동쪽에 가깝다. 즉 에렘은 네 개의 지역이 감싸고 있는 중부까지 합해 총 다섯 개의 지역으로 나뉘는 것이다.

중부는 황제만이 다스릴 수 있는 직할령, 그 외 4개의 지역에는 공후 백작들에게 대리 통치를 임명한 영지가 있다.

그 공후백들이 자작, 남작, 혹은 상급 기사에 해당하는 준남작들을 봉신으로 들여 다시 한번 대리 통치권을 임명하여 수백 개의 영지로 나뉜다. 봉신을 들여 영토를 또 한 번 나누어 줄 수 있는 공후백들은 본인들의 영지에서 소규모의 왕국을 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다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황제의 밑에 머리를 조아리는 구조가 에렘의 통치 형태였다. 에렘의 영토가 너무 넓어 황실이 모든 지역을 통치할 수 없기에 만들어진 구조였다.

지금의 일은 그렇게 황제가 나누어 준 영토 중에서 남부 지역에 터를 가진 이들의 발에 불똥이 떨어진 것과 같다. 일전 그녀가 예상한 대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황실이 중앙군을 파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훗날 파병으로 인해 줄어든 병력을 충원할 때 내부에 사람을 들여보내기 쉬워진다.

북부의 귀족들은 이번에도 발을 뺄 것이고, 서부와 동부의 귀족들도 미리 준비해 두었던 북쪽의 별장으로 대피할 터. 대피 전에 사병들을 차출, 남부와 맞닿은 경계선에 군사를 배치하겠지만…….

“그들이 막아설 수 있을 리가 없지.”

마수를 상대해 본 적 없는 귀족들의 사병이 제대로 막아서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그것을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동부는 손을 대기엔 너무 머니 서부만 건드려 보자.

그렇게 남부와 서부가 난리 통을 겪기 시작하면 제국의 좌우에 있는 양국은 경각심을 가지게 될 터. 만약 남부의 파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까지 입게 된다면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황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실테르는 이미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아비체룬, 그곳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에스메랄다는 자정이 넘어 이동이 멈추자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 속에서 돌멩이의 모습을 한 채 날아드는 비수와 그녀의 죽음을 외쳐 대는 백성들의 악의, 그 속에서 마지막 순간에 들려온 환청. 일렁이는 화마 너머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그녀를 자극했다.

무의식적인 충동이었을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희망일까, 에스메랄다는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녀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날의 잔상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허공을 가득 채운 물방울은 백성들로, 땅을 때리는 빗소리는 그들이 던지는 악의와 저주로, 겨울의 시린 한기는 그녀를 불태웠던 새빨간 화마로.

비를 피하기 위해 쳤던 간이 천막 아래에서 불침번을 서던 용병들이 에스메랄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인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가씨?”

밤새 내린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마차를 벗어난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비수와 악의, 그리고 불꽃 너머에서 들려왔던 선명한 환청.

‘에스메랄다!’

그때 말발굽 소리도 함께 들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녀의 예상대로, 황도의 광장에서 줄을 직직 그었던 의문은 고작 며칠 만에 새로운 형태로 피어나 그녀를 찾아왔다.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환청을 떨쳐 낼 수 있을까?

먹구름으로 인해 떠오른 해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 그 아래에서 에스메랄다의 시야를 빼앗아 간 사람이 있었다. 악몽의 잔상 아래에서는 아르페시스, 현실 위에서는 페드로. 빗물에 젖어 축 늘어진 금발의 청년이 그녀에게 오기 위해 매섭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페드로의 위에 씌워진 아르페시스의 모습은 기억인가, 환각인가.

그녀를 발견한 페드로가 웃어 보인 것만 같았다. 그 미소를 보았을 때 빗물과 섞여 존재조차 불분명한 눈물이 마르고, 악몽이 끝을 알렸다. 에스메랄다의 시야에서 불꽃이 사라지고 현실의 빗방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무의식적으로 페드로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던 에스메랄다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안개가 낀 듯 몽롱했던 머리에 이성의 날카로움이 돌아왔다. 그녀는 내디뎠던 것과 반대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지난밤 그녀의 손에서 완성되어 하늘을 가로질렀던 글귀는 허공에 남아 에스메랄다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군의 가족들을 처형할 것.」

그 글귀가 물어 왔다. 감히, 너에게 자격이 있느냐고.

타인의 가족을 학살하고자 하는 그녀에게는 가족을 사랑하고 보듬을 자격이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생각을 외면하지 못했다.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페드로 덕분에.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눈을 가린 복수심을 치워 준 건 아니었다. 그저 그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를 질타하고, 더욱더 강하게 이를 물게 만들었을 뿐. 곁을 떠나지 않겠다 말하며 돌아오고 있는 페드로가 그것을 알게 되면, 어찌 될까?

가족들이 아끼고 사랑한 누이는 이미 죽었다. 3여 년 전 처형대 위에 피어오른 그 화마 속에서. 남은 것은 복수를 위해 백성을 학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악귀뿐이다. 과연 페드로가 사랑하는 누이의 범주에 그 악귀가 포함될 수 있을까? 그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고할 수 있는가?

에스메랄다는 빗물에 젖어 가는 몸을 방관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끊어졌던 인연에 어째서 이리도 동요하나. 불필요한 감정이다. 그러니 이 미련한 발걸음을 돌려 다시 마차에 올라라.

하지만 그녀는 결국 질척하게 젖은 흙길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페드로의 모습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감아 버렸던 그녀의 귀에 점점 느려지는 말발굽 소리가 닿았다. 느려지고, 느려지다 결국은 완전히 멈춰 버린 소리. 에스메랄다가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사이 페드로의 목소리가 훌쩍 가까워졌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찌 나와 있어. 감기 들겠다.”

그녀의 몸이 인형처럼 가벼이 땅에서 떠올랐다. 에스메랄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겨울 빗물에 차가워진 피부가 그녀에게 닿았다.

“천사가 입을 옷을 꺼내 와라. 마른 수건도.”

에스메랄다의 일행들은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히나가 마차 속의 수납공간에서 마른 옷과 수건을 찾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멀리 왔구나. 밤새 따라오느라 혼이 났다.”

차갑게 식은 페드로의 입술이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흔적을 남기고 떨어졌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 왔는지, 앞으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페드로가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오늘도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니? 안색이 좋지 않은데…….”

페드로는 커다란 품에 그녀를 안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에스메랄다의 작은 손이 그의 목덜미에 감기는 것과 동시에 붉어졌던 눈시울에서 뜨거운 감정이 흘러넘쳤다.

가장 먼저 떠났던 주제에 이번에는 대체 왜. 자신을 떠났던 그가 밉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닿아 온 온기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페드로의 큼지막한 손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 없이 우는 에스메랄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지 마라, 천사야. 네가 원한다면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 그리 아프게 울지 마.”

다가올 미래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그녀를 떠났던 페드로가 지금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 * *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집어삼키기 위해 달려드는 감정에 저항하느라 바빴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페드로의 달콤한 확언을 들은 후 그녀는 그가 자신이 행한 악행을 알고 비난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 공포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가 없는 지독한 복수심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말없이 생각에 잠기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페드로는 그런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그녀가 복잡하고 슬픈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말 한마디 걸어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페드로를 상대해 주지 않았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기에 머리와 심장이 복잡하고 엉망으로 뒤엉켜 있음에도 그녀는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무리한 이동을 지속하며 빠른 시일 내에 영지로 복귀한 에스메랄다는 곧장 뷔비르를 찾아갔다. 그녀는 아브람 백작령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페드로를 따돌리지 못했다.

싱글벙글 웃는 낯짝으로 에스메랄다를 맞이한 뷔비르는 단숨에 시리스에 의해 제압되어 노예들이나 사용하는 구속구를 차게 되었다. 곧 구속구 내부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날붙이가 뷔비르의 목에 상처를 낼 것이다. 한번 채워진 구속구는 조정석이 없으면 풀 수 없기에 인간을 통제하는 데 무척이나 효율적인 마도구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노예들이 차고 있기도 하고.

에스메랄다는 복잡한 속내를 내리누른 채 무표정하게 뷔비르를 응시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조정석이 발동되자 구속구에 채워진 뷔비르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들이 밟고 서 있는 바닥에 붉은 웅덩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질문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뷔비르가 자진하여 입을 열 때까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았고, 페드로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카 43일 오전 2시. 본격적인 겨울을 알리기 위한 첫눈이 내리던 날의 일이었다.

* * *

리퀘나라는 지칭은 남부의 최남단, 군사 지역에 있는 7개의 성벽을 의미했다. 그 7개의 성벽 중 총사령관이 머무는 중앙 성벽을 편의상 리퀘나, 라고 부르는 것이고.

제국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인 7개의 성벽은 7m에 이르는 두께를 자랑한다. 성문을 여닫는 데 필요한 시간만 해도 30분, 문이 한번 닫히면 대형 마수가 아닌 이상 절대 뚫을 수 없는 철옹성이 된다.

선황이 구축한 가장 튼튼한 저지선. 그게 에렘 제국에서 리퀘나 성벽이 가지는 위상이었다. 그곳이 뚫렸으니 제국 내의 혼란은 불가피한 일이다.

반군 창설을 위한 이탈이 가져온 남부군의 병력 약화에 대형 마수까지 출현한 상황. 에스메랄다가 원했던 대로 남부는 무너지고 있다. 이제 그 혼란을 다른 곳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자정에 가까운 시간, 시리스가 그녀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에 도착했다.

“마나 사용이 가능한 이들을 데리고 경계선으로 가렴.”

가서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어 오는 그에게 에스메랄다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마수를 유인해서 그것들을 아비체룬의 국경까지 끌고 가야 한다. 그들은 제국과의 교류를 거부한 채 저들의 전선에만 신경 쓰고 있어. 제국의 문제에 완전한 외면을 가하고 있으니… 그 인식을 바꾸고 경각심을 심어 줘야지.”

“……아비체룬의 국경 너머로 마수들을 유인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제국이 무너지면 그들까지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인지시키기 위해서.”

황실을 무너트리고자 하는 이상 내전은 피할 수 없다. 암살이나 폐위 등의 방법으로는 황제를 끌어내리지 못하니까.

암살을 시도하기에 황성의 경비는 너무나도 견고하고, 폐위를 시도했다간 증인은 황제의 부와 권력 앞에 무릎 꿇을 것이고, 증거들이 조작될 것이다. 미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전쟁으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내전이 발발했을 때 서부의 땅을 밟아 중부 외곽에서 중앙군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날이 도래할 때, 남부군은 아르페시스의 수중에 떨어질 확률이 높으니 그들의 손을 빌릴 수는 없을 터. 남부군이라는 병력을 제외한 채 남부의 영주들이 내어 준 사병으로 중앙을 압박해야 한다.

그런 남부의 사병들과 함께 7만 대군이 황도에 모이지 못하도록 만들 병력, 아비체룬과 실테르의 병력을 빌려야 한다. 서부와 동부에서 압박해 들어와 중부 외곽의 병력들의 발목을 묶어 줄 손길.

그 병력을 빌리기 위해선 아비체룬이 현 황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인식 자체가 없다면 폐쇄 정책을 취하고 있는 아비체룬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들까지 역풍을 맞는다는 사실을 인지시키고, 제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현 황실의 폐망이 필요하다는 이중적인 사고를 만들기 위한 작업. 시리스가 할 일은 전자의 경각심을 위한 것이다. 후자는 조금 더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한다.

훗날 군사를 내어 준 양국이 대가로 뭘 바랄지는 알 바 아니다. 그들이 제국을 뜯어먹든, 국고를 털어 가든, 에스메랄다는 황실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그 후의 일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의 몫이다. 예를 들면… 미래의 테몬 후작, 루그레디안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외국 세력으로부터 에렘을 지켜 내든, 뜯어먹힌 타격이 너무 커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에렘이 완전히 무너지든,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이해했습니다. 정확히 어느 지역을 원하십니까?”

에스메랄다는 지도를 펼쳐 들며 시리스에게 손짓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왔다.

“국경 주둔병과 거리가 있어 곧바로 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또한 자치병의 규모가 작아 마수의 습격에 무너지기 쉬운 곳.”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몇 개의 마을이 반나절 거리를 둔 채 오순도순 모여 있고, 그곳에서 하루 거리에는 해당 지역의 영주 성이 있는 사르긴 남작령이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고른 남작령은 국경 인근 지역이 울창한 숲 지대라 마수 서너 마리를 포획한 소수의 인원이 은밀하게 움직인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국경 주변의 경계 지역을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갈 경우에는 살아남기 힘들겠지만.

아비체룬의 언어는 에렘의 것과 달리 지나치게 거칠다. 타국인이 단기간에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니 세작을 보내도 발각되어 버린다. 그래서 에스메랄다는 아비체룬에 보낼 세작들은 모두 벙어리로 만들 예정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 수십 마리의 마수가 필요하지도 않다. 발각되지 않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해당 지역의 국경병이 움직이게만 만들렴. 그래야 국경병의 자리가 빈 틈을 타 준비해 둔 세작들을 넘겨 보낼 수 있을 테니.”

그녀의 손가락이 짚은 곳을 보며 시리스가 말했다.

“그 지역의 백성들이 많이 죽겠군요.”

“해서?”

“……아뇨, 그저 그렇다는 겁니다. 저희 쪽 피해를 줄이고 안전하게 수행하려면 꽤 많이 데려가야 합니다. 대부분 마수와의 실전을 겪은 적이 없는 이들이라…….”

“둘 정도는 아비체룬 너머로 보낼 세작을 보호해야 하니, 남은 이들은 모두 데려가도 상관없다.”

“아가씨의 호위는 어찌합니까? 서부 경계선과 백작령은 겨우 이틀 거리입니다.”

서부 경계선으로 마수가 접근하면 그 근방에 위치한 테노리엘 백장령도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 피해 없이 승리를 쟁취하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몽상이다. 자국 내의 영토에 마수가 들어와 날뛰고, 제국이 마수에게 잠식된 서부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아비체룬이 보아야 한다.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아. 넌 네가 해야 할 일에만 신경 쓰렴.”

“……원하시는 마수 종이 있으십니까?”

“지원 병력이 투입되기 전에 근방의 마을들을 모두 쑥대밭으로 만들려면 기동성이 빠른 소형 마수가 좋겠지. 아비체룬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소형이면서 발이 빠른 네발 마수 중 포획하기 쉬운 것들로 하렴.”

“알겠습니다. 내일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아비체룬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흔적을 꼼꼼히 지우고. 발각되면 다른 용병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너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그가 죽어도 복수는 멈추지 않을 테니 진정으로 복수를 원한다면 목숨까지 바치라는 의미였다. 냉혹한 에스메랄다의 처사에도 시리스는 반발 대신 수긍을 택했다.

“예, 아가씨.”

시리스가 준비를 위해 집무실을 나섰고, 에스메랄다는 남부로 서신을 작성했다.

「서부와 남부의 경계선까지 마수의 진입이 필요, 인간을 미끼로 사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성공할 것.」

에스메랄다는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남부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사내를 떠올렸다. 세력을 넓히던 당시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그는 유능했다. 시리스처럼 죄책감이나 회의감을 느끼지도 않으니 지금 시키는 일을 누구보다 잘해 내리라.

그가 경계선 인근의 뒷골목 세력들을 동원해 분탕질을 치고, 군의 경계를 흐트러트리면 서부로 마수가 넘어오는 것은 금방이다. 그럼 시리스가 아비체룬에 마수를 풀어놓겠지. 에스메랄다는 이번 기회를 틈타 타국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 버린 아비체룬 내에 사람을 심을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세작들은 3년 전부터 아비체룬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교육시켜 두었다. 아비체룬 내로 들어간 마수로 인해 주변 국경병이 움직이는 그때, 아비체룬의 촘촘한 국경이 풀어질 수밖에 없는 그때. 마을이 궤멸하고 생존자가 불분명한 상황이 도래하면 세작들이 섞여 들기 쉬울 것이다. 그럼 아비체룬의 내부에 희미한 가능성을 심을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시리스가 움직이는 동안 황도에서 진행 중인 뒷골목 정리에 계속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루그레디안과의 연락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언급한 뒷골목을 확실하게 먹어야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밑바닥을 장악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만큼 백성의 삶에 깊숙하게 관여한 세력은 없다.

그들은 백성들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폭력이었으며, 백성들에게 퍼지는 온갖 소문의 근원이다. 술집, 여관의 식당, 식료품과 옷, 모든 곳을 돌며 돈을 뜯어내는 건달들이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행동. 그것은 결국 백성들에게 황실에 의해 가려진 소식을 전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제국의 그림자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는 건 훗날을 위해서라도 선행되어야 한다. 백성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제공할 수단이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정보가 모이는 기반이 될 테니까.

이번 일은 뷔비르를 배제한 채 그녀가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현재 그는 에스메랄다의 지시로 지하 어딘가에 감금된 채 교육을 받고 있는 상태니까.

북부는 그녀가 동부에 다녀오는 사이 정리가 거의 끝났고, 지금은 그녀를 대신해 일을 맡아 줄 이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중이다. 동부의 아브람 백작에게 뒷골목을 쥐여 주기 위해 정리 중인 것처럼, 북부도 같은 체계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당장 직접적으로 손을 써야 하는 것은 중부, 그것도 가장 중요한 황도였다.

“재료는 다듬어진 것 같으니 이제 먹기 좋게 요리를 해 볼까.”

현재 황도의 뒷골목은 크게 5개 세력으로 구분되어 있다. 본래는 2개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에스메랄다가 시리스를 시켜 그 두 세력의 머리를 살해함으로써 세분화된 것이다. 본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이들이 머리가 사라짐으로써 둘 혹은 셋으로 나뉘며 파벌을 형성했다.

에스메랄다는 그중 3명이 대립하며 세력을 분할시킨 쪽을 먼저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짧고 단편적인 글귀가 그녀의 펜촉을 따라 텅 빈 종이 위에 흔적을 남겼다.

「아멤프스의 눈.」

해독제가 개발되지 않은 독의 이름이었다. 아멤프스라는 이름을 가진 중형 마수의 눈을 가공해 만든 맹독. 마비 독으로 양에 따라 심장까지 마비시킬 수 있다. 그리고 심장이 마비되면 인간은 수 분 내에 사망한다.

에스메랄다는 그 독을 한 세력 내에서 대치 중인 3명 중 2명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남은 한 명이 주도한 것으로 꾸며서. 그로 인해 3명 아래에 있는 3개의 세력이 내전을 시작하면 외부에 있는 다른 세력의 2명이 반응할 터.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나는 순간, 에스메랄다가 심어 두거나 돈으로 매수해 둔 놈들이 그들의 뒤통수를 치게 될 것이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퍼진 독이 그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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