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5화 (5/45)

제5장

운명의 그림자

황도에 있는 마탑에서 구속 마도구를 구매한 후 광장을 지나던 길이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린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에스메랄다!’

지긋지긋한 환청에 붙들린 에스메랄다는 결국 마차를 멈춘 채 잠시 광장에 내려섰다. 줄곧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사람으로 가득 찬 광장을 바라보았다.

저 분수대를 가리고 세워진 처형대의 위에서 불타오르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만약, 정말로 아르페시스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때의 답을 들을 수 있는 것 하나는 좋은 점이겠네.”

오지 않았다는 확답을 듣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환청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듣는다 하여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미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부질없다고,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발목이 붙들린다.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분명 그녀의 것이 맞는데도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감정이 원망스럽다.

쓴웃음을 머금은 에스메랄다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협력자에서 동지로, 동지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전우로. 10여 년의 세월은 그 속에서 이성을 향한 사랑까지 키워 냈다. 가족을 잃었을 때의 절망과 그로 인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분명 그를 사랑했고 그 마음을 고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시스에게서는 그녀가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불시에 팔짱을 껴 보았을 때 돌아온 답은 수줍음이나 당황이 아니라 ‘걷기 힘든가?’ 같은 것이었다. 거리를 좁히고자 귓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을 때는 ‘굳이 이리 비밀스럽게 말해야 하는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

그도 사내이니 여인의 육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해서 비겁한 유혹마저 해 보았다. 팔짱을 낀 채 그의 팔에 부러 가슴이 닿게 해 본 적도 있고, 치맛자락에 가려진 종아리를 슬쩍 드러내 본 적도 있고, 또 나란히 앉아서 그의 허벅지를 느른하게 슬쩍 쓸어 본 적도 있다.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해 보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한때는 그의 아랫도리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며 혼자 식식거렸을 정도니 어련할까.

그렇게 아르페시스에게 이성이 될 수 없음을 실감해 가던 중 황실에서 출정 명령이 내려졌고 아레스와 테노리엘 백작이 죽었다.

가족들이 모두 떠나 버렸던 그때,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그동안 아르페시스에게 행했던 수많은 유혹이 실패한 건 잘된 일이라고. 만약 그에게 마음을 고하고 그가 받아 주었다면. 단순한 전우가 아니라 연인이 되어 행복한 추억을 공유했다면. 훗날 그가 전사했을 때 지독히도 고통스러울 테니까.

가족들이 모두 죽어 버린 후 그녀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겪어야 하는 절망을 더 이상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아르페시스를 향한 감정을 정리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부터 그와의 관계에서 사랑이 배제되었다. 있었다 해도 쌍방의 감정이 아닌 그녀만의 외사랑이었고 불필요하다는 판정을 받기까지 했다. 결국 아르페시스는 모두를 믿지 못하던 때에도 유일하게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던 전우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롭게 시작된 시간에 희망이라도 가지는 건가?

“그걸 바랐다면 포기했어야지.”

아르페시스의 연인이, 배필이 되고 싶었다면 복수를 포기했어야 옳다. 다시 한번 곁에 서서 그가 가는 방향으로 함께 걸어야 그나마 가능성이 보인다.

그걸 알고 있는 지금 에스메랄다의 행동은 이것도, 저것도 포기하기 싫다고 말하는 욕심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선택하면 또 다른 무언가는 잃어야 한다. 그게 기회가 되었건, 재물이 되었건, 혹은 타인과의 관계가 되었건. 절대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절대적인 이치였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광장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넌 어디에서 죽었을까?”

그녀가 불타올랐던 황도의 광장인가, 아니면 마수들이 있던 남부의 전선인가. 에스메랄다는 스스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 위에 줄을 직직 그었다. 이렇게 줄을 그어 놓아도 어느 순간 다시 선명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미 결론을 내려 놓고도 이 모양이라니.

에스메랄다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더 노력하자. 속에 남은 이 미련을 잘라 내고자 이를 악물자. 그러면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잘려 나가리라. 어떤 것들이 그것을 도와줄까? 그에게 비난받았을 때는 어떨까? 그래, 그때를 떠올리며 비참해져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럼 더 쉽게 정리가 될 테니까.

결론을 내린 에스메랄다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가 반정을 결심한 이유는 황제가 아니라, 후에 황제가 될 황태자 때문이었다.

황제 역시 권력에 집착하는 등, 올바른 군주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적어도 남부의 중요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고작 1천의 기사지만 중앙군을 5년마다 파견해 주둔시켰고, 군수 물자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아니었다. 마지막 1년, 그녀는 백작 저가 아니라 테몬 후작 저에서 살았다. 황도에 있던 백작 저를 팔아 남부군의 물자를 마련했으니까.

대륙력 1443년, 에스메랄다가 죽기 전년도부터 황태자에게 국정이 양도되었다. 정확히는 황제가 노환으로 인해 죽어 가기 시작하자 황태자가 권력을 빼앗아 오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부친을 돌보는 대신 하루빨리 권력을 빼앗아 오는 데 안달이 났던 아들에게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을 기대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는 황제가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당당히 즉위를 준비했다. 당시 옥쇄를 손에 넣지 못했던 황태자는 재정을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기에 편법을 택해 즉위식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무려 남부군의 군수 물자를 구비하고 재정적 지원을 위해 편성된 군수 예산을 건든 것이다. 정말 충격적인 건 그 시도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평소 사치가 심했던 그는 황족에게 할당되는 사비를 탕진하는 일이 잦았고, 그때마다 군수 예산에 욕심을 내곤 했다. 황태자의 기준으로도 그 돈은 ‘거액’이라고 말할 만큼 천문학적인 예산이었으니까.

다행인 것은 그 이전의 시도는 황제에 의해 무산되었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딱 그 무렵 황제가 정신을 잃어 막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남부군에서 활약하는 아르페시스를 위험 요소로 보던 중앙군 인사들이 황태자를 도왔다. 그 돈이 빠져나가자 화살에는 촉이 없어졌고 검을 갈아 줄 숯 돌 대신 길바닥에 널려 있는 돌멩이가 채워졌다. 비상약과 상비약, 병사들의 영양을 고려한 식단은 엉망이 되어 버렸으며 붕대는 소각장에서 가져온 것만 같은 쓰레기가 재활용되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선에 있는 아르페시스를 만나러 가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사태는 커졌지만 물자를 전달하기로 예정된 날짜까지 시간이 거의 없었다. 황태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따지고, 그가 빼돌린 돈을 되찾아 준비를 할 시간. 황제가 언제 다시 정신을 차릴지도 알 수 없었기에 당장 움직여야만 했다.

상단의 자본을 빼 오는 일은 악수 중의 최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주 성이나 영지를 매매할 수도 없으니 황도에 있는 저택을 팔기로 했다. 그 외에도 에스메랄다를 따르는 몇몇 귀족과, 남부의 중요성을 아는 소수의 귀족들이 사비를 털었다. 휘하 세력의 반발이 엄청났지만 급한 불부터 꺼야만 했던 시기다. 물자 전달이 늦어지면 남부군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어찌어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전선으로 향했고, 아르페시스에게 반정에 관한 의견을 털어놓았다. 마지막 대화가 결국 언쟁이 되었던 순간이 선명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고르는 것이다. 수단을 위해 목적이 퇴색된다면 그게 어찌 옳은 일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죄를 덮기 위한 변명이다.’

‘이대로 그놈이 즉위하면 더 힘들어질 거야.’

‘그렇다 하여 눈앞의 백성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 간단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내가 이 결정을 쉽게 내린 것 같아? 지금 썩은 살을 도려내지 않으면 전부 썩어 버릴 거라고!’

그녀 역시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 썩은 살을 도려내기 위해 희생되어야 할 무고한 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잘못은 그놈들이 했는데 목숨은 어째서 남부의 백성들이 내어야 하나!’

그 문제 때문에 매일 고뇌하면서도 어렵게 털어놓은 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죽어 버릴 테니까. 그 죽음의 대상 안에 아르페시스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부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아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일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럼 계속 이렇게 버티기만 할 거야? 황태자라는 놈이 내지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기는 해?!’

‘그 미친놈이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지. 아니면 기발한 미친 짓을 하나 더 시작했든가.’

차마, 황태자가 제국을 위해 희생한 전사자들의 가족을 잡아다가 그들의 피로 목욕물을 만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충격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찰나의 실수로 변해 그의 운명에 죽음을 데려올까 봐. 어디선가 그를 노리고 있을 죽음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 입을 닫았다.

‘그 미친놈들을 치우겠다고 무고한 이들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내전을 위해 전선을 비우는 순간, 남부의 민간인들은 마수들의 간식거리로 전락할 거다.’

최근 1년 사이 그녀가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맨 횟수가 양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이 위협에서 몇 년이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뒤를 굳건하게 받치며 원조를 하는 것이지,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힘들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는 거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 가면서.’

차마… 황태자의 수작질이 계속되면 이번 원조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약속했다. 아르페시스가 남부의 영웅들과 함께 살아남아 준다면, 그것에 필요한 건 그녀가 어떻게든 준비해 주겠다고. 제 입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노라 고할 수가 없었다. 아르페시스는 그녀와의 약속대로 누구보다 훌륭하게 남부군과 함께 살아남고 있었으니까.

‘그대가 하려는 일은 결국 그놈들과 똑같은 행동이다. 거기서 멈춰.’

적나라한 비난을 받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더 얘기를 해 보고 싶었지만 황도에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급히 리퀘나를 떠났다. 말로써 전하기엔 위험한 내용이라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와 후에 연락을 달라는 것들을 상세히 적어 마도구로 봉한 후 남기고 왔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1년간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서신으로도, 전보로도.

몇 번이고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 보고자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먼저 연락을 했을 때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가정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당시에는 열심히 부정했다. 그의 침묵이 단절은 아닐 것이라고, 힘든 선택이니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기에 홀로 일을 진행했다. 신전과 황실의 금고를 터는 범죄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지막 1년 동안은 그 불법적인 돈으로 남부군의 지원 물자를 마련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자 했다. 비록 그 끝이 실패였다고는 하나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아마, 내륙에서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된 후 선고한 동맹의 끝이었으리라.

황태자는 그녀가 반정 준비를 한다고 확신하자마자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덕분에 에스메랄다는 1여 년 동안 누워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다. 매일 찾아오는 암살자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수면 장소, 시간, 빈도를 무작위로 조절했었으니까.

마차에서 살짝, 집무실에서 살짝, 식사를 하면서 살짝. 그녀는 언제나 수면 부족에 시달렸고 언제나 곁에 호위 기사를 세 명 이상 대동했다. 욕실까지 그들을 데리고 다녀야 할 정도로 그녀는 수많은 위협에 시달렸다.

“뭐가 그리 절박했는지…….”

결국 아르페시스는 반정을 위해 전선을 버리지 않았다.

“조금 더 일찍 포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 경험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 에스메랄다는 길게 심호흡하며 자신이 느꼈던 끔찍한 감각들을 되살려 냈다. 아르페시스의 비난으로 인해 받았던 상처, 그의 외면으로 인해 겪어야만 했던 또 다른 고독, 마지막 순간에 백성들이 던진 돌과 함께 찾아왔던 배신감과 회한까지.

이 기억을 계속 곱씹다 보면 언젠간 분명히, 미련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감정을 자를 수 있을 것이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별다른 효과가 없지만 이 노력이 5년, 10년을 넘어 지속되면 반드시 환청을 떨쳐 낼 수 있으리라. 페드로가 죽은 후 4년, 5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지 않았던 것처럼,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생각을 끝낸 에스메랄다는 광장을 등졌다.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페드로의 손을 잡은 채 발판을 밟아 마차에 올랐다. 탁, 하는 단조로운 음과 함께 마차의 문이 닫혔을 때 에스메랄다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란을 잡아내지 못했고,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이동했기에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광장을 빠져나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커튼을 걷으니 페드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마차에 오른 직후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고, 고작 몇 분 만에 폭우가 되었다.

“천사야.”

그는 그녀의 허락도 없이 밖에서 창문을 열었다.

“저택에 하루 들렀다 가지 않으련? 기사단 문제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은데.”

“……오라버니의 일정은 직접 결정하세요. 전 곧장 영지로 돌아갈 테니.”

“그래? 그럼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따라가마. 비가 오니 조심히 이동하고.”

방긋 웃는 얼굴이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의 기억을 추억으로 불러온다.

“하루, 이틀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때 다시 보자.”

에스메랄다는 답하지 않았고, 페드로는 북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황성이 있는 쪽이다. 그가 향하는 방향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저절로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서까지.

정말 따라오려는 걸까? 황실 기사단을 그만두고? 이번에는 출정하지 않나?

에스메랄다는 속에서 자라나는 기대감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밖을 내다보던 것을 관두고 창문을 거칠게 닫기까지 했다.

어차피 그는 오지 못하리라.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 뿐 현실에서는 본인의 의무에 충실할 것이다. 헛된 희망에 매달린 것은 15년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이 세상엔 희망도 행복도 없으니까.

에스메랄다는 속도를 높일 것을 지시하며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마차가 도망치듯 황도를 벗어났다.

* * *

아르페시스의 일과는 꽉꽉 채워져 있지만 그는 완벽할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이기에 휴식이 필요했다. 대외적으로 달에 한 번 그는 자신의 궁에서 하루를 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실을 아는 건 아르페시스 본인과 카덴, 근위 기사들과 황제 정도일까?

황제는 자신의 장기 말이 달에 한 번 행하는 일탈을 넘겨 주었다. 일종의 타협이다. 별것도 아닌 걸 못 하게 했다가 아르페시스가 반항이라도 하면? 그것이 반황실파와 손을 잡고 황위 반정을 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면? 전선에서 써먹지도 못한 채 치워야 하지 않겠나.

이러한 황제의 계산된 자비 덕분에 아르페시스는 아주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황도의 시가지로 나섰다. 터덜터덜, 힘 빠진 발걸음과 함께 혼란이 자국을 남기며 떨어졌다. 아르페시스는 최근 무언가에 집중을 하기 힘들었다.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그는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이나 입을 법한 가죽옷에, 깊게 눌러쓴 모자까지. 군데군데 해지기까지 한 옷은 그를 평범한 용병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자신이 받는 정신적 압박을 이런 식으로 해소했다. 달에 한 번, 지긋지긋한 황성을 빠져나와 평범함 속에 스며드는 것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광경 속에 포함된 채로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언젠가는, 어느 날에는 그도 저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날이 올 것이라고.

전선에서 살아남기만 하면 저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고. 장을 본 후 그것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심장을 떨리게 하는 여인과 손을 잡고 걸으며 웃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 모든 가정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상상해 본다. 살아남기만 하면 언젠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평범한 척을 해 보며 휴식을 취한다.

오늘도 그러기 위해 황성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다지 쉬는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망할.”

대로 한가운데 멈춰 선 그가 돌연 욕설을 내뱉었다. 휴일임에도 아르페시스는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의 고민은 언제나 ‘생존’에 국한되어 있었다. 어찌하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쌓으면 발을 들인 이들이 모두 죽어 나간다는 전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같은 것들. 그런데 최근, 그의 고민거리는 완전히 다른 종류로 변했다. 이상한 꿈, 그 꿈의 주인공 같은 소녀,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찬 글귀들.

꿈에서 오는 감정과 그 꿈이 의미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과 고뇌를 반복하는 사이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로에 툭, 하고 떨어진 빗방울을 발견한 아르페시스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채 하늘에 닿기도 전에 눈에 띈 색채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광장 한쪽에 멈추어 서 있는 검은색의 평범한 마차와 그 안으로 사라져 가는 작은 인영.

다급히 숨을 들이마신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내달렸다. 그의 심장은 이미 주인의 의사를 배제한 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을 하는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르페시스는 광장 가득 들어찬 사람들을 헤집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 속으로 금발을 가진 인물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겨우 마차의 문이 닫힌 것뿐인데 철컹거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다급해졌다. 저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 아니 강박이 그를 지배했다.

황성 복도에서 에스메랄다를 만나 제멋대로 손을 뻗었던 그때와 똑같았다. 뻐끔거리며 벌어진 그의 입술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간절히 바라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창백하게 질린 채 미친 사람처럼 달린 그는 이윽고 마차의 마부석에 달린 종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서너 걸음 떨어진 마차의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아르페시스는 복부에 강한 충격을 느낌과 동시에 손을 뻗어 올렸다. 자신을 공격한 이의 턱을 치려는 동작이었다. 턱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인간의 급소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손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공격한 이가 몸을 뒤로 젖히는 것을 보았다. 튕겨 나간 몸이 바닥을 구르는 사이 그의 외관을 가려 주던 모자가 허망하게 벗겨졌다. 재빨리 일어난 아르페시스의 눈동자에 순간 살기가 스쳤다.

방해받았다. 무엇을 방해받은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 생각 자체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방해한 것을 치우고자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작 그 검을 뽑아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세를 일으켜 검 손잡이를 쥐자마자 조금 전 그의 반격을 피했던 남자가 누구인지 보았으니까.

몸을 뒤로 젖혔던 것 때문일까?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벗겨져 있었다. 금발과 건장한 체격, 그리고 아르페시스의 것처럼 살기를 띠고 있는 청록색 눈동자. 쿵, 쿵, 쿵, 심장의 박동 소리가 머리를 통째로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레스를 만났던 때와 같았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수축하고, 심장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내뱉으며 제멋대로 날뛰는 감각.

언뜻 길게 느껴졌지만 사실 고작 몇 초가 흘렀을 뿐이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폭력에 사람들의 시선과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시야를 채운 사내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마차 앞을 막아선 금발의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사내가 먼저 움직였다.

“출발해라.”

눈치를 보던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고, 금발의 사내는 후드를 고쳐 쓰며 말에 올랐다. 곧장 마차를 따라가지 않은 사내의 청록색 눈동자와,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꺼져.”

금발 사내가 말을 몰아 사라진 후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르페시스는 검 손잡이를 붙든 그 자세 그대로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물은 오래지 않아 비가 되었고, 몸에 걸치고 있는 가죽이 젖어 감에 따라 그를 짓누르는 무게가 더해졌다.

그가 비에 홀딱 젖는 동안 광장을 지나던 이들은 걸음을 재촉했다. 빗소리가 사방을 때리며 끊이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 냈고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 갔다. 카의 달이 한창인 지금, 겨울의 찬 바람과 그 속에서 식어 버린 빗물이 그의 체온을 빼앗아 갔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해마저 사라져 어두워진 공간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어깨에 닿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손길의 주인을 확인한 그는 생각했다.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내린단 말인가? 평소 그가 품었던 불경한 생각에 대한 벌인가?

말의 고삐를 붙든 채 그의 어깨를 짚은 건 아레스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무얼… 하고 있었지? 아르페시스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금발의 작은 인영, 검은색 마차, 청록색 눈동자의 사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르페시스가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떠난 마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르페시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왜 그 마차를 보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달려들었지?

“하……?”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테노리엘 일가만 봤다 하면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 때문에 미치겠다. 조금 전에는 정말 살기까지 일었다.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버버거리고 있는 그에게 아레스가 물어 왔다.

“계속 전하의 시간을 빼앗아 송구합니다만, 혹시 말을 타고 가는 청년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어째서인지 문제의 그 연회 날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아레스는 자신을 볼 때마다 누굴 찾고 있나? 말을 걸지 않고 그냥 가 버리면 좋으련만.

“금발에 체격이 꽤 큽니다. 그리고 저와 아주 조금 닮았습니다만.”

“못 봤…….”

뒤숭숭한 기분 때문에 아레스를 서둘러 쫓아 버리고 싶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보았던 사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겠지.

금발이라면 분명…….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레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의 박동으로부터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금발의… 사내를 보기는 했는데.”

“혹시 그 사내의 외관을 기억하십니까?”

“금발… 190이 넘는 키에 체격이 상당했고… 청록색… 눈동자를 가졌었다. 이렇게 보니 그대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아레스는 선이 굵고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짙은 외관이었고, 조금 전 보았던 금발의 사내는 체격이 상당했음에도 선이 곱고 유려한 쪽에 속했다. 곱상하냐, 라고 물으면 체격이 주는 위압감과 눈매 때문에 아니라 답하겠지만 분명 아레스처럼 선이 굵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닮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 조금 닮았다.

아르페시스의 답을 들은 아레스로부터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쯤 보셨는지요?”

“정오……?”

“이곳을 지나갔습니까?”

“……그래, 마차와 함께 있었다. 검은색 무광의.”

“……그 아이와 함께 있다가 돌아왔던 거구나.”

아레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페시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을 막아섰던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그 사내가 누구기에?”

“아마도 제 동생일 겁니다. 바로 아래의.”

“아, 경과 함께 천재라고 불리는 그?”

“천… 예, 뭐, 테노리엘 페드로, 가문의 차남입니다.”

아르페시스는 갑자기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고 있는 중인데도 말이다.

“혹시 지난번에 찾고 있던 사람이 그대의 누이인가?”

그는 아직도 연회장 복도에서 만났던 소녀의 이름을 몰랐다. 하필 연회 다음 날 오전, 근위 기사 중 한 명인 테베르가 황제에게 불려 가서 그의 근황에 대해 탈탈 털리고 왔기 때문이다.

그가 테노리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 괜히 황제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을 터. 아르페시스는 결국 누구에게도 소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다. 족보 기록소에 가 볼까 싶다가도 열람 기록이 남는지라 기각했다.

“예, 어찌 물으시는지요?”

아르페시스는 꿈틀, 하고 솟아오르는 아레스의 눈썹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황제에게 알려질 위험이 전혀 없는 기회가 온 김에 이름을 알아내고 싶은데……. 테노리엘의 장남이 황제에게 불려 가 아르페시스와 무슨 대화를 했느냐, 같은 질문을 받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날 돌아가던 길에… 마주친 것 같아서. 그대에게는 쌍둥이 동생도 있다지? 오멘과 페르멘인가?”

이미 자잘한 사교 행사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쌍둥이는 그 소녀보다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위에 있는 형제들처럼 무위가 기대된다는 얘기로 군부에서는 꽤나 자주 이름이 오간 덕에 검술 스승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예, 맞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예, 전해 들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누이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면 될 일인데,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아르페시스는 말을 빙빙 돌리며 질문을 질질 끌었다.

“그럼 페르멘과 오멘, 페드로에 그 누이까지, 그대의 동생은 4명인 건가?”

“예, 그렇습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르페시스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나?”

아레스에게선 답이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르페시스가 아레스를 힐끔거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왜 아레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지?

“에스메랄다.”

“아?”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입니다.”

“아…….”

에스메랄다. 귀를 통해 심장에 닿은 이름이 묘한 충족감을 주었다.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이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

고작 이름 하나 불러 보았을 뿐인데 어째서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나른해지는 걸까? 아르페시스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만 물러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자정이 넘었으니 전하께서도 귀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정이라고? 얼이 빠진 아르페시스가 침묵하는 동안 아레스는 훌쩍 말에 올랐다. 그는 더 이상의 지체 없이 광장을 떠났다. 분명 정오쯤 광장에 왔는데 자정이라니. 달에 한 번뿐인 휴일이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하, 정말 미치겠군.”

아르페시스는 멀어지는 아레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벌게진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에스메랄다…….”

며칠 만에야 알아낸 작은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릴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복잡하고 심란한 휴일이 끝난 그 날 아르페시스는 또다시 색채 대신 글자가 가득한 꿈을 꾸었다.

* * *

페드로는 에스메랄다를 먼저 보낸 후 곧장 황성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본 역겨운 색채가 살짝 거슬렸지만 보다 급한 일이 있었기에 금방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폭우에 쫄딱 젖은 채 평민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상태라 황성에 발을 들이기까지 평소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품에 넣어 두었던 신분 패를 제출, 확인을 받은 후에야 황실 기사단이 사용하는 외궁에 들어선 그는 곧장 단장실로 향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빗물에 젖은 옷이 복도에 흔적을 남겼다.

“테노리엘 페드로, 복귀했습니다.”

페드로는 노크도 없이 단장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집무실에는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 창녀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사내가 있었다. 황제에게 꼬리를 흔드느라 종 자체를 바꿔 버린 자였다. 일단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하고.

페드로는 자신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는 그를 흘겨본 후 곧장 손을 뻗었다. 종이와 펜이 그의 손에 쥐어졌을 때 남자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오, 무단이탈 후 송구하게도 파발로 그것을 알려 주던 테노리엘 경이 아닌가. 인사드리렴, 참으로 공사가 다망한 분이란다.”

“오호호홍, 안녕하세요.”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역겨운 이와 말을 섞을 시간은 없었다. 페드로는 눈앞의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연극을 무시했다. 그는 이곳에 방문한 목적을 달성한 후 곧장 떠날 생각이니까.

어느덧 그가 집은 종이에는 ‘사직서’라는 글귀가 생겨난 상태였다. 사직의 이유는… 페드로의 시선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페드로가 자신을 무시하자 열이 오른 남자가 이죽거리며 무언가 더 말을 하고자 했다.

“빠른 서류 처리를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페드로가 그보다 빨랐다.

「혼인을 했음에도 집무실에 당당히 창녀를 들여 노는 타락한 단장의 지시를 따를 수 없음.」이라는 글이 채워진 종이가 남자의 얼굴 앞에 들이밀어졌다.

페드로는 얼이 빠져 있는 그의 앞에 사직서를 던져 준 후 몸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면 자정이 되기 전에는 황도를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마차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으니 밤새 달리면 날이 밝기 전 따라잡을 수 있다.

페드로는 서둘러 백작 저로 돌아왔다.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여정에 필요할 짐을 챙기라 지시하고, 말발굽에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 사용하는 마도구까지 끼우라 명했다.

그다음으로는? 테노리엘 백작을 만나러 갔다. 백작은 대화를 하기 위해 만든 시간이겠지만 페드로에게는 통보를 하기 위한 시간이었을 뿐이다.

“복귀 인사드립니다.”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다니, 제정신이더냐? 제한 연차를 초과했…….”

“이제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사직서를 내고 오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이대로 영지로 갈 생각입니다.”

“……뭐라?”

집무실에 앉아 있던 테노리엘 백작이 삐그덕거리는 고개를 들었다.

“3년 전 아버지께서는 기다려 보자 하셨지요.”

“……리디의 얘기를 하는 게냐?”

“예, 그 아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3년이나 기다렸지만 나아진 것이 전혀 없으니 이제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3년을 기다렸더니 남은 건 자신을 경계하고 불신하며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있는 누이였다. 결국 시간은 약이 되어 주지 못했으니 이제 방식을 바꿀 때였다.

“성급히 움직이지 말거라. 신중을 기해도 모자란 일이니.”

“신중이 지나치면 기회를 놓치기 마련입니다.”

“서두르다 모든 것을 망치느니, 신중한 것이 낫다.”

“신중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단 성급하더라도 한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낫습니다.”

참으로 다른 부자였다. 페드로는 화를 내는 테노리엘 백작을 보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혹여나 리디에게 다가갈 생각 하지 말거라. 넌 그 아이의 경계심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어.”

“제 누이에게 다가가는 것에 대해 아버지의 허락을 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리디는 네 누이이기 이전에 내 딸이다! 자칫하다간 다시 품에 안기도 전에 깨질지 모른다! 네가 일을 망치도록 두지 않을 게다.”

자리에서 일어난 테노리엘 백작이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네 성급함으로 그 아이를 잃을 수는 없다.”

방식의 차이였다. 가족을 아끼는 마음은 같으나 페드로는 위험하더라도 가까이에서 직접, 테노리엘 백작은 멀리서라도 좋으니 안전하게, 라는 것을 추구할 뿐이다. 두 사람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있지만 인정과 이해는 다르다.

테노리엘 백작은 페드로가 성급히 접근해 에스메랄다의 경계심을 더 자극할까 봐, 그리하여 그녀가 자신을 부친이라 부르지도 않을까 봐 걱정했다. 지금은 함께 테노리엘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훗날에는 그런 사소한 연결점마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저는 다른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좇아가지 않을 겁니다.’

가는 길이 다르니 미련 없이 함께하는 것을 포기한 듯 보였던 모습. 그녀는 이미 테노리엘의 이름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한순간 틀어져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사라질까 봐, 테노리엘 백작은 성급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반면 페드로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떠나지 않겠다고, 혼자 남겨 두지 않겠다고 다독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과의 이별을 당연시하며 원망을 품고 있던 에스메랄다였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 만약 지금 그녀에게 가지 못하면…….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하고 떠나온 참이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에스메랄다는 미래의 이별을 더 확고하게 믿을 것이다. 그가 없는 곳에서, 그의 천사가 홀로 고독에 잠기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신중함으로 그 아이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페드로는 말을 마쳤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페드로!”

뒷덜미를 잡아채는 부름에 페드로가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페드로를 노려보고 있던 테노리엘 백작이 사납게 읊조렸다.

“멈춰 서라. 더 이상 네 마음대로 움직이면 파문하겠다.”

페드로는 그 말을 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백작이 한 협박이 이루어질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으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뜻대로 하십시오.”

‘뜻대로 하세요.’

페드로는 동행을 허락하며 웃어 보이던 에스메랄다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망가진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그대로 둘 수 없다. 자신이 보듬을 수 있는 상처라면 기꺼이 품을 내어 줄 것이고, 아니라면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도 결국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함께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언제든 기꺼이, 그 사랑을 버리고 떠날 거면서.’

더 이상은 그녀를 홀로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출발할 테니 너희는 내 짐을 챙겨 영주 성으로 오거라.”

“예, 테노리엘 경.”

페드로는 간단한 짐을 챙겨 저택 밖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의 종자들에게 짐을 챙겨 백작령으로 올 것을 명하며 말에 올랐다. 빗방울이 사방에서 쏟아지며 시야를 흐리고 있었다.

“페드로!”

그가 출발하기 직전 아레스가 탄 마차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재무부 관료 복장을 한 채 자정이 넘어 귀가한 형제의 모습에 페드로는 이를 악물었다.

왜 테노리엘만이 스스로에게 허락된 시간을 모두 희생하며 타인을 지켜야 하나. 그는 그것을 강요하는 부친도, 순순히 따르는 형제들도 싫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행동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스메랄다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부친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딜 다녀왔기에 이렇게 오래도록 자리를 비워? 두 녀석 말로는 연회장에서 에스메랄다를 따라간 것 같다던데……. 그 아이는? 함께 오지 않은 거야?”

비가 내리는 밤 페드로는 말 위에 오른 채 아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그 아이 곁에 있을 거야.”

“……뭐라고?”

제국이 불바다가 되고 모든 인간이 마수의 간식거리가 된다 해도, 당장은 에스메랄다의 곁을 떠날 자신이 없었다. 페드로가 말의 허리를 차며 백작 저를 등졌다.

“페드로!”

다급한 부름이 뒤따랐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오오, 제발,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내가 잘못했다. 영혼이 들어오면 내 바로 보내 주마. 그러니 나의 구원자야, 제발!’

‘따라가야지! 어서 영웅을 따라가거라! 너희는 지금 만나야 하지 않느냐, 그러니 따라가라는데도!’

‘아, 악귀의 그림자가… 어억……! 나, 나의 구원자가……!’

등등. 지난 며칠간 주신이 내뱉은 말의 일부를 복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 아르셀의 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모니터를 만들어 냈다. 이후 평소처럼 서류에 파묻혀 있다가도 눈앞에 놓인 모니터를 붙잡고 절규하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신이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던져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모니터를 붙잡은 그의 노성이 울렸다.

“이 미련한 놈아! 그 마차를 따라가거라, 저기 구원자가 타고 있단 말이다!”

모니터를 짤짤 흔들며 비에 홀딱 젖은 영웅을 타박하던 신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다급한 행동에 주변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상품 천사들이 책상에 코를 묻었다. 제발, 신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내 것이 아니기를. 상품 천사들이 단체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중 한 천사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카엘! 다른 차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없느냐?”

“그들은 각자의 차원에서 어버이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있나이다.”

신에게 지목받은 천사 미카엘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대체 뭐가 순조롭단 말이냐? 돌연사라도 시켜야지! 심판자인 네가 개입하면 영혼을 거둬들일 수 있지 않느냐!”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들 인력난에 허덕이는데, 거기서 안배가 가능한 영혼을 급사시키면 또 다른 아르셀이 만들어질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돌아온다 한들, 휴식기가 필요해 당장은 안배하지 못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아르셀을 이대로 두고 보아야 한다는 의미더냐?”

“그리 말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은 구원자의 변화로 인해 영향을 받은 주변 인간들의 도움을 기다리는…….”

“이익……! 가브리엘!”

다음은 가브리엘이었다. 그는 미카엘과 달리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예, 어버이시여.”

“신탁은?”

“인과율을 비튼 직후이지 않습니까. 다시 간섭하시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게 얼마가 남았느냐, 이 말이다!”

가브리엘이 오른손으로 깃펜을 놀리면서도 왼손으로는 책상을 더듬었다. 보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찾아낸 그가 힐끔 하고 서류를 확인한 후 말했다.

“인과율을 비틀고 되돌린 시간이 15년이고 구원자가 회귀한 날로부터 3년 남짓 되었으니… 2년하고 339일이 남았습니다.”

“어어억……!”

신으로부터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모니터를 놓지 않고 있던 신이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 그럼 영웅의 기억을 인과율로부터 끌어 오는 건?”

“신탁을 예정대로 진행하신다면 2년 정도 더 걸리겠지요. 영웅의 기억을 먼저 끌어 오시면 신탁은 그로부터 4년 정도 후에 내리실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대답에 신이 기어코 풀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바닥을 짚은 신은 가련한 자세로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신이 신을 부르는 모습에 천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뭐, 곧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각자의 업무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수천 개의 차원을 창조한 건 누구도 아닌 주신 본인이니 뿌린 대로 거두는 것뿐이다.

천사들의 방관 속에서 신은 원망했다. 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은 없느냐고. 그리고 인세에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겠다며 인과율을 만들어 둔 과거의 자신을 타박했다.

신과 천사들은 인간들이 사는 차원에 함부로 간섭하지 못한다. 그건 차원을 창조한 후,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신이 그들에게 지나치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해 달라는 건 전부 해 주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하면 달려와 이것 좀 해결해 달라 청원할 정도로 창조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스스로 해결할 줄 모르고 부모의 도움만을 바라는 아이가 어찌 제대로 자랄까. 인간을 창조한 신은 그들이 자신에게 의존해 인형처럼 살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많은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 내 홀로 설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어렵거나 힘든 문제를 직면하면, 그때 신이 슬쩍 도와주며 아이가 주저앉지 않게 지탱해 주는 것이고.

그러한 이유로 신은 독한 마음을 먹고 강제적인 수단, 인과율이라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 규칙을 심어 둔 이상 인세에 개입하려면 인과율을 마비시키거나 비틀 수 있는 대량의 신력이 필요하다. 신과 천사들에게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신력 말이다.

덕분에 인과율이 생긴 후 인세에 가해지는 신의 개입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신탁을 내리거나, 혹은 특별한 영혼을 안배하는 일까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에만 행해지고 있다. 또한 개입 후에는 비틀린 인과율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며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해서 간섭의 주기도 확연히 늘어났다.

아르셀의 경우에는 영웅과 구원자를 보냄으로써 그들을 구심점으로 인간이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설마 아르셀의 아이들이 신탁을 위조해 구원자를 화형시킬 만큼 엇나간 상태일 것이라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음에도 신은 마음대로,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인세를 좌지우지할 수가 없었다. 분명 아이들을 위해 쓴소리를 하는 심정으로 만든 그 인과율이 신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까.

구원자의 타락, 영웅과의 인연에 생긴 비틀림, 목적을 위해 수단을 고려하지 않는 잔혹한 복수심까지. 아르셀이 망해 가고 있다.

“이를 어찌하느냐…….”

비련의 주인공이 된 신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천사들이 차마 일을 하라고 눈치를 주지도 못할 만큼 신은 심각했다.

“어버이시여!”

집무실 문을 열어 재낀 천사가 다급히 나타난 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차원 율본, 침공 시작됐습니다!”

차원 ‘율본’, 차원이 풍부하고 인간 외의 이종족도 함께 살아가기에 소비자가 넘쳐나는 거대한 규모의 시장이다. 마계가 눈에 불을 켠 채 멸망시키려는 차원으로 약 40여 년 전부터 악마들이 만들어 낸 마족들이 세상에 강림하기 위해 문을 뚫고 있던 중이었다.

그에 신은 문이 열리기 전에 훗날의 전쟁을 위한 수많은 영웅, 그들을 현명하게 이끌 현자도 둘, 부상자를 치료해 줄 성인을 셋이나 안배해 주었다. 원래라면 지난 40년간 준비시킨 자신의 아이들이 마족을 상대로 잘해 주길 바라며 기도를 했을 신이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럼 영웅이 천계로 돌아올 수도 있겠구나! 현자는? 성인이라도!”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쳐든 신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족과의 전쟁을 위해 안배해 두었던 영혼들이 죽어 돌아오기를 바랄 만큼 신은 절박했다. 차원 ‘율본’이 멸망이 보일까 말까 한 상황이라면, 차원 ‘아르셀’은 멸망이 코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상황이니까!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지만 그중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다. 지금은 그게 바로 차원 ‘아르셀’이었고.

하지만 그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이라는 장벽이 신의 앞을 가로막았으니까.

“아니, 아니지. 당장 영혼이 들어온다 해도 아르셀의 아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조금 전 미카엘이 신에게 첨언했던 말과 동일한 논리였다.

인간의 영혼은 절대불변의 완전한 것이 아니다. 쉽게 소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모되어 간다. 오래도록 사용한 천은 낡아 버리고 소홀하게 관리한 찻잔의 이는 나가는 법이다. 신이 신력을 사용해 인과율을 마비시키고, 직접적으로 안배하는 특별한 영혼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보다 튼튼하나 결국은 영혼이다. 더욱이, 그들은 평범한 영혼보다 더 극한 상황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영혼은 한 번의 내세를 경험한 후 천계로 돌아오면 천사들의 극진한 보호와 관리하에 휴식을 취한다. 직전 생에서 얼마나 고생했느냐에 따라 각자 다른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는 10, 최대는 6, 70년까지. 전생에서 얻은 상처가 아무는 휴식이 있어야, 다음 생을 혼란 없이 마주할 수 있다.

구원자인 에스메랄다의 영혼도 그렇게 관리를 받던 도중 내세에 다시금 내려갈 준비가 되었다는 판단이 내려진 후 안배되었다. 그러니 차원 ‘율본’에서 사망한 영혼이 들어와도 곧장 아르셀에 파견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부분, 현재 천계에는 특별히 안배할 수 있는 영혼 자체가 더 이상 없다. 에스메랄다가 천계에서 보호 중이던 마지막 영혼이었고 후에 더 이상의 영혼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던 신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마차에 내려앉은 전서구가 가져온 소식을 읽은 에스메랄다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녀의 영혼을 잠식한 검은 타락이 부풀어 올랐다.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하얀 점이 겨우 보일 정도로 커다랗게.

“어억, 타락만은 아니 되느니라!”

신은 모니터를 붙들고 애원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말해 봐도 에스메랄다에게 닿지 않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결국 애원은 버럭버럭 노성이 되었다.

“다른 건 상관없어도 타락만은 아니 된다는데도! 에스메랄다야!”

신의 노성은 다시 애원이 되고, 애원은 다시 노성이 되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본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 지금의 신처럼 오락가락하지 않으려면 적당히 쉬며 일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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