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의뢰
에스메랄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두 개의 마도구는 가문의 지하 창고에서 꺼낸 것이었다. 시전자의 주변에 중력을 더하는 것은 혹시 모를 원거리 저격에 대비한 방어용이다. 그리고 부싯돌의 역할을 대신해 불씨를 만들어 내는 반지는 전서구가 가져오는 것을 바로 처리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하지만 미래의 그녀가 사용했던 두 개의 마도구는 제작 의뢰를 통해 만들었던 것이다. 각기 자동 발현 실드 마법과 소리 증폭 마법이 내장된 마도구.
실드 마도구는 본래 오멘과 페르멘에게 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두 사람은 테노리엘 백작에게 방어가 부족하다는 훈계를 꾸준히 받아 왔기에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준비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마도구를 주문하고 두 사람의 귀환을 기다리던 에스메랄다에게 도착한 것은…….
「라 에타 테노리엘 오멘, 카 61일 전사.」
「라 에타 테노리엘 페르멘, 카 61일 전사.」
두 통의 서신이었다. 결국 형제들을 위해 준비했던 마도구는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의 차지가 되었다. 그녀가 중력 마도구 대신 자동 발현 실드 마도구를 사용하게 된 이유였다.
다음으로는 소리 증폭 마도구.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것은 발동 장소의 소리를 다른 곳으로 증폭시켜 주었으나 에스메랄다가 사용하던 것은 지정한 장소의 소리를 사용자가 들을 수 있도록 증폭시킨다.
활용 용도를 따지자면 기존의 증폭 마도구는 공연 등에서 소리를 다수에게 전달하는 용도인 반면 후자의 것은 주로 도청을 위해 사용되었다. 국정 회의에서 마나 장막을 뚫고 들어가 적진 귀족들이 속닥거리는 소리, 그들의 밀담 장소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 그리고 그녀의 뒤를 밟는 꼬리를 찾아내는 등의 상황에서 유용한 마도구였다.
라그나가 실제 그 마도구의 개발에 성공한 것은 에스메랄다의 나이가 21세가 되었을 무렵,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후의 일이다. 에스메랄다는 당장 완성된 마도구를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완성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서였지.
동부의 아브람 백작령에서 라그나가 은거 중인 곳은 영주 성이 있는 도시와 3시간 거리의 소규모 도시였다. 에스메랄다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석양이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김에 동부의 뒷골목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을 가진 인물을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외출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여관 1층의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페드로를 마주함으로써.
“외출을 하니?”
그렇다면 당연히 따라가겠다는 듯이 해사하게 웃은 페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메랄다가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음은 당연했다. 그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고도 방관한 이유는 그 관찰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주고받는 서신을 보지 못하고, 그녀가 이 영지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페드로를 대동하고 움직인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게 되면 그녀가 누구와 연이 닿아 있는지 정보를 주게 되니까. 만나고자 하는 이가 황실에 증오심을 품은 인물임을 알려 줄 이유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도로 계단을 올라가며 시리스에게 말했다.
“움직이기 여의치 않구나. 접선 장소로 가서 그를 불러오렴. 외관을 감추는 것도 잊지 말고.”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그녀의 세력은 아직 스스로를 보호할 전력이 다 자라지 못했다. 신뢰할 수 없는 타인에게 그 발자취를 들킬 수는 없는 일이다.
“쉬고 있으마.”
“예, 알겠습니다.”
에스메랄다는 숙식을 위해 잡은 방에 돌아왔고 시리스는 도로 밖으로 나섰다.
외출을 위해 뒤집어썼던 후드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에스메랄다의 몸이 무너지는 것처럼 뒤로 넘어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긴 한숨이 흘러 나갔다. 내일도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그녀는 페드로를 대동한 채 라그나를 만나러 나서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떼어 낼 수도 없고…….”
에스메랄다가 데려온 용병들이 모두 달려든다 해도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안다. 테노리엘의 직계들이 가진 무력은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형제들은 모두 3세부터 마나 운용법을 새겼고 10세 무렵에는 마나를 유형화시키는 중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다. 그중 아레스와 페드로는 성년이 되던 해, 마나를 신체와 분리해도 유형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상급 기사의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했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 키워졌기에 자연스럽게 자라난 타인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란 것이 아니라 키워진 것이다. 그들이 해야만 하는 역할을 위해서.
이 상황에서 불행인 것은 라그나는 오늘 만나야 할 사람처럼 부를 수 없다는 것이고, 다행인 것은 그녀와 라그나 사이의 접점은 내일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어떤 대화가 오가든 그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감출 수 있다. 라그나는 그녀의 세력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번거로워…….”
이미 페드로의 동행을 받아들인 이상 불편함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에스메랄다는 내일 페드로에게 보여야만 하는 라그나와의 대화를 정리해 보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초대한 손님이 오기 전까지는 짧은 휴식이다.
* * *
“테노리엘 경이 왜 여기에 있…….”
시리스의 안내를 받아 온몸을 후드로 가린 채 도착한 손님은 아브람 백작령의 영주 벤자민이었다. 여관으로 들어오는 길에 식당에 자리 잡고 있는 페드로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따지듯 말하던 그가 돌연 굳어 버렸다.
“달갑지 않은 동행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요.”
“……그대가 모르는 것 같은데, 나와 그는 안면이 있네.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압니다. 그러니 백작님의 외관을 가리고 모셔 온 게 아니겠습니까?”
아브람 백작은 짧게 혀를 차면서도 후드를 벗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가 나를 미행하면 어쩔 것인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정도 생각도 없이 움직이지는 않으니까요.”
페드로가 그렇게까지 한다면 에스메랄다는 그가 묵과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위기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여관을 나서 마차 앞에 뛰어들든, 뒷골목 건달들을 불러와 그녀를 괴롭히게 하든.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페드로가 그녀의 곁을 비우고 아브람 백작을 따라갈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직 에스메랄다에게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니까.
동부의 변경백, 아브람 백작이 에스메랄다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다른 이들과 같다. 황제를 증오하니까.
5년 전 황제의 탄신회에서 그의 부인이 황제의 손에 죽었다. 그녀는 자신을 겁간하려던 황제에게 반항했고, 황제는 반항하던 그녀의 목을 조르며 옷을 찢어 내기 시작했다. 아브람 백작 부인은 그 과정에서 질식사했다. 연회장 외부, 손님들을 위한 객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는 그 시간에.
‘자네의 부인이 짐을 죽이고자 달려들더구나.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축 늘어진 여인의 시신을 연회장으로 질질 끌고 온 황제가 한 말이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물론, 진실을 언급하는 사람도 없었다. 연회장 내부에 그녀와 동조한 공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황제의 근위 기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는데, 뭘 어쩌겠는가.
몇몇 인사들은 한껏 치장시켜 데려온 자신의 딸이나 부인이 아니라, 아브람 백작 부인이 황제의 눈에 들었던 것을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미친 세상에서 아브람 백작은 아내의 시신을 앞에 두고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의 시선은 아내의 목에 남은 퍼런 손자국에 박혀 있었지만 그의 입은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그 자리에서 가문 전체가 역적으로 몰렸다간 그들의 자식까지 죽을 테니까.
황제가 내뱉은 명분은 백작 부인이 행했던 반역이었지만 그것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브람 백작은 너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분명, 그날의 사건에 대해선 그녀가 모르는 내막이 있을 것이다. 백작이 숙이지 않으면 더 커다랗게 부풀었을 그의 약점 같은 것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내막이 어떠하든, 무슨 이유가 있든 아브람 백작이 황제를 증오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 무렵은 황제가 귀족들을 공포로 통제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제물로 사용하던 시기다. 덕분에 멸문한 가문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었고.
또한 증거가 없다 한들, 황제가 직접 제시한 반역의 주장 앞에서 아브람 백작을 옹호할 정도로 당시 그가 속했던 반황실 세력이 견고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때 아브람 백작이 반발 대신 복종을 택한 것은 가문을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실제로도 황제는 일을 더 이상 확대시키는 대신 숙이고 들어온 백작을 받아 주었다. 바란 것은 백작의 무릎뿐이었다는 듯이 황제는 그 문제를 두 번 들추는 일 없이 끝냈다.
흥이 깨졌다고 말하며 연회장을 떠난 황제의 뒤에서 아내의 시체를 안아 들고 오열했던 남편. 그는 살아남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미 죽은 부인을 들개의 밥으로 버려야 했다. 아브람의 충성이 황제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요식 행위로서.
“그대가 처음 내게 서신을 보내왔을 때, 분명히 언급했을 거네. 나는…….”
“제 부친을 믿지 않으시지요. 저 역시 그러하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에스메랄다는 직접 그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그리 놀라우십니까?”
이유는 뻔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린 에스메랄다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제 나이는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요. 더욱이 제 키는 또래의 평균입니다만?”
“……그대가 고작 10대의 소녀라는 걸 무의식중에 잊어먹고 있었던 게지.”
서부의 뒷골목을 장악한 후 동부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접근을 했으니 그와의 인연은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남부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국경 주둔병은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황제의 손이 많이 닿아 있더군.”
잠시의 적응 시간을 준 에스메랄다는 본론을 언급했다. 아브람 백작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내가 주는 녹봉을 먹고 내가 통치하는 땅 위에 사는 이들인데. 황제의 눈과 귀를 자처하는 개들이 어찌나 많은지…….”
제국의 동부에 있는 아브람 백작령은 실테르 왕국과의 국경 중 절반이 넘는 지역을 담당하고 있다.
“황제가 능력 좋은 미친놈이었으니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이지요.”
“……부정할 수가 없군.”
현 황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영지 내부의 세작을 색출하며 관리하던 테노리엘과 안주인의 사후 5년 가까이 영주 성에서 칩거를 유지했던 아브람은 상황이 다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실테르 왕국 인사들과의 교류가 지지부진이라 하셨으니 온 김에 방향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서신으로 나누기엔 긴 얘기가 될 테니 온 김에 조언을 받는 게 좋겠어. 지금 실테르 왕실은 에렘 제국과 달리 남부에 전력을 쏟고 있네. 왕실을 향한 백성들의 충성도가 은근히 높고.”
에스메랄다에겐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제껏 제국이라는 우물 속에서 황제의 눈치를 보며 살던 귀족들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실테르의 현왕은 눈에 띄는 업적을 세우지는 못했다. 백성들이 그에게 열렬한 환호와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왕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부터 하고 볼 정도의 신뢰는 다져 두었다. 실테르의 왕은 뛰어나진 않았지만 현명한 자였다.
왕실이 탄탄한 기반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현 왕비는 왕성에 살지 않는다. 그녀는 남부 전선 근처에 있는 별장에 머물며 전선 위문을 돌거나, 왕실에서 전달하는 중앙 보급품을 직접 전달한다. 일반 백성들보다 군부 관계자들의 충성도가 더 높은 것이 현 실테르 왕실이다.
“곧 반응이 올 겁니다. 제국이 무너지면 그들 역시 위태로워질 터이니……. 황실의 폐단을 전하며 군사력의 지원이 가능할 수준까지 우호를 다져 두어야 해요. 내전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지요.”
“……정말 남부를 궤멸시킬 생각인가?”
“예, 그리해야지만 실테르와 아비체룬에서 경각심을 가질 겁니다. 제국이 정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 말이죠. 또한 반군의 활동을 보고 자극받은 백성들을 흡수해 규모도 계속 키워야 하고요. 훗날 중앙군과 대적하려면 그들이 안정 궤도에 올라야 합니다.”
그렇게 커진 반군은 훗날 중앙군을 상대할 전력이 될 것이다. 반군이 만들어졌다 하여 곧장 내전을 일으키거나 황실을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책 속의 역사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완성되어 있지만, 그 역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현실은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이미 그들을 반군이라 부르지만, 대다수의 이들에게는 그저 탈영병일 뿐이다. 아직 해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반군은 제대로 된 조직도, 체계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이다. 각기 다른 시기에 탈영을 했기에 서로의 위치도 제대로 모를 것이거니와, 후에 서로를 찾는다 한들 내부 분쟁 때문에 곧장 협력 궤도에 오르지도 못할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식,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얻을 이권 같은 것들을 두고 다투느라 바쁘겠지. 반군이라는 이름과 존재를 명확하게 각인시키려면 그것을 가능케 할 만한 활동이 있어야 한다. 그 전에 황실의 눈을 피해 자리를 잡는 것만 해도 1, 2년은 걸릴 터.
활동은 그다음에야 가능할 것이고, 황실에 반하는 행동에 자극을 받은 백성들이 감화되어 반군에 가담하며 규모가 늘어나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것 역시 또 몇 년은 걸리겠지.
거기에 더해 반군에 가담한 백성들을 다듬을 시간도 필요하다. 농기구 대신 창칼을 쥐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앙군은 백성들과 달리 진즉부터 창칼을 휘두르는 데 익숙해진 ‘군대’이니, 그들을 상대하려면 백성들 역시 군대가 되어야 한다.
그녀가 황제와 황태자의 목을 치려 하는 이상 내전은 높은 확률로 발생한다. 애초에 그 길 말고는 방법이 없다시피 하다. 그러니 그 내전을 위해 필요한 병력을 만들고, 늘리고, 훈련시키는 데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에스메랄다는 그 기간을 최소 5년, 최대 7, 8년까지 잡고 있었다.
아브람 백작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에스메랄다는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제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씀드렸지요.”
“……알고 있네. 계속 그대를 봐 왔…….”
“모르고 계신 것 같아 다시 짚어 드렸어요.”
그러니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페드로가 왜 여기 있냐며 따진 것이지.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손에 쥔 찻잔으로 향했다.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녀가 언급하는 말과 달리 너무나도 평온했다.
“저는 수단을 고르느라 목적을 등한시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그렇게 결심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신전을 몰락시키겠다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한때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백성들의 목숨이라도. 그녀가 행한 모든 선택으로 도래하는 결과가 제국과 인간의 멸망이라 할지라도, 에스메랄다는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오로지 복수를 그릴 뿐이다.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리는 것은 오는 길에 겪었던 불편한 온기 때문이다. 결코 결심이 흔들렸기 때문이 아니다. 수단을 고르느라 실패한 경험은 지워진 시간에서 겪은 것으로 충분하다.
“황실과 신전을 나락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면 수단이 무어 중요할까요. 그것이 설령 이 땅 위의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소파 사이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러니 조금 전과 같은 불필요한 의심은 접어 두세요.”
“……직접 황제의 목을 조를 수만 있게 해 준다면, 나 역시 그 수단에 기꺼이 손을 보탤 것이네.”
“그리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잠시의 침묵, 그것을 끝으로 에스메랄다는 그가 이후 적극적으로 접촉을 시도해야 할 인사의 목록을 작성해 넘겨주었다.
실테르 왕국 내에서도 제국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화산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인사들. 그들은 제국이 무너지는 게 단순한 타국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부 전선을 유지하는 3국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쪽의 실테르, 서쪽의 아비체룬. 에렘 제국이 그 두 나라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전부 급진파가 아닌가. 백성군을 차출해 전선을 밀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본심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보수파에 대항하기 위해 과격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백작께서도 그 이유를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절충을 위해서겠지. 과격하게 몰아쳐야 반이라도 갈 테니.”
그래, 백성들을 전부 전선에 몰아넣자 주장해야 반대하는 이들의 방해를 마주했을 때 목표치보다 낮은 반이라도 전선으로 몰아넣는다. 처음부터 목표치를 낮게 잡으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는 법. 결국 그들은 미치광이 과격파를 자처하며 왕실을, 나아가 왕국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다.
에스메랄다는 그중에서도 제국의 행태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이들을 짚으며 말했다.
“남부의 혼란과 반군의 존재를 파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입니다.”
제국 내에서 황실의 통제력은 막강하다. 현재 에렘 내부는 타국의 세작들이 활동하기에 절대 좋은 환경이 아니다.
황제는 국경을 넘는 전서구는 포획 및 확인한다. 광활한 하늘 위를 모두 감시할 수는 없지만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확인하고 보는 것이다. 제국 내의 귀족들이 2, 3년 후에야 실행으로 옮기는 일을 황제는 벌써부터 국경에서 행하고 있다.
황실에 머무는 외교 대사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사용하는 전서구도 황성 외벽을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포획되고, 검열을 거친다. 그런 전서구 사냥의 과정에서 중요 정보가 실린 전서구가 잡힐 수도 있고, 황제가 의도적으로 틀린 정보를 넣어 돌려보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국경을 접한 타국은 에렘을 상대할 때 전서구 대신 인편으로 중요 정보를 물어 오는 방식에 힘을 쏟고 있다. 그게 현재 에렘과 실테르의 국경을 오가는 세작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이었다. 전서구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니 직접 몸을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반군에 대한 것도 어쩌면 벌써 눈치챘을 겁니다.”
반군이 되기 위한 탈영병이 발생한 건 고작 십여 일 전이지만 오랜 세작 활동을 한 이들은 그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폐쇄 상태인 아비체룬을 자극해 끌어들이고, 동부의 아브람 백작은 상대적으로 교류가 빈번한 실테르와의 연결점을 견고히 하는 것. 각 국경에 위치한 두 백작가가 황실의 눈을 피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테몬 후작가가 황도에서 중심추를 잡고 반황실 세력을 규합한다. 이후 규합될 반군의 터전을 북부에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루그레디안이 후작 위를 승계해 영지를 틀어쥘 필요가 있다. 그래야지만 남부의 영주들을 내전에 끌어들였을 때 4방위에서 중앙을 압박할 수 있으니까. 그게 에스메랄다가 그린 그림이었다. 음지가 아닌 양지의 세력이 갖추어야 하는 이상적인 형태.
“황제의 장기 말은 섣불리 건들지 마십시오. 이상 신호가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그는 눈을 더 크게 뜨고자 할 겁니다. 차라리 지금 상태에서 몸을 사리며 움직이는 게 낫겠지요.”
황제가 동쪽 국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추가적인 관심을 쏟게 두어서는 안 된다.
“당장 국경 너머로 서신을 반출하는 것도 쉽지가 않네.”
서쪽이 실테르와 접해 있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테노리엘은 자신의 땅에 황제의 개와 쥐를 들여 주지 않았으니까. 세작을 찾아내는 데 노력을 많이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영주 성의 사용인들은 물론 사병들까지 모두 테노리엘령에서 태어난 이들만 받는다. 이주를 해 온 이들의 경우에는 3대부터 영주 성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지키는 국경이거늘, 황제의 손아귀에 떨어진 상태라고 봐야 하네. 출국증을 발부하는 관료는 황제 앞에 배를 깔 정도의 인사더군. 이대로라면 그들과 접촉이 불가능할 수도 있네.”
아랫사람을 관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였다.
테노리엘 백작령에서는 누군가 돈을 찔러주며 영주 성 내부의 소식을 알려 달라고 하면 그 제안을 받은 이들은 영주를 찾아온다. 그리고 영지 안전에 이바지했으며 세작을 잡았다는 포상으로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간다. 이미 그런 의식이 심어져 있는 테노리엘이기에 충성도는 높아지고 내부적 결속은 단단해진다. 테노리엘이 황제가 무너트리지 못한 철옹성이라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면 동부의 아브람 백작은 이제껏 황제가 자신의 가신들을 하나, 둘 물어 가는 동안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인이 죽은 후 추가적으로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칩거 상태를 유지했으니까.
“야산을 타 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출국증이 없으면 실테르 내부에서의 활동이 힘드네. 실종된 기사만 벌써 열이 넘고… 실테르 왕국에서 그들을 황제의 세작으로 여기고 척살했을 가능성도 있네.”
에스메랄다는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 아브람 백작에게 속삭였다. 비밀을 말해 주듯이.
“주도적인 반출이 힘들다면, 타의적인 반출에 의지해야지요.”
“타의적인? 어떤 의미인가?”
“실테르 왕국의 세작들, 그들을 찾고 안전을 보장하며 그것이 백작의 안배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게 손쓰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먼저 접촉해 오도록.”
제국 내에서 활동하는 실테르 왕국의 세작들을 확보해 연락책으로 써야 한다. 이쪽의 인물들이 황제의 세력이 아님을 증명하고 신뢰를 쌓으려면 그 방법이 가장 좋다.
“은밀하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입니다.”
아브람 백작의 시선이 에스메랄다의 손으로 향했다.
3년 내에 국경을 왕복으로 넘은 기록이 2회 이상인 이들 중에서 같은 소속. 예를 들어 상단, 용병단, 혹은 서커스단 등의 소속이 같음에도 출입국 일자 기록이 다른 이들. 그들의 얼굴을 파악하고 국경을 주시하면서 다른 이름을 쓰는지 확인해야 한다. 시간과 노력이 모두 필요한 작업이다. 이것이 실테르가 적극적인 지원을 해 가며 보유 중인 세작의 꼬리를 잡게 해 줄 것이다. 이외에도 그들을 찾아낼 방법이 있다.
“황제가 이런 식으로 세작을 찾아낼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징조를 보이는 이들은 이미 황제의 감시하에 있을 터, 백작님의 사람이 아님에도 마나를 사용하는 이들을 찾아 함께 주시하세요. 분명히 황제의 세작들일 겁니다.”
타국에 등록된 작은 규모의 용병단이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지 평범한 이들은 모를 테지만 황제는 안다. 반복적으로 국경을 오가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황제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들의 초상화는 진즉에 그려져 있고, 만약 그들이 미리 기록된 것과 다른 가명을 사용한다면 곧장 밀착 감시가 시작된다. 그렇게 확신이 떨어지면 소리 소문 없이 처리되는 것이다.
아브람 백작은 지금부터 그런 황제의 꼬리를 밟아 역으로 실테르의 세작을 찾아내야 한다.
“만약 먼저 찾아내신다면 황제의 인사들에게 은근슬쩍 흘리세요.”
“보호가 아니라?”
아브람 백작의 질문에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을 찾는 목적은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호의를 베풀어 그들이 찾아오게 만들려는 것이지.
“추격의 특성상 다수가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또한 이곳은 국경이니 그들의 입을 모두 닫게 할 수만 있다면, 실테르 인사들이 구원 병력을 보낸 것이라고 위장하기에도 안성맞춤이지요.”
“……황제 측이 습격을 할 때 내가 구해 주라는 말이군. 그 습격을 유도하는 것도 내가 하고.”
그렇다. 기회가 올 때까지 목 빠지게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나. 어차피 실테르의 세작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들을 위협에 빠트린 정보가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아낼 수 없을 텐데.
“확신 없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추격자의 숫자가 확실할 때만, 황제에게 돌아가 말을 전할 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때만 나서셔야 해요.”
“신중과 기밀, 그걸 최우선으로 하지.”
아브람 백작이 실테르와 접점을 구축하는 동안, 에스메랄다 역시 국경을 걸어 잠근 채 폐쇄적으로 변해 버린 아비체룬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 후에도 긴 대화가 오갔다. 에스메랄다는 복수를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 * *
에스메랄다는 라그나를 감시 중이던 이에게서 그가 외출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길을 나섰다. 페드로는 어제처럼 여관 1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불편한 동행이다.
좁은 골목 어딘가에 위치한 허름한 목재 건물 앞에 멈추어 선 에스메랄다가 가볍게 손을 놀려 문을 두드렸다.
‘네가 바라지 않으면 출정하지 않으마.’
‘돌아가는 대로 기사단을 나오도록 하마.’
거짓이고 기만이라고 여기면서도, 그녀는 그 말에 흔들린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 고작 온기 한 번에 이토록 흔들리다니. 그녀는 페드로의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에스메랄다가 앙증맞은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질타하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에 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목표물이 함께 생활하는 이가 있다는 보고서는 진즉 받았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목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머릿속과 심장을 어지럽히는 잔상들을 떨쳐 내고 말했다.
“라그나를 만나러 왔다.”
잠시 후 허름한 판자 문이 반 뼘 정도 열렸다.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노란색 눈동자가 경계심을 품은 채 일행을 훑었다. 후드를 쓰고 있는 작은 에스메랄다, 검을 차고 있는 페드로와 시리스까지. 이곳에 있는 사람은 셋이었지만, 후에 이곳에 배치할 용병 둘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눈앞의 소년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딱딱한 음성이 에스메랄다의 용건에 답했다.
“그 사, 사람은 나, 나갔는데요.”
“안에서 기다리지.”
“아, 안 돼요. 다, 다음에 와요.”
안 될 소리. 방문객이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라그나는 곧장 짐을 싸 도주할 것이다. 에스메랄다 일행이 실내가 아니라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는 걸 목격해도 마찬가지. 그렇게 될 경우 번거로운 추격을 해 가며 그를 마주해야 한다. 하루빨리 영지로 돌아가 황도에 생겨난 먹이들을 삼켜야 할 시기에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다.
“시리스, 상처는 입히지 않도록 조심하렴.”
“예, 아가씨.”
시리스가 문을 걷어차며 강제로 진입했다. 에스메랄다와 페드로가 그 뒤를 따랐다.
“나, 나가라고!”
소년이 재빨리 몸을 빼며 의자를 집어 들었다. 휙, 휙, 가구가 휘둘러지는 상황에서 시리스가 그 의자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악!”
시리스의 손길에 소년이 바닥에 처박혔고 페드로가 성큼성큼, 그녀를 앞서갔다. 그러고는…….
“여기 앉으렴, 작은 천사야.”
겨울 망토를 풀어 나무 의자 위에 깔아 주며 언제나처럼 방긋 웃었다. 애석하게도 에스메랄다는 그가 권한 자리 대신 다른 의자를 찾아 앉았지만.
“지금 어, 없단 말이야!”
시리스에게 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소년이 울먹이며 언성을 높였다. 소년의 잿빛 머리카락이 바닥에 쌓인 먼지와 엉키기 시작했다.
“온 동네에 침입자가 나타났노라 알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당신들 사, 사냥꾼이야?”
“사냥꾼이면 바로 라그나의 목을 자르러 갔겠지. 소란을 일으키긴 싫으니 그만 버둥거리렴.”
에스메랄다는 경계심과 불안감이 내포된 노란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이름 모를 소년은 시리스에게 목덜미가 잡혀 바닥에 내리꽂혔지만 처음과 달리 실질적인 반항은 하지 않는 상태였다.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메랄다가 말했다.
“놔주렴.”
시리스가 소년의 억압을 풀어 주었다. 라그나의 귀환을 기다리는 동안 빽빽거리며 악을 쓰지만 않는다면 대화를 해 봐도 좋을 터였다. 에스메랄다는 몸을 일으키고 있는 소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가 모르는 라그나의 일행.
라그나는 혈육이 끊김으로써 작위가 회수된 남작가의 친척이었다. 정확히는 마지막 남작 부인의 친척이기에 가문의 작위 계승권은 없지만, 가문의 방계이기는 했다. 라그나는 마지막 남작이 남겨 준 유산에서 마나 운용법대로 가공된 마석을 받았다.
그 후 황실 마법사 판별 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마법사 지망생이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그 스스로도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몰랐을 것이다. 몸이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마나 친화력은 평범한 이들보다 못한 반면, 체내에 모은 마나를 다루는 운용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섬세한 유형의 사람. 라그나는 전투 마법사보다 연구 마법사에 어울리는 재능을 가졌다.
그런 그가 불법 마법사로 여겨지며 황실의 눈에 띈 것은 하나의 마도구가 황제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황실이 주기적으로 행하는 뒷골목 청소에서.
여기서의 청소가 에스메랄다가 했던 그 청소와 다른 의미인 건 분명하다. 주기적으로 뒷골목 세력들에게 수금을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돈, 여자, 혹은 뒷골목을 전전하는 이들 중 황실이 탐낼 만한 물건과 정보 같은 것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그게 라그나의 불운이 시작된 계기였다.
황실에 연을 대고 싶어 안달이 났던 포주 하나가 수금을 나온 기사에게 전해 준 확대 마도구. 암시장에서 확보한 그 물건은 황제의 손에 들어갔고, 그 유용성에 감탄한 황제는 황실 마법사들에게 그걸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했다. 결과는 실패. 마나 수식을 새기는 과정에서 광석이 깨지거나 폭발하기 일쑤였다.
어찌어찌 성공해도 확대된 전경이 깨져서 유용함을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연구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운용력의 차이가 불러온 참사였다. 결국 황제는 마도구를 넘어 그것을 만든 ‘물건’에 관심을 갖는다.
당연히 모든 일의 시작인 그 포주를 불러들여 캐묻고 암시장에 종종 물건을 내놓는 라그나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로는 추적과 도주의 반복이었겠지. 확대 마도구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는 건 1435년 바의 달에 벌어지는 일. 지금은 그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도 이 시기의 라그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이 없다. 그저 간간이 마도구를 만들어 뒷골목이나 암거래 시장에 내놓으며 돈을 벌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전부다.
에스메랄다가 만났던 라그나는 굉장히 방어적이고, 고집불통에, 타인과의 교류를 완전히 거부하는 벽창호였다. 그런데 지금은 일행이 있는 상태로도 모자라 같은 거처에서 생활 중이기까지 하다. 과연 저 소년은 라그나와 무슨 관계일까? 왜 미래에서는 함께 있지 않았을까? 독립? 아니면 단순한 이탈? 배신? 그도 아니라면 살해?
주어진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의 추측은 불확실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에스메랄다는 가능한 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소년을 관찰했다.
소년 역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에스메랄다 일행을 관찰 중이었다. 조금 전처럼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경계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귀환을 기다리며 저 소년에 대해 조금 캐 보기로 했다. 후드를 벗자 선명한 금발이 드러났고 소년의 노란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꽂혔다. 조금은 확장된 동공, 벌어진 입, 경직된 듯 보이는 모습.
“와…….”
갑작스러운 감탄사가 흘러나왔지만 못 들은 척 넘기기로 했다. 굳이 반응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넌 왜 라그나의 거처에 있지?”
에스메랄다가 물었다. 소년의 노란색 눈동자가 홀린 듯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에스메랄다가 말을 이었다. 순전히 눈앞의 저 소년에게서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말이었다.
“라그나에겐 딸뿐이었지. 그마저도 오래전에 죽었고. 그러니 네가 자식이 아닌 것은 확실하구나. 그자의 성격에 도제를 들일 리도 없는데……. 과연 넌 뭘까?”
넋을 놓고 있던 소년이 에스메랄다가 고른 단어에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랑 아, 아는 사이야… 요? 딸 얘긴…….”
반사적으로 말을 꺼냈으나 다시 입을 다무는 소년. 에스메랄다는 입가에 미소를 걸며 말을 이었다.
“그의 거처에서 네가 나와 조금 놀랐단다. 난 그에게서 너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거든.”
여기에서 소년이 라그나와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뉠 것이다. 친분이 있는 자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반박하거나, 침묵하거나. 지금 반응을 보자니 후자였다. 소년은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에스메랄다가 한 말은 그녀가 라그나와 잘 아는 사이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사실이 어떤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년은 그걸 믿는 듯 보였으니까.
방금 전의 반응을 통해 에스메랄다는 꽤 많은 것을 알아냈다.
하나, 저 소년이 그녀가 한 말의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것. 소년이 라그나의 대인 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했다.
둘, 강한 경계심을 띠던 소년이 라그나와 친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자마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 그건 저 소년의 서열이 라그나의 아래에 있다는 의미니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셋, 소년의 노란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피어오른 불안감. 라그나가 친분이 있는 자에게 자신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오는 감정인지, 아니면 손님에게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에스메랄다는 그 정보들을 고려하며 생각을 곱씹었다.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위의 정보에 해당하는 관계는 대체 뭘까? 시종? 제자? 양자일지도?
말을 더듬고 발음이 조금 어눌한 게 관련이 있을까? 어쩌면… 에스메랄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
힐끔거리는 노란색 눈동자 앞에서 생각을 정리한 에스메랄다가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진 속삭임.
“혹시, 길거리에서 주웠다던 게 너니?”
실내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소년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돌아오는 부정은 없었다. 소년과 라그나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주웠다기에 동물인 줄 알았더니… 사람일 줄이야.”
에스메랄다의 중얼거림에 소년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라그나, 그는 에스메랄다와 만나기 전에 길거리 출신의 고아 한 명을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후의 관계가 어찌 변했건 지금은.
에스메랄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라그나, 라그나, 그 벽창호 옹고집 노인네가 아이를 거둬 키워? 왜? 무슨 이유로?
그는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화를 던져 주긴 해도 직접적으로 손을 내밀어 품고 보살피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그나는 배타적인 성향의 인물이다.
에스메랄다가 머리를 한창 굴리던 그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판자 문이 열렸다.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아 든 이가 문을 비집어 열며 말했다.
“나단, 후딱 나와서 이것 좀 들…….”
“만나서 반갑군요, 라그나.”
뭐, 문을 지나 내부를 확인하게 된 후에는 멈춰 섰지만.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바쁜 일이라 기별 없이 방문한 점, 이해 부탁해요.”
“아, 아는 사이 아냐?”
“……내가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내가 들인 게 아니야……. 저 녀석들이 그, 그냥 들어온 건데…….”
“밖에서 기다렸다간 당신이 도망갈 테니 들어와 기다리기로 했죠.”
에스메랄다, 라그나, 그리고 소년, 나단의 대화였다.
“우선 앉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스메랄다는 라그나의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그는 그녀를 주시하면서도 계속 나단이라고 부른 소년의 위치를 확인했다. 현재 나단과 가장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시리스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위협적인 방문이면 도망가고도 남지.”
“그렇다면 그대로 몸을 돌려 도주하면 되겠군요.”
“……애는 내보내. 그럼 앉아 줄 테니까.”
두 사람은 초면이지만 에스메랄다는 이미 라그나를 알고 있었다. 16세에 만나 24세가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니까.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것은 스무 번 내외, 한 사람의 전부를 파악하긴 힘들지라도 기본적인 성정에 대해 파악하기엔 충분한 횟수였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생활하고 지금의 상황에서 안위를 챙긴다? 에스메랄다는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고집불통 옹고집의 벽창호 라그나가 나단이라는 소년을 꽤나 아끼는 모양이다.
“기꺼이.”
에스메랄다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애초에 나단이 이곳에 있든 없든 대화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테니까.
라그나는 방 한쪽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단에게 손을 휘, 휘 저었다. 그는 나단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 후에야 에스메랄다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스메랄다는 나단이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말했다.
“의뢰를 하러 왔어요.”
“그런 거라면 용병을 찾아가지 그랬나? 내가 뭐, 청부업자라도 되는 줄 알아?”
“용병이 마도구 제작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혹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용병을 알고 있다면 소개를 부탁하죠.”
라그나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난 따로 표식 같은 걸 새기지 않는데.”
발뺌은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라그나는 쉽게 수긍했다. 그에 에스메랄다는 꽤나, 그래 꽤나 당황했다. 이 벽창호가 이렇게 순하게 굴 리가 없는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굳이 내가 당신을 찾아낸 방법을 설명해야 하나요?”
“…….”
“나는 대금을 치르고, 당신은 제작을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보아하니 귀한 댁 아가씨 같은데 마탑에나 가 보지 그래? 내 뒷조사는 이미 다 했을 테니, 나 같은 버러지보다 그런 샌님들이 아가씨의 곱상한 취향에…….”
이죽거리며 말하던 라그나가 움찔, 몸을 떨며 말꼬리를 흐렸다. 에스메랄다는 그의 시선이 향했던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웃어 보이는 페드로가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에스메랄다가 어리석지는 않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녀는 페드로의 낯선 모습을 꽤나 많이 봤으니까. 특히나 에스메랄다를 지척에서 호위하는 시리스를 대할 때 그 모습을 확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밝고 따스한 오라비의 모습 아래, 날카롭게 벼려진 검 한 자루가 있다.
그러니 지금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필시 그녀에게 건방지게 구는 라그나를 페드로가 위협함으로써 벌어졌을 터이다.
“제 일을 방해하시는군요.”
“미안하구나. 네게 불온하게 구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만.”
“나가 주세요.”
“……내 주의하마.”
“시리스.”
페드로가 에스메랄다의 곁을 차지한 덕분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시리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패…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작은 천사야, 내 정말 주의하마. 한 번만 용서해 다오.”
에스메랄다는 방긋거리는 페드로를 노려본 후 다시 라그나와 마주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어요. 사과하죠.”
“……크흠!”
더듬더듬,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따라 마신 라그나가 물어 왔다.
“뭐, 뭘 만들고 싶은데… 요?”
그에 에스메랄다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라그나는 그녀에게 포섭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뷔비르같이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포섭. 그래서 지금과 같은 무력적 위협은 단 한 번도 가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생각이 많아졌지만 그녀의 입은 본래 목적했던 단어를 나열하는 데 충실했다.
“실드 마법이 구현되는 마도구.”
“그런 거라면 마탑에서 판매하는 상용…….”
“자동 구현이 가능한 물건을 원해요.”
“……하?”
소유자가 체내의 마나를 사용해 발동을 명령해야지만 구현되는 형태를 수동 구현이라고 한다. 현재 그녀가 사용 중인 두 가지 마도구가 그 종류에 속한다.
반대로 소유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특정 조건을 갖추면 무조건 발동되는 방식을 자동 구현이라고 한다. 원래라면 5, 6년 후에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는 수준. 하지만 그 연구가 한창 흐름을 타기 시작할 무렵, 라그나는 이미 성공작을 만들었다. 만약 실마리를 얻는다면 그보다 더 빠르게 성공할 수도 있을 터.
“이봐, 철없…… 큼.”
라그나의 헛기침에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당장은 그녀의 일에 마음대로 끼어드는 페드로에게 주의를 주는 것보다 저 벽창호 라그나를 수월하게 다루는 게 더 이득이니까.
“자동 구현 연구가 제자리걸음이라는 건 알고 있나? 더욱이 실드 마법에?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기만 해도 실드가 생성될 거라고.”
“물체의 중량과 강도에 제한을 주면 돼요.”
라그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보면 볼수록 낯설다. 말 한마디에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마법의 발동 조건으로 인식되는 물체의 중량과 강도에 제한을 주면 된다고요. 현재 상용화되어 유통 중인…….”
“저울추 마도구나 광석 품질 판별 마도구!”
탄성과도 같은 답으로 그녀의 말을 끊은 라그나. 에스메랄다는 답을 찾아낸 그에게 답해 주었다.
“화살, 비수 등 투척으로 공격이 가능한 무구들의 중량을 포함할 수 있는 상한선을 걸면 될 거예요. 제한선 아래의 중량이 접근하면 반응하도록.”
직접 만들 수는 없지만, 당시 마도구 제작에 성공했던 라그나가 수식 원리에 대해 꿍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지금처럼 누군가 슬쩍 알려 주기만 해도 진척이 있으리라. 본래 그의 것이었으니까.
“……원거리 저격을 대비하는 건가?”
“그런 용도로 쓸 예정이죠. 발동에 반응하는 강도는… 철, 구리, 그 외의 돌도 가능하겠죠. 종류와 강도는 넉넉하게 새기면 좋겠고. 마수의 발톱 같은 것들이 포함되면 더 좋겠죠.”
개발에 필요한 실마리를 얻은 라그나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푸르스름한 마나가 일렁거렸다. 수식을 짜 보는 모양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닌데……. 그렇게 복잡하게 짜 넣으려면 다이아나 흑철 정도는 돼야…….”
에스메랄다는 이미 미래의 누군가가 하나씩 찾아낼 광산들을 대부분 장악해 두었다. 광산을 개발해 채굴 중인 곳도 있고, 그저 그 일대를 산 후 침묵 중인 곳도 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않고 건달들을 사용해 비밀리에 채굴 중인 광산도 있다. 라그나에게 제공할 광석은 그런 비밀스러운 곳에서 꺼내 줄 예정이었다.
“그 정도 생각도 없이 온 건 아니에요. 필요한 물자는 준비해 뒀어요.”
“호오.”
마도구는 광석에 마나 수식을 새김으로써 만들어진다. 마나로 만든 수식 때문에 연구 마법사들에게 마나 운용력이 중요한 것이다. 운용력에 따라 수식을 얼마나 촘촘하게, 세밀하게 새겨 넣는지가 결정되니까.
또한 광석의 강도가 어떠냐에 따라 마나로 새길 수 있는 수식의 한계선이 다르다. 그 조건에서 광석의 크기는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광석이나 주먹만 한 광석이나 별 차이가 없다.
크기로 한계선을 구분하려면 주먹만 한 것과 집채만 한 것 정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양하고 긴 수식이 들어갈 때의 효과가 단조로운 수식의 효과보다 좋음은 당연한 일. 그다음 마석을 끼울 자리에 발동과 단절에 대한 수식을 넣음으로써 마도구의 기본이 갖춰지는 것이다.
그 외에도 착용 무게나 디자인 같은 부분이 포함되지만 에스메랄다로서는 간편 휴대만 가능하다면 크게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라그나의 미적 감각은 꽤 봐 줄 만하기도 하고.
“대금은?”
“다음 것까지 듣고 결정하죠.”
“또?”
눈썹을 씰룩거리는 라그나는 마치 원하는 게 뭐 그리 많냐는 듯한 불퉁한 시선을 취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가 자신의 뒤를 힐끔거린 후 시선을 돌리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지정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증폭하는 용도의 마도구를 원해요.”
“……지정한 장소? 반경이 아니라는 의미겠지?”
“반경 내의 소리가 모두 증폭되면 소유자의 청각에 손상이 너무 커져요.”
“사용해 본 것처럼 말하는군?”
“궁금한가요?”
라그나가 그녀를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에스메랄다는 그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가만히 두었다.
“뭘 하기에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그걸 알아야 하나요?”
“위험한 일에는 끼어들지 말자는 주의라서.”
이어진 말에 에스메랄다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안전한가 보죠?”
그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그는 꽤나 잘 숨어 산 편이다. 황제가 그에 대한 추적을 시작한 후에도 1년이 넘게 피해 다녔으니까. 하지만 말 그대로, 잘 숨어 있었을 뿐이다.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되면 황제의 기사들이 나설 터, 그것에 대응할 만한 힘은 없다.
마도구 중에는 대량 학살이 가능한 군사 물품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들어가는 수식이 아득할 정도로 길다. 사용되는 광석이 집 한 채를 넘어 성벽만 하게 커야만 한다. 리퀘나 성벽이 그렇게 만들어진 마도구의 대표적인 예시였다.
겨울의 끝자락, 밀어낸 전선이 다시금 밀려나 리퀘나에서 수성을 할 때가 되면 불과 전격 등의 원소 마법으로 번쩍거리는 하늘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들고 다니면서 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에스메랄다가 그를 먼저 찾아내지 못했다면 결국 황제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다.
“본인의 재능을 체감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을 텐데요? 암거래 시장에서 당신의 물건이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도, 그런 물건들을 계속 만들다간 언젠가 누군가의 눈에 잡힐 거라는 것도.”
“……지금처럼 말이야.”
에스메랄다는 그 말에 살며시 웃기만 했다. 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지금의 라그나는 낯설었다. 그녀가 아는 그는 방금 전의 대화에서 상대방을 배척했어야 한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같은 말이 에스메랄다가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런데 라그나가 보여 준 건 고작 해 봐야 경계심 정도.
“안전을 생각한다면 암거래 시장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죠.”
“……당장 개발된 수식이 없어서 만들어야 해. 꽤 걸릴 거야. 한두 해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실험으로 날리는 재료도 많을 거고.”
잠시의 침묵과 함께 라그나가 의뢰를 수락했다. 당장 사용하고자 온 것이 아니니 오래 걸린다 해도 상관없다.
“시간과 자금은 감내하죠. 당신은 성공하기만 하면 돼요.”
“대금은?”
“요구하는 만큼.”
“……어린 아가씨가 통이 크군.”
라그나가 보이는 모든 반응이 그녀에게는 낯설었다. 지금의 그는 생각보다 방어적이지 않다. 훗날의 그는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리도 달라졌을까.
“완성되면 어디로 보낼까?”
“곧 알게 될 거예요.”
“뭐… 그렇다면야. 재료는?”
“며칠 내로 보내 줄게요. 물론, 당신에 관한 신뢰가 없으니 감시가 붙을 거예요.”
그건 불쾌하다는 듯 라그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로서는 투자금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재료만 챙겨 도주하면 곤란하니까요. 그들이 훗날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 줄 거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시리스가 문을 열고 나섰다. 대기 중인 용병을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에스메랄다가 말을 이었다.
“개발 의뢰 말고 제작 의뢰도 하고 싶어요.”
“바라는 게 더럽… 많군. 큼!”
또 한 번 페드로의 날 선 시선을 받은 모양이다.
“가능한가요?”
“제작이면 이미 정립된 수식을 넣기만 하면 되니까. 원하는 수량에 따라서 기간이 좀 다르겠지.”
“전서구에게 달아 줄 상시 실드 마도구, 형태는 온전한 구를 이뤘으면 해요. 우선은 100개로 하죠.”
“……통이 정말 큰 아가씨군.”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는 라그나의 행동에 에스메랄다는 부드럽게 웃었다. 표정과 달리 속은 꽤나 복잡했지만.
“이것도 재료 조달을 해 주나?”
“기꺼이.”
“그 정도 수량이면 100일… 150일 정도는 걸릴 거야. 혼자 만드는 거니까.”
에스메랄다는 충분하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녀의 시선이 조금 전 시리스가 밖으로 나섰던 문가로 향했다. 대화가 시작되기 전 나단이 사라졌던 곳이었다.
“아들인가요?”
주어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라그나는 그 질문을 알아들었다.
“아들은 무슨, 그냥 어쩌다 보니 같이 사는 거야.”
이렇게나 순순히 대답을 하다니, 에스메랄다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준비했던 말을 모조리 폐기 처분했다.
“운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거라고 여기지 마세요.”
“하?”
후드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꼼꼼하게 가린 에스메랄다가 라그나로부터 돌아서며 말했다.
“다음에 당신을 찾아내는 사람은 나처럼 거래로 만족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황제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에스메랄다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리스가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두 명의 용병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의 뒤로 나단이 쭈뼛거리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나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용병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앞으로 보호해야 할 인물이다. 혹여 도주하려거든 무력으로 제압해도 좋다.”
“예, 아가씨.”
용병 둘에게 주의를 준 그녀는 다시 한번 라그나를 돌아보았다.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봐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가 아는 라그나가 아니니, 준비해 온 회유책 대신 이 정도의 경각심에서 멈추는 게 좋을 듯했다.
걸음을 옮기던 중, 에스메랄다는 문가에 서 있던 나단과 다시 한번 시선이 마주쳤다. 시작이 조금 과격했지만 그가 라그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관계 개선을 시도해 보긴 해야겠지.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린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린 에스메랄다가 나긋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조금 전 내 사람이 네게 위해를 가한 것은 미안하구나.”
“에……?”
“네가 라그나의 친인인지 몰라 한 실수였으니 다시 한번 사과하마.”
충돌이 있은 후 사과의 유무는 인간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자주 보지 못하는 관계일수록 더 중요하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 되짚어 보는 기억 속에 잘못에 대한 사과가 있다면 충돌로 인한 불쾌감이 상당 부분 완화되니까.
어차피 다시 만나기까지 꽤나 걸릴 것 같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얼떨떨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한 나단에게 에스메랄다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잘 지내렴.”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나단을 뒤로한 채 라그나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꽤나 걸어 시가지의 대로까지 나온 후에는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 보여선 안 되는 게 보이고 있으니까.
“재수가 옴 붙었군. 볼일만 보고 국경을 넘으려 했더니!”
비명과 피가 그녀를 반겼다. 마차에 치여 초라하게 널브러진 아이는 왜소했다. 반면 마차의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 사내는 기름기가 덕지덕지 묻은 지방을 몸에 달고 다니는 이였다. 지니고 있는 탐욕을 신체의 특징으로 증명하고 있는 남자는 창밖으로 얼굴을 빼낸 것만으로도 창을 가득 채웠다. 에스메랄다는 그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지난가을, 그녀가 남부로 향하는 치료제를 약탈할 수 있었던 건 돈과 탐욕 덕분이었다. 마법을 동원한 습격에 대응하기 위해 동행하는 마법사가 결계 마법을 풀어 주고,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녀에게, 그녀가 보낸 사람에게 돈을 받고서.
도합 광산 1개 정도는 살 수 있을 만한 거금이 들었지만, 그렇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난 후 그녀는 그들의 입을 막았다. 일부는 남부에 갔을 때 백성들에게 맞아 죽기도 했고.
지금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저자도 그리되었어야 한다. 초상화로 대상의 얼굴을 모두 숙지하기도 했거니와, 마차 속의 사내는 미래에서 마탑과 거래를 하며 몇 번이나 보았기에 익히 아는 자이기도 했다.
에스메랄다의 녹색 눈동자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버릇이 나빠질 때도 되었지.”
지시를 내린 것은 그녀지만 그것을 계획대로 시행한 건 뷔비르였다. 죽이라 명했고, 모두 처리했다고 보고 받았다. 그런데 한 놈이 살아 있으니 그녀의 머릿속엔 뷔비르가 놓친 후 문책이 두려워 숨겼을 가능성, 혹은 자의로 놔주었을 가능성까지 자리를 잡았다.
만약 놔준 것이라면… 키우는 개의 목줄을 다시 졸라 줘야 할 때가 온 모양이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시리스, 저 마차를 따라가렴.”
“추적만 합니까?”
“깨끗하게 치우라는 의미란다. 여관에 대기 중인 이들을 데려가도 좋다. 마법사니 신중하게 움직이고.”
“……예, 아가씨.”
나란히 걷고 있던 페드로를 힐끔거린 시리스가 곧장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에스메랄다 역시 아무런 말도 없는 페드로를 힐끔거렸다. 페드로가 아는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할 나이가 아님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 보아야……. 에스메랄다는 생각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페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건 중요하지 않다. 그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태산이고 생각할 것이 한가득인데, 머리를 쓸데없는 것으로 채울 필요는 없겠지.
에스메랄다는 머릿속에서 페드로를 털어 내며 향후 일정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길에 마탑에 들러야 할 모양이다. 개의 목에 채울 새로운 목줄을 구매하기 위해서 말이다.
라그나에게 부탁해 제작해도 되지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며칠은 기다려야 할 터였다. 마나 수식을 새기기 위해선 광물에 기본 가공을 해야 하고 그것만 해도 열흘은 걸린다.
그 시간을 이곳에서 기다리느니 어차피 지나야 하는 황도에서 몇 분 만에 살 수 있는 기성품을 구매하는 게 나을 터였다. 마탑을 통해 하는 거래는 기록에 남지만 노예를 구속하는 마도구는 누구나 사는 것이니 문제가 될 여지는 없을 것이다.
마차를 추적하기 위해 움직였던 시리스가 일을 처리한 후 귀환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이었다.
카 19일의 야심한 밤에 황도에서 출발해서 카 27일 아브람 영지에 도착한 이후, 나흘간의 체류를 마친 카 31일 오전, 에스메랄다는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겨울바람이 매서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