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3화 (3/45)

제3장

위선과 기만

만약 신이라는 자리를 직업에 비유해 보면 어떨까? 아마 고달픈 것은 물론, 괴롭다 못해 야근으로 인한 과로를 끼니처럼 먹게 되는 직업일 것이다. 신과 종교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존재를 부르짖는 이들이 넘쳐날 테니 말이다.

지금 이곳의 상황을 보면 그 가정이 진실임을 알 수 있다. 그 하드코어 직종의 종사자, 신이 여기에 있으니까. 문제의 그 신은 자신을 찾는 신도들의 불평과 불만, 청원과 소망이 주를 이룬 서류 더미에 파묻힌 상태였다.

신을 직업으로 표현했으니 이 장소는 회사에 비유해 보자. 기업 천계, 주요 업무는 신도들에게서 올라오는 청원의 수리 및 각 차원의 안녕과 번영, 관리를 위한 모든 것, 정도일까?

매일 추가 업무로 인한 야근이 진행되는 탓에 기업 천계의 불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을 정도다. 그곳의 대표 이사이자 1인 주주인 주신은 현재, 당연하게 일을 하는 중이었다.

방금 하나의 결재안을 통과시킨 신은 숨 한 번 돌리지 않고 곧장 새로운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신의 눈썹이(물론, 신이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갖춤으로써 눈썹과 미간이 있다는 가정하에) 들썩거렸다.

“이게 왜…….”

분명 3년여 전에 처리했던 서류가 더 두꺼워져서 그에게로 돌아왔으니까.

“어버이시여, 결재를 해 주…….”

“잠시, 잠시만 기다려라. 내 이것만 읽고 바로 해 주마.”

싸한 불안감을 느낀 주신은 결재를 받으러 온 라파엘을 앞에 세워 둔 채 빠르게 글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직종의 특성상 업무의 생명은 신속, 정확이다. 뭐, 서류가 너무 밀리고 쌓여 있는 상황이라 그다지 신속한 것 같지는 않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넘어가자.

서류에 기재된 내용은 차원 ‘아르셀’에 관한 것이었다. 토벌하지 못한 마신의 파수꾼이 열심히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는 그곳 말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루시퍼를 유혹해 빼내어 간 경쟁사 마계! 그곳의 대표 이사이자 1인 주주는 당연히 마신이다. 함께 태어난 마신이라면 치를 떠는 우리의 주신. 그는 마신에 대한 적대감을 곱씹으며 다음 장을 읽기 시작했다.

토벌의 시기를 놓친 악마의 씨앗이 성장해 알을 깨고 나왔으니 마수들이 그 마룡의 통제하에 집결, 군대를 이루고 인간들을 도륙했다. 감당할 수 없는 악을 목전에 둔 인간들은 매년 토지와 동족들을 잃으며 몰리고 있는 상황. 그러니 부디 신의 위대한 권능으로 인간들을 구원해 달라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뒷장에는 그동안 천계에서 행했던 모든 프로젝트들이 아주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후우.”

신은 뒷장으로 넘어가기 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 뒤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높아질 혈압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뭐, 마신의 파수꾼을 잡을 수 있는 영웅이나 성인을 보내 주면 해결되는 일이 아니냐고? 설마 신이 그런 기본적인 매뉴얼을 몰라 이러겠는가? 다 하다못해 넘치게 해 주었는데도 이게 또 올라왔으니 이러지.

애초에 일이 커지기 전에 신탁을 내려 마룡이 웅크린 알을 없애라고 했는데 결과는? 토벌을 하는 시늉만 하고 흥청망청, 음주가무를 즐기며 노는 바람에 마룡이 알을 깨고 나왔다.

일이 커진 후에야 청원서를 바득바득 보내기에 토벌을 할 수 있는 재능과 역량을 가진 영웅을 셋이나 안배해 주었는데 결과는? 영웅들의 재능을 위협으로 느낀 지도층이 그들의 가족이나 연인을 납치, 위협, 협박하는 바람에 둘은 어이없이 죽어 버리고, 남은 한 명은 홀로 전장에서 고군분투하다 죽었다.

다음은? 아, 이놈들이 나를 엿 먹이고 싶어 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음에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성인을 둘이나 보내 주었는데 결과는? 웬 놈들이 성녀로 태어난 그녀들을 납치, 감금, 겁간하더니 꼴까닥시켜 버렸다.

궁여지책으로 해당 차원에 허락한 한계치를 조정해 신관들의 평균 신력을 늘리고 대신관을 일곱이나 더 만들어 주었는데 결과는? 제발 토벌 좀 하고, 다치고 병들고 굶주려 가는 아이들을 돌보라고 늘려 준 신력을 권력을 쌓기 위해 찔끔찔끔 사용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다행, 신에게는 불행히도 대신관을 늘려 준 것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약 30여 년 전, 당시 여유가 하나뿐이던 영웅의 영혼을 아르셀에 안배했다. 그 후 영웅의 친부가 전혀 예상도 못 한 짓을 하기에 뒷목을 잡아야만 했지만…….

4년쯤 후에 구원자이자 현자로서의 능력을 다 가진 영혼이 준비를 마쳤기에 뒤따라 보냈었다. 또래로 태어날 테니 둘이 힘을 합쳐 잘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신분이 미천하면 이전 영웅들처럼 죽어 버릴까 봐 그 부분도 신경을 썼다. 영웅의 경우는 좀 급해서 완벽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일이 약간 꼬이기까지 했지만, 구원자는 진짜 신경 써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한 3년 전쯤? 이 서류가 다시 올라왔었다. 주신이 직접 안배한 구원자가 처형당했다고. 신탁이 지정한 마녀로 지목받아 화형당했다나 뭐라나. 문제의 신탁을 내린 적도 없던 주신은 기가 막혔었다. 그의 아이들이 기어코 그의 이름을 사칭해 거짓 신탁까지 만들어 냈으니까!

“어버이시여, 결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기다리라는데도! 내 곧 해 준다 하지 않았느냐.”

신은 라파엘의 결재 요청을 미루며 과거를 회상했다. 당시 혈압이 올라 뒤로 넘어갈 뻔했던 신은 불굴의 의지로 기절을 참아 내고 다급히 조치를 취했었다.

구원자를 기준으로 인과율을 비틀고 시간을 지워 낸 것이다.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그로 인해 안배과에 업무 폭탄이 떨어지기도 했었으니 무얼 더 말할까.

태어났던 영혼들을 다시 거둬들이고, 죽어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던 영혼들까지 다시 인계에 내려보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시간을 되돌렸던 차원 ‘아르셀’의 서류가 다시 올라왔다. 그 내용이 어떨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하리라 믿는다.

꾸역꾸역 그것을 다 읽은 주신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구, 구원자가… 왜……?”

보고서의 마지막 장에는 회귀를 한 구원자가 파업 중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 손으로 혈압이 오르는 뒷목을 움켜쥔 신이 서랍 한구석에 넣어 놨던 사직서를 만지작거렸다. 어디선가 악마들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긴 포기해, 완전히 망했어, 회생 불가능이야, 어서 넘겨, 우리가 네가 만든 인간들에게 빨대 꽂아서 쪽쪽 빨아 먹게 두란 말이야!

한순간 혹할 뻔했던 강렬한 유혹이었지만 신은 버텨 냈다.

“어버이시여, 결재를…….”

장하다. 라파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신이 스스로를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창조한 차원들인데, 마신 놈의 수작에 홀라당 빼앗길 줄 알고?

못난 짓 좀 한다고 자식을 내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나. 신은 불굴의 의지로 사직서를 내려놓으며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아니 숫자를 읽었다.

「보고일, 차원 ‘아르셀’ 1429년 카 100일.」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어버이시여, 제발 결재를…….”

주신의 귀에는 피로에 찌든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제발, 자신이 틀리게 알고 있었던 것이기를 바라면서.

“아, 아르셀이 오늘로 몇 해인지 아는 아이가 있느냐?”

“대륙력 1432년 카 20일입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나온 가브리엘의 답은 주신의 기대를 배반했다.

한편, 가브리엘은 즉답을 한 후 자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건가, 하면서.

주신을 돌아본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창조하여 이 과로의 사지로 밀어 넣은 창조주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 아래 자신을 창조한 신에게 보내는 무한한 애정도 함께였다. 그게 없었다면 벌써 이 지긋지긋한 업무를 때려치우고 루시퍼처럼 마계로 도망갔으리라.

가브리엘이 애증을 곱씹는 동안 주신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3년, 3년 전 보고를 지금 봤다. 분명 보고는 정시에 올라왔을 것이다. 다만 주신이 3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서류를 확인했을 뿐이다. 읽을 서류들이 한가득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쌓이는 서류가 산더미였다.

주신이 바들바들 떨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차원 아르셀의 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모니터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점은 당연히 파업을 선언한 구원자다. 그렇게 초점을 맞추고 나자 주신은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런 주신의 앞에서 퀭한 몰골의 라파엘이 다시 한번 간청했다.

“제발, 결재 좀…….”

안타깝게도, 라파엘의 간청은 이번에도 주신에게 닿지 못했다. 구원자의 영혼을 확인한 주신이 완전히 넋을 놓아 버렸으니까.

천사들은 보지 못하나, 창조자인 신은 볼 수 있는 영혼의 빛. 영웅이나 성인 같은 자질을 가진 영혼은 창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세에서 태어난 영혼들이 고난과 역경을 거치며 천천히 다듬어지는 것으로, 그런 영혼들은 각자만의 빛을 가진다.

영웅의 경우 타오를 듯 뜨거운 빛. 그들은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다.

성인은 포근하고 따스한 빛. 그들은 신을 대신해 인간의 죄와 고통을 보듬는다.

그리고 현자나 구원자의 경우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서늘한 빛이다. 그들은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

분명 신이 아르셀에 구원자를 안배할 때, 그녀의 영혼은 겨울의 눈보라처럼 시리고 날카로운 빛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신의 눈에 보이는 구원자의 영혼은 거기에 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거뭇거뭇, 얼룩덜룩한 타락의 징조가! 순간 눈앞이 아찔해진 신은 앉은 채로 휘청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구원자의 영혼이 타락하기 직전인가? 신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르셀에서 구원자가 회귀한 직후에 일어난 일을 당장 보고해 올려라!”

그에 감사과와 기도과를 담당하는 인도자 가브리엘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야근인가. 가브리엘은 오늘도 다시 한번, 이라는 처참한 심정으로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다.

회귀 직전, 에스메랄다가 신을 찾으며 올린 기도가 기재된 서류가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3년이라는 기록 속에서 그녀가 비틀린 복수심에 순응하는 모습을 찾는 데는 5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속전속결, 신속 정확한 일 처리를 보면 신의 천사들은 분명 유능하다. 유능한 것이 분명한데 대체 왜…….

신은 자신의 앞에 도착한 결과물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신이시여, 부디 저들을 멸망으로 이끄시기를.’

‘우매하고 어리석다 못해, 악마의 속삭임에 응한 타락자들을 벌하기 위해 나를 돌려보내신 것이다.’

‘그리도 간절히 바란다면, 기꺼이 나의 손으로 그들에게 멸망을.’

‘백성들이 원한다 하니 이번에는 진짜 마녀가 되어 주마.’

‘희망 따위 진창에 처박힌 헛된 망상일 뿐이지.’

이 모든 것을 읽고도 차마 탓할 수 없는 것은 구원자를 가혹한 운명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 주신, 본인이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인력난이 심했다고는 해도, 그리 엉망이 된 차원에 덜렁 영웅 하나만 붙여 줬으니 구원자가 파업을 선언할 만했다.

“아… 으… 으윽…….”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사는 주신이 배를 움켜쥐며 비척거렸다. 차원을 구하라고 안배한 구원자가 복수를 부르짖으며 멸망을 방조하려 하고 있다.

그때 모니터 속에서 구원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물겹군요.』

동시에 타락의 징조들이 꿈틀꿈틀, 영역을 넓혀 가며 구원자의 영혼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걸 본 주신은 몰려오는 막막함에 결국 뒤로 넘어갔다.

“아… 결재…….”

눈을 부릅뜬 채 기절한 주신의 앞에서 라파엘이 참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대륙의 1/3, 인간이 80여 년 동안 마룡과 마수에게 빼앗긴 영토의 크기였다. 그리고 남은 2/3의 대륙에 존재하는 마법사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각 나라의 황실이나 왕실이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고 정식으로 자격증을 받은 정규 마법사. 이들을 전투 마법사와 연구 마법사로 구분하여 두 가지 종류가 생긴다.

연구 마법사는 대체로 마법 약품이나 새로운 마도구에 들어갈 마나 수식을 연구하는 이들로 도제를 들여 연구의 결과물을 제작하기도 한다.

반면 전투 마법사는 원소나 변형 마법을 실제 전장이나 치안, 방위 등에 활용하는 이들로, 남부군에 소속된 전투 마법사가 대표적인 예시다. 이들 역시 제자를 들여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다.

남은 하나는 등록 과정이나 자격증 없이 음지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불법 마법사였다. 에렘의 황실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수배 대상으로 여긴다. 마나 사용자를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제국 내에선 불법 마법사에 대한 사냥이 자행될 정도로 그들의 목에 걸린 현상금도 크다.

그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마법을 쓰거나 마도구를 제작하는데 특정 마법사의 도제나 제자가 아니거나 자격증이 없다면 곧 불법 마법사다. 찾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한 명이라도 찾아낸다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현상금을 받는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동부로 가는 이유가 바로 그 불법 마법사 때문이다. 그는 황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을 정도로 마도구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였다.

에스메랄다는 미래에서 황실보다 먼저 그를 찾았다. 그는 신변 보호를 조건으로 그녀의 의뢰를 받아 마도구를 제작해 주었다. 본래라면 에스메랄다가 그를 찾는 건 16세가 되던 해 여름, 성년식을 반년 정도 남겨 두었을 무렵의 일이다.

대륙력 1432년에 이른 지금 그의 나이는 49세. 수십 년이 넘도록 황실의 눈길을 피해 음지를 전전하는 마법사. 그가 황실에 자격 등록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20세 무렵에 두 살배기이던 딸은 돈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신관의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타락한 신관들을 증오하고 그들이 부패할 수 있는 법규를 매년 강화하기만 하는 황실을 혐오하는 불법 마법사, 그의 이름은 라그나였다.

지금부터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의 기본적인 목적은 일전 그를 통해 얻었던 2개의 마도구 제작 의뢰였다. 거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회유까지 시도할 생각이고. 미래에도 무수한 회유 시도를 했으나 그는 제조 의뢰 외의 모든 접촉을 거부했다. 자칫하다간 의뢰마저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에스메랄다가 먼저 물러서야만 했었다.

이번에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기의 라그나는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정말 고집불통이다. 벽창호, 그게 에스메랄다가 그를 부르던 은어였을 정도니 어련할까.

“무슨 생각을 하니?”

다른 용병들과 합류한 후 일정대로 동부로 이동하는 길, 페드로는 어느새 마차 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힐끔 본 후 언제나처럼 무시했다.

며칠 전 황도 인근의 도시에서 다른 용병들과 합류하고 하루의 휴식을 취했다. 그 뒤로는 한 사람이 일방적인 질문을 던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이동이었다.

“그리 있지 말고 낮잠이라도 자지 않으련?”

에스메랄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밤마다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곤하지 않니? 내가 옆에서 재워…….”

“불필요한 친절이세요.”

함께 이동을 한 지 1주일째, 그가 알아채도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간섭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그녀만의 감정이다. 위로받고자 한 적도 없고,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지금 페드로가 하고 있는 말은 그녀에게 불필요한 것이다.

“내가 아는 작은 천사는 방금 그 말에 수줍게 웃으며 내 무릎을 베고 누웠겠지.”

남부의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그의 잔류를 택한 이상 에스메랄다는 그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정말로 올해 그가 진급하지 못하도록.

그가 황실 기사단에 입단한 시기는 그의 나이와 파병 기간 등을 고려해 철저하게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 번이라도 진급이 어그러지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황실 기사단에는 황제에게 반하는 이들보다 꼬리를 흔드는 이들이 많으니까. 물론 반황실 세력이 무능한 것은 아니니 대체할 방법을 찾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필요하다 판단했기에 감내하고자 한 불편함이지만… 마음먹었다 하여 그것이 편해진다면 어찌 불편함이라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넌 내 누이가 아닌데, 어째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까?”

“제가 악마에게 먹힌 것이라 여기시나요?”

“그렇게 봐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왜일까?”

“아쉽게도 제가 오라버니의 누이이기 때문이겠지요.”

페드로가 침묵하는 사이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메랄다는 곧장 마차의 창문을 열며 그 소리에 반응했다.

「반군 규모 확대 중, 탈영병 증가. 최초 주동자 및 핵심 인물 추적 중이나 여전히 부진.」

귀족들의 마차에는 대부분 수납공간이 있다. 의자의 아래에 여닫는 것이 가능한 서랍이 있는 셈이다. 보통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여벌 옷, 장신구, 신발, 망토, 장갑, 또는 기사들이라면 여벌용 검을 수납하기도 한다. 에스메랄다의 마차는 그 보통의 경우 대신 종이, 잉크, 깃펜 등의 소모 물자가 채워져 있었다. 지금처럼 새로 오는 서신에 답신을 보내 지령을 내리기 위함이다.

새로 도착한 서신을 태운 그녀는 펜과 종이를 들었다.

「추적을 지속하되 반군을 자극할 것 같으면 몸을 사릴 것. 탈영병과 조우할 경우 선의와 도움을 제공, 인연을 만들어 두어 나쁠 것이 없으니 개별적 인원 간의 우호 관계 형성이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주도할 것.」

시리스가 창틀 위에 앉아 있는 전서구에게 먹이와 물을 주고 있었다. 그사이 에스메랄다는 완성한 서신을 접었다. 종이를 전서구의 발치에 달린 통에 넣자 시리스가 전서구를 창가에서 떼어 놓았다. 배를 채우고 곤했던 날개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다시 남부로 날아가리라.

지금의 시대에는 전서구를 노리는 이들은 거의 없다. 전서구는 귀족의 물건. 괜히 건드렸다가 귀족의 화를 사거나, 가문 간에 불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 5년…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최소한의 예의나 경계마저 던져 버리고 전서구를 포획, 뜯어보는 이들이 늘어난다. 황실의 통제는 더 심해지고, 고위 귀족들의 정보망은 점점 견제를 받기 시작하니까. 힘이 되는 정보가 손에 들어오는 빈도가 줄어들자 귀족들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하나, 둘 행동에 나선다.

바삐 움직이는 전서구를 발견하면 무조건 포획, 확인 후 다시 날려 보내게 되는 것이다. 정작 서신은 잃어버린 채 귀환하는 전서구가 늘어 가고, 심하면 서신 탈취 후 전서구를 아예 죽여 버리는 일도 생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틀어막는 것이다. 황제가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그 전에 서신에 사용할 안전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암호 문구 체계를 완성하고, 전서구들의 목에 걸어 줄 실드 마도구를 마련해서. 일전 사용하던 암호 문구가 있지만 이제 겨우 각지에 인물들을 배치하는 일이 끝난 상태. 당장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전서구를 담당하는 인원들에게 교육을 시키고는 있지만, 에렘어를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려면 반년 정도의 적응 기간이 더 필요했다. 전보 마도구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그렇게 연락망을 유지해야 한다.

“누구와 주고받는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니?”

“오라버니께서 모르는 사람이니 말씀드려도 알지 못하시겠지요.”

“……네 친구들을 모두 알았던 때가 있는데, 지금은 왜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3년이란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요. 변한 것뿐이랍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페드로의 행동을 계속 무시하는 게 계속 힘들어지고 있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말 속에 들어 있는 정보가 없는 대응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 대화가 아닌 대응이다. 질문이 바라는 답을 주지 않으니 결코 대화가 될 수 없다.

“거짓말에 망설임이 없구나.”

다정한 기색을 담고 있던 페드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자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주시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이 아니라, 3년 전 그날 변했지 않느냐.”

“…….”

“3년 전 네 생일날.”

에스메랄다에게 뭐든 해 줄 듯 달콤하게 구는 형제들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단련된 기사이고, 수를 내다볼 줄 아는 정치꾼이다. 우직한 기사이기만 해선 황실의 견제에 밀려 전선에 손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네가 저택 내에 없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함께 찾아 나섰지. 네가 매번 우리를 따돌리고 저택을 빠져나가던 것까지 평소와 똑같았다.”

“…….”

“평소와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어. 공원, 디저트 상점, 광장… 황도의 시가지를 돌고 돌아 서커스를 구경하고 있던 너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언제나처럼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혼자 나가면 위험하지 않느냐, 같이 가자고 하면 나와 줄 터인데 왜 또 혼자 나온 것이냐, 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잔소리.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손에 쥐었던 작은 꽃을 짓뭉개며 다짐했던 그 겨울날에는 듣지 못했던 그리운 말.

“네가 울고 있었으니까.”

에스메랄다의 눈동자가 거뭇한 색으로 물들었다.

“넌 당황해서 굳어 있는 우리를 지나쳐 사라졌고, 그 후로 침실에서 꼬박 이틀을 나오지 않았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았지.”

페드로가 손을 뻗었지만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뺨으로 다가오는 그의 손을 피했다. 허공에 그의 커다란 손이 멈춰 섰다.

“그러곤 이틀 만에 나와서는 지금처럼 내 손길을 피했다.”

페드로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에스메랄다가 대꾸했다.

“그래서요?”

“너의 변화에 대해 설명한 것뿐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죠. 어릴 적 검술 수업을 피해 도망 다니셨던 오라버니께서 지금은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고 계신 것과 똑같아요.”

허공에 멈추어 선 그의 손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페드로의 어린 시절을 그녀가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훗날 늠름해진 그를 보며 유모가 해 준 말이었을 뿐.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어디서 그 얘기를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래, 누구나 변하지. 하지만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너와 달리 나는 내 변화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를 빤히 주시하며 살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 단어 하나, 억양의 높낮이, 시선 처리, 버릇, 표정 등의 모든 것을 따져 상대방을 파악하는 행위. 그게 에스메랄다가 알고 있는 대화였다.

“내게 부여된 역할을 외면할 때 전선 너머에 있는 네가 위험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성실해지기로 했다.”

“제 변화의 이유를 궁금해하신다고 해서 그것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그래, 없다.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유 역시도 크게 상관없고.”

페드로가 설핏 웃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어떻게, 왜 변했건. 내가 사랑하는 누이임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한번 뺨에 닿을 듯 가까워지는 페드로의 손은 이전과 달리 목표물을 잃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튕겨 나갔다.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스메랄다가 그의 손을 쳐냈으니까.

어둡게 물들었던 에스메랄다의 녹안 속에서 무언가 일렁거렸다. 페드로의 거듭된 접근은 그녀의 내면을 건드렸다. 그가 에스메랄다의 단절에 응해 관계를 다시 쌓으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불길에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던 신념을 뒤덮은 복수심 위에 온기라는 이름의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겹겹이 쌓인 그것을 씻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페드로의 행동이 지속되면 그 물방울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복수심 아래 가려진 잿더미가 드러나게 되겠지. 모두 타 버려 이제 더는 탈 수 없다고 해도, 흔적은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건 에스메랄다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눈물겹군요.”

날 선 목소리가 흘러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은 물론,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주었던 사랑 또한 모두 위선이다. 그녀의 행복이 아닌, 그들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한 사랑이었으니 위선이 아닐 리가 없다.

그녀의 형제들은 모두가 죽을 것을 가정하고 살아갔고, 그들 중 누구도 혼례나 약혼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 죽을 테니까, 배필을 맞이하는 것을 이기적인 행동이라 여겼던 거겠지. 그들은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갔었다.

떠날 생각으로 곁에 머물렀다면 애초에 사랑 따윈 주지를 말든가. 혼자 남겨져도 굳건할 수 있도록 애초부터 고독을 배우게 해 주었어야지. 남겨진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는 생각하지 않고 본인들의 인생에 후회가 없도록 모든 사랑을 쏟아부어 준 후 죽어 버렸다.

이후 그녀는 그리움도, 원망도 토로하지 못한 채 홀로 모든 것을 품어야만 했다. 그것들은 쌓이고 쌓여 응어리가 되었고, 그 응어리는 이성을 잡아먹고 감정의 고통만을 남겨 주었다. 그들의 만족을 위해 뒤에 남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는데, 그게 위선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위선인가?

“오라버니는 위선을 사랑이라 부르시나요?”

“무슨 의미니?”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기만은 심장에 비수를 꽂은 것처럼 생생하고, 그 비참했던 순간들은 머리에 각인된 것처럼 선명하다.

가장 먼저 페드로. 그는 2년 후 예정대로 중앙군의 기사들을 통솔해 전선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시신이 되어 돌아오겠지.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누이가 꼭 돌아오라고, 벌벌 떨며 간청하는 말에 반드시 그리하겠노라 약속했으면서.

그리고 페드로가 죽은 해의 여름, 테노리엘 가문이 매년 전선으로 보내는 자원병과 함께했던 오멘과 페르멘이 출정한다. 또한 그들은 전선으로 향한 다음 해 에스메랄다를 떠났다.

다음으론… 남부의 인구 부족이 가져온 전선 약화를 기회로 귀족들의 세력을 깎아 내고 싶어 했던 황제가 내린 출전 명령. 나날이 위세가 높아지는 테노리엘을 중앙에서 쫓아내려는 견제임을 알면서도 테노리엘 백작은 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레스까지 함께 데려갔다. 제발 가지 말라고, 옆에서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그녀를 버려두고. 거짓말쟁이들, 위선자들.

에스메랄다가 19세가 되던 해 봄, 아레스가 먼저 부고를 전했고 그해 가을에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테노리엘 백작이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 후 작위를 승계했지만 에스메랄다는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백작이라 불리지 않았다. 부친을 떠올리는 그 호칭이 불편했기에 그녀는 백작 위를 가졌음에도 영애라고 불렸다. 그렇게 가문을 영위하고, 모략꾼들과 드잡이를 하며, 황실과 신전의 압박을 홀로 견뎌 냈던 6여 년. 그들은 에스메랄다가 그 긴 시간을 홀로 버티도록 만들었다.

“언제든 기꺼이, 그 사랑을 버리고 떠날 거면서.”

속에서 들끓었으나 뱉어 낼 대상이 없어서 품고만 있었던 감정이 튀어나왔다. 그녀를 홀로 남겨 두고 모두 떠나 버린 가족들에 대한 원망.

그들의 죽음이 그들의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이 지독한 원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죽은 후의 고통이 에스메랄다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말을 내뱉은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눈을 감았다. 실수했다. 감정에 취해 쓸데없는 말을 한 것이다. 연민과 동정, 신념과 대의 따위는 모두 버리고 악귀가 되고자 했으면서, 겨우 한때의 과거에 품었던 감정 때문에 날뛰다니.

전서구를 내보내고 닫았던 창문을 다시 연 그녀가 말했다.

“내가 탈 말을 준비하렴.”

“예?”

에스메랄다는 시리스의 반문에 대답하는 대신 창문 옆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아직 몸에 승마를 익힌 건 아니지만 머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 매달려 가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마부석 옆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자 곧 마차가 멈추었다. 직접 마차 문을 열고 내리기 직전 에스메랄다는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는 온기에 뻣뻣하게 굳었다.

“거기서 화가 났구나.”

손쉽게 그녀의 작은 몸을 뒤덮은 온기가 속삭였다. 드디어 말해 주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알겠다. 네가 바라지 않으면 출정하지 않으마.”

거짓말.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돌아가는 대로 기사단을 나오도록 하마.”

울 듯 일그러진 표정 위로 온기가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기억 속의 그것처럼, 바의 달에 볼 수 있는 따듯한 햇살과 닮은 미소가 페드로의 얼굴에 맴돌고 있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으마. 맹세하겠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금발을 넘겨 주는 페드로 때문에 에스메랄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 이제 화를 풀어 주렴, 작은 천사야.”

까마득한 과거에 당연했던 순간처럼, 그에게 받아 보았던 입맞춤이 에스메랄다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 끔찍한 온기에 정신을 차린 에스메랄다가 페드로를 밀쳤다. 겨우 그의 허리춤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소녀에게 건장한 청년이 반항 한번 없이 밀려났다.

거북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에스메랄다는 페드로를 피해 다시 몸을 돌렸다. 뛰어내리듯 마차 밖으로 몸을 던지니 시리스가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아가씨?”

시리스가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며 넘어질 뻔했던 에스메랄다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거친 손이 그런 시리스를 밀어내고, 다정한 손이 에스메랄다를 채어 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에스메랄다의 외마디 비명에 노성을 담은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리 급히 내리면 위험하잖니.”

어느덧 마차에서 따라 내린 페드로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며 시리스를 밀어냈다. 페드로의 팔을 의자 삼아, 그의 가슴을 등받이 삼아 품에 안겨 든 에스메랄다의 몸이 굳었다.

“함께 있는 게 싫다면 내가 말을 타마. 네가 찬 바람을 쐬게 두지는 않을 게다.”

페드로는 그렇게 말하며 에스메랄다를 다시 마차에 태워 주었다. 인형을 안아 든 것처럼 가뿐히.

“내 말을 가져와라.”

용병 중 한 명이 눈치를 보며 고삐째 맡아 두었던 말을 끌고 왔다. 그러는 사이 페드로는 마차의 문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에스메랄다를 의자에 앉혀 주었다.

“자, 어서 출발하자. 나 때문에 일정이 지체되었을 것 아니냐.”

마차의 문을 닫은 후 말에 오른 그는 마부석에 앉은 다른 용병에게 출발을 지시했다. 길지 않은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에스메랄다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마차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 *

아레스와 페드로는 정식으로 군부에 이름을 올리고 활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사교계라는 또 다른 정치판 위에서, 황제의 수중에 떨어지길 거부한 인사들을 만나 우호를 다지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업무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연회 내내 에스메랄다의 옆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누이의 호위 역을 오멘과 페르멘에게 맡겼다.

하지만 두 시간, 세 시간… 중요 인사들과의 인사를 마친 후 연회장을 돌아보았을 때, 에스메랄다가 보이지 않았다. 두 동생이 같이 있으니 엄한 놈이 들러붙지는 않겠지만…….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동생들을 찾던 페드로는 아레스와 조우했다. 그도 동생들을 찾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찢어져 에스메랄다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페드로는 저 멀리서 외투를 가져오라, 마차를 꺼내오라 황궁의 시종들에게 성을 내고 있는 쌍둥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옆에 붙어 있으라 했더니 저기서 뭘 하는 건지. 페드로는 미간을 좁히며 쌍둥이를 채근했다.

2황자가 어쩌고, 테노리엘의 마차가 어쩌고… 우왕좌왕, 쌍둥이는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 냈다.

간략한 정황을 알아낸 직후, 페드로는 마차에 매인 말을 따로 풀어내 출발할 정도로 서둘렀다. 연회장 앞을 지키는 시종으로부터 에스메랄다가 타고 간 마차에 수행원이 시녀 하나뿐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초조했다.

마차가 아무리 빨라 봐야 말보다 빠를 리 없거늘.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것과 달리 백작 저에 도착할 때까지 에스메랄다의 마차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가씨께선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집사의 말에 무슨 일이 생겼나, 나쁜 일을 당한 것인가 싶어 급히 황성으로 돌아갔었다. 그렇게 황성 입구의 경비병들에게 테노리엘 백작가의 마차를 보았냐고 물어보았더니 기가 막힌 답이 돌아왔다.

‘동쪽 대로로 나갔습니다만…….’

황도에 있는 테노리엘 백작 저는 황성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다. 그런데 동쪽이라고? 그는 싸한 감각을 느끼며 말을 재촉했다.

마차를 끌던 말이라 안장도, 고삐도 없었다. 급한 대로 말의 갈기를 붙잡은 페드로가 황도를 나섰다. 뒤에 남겨진 것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숨 가쁘게 달렸더니, 황도를 빠져나가 동쪽을 향해 이동 중인 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의 누이는 가족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난 것이다.

그때의 아찔함이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에 충동적으로 합류를 결정했다.

기사단 진급? 지휘권? 파병?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나뿐인 누이가, 그가 목숨을 바쳐 지키기로 맹세한 천사가 매일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는데.

에스메랄다는 뜻대로 하라는 말을 남긴 후 그를 일행으로 대했다. 말에 안장을 달아 주었고, 연회복 차림인 그에게 겨울 여행자들이 입는 옷을 마련해 주었다. 외관을 가릴 수 있는 두꺼운 겨울 후드까지 함께. 그 덕에 페드로는 낯선 누이를 관찰하기 수월했다.

황도에서부터 함께 나온 듯 보이는 셋은 물론 인근 도시에서 합류한 다섯까지. 그들 모두가 용병의 신분임에도 마나를 다룬다. 또한 용병임에도 에스메랄다를 대할 때 예법을 지켰다. 과거 귀족이었다는 의미. 대체 에스메랄다는 저들을 어디서 만난 것일까.

처음 도착한 도시에서 그녀의 일행은 마차까지 바꾸어 탔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검은 마차로. 그 이후 지겨운 이동을 지속했다. 매일 그녀를 관찰하고 살피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렇다 보니 알 수밖에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밤마다 흐느낀다. 무엇이 그리 힘든지, 무슨 꿈을 꾸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그녀의 옆을 차지하고 앉아 뭐라도 해 보려고 노력하여 결국은 알아냈다.

‘눈물겹군요.’

‘오라버니는 위선을 사랑이라 부르시나요?’

페드로는 에스메랄다가 잠든 마차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선 후 의자 위에서 잠든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오늘도 역시나, 잠든 채 울고 있다.

“무슨 꿈을 꾸기에 그리 애달프게 울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눈물을 쓸어 주며 속삭였다.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답을 회피해 의문을 던지는 화법이 지나칠 정도로 능숙하다. 또한 방어적이고 위축되어 있다. 그를 행복하게 해 주던 수줍은 미소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날카로운 불신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페드로의 청록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었다.

아레스는 부친에게 충실한 장남이었고 어린 시절에도 부친의 명에 순순히 응했다. 반면 페드로는 조금 달랐다. 그는 어린 시절 왜 우리만 희생해야 하냐며 반항했다. 그런 반항이 끝난 건 그가 아홉 살이 되던 해 태어난 어린 누이 덕분이었다. 갑작스러운 조산 때문에 수척해진 모친이 작은 아기를 안고 있던 모습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했다.

아아, 저 아이가 내 누이구나. 내 누이는 작은 천사였던 거구나.

페드로는 어린 마음에 모친에게 맹세했다. 작고 여린 누이를 반드시 지켜 주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어린 소년의 순진한 맹세는 지금의 페드로를 있게 하는 근간이 되었다.

미숙아로 태어나 몸이 약했던 에스메랄다는 검을 배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기적이게도, 페드로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에스메랄다의 작고 보드라운 손에 굳은살이 생기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쥐던 그 보드라운 온기가 평생토록 이어지길 바랐다.

페드로가 황실을 혐오하면서도 부친의 명에 따라 전선에만 신경 쓰는 이유, 그건 부당함에 순응하더라도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에스메랄다를 위해서였다. 모친이 목숨을 걸고서, 이 난잡한 세상에 데려온 천사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

하지만…….

‘언제든 기꺼이, 그 사랑을 버리고 떠날 거면서.’

그리 말하며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남겨 두고 떠나야 하나? 페드로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안전하기를, 또한 평생을 아름다운 것들만 보며 위험을 마주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기사단을 나오면 되겠냐고 물었던 그 순간, 간절해 보이던 에스메랄다의 표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천사가 그런 절박한 표정을 짓는 걸 원하지 않는다.

“가지 않으마.”

페드로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기어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에스메랄다를 뒤로하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곁에 있으마.”

숨소리처럼 희미한 흐느낌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러니 울지 마라.”

그리고 기사는 울음이 가져온 흔들림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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