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흑화했다-2화 (2/45)

제2장

비극의 전조

달이 구름 속에 가려지는 바람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어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복면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외관을 가린 이들이 있었다. 천과 몸으로 이리저리 가리는 바람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며 빛을 낸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그들을 맞이한 건 수염을 기른 중년인과 입술을 계속 핥아 대는 청년이었다. 복면을 쓴 이들 중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면인의 손에 들린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가죽 주머니였다.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낯선 이들을 맞이한 중년인이 먼저 그것을 받아 들었고, 이어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던 청년도 같은 것을 받아 들었다.

그들이 가죽 주머니를 주고받는 사이 복면인과 함께 온 이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짐수레에 한가득 실린 통을 내리고 수풀 속에서 꺼내 온 수레에 들어 있던 통을 대신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의 일이 알려져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겠지?”

“당연한 일 아니겠소? 그쪽이 준비해 준 대로 일이 끝나면 바로 국경을 넘어갈 생각이오.”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그렇게 답하자 청년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화는 그게 다였다. 복면인은 그들에게 미련 한 점 남기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후 수레에 실린 짐을 모두 바꿔치기한 이들이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어둡고 음산한 수풀 사이에서 다시금 반짝, 하고 빛이 튀어나왔으나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이후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외부에서 시전되는 마법을 차단하는 결계가 쳐졌다.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주변을 둘러싸자 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청년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고, 조금 전 함께 보초를 서는 동료에게 빌려주었던 물병을 비워 냈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수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남자가 흠칫,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 내가 언제 잠들었지? 미안하다. 깨우지 그랬냐?”

“……일정이 빠듯했잖아. 피곤한 모양인데 더 자라고. 내가 보초를 마저 설 테니까.”

“그래도 될까? 너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조금 전 복면인에게서 가죽 주머니를 건네받았던 청년이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신 내일은 네가 날 도와주면 될 거 아냐.”

“뭐, 그렇게 말해 준다면야.”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던 남자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눈을 감았다. 가죽 주머니를 받았던 청년이 수레가 아닌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마법사가 사라진 마차로. 열흘 전쯤, 그 마법사와 나누었던 대화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라네, 젊은이.’

동료 보초병이 잠든 것을 확인한 청년은 품에 넣어 놨던 가죽 주머니를 꺼내 보았다. 그 속을 확인한 청년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반 금화 100개의 가치가 있는 젠금화가 주머니 내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래,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그러니 잡는 게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에서 언제 이만한 거금을 벌어 보겠나. 어차피 다른 쪽에서 운반 중인 약제들도 많으니 괜찮을 것이다. 여기서 빼돌려진 것이라고 해 보아야 전체의 1할이 될까 말까 한 양이니 티도 별로 나지 않을 테고. 청년은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가죽 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했다.

남부로 약제 운송을 담당했던 그 청년은 정확히 32일 후 소속된 중앙군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무단으로 이탈했다. 탈영병이 되어 버린 셈이지만 그는 국경을 넘어 타국에서 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괜찮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국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는 가고자 했던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차가운 시체가 되어 버린 사람이 이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해 약제 운송에 차출되었던 이들 중 무단 이탈자 27명의 수배령이 내려졌으나 체포되어 법적 처벌을 받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 *

펼쳐지지도 못한 채 차가운 겨울을 맞이해 피어난 벽난로의 불길 속으로 직행한 것은 페드로가 보낸 서신이었다.

그녀는 지난 3년간 가족들과 그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았다. 오는 서신은 읽지도 않고 태워 버렸으며, 가족들이 신년마다 남부를 경유해 영지로 올 때가 되면 오히려 몸을 빼내 별장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확인하는 건 가주의 인장이 정식으로 찍힌 테노리엘 백작의 명령서뿐이다. 백작의 개인적인 서신은 오라비들의 것과 똑같이 취급했다.

그녀가 서신과 서류들을 훑어보던 집무실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렴.”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집무실에 들어선 시녀는 신문과 차 한 잔을 책상 위에 올려 두며 말했다.

“조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래, 나가 보렴.”

“예, 아가씨.”

3년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이 적응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에스메랄다만이 머무는 영주 성은 무척이나 적막하고, 또한 서늘했다. 사용인들은 테노리엘 백작이 영주 성으로 돌아와도 시끄럽게 떠들지 않게 되었다.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조찬과 함께 도착한 신문을 펼쳐 보았다. 전날 발간된 황도의 신문이었다. 해당 지역의 것은 당일 받아 볼 수 있지만, 황도의 것은 전서구가 가져와야 하기에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황실을 향해 반기를 들었던 남부의 폭도들, 진압되다.」

첫 장에 기재된 기사였다. 에스메랄다는 찻잔을 집어 들며 그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폭도인 것은 맞다. 황실에게 반기를 든 것도 맞다. 하지만 그 이유가 기사에 나온 것과는 다르다.

「카의 8일인 오늘, 황실은 남부의 폭동이 파견된 중앙군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고 밝혔다.

지난 카의 2일, 과격 분자로 칭해지는 남부의 백성들이 역병의 치료제로 제공된 약이 부족하다며 폭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지난가을 사의 달에 개발된 ‘알라반’은 남부에서 발병한 전염병 ‘쿠그스’의 치료제이다. 그것은 제조 단가가 매우 높으며 희소한 약제가 사용되기에 한 번에 많은 수량을…(후략)」

우습지도 않은 소리. 치료제 알라반에는 희소한 약제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저 마법 처리를 거친 약초를 사용해야 하기에 단가가 조금 높을 뿐. 또한, 이 기사가 언급한 폭동의 원인은 황도에서 보낸 치료제 알라반이 사실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약이라는 말에 복용을 했는데도 효과가 없었기에 금방 들통났다. 본디 투명한 약을 물로 바꿔치기한 것이 에스메랄다가 보낸 사람들임은 당연하고.

약이 물이라는 사실에 당황한 중앙 관료가 버벅거릴 때, 누군가 외쳤다.

‘너희는 왜 병에 걸리지 않지?!’

강력한 전염성으로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끔찍한 병과 영지에 발을 들이고도 며칠이 지났는데 그 병에 걸리지 않는 중앙 출신 관료들. 남부의 영지민들은 치료제라 속여 물을 준 황실의 행태에 분노했고, 이어 그들이 보낸 관료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중앙 출신의 관료들이 병에 걸리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들은 남부에 진입하기 전 각자의 몫으로 챙겨 온 약을 따로 복용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남부에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심어 둔 건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리 약을 복용하고 남부로 파견 갔던 건달들이 각각의 영지에서 외쳤다.

‘너희만 약을 먹은 거냐?!’

‘우리는?’

‘우리에게 와야 하는 걸 너희가 훔쳐 먹은 거구나!’

선동, 그것은 인간의 지저 깊은 곳에 똬리를 튼 불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그런 상태에서 한 명이라도 앞장선다면 그 불신은 속으로 타들어 가 폭력이라는 괴물을 터트린다. 결과적으로 남부에선 폭동이 일어났다. 파견 갔던 관료들 중 일부가 성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고. 폭동이 진압되었다고는 하나 그로 인한 영향은 결코 쉬이 진압되지 않으리라.

카의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닫아 둔 창문 밖에서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의 옆방, 항상 창문이 열려 있는 그곳을 드나들며 소식을 가져오는 심부름꾼이 온 모양이다. 마법으로 조련한 전서구는 모든 귀족들이 한 마리씩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흔한 짐승이었다. 날갯짓 소리가 끝난 후 잠시 기다리자 노크 소리와 함께 옆방과 연결된 곁문이 열렸다.

“초록 깃의 전서구가 가져온 것입니다.”

초록 깃은 동부, 노란 깃은 남부, 파란 깃은 북부, 그리고 붉은 깃은 황도가 있는 중부를 오가는 전서구들이다.

전서구들을 관리하고 그들이 가져온 서신을 에스메랄다에게 전달하는 시종은 테노리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3여 년 동안 그녀가 따로 포섭한 인물들로 황실이나 신전의 권력에 짓눌려 인생이 망가진 이들이 대부분이다. 영주권을 쥐고 있으니 그들을 테노리엘 출신의 영지민으로 조작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테노리엘 내부에 세작을 심지 못한 황제에게 들킬 일도 없었고.

에스메랄다는 서신을 받아 든 후 손을 내저어 시종을 내보냈다.

「목표물 발견, 동부 아브람 백작령에 거주 중, 감시 인원 투입, 현재 거주지 및 활동 영역 전반에 걸친 감시 진행, 어린 소년이 함께 생활 중. 이하 덤이라 지칭.」

드디어 동부에서 찾아 헤매던 목표물을 발견한 것이다.

건달들을 포함한 뒷골목 세력들을 장악했던 3년. 에스메랄다는 그 기간 동안 다른 이들과의 접촉도 병행했다. 황실과 신전에 능욕당해 비참하게 짓밟힌 이들 중, 복수심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황실에 반기를 들기로 결심한 후 에스메랄다는 내전의 명분을 위해 그들이 행한 악행을 캐내며 증거를 모았다. 그리고 치를 떨었다. 인간이 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죄가 가득했으니까. 그렇게 알게 된 기록 덕분에 그녀는 누가, 언제, 어떤 비극을 겪을지 알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이 비극을 겪을 때까지 기다리고, 그 후에 복수라는 달콤한 사탕을 내밀며 접근하는 방식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았다. 막으면 손을 잡을 동지가 줄어드니까.

일부는 몰락한 귀족이며 불명예 전역한 기사, 윗선의 눈 밖에 난 사제, 혹은 황성에서 하급 관료로 일하던 귀족가의 방계들이다. 지금 에스메랄다의 근접 경호로 테노리엘 영주 성에 들어와 있는 용병, 몇몇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외부로 파견 나가 있는 인물들의 정체였다.

미래에 발견되어야 하는 광맥들이 그 기반을 다지는 자금줄이 되고 있었다. 뷔비르를 이용해 만들어진 광물 상단은 지난 3년 동안 이미 몸집을 불린 상태. 그 상단을 통한 사치품 상단들이 황도에서 조금씩 커 가고 있다.

내부에서만 순환하는 자금을 통해 에스메랄다는 1여 년 전쯤 서부와 남부, 그리고 동부의 뒷골목을 완전히 장악했다. 지금은 그곳에 자신과 함께 복수에 참여할 이들을 배치하고 있는 시기였다. 또한 뒷골목 출신 중에서도 세작으로 쓸 수 있는 이들을 선별해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일만 도맡아 하는 중소 규모의 용병단은 북부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영역을 넓혀 진입 장벽이 높았던 황도와 조용한 북부에도 손을 쓰고 있고.

그녀가 북부와 중부보다 동부를 먼저 장악한 이유는 방금 도착한 그 서신 때문이었다. 오래도록 동부에 숨어 산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찾기 위해서. 그 목표물을 발견했다는 서신을 받고 장거리 여행의 일정을 짜던 에스메랄다의 집무실에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은쟁반을 들고 나타난 시녀의 이름은 히나였다. 황태자의 유희에 쓰이기 위해 납치되었다가 죽었다고 여겨져 시체들과 버려졌던 여인. 그녀와 함께 납치되었던 자매는 정말 죽어 버렸지만 그녀는 죽은 척 시체들 틈에 섞여 나온 덕에 살아남았다.

미래에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반정 세력과 손잡고, 그의 침실에 창녀로 가장한 암살자를 집어넣던 포주가 바로 그녀였다. 그때는 실패했고 처형당했지만, 이번에는 에스메랄다가 그녀를 찾아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 히나는 에스메랄다의 전속 시녀로 영주 성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전속 시녀이기는 하지만 히나는 전속 시녀가 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필사 모조, 그리고 서류 위조를 위한 교육을 받고 연습을 하기에 바빴으니까. 애초에 그녀를 전속 시녀로 뽑아 곁에 두는 이유가 이런 교육을 위해서였다. 재능도 있고 동기도 확실하다. 해서 에스메랄다는 그녀를 특별히 곁에 두고 가르치고 있었다. 제대로 따라오기만 한다면 히나는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에스메랄다는 히나가 가져온 서신을 받아 들었다.

「바 에타 테노리엘 노만.」

테노리엘 백작의 이름과 백작가의 인장이 정식으로 찍힌 명령서였다.

「카 19일에 열리는 황태자 전하의 약혼 축하연에 참석을 명한다.」

에스메랄다가 테노리엘 백작이 보내는 명령서를 무시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군에서 명령 불복은 처형이 가능한 중죄, 귀족들의 관습 속에선 파문이 가능한 명분이 된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이상 가족의 정은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미 백작이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용인들에게 접촉하는 횟수가 늘고 있다. 과거의 오해가 걷히고 그 속에 무언가 더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발자국은 들키더라도 꼬리가 잡히는 일은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백작은 에스메랄다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경우 그녀를 방해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계획의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겠지. 테노리엘 백작은 반역이 일어날 경우 희생되는 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니까. 아르페시스처럼. 그렇기에 에스메랄다는 만약의 경우 가문에서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부친의 ‘명령’에는 복종하고 있었다.

지금은 카 10일, 마차를 타면 영지에서 황도까지는 평균적으로 7, 8일 정도가 걸리니 꾸물거리지 말고 이동을 시작해야 할 듯했다.

에스메랄다는 종을 흔들어 집무실 밖에 서 있는 시녀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내일 오전에 황도로 출발해야겠으니 준비를 해 두렴.”

“예, 아가씨.”

어차피 예견하고 있던 일이다. 이 시기에 황태자는 솔루베르 공작가의 여식과 약혼을 한다.

황도에 가서 손을 써야 할 것도 있고, 그 연회에서 만나야 할 인사도 있으며, 동부에도 들러야 한다. 백작의 명령이 없었더라도 갔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3여 년 만에 황도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 * *

덜컹거리는 마차의 창틀 위로 노란 깃의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전서구들이 도착점으로 여기는 조련석 중 하나가 에스메랄다의 마차에 있으니 곧장 이곳으로 찾아든 것이다.

남부에서 폭동이 일어난 지 10여 일, 새로운 소식이 속속들이 들려오고 있다.

「일부 전선 병력이 황실을 목표로 한 반군 조직, 전선 이탈 중. 최초 주동자 및 이탈자 미확인.」

그녀의 방해 이후에는 약이 제대로 전달되었지만 이미 붙어 버린 불은 꺼지지 않았다. 곳곳에서 황실에 대한 불신과 적의가 퍼져 나가고 있다.

남부의 인구는 미래보다 더 많이 줄어들 것이고, 이번에는 서부와 동부는 물론, 북부에서까지 백성군이 차출될지도 모른다. 그럼 남의 일이라고 발을 빼던 북부의 영주들과 관직에 앉은 중앙 귀족, 작위와 영토를 손에 쥔 지방 귀족 사이에서 대립이 일어날 것이다.

높은 확률로 중앙 귀족들의 승리를 예상하지만 남부의 상황을 황제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중앙군이 밖으로 나올 가능성도 전무하지는 않다. 중앙군을 남부로 파병한다면 수가 줄어들 것은 자명한 사실. 훗날 황제가 줄어든 병력을 회복할 때 중앙군 내부에 사람을 집어넣기 쉬워진다.

「남부 오시라 자작령, 쿠그스 병세 악화, 유아 및 노인 대다수 사망.」

「남서쪽 세테라 지역 전선, 반군에 가담한 병력의 이탈로 마수에게 점령. 잔존 병력 퇴각.」

차근차근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 남부는 한 번 휘청거릴 것이고 피해는 남부 밖으로 확산되리라. 반군의 창설과 그에 가담한 병력의 이탈,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군의 약화. 그 영향으로 견고한 리퀘나가 돌파당한다면 최상의 결과다. 황실과 신전의 발에 불똥이 떨어지면 그들을 흔들고 내분을 유도하는 게 수월할 테니까.

에스메랄다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 빛을 내며 서신을 태웠다.

“아가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가문에 소속된 기사였다.

“마수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소형 2기로 추정됩니다.”

가끔 저지선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오는 마수들이 있다. 광활한 제국의 땅 위를 일일이 다 막아설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꼭 두 마리씩 붙어 다니는 그놈들이 민가를 공격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을 직접 사냥하기보다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근방을 지나는 인간이나 들짐승을 잡아먹는다. 피해 신고가 올라오지 않으면 주변에 마수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일도 빈번했다.

그 행동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학자들이 머리를 싸매어 보았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 얼토당토않은 추측일 뿐. 그녀가 이유를 아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은 그것을 궁금해하며 골머리를 앓을 시기도 아니다.

“사냥하고 오라, 먼저 이동하고 있을 테니.”

에스메랄다가 기사들에게 명했다. 역할이 바뀌었다. 본래 그녀의 근접 호위는 기사들이, 만약의 경우 위험의 제거는 용병들이 해야 한다. 하지만 기사들은 에스메랄다의 명령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달갑지 않겠군요.”

“황도에 가서 해야 할 일도 있는데 너희가 다쳐서 좋을 게 없지.”

에스메랄다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들, 그들은 기사들보다 더 지척에서 그녀를 호위한다. 이 행동은 에스메랄다가 가문의 기사들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테노리엘 백작이 직접 키우고 기사 서임을 내려 준 이들이다. 모두가 테노리엘의 이름이 가지는 명예를 위해 모여들었다. 그 이름의 주인인 테노리엘 백작의 뜻이라면 부당한 명령에도 복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작의 자제에 불과한 에스메랄다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황제나 그를 따르는 이들을 몰래 제거하는 정도의 비겁한 명령까지는 따를 사람을 구할 수 있겠지만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라는 잔혹한 명령까지 따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이 따르는 것은 백작이지, 그의 자녀인 에스메랄다가 아니니까.

결국 그녀는 자신보다 백작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가문의 기사들 대신 직접 자신의 손으로 한 명, 한 명 모아 온 이들을 더 신뢰한다. 그들이 따르는 것은 백작이 아닌 에스메랄다이니까.

에스메랄다는 기사들이 떠난 후 천천히 말을 몰아 마차 곁으로 다가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신분은 라 루그 록첸 테오메스, 지금의 신분은 용병 시리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모략에 휘말려 멸문한 록첸 자작가의 생존자였다.

황도로 가는 동안 대동하는 호위 기사는 셋, 그녀가 따로 대동한 용병도 셋이다. 나머지 용병들은 황도를 빠져나와 동부로 갈 때 따로 합류할 예정이었다. 시리스가 기사들이 사라진 곳을 빤히 바라보며 에스메랄다에게 물었다.

“정말로 황도에 도착하면 가족분들의 접근까지 막아섭니까?”

“그래.”

“……아가씨께서 황실에 적의를 가지신 건 믿습니다. 아가씨의 눈은 저랑 똑같거든요.”

동류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 그렇기에 에스메랄다가 접근한 이들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가족분들을 멀리하시는 이유는 이해가 안 됩니다. 절대적인 우군인데 함께하자 청해 보지는 않으십니까? 그분들도 황실의 폐해를 알 텐데요.”

“서로가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니, 그 행보는 같을 수 없는 법이지.”

“…….”

“난 그치들을 안전하게 만드는 짓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더 이상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형제들과 부친께서는 기꺼이 하겠지. 그치들의 안전이 백성들의 안전과 연결되니까.”

시리스의 표정에 그늘이 서렸다.

서부의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 테노리엘, 그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그 외에도 다양했다. 매년 가장 많은 전선 기금을 내는 가문. 매년 가장 많은 자원군을 전선으로 보내는 가문. 매년 가장 많은 군수 물자를 원조하는 가문. 그들은 진정 난세를 떠받드는 고귀한 혈통이었다.

작위 분쟁을 염두에 두고 하나 혹은 둘의 후계를 보는 귀족들과 달리 테노리엘은 여건이 되는 한 많은 후손을 보고 있다. 또한 마수가 등장한 시대부터 4대째 꾸준히 그 후손들 모두 전선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왔다.

20여 년 전, 테노리엘 가문의 후손은 전선에서 활약했고 한 명을 빼고 모두 전사했다. 당시 생환한 유일한 후계가 지금의 테노리엘 백작이었다. 이번 세대에 태어난 4형제도 매해 연말 주기적으로 전선에 방문하는 중이다. 일부는 곧 전선에 소속되기까지 할 것이다.

장남 아레스는 이미 재무부 관료로서 후방 지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고. 3년 전 성년식을 치른 페드로도 황실 기사로 서임을 받아 훗날 출정할 중앙군의 지휘권을 손에 넣기 위해 진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내후년이 되어야 성년을 치르는 쌍둥이도 훈련에 훈련을 거듭 중이다.

오지 않을 미래에는 에스메랄다 역시 한 해에 두세 번씩 전선을 방문했다. 언론을 장악한 황실의 농간이 있었지만 테노리엘의 희생과 원조를 모두 가리진 못했다. 관직에 진출했던 에스메랄다가 우호 세력을 다진 기반이 바로 테노리엘의 이름이 가진 무게 덕분이었을 정도였다.

“그리 마음이 불편하면 너도 가지 그러느냐?”

“……예?”

“너도 그치들에 대한 복수심을 버리고, 전장으로 향해 고결히 전사하라는 말이었다. 내륙에 사는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에스메랄다는 시리스에게 냉소를 지어 보였다.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겸사겸사 그놈들의 안전에도 기여하고 싶다면, 내 언제든 부친께 너를 추천해 주마.”

에스메랄다는 이를 꽉 깨물어 턱이 불거지기 시작한 시리스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럴 것이 아니라면 괜한 감정에 흔들리지 말거라.”

“…….”

“우리의 앞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뒤돌아보지도 마라.”

“……예, 아가씨.”

복수심, 인간의 눈을 멀게 만드는 잔혹한 이름.

그녀의 손길에 모여든 모두가 똑같았다.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황실과 신전에 복수를 부르짖을 이들이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번에 남부군을 이용해 반군을 만들어 낸 것처럼 에스메랄다가 계속 동지를 늘려 갈 테니까.

* * *

아레스와 페드로는 반차를 내 가면서까지 일찍 황성을 나섰다. 그리고 백작 저에 도착한 그들 옆에는 저택의 연무장에서 훈련 중이던 오멘과 페르멘까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오늘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3년 동안 정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누이를 만나기 위해서.

연초에 영지에 내려가면 에스메랄다는 별장을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가 버려서 행적이 묘연하다. 종종 그녀를 황도로 불러 달라 부친에게 청해 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그들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시간이 약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기다려 보자.’

백작은 현실에 절망한 에스메랄다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4명의 아들을 단속했다.

백작의 만류 때문에 그들은 지난 3년간 에스메랄다를 보러 달려가는 대신 기다렸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오늘은 무척 특별한 날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3년이나 지났으니 다시 예전처럼 말을 걸어 주고 품에 안겨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만약 3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면… 그들이 인내한 시간은 약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일 터.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화가 난 것이라면 풀어 주고, 오해가 있다면 그것도 풀고, 그게 아니라면 또 이유에 맞춰 뭐든 해 줄 것이다.

그들이 마음을 다잡는 사이 백작 저의 정문을 지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노리엘 백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그 마차에는 분명 그들의 누이가 타고 있으리라. 형제들은 3년 만에 이루어진 재회에 단체로 마른침을 삼켰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서고 그 문이 열렸을 때, 형제들은 앞다투어 마차에서 내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리디, 오랜…….”

“작은 천…….”

“잘 지냈…….”

“에스메…….”

분명 한걸음에 다가서서 재회의 포옹을 하고 그리움을 속삭이고자 했다. 검을 빼어 들고 에스메랄다에게로 향하는 걸음을 막아선 이들이 없었다면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의 형제들을 불한당 취급하며 검을 겨눈 용병들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무례하다!”

그들과 함께 저택으로 온 가문의 기사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비키십시오. 아가씨의 명입니다.”

사형제의 표정이 삐걱거렸다. 시리스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서늘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에스메랄다 때문에.

“시리스.”

앙증맞은 입술에서 짧은 말이 흘러나왔다.

“피곤하구나.”

3여 년 만에 들어 보는 누이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삭막했다. 그녀의 말이 끝난 직후 시리스를 비롯한 용병들이 직접 사형제를 밀치며 길을 열었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밀린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길을 에스메랄다가 유유히 걸어갔다. 그들이 기대했던 재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 *

테노리엘 백작의 미간에 파인 굴곡은 매우 얕았지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 이유는 오후에 저택 앞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니까. 고용한 용병들이 형제들을 향해 검을 겨누도록 만든 에스메랄다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협박을 받은 후 백작은 멀리서나마 그녀를 주시해 왔다. 그는 3년 전 에스메랄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전장에 섰던 시절, 아차 하는 순간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만큼 망가지는 상황을 수도 없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루는 것이 전장의 문제였다면 조금은 더 과감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은 하나뿐인 딸과 관련되어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에스메랄다…….”

그녀가 지내는 영지는 결국 백작의 땅이다. 에스메랄다가 영주 성이 있는 곳의 뒷골목을 청소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모든 일까지, 소식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듣지 못하는 것이 늘어났다.

그러다 에스메랄다가 열 살이 되던 해부터는 종종 행적이 묘연해지기 시작했다. 영주 성을 비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가문의 호위 기사를 일절 대동하지 않고 홀로 떠났기에 그녀가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더니 하나, 둘, 외부에서 그녀가 불러들인 인사들이 성에 머물기 시작했다. 뒷조사를 해 보아도 이상함이 딱히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이들이 전부였다. 그렇다는 건 신분을 세탁했다는 의미. 테노리엘 출신으로 둔갑한 그들의 본래 신분을 조사하려면 영주권을 쥐고 있는 그녀의 눈에 발각될 확률이 높아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백작의 귀에 들려오는 보고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에스메랄다의 행적을 정확히 아는 백작령의 사용인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집무실에 틀어박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매일 수십 통의 전서구가 오간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인간이나 말의 발로 하늘을 나는 전서구를 쫓아가 행방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 결국 백작은 에스메랄다의 종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테노리엘 백작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가주의 인장이 붙은 명령서를 사용할 때뿐이다. 그것마저도 회피가 가능하거나 부당하다는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정당한 항의를 하며 거부하기도 한다.

거기서 백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딸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명령 불복이라는 빌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응하는 것뿐이다. 그건 명령에 순응하지 않을 경우, 백작이 그녀를 가문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여긴다는 의미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를 적대 세력, 혹은 방해꾼에 준하는 경계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대체…….”

백작 저에 도착한 에스메랄다는 침실에서 꼼짝하지도 않고 있다. 그녀의 침실에 있는 창문을 통해 매일 몇 번이고 깃 색이 다른 전서구가 오고 가지만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내일은 황태자의 약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다. 애초에 그것을 빌미로 에스메랄다를 황도로 불러왔으니, 연회가 끝나면 또 돌아가겠지. 백작은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에스메랄다.”

그의 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기에 좌절했다고 여겼다. 영지의 뒷골목을 정리한 것도 현실의 절망을 잘못된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에스메랄다가 본인의 행적을 이토록 철저하게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눈과 귀를 피해 무언가 하고 있다고.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속내를 탐색해 볼 겸 그녀를 황도로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에스메랄다는 백작이 깔아 둔 판을 깨고 과격한 수단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가 형제들에게 검을 겨누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만약 이번 판에서 에스메랄다의 생각을 캐 보는 데 실패하고 영지로 돌려보내면? 지난 3년처럼 그녀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지 못해 주변을 뱅글뱅글 돌게 되겠지.

‘정말로 쌍둥이 오라버니들의 것도 만들어 오길 바라시나요?’

그때 물러서서 관찰하겠다는 결정이 틀렸던 걸까? 억지로라도 붙들어 두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어야 하나?

사형제가 3년 전 갑작스럽게 누이와 생이별을 한 것처럼,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딸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등을 지더니 어느새 거리를 벌리고 멀어졌다. 평생을 전장과 정치판에서 살아온 그라도 딸에게는 약해지는 아비였다. 자신의 부인이 목숨을 걸어 낳았고,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막내딸이라면 더더욱.

“어찌하면 네가 입을 열까…….”

에스메랄다가 그리하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의 사색도 길어졌다.

* * *

에스메랄다는 따로 연회용 드레스를 준비하지 않았다. 테노리엘 백작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 준비해 둔 드레스를 보내왔다. 보석 하나 달리지 않았지만 자수만으로도 화려한 드레스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히나의 도움으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한 치장을 하던 도중, 에스메랄다가 시리스에게 말했다. 그녀는 황도에 발을 들인 김에 지지부진한 일에 손을 써 두고 갈 생각이었다.

“시리스.”

“예, 아가씨.”

“실패하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경비대 소속의 기사들과 마주친다면 몸을 빼도 좋다. 전력에 손실이 오는 일만은 막아야지. 우리는 아직 다 자라나지 못했으니까.”

이미 오는 길에 시리스에게 말을 전해 두었다. 조용하게 제거해야 할 이들이 있다고.

귀족이었던 시리스는 건달들과 다르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다. 에스메랄다가 고용한 다른 용병들도 대부분은 그러했다. 그렇기에 무력적인 면에서는 그들의 손을 빌려야 할 때가 많다. 건달들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니까. 무력이란 곧 위험 분자, 황실은 마나라는 힘을 전적으로 통제한다. 귀족 가문과 연결점이 없는 평민들은 마나라는 힘을 얻을 수 없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올 것 없다. 오늘 자정, 동쪽 성문으로 가마.”

“……바로 떠나시려고요?”

“그래.”

“……알겠습니다.”

당황한 듯 보였지만 시리스는 곧 순응했다. 황도로 오면서 나눈 대화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터. 앞으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일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으리라.

시리스가 두 용병을 데리고 저택을 나섰을 무렵 에스메랄다의 치장이 끝났다. 그녀는 침실을 나서기 전에 화장대 위에 놓인 물건을 챙겨 들었다. 전서구들을 길들이고 그들의 귀환점이 되는 마도구,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 조련석이다.

전서구는 오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개가 한 쌍으로 만들어진다.

“가자.”

“예, 아가씨.”

조련석을 챙긴 에스메랄다가 히나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택의 1층 홀에는 이미 그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부친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히나는 남을 것이다. 연회가 끝나기 전 에스메랄다가 타고 떠날 마차를 가져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너희는 따로 타거라.”

“아버지, 저희도…….”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테노리엘 백작이 그녀와 단둘이 마차에 오르고자 했다는 것이다. 같이 타겠다는 쌍둥이 형제의 말을 흘려들은 백작이 에스메랄다와 단둘이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백작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 답안을 뽑아 보았다. 괜한 정보를 넘기지 않으려면 시작부터 밀리지 않고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출발하는 마차 속에서 백작이 나긋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영지엔 언제 돌아갈 생각이더냐?”

“연회가 끝나면 가야지요.”

단호한 답과 함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백작에게로 향했다.

“며칠 머물지 그러느냐. 네 오라비들이 너를 많이 그리워했다.”

“오라버니들께서 그리워했다 하여 제가 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3년 전의 대화처럼 이유를 꼬집는 비꼼이었다. 백작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가 아는 딸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한데도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비가 어떻게 딸을 알아보지 못할까. 그녀는 그저 변한 것이다. 단 한 순간에.

그러나 백작의 생각과 달리 에스메랄다는 한순간에 바뀐 게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해 갔던 것이지.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백작이 그녀가 자신의 딸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남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기에?”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백작은 에스메랄다와 대화를 하며 생각했다. 어린 소녀가 아니라 지독하리만치 교활한 정치꾼을 눈앞에 둔 것 같다고. 아무리 나이에 맞지 않은 현명함을 갖췄다 한들, 이게 12세라는 어린 소녀가 가질 수 있는 모습인가? 그런 모습은 자질이 아닌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백작의 녹안에 혼란이 깃들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보고 있던 에스메랄다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의 질문에 답하며 말을 돌리기보다 아예 대화의 주도권을 차지한 채 그의 질문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출정 명령이 내려온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에스메랄다는 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 중인 백작 역시 스스로가 할 대답을 이미 정해 둔 사람이었다.

“출정해야지.”

“그것이 부당하며, 죽음이 예정된 것이라 해도 말이지요.”

“그래, 그것이 기사다.”

에스메랄다의 차가운 녹안에 설핏 비참함이 서렸다. 기사로 길러진 후 위정자들을 상대하며 50여 년을 살아온 백작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을 붙이기 전에 에스메랄다가 선수를 쳤다.

“뜻대로 하세요. 제 눈에는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나, 그렇다 해도 그것이 아버지의 뜻일 테니.”

그가 죽음으로 지켜 낸 백성이 얼마나 비겁한 놈들인지는 에스메랄다가 알 바 아니다.

백작은 하려던 물음을 삼키고 그녀의 말을 경청해야만 했다. 그녀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가지 말아 달라 매달리지 않을 것이고, 부당함에 저항하자고 설득하지도 않을 거예요.”

백작과 마주하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흘렀다.

“아버지와 저는 보는 세상도, 그 세상 속에서 골라낸 우선순위조차도 다릅니다. 그렇기에 행동 역시 다를 수밖에 없지요.”

한때 그 모든 것이 같았던 순간이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다른 길을 가기로 한 이상 모두 옛말이 되어 버렸지만.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에스메랄다가 바라는 미래도, 목표도, 가족에게 가지는 감정도.

걸어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녀도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리라. 홀로 남겨져 힘겨워한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이미 백작은 3년 전의 오해를 거두고 새로이 그녀를 파악할 준비를 마쳤다. 아닌 척 숨기기엔 3년간의 행보가 백작에게 판단의 증거가 되었을 터. 되지도 않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을 들이느니, 빠르게 새로운 선택지에 맞춰 행동하는 게 나았다. 에스메랄다가 눈을 감으며 읊조렸다.

“저는 다른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쫓아가지 않을 거예요.”

“……에스메랄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도 저를 쫓아오지 마세요. 사용인들을 통해 제 행적을 캐 보시는 것 역시, 적당히 하시기를.”

마차가 황성에 들어섰다.

“그날 제가 손에 쥐여 드렸던 것들이 진실이 되는 일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주의하셔야 할 거예요.”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 * *

제국법은 미성년자가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황제는 폐지를, 반황실 세력은 폐지 반대를 외치며 대립하는 법규였지만 거의 유명무실한 법이기도 했다.

실제 남부 전선에서는 소년병, 심지어 소녀병까지 존재한다. 10세, 12세의 어린아이들이 무기를 닦고 기름을 끓이며 부상자의 수발을 든다. 살아야 하니까. 북상하는 마수를 저지하고 전선을 유지하여 그들의 고향, 그들의 터전을 보존해야 하니까. 실제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 아이들을 군사 시설에 팔아넘기는 부모도 있는데 어련할까.

인력난에 시달리는 남부군은 그게 불법임을 알면서도 아이들을 사들인다. 병사들의 잔수발을 들거나 막사와 병영을 청소하고, 대장간에서 무구 수리를 돕거나 마구간을 관리하는 등의 일을 그 아이들에게 시키며 훗날의 병사로 키우는 것이다.

일손은 언제나 부족하고, 수많은 아이들에게 계속 삯을 주면서 일을 시키기엔 남부군의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 그리고 헐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사들이지 않으면 결국 그 아이들이 버려져 굶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하고.

그 실상을 모르지 않으면서 다른 지역의 영주들은 병력 차출에 동의하지 않는다. 남부의 전선은 그 지역 영주들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게 전부다. 사병의 출정은 돈을 빨아먹는 하마이고, 영지민의 차출은 그들의 세수를 갉아먹는 기생충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유명무실한 법이라 해도 황제가 되어서 불법을 자행할 수는 없는 일. 그게 2황자 아르페시스가 성년식의 선물로 남부 전선 총사령관직을 받게 되는 이유였다. 생일 선물이 사지로 향해 빠져나올 수 없는 직책이라니. 끔찍하기도 하지.

겨울인 지금 2황자의 나이는 15세, 남아의 성년인 18세까지는 3년도 채 남지 않았다.

연회장의 한구석에서 서 있는 에스메랄다의의 시선이 저 멀리, 언뜻 보이는 남청색 머리카락을 좇았다.

생명의 준동이 가장 활발해서 그것을 창조한 신이 직접 내려와 세상을 구경한다고 여겨지는 달. 뜨거운 라의 달에 태어난 아르페시스. 본래라면 오늘 그녀는 그를 마주한다. 그 계기가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배가 찼으면 비우고 다시 먹으면 되니라!”

배가 부르다며 황제가 건네는 음식을 거절하는 창녀, 그녀에게 호탕하게 말하는 황제. 역겨운 웃음소리가 에스메랄다에게 닿았다.

빵 한 조각, 고기 한 점이 없어서 수천의 백성이 굶어 죽는데 황제라는 작자가 먹었던 것을 토하고 다시 먹으라 한다. 또한, 황실이 정식으로 개최한 연회에 본인이 끼고 다니는 창녀까지 대동해 배필인 황후를 욕보이고 있다.

절개와 신의를 실천하며 신하들을 이끌어야 하는 황제가 그 꼴이니 밑의 신하들도 거리낄 것 없이 정부와 놀아나고 사생아를 버린다. 그 사생아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범죄를 저지르고, 그 범죄의 피해자는 그들을 용서하는 선보다 복수하고 원망하는 악을 택한다.

끊임없는 악순환이 지배하고 있는 제국은 이미 엉망이다. 그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황제의 말을 들은 아르페시스도 반응했다.

붉은 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는 소년. 그는 거부권 없이 전선으로 가야만 하는 입장이다. 가지 않으면 그 전에 황제에게 불필요한 장기 말 판정을 받고 죽을 테니까.

사생아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에서 황제가 그의 나이까지 조작해 가며 족보에 올린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아들을 낳은 하녀의 신분까지 세탁해 황비에 책봉, 그 후에 황자가 태어났다고 공표했기에 그는 서류상으로 적자다. 황실에서는 그 소문을 단속하지만 이미 퍼진 얘기를 어찌 주워 담겠나? 2황자가 사생아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안다.

아르페시스가 사생아들 중 유일하게 황실 족보에 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십수 명에 달하는 후손 중 겨우 두 명의 아들을 본 셈이다.

물론 다수의 귀족들이야 진실을 알지만 평민들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그의 생일 연회는 매년 화려하게 열리고, 몇 해 전 처음으로 마나 유형화에 성공했을 때는 별장을 선물 받기까지 했으니까.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사비도 황태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되어 매달 그에게 지급된다. 황제는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서 아르페시스를 적자로 대우하고 있었다. 후에 그가 전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명예를 황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러니 정당한 황족 대우를 받으며 자라는 아르페시스의 소식을 접하는 대부분의 평민들은 그가 정말 적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황제는 평민들의 시야 하나하나까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황제를 단순한 폭군이라고 치부할 수 없지. 그는 지독하리만치 교활하고 치밀한, 그리하여 유능하기까지 한 자다.

에스메랄다가 이러한 배경을 가진 아르페시스에게 접근한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전선으로 향해야만 하는 그가, 황실의 의도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곳의 영웅들을 보호해 주었으면 해서.

그녀가 과거를 곱씹는 사이 아르페시스는 피가 맺힌 손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려 연회장을 나가고 있었다.

오늘 10년이 넘는 인연이 시작되어야 하건만 그녀는 그 인연을 시작하지 않았다. 관료 시험 역시 치르지 않을 생각이다. 음지에서의 활동에 주력해도 시간은 부족할 테니까. 지금의 그녀는 눈을 감는 것으로 그 미래에서 등을 돌렸다. 고작 멀찍이서 그를 보았을 뿐인데도 심장이 울렁거렸다.

불길 속에서 타오르던 그 순간 들었던 환청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불가능한 것을 알고, 그럴 일이 없다는 것 역시 알면서.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련을 품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감정을 쫓아낼 수 있을까?

“어차피 그때의 그와는 달라.”

에스메랄다는 지금의 아르페시스가 자신이 마음에 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들먹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워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떨쳐 내고 싶었다.

“응? 뭐라고?”

버릇이 되어 버린 중얼거림에 페르멘이 물어 왔지만 답을 얻어 가지는 못했다.

그녀가 황실에 반감을 가진 인사들을 포섭하면서도 지금의 아르페시스에게 접근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진실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기에. 그는 본인처럼 선택지 없이 사지로 쫓겨난 병사들을 동정하고, 무고하게 죽어 나간 백성들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짊어진 짐을 나눠 들고 10년이 넘게 전장에서 살아남아 남부를 지켜 낼 영웅.

그는 황실에 반감을 품었다 하여 에스메랄다의 계획에 동참할 사람이 아니었다. 따지자면 그녀의 부친이나 형제들 같은 유형의 인사였다. 세상의 부당함에 반항하기 위해 희생물을 고르기보다, 눈앞에 놓인 무고한 백성 한 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 그는 에스메랄다와 함께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마지막 만남에서 에스메랄다와 아르페시스가 언쟁을 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에스메랄다는 미래를 위해서도 그가 황위를 반정했으면 했고, 그는 남부의 백성들을 버리고 내전을 행하는 것에 반대했다.

내전을 일으키려면 중앙군을 상대할 만한 병력이 필요하다. 사병으로 중앙군 7만을 상대하려면 수십 명의 귀족이 응해야 한다. 하지만 패전 확률이 높은 반정에 과연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동참할까? 불확실성에 걸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목인데. 고로 정규군으로서 몇만의 규모를 이루고 있는 남부군을 동원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내전을 위해 그들을 황도로 돌리게 되면 그동안 비어 버린 남부는? 모든 것이 성공으로 끝났을 때, 황제가 되어 돌아봐야 할 국정은?

그러한 문제 때문에 아르페시스는 반정에 반대했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의견이 갈렸다.

에스메랄다는 등을 돌려 아르페시스가 나간 방향과 반대로 걸었다. 앞으로 그와 그녀가 걷는 길의 방향은 지금과 같을 것이다. 서로가 반대로.

에스메랄다는 치솟는 그리움을 꾹꾹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단순히 테노리엘 백작 때문에 억지로 참석한 자리가 아니다.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적한 곳, 연회장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복도. 에스메랄다는 홀을 벗어난 그곳에서 원하는 사람을 기다렸다. 아직 연회가 한창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리디, 춥지는 않니?”

“외투를 가져올까?”

“답답했어? 근처에 후원이 있는데, 산책하러 갈래?”

“마실 건? 음료라도 가져다줄까?”

에스메랄다는 두 형제의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을 곱씹었다.

연회장을 벗어난 아르페시스를 쫓아가 향후 전선으로 향할 그를 지원하겠다고 맹세했던 에스메랄다는 한 사람을 더 만났다. 아니, 만났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대화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목격한 것에 가까웠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외무부 관료, 바 아그라 테몬 루그레디안. 테몬 후작가의 차남. 훗날 테몬 후작이 될 사람이자, 반정을 결심한 이후 그녀의 가장 큰 우호 세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비와 형을 죽이는 패륜까지 감수하며 작위를 승계했다. 오로지 황실의 폭정을 막고 제국을 살려 보기 위해. 핏줄들이 황제가 하는 짓을 답습하던 이들이었기에 죄책감 한 톨 들지 않았다고 말했던 이였다.

멀리서 욕설이 들려온다. 에렘 제국의 동쪽에 있는 실테르 왕국의 언어가.

올해 31세가 된 루그레디안은 외무부 소속의 중앙 귀족으로 3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게 아니면 언어가 다른 타국 인사들과 교류를 할 수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

에스메랄다는 복도의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그를 만나러 온 이유? 아무리 음지에서의 세력이 커진다 한들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포섭한 용병들 외에도 쓸 만한 이들을 걸러 마나 운용을 가르치고 있지만, 평생을 수련해 온 정식 기사들과 대적하기엔 부족하다.

세력은 될지언정 전력은 되지 못하니 양지에서의 전력을 만들어 둬야 한다. 남부 출신의 영주들 중 중앙으로 진출한 이들을 포섭해 줄 대리인도 필요하고. 또한, 현재 남부군에서 이탈해 조직되고 있는 반군이 규합되었을 때 숨어들 땅도 있어야 한다.

복도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루그레디안이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집어 던지자 시끄러운 파열음이 생겨났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오멘과 페르멘이 곧장 반응했다.

“리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래?”

“술에 취한 사람은 피하는 게 좋아, 응?”

“차라리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페르멘의 뒤를 응시했다. 그사이 루그레디안은 더 가까워져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외국어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회화나 중요한 단어, 그리고 각종 군사 용어에는 익숙했다. 남부의 전선은 에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제국의 서쪽과 동쪽에 국경을 맞댄 나라에도 전선이 있다. 서쪽의 아비체룬은 교류가 없는 상황이지만 동쪽의 실테르와 제국은 교류를 지속했다. 그들과 협력하기 위해 그녀는 틈틈이 외국어를 배워 왔다.

「패잔병이 따로 없군요.」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는 쌍둥이와, 그들을 지나쳐 가기 직전 우뚝 멈추어 선 루그레디안.

「겁에 질리신 겁니까?」

“뭐?”

“리디, 술 취한 사람한테 그러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던 길 가시…….”

쌍둥이가 다급히 에스메랄다를 말렸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 속에서 현실의 벽을 굳건히 쌓아 올린 이들과 그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결국 좌절하는 것. 그게 전쟁에서 패배한 패잔병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요?」

루그레디안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눈앞에 멈추어 선 그는 황실의 치세에 반발하고 제국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가 말한 대로 현실의 벽에 좌절한 상태였다. 그가 싫어하는 황제의 권력은 적이라 할지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하니까.

황제는 중앙군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남부에도 겨우 5년에 한 번, 1천의 기사를 지원하는 게 전부다. 그 결과 7만이라는 대군이 중부를 수호하고 있다. 그중 2만이 황도와 그 주변의 소도시에 흩어져 주둔하기에 내전을 일으켜도 승기를 잡는 건 불가능했다.

반나절, 황도로 2만이 집결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중부 전역의 7만이 집결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고작 나흘이다. 황성을 점령한다 해도 어중간한 병력으로는 수성을 할 수조차 없는 규모다. 에스메랄다가 정계에 진출한 초기에 반정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마지막 1년은… 불가능하더라도 해야만 했던 시기였기에 이를 악물었던 것뿐이다. 결국은 그녀의 생각대로 불가능으로 끝이 났고.

「실테르어를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네가 이상과 현실에 대해 무엇을 알기에? 절망을 해 본 적이 있기는 하느냐?」

「잘하지 못해요. 그저 말을 외워 온 것뿐이니까요.」

「뭐?」

「대화는 듣는 귀가 없을 때 제대로 하게 될 거예요. 지금은 아쉽게도 내가 할 말만 전해야겠죠.」

그녀와 루그레디안 사이에 끼어들어 막아서고 있는 오멘과 페르멘. 에스메랄다는 그들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남부에서 일어난 참사는 안타까운 일이었죠.」

술에 취해 초점이 흐려졌던 루그레디안의 눈동자가 악귀의 앞에서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치료제가 물로 바뀌었다는 건 알고 있나요?」

고위 귀족들의 일부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다. 독자적인 정보 세력을 구축하고 있으니 황실이 눈을 가려도 귀로 들은 것이다. 그 일을 벌인 주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 에스메랄다의 눈앞에 서 있는 루그레디안도 그런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고위 귀족이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고, 에스메랄다와 마주한 주홍색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느끼는 그 절망을 넘기 위해 악귀가 될 준비가 끝났어요.」

「네가 지금 무슨…….」

「당신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는 준비된 사람이다. 친부와 형제를 제 손으로 죽일 정도로. 단 한 번이라도, 그럴 기회가 온다면 심장에 담아 두었던 칼날을 꺼내 들 사람. 그는 무고한 피를 흘려서라도 썩은 살을 잘라 내고자 할 것이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테노리엘 백작과 그녀가 처음부터 루그레디안과 손을 잡지 않은 이유였다. 테노리엘은 무고한 희생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녀가 루그레디안과 함께한 건 반정을 결심한 마지막 1년 동안이다.

에스메랄다의 질문에 루그레디안이 침묵하는 동안, 그녀는 치마 주름 속에 감추어진 주머니 속에 숨겨 온 것을 꺼냈다. 방을 나설 때 챙겨 온 조련석이었다. 곧이어 이음부가 딱, 소리를 내며 두 개로 쪼개졌다.

「연락을 기다릴게요.」

「……원하는 게 있다면 네가 해야지.」

간단한 문장이었고,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더 이상 외워 온 말이 없다는 것이겠지. 에스메랄다는 에렘어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끝난다면 그뿐인 것이겠지요. 선택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니까. 하지만 당신의 선택에 그늘 속의 격변이 영향을 미치길 바라요.”

그 말을 끝으로 에스메랄다는 한 걸음 물러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조련석 한 짝이 바닥에 떨어졌다. 또로록 맑은 소리를 내며. 오멘과 페르멘이 그것을 보고 눈을 끔뻑거렸다. 주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 의문을 느끼면서.

하지만 그것을 줍든, 버리고 가든 그건 루그레디안에게 던져진 선택지였다. 이만큼 언질을 주었음에도 좌절한 채 남아 있다면 이번엔 그와 연이 닿지 않는 것이리라.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테몬 영식. 테노리엘의 에스메랄다가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인상적인 대화였습니다, 테노리엘 영애.”

“오늘의 무례를 정식으로 사과드릴 날이 오기를 바라며, 안녕히.”

“안녕히.”

에스메랄다는 두 형제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고 홀로 복도에 남겨진 루그레디안은 침묵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조련석을 집었는지, 아니면 그저 그것을 뒤로하고 떠났는지는 모른다. 그 의문의 답은 훗날에 알게 될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연회장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리, 리디.”

“외국어는 언제 배웠어?”

“유창하더라. 실테르어로 대화한 거야?”

“멋졌다고! 테몬 영식과 실테르어로 대화를 하고!”

“나중에 형들한테도 말해 줘야겠다. 엄청 자랑스러워할 텐데…….”

저들끼리의 대화를 하듯 말을 주고받던 오멘과 페르멘이 말꼬리를 흐렸다. 누이의 노골적인 무시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지금의 일방적인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에스메랄다로서는 그런 그들을 계속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평정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루그레디안을 만난 복도를 빠져나와 연회가 열리는 궁의 입구로 나가는 복도에 올랐을 때.

“앗……!”

앞서 걷던 에스메랄다는 복도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이와 부딪쳤다.

“리디!”

속절없이 뒤로 넘어가려던 그녀를 붙잡아 준 것은 오멘이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이보십시오! 앞을 제대로 보고 다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호들갑을 떠는 오멘. 오멘에게 에스메랄다를 빼앗긴 채 원흉을 찾으며 언성을 높이려던 페르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확인한 에스메랄다.

“아, 미안하…….”

심지어 에스메랄다와 부딪친 아르페시스까지.

네 사람은 모두 각자만의 이유로 인해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중 에스메랄다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르페시스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멀찍이서 바라본 것만으로도 그녀를 복잡하게 만든 사람인데, 직접 마주할 이유가 어디 있다고.

하지만 지금 에스메랄다는 아르페시스를 마주했고, 너무나도 익숙한 그의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꾸역꾸역 짓눌러 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움, 원망, 그에게 받았던 상처, 존경심과 경외심, 홀로 잘라 내었던 사랑. 그리고…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지독한 것까지. 심장이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노리엘의 오멘이 인사 올립니다.”

“테노리엘의 페르멘이 인사 올립니다.”

에스메랄다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어 버렸다. 쌍둥이들은 인사를 올린 후 슬금슬금 움직이며 그녀를 가리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와 함께 굳어 있던 아르페시스가 움직인 건, 정말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약혼 축하드립니다, 형님.”

두 사람은 눈동자로는 서로를 향한 혐오감을, 혀로는 다정한 말을 주고받았다. 아르페시스는 미친놈을 향한 혐오를, 페라노스는 반쪽짜리에 대한 혐오를.

황태자 카 록트 에렘 페라노스, 그가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단순한 미친놈이었으면 일이 조금 달랐을까?

그는 최소한의 수를 둘 줄 안다. 일평생을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덕에 안목과 눈치도 있다. 계산할 줄 알고 수를 읽을 수 있으며 계략을 세울 줄 안다. 또한 훗날을 위한 최소한의 참을성까지 갖추었다. 그래서 더 골치가 아픈 미친놈이다.

황태자는 지금 미래의 본인이 연기하게 될 역할에 충실한 이입을 한 상태였다. 아끼는 아우를 전선에서 잃은 후 비통해하는 황태자 역할 말이다. 황족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전사했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내세울 훌륭한 선전거리고, 그 전사자와 사이가 좋았던 황태자는 알게 모르게 지지받을 것이다. 사소한 이득이지만 황권을 다지기 위해 필요하다면 못 할 것도 없는 일.

“고맙구나, 아르페시스. 너도 어서 배필을 찾아야지.”

아르페시스는 그의 약혼녀가 된 솔루베르 공작가의 영애를 보며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저 여자는 혼인 후 본인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알고 있을까? 어쩌면 알고서도 황후 자리 때문에 묵인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모조리 미친놈들. 아르페시스의 속마음과 달리 혀는 순종적인 말을 내뱉었다.

“형님처럼 훌륭해지면 그때 천천히 찾아보겠습니다.”

“나처럼? 이제 보니 욕심이 많구나, 하하하하.”

이것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아르페시스는 친한 척, 아끼는 척하는 페라노스와 몇 마디를 더 나눈 후에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연회장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것. 그게 오늘 아르페시스가 할 일이었다. 형의 약혼을 축하하는 연회인데 얼굴 도장만 찍고 돌아가면 버릇이 없느니, 감사한 걸 모른다느니 하며 헐뜯길 것이다. 또 지나치게 오래 있으면 주제도 모른다고 수군거리겠지.

“후우…….”

아르페시스는 자신을 둘러싼 미친놈들이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낳아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의 주변을 둘러싼 채 쑥덕거리며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에게 있어 혈육이란 그가 태어나 사내아이라는 게 확실해지자마자 이용할 생각뿐인 이들이었다.

실제로 아르페시스는 황실에 철저히 이용당할 것이다.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도 그의 이름은 황태자를 위해 쓰일 예정이다. 매년 그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식에 참석해 죽은 아우를 잊지 못하는 비통한 황제 노릇을 해 대겠지.

속을 휘감는 역겨움에 이를 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쉽게는 죽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그의 탄생이 공표된 지 사흘 만에 산고라 속여 모친을 죽인 황제와 그를 천하다 여기면서도 이용할 생각이 가득한 황태자까지. 그들의 뜻대로 쉽게 죽어 주지 않을 것이다.

“배가 찼으면 비우고 다시 먹으면 되느니라. 하하하하!”

그가 죽음을 향한 반항을 다짐하던 그때, 기가 막힌 황제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지금 저 창녀가 토해 낸 것이라도 먹겠다고 달려들 이들이 거리에 한가득이다. 그 정도로 굶주림에 죽어 나가는 이들이 천지에 널렸는데 토하고 다시 먹으라고? 황제가, 아니 인간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미친놈. 아르페시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세상에 정말 신이 있다면 왜 저들을 벌하지 않지?

신의 존재를 믿고 신앙심을 가진 에스메랄다와 달리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존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신에게 의존하며 살려 달라고 매달릴 생각도 없었다.

정말로 배를 비우고 황제가 내민 음식을 먹는 창녀, 그녀 주변에서 아양을 떠는 귀부인들을 보던 아르페시스는 그들을 피해 몸을 돌렸다. 그가 말아 쥔 손에는 이미 붉은 핏방울이 고여 있었다. 예정보다는 이르지만 이 꼴을 들키느니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게 이로울 것이다.

연회장을 나서서 후원으로 몸을 빼낸 후에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미친놈들.”

그 외의 어떤 단어가 저들에게 어울릴까. 오물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기분이었다. 역겨움을 이겨 내기 위해 숨을 고르는 동안 꽤 긴 시간이 지났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체온을 식히고, 손을 얼음장처럼 차게 만들었다. 아르페시스가 사색을 마친 것은 인기척 때문이었다.

“누구냐!”

기분이 좋지 않으니 절로 날 선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하지만 후원과 연결된 복도를 지나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을 때는 말문이 막혔다. 짧게 다듬어진 금발,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색을 내고 있는 녹안. 성장이 끝나 청년이라 불려야 마땅한 이가 눈썹을 들썩이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으로 오던 게 아니라, 후원을 향해 한쪽 벽이 트여 있는 복도를 걸어가던 것뿐인 모양이다. 잠시 아르페시스를 주시하던 남자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금발과 녹안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희귀한 색은 아니다. 귀족들 틈에선 스물에 하나 정도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르페시스는 이제껏 귀족들을 보면서 악몽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장 그의 창술 교관도 금발에 녹안이건만, 그를 보며 악몽에 대해 떠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청년을 눈으로 확인하는 그 순간, 아르페시스는 악몽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몇 년이 넘도록 악몽 속에서 보아 왔던 그 색과 닮았다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테노리엘의 아레스가 인사 올립니다.”

“아… 테노리엘…….”

미친놈들의 터전에서 몇 되지 않는 정상인. 아르페시스가 테노리엘에 대해 가지는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테노리엘 일가 중 그가 만나 본 인물은 가주인 백작뿐이다. 그것도 연회에서 몇 번,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것도 아니고 인사를 주고받은 정도. 제대로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들리는 것 외에 개인적으로 그들에 대해 곱씹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뭐지? 아르페시는 울렁거리는 심장이 있는 가슴께를 더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무슨 말인가 싶어 자신의 가슴을 더듬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아레스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제야 아르페시스는 오른손에 피가 나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심장은 왼쪽에 있고 그는 오른손으로 그곳을 만졌다. 그 결과는? 연미복에 피가 묻었다.

“아… 고맙다.”

“영광입니다.”

급한 대로 아레스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든 아르페시스는 곧장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레스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그 색과 닮았다. 그런 느낌이 든다. 얼굴도, 이름도, 체형이나 성별도 알지 못하지만, 화마 속에서 사라지던 사람의 색은 아레스의 것과 닮았다. 겨우 악몽 속의 색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째서 이토록 동요하는 것일까?

혼란스러워하는 아르페시스를 두고 아레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례합니다만.”

“어?”

딴생각을 하던 그가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혹시 요만한 여자아이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자신의 허리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아레스를 확인한 순간,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왜? 왜? 왜? 왜 이러지?

“저와 많이 닮았습니다.”

“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르페시스로서는 당황한 상태로 도리질 치는 것이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러시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럼, 저는 이만.”

아레스가 후원을 떠난 직후 아르페시스의 몸이 확 달아올랐다. 달빛 아래에서도 얼굴에 어린 홍조가 보일 정도로.

“뭐… 이게 무슨…….”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달음박질을 한 것처럼 뛰어 대는 심장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굴이 한순간 창백해졌다. 방금 마주했던 그는… 그래, 그는 그다! 그라고!

아르페시스가 가슴께를 움켜쥐며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럴 여유가 없어 누굴 만난다거나 품은 적은 없지만, 그는 여인이 좋다. 사내를 보고 성적 충동이 일어났던 적은 결단코 없었다. 단 한 번도!

한데 지금 이 격한 심장 박동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후원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려 뜀박질을 시작한 아르페시스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악몽, 악몽 때문이다. 내, 내가 그럴 리가 없다.”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던 악몽이 아르페시스에게 성 정체성의 혼란을 선물했다. 그런 선물을 단 한 번도 바라 본 적이 없던 그는 서둘러 후원을 벗어나는 데 집중했다. 정원이 아니라 후원으로 들어왔었기에 연회가 열리는 궁을 빠져나가려면 다시 건물 내부의 복도를 타고 나가야 한다.

복도에 들어선 후에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용인들 때문에 뜀박질을 멈춰야 했다. 품위가 없느니, 천한 것은 가르쳐도 소용이 없느니, 같은 수군거림을 듣느니 조금 조심하는 게 나았다.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지만 주변의 기척까지 빠짐없이 살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복도가 꺾어지는 곳에서 누군가와 부딪친 이유였다.

팍, 하는 단조로운 마찰 소리가 들린 후 이어지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아르페시스는 자신이 누군가와 부딪쳤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앗……!”

“리디!”

충돌이 있었다고 보기엔 몸에 가해지는 무게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이보십시오! 앞을 제대로 보고 다니……”

아르페시스는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가슴께쯤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소녀에게.

“아, 미안하…….”

하지만 그는 입을 열자마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하며 사과를 끝맺지 못했다. 아르페시스는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악몽 속에서 화마와 함께 사라지던 그 색.

조금 전 보았던 아레스나, 눈앞에 있는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확신, 의심 한 자락 찾아볼 수 없는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이름, 성별, 나이, 체격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악몽 속의 그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다. 그 확신이 내려진 직후 그의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잊고 멈추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테노리엘의 오멘이 인사 올립니다.”

“테노리엘의 페르멘이 인사 올립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오멘과 페르멘이었다. 두 사람은 에스메랄다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아르페시스의 행동에 자신들의 동생을 슬쩍 가렸다.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쌍둥이의 인사를 받는 대신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뻗었다.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격동하기 시작했다.

아르페시스는 쌍둥이 사이를 파고들었지만 곧장 제지당했다. 당황한 오멘과 페르멘이 반사적으로 아르페시스를 붙들며 막아선 것이다. 그가 뻗은 손은 페르멘에게 붙잡힌 채 목표물에 닿기 직전 허공을 배회했고, 오멘에게는 허리와 어깨가 붙들렸다.

그 움직임 직후 창백하게 질린 금발의 소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일렁거렸다. 후두득, 하고 떨어져 내린 건 눈물이었다.

“아……?”

아르페시스가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제 얼굴을 더듬었다. 눈물?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어디에 있다고?

그가 당황하는 사이 페르멘과 오멘이 아르페시스를 뒤로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난 아르페시스의 호흡은 이미 뜀박질을 한 사람의 것처럼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날 때마다 느끼던 아득함과 공허함과 상실감이 그를 다시 찾아왔고, 동시에 허공에 퍼진 연기가 사라지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그를 가득 채우는 충만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전율이 그를 뒤흔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아르페시스의 시선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소녀에게 닿았다. 그의 어깻죽지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소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소녀를 감싸듯 서 있는 쌍둥이에게로 흘렀다.

분명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조금 전 보았던 아레스는 물론,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인 오멘과 페르멘. 그들과 똑 닮은 색채는 물론, 직접 이름을 거론하며 소개한 쌍둥이와 함께 있었으니 저 소녀도 분명…….

“테노리엘…….”

아르페시스가 그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 그의 앞에 있던 소녀는 다급히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아……?”

“어?”

“어어, 리디!”

상식적으로 황족의 앞에서 인사조차 올리지 않고 떠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족 모욕죄를 물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르페시스가 신경 쓰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잠깐……!”

아르페시스는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쫓아가려고 했다. 오멘과 페르멘이 그를 막아서며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면, 분명 따라가 붙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품 안에 가두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두 번 다시 자신을 떠날 수 없게.

그런 생각은 아르페시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쌍둥이에게 양쪽 팔을 하나씩 잡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대체 왜 그녀를 쫓아가고, 그녀를 품 안에 가두고 싶었던 거지?

오늘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 소녀가 그를 떠난 적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대체 왜 ‘두 번 다시 떠나지 못하게 만들겠다.’ 같은 생각을 당연하게 했느냔 말이다. 스스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혼란을 느끼며 굳었다.

“죄… 송합니다. 누이가 아직 어려 전하의 앞에서 긴장을 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돌아가 다독일 테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르페시스가 굳어 버리자 서둘러 그를 놓고 물러난 쌍둥이가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려도 아르페시스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금슬금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먼저 떠난 에스메랄다를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조했으니까.

아르페시스는 쌍둥이가 떠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그는 몸의 떨림이 진정될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에스메랄다는 연회가 열리는 궁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뛰고 있었다. 낮은 굽의 구두가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를 그녀의 뒤에 남겼다.

“리디!”

그녀가 궁을 빠져나왔을 무렵 페르멘의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진즉에 도착해 있던 마차 위로 뛰어들듯 올라탔다.

“아가씨?”

마차를 가지고 도착해 있던 히나가 그녀를 불렀다.

“출발해.”

“예?”

“출발해!”

창백하게 질린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비명과 닮은 목소리가 튀어 나가자 히나가 말을 재촉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디!”

“잠시만!”

뒤따라 나왔던 오멘과 페르멘의 부름이 멀어졌다. 귀에 닿는 소리라고는 말의 발굽 소리와 마차의 도로를 때리며 나는 마찰음이 전부였다. 그제야 에스메랄다는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왜 도망쳤지……? 스스로의 행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혼란이 시작되었다. 괜한 트집을 잡지 않기 위해서라도 예법대로 인사를 한 후 조용히 물러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도망쳤다. 그 외의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왜……?”

무엇이 무서워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스스로의 행동에 한 번. 직전에 보았던 아르페시스의 눈물 때문에 또 한 번.

혼란에 휩싸여 덜덜 떠는 와중에도 시야에 아른거리는 잔상이 그녀를 괴롭혔다. 10년이 넘게 아르페시스를 알고 지냈지만, 그가 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왜… 에스메랄다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앓는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고 해서 계속 거기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참이나 격한 호흡을 토해 낸 그녀는 마차가 황성을 빠져나왔을 무렵 의식적으로 호흡을 길게 늘이기 시작했다.

당황을 밀어내고 억지로나마 이성을 불러온 에스메랄다는 조금 전 보았던 것을 곱씹었다. 아르페시스가 보인 행동들을 하나하나 꼬집어 이유를 찾았다.

“이상한 반응…….”

연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만난 사람을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시간대에서 아르페시스를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원래라면 오늘 그에게 해야 했던 말들 중 그 어떤 것도 건네지 않았다.

실제로 사라진 시간 속에서 에스메랄다의 주도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만남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아르페시스는 갑자기 본인에게 접근한 그녀를 경계했었고, 그 때문에 에스메랄다는 용건을 전한 후 먼저 물러나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을 택했었다.

분명 이 시기의 그는 훗날 살아남는 것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 상태일 터. 복도에서 갑자기 마주친 사람을 보고 다급히 손을 뻗는 것도 모자라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다.

지금의 아르페시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건, 다시 말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앙다문 잇새 사이로 에스메랄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설마…….”

단 한 번도 가정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그녀의 행보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일이 사라진 시간과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건 그녀처럼 기억을 가진 누군가가 예정된 미래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아르페시스가 그녀처럼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에스메랄다가 단 한 번도 상정해 본 적 없던 가정이다.

만약 다른 이들이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과거로 돌아온 날 황도 시가지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를 가리키며 마녀가 되살아났다고 수군거렸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기에 그녀는 기억을 가진 게 자신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외가 튀어나온 것이다.

아르페시스가 자신처럼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최근 남부에서 일어난 일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을 터.

“만약 내 행적이 변한 것에 의문을 느끼고, 주시하는 상태라면…….”

악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가정은 참담했다.

만약 아르페시스가 정말 기억을 가진 채 최근 일어난 남부 폭동 사태에 의문을 품고 있다면 최우선적인 의심의 대상은 행적 자체가 바뀌어 버린 그녀였다. 에스메랄다가 알던 것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아르페시스를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죽던 순간까지 살아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는 것이 죽음을 기준으로 시작된다면, 그는 마지막 순간 그녀가 무엇을 하다 죽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에스메랄다가 평생을 보냈던 황도가 아닌 영지에 있고, 더욱이 테노리엘 백작으로부터 영주권까지 위임받은 상태라면?

에스메랄다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아르페시스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변한 그녀의 행보를 보고 반정 준비를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 가정이 진실이라면 왜 그녀를 방해하지 않나?

“아직… 남부군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어떻게 보면 타당성이 있는 추측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오늘 보인 눈물을 설명할 수 없다.

‘에스메랄다!’

사라진 시간을 넘어 꿈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환청이 기어코 현실까지 그녀를 쫓아왔다. 마지막 순간 정말 그가 황도에 왔나? 그녀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기에 동정하고 있는 건가? 해서 이번에는 그녀와 같은 길을 걸어 주려는 걸까?

에스메랄다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깊은 환멸을 느꼈다.

“또 이런 미련이라니…….”

그녀의 행보를 납득하지 않고 연락을 끊어 버린 그다. 정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죽는 것을 보았다 하여 대의를 포기할 만큼 무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그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당장 에스메랄다를 방해하지 않는 건 그럴 기회도, 힘도 없기 때문이겠지. 그녀에게 동조하기 위해서는 절대 아니다. 각양각색의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 에스메랄다의 머릿속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아르페시스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예외를 인정하고 나면, 타인에게도 그 예외가 적용될 수 있다. 그녀가 복수의 대상으로 지정한 이들 중에도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고작 예외 하나를 가정했을 뿐인데도 지금까지 그녀가 해 온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어그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 그려진다.

에스메랄다가 혼란스러워하는 중에도 시간은 순조롭게 흘렀다. 예정된 시간에 동쪽 성문에서 합류한 시리스가 히나와 함께 마부석에 올랐다.

에스메랄다는 당장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을 미루고 보고부터 받았다. 그녀가 바랐던 대로, 황도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던 뒷골목 세력의 주요 인사들은 무사히 제거됐다. 기존 세력이 너무 크고 견고해 에스메랄다가 쉽사리 손에 넣지 못하던 황도의 뒷골목.

이제 머리가 없어졌으니 아랫것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할 것이다. 세력은 쪼개지고 크기가 줄어든 만큼 약해지겠지. 혼란은 틈을 파고들기에 아주 유용한 도구다. 에스메랄다가 동부에서 목표물과 접촉하는 동안 뷔비르가 그녀의 지시대로 일을 진행시킬 것이다.

서열 놀이를 하는 놈들에게 뒷돈을 찔러 주고 이간질을 하는 일을 말이다. 그럼 영지로 귀환할 즘엔 황도를 차근차근 삼킬 수 있겠지. 지금은 무너지길 기다릴 때였다.

이후 계획을 한 번 더 정리한 에스메랄다가 출발을 명했다. 황도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다른 용병들과 합류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밤새 이동을 해야 한다. 히나가 챙겨 온 한 무더기의 조련석이 마차 한쪽에 고이 놓여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이나 이어 간 에스메랄다가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상황을 가정했기 때문인지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르페시스의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한 건 몇십 분 전의 일이건만, 지금까지도 그 색은 잔상처럼 그녀의 앞에 남아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어떤 가정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결론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 아르페시스를 위해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에스메랄다가 새로운 시간 위에서 선택한 건 미래를 만들기 위한 사랑 따위가 아니라 과거에 얽매인 복수였으니까.

그와의 인연은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어떤 상태로 마주하든 상관없다. 정말로 만약 그녀가 조금 전 해 본 가정이 모두 사실이고, 그것이 모두 현실이 된다 해도……. 에스메랄다는 한차례 숨을 들이쉰 후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전우가 아닌, 적이 되는 것뿐이지.”

그가 기억을 가진 채 그녀를 의심하고 방해한다면 적대 세력으로서 대우할 뿐이다. 차라리 일찍이 만나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던 그녀의 생각은 이질적인 소리 때문에 끊어졌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이 야심한 시간에 누가 이토록 다급히 이동하는 중일까.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지라 시리스가 마부석을 떠나 말로 옮겨 탔다.

밤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 위험하다. 그렇기에 보통은 해가 지면 이동을 하는 대신 야영을 한다.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급한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저 말발굽 소리를 무시하는 것보단 경계하는 게 좋으리라. 평범하진 않을 테니.

지금 야밤을 타 이동하고 있는 에스메랄다 일행을 보라, 무려 황실에 반기를 들기 위해 뭉친 이들이지 않은가.

마차가 길의 한쪽으로 붙으며 속도를 줄였다. 지나갈 것이라면 바로 가라는 의도를 담아. 하지만 소리의 간격은 점점 넓어졌다. 속도를 줄이고 있는 것이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어 섰고 시리스와 두 명의 용병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창을 가린 커튼을 살짝 걷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 궁금해하면서.

그리 오래지 않아 말발굽 소리를 몰고 온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에스메랄다와 달리 시야의 제한이 없었던 시리스가 상대방을 알아본 것이다. 창문 밖에서 불청객의 신원을 알려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노리엘 페드로 경입니다.”

에스메랄다의 미간을 일그러트리는 소식이었다.

“다시 이동한다.”

“……예, 아가씨. 다시 출발해.”

마차가 다시 속도를 올렸고, 용병들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마차 옆에 바짝 붙었다. 후방을 주시하면서.

“멈춰라!”

페드로의 경고가 있었지만 에스메랄다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또한, 뜻을 함께하며 그들을 불러 모은 에스메랄다의 명령이 없었으니 용병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강제로 멈춰 서야 했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연미복 그대로인 페드로가 수풀을 뛰어 넘어가며 마차를 앞질렀으니까. 마차 앞을 막아선 페드로는 사나운 기색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들이 연회장에 차고 들어가는 예장용 검이라도 마나가 덮이면 누군가를 죽이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쉽다. 그 때문에 마차가 크게 요동치며 급정거를 했다.

“멈추라고 했다.”

사납게 일렁이는 목소리에 시리스가 곧장 응대하듯 검에 마나를 둘렀다. 그걸 본 다른 용병들도 같은 방법으로 응수했다. 페드로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용병이라니. 시리스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마차 안에서 페드로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눈은 살짝 커졌다. 그녀는 페드로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낯섦도 잠시, 에스메랄다는 곧 조소와 함께 납득했다. 그에게도 화라는 감정이 있을 테니, 그녀가 모르는 모습이 있다 하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에스메랄다도 가족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그녀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었던 것뿐이리라.

“마차에 누가 타고 있지?”

마차 앞을 막아서고 있던 페드로가 말을 뒤로 물리며 물었다. 싸울 의사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리스는 그것을 주시하기만 할 뿐 답을 하지는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황실을 무너뜨리자며 손을 내밀었을 때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다. 무조건적인 복종. 에스메랄다는 그것만 지킨다면 황제를 난도질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시리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따랐던 건 아니다. 당연히 경계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가진 세력과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알아 감에 따라 복종이라는 선택지에 응했다. 그녀를 따라가면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황제에게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혼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던 복수의 길을 에스메랄다가 보여 준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복종하는 시리스는 앞에 있는 장애물을 치우고 이동을 지속해야 한다. 당장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때 귀족이었던 그들 모두 테노리엘의 명성을 알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모시는 상관이 페드로의 누이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에스메랄다가 가족을 배제했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시리스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페드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페드로가 무력으로나마 마차 문을 열어 보려고 마음먹은 그때.

“시리스.”

마차 안에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삭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린 페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설마 했더니, 그의 누이는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아가…….”

말머리를 돌려 마차의 창가로 다가갔던 시리스는 곧 밀려났다. 잔뜩 굳은 표정의 페드로가 용병들을 지나 훌쩍 다가와 그를 밀어냈다. 페드로의 검에는 여전히 일렁이는 마나가 뒤덮여 있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한 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에스메랄다…….”

페드로는 가라앉은 목소리와 달리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스메랄다와 그의 시선이 창문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인사도 않고 가다니… 섭섭하구나, 작은 천사야.”

아레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했다. 에스메랄다, 하고. 쌍둥이는 애칭을 부르는 걸 좋아했다. 리디, 하고. 그리고 페드로는 에스메랄다를 작은 천사라고 불렀다.

철이 들며 민망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호칭이었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10년 가까이 들을 수 없던 그 부름.

에스메랄다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리움을 짓밟았다. 불필요한 감정이다.

“여긴 영지로 돌아가는 방향이 아닌데, 어디를 가니?”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에스메랄다는 페드로가 지금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에게는 페드로가 화내는 모습도, 화를 참는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가족들과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페드로가 끝까지 따라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갈 곳이 있어서요.”

“어디를?”

“멀어요.”

“……그렇구나.”

침묵과 함께 페드로는 탐색을 하듯 그녀를 훑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멀다고 하니 내가 호위차 동행하마.”

하지만 페드로는 후에 들려온 말에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멀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러니 내가 함께 가야지. 용병 셋과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기사단은 어쩌시고요?”

“용병 한 명을 빌려주면 될 일이 아니더냐? 파발을 보내면 며칠 쉬는 거야 큰일도 아닌 것을.”

큰일이지. 황실 기사들이 한 해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연차는 한정되어 있다. 그 이상을 사용할 경우 무단결근이 되고, 무단결근 기록이 남은 기사는 해당 연도에 진급이 불가능하다.

차출되는 중앙군을 지휘할 만한 자리까지 최대한 빨리 올라가지 않으면, 3년 후가 문제다. 5년에 한 번 남부로 파병하는 중앙군을 확보하지 못할 테니까. 그럼 죽는 게 무서운 그들은 가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파병 기간을 채우고 돌아오겠지. 고작 1천이지만 그들이 모두 마나를 다루는 기사이기에 중요 병력이다.

그런데도 따라가겠다고? 에스메랄다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황제에게 붙은 간사한 이들이 파병될 중앙군에 대한 전권을 쥐고, 남부 전선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다. 남부군과 중앙군의 갈등은 더 심화될 테고, 전선의 병사들은 황실에 더 큰 적의를 품게 될 테니까.

지휘관 선정은 반황실 세력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영역일 테니, 페드로 대신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찾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 해 두어 나쁠 것이 없는 일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훗날 도약할 수 있는 수많은 발판 중 하나가 되어 그녀를 기다려 줄 테니까.

에스메랄다는 잠시간 페드로의 동행이 가져올 혼란과 그의 동행으로 인해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저울 위에 올리고 무게를 달았다. 결정은 한순간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를. 에스메랄다가 페드로에게 3년 만에 웃어 보였다.

“뜻대로 하세요.”

“…….”

“시리스, 오라버니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어드리렴.”

“……예, 아가씨.”

시리스는 용병 한 명을 파발꾼으로 지정해 주었다. 잠시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동부로의 이동은 재개되었다. 예상외의 동행을 대동한 채.

* * *

매번 보던 화마와 선명한 색채는 사라졌다. 대신 일렁거리는 촛불 아래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손, 가죽으로 엮은 책, 손때가 묻은 낡은 깃펜이 보였다.

아르페시스는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원망과 분노를 느끼며 눈앞의 것을 빤히 주시했다. 커다란 손은 잠시간의 침묵 후, 책을 펼치고 깃펜을 쥐어 숫자를 적었다.

「대륙력 1444년 카 76일.」

날짜를 적은 직후 깃펜을 쥔 손은 그 날짜 옆에 머물렀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손이 다시 움직인 건 정말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속에 처박힌 채 화마 속에서 사라지는 --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력함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순간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다.」

거기까지. 손은 다시 글을 쓰지 못한 채 멈추었고 종이 위로 물방울이 쏟아졌다. 아르페시스는 잉크가 만들어 낸 글자가 흐리게 번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물,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고 그 순간 몰려오는 감정에 잡아먹혔다. 전신을 지배하는 무력감으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치솟아 올랐다. 딛고 선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비참했다. 수많은 감정이 그를 장악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강렬한 것은 후회였다.

멈추었던 글자가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일 틈도 없이 흘러내리기 바쁜 눈물과 함께 지독한 흐느낌이 오래도록 이어진 후였다.

깃펜은 빠르게 움직이며 거친 형태의 글자들을 만들어 냈다.

「--가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워 잠을 자는 것도 피해야 할 정도로 암살자가 들끓었다는 것. 입에 대는 모든 것에 반드시 독이 들어 있다는 것.

사지를 찢어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 미친놈이 --를 겁간하려 든 것이 수십 번이 넘는다는 것까지. 나는 그중 아무것도 몰랐다.

--가 말해 주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내가 말해 주지 않았음에도 --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계획과 달리 물자가 빨리 떨어지면 곧장 그것을 보충을 해 주었다. 본인의 사비를 털거나 귀족들에게 기부금을 뜯어내서라도.

부상을 숨길 때면 은밀하게 신관을 보내 주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미친놈에게 나의 부상 소식을 감추어 줄 진실된 신관을.

하지만 나는? 나는 대체 --에 대해 무얼 알고 있었던 거지? 그저 내 눈앞에 직면한 문제에 취해 --를 외면하기 바빴다.

인간은 어리석고 나약하다 하던가, 내가 그 증거다.

어리석게, 잃고 난 후에야 --를 향한 감정을 정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약하게, 나의 고난에 취해 --의 고난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 어리석음과 나약함의 결과, 지금의 나는 살아온 모든 순간을 후회한다. 처음으로 심장에 품었던 이를 그토록 허무하게 잃은 나의 무능함을 저주한다.

--가 없이 숨을 쉰 시간은 고작 13일. 그 짧은 시간이 전선에서 버틴 10여 년보다 더 길고 참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고한 자들의 희생?

함께 살아남은 전우?

남부에 버려질 백성?

그딴 것보다 -- 한 사람이 더 중요했다는 걸 왜 몰랐단 말인가. 괴물이 되는 것이 어떻다고, 나의 이기를 위한 정당화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망설였단 말인가.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던 겁쟁이.

침묵으로나마 곁에 있고 싶었던 비겁자.

손에 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멍청이.

--가 그런 얘기를 꺼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나의 과오를 들키는 것이 무서워 --를 비난함으로써 감추었다.

그날 그 끔찍한 말을 내뱉었던 내 입을 찢어발겨도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리라.

과거에 행한 모든 선택을 후회하지만 너무나 늦었다. 남은 건 들끓는 화뿐이다. 어떻게든 풀어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분노와 원망.

--에게 돌을 던지던 그들, --의 죽음에 환호하던 그들, --를 죽음으로 내몬 그들, --의 절박함을 외면한 나를 용서할까 보냐.

본래라면 --의 탄생을 축복했어야 하는 오늘, 나는 축복 대신 복수를 다짐한다. 내게서 --를 빼앗아 간 놈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다.

「네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대가가 마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것이라 해도 기꺼이 뛰어들 텐데.

하지만 너는 돌아오지 않겠지. 너를 비난한 내게 돌아올 이유가 없을 테니까.

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돌아올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부정해 왔던 주신에게 애원해 본다. 너를 내게 돌려 달라고.

평생을 증오해 왔던 마신에게 구걸해 본다. 너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 어리석은 나는 너를 잃은 후에야 네가 나의 세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방울방울 떨어진 얼룩이 글자 위에 흔적을 남기더니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갑작스럽게 암흑이 찾아왔다. 아르페시스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아… 으윽…….”

가슴께를 움켜쥐며 몸을 웅크린 것은 고통을 버텨 내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자세였다. 심장이 찢어지고 있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고통이었다.

이제껏 속에 담겨 있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눈물이 쉴 틈 없이 흘러내렸다. 울음이 뒤섞인 숨소리가 고요한 침실을 가득 채웠다. 아르페시스는 통증을 참기 위해 침대 위에 웅크린 채로 이를 악물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언제나 똑같던 악몽이 아니었다. 기억과 과정 없이 생겨난 감정이 그를 침범하자 낭떠러지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젠장, 젠장…….”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에 깨어난 그는 욕설과 함께 베개를 가득 적실 눈물을 쏟아 냈다.

“후우, 후우…….”

몇 번의 노력 끝에 숨을 고른 그는 눈물로 젖은 뺨을 닦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곳은 10여 년을 지낸 그의 침실이었다.

쌍둥이가 도망치듯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아르페시스는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으로 마차에 올라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었다. 갑작스러운 일들 때문에 너무 피곤했던지라 일단은 쉬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해서 생각을 곱씹는 대신 그대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웠었는데… 이 개꿈은 또 뭐란 말인가.

아직 진정을 되찾지 못한 아르페시스는 침대에서 벗어나 침실 옆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내부가 연결된 곁문을 열고 서재에 발을 들인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빈 종이와 깃펜, 잉크를 챙기는 것이었다.

그는 악몽 속에서 보았던 글을 기억해 내려 애쓰며 겨우겨우 손을 놀렸다. 떨리는 손 때문에 필체가 잔뜩 일그러졌으나 아르페시스는 기억나는 모든 내용을 받아 적었다.

어휘나 순서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대체로 꿈속에서 본 내용과 비슷했다. 군데군데 고쳐 쓴 흔적이 가득한 글을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들끓었다.

“대체…….”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손바닥으로 누른 그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꿈의 경계를 넘어와 현실의 그에게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주는데, 이걸 단순한 악몽이라 치부해야 하나?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를 밀어내고 생각을 하고자 노력했다.

하나, 몇 년 전부터 이유 모를 악몽을 꾼다.

둘, 그 악몽에는 누군지 모를 사람이 화마 속에서 사그라진다.

셋, 그 이름 모를 사람이 어제 복도에서 마주친 소녀 같다.

넷, 그리고 오늘의 악몽은…….

“젠장!”

깃펜을 꽂아 두었던 잉크병이 그의 거친 손길에 쓸려 나갔다. 대체 그 악몽이 무엇이기에 자신의 신체에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행사한단 말인가.

아르페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지난밤 복도에서 만났던 작은 소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분명 처음 본 소녀인데, 어째서 이토록 그립지?

그 의문을 느끼고 난 후에야 아르페시스는 자신의 감정이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처음 본 사람에게 그리움을 느낄 이유가 어디 있다고?

커다란 손이 가장 먼저 썼던 숫자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1444년 카 76일.

지금은 1432년 카 19일, 아니 20일이다. 무려 12년 후의 날짜. 순간 그는 자신이 미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마수에게 겁을 먹어서, 전선이라는 지옥에 발을 들인 앞날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미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예지몽 같은 것인가?”

신관들은 때때로 꿈을 통해 신이 알려 주는 미래를 본다고 했다. 어쩌면 그런 종류의 꿈일지도 모른다.

“신을 믿지도 않는 내게, 신이 알려 주는 미래라니…….”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 꿈을 광증으로 인한 환상으로 치부할라치면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짙은 거부감이 들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그러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색채로만 구성되어 있던 악몽과는 영향력 자체가 달랐다. 만약 자신의 악몽이 예지몽이라면 그 속의 주인공이라고 추정되는 그 소녀는… 아마도 테노리엘 가문의 고명딸이겠지?

“이름이 뭐라더라…….”

아직 사교계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린 소녀라 그런지, 그녀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카덴에게 물어볼까? 아니면 근위 기사들에게? 그녀가 나오는 악몽은 대체 왜 꾸는 거지?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불길에 잡아먹히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꿈일까? 그 작은 소녀가 죽는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런 것을 꿈으로 보는 것일까?

“정말 미치겠군.”

이유를 모르는 눈물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과 같다. 멈출 방법을 알 수가 없으니까.

아르페시스는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에 이를 악물었다. 대체 뭘 어쩌라고. 오늘 꾼 악몽은 그녀가 죽은 후의 일인가? 이 절절한 글을 쓴 건 대체 누구기에?

꿈속에선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그가 그걸 쓰기라도 한 것처럼. 당시에는 그게 꿈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모든 걸 보았다. 직접 마주한 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제나 부정해 왔던 주신에게 애원해 본다. 너를 내게 돌려 달라고.

평생을 증오해 왔던 마신에게 구걸해 본다. 너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이건 거의 연서가 아닌가. 설마, 미래에 그가 그 작은 소녀를 사랑하게 되나?

이 내용과 화마가 가득하던 꿈을 보면… 그녀가 죽는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얼추 말은 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죽음에 원통해한다는 추측 말이다.

“하… 내가?”

정말 어이가 없지만 꽤나 그럴듯했다. 그는 분명 글을 쓰는 사람의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신도, 신이 정해 준 운명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운명을 믿는다면 그는 자신이 죽기 위해, 황실에 이용당하기 위해 태어났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어찌 그 존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지몽이라니, 운명이 정해 둔 미래의 사랑이라니.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종이의 상단으로 향했다.

「대륙력 1444년 카 76일.」

아르페시스는 몇 시간 전 잠깐 보았던 소녀를 떠올리며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숫자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도 어째서인지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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