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조효(早曉)1)
희미한 여명의 사이에 안개가 자욱하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OPENING
카 에타 테노리엘 에스메랄다. 처형대 위에 묶여 있는 여인의 이름이다.
신이 다음을 도약하기 위해 기다리는 달에 태어났다고 하여 카. 타고난 혈통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에타. 난세 속에서 그 어느 것보다 무거웠던 이름 테노리엘. 마지막으로, 녹음과 닮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본 그녀의 모친이 지어 준 이름 에스메랄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향해 마녀라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지는 이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녀 에스메랄다의 죄는 다음과 같다!”
그녀가 마녀라면 지금 처형대 앞에 서 있는 대신관은 악마다.
“리퀘나 성문을 폐쇄하여 남부군의 피난을 저지함으로써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죄!”
닫지 않았다면 대형 마수가 넘어왔을 것이다. 리퀘나가 뚫렸다면 그 뒤에 있는 수십 만의 남부 백성들이 도륙을 당했겠지. 이후 제국의 남부는 모조리 마수들에게 잠식되고, 겉멋만 가득 든 내륙의 기사들이 열심히 도망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수십만을 지키기 위해 수천을 잘라 냈던 고통은 저들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역병 치료제를 제조하기 위해 모은 성금을 횡령한 죄!”
횡령을 한 것은 신의 이름을 사칭해 유흥과 사치, 타락에 물든 신관들이다. 그녀는 그 돈을 정말 알뜰하게도 쪼개어 썼다. 백성들을 구할 돈이었으니까. 신관들이 횡령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신전에 죄를 묻기까지 했었다.
“제국을 이끌고 지켜 나가실 페라노스 황태자 전하를 유혹하여, 그 혜안을 가린 죄!”
그놈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해악인 버러지다. 제멋대로 그녀를 취하고자 했기에 정당한 저항을 했을 뿐이다.
“하여, 주신의 뜻을 따르는 신전이 선고하니!”
“마녀를 죽여라!”
“죽여! 죽여 버려!”
“마녀를 죽이면 신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거야!”
신관들과 황태자, 그녀가 물어뜯었던 모든 정적들까지.
“마녀의 시체와 악함이 이 땅에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화형에 처한다!”
“와아아아아!”
백성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아찔한 굉음이 그녀의 몸을 두드렸다. 에스메랄다는 화형을 선고하고도 곧장 불을 붙이지 않는 대신관의 행태에 조소했다. 그들은 그녀가 돌팔매질에 죽은 후에야 식을 거행할 생각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한 끗이라도 더 비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
자신의 죽음을 기원하는 백성들을 보며 에스메랄다는 생각했다. 무엇을 위한 시간이었냐고.
고작 아홉이라는 나이에 세상의 비틀림을 직면하고 희망의 뒤를 좇아가기 시작했던 그녀다. 줄어들기는커녕 매일 늘어나기만 하는 마수들. 그놈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던 전선. 매년 발생하는 사상자와 부상자. 마수들의 시체로 인한 역병. 백성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야 할 신전과 지도층의 타락.
어리석고 이기적인 백성들을 사랑해서, 그들의 무지를 가엽게 여겼기에 옳은 길로 살 수 있게 이끌고자 했다. 그들이 누리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더 영위할 수 있도록 발품을 팔았고, 가족의 희생에도 침묵했으며, 스스로의 몸을 망가트리는 일이 있어도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마녀라고? 죽이라고? 에스메랄다는 치가 떨리는 배신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녀의 가족과 전우들의 피 위에 지어진 평화를 누리는 놈들이, 이제는 기어코 그녀마저 죽이고자 한다.
“빨리 죽여라!”
“죽여!”
그녀가 리퀘나의 폐쇄를 강행한 덕분에 지금 그들이 발붙이고 있는 중부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가?
“화형! 화형!”
자신에게 횡령의 죄를 묻고 있는 저 대신관이 한 해에 얼마나 많은 금화로 제 주머니를 채우는지도 모르겠지. 그 돈만 있었다면, 남부에서 발생한 역병을 완전히 잡고 수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건 그들이 알 바가 아닐 것이다.
“불을 붙여! 빨리 죽이라고!”
황태자라는 놈이 여인을 채찍질과 매질을 해 가며 가학적으로 품고, 때론 시체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것도. 강제적인 관계로 태어난 사생아들의 피로 목욕을 함으로써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려 들려는 것도. 그들이 굶어 죽어갈 때, 귀족과 신관들이 음식과 술로 연회를 벌이며 먹고, 토하며 낭비한다는 것까지 모두 알지 못하리라.
아니, 알아도 상관이 없는 거겠지.
“킥, 키키킥…….”
우매하다 하여 눈과 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그녀가 그간 고발한 모든 것들을 보고 들었다.
그래, 저들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황실과 신전의 악행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를 죽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그녀가 잘못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나약하고.”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자조적인 중얼거림이 흘러 나갔다. 그녀의 머리를 때린 돌이 살을 찢어 내고 피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눈가를 지나 그녀의 뺨에 흔적을 남겼다. 피눈물처럼.
“비겁한 놈들.”
신관들에게 대들었다가 피해를 볼까 봐, 황실에 밉보여 처형당할까 봐. 희망 따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내 잘못이 아니라 너의 잘못이라 매도하며 당장의 안도감을 얻기 위해 저러는 것이다.
신전의 타락과 황실의 폐단이 어떠한들, 저들에게 진실은 상관없다. 여기서 그녀를 죽이면 안도하며 거짓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테니까. 신전과 황실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당장의 평온과 안정을 위한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다.
퉤, 하고 에스메랄다가 입가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그녀는 불에 타 죽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겠지. 백성들이 던지는 배신의 돌팔매질 사이에서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의문을 던졌다. 저 비겁한 배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위대하고 고결했던 영웅들을 잃어야 할 가치가 있었나? 그녀의 가족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게 고작 저런 놈들이라고. 그들의 죽음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던가.
“아무런… 개죽음…….”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에스메랄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개죽음이라고. 눈앞의 추악한 광경을 담은 에스메랄다의 녹안에 번들거리는 악의가 들어찼다.
“죽어! 빨리 죽어!”
“마녀를 죽여라!”
그래, 죽여라.
“신이시여, 마녀를 죽였습니다!”
“저희가 마녀를 사냥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원망과 저주 속에서.
“신이시여.”
에스메랄다가 마지막 기도를 읊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속삭임으로.
“부디, 저들을 멸망으로 이끄시기를.”
그녀에게 허락된 생명이 다해 가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다!”
“신이시여, 구원을!”
“희망을!”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고여 잔혹한 웅덩이를 만들어 냈을 무렵, 그리운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착각이겠지. 그가 여기에 있을 리 없으니까.
“……랄다!”
“……엘 영애!”
“……님을 구해라!”
모든 것이 희미한 곳에서 유독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마녀를 탈취하고자 하는 이단이다! 악의 무리다! 화형을 거행하라!”
그녀의 마지막을 선고하는 대신관의 목소리였다. 돌팔매질에 죽도록 내버려 두나 했더니, 불을 붙이긴 하는구나. 아니, 어쩌면 벌써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해 불을 붙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에스메랄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스러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옥의 염화가 바로 이것이리라. 죽음으로 가는 아득함 속에서 에스메랄다는 화마로 인한 그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어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승자의 미소를 안겨 줄 수는 없지 않은가. 화염 속에 파묻힌 에스메랄다가 죽음을 준비했다.
“에스메랄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기 전, 다시 한번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정작 모습은 쥐꼬리조차 보여 주지 않으면서, 포기하지 못하도록 흔적을 남기며 도망가던 희망. 존재조차 명확하지 않은 그것을 좇으며 함께 걸었던 사람. 그녀가 선택한 길을 용납해 주지 않고 등을 돌렸던 그 사람, 아르페시스.
그는 그녀가 홀로 반정을 준비하는 1년간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올 리 없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망설이고 겁을 먹어 물러나는 대신 용기를 내 말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까?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생각해 보아야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 전에 그녀의 심장이 멈추었으니까.
에스메랄다는 눈을 시리게 만드는 햇빛 아래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분명 화마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는데……?
찬란한 태양 빛을 가리는 손이 앙증맞았다. 그녀의 정면에서 소형 마수 한 마리가 커다란 원형 고리를 뛰어넘었다. 서커스 단원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고, 각종 곡예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 속에서 사람보다 두 배쯤 큰 공 위에 올라탄 빨간 코가 관중들로부터 돈을 받고 있었다.
“아…….”
에스메랄다는 지금 이 순간을 알고 있다.
“음? 귀여운 아가씨네요?”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빨간 코 때문에 에스메랄다가 시선을 들었다. 검은 음영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햇살을 막아섰다.
이유와 과정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거짓말 같은 현실을 이해했다. 툭툭 소리와 함께 떨어진 눈물이 옷섶을 적시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본 빨간 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 어어! 우, 울어요? 나, 나 무서운 사람 아니에요! 깍쟁이 빨간 코랍니다!”
아아, 신이시여. 에스메랄다는 한평생 믿었던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뚝, 뚜욱! 이거 줄 테니까 울지 마요! 선물이에요!”
허둥지둥, 당황한 빨간 코가 작은 꽃 한 송이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기억 속의 그 날처럼.
그래, 에스메랄다는 지금 이 순간을 알고 있었다. 현실의 비틀림을 인지하고 불길 속을 걷고자 다짐한 날이다.
전선에서는 수천, 수만의 병사들이 죽어 나감에도 돈을 위해 마수를 사육하고, 그것을 감히 전선의 안으로 반입시키는 서커스단. 그들이 자행하는 불법 속에서 울리는 웃음소리.
그녀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결국 서커스단주에게 돈주머니를 받은 후 돌아가던 경비대. 마수를 보며 환호하고, 더 높게 뛰어 보라며 서커스단원들이 파는 간식을 사서 던져 주는 신관과 그 신관의 배포에 환호하는 백성들.
그 많은 병사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죽는 것일까? 매일매일, 시체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마수의 먹이가 되는 이들이 넘쳐 난다는데. 그런데 너희는, 그들의 희생으로 안녕을 누리는 너희가 어떻게 마수를 보며 환호할 수 있나. 어떻게 그 괴물을 돈벌이로 쓸 생각을 하나. 아무리 무지하다지만 해서는 안 되는 짓이 아닌가? 주신에게 대항하는 마신의 종자를 보고 신관이라는 자가 웃는 것이 가당키는 한가 말이다!
그 모든 것을 허망하게 보고 있던 와중 지금처럼 빨간 코가 다가와 꽃을 쥐여 주었다. 겨울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긴 꽃. 찬 공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고개를 내밀어 매해 또 한 번 피어나는 그 작은 꽃. 삭막한 겨울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 꽃이 마치 그녀에게 용기를 내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다가왔었다.
에스메랄다는 그 꽃을 쥐고 다짐했었다. 이 엉터리 같은 세상을 바꿔 버리겠노라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고, 보듬어 함께 나아가겠노라고.
그녀의 아홉 번째 생일, 대륙력 1429년 카 76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녀의 인생이 이날을 기점으로 변했기에 잊으려고 해 봐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에스메랄다는 빨간 코가 쥐여 준 꽃을 짓뭉개며 눈을 감았다. 찐득거리는 식물의 진물과 알싸하고 달콤한 꽃향기 속으로 그녀의 눈물이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평생 동안 믿어 온 신이 그녀의 마지막 기도에 응해 주었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타락자들을 벌하기 위해 신이 그녀를 돌려보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의 멸망을 기원한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온다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한때는 총기와 희망을 품었던 에스메랄다의 녹안에 검은 복수의 불꽃이 붙었다.
제1장
흑화
마신의 파수꾼이 멸망의 사명을 부여받고 세상에 강림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륙의 남부를 멸망시킨 마룡이지만, 그것은 본디 자유로운 운신조차 불가능한 알의 형태였다. 그에 주신은 그 파수꾼이 알을 깨고 나오기 전, 토벌할 것을 명하는 신탁을 내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미 부와 권력에 취해 타락했던 신관들은 그 신탁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남겨진 기록을 보면 열과 성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하는 척을 한 것이 전부였다.
마나를 사용할 줄도 모르는 용병들을 모으고 소수의 하급 신관들을 동행시킨 결과, 토벌 인력을 보내는 족족 마룡의 알이 만들어 낸 마수들에게 도륙당했다. 그러면 이제 정신을 좀 차리고 위험을 인지할 만도 한데 신전은 전멸한 이들의 부족함을 지적하며 눈앞에 닥친 위기를 외면하기 바빴다.
공포와 나태,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신전의 권위가 가져다준 자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보다 못한 에렘과 실테르가 토벌 전권을 빼앗아 온 후에는 대대적인 토벌 시도가 있었다. 당시에 두 나라의 지도층은 좀 쓸 만했던 것 같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을 차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토벌단을 구성하기 위해 신전에 대신관의 파견을 요청했으니까.
하지만 문제의 그 대신관들은 몸이 안 좋다, 신도들을 돌봐야 해서 바쁘다, 순례를 가야 한다는 등, 가지각색의 변명으로 두 황실의 요청을 무시했다. 다른 이들을 보내는 건 잘도 했으면서 본인들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겠지.
신관들의 행태에 질린 두 제국은 그들 없이 토벌단을 꾸렸다. 남부로 향하는 길에 넘어야 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국경 진입 허가에 대한 교섭이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다음으로는 물자 보급로를 정비하고, 병장기를 배급하고, 군마를 선별하고,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까지. 기나긴 준비가 끝난 후에야 토벌을 시작한다는 전서구가 에렘과 실테르에 도착했다.
60여 년 전의 그 연락이 끝이자 시작이었다. 정확히 닷새 후 토벌단과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그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마수에게 대륙의 남부에 있는 국가들이 잠식되어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룡이 알을 깨고 나옴으로써 마수들이 번식 능력과 지능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파수꾼의 강림으로부터 80여 년이 지나버린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최근 이틀, 자신의 처소에서 두문불출하며 생각에 잠긴 상태였다.
“올해 전선의 사망자는 3만, 부상자는 7만…….”
또한,
“다음 해, 남부의 열기에 썩어들어 가는 마수의 사체로 전염병 쿠그스가 창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대규모 사상자로 남부에서 자체적인 군사 징집이 불가능해지자, 황실은 동부와 서부에서 백성군을 차출하기에 이른다.”
검과 창을 쥐어 본 적도 없는 백성들을 전선으로 보낸 결과는?
“그해 사망자는 11만, 부상자는 5만…….”
부상을 입었음에도 살아남는 이들보다, 마수의 식량으로 전락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제야 중앙 귀족과 북부의 귀족들이 움직였다. 이대로 가다간 전선이 무너지겠다 싶어서 계책을 낸 것이다.
“전염병 치료제의 연구가 시작되고, 2년 만에 성과를 본다.”
타락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머리가 돌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의료 종사자들과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치료에 효과가 있는 약품, 알라반을 개발해 냈다.
“곧 남부 전역을 뒤덮은 전염병의 치료제 배급을 시작한다.”
그녀의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와 닿으며 간결한 음을 만들었다.
여기까진 나쁘지 않았다. 당시엔 치료제의 배급으로 남부의 역병을 잡고, 천천히 인구를 회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10년, 20년 후에는 어떻게든. 하지만 넉넉지 못한 치료제의 수량으로 인해 역병은 완전히 잡지 못했다. 치료가 가능해지기는 했으나, 매년 새로운 감염자와 사망자가 발생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신관들이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거둔 성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에스메랄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알라반의 제조가 시작된 지 4년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성인이 된 16세에 곧장 황성의 관료 시험에 합격해 전선으로 보낼 물자 조달과 군사 지원 업무에 참여했다. 신전의 횡령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해였다. 진심을 다해 분노한 에스메랄다는 신전을 뒤집어엎기에 이르렀다.
그 일로 신전이 좀 자중하는가 싶더니… 다음번에는 황태자가 사고를 쳤다. 그는 본인의 사생아들을 모아 목욕물을 마련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말이다. 그 기가 막힌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 에스메랄다는 일단 부정했다. ‘그렇게까지 미쳤을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황태자는 그녀의 기대를 넘어서는 대범한 자였다.
사생아가 부족해지니 각지에서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을 모아다 목욕을 하기까지 했다. 지켜 줄 가장이 전선에서 죽어 버려 손대기 쉬운 이들만을 골라서. 대체 얼마나 미쳤으면,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가족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놈이 황제가 되었다간 제국이, 나아가 제국 뒤에서 바득바득 원조하고 있는 남은 왕국들까지 모조리 망하겠구나 싶어서 에스메랄다는 반정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황실에서 일하던 하녀에게 잉태되어 태어난 2황자. 그녀의 전우였던 아르페시스를 황위에 올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사자는 반정을 거부했지만.
에스메랄다는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 문제로 다투었으나 혼자서라도 계획을 강행했다. 그전까지는 신전과 칼부림을 하던 에스메랄다가 황실에까지 검을 겨누었으니, 황태자는 단번에 지지고 볶던 신전과 결탁했다.
그리고 1년 뒤, 그녀는 패배했다. 침실에 마련된 1인용 소파에 앉아 생각을 곱씹고 있던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 마녀라고.”
내가. 그 짧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음에도 그녀가 느끼고 있는 배신감과 회한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악인의 죄를 묵인할 것인가, 악인의 죄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킬 것인가.”
15년간 끊임없이 고뇌했고 결국 그녀의 모든 선택은 전자였다. 아르페시스의 반발에 순순히 물러나 홀로 반정을 준비한 이유도 결국은 그 때문이었다. 억울하지만, 분하지만, 타락한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위해 그리도 힘겹게 달렸을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자조 섞인 물음이었다.
지키고자 했던 이들에게 돌팔매질당해 죽고 지옥의 염화로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다시금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원망스럽고 끔찍한 그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그 불길을 걸어야 할 이유는? 그들에게 그런 가치가 있나? 일신의 안위를 위해 악의에 가담한 그들이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그런 이들을 위해 전선의 수십만 병력이 희생해야 할 필요는? 이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 죽인 이들이 살아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이유는?
없다. 아무리 곱씹어도 합당한 이유가 없다. 아직은 앙증맞은 에스메랄다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갔다. 분노와 원망, 그로 인해 탄생한 복수심이 뒤엉킨 그런 한숨.
그녀의 속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던 신념은 이제 없다. 그녀의 몸이 불타 으스러진 것처럼, 그것 역시 모두 타 버려 잿더미가 되었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에스메랄다의 시선은 백작 저의 북쪽으로 향해 있었다. 꽉 움켜쥔 그녀의 하얀 주먹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의도, 명분도, 희망도 아니었다. 구원? 희망? 그딴 것은 시궁창에 박아 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타오르는 복수심에 순응했다. 자신의 죽음을 비참함으로 장식하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를.”
에스메랄다는 정적들 다음으로 자신을 향해 마녀라고 소리치던 백성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리 바라는 데 못 할 것도 없지.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마녀가 되어 주리라. 그리하여 그녀에게 비참한 최후를 선물해 준 정적들에게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그것을 위해 세상에 도래할 혼란이나 영향 따위 알 게 뭐라고. 그녀의 복수를 위해 행한 모든 것이 세상의 멸망을 가져온다 해도, 상관없다.
‘에스메랄다!’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환청이 잠시간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뿌리쳤다. 복수, 복수, 복수,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그날의 환청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그와 새로운 미래 같은 건, 불가능하니까. 그녀는 백성들을 제물로 바칠 악귀가 될 것이고, 그는 백성들을 지킬 영웅이 될 테니 함께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참에 이 지긋지긋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 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복수심으로만 채울 생각이었다.
머릿속을 침범해 오는 은회색 눈동자를 애써 밀어낸 그녀가 다시 생각을 곱씹기 시작했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그들은 황성과 신전이라는 안전하고 견고한 방벽 너머에 있다. 그들을 나락으로 몰아넣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그저 가만히 두면 될 일이다. 자멸하고자 그리도 발악하던 이들이니,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은 채 방치하면 저들끼리 알아서 멸망해 버릴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적어도 몇십 년은 걸릴 터. 그렇게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더 빠르게 멸망으로 인도할 방법은 많지.”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를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만든 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규칙적인 박자를 타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버릇으로 부친을 닮아 가며 생긴 것이었다.
다가오지 않을 미래에 그들이 백성들을 이용해 에스메랄다를 꺾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가 그 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를 위한 수단은? 다음 해에 발병할 역병부터 차근차근 건드려 제국을 무너트리는 방법도 괜찮다. 역병을 이용해 불을 붙이면 남부는 완전히 폭도들의 소굴이 되어 줄 것이고 그들의 원망과 증오는 황실과 귀족에게 향할 터.
“구원 따위…….”
희망 따위.
“진창에 처박힌 헛된 망상일 뿐이지.”
10여 년, 그녀는 그 긴 시간 동안 정치꾼과 모략가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또한 그 긴 시간 동안 모든 인간의 안위를 책임지던 전선의 뒤를 떠받들며 버텼다. 그 결과 그녀의 입은 나날이 거칠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변하지 않았으면 혓바닥을 날카롭게 세운 이들 틈에서 그만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수와 인간의 피 속에 무릎을 꿇려,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봐 주마.”
놈들의 뜻대로 자신에게 돌을 던진 백성들에게도 똑같은 절망을.
당장의 목표는 다음 해 여름에 시작될 역병을 최대한 많이 퍼트리는 것이다. 그 역병의 소식이 황실에 들어가는 것도 늦추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해 두어야 할 일은 아주 많았다. 그녀의 뜻대로 움직일 세력을 만들어야만 했다. 황도에서 그런 일을 하다간 황제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 영지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
“어떤 명분으로 내려가야 좋을까…….”
조부 시절부터 중앙 귀족으로서 황도에서 지내던 테노리엘이다. 영지에서 그녀만의 기반과 세력을 다지려면 힘이 필요했다. 영지의 전력을 움직일 수 있는 힘.
“영주권 정도는 가져가야겠어.”
하지만 테노리엘 백작이 건재하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린 딸에게 전권을 위임할 리가 없다.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것이 좋을까? 에스메랄다는 잠시 고민한 후 부드럽게 웃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어차피 가족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지낼 것도 아닌데.
“그냥 빼앗으면 되지.”
에스메랄다는 테노리엘 백작이 영주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사건부터 만들기로 했다.
그녀는 패전하였음에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자신의 정쟁을 위해 일어났다. 그 첫걸음이 바로 부친을 협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가족의 정은 그들이 전장에서 죽어 떠났을 때 털어 냈다. 비정하고 잔인해져야지만 살아남고, 살릴 수 있었던 정쟁을 겪으며 그렇게 변해 갔다.
“이기기 위해 하지 못할 짓은 없는 법이니.”
그녀는 걸어 잠갔던 침실의 문을 열고 다시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바라보았다.
이미 패전한 미래의 전쟁도 더러움의 연속이었다. 오물 구덩이에서 구르는 이들을 상대하면서 본인은 깨끗하길 바라면 승리는 요원한 법이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오물을 기꺼이 뒤집어썼고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더러움을 넘어 잔혹한 일까지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물이 아니라 피를 뒤집어쓴다고 해도 기꺼이.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침대로 다가간 그녀가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시녀가 곧장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외출을 할 생각이니 마차와 의복을 준비하렴. 후드를 챙기는 것도 잊지 말고.”
“예, 아가씨.”
대답을 했음에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시녀에게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 식사는 어찌할까요? 이틀이나 거르셨는…….”
“외출 준비를 하렴.”
“……예, 아가씨.”
그제야 시녀가 외출복을 챙겨 왔다.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시중을 받아 환복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 * *
외출 준비를 마친 에스메랄다는 이틀간의 칩거를 끝내고 침실을 나섰다.
그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식당이었다. 언제나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그곳의 입구에 에스메랄다가 멈춰 섰다.
“작은 천사는 오늘도 식사를 하지 않았느냐?”
“……예, 도련님. 모두 물리셨습니다.”
“그러다 몸이 상하면 어쩌려고.”
올해의 봄에 성년식을 치러 앳된 티가 조금 남아 있는 차남 페드로.
“여전히 문도 열어 주지 않고?”
훌쩍 커 버려 벌써 청년이 되어 버린 장남 아레스.
“올라가 볼까?”
“오늘은 열어 줄지도 모르잖아.”
아직 소년의 모습을 벗지 못한 삼남과 사남, 쌍둥이 오멘과 페르멘. 그들 다음으로 태어난 테노리엘 가문의 고명딸 에스메랄다까지. 현재 테노리엘 백작의 자식들은 그녀까지 합해 5명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식당에 모여 앉아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형제들을 보던 중 그들의 상석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하던 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기서도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제발 가지 마세요!’
‘아버지!’
부친인 테노리엘 백작의 모습 위로 자존심도, 명예도 모두 버리고 매달렸던 기억이 덧씌워졌다. 에스메랄다는 시선이 마주친 테노리엘 백작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며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리디.”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형제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작은 천사야!”
“에스메랄다!”
“리디!”
“리디!”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이 다가왔다.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돌아보며 눈에 담았다.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언제나 그렇듯, 페드로였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끔찍한 온기였다.
“이제 기분은 좀 괜찮니? 배가 고프지는 않아? 어서 식사를 하자.”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안아 들고자 하는 페드로의 손을 쳐냈다. 원래의 그녀라면 페드로의 인사에 수줍게 웃으며 답례의 입맞춤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들의 손길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그들과 가족의 연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기 전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그들을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복수 속에서 가족만은 희생시키지 않고 지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장 안전하고 굳건한 방벽 뒤에 있는 그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고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다. 그것이 가족이라 해도.
어차피 그녀의 기억 속에선 떠나갔던 이들이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은 이미 원망으로 변해 있었기에 연을 끊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에스메랄다가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작은 천사야……?”
“리디, 왜 그래?”
“에스메랄다, 어디가 아픈 거니? 왜 말을 하지 않았어.”
당장이라도 그들의 뺨을 때려 주면 어떨까? 자신을 그 지옥에 홀로 내버려 두고 평온했느냐고, 어째서 단 한 명도 돌아와 주지 않았냐고.
누구에게도 풀어내지 못해 속에서 썩고 응어리진 감정을 모조리 토해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있나. 지금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꼴이 아닌가. 훌륭한 변명거리다. 기억이 없다니, 참으로 부럽기도 하지.
“며칠 얼굴도 보여 주지 않더니, 화가 났니?”
“뭐든 우리가 잘못했다, 응?”
에스메랄다는 아레스의 손길도 똑같이 쳐냈다. 이미 그들을 보겠다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떠는 형제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등을 돌렸다. 미련과 후회, 연민과 동정, 심장을 따스하게 만드는 사랑까지. 그런 감정은 이제는 방해물일 뿐이다.
“어어…….”
“리, 리디?”
“리디! 어디 가니?”
“작은 천사야, 왜 그래? 응?”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네 명의 형제가 에스메랄다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상석에 앉아 있던 테노리엘 백작도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지만 에스메랄다가 다시 그들을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다 타 버린 신념을 뒤덮은 복수심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길고 긴 시간을 돌아 기적처럼 다시 만난 가족을 외면할 정도로. 그녀는 예정대로 외출을 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 * *
에스메랄다가 칩거를 끝내고 나온 후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닷새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꽤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불법 노예 시장을 방문하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법적인 노예들 외에, 평민들을 납치해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불법 노예 상인들은 보통 암호화된 거래 기록을 남겨 귀족들이 자신들을 팔아먹을 때 대항할 수단을 만들곤 했다. 에스메랄다가 사들인 것이 바로 그 거래 기록이었다. 이후 그것을 동일한 필체로 옮겨 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노예를 구매한 사람의 이름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는 있지도 않은 겁간 사건을 만들기 위해 뒷골목 창녀들을 몇 고용해 거짓 피해자로 만들었다. 이미 그녀들의 연극, 아니 진술은 모두 수정 마도구에 기록했다. 또한 사내에게 몸을 파는 남창들도 몇 고용해 돈을 쥐여 주고 거짓 진술을 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일정은 마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마법 중에는 피부 조직이나 혈흔, 사내의 파정 흔적을 통해 본인 여부의 판별을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했다. 에스메랄다는 그 마법을 통해 직전에 만들었던 거짓 겁간 사건의 증거물로 쓸 수 있는 감정서를 확보했다.
물론, 완성품을 받은 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가 받아 온 감정서는 미리 조작한 혈흔과 정사 흔적의 대상자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반쪽짜리였다. 그것을 완성품으로 만들기 위해선 약간의 연습이 필요했다. 노예 장부에 적힌 구매자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 그 장부에 쓰인 필체를 연습했던 것처럼.
에스메랄다는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감정서에 있는 필체를 연습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어두워졌을 무렵 그 감정서의 하단에 하나의 이름을 써넣었다.
「바 에타 테노리엘 노만」
본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글자를 보고 있자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 서류 위조를 위한 필체 모방은 에스메랄다의 특기였다. 당시에는 필체 모방은 물론 뒤처리까지 완벽했기에 그녀가 위조한 서류들은 언제나 진품이 되었을 정도였는데, 그 뛰어난 실력을 부친을 협박하는 데 쓸 날이 올 줄이야.
수작과 계략에 능한 그녀의 경험과 필체 모방이라는 재능이 합해진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에스메랄다는 닷새간 준비한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증거물이 들어 있는 상자, 그와 관련된 서류는 물론 진술을 기록한 수정 마도구까지. 전부 모아 놓고 보니 양이 꽤나 많았다.
다음 날 아침, 에스메랄다는 닷새간 준비한 것들을 시녀들에게 들려 본인의 서재를 나섰다.
“아버지를 뵈었으면 하는구나.”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시각, 그녀가 찾아온 곳은 테노리엘 백작의 집무실이었다. 그녀의 방문을 고하러 들어갔던 시종이 오래지 않아 집무실 문을 완전히 열어 주었다. 에스메랄다는 함께 온 시녀들을 데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거라, 리디.”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차를 준비시킬게요.”
밤새 평안했느냐는 그 흔한 인사조차 없이 용건을 꺼내 드는 에스메랄다의 태도에 백작의 움직임이 잠시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에스메랄다는 책상의 앞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함께 온 시녀들이 그녀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 가지고 온 것들을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백작의 시녀가 차를 내어 오는 동안 에스메랄다의 시녀들은 모두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윽고 백작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메랄다는 맞은편 소파로 향해 자리를 잡은 자신의 부친을 빤히 응시했다. 비참한 기억들이 백작의 얼굴 위를 훑고 지나갔다.
“이리 이른 시간에 일어난 게냐?”
“할 일이 있어 조금 서둘렀어요.”
본인의 것과 똑같은 색채의 녹안을 마주했을 때, 에스메랄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매가 움직이지 않아 지독히도 작위적인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찻잔을 잡기 위해 움직이던 백작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그는 낯선 딸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순간순간, 숨겨지지 않는 혜안을 보이며 또래와 다르던 딸이다. 어리다고는 하나, 그녀의 혜안은 진짜였다. 지금 테노리엘 백작가가 운영하는 전선 구호 기금 사업의 구상도 에스메랄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백작은 종종 어린 딸에게 자문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며칠 전부터 이상하다. 아니, 무언가 변했다. 백작이 아는 딸은 저렇게 웃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몇 가지 보여 드릴 것과 한 가지 허락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른 시간부터 찾아뵈었어요.”
“……무엇이기에? 말해 보렴.”
에스메랄다는 시녀들이 두고 간 것을 백작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밀어 주었다.
“대화는 모두 확인해 보신 후에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눈앞의 물건들을 설명하자면 꽤나 간단하다. 일부는 테노리엘 백작이 힘없는 영지민들과 황도의 백성들을 겁간했다는 증거물이다. 혈흔은 물론 파정 흔적, 피해자의 진술 기록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직접 백작의 이름을 써넣었던 감정서까지 함께 협박의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수정 마도구에 기록된 피해자들의 진술을 확인한 백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을 때, 에스메랄다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다음으로는 그녀가 새로 만든 노예 거래 장부. 그곳에 적힌 구매자의 이름은 카 에타 테노리엘 아레스. 백작은 자신의 장남이 불법 노예를 사들였다는 증거물과 그 노예들을 시체로 발견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함께 확인했다. 고문과 학대의 흔적이 가득한 시체의 모습을 기록한 수정 마도구도 몇 개 있었고.
백작이 손에 쥔 종이를 우그러트렸을 때, 에스메랄다는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백작은 다음 물건을 확인했다. 사교계에 퍼트리면 페드로가 남창을 사고 있다는 소문 정도는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황도에서 활동하는 남창들이 페드로의 초상화를 보고 주요 고객이라 말하는 영상이 담겨 있는 수정구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이게, 무슨…….”
에스메랄다는 경악을 담은 백작의 녹안을 확인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본인의 앞에 딱 한 장 남아 있던 종이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영주권 위임장.」
협상이란 결국 협박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에스메랄다가 정적들과 물고 뜯으며 깨달은 진리였다.
“시간을 더 주신다면 쌍둥이 오라버니들의 것도 만들어 오죠.”
“네가 지금…….”
“물론, 새로운 것들을 만들기도 전에 지금 준비한 것들이 공개될 거고요.”
황실 고발소와 황도 신문소 앞에 그녀가 보낸 사람들이 이것과 똑같은 증거물을 들고 대기 중이다. 그들은 본인들이 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시간 안에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정식으로 고발과 고소를 진행하라고 언질해 둔 상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어요. 이번 사건으로 에렘이 시끄러워지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에스메랄다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황도가 시끄러워지는 것보단 제가 영지로 내려가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버지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지로 가 무얼 하려고?”
“그것까지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간결하게 답한 에스메랄다는 백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결정을 재촉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시켜 드려야 할까요?”
그녀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부친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정말로 쌍둥이 오라버니들의 것도 만들어 오길 바라시나요?”
백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위임장에 인장을 찍었다. 에스메랄다는 인장이 찍힘으로 인해 법적 효력이 생겨난 위임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테이블 한쪽을 가득 차지한 것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건 아버지께서 처분하셔도 상관없어요. 밖으로 보내 둔 건 제가 처분할게요.”
“……내가 결정을 번복할 때 필요하지 않겠느냐?”
딱딱하게 굳은 백작의 목소리에 에스메랄다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세심하게 준비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노예 장부를 판 노예상은 물론, 수정구에 거짓 진술을 한 증인들과 반쪽짜리 감정서를 내어 준 마법사까지. 이번 일에서 에스메랄다는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필요한 뒤처리를 해 놓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아직 그런 작업을 할 만한 힘이 없었으니까. 한마디로 백작이 반격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면 어차피 효용 가치가 없어진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백작이 위임장에 인장을 찍은 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것들이 위조되었음을 파헤치기도 전에 에스메랄다가 외부로 유출시킬 준비를 끝내 놓았으니까. 이곳에 있는 것들이 유출되면 테노리엘을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황제가 나설 것은 자명한 사실.
황제의 손길에 의해 위증을 하거나 뒷돈을 받았다는 진실을 말할 사람들이 사라지면? 더 이상 위조임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진실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을 묻어 버린 사람이 원하는 게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에게 알려지기 전에 뒤를 캐내어야 재판이 일어나도 방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 백작은 에스메랄다의 협박에 응해 외부 유출을 막은 것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나겠지만 다음에는 분명 위증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조작해 둘 생각이었다. 이제 영지로 내려가 그 뒤처리를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상대방이 매수한 증인을 다시 한번 매수할 수 있는 재력과, 매수가 불가능한 증인을 처리할 수 있는 무력까지. 그것을 기반으로 후에 일어날 역병을 건드려 남부를 뒤집어 놓으면 그녀가 원하는 복수에 한발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스메랄다가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 문이 곧장 열린 건 아니지만.
“하나만 대답해 주려무나.”
경악과 혼란으로 말문이 막혀 있던 테노리엘 백작이 다급히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네가 지금 황도를 떠나려는 게, 악행을 일삼고 있는 자들을 외면하기 위해서냐?”
그런 식의 오해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나쁠 것은 없다. 백작의 오해는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의 진위를 왜곡시켜 줄 테고, 그건 결국 그녀에게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시선이 다시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외면하려는 그녀의 태도에 대한 훈계였다.
하지만 훈계란 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행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가 동시에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지. 그리고 에스메랄다는 백작의 훈계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뭐라?”
“아버지께선 정당한 이유가 있어 침묵하고 계신가요?”
한때 따스하고 청명하던 에스메랄다의 녹안은 이미 차갑고 어둡게 물든 지 오래였다.
“현실에 대한 순응일 뿐이지요. 합당한 이유가 존재할 리 없는데, 왜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시나요?”
백작은 대답 대신 되돌아온 질문에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은 정답이 아니었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신전과 황실의 타락을 해결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이유는 정당하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없기 때문에 순응하고 있는 것일 뿐.
“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제게서도 그 이유를 찾지 마시기를.”
“……리디.”
“그러니 또한, 아무런 이유 없이 외면을 한다 해도 저를 타박하실 자격은 없으세요.”
“에스메랄다! 그것은 궤변이다.”
“이것이 궤변이라 하여 무엇이 문제가 될까요. 아버지께서는 묵인하고 계시면서, 고작 이유가 없다는 명분으로 외면하고자 하는 저를 비난하시는 건가요?”
테노리엘 백작은 방금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폐단을 침묵하는 행위, 그 자체를 비난받았다.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해 훈계할 자격이 없다고 지적한 건 무려 그의 딸이었다.
에스메랄다는 충격으로 굳어 버린 백작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중한 직책을 맡겨 주셨으니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오늘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녀는 백작에게 오해를 더해 줄 수 있는 말들을 주워 담지 않았다.
* * *
백작의 집무실을 나선 에스메랄다는 곧장 이동을 통보했다. 짐을 최소화하자 호위 기사 배정과 마차 준비, 이동 중에 먹을 식량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준비는 끝낼 수 있었다. 세 명의 호위 기사가 배정되었고, 그 외에는 에스메랄다의 전속 시녀 둘과 잡일을 할 시종 둘까지. 합해 봐야 여덟 명이 전부였다.
침실에 앉아 기억을 곱씹고 있던 그녀는 출발 준비를 마쳤다는 말을 듣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출발 직전에야 일정을 알게 된 그녀의 형제들이 저택의 입구로 달려왔다. 갑자기 호위 기사가 차출 되었으니 기사단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들이 모르기는 힘들었으리라.
“리디!”
“리디야!”
“작은 천사야!”
“에스메랄다!”
마차에 오르기 전,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잠시간 형제들에게 닿았다.
훗날 전선으로 향하기 위해 해가 뜨기 전부터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는 저들과 부친까지 전선에서 마수의 먹이가 된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그리하여 허망하기까지 한 죽음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가족들이다. 돌아오라 기도하고, 무사하라고 간청하는 것도 모자라, 가지 말라 빌어 보기까지 했건만. 그들은 결국 에스메랄다를 남겨 두고 떠났다.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을 것이다. 악마가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뛰어들겠지. 그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러니 떠날 이들에게 정을 주지 말자. 다시 한번 그들을 잃는 상실감에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쟁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뼈저리게 배우지 않았던가. 저들의 부재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애초에 마음에 들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이미 그 결심대로 부친인 테노리엘 백작까지 협박하고 내려오는 길이 아니던가.
다급히 달려오고 있는 그들을 응시하던 에스메랄다가 몸을 돌렸다. 작은 몸 위로 리본과 촘촘한 레이스가 나풀거렸다. 에스메랄다의 모습이 마차 속으로 사라졌을 때, 그들이 도착했다. 문이 닫힌 마차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그녀의 형제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리디, 영지에 간다고?”
“갑자기 영지에는 왜? 응?”
“우리랑 같이 가자. 며칠만 기다려 주면 알펨 경에게 허락을…….”
“휴가를 내 보마.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지 않겠니?”
마차의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형제들의 얼굴을 외면한 에스메랄다가 창 옆에 달린 짧은 줄을 당겼다.
딸랑, 하고 마부석 옆에 달린 종이 울었다. 마차의 주인이 출발을 명했다. 마부를 겸한 시종이 눈치를 보았지만 다시금 출발 종이 울리자 어쩔 수 없었다.
“리디!”
그녀의 발목을 붙잡기 위한 짧은 부름이 뒤를 따랐지만, 에스메랄다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백작 저는 순식간에 멀어졌고,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황도에서 서쪽에 있는 테노리엘 백작령으로 가기 위해서는 서문을 타고 나가는 게 가장 빠르다. 백작 저는 황도의 남문과 가깝지만 그곳으로 나갔다간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은 황도 외부를 빙 돌아 움직여야 한다. 고로 에스메랄다의 마차는 황도의 남쪽에 있는 백작 저를 나서 우선 광장으로 진입했다.
그녀가 불타올랐으며 수없이 많은 백성들에게 배신당했던 그곳이 시야에 들어오자, 인형의 것처럼 텅 비어 있던 에스메랄다의 얼굴에 검고 질척거리는 감정이 떠올랐다.
“네놈들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마.”
백성들이 배신감과 회한에 점철되어 살아온 모든 순간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지독한 복수심에 이를 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불현듯 한 곳에 닿았다. 마차가 서쪽 대로에 올라서자 창밖으로 높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장의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첨탑들 사이에는 황족이 기거하는 거처가 있다. 지금 에스메랄다가 바라보고 있는 건 황성이었다. 설핏 그녀의 표정 속에 그리움이 스며든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
그 부름은 정말 환청이었나? 에스메랄다는 계속 멀어지는 첨탑을 보며 생각했다.
의문을 느낀 직후 에스메랄다는 실소했다. 남부의 전선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황도에 있겠나. 환청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에스메랄다가 잡혀간 후 처형식이 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사흘이다.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습격이었고,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테몬 후작이 연락을 넣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남부 전선에서 황도까지 온다고. 반정을 준비하던 1여 년간 그를 지독히도 그리워했으니 마지막 순간에 환청을 들은 것이다.
“버리지 못한 감정 때문에 헛소리를 들은 거겠지.”
죽은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으로 수없이 많은 환청을 듣고 환상을 보았던 것처럼, 아르페시스가 온 것이 아니라 오길 바랐던 그녀의 헛된 꿈이 만들어 낸 환청이다. 만약 아니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녀는 이미 선택을 했으니까.
시간이 새롭게 흐르기 시작했으니 미래를 바꾸어 그녀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던 그에게 여인으로 다가간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른 건 그의 사랑을 쟁취하는 미래가 아니라 복수였으니 이번 생에서는 그와의 어떤 접점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다시 만난다면 서로를 적대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에스메랄다는 그가 지키고자 할 사람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아르페시스는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그녀가 가는 길을 방해할 테니까. 그와의 인연은 연락이 두절되었던 1년 전에 끝난 것이다. 이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미련도, 그리움도 다 부질없는 감정이니까.
언젠간 연락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울리지 않는 마법 전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지 않았나.
그녀는 아린 심장을 내리누르며 황성이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복수를 다짐했던 그때, 황성을 바라본 것도 미련 때문일 테니 이제는 그만하자.
* * *
영지에 도착한 에스메랄다의 첫 행보는 지하 창고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그녀가 오래도록 사용했었던 마도구를 찾을 수 있었다. 시전자 주변의 중력을 가중시켜 주는 것 하나, 그리고 불씨를 만들어 내는 것 하나. 그 두 가지를 챙긴 후에는 뒷골목에 방문했다. 방문이라는 표현보다는 무력을 행사해 진입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꽤나 질이 좋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에스메랄다의 앞에는 통통하게 살집이 오른 사내가 엎드려 있었다. 함께 나온 호위 기사가 제압해 그녀 앞에 꿇려 놓은 것이다. 그는 테노리엘 백작 성이 있는 도시에서 활동하는 뒷골목 세력 중, 꽤나 규모가 큰 건달 무리와 유곽을 보유한 이였다.
후드를 벗은 탓에 드러난 그녀의 금발과 녹안 덕분에 엎드려 있는 사내가 에스메랄다의 정체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나를 쓰는 기사를 데려온 와중에 테노리엘 영주 일가가 모두 금발을 타고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고한 백작 부인을 닮아 청록색 눈동자를 타고난 이는 차남과 삼남, 사남. 가주를 닮아 녹안을 타고난 이는 장남과 막내 고명딸뿐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의 나이 때를 고려해 볼 때, 그녀가 영주의 딸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머리를 굴리는 게 빤히 보이는 사내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삭막했다.
“네가 나에게 충정을 바친다면, 그 대가로 영지에서 활동하는 세력을 모두 정리해 주마.”
“예……?”
“아툰 유곽이던가? 그 녀석을 비롯해 다른 유곽과 건달들을 모두 치워 주겠다는 말이란다.”
“어, 어째서…….”
그는 나름 머리를 굴린다고 경계심을 보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의 행동 앞에서 차갑게 웃었다.
“영지의 기생충 같은 것들을 치우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할까?”
“하, 하면 저, 저는 왜 살려…….”
“치워 봤자 새로 생길 것이 빤하니 너를 두고 적당히 관리하려는 게지. 질문은 그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서 선택지를 고르렴.”
“……거절하면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계속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던 사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작 어린아이를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 왜 이리 무서운지 모를 일이다.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다른 놈에게 가 봐야지.”
가기 전에 지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그를 치우는 건 당연하고. 선택을 하라 했지만 결국 그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뿐이다. 마나를 가지지 못한 건달이 마나를 다루는 기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마나는 귀족들만의 전유물이니 뒷골목 포주에 불과한 그가 배울 수 있을 리 만무.
마나 운용법, 마도구, 그리고 일정 규모 이상의 사병까지, 난세 속에서 마나는 귀족들에게 독점되고 있다.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반발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신변을 보호하고, 위협할 수 있는 무력이 귀족의 손아귀에 잡혀 있으니까. 난세 속에서 귀족이 가진 위엄은 그저 돈 많고 태생이 좋은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귀족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지배자였다.
“일어날까?”
“시, 시키십시오.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마른 입술을 적시기 위해 뱀처럼 날름거린 사내가 다급히 답을 꺼내 들었다. 에스메랄다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만간 영주 성에 식자재를 대는 이가 다칠 게다.”
“……네?”
“주기적으로 성내에 드나들기엔 그만한 것이 없지. 새로운 직업을 가져 보렴.”
“예, 예, 아가씨.”
용건을 마친 에스메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은?”
“부, 뷔비르, 사 뷔비르입니다.”
“그래, 조만간 다시 부르마.”
“예, 예, 아가씨. 사, 살펴, 살펴 가십시오.”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그녀가 뷔비르를 등지고 유곽 건물을 나섰다.
* * *
엄격한 규율과 가훈이 존재했지만 테노리엘 백작가에 소속된 이들은 화목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했다. 윗사람이 그것을 허락했고, 실제 백작 일가가 모두 아랫사람에게 엄하기는 할지언정 가혹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최근 그들은 영주 성으로 돌아온 주인 아가씨의 눈치를 보며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다. 영주권을 위임받아 영지로 돌아온 그들의 아가씨는 나흘 전, 병력을 차출했다. 목적은 뒷골목에서 성매매 및 불법적인 마약 등을 거래하고 있는 이들의 소탕.
영지의 골칫거리나 마찬가지인 건달 세력을 소탕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 과정이 문제였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입에서 하달된 것은 생존자를 남기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이후 창녀와 그녀의 사생아를 베지 못해 망설이는 병사를 명령 불복의 죄로 처형하는 일도 있었다. 전사가 아닌 불명예로 인한 처형이었기에 그의 가족은 위로금 한 푼 받지 못했다.
모두 에스메랄다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영지에 제대로 피바람이 불었으니 아랫사람들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에스메랄다가 새로이 똬리를 튼 테노리엘 백작 성은 쥐의 발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적막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에 일어난 에스메랄다는 창가로 다가섰다. 새근새근, 쉬어지는 숨이 차가운 창문에 달라붙어 뿌옇게 변했다.
몇 개인지 세어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돌과 마지막 순간 자신을 집어삼킨 화마. 처형대에 끌려 올라가던 순간부터 불타던 순간까지의 모든 것을 꿈을 통해 보고 울면서 깨어난다. 배신감과 절망은 물론 회한과 비참함, 나아가 헛된 생각까지 품게 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온 직후에는 꾸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황도를 떠나던 무렵에는 꾸었던 것 같다. 그 무렵 잠에서 깨어나면 눈가가 젖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뒷골목에 다녀온 후로는 확실히, 매일 밤 그 악몽을 꾸고 있다.
누군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날을 잊지 말고 반드시 복수를 행하라고. 그녀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악몽의 마지막은 언제나 환청으로 끝난다.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에스메랄다!’
부질없는 환청에 왜 이리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듯 계속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게 스스로가 가진 미련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한심했다.
“난세를 이기고자 하는 영웅과, 난세를 이용해 복수를 취하고자 하는 악귀라니. 재미있기도 하지.”
곁을 지키던 때에도 고하지 못했던 마음이다. 이제 그의 곁이 아니라 반대편에 서게 될 텐데 계속 곱씹어 보아 무얼 어찌하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미련하기는.
“아, 아가씨. 기침하셨습니까?”
조금 붉게 충혈된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세숫물을 들고 들어온 시녀에게로 향했다. 복잡하기만 한 악몽 때문에 그녀의 기상 시간이 빨라지자 영지에서 그녀를 모시는 사용인들도 서두르게 되었다.
“조, 조찬은 어찌할까요?”
신년은 항상 영지에서 맞이하던 주인 일가였다. 그렇기에 영주 성의 시녀들은 에스메랄다의 과거를 알고 있다. 평범한 소녀보다 잘 웃고, 그들이 보았던 귀족 중 누구보다 다정하던 그녀를.
“입맛이 없구나. 따듯한 차를 내오렴.”
“예, 예, 아가씨…….”
그런 에스메랄다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왔으니 눈치를 보는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시녀를 빤히 바라보며 불현듯 입을 열었다.
“너도…….”
내뱉기도 전에 다시 거두어들였지만. 해 보았자 무의미한 질문이다.
에스메랄다는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해 곧장 돌아보는 시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영지에서 한평생을 지냈을 저 시녀가 그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게 무엇인가. 똑같이 마녀라 손가락질하며 멀리서나마 돌을 던졌을지, 그럴 리 없다며 그녀를 비호했을지,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다. 그날을 기억하는 것도 그녀뿐인지라 시녀가 답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에스메랄다는 심호흡으로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털어 냈다.
황도에서 자신에게 돌을 집어 던지던 백성이 일부의 과격한 이들임을 안다. 모든 백성이 그녀의 죽음을 기원한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어딘가에 있는 이들은 에스메랄다가 마녀일 리 없다고 비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구별은 중요하지 않다. 에스메랄다는 백성의 존재 자체를 증오하고 있으니까.
지금의 그녀에겐 악행과 배신을 자행한 이들이 있음에도 다른 선량한 백성을 사랑한다, 라는 논리가 불가능했다. 그녀가 선택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 ‘그렇기에’라는 전제이다.
“지워진 것을 따져 무얼 하려고. 어차피 난세 속의 백성이란 똑같은 것을.”
전쟁이나 무질서한 정치 따위로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 난세. 마수와의 전쟁 80여 년, 현황의 즉위 이후 자행된 부정과 부패 20여 년. 그래, 지금은 난세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오늘 죽지 못했기에 내일을 사는 그런 세상.
벌어먹을 길이 없어 굶어 죽어 갈 거지들과 그런 그들에게 빵 한 조각의 온정을 베풀 여유조차 없는 평민들. 배우지 못해 무지하고, 이끌어 줄 사람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들. 멀고 먼 미래보다 지금 당장의 평온과 이득이 중요한 그들의 이름은 백성이다.
에스메랄다의 심장에는 난세를 살아가는 백성을 향한 증오가 이미 뿌리를 내렸다. 그녀는 세숫물로 간단하게 씻은 후 영주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겨우 백작 성이 있는 도시의 뒷골목을 정리했을 뿐이다. 백작령은 넓고 그곳에 있는 도시와 마을은 무척이나 많다. 그곳들은 물론 나아가 다른 영지의 뒷골목도 정리를 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 * *
정오가 되었을 무렵, 에스메랄다는 정원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채 뷔비르를 앞에 세워 두었다. 오가는 대화가 없는 건 그녀가 눈을 감고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뷔비르를 만나러 나가던 날 호위 기사를 차출한 것은 물론, 그녀가 이번에 병력을 동원한 일까지. 모두 테노리엘 백작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용인들이 우선적으로 따르는 건 백작의 지시다. 그가 에스메랄다에 대한 것을 물어보면 사용인들은 말을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당장은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행보는 백작에게 전달되어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녀가 떠나기 전 백작이 가졌던 오해에 힘을 더해 줄 것이다.
지금 백작은 에스메랄다가 거대한 장벽 속에서 숨어 사는 타락자들을 벌할 방법이 없어 좌절하고 도망치듯 황도를 떠났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어설픈 협박은 백작이 자의적으로 영주권을 줄 리 없으니 그녀가 미리 손을 썼다, 정도로 여기겠지. 그들 대신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뒷골목의 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정도는 있을 법한 일이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동행했던 기사 앞에서 뒷골목을 뿌리 뽑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완전히 없애는 대신 손에 쥐고 통솔하려는 타협적인 모습도 보였다. 함께 뷔비르를 만나러 갔던 기사를 통해 당시의 대화가 백작에게 그대로 전달되리라. 이처럼 현실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모습은 황도를 떠난 이유를 더 확실하게 굳혀 주겠지.
오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가려 버리고, 원하는 것만을 보게 만드니까. 그러니 충분하다. 당분간은 걱정이 없다. 중요한 건 테노리엘 백작이 자신의 오판을 깨닫고 그녀의 진짜 목적을 캐기 시작했을 때다. 그 전까지 쌓아 올려 두어야 할 것이 많았다. 훗날을 위해 세력을 모으면서도 백작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 역시 소홀해서는 안 되겠지.
생각을 마친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래, 마음에 드느냐?”
오늘도 음식 대신 차로 하루를 시작한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앳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예. 그럼요. 어느 분이 주신 건데요.”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가씨가 식자재를 배달하러 온 잡부를 잠시 불러 세운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며칠 만에 적응을 마친 뷔비르가 꼬리라도 흔들 것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뒷골목 유곽과 건달들을 소탕하던 당일, 그는 에스메랄다의 언질에 미리 몸을 피했다. 이제 뒷골목에서 불법을 자행하는 이는 그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 소탕으로 뒷골목 포주나 건달들이 가지고 있던 자금도 챙겼으니 앞으로 나아갈 발판은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인원을 죽였지만 본래의 규모를 회복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뒷골목이란 그런 곳이다. 잘라 내고 뽑아내도 다시금 자라나는 잡초처럼 끈질기지.
물론, 이후 불어나는 모든 세력은 뷔비르의 통솔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간단한 원칙을 벗어난다면 며칠 전의 일처럼 에스메랄다가 다시 치워 버릴 예정이니까.
“배불리 먹여 주었으니 이제 시키는 일을 잘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요, 아가씨.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어른스러움이라곤 전혀 없는 앳된 외모의 에스메랄다가 그 나이의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은 수를 늘려야지.”
“……그게 전부입니까?”
그녀가 명하지 않아도 할 일이 아닌가. 뷔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목줄을 성공적으로 움켜쥔 주인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녹안에서 한심함을 엿본 후에는 꼬리를 마는 개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지만.
“영지 밖으로 넉넉한 인원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많이 늘리라는 말이란다. 언젠가 차출을 할 예정이니.”
“몇… 이나 생각하시는지요?”
“글쎄, 주먹질로 난동을 피울 건장한 청년들을 가득?”
“가득… 이요?”
힐끔 시선을 든 뷔비르가 에스메랄다의 녹안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그는 주인이 된 그녀의 녹안을 마주 볼 때마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위축되었다.
“그렇게 수를 불리면서 서부의 다른 영지들도 조금씩 손을 대면 되겠지.”
“소, 손이라면…….”
에스메랄다의 어두운 녹색 눈동자가 뷔비르를 훑었다.
“설마, 이 조막만 한 영지에서 노는 것으로 만족할 셈이더냐?”
사실 테노리엘 백작령을 작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주인이 변하지 않았던 백작령은 제국 내에서 영지민이 세 번째로 많은 곳이었다. 출산 장려 정책도 있고, 영유아기의 자녀들이 아플 때는 치료비를 빌려주기도 해서 아이들의 사망률이 가장 낮은 영지이기도 하다.
이런 정책은 결국 영지민의 수를 늘려 주기에 지금 백작령의 영지민은 20만을 훌쩍 넘는다. 유사시 창칼을 쥐어 내몰 수 있는 인력이 20만을 넘는다는 의미였다. 무장을 시킬 수 있는 재력도 필요하고. 해 보았자 고기 방패 이상은 안 되겠지만.
하지만 그런 백작령이라 한들 제국 전역, 나아가 대륙 전체로 보자면 좁쌀만 한 크기임은 분명했다. 에스메랄다는 그 점을 짚으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도리질을 치던 뷔비르는 눈앞의 에스메랄다를 보며 깨달았다. 시키는 일만 잘하면 영주권을 가진 에스메랄다는 자신에게 더 많은 먹이를 줄 것이다. 금과 보석, 여자들에 파묻혀 사는 것도 모자라 귀족의 수하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되리라.
뷔비르는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며 비굴하게 그녀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게 에스메랄다는 속을 새카맣게 뒤덮은 복수를 위해 나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 * *
언젠가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던 금색이 붉게 물들고, 푸르던 빛을 잃은 녹색이 화마 속에서 사라지는 광경. 얼굴도, 성별도, 체격은 물론 이름까지, 누군지도 모를 이가 불길에 휩싸여 사그라지는 장면 속에서 선명한 건 색채뿐이었다. 아직 소년에 불과한 아르페시스가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또…….”
그는 지금의 꿈을 악몽이라고 부를 정도로 싫어했다. 깨고 나면 어떻게 이겨 내야 할지 모르는 공허함과 상실감에 허덕여야 했으니까.
잠에서 깰 때면 온몸이 덜덜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밟고 서 있는 땅이 한순간 꺼지는 것 같은 아찔함 속에서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당연한 것들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떨리는 몸을 다독이고 벅찬 숨을 고르는 데 한참의 시간을 들이면, 드디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다.
뭐, 덕분에 기상 시간이 일러진 것만은 조금 마음에 들었다. 악몽을 꾼 이후 푸르스름하게 하늘이 밝아 오던 때 일어나던 그는 해가 뜨기도 전의 고요한 새벽에 깨어나기 시작했으니까.
황제가 찰나의 변덕으로 인해 품은 하녀를 모친으로 둔 2황자 아르페시스는 반쪽짜리인 본인이 황실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이유를 알고 있었다. 훗날 전선으로 향해 황실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선전하고 그곳에서 영예로이 전사하는 것.
실제로는 13세지만 알려지기는 12세인 덕분에 성년까지는 6년 정도가 남았다. 아니, 지금은 겨울이니 고작 5년하고 며칠이겠지.
아르페시스는 그때가 다가오기 전까지 최대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위태로운 전선 속에서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지금 그가 꾸는 악몽에 대해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그 속에서 본 색채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그의 일과가 너무 빠듯했으니까.
침대 옆에 높인 작은 종을 들어 흔들자 기다렸다는 듯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오늘도 일찍 깨셨군요.”
“그래. 씻는 동안 조찬을 준비해 오거라.”
“궁의를 부르는 게 어떠신지요?”
3년 전부터 곁을 지키며 보필해 온 카덴의 조언에 아르페시스는 냉소를 지으며 답했다.
“불러서?”
“…….”
“악몽을 꾸니 수면초라도 처방해 달라 할까?”
“…….”
“그럼 당장에 반쪽짜리는 유약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돌겠지. 되었다. 괜한 말이 나도는 것보단 이게 나은 것을. 일찍 깬 김에 연무장이나 가련다.”
“……예, 전하.”
가볍게 조찬을 챙겨 먹은 아르페시스가 몸을 일으켰다.
지평선에서 나타난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를 때까지는 육체를 단련하고, 하늘의 꼭대기에 달한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머리에 유용한 것들을 집어넣는다.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에는 현재 전선의 실황을 접할 수 있는 황실 서고로 향해 새로운 것들을 읽고 외운다.
단조롭지만 타인보다 1.5배 정도 긴 아르페시스의 하루였다. 5년 전부터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향후 5년 정도는 더 변하지 않을 일과.
황제는 그가 성년이 되면 전선에 파견할 것이다. 세력도 뭣도 없는 반쪽짜리가 황제의 명령에 저항할 방법은 없다. 그 전에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챙겨야 한다. 전선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러니 악몽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털어 버리는 것이 맞다.
잔상처럼 남아 그를 괴롭히는 이 공허함과 상실감도 치워 버려야 한다. 어차피 감정을 포기하는 데는 이골이 나지 않았나.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은 그가 침실을 나섰다. 궁을 다 벗어나지도 못하고 멈춰 서야 했지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은 채찍 소리와 여자들의 높은 비명 소리였다. 정말이지, 저 미친놈이 머무는 궁과 자신의 궁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게 뭐란 말인가?
정원을 통해 오갈 수 있는 두 개의 궁은 대대로 황자들이 우애를 다지기 위해, 황녀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사용하던 곳이었다.
짜증을 내 봐야 변하는 게 없다는 것을 아는 아르페시스는 애써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연무장까진 빙 돌아가야 할 모양이다. 그의 자랑스럽지 않은 형님께서 정원에 여인들을 풀고 난잡하게 놀고 계신 것 같으니까.
아르페우스가 궁을 빙 돌아 걷던 도중 불현듯 말했다.
“내가 반쪽짜리여서 다행이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나를 모조리 가졌으면 나도 저 꼴이 났을 것 아닌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고귀한 인간으로 사느니, 반쪽짜리 천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
“왜?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 가서 고하기라도 할 것이냐?”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황제의 유희에 부인이, 황태자의 유희에 딸이 유린당해 2대에 걸친 원한을 쌓은 시종 라오스. 그는 아르페시스가 얼마 되지도 않는 근위 기사들의 힘을 빌려 신분 세탁을 해 준 뒤 카덴이 되었다.
3년 전, 두 황족을 고발하기 위해 황성 고발소로 가고 있던 그는 황태자가 보낸 기사들에게 잡혔다. 아마 가서 죽을 생각이었겠지. 황족의 죄를 황실 고발소에 묻는 놈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아르페시스는 모포에 싸여 강에 던져진 그를 건져 내서 데리고 왔다.
‘일단은 살아야 뭐든 하지 않겠느냐?’
‘복수를 도와준다는 말은 못 한다. 내 팔자도 너만큼이나 사납거든.’
‘대신 지금 살려 주마. 그러면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겠지.’
‘그때까지 내 궁의 시종장 좀 해 다오. 그거면 된다.’
아르페시스는 그를 살려 주는 대신 자신의 궁에 취직하라고 권했다. 황제가 먼저 물어보는 것에 답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달려가 이것저것 고해바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었다. 꽉 막힌 감시망에 조그마한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를 충정으로 모시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르페시스의 권유가 있던 날로부터 닷새 뒤, 카덴은 얼굴에 큼지막한 흉터를 달고 아르페시스의 궁으로 출근했다. 직접 얼굴을 난도질한 후 신관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았다. 신력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해 주는 것이지 흉터 없이 깔끔하게 치료해 주는 게 아니다. 덕분에 카덴은 얼굴을 감추고 다시 한번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카덴처럼, 죽을 뻔했거나 죄를 뒤집어쓸 뻔했던 이들을 데려온 것이다. 황제의 부당한 억압에 반항할 힘조차 없는 이들이기 때문인지 황제는 그들의 합류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곁에 있다고 황제의 감시망이 약해진 건 아니기에 경시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의 오만한 성정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겠지.
“돌아가려니 번거롭군.”
기껏 일찍 일어났는데. 짧게 혀를 찬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카덴의 걸음도 함께.
악몽 속에서 보았던 색채가 잠시 동안 시야를 가득 채웠지만 그는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튼 것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전선이라는 이름의 사지로 걸어 들어가기까지 고작 5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