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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11)화 (111/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7화

모래사장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 머물던 곳인데. 이상하게도 태어나서 처음 바다에 온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차에서 내린 내가 바다로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 자식 어디 갔어.”

설마 벌써 간 건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더니, 이게 환생하면서 끈기는 내다 버렸나.

내가 늦은 게 맞기는 한데……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 놈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괜히 서러웠다.

바닷바람은 성가셨고, 머리카락은 제각기 자아를 가진 것처럼 움직여 댔다.

고작 사람 하나 못 만났다고 이렇게 기분이 더러워질 수가 있나.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불안을 가라앉힐 겸, 나는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모자를 뒤집어썼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내가 맞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내 등 뒤쪽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새롭고도 익숙한 얼굴을 가진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어 보이더니, 내 쪽으로 걸음을 이었다.

남자가 걸어오는 길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그 선명한 발자국들이, 마치 그가 살아온, 그리고 기억하는 긴 세월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더니. 없어서 놀랐잖아.”

솔직히, 그냥 놀랐다기보단 겁을 먹은 쪽에 가까웠다.

“슬슬 오실 것 같아서요.”

잠시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가 핫팩을 꺼내 들었다. 내 한쪽 손을 잡아 올린 그가 내 손바닥 위에 핫팩을 올렸다. 그리고 손을 감싸 주먹을 쥐게 했다.

“딱 맞춰서 가져왔죠.”

다시 주어진 삶에서 가진 첫 만남과 같았다.

“그때 내가,”

“제 손에 쥐여 주셨잖아요.”

“그랬지.”

오는 길에 핫팩을 얼마나 열심히 흔들어 댄 건지, 손안의 온기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핫팩을 쥔 손의 힘을 살짝 푼 내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리온입니다.”

“……이번에도?”

“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번뜩 떠오른 질문에 리온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성은? 설마, 오 씨야?”

“이 씨요. 아쉽게도.”

이리온이라니. 오 씨는 아니라지만 어쩐지 친구들이 놀렸을 것 같은 이름이었다. 이리오라는 듯이 놀려 댔을 친구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뭐 하고 살았어?”

“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어요. 제가 역마살이 좀 껴서.”

“떠돌아다녔다고?”

“네. 민들레 홀씨처럼요. 자세히 들려 드릴까요?”

“응. 듣고 싶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그 외에도 언제, 어떻게 나를 알게 되었는지 등.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는지, 리온이 시간을 가늠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내일 바쁘세요?”

“아니, 한가한데.”

“저도 한가한데. 이거 운명인가 봐요.”

가벼운 목소리로 운명을 들먹인 그가 언제나처럼 실실 웃어 댔다.

고작 그런 걸로 운명이라니. 운명치곤 너무나도 저렴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는 핀잔 대신 그를 따라 웃는 쪽을 택했다.

*

남자는 태어났다. 아주 머나먼 이국땅에서.

남자의 부모님은 그가 그들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운명이라 말했으나, 리온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태양의 이름을 가진 아버지는 이른 죽음을 통해 과거의 죄를 청산한다는 유언과 거액의 유산을 남긴 채 죽었다. 어쩐지 아버지에게는 ‘죽었다’라는 말보다는 ‘소멸했다’ 혹은 ‘사라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에도 어머니와 동생으로 이루어진 그의 가정은 화목했고, 그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자랐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제외하면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 전날 핸드폰을 충전하지 않고 잔 것 정도의 삶이었다.

그런 삶이 조금은 지루했던가. 어느 순간부터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형, 어디 가?”

“별구경 가려고.”

“나도 갈래! 어디서 구경할 건데?”

“몽골.”

“형은 무슨 그런 걸 옆 동네로 산책 가듯이 말해……?”

그 떠도는 행위의 범위가 점점 커져 세계가 될 줄은, 그 스스로조차도 알지 못했다.

*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었으며 여행은 즐거운 일이었다.

덥고 끈적한 곳, 더럽게 추운 곳. 그는 가리지 않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따금 생존 신고 겸 사진을 찍어서 보내 달라는 어머니와 동생의 말에 그는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을 어느 누군가가 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여행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삶을 살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사진을 실은 여행 도서까지 내게 되었다.

‘……이걸 누가 봐 줬으면 하는데. 그게 대체 누구지.’

그렇게 방황하던 중 향한 곳이 한국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다에 몸을 던지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본능적으로 저 사람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리온은 자신의 생각대로 몸을 움직여 여자를 붙잡았다.

“죽지 마요.”

“저기요,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아직 볼 게 많은 세상이에요. 세상은 아주 넓어서, 당신이 보지 못한 것들이 가득할 거예요. 먹어볼 것들도 많고요. 그러니까 지금은 죽지 말아요. 네?”

“나 안 죽어요. 죽을 생각도 없고요.”

괜한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민망해진 그는 여자 대신 바다에 뛰어들고 싶어졌다.

‘하, 더럽게 쪽팔리네…….’

하지만 조금 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나열했던지라, 그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했다.

민망한 탓에 여기저기로 눈알을 굴렸다. 그러다 눈앞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덮은 마스크와 푹 눌러쓴 모자 사이로, 여자의 두 눈동자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분명 눈을 피하고 싶었는데, 피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먼저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라니.

그리고 그는 먼저 바닷가를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핫팩 하나를 손에 쥐고 돌아온 그날 이후, 바닷가에서 봤던 여자의 눈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갑자기 손안에 들어온 따스함 역시 잊지를 못했다.

그렇게 그가 손안의 온기를 간직한 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는 사진 파일을 정리하다가 피로해진 눈을 문지르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옆자리에 앉아 멍하니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마스크와 검은 모자를 쓴 여자가 끌고 온 남자를 두들겨 팬 다음, 망치로 남자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어우…… 엄마, 저런 걸 왜 봐요.”

“왜 보긴. 재밌으니까 보지.”

“난 무서워서 못 보겠네.”

마스크와 모자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이 섬뜩하게 느껴진 것도 잠시.

‘그 사람이다.’

그는 그 안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찾았다. 틀림없이 그때 바다에서 본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잇는 대신, 화면 속 여자의 모습에 집중했다. 살인을 마친 여자가 모든 증거를 없앤 뒤 마스크를 벗는 장면이 이어졌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이 참…… 신비로워 보였다.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익숙하지.’

저 사람이 정말 드라마 속에서만 사람을 죽였을까? 사람을 두들겨 패는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정말 사람 몇 명을 죽여 봤을 것 같았다.

“누구예요?”

“응?”

“저 사람 누구예요?”

남자의 물음에, 그의 어머니는 약간의 흥미가 어린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넌 평생 이런 거에 관심 없을 것 같더니, 별일이다.”

그의 어머니는 끝까지 배우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학생 때도 안 좋아하던 연예인을 다 커서 좋아한다는 말로 그를 놀릴 뿐이었다.

결국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온 그는, 혼자 핸드폰을 꺼내 들어 TV 화면 상단에 있던 드라마 이름을 검색해야 했다.

그는 그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되었고, 마지막 화를 본 어느 날 밤, 그는 지금까지 꾼 모든 꿈을 합친 것보다도 긴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생에서의 기억을 되찾았다.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여자의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그것이 모두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형당한 첫 번째 삶,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번째 삶,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오래오래 함께한 세 번째 삶. 그리고 다시 주어진 네 번째 삶.

“이 정도면, 운명이지.”

네 번씩이나 다시 만났으니까 운명 맞지 않나.

여태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는 우연 취급하더니, 눈을 뜬 그가 얻어맞을 소리를 지껄였다. 모든 기억을 찾은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과거의 기억을 곱씹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래서 유일한 연결 고리인 바다로 향했다.

그 사람도 이곳에 한 번쯤은 다시 오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가 정착 아닌 정착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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