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10)화 (110/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6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언니에게 웬 미친놈이 있다는 것 사실을 알렸고, 다음 날 아침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어제 내내 잠을 설쳤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자야 했다.

‘열이 나나?’

시야가 흐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오늘 점심때 친구가 집에 놀러 오기로 했던 것 같은데…….

큰일이다. 오지 말라는 연락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사실상 기절에 가까웠지만 그걸 인식하지 못했다.

눈을 감기 무섭게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억이 들어오는 순간은 부드럽지 못했고, 거친 파도와도 같아서 몸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잠시 뒤, 모든 기억을 되찾은 내가 드라마처럼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병원인가?

‘병원 맞네.’

열심히 눈알을 굴리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서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나를 타박했다.

“너 미쳤어?”

“……나 왜.”

“아프면 병원에 와야지. 왜 집에서 그러고 있어?”

약속대로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기절한 나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눈을 뜨자마자 옆에서 잔소리를 퍼부으니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잠잠히 서도영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그를 가라앉히기 위해 녀석의 옛 이름을 불렀다.

“도스야.”

“왜, 뭐.”

내가 키득거리자 퉁명스럽게 답한 서도영이 잠시 멈칫했다.

“어……? 너 뭐야?”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의 눈이 커졌다. 불같이 화를 내던 녀석의 표정이 바로 무너지는 꼴이 참 우스웠다.

“쓰러진 덕분에 기억 찾은 거 같으니까 잔소리 그만해.”

“하.”

서도영은 한참을 똥 마려운 개마냥 병실 안을 휘젓고 다니다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길래 내가 먼저 물었다.

“너는 언제 다 알았어? 꽤 일찍 안 거 같은데.”

어렸을 때부터 칼바도스라는 이름을 가진 술을 내 앞에서 흔들어 댔으니, 꽤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기억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옛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국어사전으로 내 머리를 내리친 날.”

“……나한테 때려 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네.”

“어. 때려 줘서 고맙다.”

대답에 영혼이 없었다. 뭐, 혼자서만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 원하지도 않는 기억을 찾게 한 나를 원망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서도 내가 칼바도스랑 친구가 되다니. 이거 참 질긴 인연이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오랜 친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혼자 답답했겠네.”

“그놈 아니었으면 이미 답답해 죽었지.”

그놈.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놈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레이델, 그러니까…… 나한테 고백하고 튄 견우 그놈이다.

‘우산 가져가. 서도영 거니까 월요일에 학교에서 주면 돼. ……왜 웃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아서요. 아, 그땐 역할이 반대였지.’

꽤 오래전 일이었지만, 그 녀석이 내게 존댓말을 하던 그때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레이델이 비를 맞고 있던 내게 로브를 둘러 주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견우는 그 일을 계기로 기억을 찾았고, 서도영과 친구가 되었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끼린 과거의 일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다시 만난 서도영과 견우가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 앞에선 그의 입이 열리지 않은 거다.

‘지금은 내가 기억을 찾았기 때문에 이놈과 내가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야.’

아무래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앞에선 직접적으로 과거의 일을 언급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서도영이 답답하다며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제 입을 내리치지 않았던가.

그 모습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입을 내리치던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입이 안 열려서 곤란하네요.’

어제 만난 그 남자.

‘리온.’

기억을 찾으니 그 사람이 리온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다른 기억은 없으시고요?’

‘음, 저희가 그때 말고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있긴 한데. 저만 기억하나 보네요.’

‘아…… 네.’

‘그런데 너무 유명해진 거 아니에요? 딱히 원망하는 건 아닌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찾아오기 힘들었어요.’

리온은 나를 알아봤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우리가 처음 바다에서 만났을 땐 나를 몰랐던 게 확실한데.’

나를 만난 이후에 모든 걸 기억하게 된 건가.

리온이 언제 기억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와 한 약속대로 나는 유명해졌고 그는 정말 나를 찾아왔다. 리온이 나한테 접근하는 게 어려웠을 뿐이지.

그렇게 처음 바다에서 만나고 몇 년 뒤에야 다시 호텔에서 만났는데.

분명 그랬는데…….

‘내가 미친놈 취급을 했네.’

그러고 보니 오늘도 계속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지.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병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거리니 지금 가면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만날 수 있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주워 신었다.

“어디 가?”

“리온 만나러.”

순간이지만 리온의 이름을 들은 그의 눈이 흔들렸다.

“……벌써 찾은 거야?”

“어. 그 사람은 이미 나를 알고 있더라고.”

“가지 마. 너 방금 눈 떴잖아.”

“나를 기다리고 있겠대.”

그는 계속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오늘은 날이 너무 추웠다. 날이 따뜻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추위를 피해 실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평상시엔 얍삽하게 굴면서도 쓸데없이 미련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아주 예전에, 뒤늦게 약속 시간이 적힌 편지를 본 내가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게 나갔을 때도 리온은 그 자리에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당장 리온을 만나서 차갑게 식은 그의 손을 잡아야 했다. 이번에는 핫팩을 쥐여 주는 대신 손을 잡고 싶었다.

의사에게 몸이 멀쩡하다는 말을 들은 내가 바로 병원을 뛰쳐나와 서도영의 차를 훔쳐 바다로 가려 했다. 하지만 서도영은 그 꼴로 어딜 가냐며 나를 집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친구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나는, 제대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뒤 나갈 준비를 했다.

이거, 하마터면 잠옷 바람으로 바다까지 갈 뻔했다. 나는 내 체면을 지켜 준 그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서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워다 줄까?”

“아니, 괜찮아.”

나는 정말 괜찮았다. 몸 상태도 멀쩡했고, 가는 길에 사고를 낼 정도로 흥분한 상태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수년 만에 남편을 만나는데 그 자리에 친구를 데려가긴 좀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차에 올랐고, 짧게 인사를 했다. 오늘따라 녀석의 작별 인사가 긴 것도 같았다.

*

차에 오른 서도영은 주차장을 떠나는 친구의 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인연을 다시 한번 만났다. 그는 이것이 운명이라 믿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 관계를 그저 질긴 인연이라고만 여기고 있을 테니까.

언제 기억을 찾았냐는 물음에 거짓말을 했다. 그의 친구가 국어사전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 건 사실이었지만, 그 사건은 기억을 찾게 된 계기가 아니었다.

그가 기억을 찾은 그날은, 오랫동안 친분을 이어 온 두 가족이 함께 유람선을 탄 날이었다.

그날엔 불꽃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의 오랜 친구는 불꽃이 그려지는 까만 하늘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부터 자꾸만 귓가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폭죽 소리인가.’

서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축제가 끝난 뒤에도 계속 그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그 소리가 들려서, 귀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그게 심장 소리라는 걸 알았다.

“……말도 안 돼.”

내가 걔를?

내가 걔를 좋아한다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그날 밤, 그가 잊고 있었던 모든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와 기억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아 답답했다. 혼자만 모든 걸 기억하는 게 억울하고 짜증 났다.

빨리 친구가 기억을 찾았으면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애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럼 리온 놈을 찾아 나서지 않을 테니까.’

그 녀석을 만나지 못하면, 나한테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홀로 외롭게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던 중, 레이델을 만나게 되었다.

이견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전생에서 전하지 못한 마음을 이번 생에서는 전해야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서도영은 그 녀석을 보며 등신이라고 생각했다.

‘고백했다가 차이면…… 정말 끝이잖아.’

지금처럼 편하게 놀 수도 없다. 오히려 불편해지겠지. 지금도 양가 부모님이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시는데, 차이기라도 하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평생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언젠가 저 애가 자신을 좋아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는데, 이제 그런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이다. 리온을 찾았다고 했으니 말이다.

짙은 우울을 삼킨 그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