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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9)화 (10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5화

겉옷과 신발을 벗고 바다에 들어간 나와 달리, 나를 구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린 남자는 옷을 벗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바다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옷이 많이 젖어 있었다.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참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다 젖으셔서 어떡해요.”

나는 겉옷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핫팩 꺼내 남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음 같아선 제 옷을 걸쳐 드리고 싶은데, 작을 것 같아서요.”

“따뜻하네요.”

핫팩을 쥔 남자가 고맙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저 웃음이 참,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었다. 그 증거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눈이 마주쳤고, 남자는 마스크와 모자 사이에 자리를 잡은 내 눈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대화가 길어지면 내가 누군지 알아볼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이 사람한테 욕을 했던가?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짜고짜 나를 내동댕이친 사람한테 욕을 안 했을 리가 없다.

‘했을 거야, 했어.’

꽤 험악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욕을 했다는 쪽으로 판단이 기울었다.

도와주려다가 한시우한테 욕을 먹었다고, 상황을 이상할 정도로 부풀린 글을 올릴지도 모른다.

나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 네. 저도 죄송했습니다.”

멀쩡하게 생겨서 제정신 아닌 놈들을 꽤 많이 봤기 때문에, 나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

몇 년 뒤, 드라마 촬영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 겨울에 바다에서 키스신을 찍는댄다. 장면이 예쁘긴 하겠지만 살이 떨리는 추위에 얼굴이 절로 찡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그때 와 본 곳이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한 번 와 본 곳이라 그런지 꽤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랑 재밌는 일이 있기도 했고.

그때 당시엔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이름 모를 남자와의 기억을 떠올린 내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책 한 권을 꺼냈다. <민들레 일지>라는 제목의 여행 에세이였다.

작가의 필명은 홀씨. 작가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가 역마살 낀 돈 많은 남자라는 사실 정도만이 알려져 있었다. 아, 국내 해외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사진도 잘 찍고 글도 맛깔나게 써서 나는 얼마 전에 그의 책들을 구매했다.

그리고 책을 본 나는, 그때 이곳에서 만난 이름 모를 남자의 말을 인정했다.

세상은 아주 넓어서, 내가 보지 못한 것과 먹어 볼 것들도 가득하다고.

그 말이 맞았다.

남자의 말대로 세상은 정말 넓었고, 내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득했다.

‘예쁘긴 하네.’

내가 책에 정신을 팔고 있자, 오빠의 친구이자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내 옆을 기웃거리더니 함께 책에 실린 사진을 구경했다.

“너 요즘 맨날 이거 읽더라. 그렇게 여행이 좋으면 직접 가 보지?”

“직접 가는 건 귀찮잖아요. 준비할 것도 많고.”

공감한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목에 자리를 잡은 목도리에 시선을 두었다.

“하긴. 그런데 너 이제 목도리 잘 매네? 어렸을 땐 엉엉 울었다더니.”

“아, 지금은 괜찮더라고요.”

“너 지금 완전 목도리도마뱀 같아.”

“그러는 오빠는 김말이 같거든요.”

나는 말없이 옆에 있던 빨간 털모자를 살짝 걸쳐 줬다. 김말이에 떡볶이 국물을 찍은 것 같은 모습이 참 웃겨서 웃음이 다 나왔다.

*

촬영이 끝난 뒤, 나는 귀가를 거부했다.

“그냥 근처에서 자고 가자.”

오늘따라 느낌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뭐랄까…… 아,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럭이랑 교통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느낌이 온 건 처음이라,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가 찝찝했다.

같이 온 두 사람 중 한 명은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보내 줬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나를 담당해 온 매니저 언니 한 명과 바다 근처 호텔을 잡았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었다.

창문을 통해 바다를 구경하는데, 어느 남자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 추운 겨울날, 한 남자가 모래사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곧 망부석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는 중, 다시 한번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어?”

내가 식사를 멈추자, 앞에 앉아 있던 언니가 물었다.

“왜 그래?”

“오늘 왠지…… 누구 열애설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라.”

“너 아니야?”

나는 실없는 농담을 웃어넘겼다. 그리고 만 원씩 내기를 걸었다. 나는 열애설이 터진다로, 언니는 아니다로. 나는 오늘 중으로 열애 기사가 터질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으로 얻게 될 만 원을 어떻게 쓸지 신나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날 저녁, 누군가의 열애설은 아니고 불륜 기사 하나가 터졌기 때문이다.

‘이럴 거면 그냥 얌전히 집에 갈 걸 그랬나.’

예상이 척척 빗나가는 걸 보면, 그냥 차를 타고 돌아갔어도 사고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내기대로 언니에게 만 원을 넘겨줬다.

*

호텔 시설이 궁금했던지라, 나는 호텔을 둘러보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누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 있었는데, 내가 바깥에서 고개를 잘 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라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곧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신나게 호텔 로비를 가로지르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발 앞에 내 카드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내가 원래 이렇게 손힘이 없었나.’

신발의 주인이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주워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신발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

그때 만난 남자다. 아주 예전에, 나를 모래 위에 내동댕이치고, 바다에 빠진 내 핸드폰을 찾아준 사람이었다.

내가 몇 년 전에 만난 남자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단순히 그때 그 상황이 강렬해서……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함부로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 눈앞의 남자는 쉽게 잊기 힘든 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가만, 혹시 어제 바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이 남잔가?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모자와 마스크 사이에 자리한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만난 적 있죠?”

내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어떻게 눈만 보고…….”

“쉽게 잊기 어려운 눈이라서요.”

나는 남자의 얼굴이 잊기 힘든 얼굴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내 눈이 잊기 어려운 눈이라고 말했다. 우연처럼 다시 만난 그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재미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물었다.

“저를 기억하세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조금 전 대화로 내가 자신을 기억하는 걸 확인했을 텐데. 굳이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하죠. 그때 바다에 빠진 제 핸드폰 찾아주셨잖아요.”

“……아.”

뭐지? 설마 지금 아쉬워하는 건가?

분명 제대로 기억하는데 왜 아쉬워하는 건지…… 좀처럼 남자의 감정 상태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다른 기억은 없으시고요?”

“음, 저희가 그때 말고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난 적이 있던가요?”

……분명 없는 걸로 아는데.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을 길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다면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남자가 살짝 웃으며 내 질문에 답했다.

“있긴 한데. 저만 기억하나 보네요.”

‘만난 적이 있다고?’

놀란 내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입이 안 열려서 곤란하네요.”

그렇게 말한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손으로 입을 내리쳤다. 서도영도 가끔 저렇게 입이 안 열린다면서 제 입을 내리쳤었는데. 딱 그 모습이 생각났다. 남자가 입을 내리치는 모습이 살벌해서 조금 쫄았다.

“아…… 네.”

“그런데 너무 유명해진 거 아니에요? 딱히 원망하는 건 아닌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찾아오기 힘들었어요.”

뒤늦게 자신이 투덜거렸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남자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내 입가에선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뭐야, 이 사람. 스토컨가?’

나는 이제야 남자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남자를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없는데, 그는 다른 곳에서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내가 너무 유명해져서 찾아오기 힘들었다고? 그럼 처음부터 내 직업을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그리고 찾아오긴 왜 찾아온단 말인가.

‘설마 오늘도……?’

이번에 바다에 온 것도 나를 찾아서 왔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차게 식었다. 이 남자는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자극하지 말자.’

나는 그냥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고 온 것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탄 뒤, 열심히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러 댔다.

답답할 정도로 문이 닫히는 속도가 느리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내일도 그 바다 앞에 서 있을 거예요.”

뭐 어쩌란 거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아련하게 웃었다.

“당신을 기다릴게요.”

“허.”

바다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냐…….’

미친 새끼는 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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