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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8)화 (108/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4화

견우 역시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관에서 신발을 주워 신었다.

“집에 가게?”

그렇게 물은 그가 내 옆에 쭈그려 앉아 신발을 신었다.

“어. 너는 어디가?”

“나도 이제 집에 가려고.”

“자고 간다며?”

분명 서도영네서 자고 간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지?

그러자 견우는 저쪽에서 기절하듯 잠든 서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한테서 술 냄새 나서 싫어.”

나는 끌끌 웃으며 문을 나섰고, 견우는 내 뒤를 따라왔다.

그나저나 술 냄새라. 나한테서도 나려나. 집에 가서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킁킁거렸다. 후각이 둔해진 건지, 내 몸에서 나는 냄새라 맡아지지 않는 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옆에서 함께 걷던 견우가 나를 보며 웃었다.

“너는 괜찮아. 다 좋아.”

새끼, 편애하네. 뭐 나도 셋이 있을 땐 대놓고 녀석을 편애하는 편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둘 사이에 껴 있으면 이 녀석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 내가 그의 말에 가볍게 답했다.

“그래? 고마워.”

“진짠데.”

“응. 나도 진짜인 거 알아.”

“……아니, 너는 몰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그 순간, 나는 무언가가 아주 단단히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공포영화가 시작된 기분이었다. 더 무서운 것이 튀어나오기 전에 재빨리 화면을 꺼야 하는.

‘그런데 이게 꺼지지가 않네.’

끄는 방법도 모르겠고. 나는 속으로 욕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반쯤 체념한 동태 눈깔로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아주 예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돼서 못 했어. 그 사람이 오면 영영 말 못할 것 같으니까 그냥 지금 할게.”

아주 예전부터?

‘대체 그게 언제야.’

뭐,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가 아주 예전부터 나를 좋아하는 녀석과 친구를 하며 하하호호 웃어 댔다는 건 잘 알겠다.

‘나만 친구로 생각한 거네.’

혼란에 빠졌기 때문인지,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견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이 나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좋아한다는 게 그 ‘좋아한다’라는 의미일 줄은 몰랐지. 그냥 사람이 사람에게 가지는 보편적인 호감인 줄 알았다.

내가 이놈을 좋아하는 것과, 이놈이 나를 좋아하는 건 다른 의미였다.

‘……이 미친놈.’

그냥 말하지 말지. 불편할 거면 혼자만 불편하지. 왜 나한테 말해서 나까지 불편하게 만든단 말인가. 괜히 엉뚱한 곳으로 원망이 튀었다.

‘아니야. 아직,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

정문 근처에 있는 돌로 머리를 내리쳐서 기억을 잃게 만들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나는 빠르게 포기했고, 그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준비한 사람처럼.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해.”

‘그래서 뭐.’

나더러 어쩌라고.

이 녀석은 나에게 ‘나도 네가 좋아’와 같은 답을 기대하고 고백한 게 아니다. 그냥, 자기 속이 편해지고 싶어서 고백한 거지.

이 관계가 끝났다는 아쉬움과 후련함이 뒤섞인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쳐져 있었다.

“……그래서 뭐, 사인해 주랴?”

견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었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대화를 끝으로 셋이서 재밌게 노는 날은 끝나 버렸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가족 동반 모임에서 만난 서도영에게나 그 녀석의 행방을 물었다.

“견우 걘 요즘 뭐 하고 사냐?”

“군대 갔다.”

“…….”

여러모로 할 말 없게 만드는 놈이었다.

*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라 가족끼리 겨울 바다 구경을 갔다.

겨울이라 그런지 바다에 사람이 없었다.

날은 추웠지만 오랜만에 바다를 보신 부모님은 신이 나셨고, 카메라를 든 오빠는 열심히 두 분의 기념사진을 찍어 댔다. 그리고 나는…… 소품으로 가져온 비눗방울 머신건을 쏴 댔다.

그렇게 사진을 찍은 뒤엔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2주 전 오빠랑 사전 답사를 온 곳이라 가족 모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부모님을 숙소로 모셔다 드린 나와 오빠는 다시 저녁 산책을 나섰다. 나는 다시 한번 차에서 꺼내 온 머신건을 쏴 댔고, 오빠는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이 다 조용하고 점잖아지진 않는다는 것을 나와 오빠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추운 날씨 탓에 코끝이 붉어진 오빠가 물었다.

“여기 근처에 화장실 있나?”

“아까 차 세워 둔 곳에 하나 있던데.”

“화장실 좀 다녀올게. 차에 두고 온 거 있으면 말해. 오면서 가져오게.”

“가져올 건 없고, 이것 좀 차에 가져다 놔 줘. 더 안 나온다.”

비눗물이 동나서 그런지 더 이상 총에서 방울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 전까지 신나게 가지고 놀던 총을 건넸고, 아쉬운 얼굴로 장난감을 받아 든 오빠는 화장실로 떠났다.

장난감도 없고, 같이 놀 사람도 없고.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심심해진 나는 발밑에 놓인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바다에서도 물수제비가 되나.’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돌을 날리는 연습을 했다. 몇 번의 연습 후 바다에 돌을 집어던졌지만 금세 밀려든 파도가 돌을 삼켜 버렸다.

한 번 더 해 볼까 싶었지만, 나는 예전부터 물수제비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깔끔하게 재도전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대체 언제 와?’

나는 오빠한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넣어 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이거…… 느낌이 안 좋다.

핸드폰이 원래 이렇게 거친 느낌이 아닌데? 나는 다급히 핸드폰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뭐야, 이거?”

주머니 속엔 핸드폰이 아닌 돌이 들어 있었다. 조금 전 물수제비를 한답시고 주워 든 돌이었다.

그럼 내 핸드폰은? 내 핸드폰은 어디 갔지?

다시 한번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런 미친…….”

설마 방금 내가 바다에 집어 던진 게 내 핸드폰이야?

나는 허망한 눈으로 바다를 들여다보다가 뒤통수를 몇 대 때렸다.

“환장하겠네, 진짜!”

다행인 점이 있다면, 던지는 데 소질이 없어서 핸드폰이 꽤 얕은 곳에 빠졌다는 것이다.

깊은 곳에 들어가진 않은 것 같은데, 빨리 가서 건져 오면 되지 않을까.

결국 나는 신발과 겉옷을 벗어 모래사장 위에 던졌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다에 발을 들였다.

“아악!! 차가워!”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핸드폰이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까지 들어오자 허벅지가 반 정도 잠겼다.

내가 바닷물로 손을 집어넣어 모래 위를 더듬던 그때였다.

“당신 미쳤어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웬 미친 남자가 나한테 미쳤냐며 화를 냈다.

누가 누구한테 미쳤냐는 건지,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추워서 입술이 달달 떨렸다.

설마 나 때문에 바다에 들어온 건가?

더 생각할 틈도 없었다. 이 미친 남자가 내 양팔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무슨!”

당황한 내가 몸부림쳤고, 나를 바다에서 끌어낸 남자가 나를 모래 위에 내동댕이치듯 내려놨다.

그리고 말했다.

“죽지 마요.”

이게 무슨 개소리지……? 설마 내가 죽을 생각으로 바다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뒤집어쓴 탓에 남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핸드폰이 죽어 간다.

다시 바다에 들어가려 했지만 남자가 내 팔을 붙잡은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요,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아직 볼 게 많은 세상이에요. 세상은 아주 넓어서, 당신이 보지 못한 것들이 가득할 거예요. 먹어 볼 것들도 많고요. 그러니까 지금은 죽지 말아요. 네?”

그는 계속해서 바다에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으며 설득했다.

짧게 한숨을 쉰 내가 입을 열었다.

“나 안 죽어요. 죽을 생각도 없고요.”

훌륭한 오빠의 조기교육 덕분에, 거지 같은 일이 생기면 죽고 싶다는 생각 대신 나를 곤란하게 한 저놈을 죽이자는 생각을 하게 된 나였다.

“내 핸드폰은 죽어 가고 있겠지만.”

“……아?”

“이제 손 좀 놔주실래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손을 물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도와 드릴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이미 젖은 김에요.”

이왕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다듬자는 건가. 나는 남자를 무시한 채 바다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나를 따라 바다에 들어온 그는, 조금 전의 내가 그랬듯 바다에 손을 담가 모래 위를 더듬었다.

잠시 뒤, 넓은 호주머니 같은 바다를 뒤적거리던 그가 짧은 탄성을 뱉었다.

“아.”

“찾았어요?”

“여깄네요. 이거 맞아요?”

“아, 맞아요! 이거예요.”

나는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남자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아닙니다. 그보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방해한 거 같아서요.”

이 사람이 나를 내동댕이치지 않았다면 핸드폰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다.

핸드폰이 있던 곳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켜지긴 하나요?”

“아, 네. 켜졌어요.”

켜지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바다에서 나온 나는 얼른 모래 위에 둔 겉옷을 입고 신발을 주워 신었다.

다행이네요, 핸드폰이 켜졌다는 말에 그렇게 답한 남자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 포근한 미소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마음이 놓이기 무섭게, 바닷물에 흠뻑 젖어 덜덜 떨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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