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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7)화 (107/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3화

“너희 둘 다 다시 올 줄 알았어. 우산을 하나 가져가 놓고, 빌려주긴 뭘 빌려줘? 넌 사람이 부르면 좀 돌아봐야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가?”

예전부터 자기가 있는 쪽을 한 번도 봐주질 않았다며 서도영이 한참을 불평했다.

‘내가 그랬나?’

오늘을 제외하면 딱히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대충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크게 선심 쓰듯 말했다.

“앞으론 자주 돌아볼게.”

“……안 믿어.”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푹 젖은 견우에게 수건을 건넸다.

“기사님 다시 들어오신대. 안에서 옷 갈아입고 차 타고 가.”

“그래? 고마워. 그리고 나 이제 다 기억난 것 같다.”

“뭐?”

허무한 표정으로 견우를 배웅하던 때와는 반대로, 그의 눈이 번뜩였다. 견우는 별말 없이 생긋 웃어 보이며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음…… 상황을 보아하니, 서도영이 원하는 건 견우의 기억이다.

‘그래서 집까지 데려온 거지.’

조금 전 시큰둥한 표정을 보이며 견우가 비를 맞으며 돌아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기억이 났다니까 눈 반짝이는 것 좀 봐라, 어휴.

‘뭔진 모르겠지만 견우가 기억하는 게 되게 중요한 건가.’

하긴, 저 녀석은 예전부터 사람마다 조건을 따지긴 했다.

서도영이 지금의 운전기사 아저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사님이 ‘운전 실력’과 ‘무거운 입’이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우가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한 조건은 ‘기억’이었다.

적재적소에 직원을 배치하듯이 누군가가 저 녀석과 가까워지기 위해선 어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말을 정제할 틈도 없이 불쑥 입이 열렸다.

“나는 너랑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갖춘 사람이야?”

“나는 너를 기준으로 그 조건들을 세웠지.”

내가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그는 말과 말 사이에 정적이 자리를 차지할 틈을 주지 않고 답했다.

친구로서 내가 갖추지 못한 조건을 다른 사람이 보완하고, 다른 사람이 갖추지 못한 조건을 내가 보완한다는 뜻인가. 솔직히 내가 그 기준이 된다니 찜찜했다.

가만. 그럼 내가 충족한 조건이 사라지면, 이 새끼가 나를 바로 팽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이 자식이 성격이 더럽긴 해도 같이 놀면 재밌는데.’

서로 선을 지키면서 재미있고 편하게 놀 수 있는 친구도 드물다.

이 관계를 나름 오래 유지하고 싶었던 나는, 내가 그의 친구로서 충족한 조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이놈이 나랑 친구가 됐을 때 부탁한 게 있었지.

‘응. 앞으로 천천히 크고 많이 울게. 그러니까 계속 나 싫어해 줘.’

나랑 결혼하는 게 무서워 엉엉 울었던 놈이다. 싫어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는 나를 친구로 인정했다. 그러니 나는 이놈을 그런 방향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된다.

‘이건 쉽지.’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잠시 뒤, 이 집 도련님 전용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차는 견우를 싣고 떠났다. 사람이 떠나 텅 빈 현관을 바라보던 내가 팔을 매만졌다.

“쟤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오른팔이 아리는 것 같은데, 운명인가?”

“심장 정도는 아려야 운명이지. 가서 팔에 파스나 붙여.”

*

<달의 미로>라는 소설 하나를 읽게 됐다. 이벤트를 하길래 충동적으로 결제한 로맨스 소설이었다.

소설은 혼인 동맹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해 제국의 아카데미로 도피한 여주인공 셀레네가, 제국의 1황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뭐, 재밌긴 하네.’

소설을 다 읽은 내가 홀린 듯이 공지와 이벤트 글이 있다는 작가의 sns 계정에 들어갔다. 작품 세부 설정 등 여러 글들이 있었다. 대충 공지를 확인한 내가 어플에서 나가려던 순간, 작가의 새 글이 상단에 떴다. 바로 방금, 딱 1분 전에 올라온 글이었다.

[새벽이라 푸는 TMI]

‘이건 뭐야.’

나는 그 글을 클릭했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타래글을 확인했다.

새벽이라 하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예전에 친구와 장난삼아 전생 체험을 했다고 한다.

모든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작가에게 손을 내민 여자가 있었다. 작가가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하자, 그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켜 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신기한 건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수첩이었는데, 작가는 꿈에서 수첩에 적힌 문자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문자는 한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전생 체험 이후에 쓴 소설이 바로 <달의 미로>였다.

공지 계정에 있기에 부적합한 글이라고 생각했는지, 몇 분 뒤 작가는 글을 지워 버렸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았고, 글이 올라와 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

하지만 그 글이 잠시나마 내 흥미를 잡아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

견우가 꽤 괜찮은 애였는지, 서도영은 견우를 계속 곁에 뒀고 집에도 자주 불렀다.

내가 옆집에 자주 놀러 간 만큼 우리 셋은 빠르게 친해졌고, 성인이 된 이후로도 시간이 되면 함께 놀았다.

그 둘이 같은 대학에 갔기 때문인지 셋의 관계는 제법 괜찮게 유지됐다. 친구들의 대학 진학 후로는 내가 은근 겉돌게 될 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그런 게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내가 혼자 아파서 끙끙대던 날이 있었는데, 견우 이놈이 죽집을 털어 왔다. 입맛에 맞는 걸로 골라 먹으라나 뭐라나. 그때 당시엔 황당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웃긴 기억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이 펑펑 내린 한겨울의 어느 날, 나는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뭐? 연우 쌤 결혼 안 하신다고? 그럼 결혼식이랑 돌잔치는??”

“아…… 비밀이랬는데, 깜빡했다.”

아차 싶었는지 술김에 진실을 털어놓은 서도영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입 막은 놈을 추궁하느니 다른 놈에게 묻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 옆에 있는 견우에게 물었다.

“야 이견우, 진짜야?”

“……응.”

그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과외를 관둔 지 약 6년 만에, 연우 쌤이 독신 라이프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뭐야. 이거 완전 카이사르 간접 체험 아닌가? 배신감이 쩔었다.

6년 동안 이어져 온 거짓말에 뒤통수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아니 그럼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어떻게 6년 동안…….”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눈 뒤집혀서 사고칠까 봐 무서워서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대.”

쌤도 참, 나를 대체 뭘로 보시는 건지. 그냥 솔직하게 말했으면 그랬냐고 웃어넘겼을 텐데.

‘결혼식 초대해 준다는 말에 내가 그렇게 기뻐했나?’

옛날에 내뱉은 말 때문에 혼자 덜덜 떨고 계셨을 생각을 하니 웃겨서 웃음이 다 나왔다. 하여간 쌤은 마음이 너무 여리시다니까.

나는 그저 내가 현재 상태를 유지해야 할 적당한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결혼식과 돌잔치 초대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나는 그걸 무사고로 유명해져야 하는 이유로 삼았다. 나는 유명해져야 하니까.

‘그런데 왜?’

분명히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그걸 알면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진 않을 텐데. 혹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싶을 정도로 속이 갑갑해졌다.

고깔 모양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운 서도영이 테이블 구석에 머리를 처박았을 즈음이었다.

텅 빈 과자 봉지를 쪽지 모양으로 접던 견우의 입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가 오던 날, 네가 나한테 우산을 씌워 줬을 때. 나는 전부 다 기억났어.”

“그래? 뭔진 몰라도 좋겠다, 너는.”

나도 너처럼 갑자기 뭔가가 떠올라서,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를 좀 알고 싶다.

짧게 한숨을 쉰 내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술 때문인가, 오늘따라 나이에 맞지 않는 그의 낡은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내가 연우 형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날 네가 나한테 우산을, 아니지.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네가 연우 쌤 동생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날 너한테 우산을 씌워 주지 않았을 거라고?

‘……뭐, 그랬겠지.’

견우는 말을 잇는 것을 포기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뒷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형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은 저를 구하지 않으셨겠죠?’

가만, 나 이거 어디서 들어 본 대사 같은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 영화였나? 아니면 드라마?

왜 갑자기 그 말이 귓가에서 울리는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취했나 싶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최근에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많이 받은 건가.

진지하게 병원행을 고민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나는 견우가 접은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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