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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6)화 (106/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2화

옆집 아주머니의 몸이 나아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늘 뻑뻑하게 굳어 있는 그놈도 조금은 풀어지겠지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식을 듣고는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TV를 켰다.

아주머니는 최근 베이킹을 시작하셨다는데, 그 덕에 종종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편하게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간식 배급 건으로 우리 집에 온 서도영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뭘 봐.”

“너 보고 있잖아. 방금 눈 마주쳤으면서 뭘 물어.”

“왜 봐. 구멍 나겠네.”

덤덤히 제 검지를 치켜든 그가 말했다.

“너 그거 잘 어울리네.”

녀석의 손가락은 내가 입은 보라색 맨투맨을 향해 있었고, 그걸 본 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뭔들 안 어울리겠냐…….”

나는 뒤쪽으로 몸을 젖힌 채 한쪽 팔을 이마 위에 얹었다. 내 거만한 모습이 우스웠는지, 곧 웃음 섞인 한숨 소리와 함께 소파가 출렁였다.

털썩, 내 옆자리에 앉은 그가 집에서 가져온 머핀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나저나 이놈이 갑자기 칭찬을 할 리는 없고…… 아, 옷이 탐나나? 그러고 보니 얘가 좋아하는 브랜드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예전부터 보라색을 좋아하기도 했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소나기라는 걸 들었을 땐 웃음을 절로 나오더라.

음, 속에 검은색 티셔츠 입었는데. 한번 입어 보게 빌려 달라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건네줄 의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전 그가 그랬듯이 내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빌려줘?”

“……관두자.”

맥이 빠졌는지 그가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보니 그냥 순수한 칭찬이었나 보다.

*

아, 옆집에 노트북을 두고 왔다.

‘X플릭스로 영화 보려고 했는데.’

주말 오후,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옆집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평소처럼 익숙하게 옆집에 들어선 순간, 내 몸이 굳고 말았다. 이 집에서 처음 보는 뒤통수를 가진 사람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 오셨나?’

연락 좀 하고 올걸…….

아무리 이 집에 드나드는 손님이 없다 해도 내 행동이 잘못된 건 맞았다.

나는 새삼 잘못 들인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깨달으며 조용히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놀란 내가 멈칫하는 사이, 내 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내 또래의 남자애였다.

‘학교 친군가?’

서도영이 집에 학교 친구를 데려온 걸 처음 봐서, 조금 얼떨떨했다. 당황한 나머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고, 나는 말없이 그 애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분명 낯선 사람인데…… 왜 어디서 본 얼굴 같지?’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뭔가 개수작을 부리는 기분이 들어서 관뒀다. 그때 바로 주방에서 기어 나온 서도영이 내게 알은척을 했고,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얼굴이 되게 낯익은데.”

“연우 쌤 동생. 나랑 같은 반이야.”

“아! 어쩐지 익숙하더라.”

선생님이랑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때 선생님이 보여 준 사진 속 애가 저렇게 큰 거였다. 내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놈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그것뿐이야?”

“뭐가 더 있어야 해?”

얼굴 본 소감문이라도 써야 하는 건가. 내가 되묻자 그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없지.”

“뭐야.”

요즘 들어 애가 좀 맹해진 거 같다. 뭐, 맹해져도 성적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친한 선생님 동생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착한 미소를 지으며 그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 연우 쌤 동생이라며? 선생님이랑 엄청 닮았다, 안녕!”

서도영은 그런 내 표정이 거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언제나처럼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차분함을 겹겹이 두른 고운 남자애가 나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웃는 얼굴이 선생님을 닮아 있었다.

“안녕, 너는 그 사람 닮았다. 그…… 얼마 전에 사극에서 공주로 나온 사람.”

“내가 걘데?”

“어?”

친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그 모습을 본 내가 소리 내 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 셋은 롤케이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의 이름은 견우라고 했다. 이름에 개 견 자를 쓰는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 이야기를 하다 집으로 돌아왔고, 얌전히 방에서 읽다 만 소설을 읽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이 조금 아파서 책을 덮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노트북을 안 가지고 왔잖아.”

세수하러 온 토끼가 옹달샘에서 물만 먹고 돌아갔듯이, 나는 그 집에서 롤케이크만 주워 먹고 온 것이다.

‘나는 짐승도 아닌 인간인데 왜 그런 실수를.’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몇 대 때린 뒤, 나는 다시 옆집으로 터덜터덜 기어들어 갔다.

“왜 다시 왔어?”

“……노트북을 안 챙겼어.”

“바보야?”

“몰랐는데 그랬나 봐.”

생각보다 자기객관화가 느리다며 놀려 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말보다는 겉옷을 입고 현관으로 나서는 견우가 내 시선을 끌었다.

“집에 가는 거야? 잘 가.”

“응, 안녕.”

견우가 상냥하게 웃었다.

서도영과 함께 견우를 배웅한 나는 2층에 올라가 내 노트북을 가져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던 그때,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가 보였다.

“뭐야, 날씨 왜 이래. 미쳤나?”

“빨리 가 봐야 하는 거면 거기 있는 우산 써. 급한 일 없으면 비 그치고 가든지.”

소나기라 금방 그칠 것 같은데, 그냥 여기서 조금 놀다 가는 게 낫겠다. 괜히 축축해지기 싫기도 하고.

“야, 네 친구는 우산 있어?”

“없겠지. 나갈 때 빈손이었잖아.”

주말에 놀러 와서 그런지, 메고 있는 가방도 없었다.

“……다시 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전화해 봐.”

“음.”

굳이? 라는 표정이었지만 그가 알겠다며 느릿느릿 전화를 걸었다.

“안 받네.”

“그럼 내가 앞에 나갔다 오지 뭐. 있으면 우산이라도 주고 올게.”

“네가 왜 가.”

“연우 쌤 동생이니까?”

“아니, 야 잠깐만-”

나는 망설임 없이 현관 앞에 세워져 있던 우산을 들고 정문을 나섰다. 그리고 서도영의 물음을 곱씹었다.

‘내가 왜 가냐니.’

사실, 선생님 동생이 아니면 비를 맞고 가든 말든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내 친구도 아니고 서도영 친군데 뭐.

게다가 지금 보니 서도영도 견우라는 애를 기껍게 여기지는 않는 기색이라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눈치챘다. 서도영은 그 애에게 흥미가 식었다.

아니, 그럼 집에는 왜 불렀지? 자기가 처음으로 집에 데려온 학교 친구 아닌가?

가능성은 두 가지다.

‘집에 초대할 만큼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견우가 생각만큼 괜찮은 애가 아니었거나.’

아니면 서도영 그 새끼 성격이 이상해서.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성격 이상한 그놈과 달리, 연우 쌤은 엄청 좋은 사람이었다.

예전만큼 자주 얼굴을 보진 않지만 나와 서도영은 스승의 날마다 선생님한테 연락을 넣었다.

사고 안 치고 일 잘하면, 결혼식이랑 돌잔치에 초대해 주기로 약속도 했는데!

그때가 열다섯 살이었나? 선생님은 더 유명해진 걸 축하한다며 내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

하지만 여기서 더 유명해져야 한다고 생각한 내가, 대형 사고를 쳐서 유명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상담을 했다. 원래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이 빨리 퍼진다는 근거를 대면서 말이다.

그때 갑자기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었지.

선생님은 자기가 결혼할 때까지 내가 사회면에 나오지 않으면 나한테 결혼식과 돌잔치에 초대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선생님과의 약속은, 내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엔 선생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다.(n년 뒤, 나는 연우 쌤이 비혼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선생님의 동생을 쫄딱 젖은 채로 집에 보내라고?

견우가 어떤 녀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나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직 집 근처겠지.

내 예상대로 견우는 바로 집 근처에 있었다.

다시 서도영네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빨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지, 그는 빗줄기 속에서 달리고 있었다.

“견우야!”

내 부름에 그가 뛰는 것을 멈춘 채 주위를 살폈고, 나는 바로 달려가 우산을 씌웠다. 우산 아래에서 영화처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내 오른팔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갑작스러운 통증에 당황한 나처럼, 견우는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나한테 반한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건 순간에 불과했다.

“……아.”

“우산 가져가. 서도영 거니까 월요일에 학교에서 주면 돼.”

나는 냉큼 그에게 우산을 쥐여 주었다. 그러자 얼굴의 물기를 닦은 그가 작게 웃었다.

“왜 웃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거 같아서요. 아, 그땐 역할이 반대였지.”

갑자기 웬 존댓말? 역할이 반대라는 건 또 무슨 소린지…….

내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 애는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 짧은 탄성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손에 들린 우산을 본 그가 물었다.

“그런데 너도 우산 하나밖에 없잖아. 이거 나한테 빌려주면, 너는 어떻게 가게?”

“어…… 그러게?”

조금 전의 내가 그랬듯, 견우가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나를 다시 서도영네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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