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외전 1화
아주 어렸을 때, 나는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했다. 혼자 잠들기엔 방이 너무 넓었고, 침대 밑에선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이제 둘 다 자야지. 시원이도 방으로 가자.”
“난 안 졸린데…….”
내 방에서 더 놀다 가면 안 되냐고. 그렇게 어린 내가 칭얼거리자, 오빠가 방 안의 보조등을 켜며 말했다.
“꿈에서 놀면 되지.”
“꿈에서?”
“응. 먼저 자고 있어. 그럼 오빠도 얼른 잠들어서 너한테 놀러 갈게.”
오빠는 꿈에서 만나자고 인사했고, 나는 기다리고 있겠다고 답했다.
내가 이불을 덮어 주는 아빠의 손을 거절하지 않자, 엄마 아빠가 안도하며 웃었다.
나는 그날 아주 좋은 꿈을 꾸었고, 그날 이후 꿈에서 만나자는 그 말은 우리 집의 굿나잇 인사로 자리 잡았다.
엄마 아빠는 오빠가 나를 달래기 위해 그냥 던진 말이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옛날에 꿈에 나온 여자애가 나한테 그렇게 인사했어.”
그 말을 꿈에 나온 여자애가 알려 줬단다. 오빠는 꿈에서 그 인사를 배워 온 거고.
한 손에 크레파스를 든 오빠가 스케치북을 넘기며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애, 시우 너랑 닮았다?”
“진짜?”
“응. 기다려 봐, 오빠가 그려 줄게.”
한참 동안 크레파스를 들고 씨름을 하던 오빠는 뿌듯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그림을 자랑했다. 그리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하나도 안 닮았어.”
“……그래? 닮은 것 같은데.”
회색보다는 은색에 가까운 긴 머리카락과 빨간 눈을 가진 그 여자아이는, 동화 속에나 나오는 마녀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그려 달라고 해야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나와 오빠, 둘 다 그 여자아이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꼭 마법에 걸린 것처럼.
*
시간이 흘러 우리 집은 이사를 갔다. 옆집은 엄마 아빠의 친구 부부가 사는 집이었는데, 나와 동갑인 남자애가 있다고 들었다.
엄마는 친구를 만나게 해 주겠다며 나를 그 집에 데려가 소개했다.
그 집 아주머니가 꽃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정원에는 꽃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서도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애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도망쳤다.
“쟤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부끄러워서 저러나?”
그랬다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치지 않았을까?
2층 계단에 서 있던 저 녀석은, 분명 내 이름을 들은 후에 도망쳤다. 얼굴이 아주 하얗게 질린 채로 말이다.
나는 민망해하며 사과하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내 친구가 될 그 녀석을 찾으러 갔다.
아주머니의 조언대로 그 녀석은 2층에 있는 텐트 안에 숨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텐트에 쳐들어간 내가 물었다.
“너 왜 도망가.”
이미 한참을 울었는지 녀석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던 서도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난…… 너랑 결혼 안 해. 너랑 결혼하기 싫어.”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밑도 끝도 없이 나온 황당한 소리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다행히 바로 정신을 차린 내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나도 너랑 결혼 안 할 건데?”
“정말……?”
“응. 너 그거 때문에 도망쳤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별말 없이 눈을 깜빡거리자, 서도영이 흐느끼며 제 행동의 원인을 설명했다.
“우리 아빠가 나중에 너랑 결혼하면 딱이겠대. 나는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하는데에! 그러려면 나중에 너랑 결혼을-! 끄흑, 흐윽!”
나는 이 녀석이 엄마 아빠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찌들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때 당시엔 녀석의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집에 아픈 어른이 있으면 아이가 빨리 성숙해진다는 말을 나중에야 이해했다.
나와 결혼하는 제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암담했는지 서도영이 서럽게 울었다. 그런데 울어도 적당히 울어야지. 너무 서글프게 울어 대니까 슬슬 짜증이 났다.
‘아니, 누가 너랑 결혼한대?’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울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이 녀석이 더 크게 울 것 같아서 생각을 바꿨다. 서도영의 옆자리에 앉은 내가, 그와는 반대로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한테 결혼하지 말고 평생 같이 살자고 했는데.”
자기만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하는 줄 아나? 나도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하는 거니까, 나랑 우리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면 없는 일이 된다.
그 뜻을 알아먹은 그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울음을 그쳤다.
“다행이다, 킁,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할까 봐…… 그래서 나한테 결혼하자고 할까 봐 무서웠어.”
“안 좋아해. 난 나보다 키 작은 울보는 싫거든. 두 배로 다행이지?”
“응. 앞으로 천천히 크고 많이 울게. 그러니까 계속 나 싫어해 줘.”
싫어해 달라니. 그런 부탁은 처음이었다.
참 우습게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면 아주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못할 것도 없다 싶어서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대답에 서도영은 안도했고,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안도했다.
시작은 요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온갖 장난을 함께 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날의 굳건한 다짐과 달리, 서도영의 키는 아주 빨리 자랐고, 그는 잘 울지 않았다.
우는 대신 잘 웃었지. 그래, 웃는 건 보기 좋으니 됐다.
……그런데 솔직히 키는 좀 짜증 났다. 그 녀석의 키가 너무 많이 자라서 나중에는 배알이 꼴릴 정도였다.
*
매주 수요일, 나와 서도영은 우리 집에서 함께 논술 수업을 듣게 되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주장하는 글을 쓰거나 매주 책 한 권을 읽고 토론하기 등의 활동을 하는 수업이었다.
우리 엄마의 지인의 지인인 연우 쌤이 우리의 수업을 담당했는데, 선생님의 얼굴이 아주 재미있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연우 쌤은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고운 남자였다.
어느 날, 수업을 듣기 싫었던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연우 쌤, 저 교재 잃어버렸나 봐요.”
“쌤 저거 거짓말이에요! 쟤 글 쓰기 싫다고 교재 찢어서 변기 물에 넣고 내렸어요!”
“야!!!”
하여간 쟨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후…… 선생님, 저는 공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넌 나랑도 안 맞아.”
“고마워.”
옆에 앉은 서도영의 말에 짧게 답한 내가 유리잔에 든 물을 단숨에 비워 냈다. 그리고 빈 잔을 머리에 털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선생님이 물었다.
“……시우야, 지금 그거 어디서 배웠어?”
“티비에서 봤어요.”
“그래, 그렇구나……. 음,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해.”
이유를 물어보자, 나중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처참한 내 성적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단 공부를 해 두면 미래의 선택지가 넓어진다나.
다른 사람이 했으면 걸러 들었겠지만 연우 쌤이 하는 말이라 귀담아들었다.
“시우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모르겠어요. 근데…….”
“근데?”
“엄청 유명해져야 해요.”
유명해지고 싶어요, 가 아니라 유명해져야 해요.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지은 선생님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냥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유명해지면 사람들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준다는데. 그런 삶이 부러웠나 보지, 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 유명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선생님은 서도영에게도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수업을 시작했다. 이번 책은 투표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다들 책 몇 번씩 읽었니?”
“전 한 번이요.”
“저는 두 번이요.”
서도영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독한 새끼…….
한 번 읽기도 힘든 걸 두 번이나 읽어 오네.
‘재미도 없던데.’
하지만 옆에 앉은 독한 놈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수업에 집중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슬슬 우리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선생님은 쉬는 시간을 가지자고 말했다.
쉬는 시간 동안 간식을 먹던 선생님은 우리에게 동생 사진을 보여 줬는데, 핸드폰 액정 속에는 선생님과 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예쁘장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몇 살이에요?”
“너희랑 동갑.”
“아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저 녀석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이어지는 서도영의 말을 흘려들으며 그런 작은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운 좋게도 특별 편성된 드라마 <허난설헌>에서 허난설헌의 어린 시절을 맡게 되었고, 내가 바라던 대로 유명해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누군가의 딸과 누나, 여동생 등을 연기하며 살았다.
……가만, 그런데 이게 내가 바라던 게 맞나?
사실 이것이 나의 바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유명해져야 하는 거니까 말이다.
‘바람까진 아니고, 그냥 하나의 목표 정도인가?’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뿌리를 내린, 알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달려야 했다.
*
“이 술 이름이 칼바도스래. 너는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라고. 어느 날 서도영이 물었다. 미성년자의 손에 있으면 안 되는 제품을 든 채로 말이다.
“……무슨 생각?”
“이름을 들었을 때 드는 느낌이라든가, 뭐 그런 거.”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내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칼바도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드는 느낌이라…… 아니, 그건 그렇고 쟤는 왜 저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봐?
내 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장난 아니게 부담스러웠다.
떠오르는 것도 없고, 시간을 끌면 더 부담스러워질 것 같아서 대충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이름이 세 보이긴 하네.”
그러자 서도영은 몹시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넌 진짜…… 멍청이야. 다른 쓸데없는 건 다 잘 기억하면서, 하.”
“아니, 그게 뭔데? 알면 뭔지 말해 주든가.”
“나도 진짜 말하고 싶은데, 입이 안 열려.”
“뭐야 그게.”
서도영은 이어지는 내 말을 무시한 채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