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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4)화 (10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4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이제 네가 나를 따라서 심장을 찌르는 일이 아주 어려워졌으면 좋겠거든.

“그러게요. 이러면 안 되는데.”

얼굴을 가린 손을 뗀 리온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인기척을 느낀 나와 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쟤 왜 저래……?”

등 뒤에서는 아주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끏, 꺽, 끄윽.”

아래층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레이델이, 어느새 다락방에 올라와 입안에 주먹을 넣은 채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본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쟤가 왜 울지? 아니, 그나저나 얘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거지?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이 망할 놈은 앞으로 고꾸라진 채 잠들고 말았다.

‘혹시 내가 어디 가서 문제가 될 말을 했던가.’

나는 조금 전 나와 리온의 대화를 곱씹었다.

일단……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나와 리온 둘 다 직접적으로 흑마법을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

리온은 레이델을 질질 끌어 방으로 옮긴 뒤,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혹시 자다가 토를 할까 걱정이 돼서 나는 레이델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주었다.

그렇게 방을 나가려던 때, 갑자기 눈을 뜬 레이델이 내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깼네? 깼으면 옷 갈아입고 자.”

하지만 눈이 마주친 그는 내 소매를 놓지 않고 다시 꺽꺽대며 울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왜 울어?”

“공녀니임.”

“왜?”

“분명 죽고 싶으셨다고…… 그게 정말입니까?”

설마 그 말 때문에 운 건가?

딱히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달래듯이 새로운 사실을 덧붙였다.

“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천천히 눈물을 멈춘 그의 입에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입니다. 지금은 살고 싶으셔서. 저도 아주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건 너무 아픈 기억이었거든요. 저는 공녀님이 아프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레이델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고 있다. 레이몬드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겠지. 그래도 확인차 물었다.

“예전에 그랬다는 건, 지금은 아니란 뜻 맞지?”

“예, 공녀님 덕분입니다. 어느 이야기 속 영웅처럼, 투명 망토를 두르고 저를 구하러 와 주셨으니까요.”

나와 같은 시간을 떠올린 그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웃었다. 그러다 내 뒤에 있는 리온이 신경 쓰였는지 레이델이 작게 물었다.

“리온 경은…… 공녀님을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죽는 이야기를 읽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예전부터 죽고 싶어 했다. 어느 날에는 해가 너무 쨍쨍해서, 어느 날에는 바람이 부는 것이 짜증나서.

그렇게 죽고 싶었던 이유 수천 가지가 있었는데, 리온은 그걸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 직전의 순간에, 내가 갈등하게 만든 사람.

그 정도면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이유로 충분하겠지.

그 사실을 인정한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델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눈가의 물이 말라 있었다.

*

다음 날, 몸은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영원히 환청에 시달릴 걸 걱정한 지난밤이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귓가를 맴돌던 소음도 멎었고, 머리도 아프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몸도 가벼워졌고.

‘역시 흑마법 손절이 답이었어.’

그 환청과 두통은 다신 흑마법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등이었던 거다.

이른 아침, 한결 개운해진 몸을 일으킨 내가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목적지는 내 방 창문에서 보이는 절벽이었다.

나는 절벽에 선 채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벽가의 작은 돌들이 절벽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는데, 돌이 바다에 빠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거 까딱 잘못하면 죽겠네.’

다행히 그 밑으로 몸을 던지고 싶다는 충동보다는 아찔함이 우선이었다. 나는 의도치 않게 내가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절벽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내리시려고요?”

방금 뒷걸음질 친 걸 다 봐 놓고 저런 말을 하네. 고개를 돌린 내가 리온을 흘겨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농담입니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왔지? 이쯤 되면 리온이 나한테 위치 추적 장치를 달아 놨다고 의심해 볼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의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직전까지 구경한 바다처럼 파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너는 언제나 나를 찾아오네.”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그는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굴었고, 그의 답을 들은 나 역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네 역할이지.”

그래도 말이다, 우리에게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너를 데리러 갈 거다. 아주 옛날이지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나는 리온을 바라보며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게 분명…… 첫 번째 삶에서의 약속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내 손으로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내 발로 너를 데리러 갈 테니까.’

저렇게 약속해 놓고 데리러 가지 못했다. 칼바도스한테 체포당해서 처형대로 질질 끌려갔지.

오히려 처형장에 있는 나를 찾아온 건 리온이었다.

‘리온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어진 두 번째 삶에서도 그는 나를 만나러 왔다.

‘이번에도 리온이 먼저 나를 만나러 공작저에 들어왔고.’

그는 언제나 한발 먼저 나를 찾아와서 내 곁을 맴돌았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땐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고. 내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던 때, 리온이 말했다.

“네. 그러니까 다음에도 제가 아가씨를 찾아갈게요.”

“또……?”

내가 가려고 했는데…… 그럼 엇갈리잖아, 이놈아.

당황한 탓에 표정 관리가 안 됐나 보다. 눈이 마주친 리온이 대놓고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그 표정이 참 작위적이었던지라, 긴장감이 줄었다.

“그 반응은 대체…… 아, 그래요. 네 번이면 지긋지긋하실 만도 하지.”

“어. 슬슬 지겨울 때 되지 않았나? 원래 뭐든 딱 세 번까지가 적당하잖아. 그래서 다음엔 다른 사람을 좀 만나 볼까 해.”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이렇게 매일 제 얼굴만 보고 살면, 다른 놈들 얼굴은 엄청 흐려 보일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는 그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자기가 다 봤는데, 다른 놈들은 나랑 안 어울린댄다.

그 뒤로도 이어지는 재롱에 한참을 웃던 내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나 해. 다음에는 내가 너를 만나러 갈 거니까.”

“음…… 제가 가는 게 나을 텐데요.”

“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구렸다.

‘설마 내 말을 못 믿나?’

뭐, 리온이 나를 못 믿는다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첫 번째 삶에선 직접 데리러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한 주제에 처형당했다. 두 번째 삶에선 잘 다녀오라며 그를 전쟁터에 보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니 무작정 내 말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리온의 입에선 전혀 뜻밖의 이유가 흘러나왔다.

“저는 경력이 있으니까요. 세 번이나 잘 찾아왔으니까 네 번째도 잘 찾아갈 수 있겠죠. 그러니까 아가씨는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자신만만한 미소를 걸친 그가 어깨를 폈다.

‘오 경력직…….’

그 말에 갑자기 신뢰도가 확 높아져서, 나는 줏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이 경력직이면 나는 전과자인 셈이지.’

괜히 서로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양쪽 다 엇갈리는 것보단 이쪽이 나으려나. 그 사실을 빠르게 인정한 나는 곧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나는 아주 유명해져야겠다. 네 눈에 띄기 쉽게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네가 나를 더 빠르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

꽤 괜찮은 방법 같았는지, 아니면 그 말이 마음에 든 것인지. 리온이 활짝 웃었다.

“그거 좋네요. 분명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아가씨는 어디서든 반짝반짝 빛나실 테니까.”

설마 이렇게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내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지. 전과가 있는 나면 몰라도, 리온이 그럴 리 없었다.

나는 리온의 얼굴에 그려진 뚜렷한 미소를 보며, 그가 다시 한번 나를 찾아올 것을 확신했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다음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리온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던 길,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그나저나 기분 탓인가. 어제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데.”

“아. 잠을 잘 잤거든.”

“정말요?”

“응. 환청도 안 들리고, 머리도 안 아프고. 몸 상태가 아주 좋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달라진 게 있었다. 정확히는 뭔가가 사라졌다.

그 무언가의 부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목 부분을 더듬었다.

‘이거구나.’

언제부터였을까, 더 이상 목이 갑갑하지 않았다. 줄곧 내 목에 걸려 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이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정면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그렇게 해방감을 만끽하며 웃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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