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3화
공작저 주치의에게 차마 환청이 들린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저번처럼 루카스의 스승을 찾아가 강도짓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환청이 들린다고. 그렇게 반복되고 강조되는 소리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니 뭐라도 내놓아 보라고.
몇 시간 뒤, 의원은 염소똥처럼 생긴 약들을 가득 담은 갈색 병 하나를 건넸다.
무슨 약인지 들키면 미친 사람 취급 받을까 봐 무섭다고 했더니 병에 평범한 영양제로 표기해 주더라.
기쁜 마음으로 병을 받아든 것도 잠시, 두 번째 삶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약을 먹고 기억에 문제가 생겼었지.’
환청이 들리고 아플 때마다 약을 먹어 댔더니 틈만 나면 기억이 끊겼다. 나중에는 내가 무슨 말과 무슨 일을 했는지 종이에 적어 둬야 할 정도로 말이다.
‘……설마 같은 약은 아니겠지?’
과거의 기억에 불안한 마음이 든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너무 자주 복용하면 기억이 끊긴다거나, 그런 부작용은 없나?”
“술이랑 커피랑 같이 드시지만 마세요. 식욕이 떨어지고 잠이 많아지긴 할 겁니다.”
다행히 예전에 먹었던 약과는 다른 약인 모양이다. 그녀의 답에 안도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이랑 술을 동시에 먹지 않으면 되는 거지?”
“……복용 기간 동안 술은 손대지 마십쇼, 그냥. 아픈 분이 왜 그러십니까?”
메이를 데려오지 않은 탓인지 무서울 것이 없었던 의원은 내가 나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한참을 떠들었다.
잔소리는 길어졌고, 환청에 섞인 잔소리를 버티지 못한 나는 냅다 그녀의 집을 뛰쳐나와 저택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
바로 방으로 올라갈 생각이었건만, 문을 넘기 무섭게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쓰러졌었다면서 도대체 어딜 다녀오는 거니?”
“머리 아파서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이미 주치의에게 들으셨겠지만 요즘 몸 상태가 안 좋아요. 많이는 아니고, 엄청 조금.”
결음을 멈춘 내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왕 아픈 김에 백작령에서 이틀 정도만 놀다 올까 합니다. 다음 주면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정말 조금 아픈 게 맞아? 네가 원래 워낙 튼튼했어야지……. 한겨울에 황궁 호수에 빠져도 멀쩡하던 애가, 안 아프던 애가 갑자기 이러니까 걱정된다.”
아직도 귓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어머니의 말 끝부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마터면 어머니와 대화중이니까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나는 혼자만의 외로운 소음 속에서 어머니와의 대화를 겨우 마무리했고, 의원이 준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메이는…… 나에게 편지 하나를 쥐여 줬다.
“이게 뭐야.”
“시몬의 왕세자 저하께서 보내셨어요.”
리오스가?
보낸 사람의 이름을 듣고 나니 괜히 기분이 찝찝해져서 편지 봉투를 열기 싫어졌다. 나는 혀를 차며 봉투를 뜯었고, 내 생각보다 훨씬 짧은 내용의 편지가 나를 반겼다.
[쾌유를 비네^^]
‘이 새끼가 나 아픈 걸 어떻게…… 아.’
공작저에 시몬의 첩자가 있나 싶어 소름이 돋았지만 바로 떠오르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율리안 이 음습한 미친놈이 시몬의 왕세자한테 내 이야기까지 보고하고 있었던 거다.
내 등짝에서 피가 난 걸 셀레네가 율리안에게 말했을 테고, 율리안은 리오스한테 그대로 말했을 테지.
내가 아파서 셀레네가 많이 걱정한다. 뭐, 이런 내용을 보고했을 테니 리오스가 알 법도 하다.
‘객식구 주제에 입이 참 방정맞네.’
바로 쫓아낼까 했지만 어차피 곧 제 발로 나갈 거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율리안이 두 번 다시 공작저에 발을 들일 일은 없을 테니까.
왕비와 칼린은 죽었고, 리오스는 셀레네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혼인을 피해 제국에 도망치듯 유학 온 셀레네는 겨울이 되면 왕국으로 돌아가겠지.
애초에 두 사람이 공작저에 머물게 된 건 셀레네가 왕국에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비와 칼린이 처형당하며 그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두 사람이 제 집을 두고 공작저에서 지내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펜을 들어 리오스에게 셀레네의 생일을 알려 주는 편지를 썼다. 나한테 신경 끄고 네 동생한테나 신경 쓰라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나는 공작저 사람들 몇 명을 데리고 앱솔룬령으로 향했다. 처음엔 조용히 다녀올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새서 사람 여럿이 따라붙었다.
결국 사람을 추가해 저택에 있던 슈아와, 휴식기인 슈바, 메이, 시즈, 리온과 함께 쉬고 오기로 했다.
아, 리온을 체포한 체르티와 닉스 경까지 데리고 가게 됐다. 리온을 잡은 상으로 휴가를 갔어야 하는데, 두 사람 다 휴가지를 정하지 못해 휴가가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칼바도스와 레이델에게도 연락을 넣었는데, 칼바도스는 바쁘다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공작저에 머물며 체르티와 닉스 경과 친분이 생긴 레이델은, 바다 구경이 하고 싶다며 나를 따라왔고.
요양지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지어 둔 작은 별장이었다.
얼마 전부터 골골거리는 나와 달리 건강한 인간들뿐이라 사실상 요양을 해야 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냥……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놀아라.”
말이 끝나자마자 체르티와 닉스는 바다로 뛰어갔다.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을 보던 레이델이 물었다.
“같이 안 가십니까?”
“어. 저녁 먹을 때까지 혼자 조용히 쉬고 싶어.”
다른 고용인들이 있다는 핑계로 메이와 리온까지 내보내자, 처음엔 눈치를 보던 다른 녀석들도 다 신이 나서 별장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는…… 참 재미없게도 집에서 읽던 책을 가져와서 읽었다.
“응, 시끄러워 데이빗.”
“조용히 해, 셀리.”
이러니까 정말 미친 사람 같네.
혼자 말하는 걸 들킬까 봐, 책을 펼쳐 놓고 목소리의 주인들에게 말을 걸어 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차라리 소통이 가능했으면 이 정도로 짜증이 나진 않았을 텐데.’
책을 내려두고 발코니에 나가 보니 눈앞에 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이곳에 별장을 지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한 풍경이었다.
이번 생에선 처음이지만, 이전 생에선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눈앞의 풍경이 꽤 익숙했다.
생각보다 더운 바람이 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좋아진 기분과는 정반대로, 약을 먹으니 식욕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저녁을 거른 채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아픈 것만 제외하면 정말 완벽한 백수 라이프라고 할 수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아래 층 상황을 확인해 보니 다들 술을 마시고 있더라. 슈아와 리온은 자리에 없는 걸 보니 자러 간 것 같았다.
‘식욕은 없어도 저건 좀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곧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원의 말을 떠올린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1층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는 일행을 뒤로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냥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
내 방문 옆에는 리온이 서 있었다. 일찍 잠들겠다는 내 계획을 비웃듯이 말이다.
눈이 마주친 그가 포도 주스와 얼음이 든 그릇을 흔들며 웃었다.
“아래는 시끄러워서 제가 왔습니다. 지금은 소리에 예민하실 테니까.”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안 자네.”
나는 리온을 별장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 기억대로라면 거기가 가장 조용하고 좋은 곳이었다.
다락방에 도착한 내가 커다란 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자, 리온이 그 옆에 따라 앉았다. 그는 작은 테이블 위에 주스와 그릇을 내려두었고, 조심스레 내 상태를 물었다.
“증상은요? 좀 괜찮으세요?”
“글쎄. 일단 약을 먹고 있긴 한데 아직까진 별 효과 없어.”
혹시 걱정할까 싶어, 약을 복용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천천히 생각해 보니 약은 큰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약을 먹어서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면 내 두 번째 삶이 괜찮게 끝나지 않았을까?
이건 병이 아니라 그냥 저주였다. 종류와 장르가 다르다 이 말이다.
‘지금은 흑마법과의 접점을 없애는 게 최선이야.’
사형수로 마정석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접었고, 마탑에는 원래 예정보다 마정석 공급이 늦어질 것 같다고 연락도 넣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그러니 이대로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다면, 이 목소리들과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 잔뜩 예민해져서 저번처럼 미쳐 버릴지도 모르지.
암울한 두 번째 삶을 떠올린 내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리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던 그 말이 하필이면 지금 떠올랐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그나마 몸과 정신 상태가 온전할 때 그 말을 하라는 계시처럼.
얼음이 동동 띄워진 포도 주스를 가볍게 넘긴 내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 생각보다 입은 쉽게 열렸다.
“있잖아, 리온. 내가 지금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이요?”
“내가…… 너한테 같이 죽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부터 그 말은 잊어. 그냥 다 지워 버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지만, 이번 한 번만 주워 담게 해 달라고. 나는 그렇게 부탁했다.
“그 말을 지우면 너무 허전할 것 같은데요. 제 삶들을 가득 채운 말이라.”
“다 지우고 다른 말로 채우면 안 되나?”
내 말이 솔깃했는지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말이 마음에 들면 생각해 볼게요. 뭔데요?”
나는 그와 함께 죽고 싶다는 과거의 말을 뒤집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때와는 정반대의 말을 해야겠지.
그래. 그러니까 나는…… 나는,
“나는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버린 내가, 리온을 보며 웃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이던 그가 겨우 말을 꺼냈다.
“……제가 말했었죠. 우린 틀림없이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랬지. 왜, 지금 내 말이 그리 좋은 답이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그래요.”
손으로 눈을 덮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