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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2)화 (102/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2화

요 며칠 몸 상태가 나쁘다.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가, 갑자기 몸이 식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잠도 설쳤지.’

피곤함이 몰려와 눈을 감으면 잠이 확 달아나는 날이 며칠 반복됐다.

끔찍한 몰골로 저택을 방황하던 나는, 마시면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셀레네가 가져온 차를 홀짝였다.

내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는 셀레네는 나와는 정반대로 생기가 넘쳐흘렀다. 누가 보면 셀레네가 내 체력을 다 뺏어 가는 줄 알 것이다.

지친 눈으로 셀레네의 맑은 얼굴을 눈에 담고 있던 그때, 얼굴이 귀신처럼 하얗게 질린 그녀가 소리쳤다.

“피!”

“네?”

“공녀, 피가 나잖아요!”

피가 난다는 말을 들은 내가 나도 모르게 코를 매만졌다.

“어디서 피가……?”

코피는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피가 날 곳은 거기뿐이었다.

하지만 셀레네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바로 내 옆구리 부근이었다.

왜 이런 데서 갑자기 피가 나지?

당황한 내가 옆구리 쪽을 매만졌고, 나보다 당황한 셀레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몸을 살펴 댔다.

등 아래쪽에서 난 피가 번진 것 같다며 셀레네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대체 왜 이런 데서 피가 나는 거예요? 다쳤어요? 아프진 않아요?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안 아플 수가 있지?”

“주치의에게 보이면 됩니다. 별거 아닐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놀라긴 했다만…… 셀레네가 너무 놀라서 오히려 내 쪽이 차분해졌다.

그나저나 막상 피를 보니 유난히 쓰라린 부분이 있기는 했다.

9년 전, 카인의 마나 폭주로 다친 곳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참 전 일이잖아?’

카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그 사고가 내게 있어 액땜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이후로 크게 앓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9년 동안 멀쩡하던 곳이 왜 이제 와서 말썽을 부리냐 이 말이다.

*

잠을 못자서 그런지 머리가 무겁다. 몸도 무거웠다. 살이 찐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빠지면 빠졌지.

아파트 층간소음도 아니고, 왜 이렇게 머리가 쿵쿵거리는 건지.

시즈와 함께 일을 하던 중, 근처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자꾸 신경을 긁었다. 꽤 여러 명이 떠드는 소리였다.

하지만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성실하게 서류 작업을 할 뿐이었다.

결국 소음을 참지 못한 내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시끄러워.”

“네?”

“복도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나?”

누가 집무실 앞 복도에서 떠들어? 미친 건가?

그러자 시즈가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쟤가 귀가 썩었나. 주치의한테 가 보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덜컥 문을 열어젖혔다.

사람 서너 명이 수군거리고 있을 거란 내 생각과는 달리, 문 앞에는 리온 한 사람만이 서 있었다.

휑한 복도를 보니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허.”

“누가 있어요?”

“아니, 리온 경만 있네. 리온, 여기 누가 지나갔어?”

그러자 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 저만 서 있었습니다.”

내가 미친 건가?

그래,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젓자 시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요새 잠을 잘 못 주무셨다면서요. 피곤하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가.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문 옆에 서 있던 리온에게 따라오라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까딱이자, 뜻을 알아먹은 그가 내 뒤를 따라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뭐?”

아까 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나.”

“아까 전부터 근처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치겠네.

아무래도 내가 환청을 듣는 것 같다.

후계자고 나발이고,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주치의한테 가야 하는 건 시즈가 아니라 내 쪽이었네.’

그나저나 이거…… 뭔가 익숙한데.

예전에도 이러지 않았나?

나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두통에 수면 부족에 환청까지. 모두 내가 두 번째 삶에서 시달린 증상이었다.

얼마 전에는 9년 전 흉터가 터지더니, 이제는 환청까지 나를 찾아왔다.

그러니까 그게 이제 와서 왜?

두 번째 삶에서 내 몸과 정신이 망가진 이유는, 카인에게 향했어야 할 흑마법의 저주를 내 쪽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의문을 안고 계단을 내려가던 때, 꽤 괜찮은 결론이 하나 나왔다.

‘……아무래도 그 저주가 아직도 나한테 영향을 미치나 본데.’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시야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균형을 잃은 채 계단 아래로 쓰러지던 나는, 리온이 다급한 손길로 나를 붙잡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의식은 돌아왔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편히 잠든 게 너무 오랜만이었거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른다.

그냥 이대로 계속 자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때,

“제 운명이 실현됐다고, 그렇게 말하셨지요.”

리온은 내 의식이 돌아온 것을 알아챘고, 그런 그의 목소리가 내 영역에 불쑥 발을 들였다. 자리에 누운 채 눈을 뜬 내가 답했다.

“……그랬지.”

“그럼 그때 아가씨 몸에 스며든 저주도 유효하겠네요.”

아무래도 리온 역시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린 듯했다.

두 번째 삶에서 리온의 운명이 실현되었다면, 내 쪽으로 향한 저주 역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저주가 유효했다면 왜 지난 9년 동안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지?

나는 9년 동안 내게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럼 내가 근래에 한 행동이 과거의 저주롤 불러 왔다는 건데, 대체 뭐가…….

“아.”

나는 짧은 회상 끝에 제법 그럴 듯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마탑에 다녀온 내가 시즈에게…….

‘북부 영지의 사형수 명단이랑 세부 사항을 좀 알아와. 처형은 뒤로 미루라고 하고.’

라고 했었지.

한숨을 쉰 내가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 그대로 내 이마를 때렸다. 바로 방금 전부터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왜 그러세요?”

“내가 미쳤나?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지?”

“뭐라고요?”

사람의 영혼으로 마정석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형수들을 데려다가 말이다.

죄 없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 같지만, 그마저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더 이상 영지에 사형수가 없다면, 나는 내 기준에서 ‘죽어도 괜찮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을 테니까. 어쩌면 돈을 주고 다른 지역의 사형수를 넘겨받았을까.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 사형수 다음에는 너무 아파서 차라리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상이 되었겠지.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며 꼬드겨서 말이다.

혹은 죽음 직전의 사람들이 표적이 된다. 가족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고, 숨 넘어 가기 직전인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다.

그럼 사람의 목숨에 값이 매겨지기 시작한다.

‘최악의 경우엔 돈 때문에 비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팔아넘기는 경우가 발생할 테고.’

나는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고, 다시 한번 내 이마를 때렸다. 놀란 리온이 움찔거리는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렇게까지 생각을 안 하고 일을 진행시킬 수 있나?’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 뭐에 홀렸었나. 아무래도 눈앞의 이익에 잠시 눈이 멀었었나 보다.

겨우 몸을 일으킨 내가 리온의 부축을 받아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는 건방진 자세로 책상에 앉아 있는 시즈에게 물었다.

“시즈, 사형수 명단은?”

“아, 그거. 방금 자료가 도착했어요.”

사형수라는 말을 들은 리온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시즈가 옆에 있어 차마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안 하면 되잖아, 안 하면.’

얼굴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책상을 뒤적거리던 그녀는 내게 종이봉투를 하나 건넸고 나는 대충 이름과 세부사항이 나열된 서류를 읽는 척하며 넘겼다.

“수고했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지만 사형은 미루지 말고 그냥 원래 정해져 있던 대로 처리하라고 해.”

마탑 쪽 통신 사업이 몇 년이 걸리든 간에, 일단 마정석을 직접 만드는 일에선 손을 떼야겠다.

*

“아무래도 저는 계속 아가씨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즈가 자리를 비우자, 내 등 뒤에 선 리온이 가볍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은 예전부터 걱정이 되고 불안할수록 그 속을 티 내지 않고 가벼운 목소리로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부조화를 자연스럽게 넘겼다.

‘만약에, 내가 또 다시 이상한 짓을 한다면, 그걸 가장 먼저 눈치챌 사람은 리온이겠지.’

우린 이미 두 번의 삶을 함께 했고, 그 삶에서 서로의 모습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경은 계속 내 옆에서 나를 지켜봐 줘. 내가 또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당연하죠. 그러려면 저는 계속 아가씨 곁에 머물러야겠죠?”

“응. 그런데…… 탈세나 횡령까진 괜찮은가 봐.”

“네?”

“내가 예전부터 해 봤는데, 그건 안 아프더라고.”

나쁜 선택이라는 기준이 너무 애매모호했는데, 흑마법과 관련된 쪽으로 개수작만 안 부리면 괜찮은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친 내가 책상을 툭툭 두드렸고, 등 뒤쪽에선 도저히 못 말리겠다는 듯한 리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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