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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0)화 (100/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100화

“살아서 왔네?”

“쯧, 방 혼자 쓸 수 있었는데.”

리온이 지하 감옥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자, 기사단 사람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리온은 옆에 있는 나를 내세우며 뻔뻔하게 굴었다.

“총애는 면죄의 지름길이거든요.”

그래, 그냥…… 총애라고 치자.

해명을 포기하는 동시에 총애를 절반 정도 인정한 나는 리온을 기사단으로 바래다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친 뒤, 시즈에게 일을 하나 지시했다.

분명 그때 나를 찾아왔던 사제의 이름이…… 크리센이었던가.

“시즈, 신전에 있는 크리센 사제를 통해 직접 헌금을 전하고 싶다고 연락을 넣어 봐.”

그러자 시즈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래?”

“……그냥, 소공작님이 신전에 직접 헌금을 내시겠다고 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야.

‘그러고 보니 정말 아버지나 어머니가 기부하실 때 조금 보탠 게 다였지.’

다른 기관이면 몰라도, 정말 신전에 직접 내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한마디 하려다가 생각해 보니 시즈의 말이 맞아서 관두었다.

“……원하는 걸 받았으니까 낼 건 내야지.”

“원하는 거요?”

“그런 게 있어.”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해 준데다가, 본의 아니게 신에게 몸까지 빌려주었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 했다. 사제라 개인적인 보상은 거절할 테니 이게 최선이겠지.

‘아닌가. 개인적으로 챙겨 줘도 받으려나……?’

뒤에서 몰래 챙겨 주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며 사제의 청렴에 대해 의심하고 있던 그때, 시즈가 물었다.

“참, 마탑에서 소공작님을 찾아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는데요, 이건 어떻게 할까요?”

아, 마탑.

직전까지 사제의 ‘청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마탑에 몰래 돈을 지원하고 마도구 몇 개를 떼어먹은 기억이 났다.

“오빠도 만날 겸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고 해.”

“네.”

이참에 마탑주를 만나서 괜찮은 물건이 있나 살펴봐야겠다. 없으면 돈 좀 쥐여 주고 황실 몰래 만들어 보라고 시켜야지.

보자, 일단 내일은 크리센 사제에게 연락을 넣어서 만남이 가능하다면 만나 보자. 그리고 다음 주 중으로 마탑에 방문하면 되겠군.

하지만 그런 내 계획과 달리, 그다음 날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나를 찾아왔다.

크리센 사제에게 따로 연락을 취하기도 전, 태양신 신전의 대신관이 공작저에 방문한 것이다.

*

소문을 듣고 응접실로 향한 내가 대신관에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대신관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대신관이 천천히 찻잔에서 입을 뗐다.

“크리센 사제가 죽었습니다.”

“……죽었다고요?”

“예.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부담감이 상당한데, 얼마 전에 신을 몸에 받아낸 모양입니다.”

그녀가 신을 직접 몸을 받아낸 날은 내 생일이다.

그날 나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서 그대로 앓다가 죽은 것이다.

뭐 좋은 일이라고 알은척을 하겠는가. 나는 일단 그 일에 대해 모른 척했다.

“그거 참 유감입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크리센을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넣었으면 모를까, 시즈는 아직 신전에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다.

심지어 얼마 전 내 성인식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크리센 사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 다짜고짜 하급 사제의 부고를 알리냐 이 말이다.

‘혹시 이 사람이 뭘 아나?’

대신관을 의심하는 속마음과 달리 좀처럼 의도를 모르겠다는 눈으로 대신관을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크리센 사제가 죽기 전에 소공작께 남긴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전하러 온 것이고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잠깐이지만 쫄았잖아요, 대신관님.

어쨌든 그날 나와 크리센 사제가 주고받은 이야기는 모른다는 거군.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신관의 말을 받았다.

“신을 몸에 받아냈다면서요. 마지막으로 제게 남긴 말이 크리센 사제님의 유언인지, 빙의한 신의 말씀인지 확인은 하셨습니까?”

“정확히는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하긴, 그러니까 직접 왔겠지.

한낱 사제의 말을 전하기 위해 대신관이 직접 걸음할 리가 없었다.

“신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소공작께서 버리고 간 나날들을 함께 기억하는 그자의 운명은, 이미 실현되었다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마친 그녀가 내 표정을 살폈다.

그 모습이 노골적이었던지라 나는 태연하게 대신관이 전한 신의 말을 읊으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물론 속마음은 뒤죽박죽 난리였다.

‘내가 버린 날?’

내가 버리고 간 나날들은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날들을 나와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리온뿐이다.

이렇게 리온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알고 보니 나와 함께 회귀한 사람이 한 명이 더 있다고 하면…… 그땐 진짜 신전에 불을 질러 버릴 거다.

‘흠.’

리온에게 주어진 운명은 공을 세워 널리 이름을 알린 뒤 단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운명이 실현되었다니. 도대체 그게 언제지?’

리온 이 녀석은 열두 살 때부터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느라 공을 세울 틈도 없는데…… 아. 설마 그때인가.

다행히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대신관의 앞에서 끙끙대며 머리를 싸매는 꼴은 면했다.

‘운명이 실현된 게 지금의 세 번째 삶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두 번째 삶에서 나는 리온을 전쟁에 내보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널리 이름을 알린 리온은…… 나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일찍 죽긴 했네.’

결국 리온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단명한 셈이다.

이미 두 번째 삶에서 그의 운명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이번 삶에서 리온은 그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고.

“그렇습니까. 전달 감사합니다.”

생각을 정리한 내가 후련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내 표정이 조금 전보다 풀려 있었는지 대신관이 물었다.

“혹시 운명이 실현되었다는 그분이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되겠니.

사실 대신관 입장에선 궁금하니 물어볼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나는 리온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이미 9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굳이 파고들려 하지 마시죠. 하실 말씀은 더 없으십니까?”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진실이다.

내 말에 섞인 거짓을 눈치챘다 해도 파고들지 말라 경고했으니 더 묻지는 않겠지.

“……없습니다. 그럼, 리베르트 소공작께 태양신의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대신관님께도 태양신의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와 내가 서로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

대신관과 대화를 마친 나는 바로 리온을 찾아갔다.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너의 운명이 이루어졌다고. 그 소식을 전해야 했으니까.

그는 정원 구석의 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그의 이마 부분에 조각처럼 작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손으로 햇빛 가려 그에게 완벽한 그늘을 선사하자, 리온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왜 거기 그러고 앉아 있어. 나 바쁠 때 도망치려고 간 보는 중이야?”

“제가 그런 짓을 왜 해요. 이제 아가씨가 제 그늘인데.”

리온이 일으켜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힘을 준 채 손을 맞잡았다.

“아니, 야……!”

이 망할 놈이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힘을 준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리온이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가 리온의 무릎에 걸터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미쳤지?”

손등을 찰싹 때리며 품 안에서 벗어나자 리온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아까부터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안 오더라고.”

“아무도 안 오긴. 내가 왔는데.”

내가 오면 메이도 오고, 루나도 오고, 시즈도 오고, 아무튼 다 온다.

어이가 없어 짧게 한숨을 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신관을 만났어.”

“무슨 말을 하던가요, 그 사람이.”

“내가 버리고 간 날들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의 운명은 이미 실현됐다고. 그렇게 말하던데.”

그 말을 들은 리온의 눈이 커졌다.

갑작스러운 운명에서의 해방에 당황해 혼자 판단하기가 어려웠는지 그가 물었다.

“……제 운명이 이뤄졌다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요?”

“응. 이건 내 짐작이긴 한데, 두 번째 삶에서 이뤄진 게 아닐까 싶어.”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졌던 모든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셈이네요.”

“그런 거지.”

만약에 우리의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라면, 리온은 아직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여야 한다.

하지만 내가 버린 두 번째 삶이 현재의 세 번째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니 나의 패배로 얼룩진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은 사라진 게 아니다.

모두 실재했다. 다만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졌을 뿐이다. 나와 리온을 제외하고는.

대신관의 말대로 나는 그날들을 버린 채 도망친 것일 뿐, 내가 한 행동들과 내가 살던 시간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언제나 그 세상에서 사라지려고 한 건 나였지.’

사라졌다고 생각한 지난 삶들이, 오늘의 결과가 되었다.

나는 운명에서 해방된 리온을 바라보며, 잘됐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예전보다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네.”

“그러게요. 역시 그때 아가씨를 따라 죽길 잘했어요.”

정복 전쟁에 나간 것도 잘한 선택이었고, 나를 따라 죽은 것도 훌륭한 선택이었다며 리온이 떠들어 댔다.

하지만 리온의 가벼운 목소리와 반대로, 그의 말을 들은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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