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9화
공작저로 돌아온 아가씨는 나를 데리고 동쪽 끝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내가 숨어 지내던 숲이었다.
아버지의 공간에는 발을 들이기도 싫었지만, 아가씨가 들어가시겠다는데 내가 뭐 어쩌겠는가. 나는 아가씨를 따라 숲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숲에 들어선 아가씨는, 내가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다 알아 버렸다는 표정을 하고도 입을 다무는 아가씨를 본 나는, 아가씨가 나를 이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낌 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복잡해 보이는 아가씨의 표정과 달리 내 기분은 참 단순했다.
그냥…… 좋았다.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다.
어차피 아가씨가 진실을 다 알아 버린 마당에, 더 숨겨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서, 나는 그냥 솔직하게 내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숲을 나서던 중, 아가씨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었다.
“그나저나, 이름을 숨길 거면 제대로 숨겨야지. 리온이 뭐야? 그거 그냥 단델리온에서 앞에 두 글자 떼어 낸 거잖아?”
아니, 그…… 리온이라는 내 이름은 단순히 단델리온에서 따온 것이 아닌데. 아가씨가 나한테 지어 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건데…….
갑자기 생각 없는 놈 취급을 받으니 뭔가 억울해졌다.
나는 내게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열심히 해명했지만, 아가씨는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여간 못된 아가씨 같으니.
심지어 얼마 전부터 아가씨는 내게 휴가를 권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미 쓴 휴가를 출장으로 처리해서, 다시 제대로 된 휴가를 가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물론 아가씨는 선한 의도로 나를 쉬게 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아가씨를 두고 휴가를 가는 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
우리 망할 아가씨는 알까. 자기가 첫 번째 삶에서 달콤한 말로 나를 꼬셔 휴가를 보낸 다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다.
잘 몰랐는데, 나는 아가씨를 두고 떠나는 휴가에 큰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나 보다.
*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삶에서 괴수들한테 당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몸이 아픈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필 아가씨 생일에 이럴 게 뭐란 말인가.
‘음, 자고 일어나면 나으려나.’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몸이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죽은 듯이 긴 잠에 빠져든 나는 아주 끔찍한 악몽을 마주했다.
첫 번째 삶에서 아가씨는 사형당했고, 두 번째 생에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나는 그저 그 모든 순간을 지켜봐야만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갑자기 이런 걸 보여 주는 건지 모르겠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아가씨가 독을 삼키며 우리의 두 번째 삶이 끝났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현재의 나와 아가씨가 살아가고 있는 세 번째 삶뿐이다.
‘이번 삶은 평탄했으니 힐링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겠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가씨는, 자신에게 세 번째 삶이 주어지기 전,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엿본 것이다.
나 역시 아가씨를 따라 그 세계를 엿보게 되었는데, 그 세계는 제국보다 높은 건물들이 가득했고, 아가씨의 머리는 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가씨는, 황태자와 레이델 놈, 시몬의 공주가 승자로 기록된 어느 이야기를 읽었지.
아가씨의 옆엔 내가 없었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사랑받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나 없이 못 사는 아가씨 모습을 보는 것보단, 나 없이도 잘 사는 아가씨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렇게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미래를 엿보고 온 아가씨는, 내가 기다리고 있던 세 번째 삶에서 눈을 떴다.
‘그래서 아가씨가 나보다 늦게 돌아온 거구나.’
나는 뒤늦게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 차를 이해할 수 있었고, 소설을 읽은 아가씨가 이 세상에서 눈을 뜨는 모습을 보며 긴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 차에 대한 의문을 해소했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내가 이런 꿈을 꾸게 된 이유를 추측했다.
‘아가씨가 기억을 찾으셨나 보네.’
내 예상은 제법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바로 나를 찾아오실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반겨 드려야 하나.
아가씨는 어이없어 하실까, 아니면 화를 내실까.
‘……가만, 기억을 되찾은 거면 성격도 예전처럼 돌아오는 건가?’
나는 천천히 두 번째 생에서의 아가씨가 한 행동을 떠올렸다.
보자, 우리 아가씨는 레이델 놈을 시켜 황태자의 목을 따고, 그 목을 나무 상자에 담아 시몬의 공주에게 보낸 사람이다. 레이몬드를 흑마법의 제물로 쓴 다음엔, 레이델 놈까지 죽였고.
황위에 오른 2황자를 압박해 모든 실권을 빼앗은 뒤, 그를 유폐시키기도 했다.
빈말로도 성격 좋다는 말이 나오기 힘든 폭군이었다.
‘이거 일 났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폭군처럼 지낸 2회차 아가씨의 성격이라면,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나를 괘씸하게 여겨 홧김에 내 팔 하나를 잘라 버릴지도 모른다.
짧으면 일주일에서 길면 한 달.
‘나한텐 꽤 유하신 편이니까, 그 정도 기간이면 화가 풀릴 것 같긴 한데.’
팔이 잘려 나가면 그 사람을 안아 줄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나는 아가씨의 화가 풀릴 때까지 숨어 있기로 했다.
그렇게 짐을 싸들고 공작저를 떠났건만…….
“리온! 이 빌어먹을 놈!”
“9년 동안 아가씨를 기만한 죄와 도주죄로 경을 체포합니다.”
체르티 경과 닉스 경이 나를 이렇게 빨리 잡으러 올 줄은 몰랐지.
‘설마 아가씨가 나를 잡아오라고 시킨 건가?’
피부 관리를 받고 있던 나는, 숍에 들이닥친 두 사람을 보고 얼굴에 바른 팩에 균열이 생길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도망치긴 글렀기 때문에, 나는 두 사람에게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히고 관리나 마저 받게 해 달라고 했다.
어차피 잡혀 들어가는 거라면 아가씨한테 조금이라도 곱게 보여야지.
그나저나, 다짜고짜 여기까지 쳐들어온 두 사람을 보니 헛웃음이 다 나왔다.
‘닉스 경, 여기서 이러지 말고 북부에 계신 할아버지 좀 자주 찾아가세요. 3년 뒤에 돌아가시니까. 닉스 경도 일찍 죽지 말고.’
그리고 체르티 경도, 부상 입지 않게 조심하시고.
두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내 마음도 모르고, 체르티 경과 닉스 경은 도망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서 나를 자루에 집어넣은 채 끌고 갔다.
그렇게 나는 모든 기억을 찾은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_리온 외전 마침
*
리온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서둘러 지하실을 뛰쳐나왔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 때문에 눈이 아팠고 코끝이 쓰렸다.
저택 사람들에게 나약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눈물을 꾹 참고 지하실에서 3층까지 씩씩하게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방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었다.
“아가씨.”
“응…….”
울다 지쳐 잠이 들었던 걸까, 작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와 그리운 목소리에 눈이 번뜩 떠졌다.
내가 손가락으로 살짝 부은 눈 위를 더듬거리고 있던 그때, 목소리의 주인인 메이가 방 안에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도 울었더니 배가 고팠다.
“방으로 가져다줘. 나 진짜 배고프니까 많이 달라고 해.”
“네. 혼자 드시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이 가져올게요. 아 참, 감옥에 계신 리온 경의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뭐?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감옥과 리온의 이름이 들어간 문장에, 배고픔을 잊어버릴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이런 미친…… 깜빡했다.”
“네?”
“감옥에서 꺼내 주는 걸 깜빡했어.”
망했다.
전생에서 리온에게 지은 죄가 있던지라, 이제부턴 정말 리온한테 잘해 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결심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사과할 일이 생겨 버렸다.
‘나 왜 이러냐, 진짜……!’
다행인 점은, 내가 감옥을 떠난 뒤로 딱 30분이 지나 있었다는 것이다.
계단에서 뛰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냅다 한 귀로 흘려버린 나는,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 내려가 단숨에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리온!”
나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던 열쇠 꾸러미를 꺼내, 리온을 가둬 둔 철창의 자물쇠에 하나씩 꽂았다.
“풀어 주는 걸 깜빡했어, 미안.”
“저는 또, 일부러 가둬 두고 가신 줄 알았네요.”
“……실수야.”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리온이 그렇다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두 번의 시도 끝에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열쇠 꾸러미가 잘 정리되어 있던 덕분이었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철문이 끌렸고, 리온이 몸을 숙인 채 철창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쌩쌩했는데, 30분 사이에 사람이 참 핼쑥해져 있었다.
제 모습이 민망했는지, 답지 않게 리온이 내 쪽에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눈이 부었네.’
아까도 우는 것 같긴 했다만, 내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나 보다.
내 시선의 끝이 향한 곳을 알아챈 그가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눈도 만만치 않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울면서 잠들었지.
여기 오기 전에 거울 좀 보고 올 걸 싶었다.
“내 방이랑 감옥 안에 벌집이 있던 걸로 합의 볼까.”
“좋습니다.”
리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뒤늦게라도 리온을 달래듯,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