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8화
눈을 떴을 땐 열두 살의 어느 날로 돌아와 있었다.
‘이게 뭐지.’
설마 나한테 시간을 돌리는 힘이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뜬 이후로, 예전부터 심장 한가운데에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어이가 없었다. 신에게 받은 특별한 힘이 검술 쪽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온전한 내 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길로 곧장 공작 부인을 찾아가서 나의 진짜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신이 내게 선물한 힘이 검술 쪽 재능이라고 사기를 쳐서 아가씨 옆에 붙어 있을 이유를 만들었다.
공작 부인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내가 배신하지 않고 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한, 그 사람은 나를 지켜 주겠지.
시간을 돌리기 전,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외할아버지가 나를 만나 보고 싶다며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대충 상황을 눈치챈 공작 부인은 내가 북부 토박이라며 제대로 사기를 쳐 줬다. 그러고는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니, 좋은 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공작저에 돌아온 나는 멀리서 아가씨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모습을 본 나는 작아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다가, 울고 말았다.
‘나만 돌아온 게 아니구나.’
세상만사가 지겹다는 듯 썩은 생선처럼 생기 없는 눈을 한 아가씨 한 분이, 정원을 뛰어노는 오빠와 간식을 가져오는 하녀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을 찌르던 그때, 나는 분명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던가.
아가씨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랑하는 가족과 하녀와 즐겁게 뛰어놀던 여덟 살 시절이었다.
그 순간에 나의 존재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짓는 아가씨를 본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
나는 다시 돌아온 것이 꿈같은데, 아가씨에게는 이 두 번째 삶이 악몽처럼 여겨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삶에서 아가씨의 그림자가 되어 모든 더러운 일에 앞장섰다.
이번에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황위에 오른 2황자에게서 모든 실권을 앗은 아가씨는, 이전에 세워 두었던 모든 목표를 빠르게 이루었다.
무료함 역시 그만큼 빨리 찾아왔고, 아가씨는 다시 세상을 지겹게 여겼다.
“네가 가장 처음 받은 이름은 단델리온이고, 두 번째로 나에게 받은 이름은 리온이었지. 참 우연이네.”
“그러게.”
“처음 이름이 아닌 두 번째 이름이 알려져도 단명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
“그걸 확인하면 당신이 조금은 즐거울까.”
“어. 즐거울 것 같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두 번째 이름이 알려지든, 세 번째 이름이 알려지든, 공을 세워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면 죽는 거다.
이름을 바꿔도 내가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재미없어하려나.’
잠깐이라도 반짝인 저 눈동자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얼떨결에 얻은 이번 생은 아가씨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 정도는 해 볼만 하지 않나?
결국 얼마 뒤 시몬과의 전쟁에 나선 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중간에 성이 무너지는 바람에 내가 잔해물에 깔려 죽었다는 오해가 생기긴 했지만 나는 멀쩡했다.
‘이제 나는 얼마 안 가 죽겠구나.’
그렇게 남은 시간을 그리며 황궁으로 돌아온 나는, 아가씨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힘겹게 숨을 쉬며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아가씨는 나를 보며 숨을 거두었고, 나는 다시 한번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이번 생은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으니 이번에도 따라 죽을 생각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다음 기회는 없어. 나는 이미 시간을 돌렸으니까.’
전에 한 번 죽어 봐서 그런지, 심장을 찌르기까지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째깍, 째깍
예전처럼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질 것처럼 여렸으나, 끈질김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라졌던 힘이 다시 심장 한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에게 회수되지 않고 흩어져 있던 동생의 힘이, 가장 가까운 존재인 나에게 정착한 것이라는 걸, 힘을 받아들인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건가?’
낭패다.
아가씨도 함께 돌아가면 곤란한데…….
사는 것이 지루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다시 이승으로 끌고 오는 꼴이지 않은가.
‘……돌아가지 마, 제발.’
나는 그렇게 빌어야 했다.
*
명확한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기도였기 때문인지,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또 한 번 열두 살 때로 돌아오고 말았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 봤지만 적절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전번처럼 공작 부인을 찾아갔고, 공작저에 발을 들여 아가씨를 만났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아가씨가 나보다 며칠 늦게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이 시점에는 함께 돌아와 있었는데, 왜 나보다 나중에 돌아왔지?’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아가씨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 같았다.
‘약을…… 약을 너무 많이 하셔서 그런가.’
죽도록 싫어하던 1황자에게 친절해지는 등, 안 하던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마치 1황자가 승자인 기록을 읽고 온 사람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이거 아무래도…… 아가씨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다.
내가 시간을 돌리면서 함께 돌아온 것이라고 말을 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가씨가 나에 대한 어떤 기억도 감정도 없는 지금 상황이라면, 아가씨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독점해야 하는 미래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아 전생에서 잃어버렸던 어머니의 유산을 조용히 찾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도박장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거라면 아가씨가 즐거워하지 않을까?’
첫 번째 삶에서 나를 따돌리고 도박장에 다녀온 전적이 있으니, 선물로 드리면 좋아할 것 같았다.
*
이상하게도 아가씨가 나에게 선물한 이 단검은 두 번씩이나 나와 함께 과거로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멀끔한 상태로.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이왕이면 귀한 보석을 쥐고 죽지 그랬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완전한 죽음을 마음먹은 사람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보석을 손에 쥐고 죽을 이유는 없다.
아가씨의 대련 상대였던 나는, 아가씨에게 그 검을 선물하기로 했다. 다짜고짜 검을 선물 받은 아가씨가 물었다.
“이건 왜 주는 거야?”
“그냥요. 아가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드리고 싶었어요.”
“단검을?”
“네. 그러니 저를 생각해서라도 꼭 가지고 다녀 주세요.”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니까 이번 삶은 포기하지 말자는 의미였는지, 내 목숨은 당신의 것이라는 의미였는지.
나는 선물의 의도를 정의내리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단검은 본래의 주인을 찾아 돌아갔다.
아가씨는 달라졌고,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전과 달리 생기 있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아가씨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아가씨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아가씨를 지켜보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가?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말을 취소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온. 공녀님이 황태자 전하랑 약혼하신다는데, 그게 진짜냐?”
나는 아주 속이 좁고 옹졸한 사람인지라, 저런 말만 들어도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황태자라면…… 우리 이모님 아들인데.’
따지고 보면 나와 친척인 셈이다. 하지만 매번 우리 아가씨를 따라다니는 꼴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아니 저놈은 친구가 우리 아가씨밖에 없나?’
어렸을 땐 귀엽고 가엽게 봐 주려고 했건만, 크고 나니 참 성가셨다.
‘이모님은 도대체 왜 저런 걸 낳으셨는지…….’
식견이 좁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뭐 아무튼 나는 이모님의 아들인 황태자가 더 넓고 원활한 인간관계를 가지길 희망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첫 번째 삶에서 아가씨의 팔을 잘라간 레이델 놈이 나타났다.
아가씨께서 다 계획이 있어서 거두신 걸 테니, 처음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저놈이 왜 저런 눈을 하지? 저번 생에선 저런 맑은 눈을 한 적이 없는데.’
아가씨를 볼 때마다 반짝이는 눈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저놈이 웰링턴의 수호자라는 말을 들으니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저 속 시커먼 녀석이 숭고한 마음으로 웰링턴 마을 사람들을 구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편견에 찌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가씨 옆을 맴도는 레이델 녀석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아가씨는 아카데미로 떠나셨고, 얼마 안 가 낮황밤영이라는 말을 들은 나는 속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낮황밤영?
우리 아가씨가 낮에는 황태자를 취하고 밤에는 영웅을 취하신댄다.
아가씨가 그럴 리가 없, 아니다. 그럴 수도 있나?
혹시…… 이번 생에선 하렘을 세우는 게 목표신가? 아니 그런데 어떻게 나를 두고? 가장 먼저 나를 스카우트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가씨의 판단 능력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다시 한번 정부로 들여 달라고 어필을 해야 하나.’
결국 낮황밤영이라는 소문을 들은 그날 밤, 나는 리베르트 기사단장과 술을 마시다가 조금 울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기사단장은 나같이 여우 같은 놈을 아가씨의 호위직에서 해임해야 한다고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할 건데?
라는 심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