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7화
나는 나의 역할답게 아가씨를 따라다녔고, 그런 나를 성가셔하던 아가씨는 화가 날 때마다 내 허벅지를 걷어찼다.
크게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번에 괴수에게 물린 곳이라 그런지, 굉장히 신경 쓰였다.
내가 허벅지를 걷어차일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자, 그걸 눈치챈 아가씨가 물었다.
“거긴 왜 그래?”
그래도 내가 호위인데, 괴수한테 물어뜯겼다고 말하기엔 좀…… 없어 보이지 않나?
그래서 나는 급히 다른 핑계를 찾았다.
“음. 저는…… 허벅지를 걷어차이면 흥분하거든요.”
“내려.”
그렇게 마차에서 쫓겨난 나는 황궁에서 저택까지 걸어서 돌아와야 했다.
자존심은 지켰지만 아무래도 변태라는 오해를 받은 것 같았다.
‘이런 등신…….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어쩔 수 없이 저택에 도착한 나는 변태라는 오해 풀기 위해, 아가씨의 방에 찾아갔다.
아가씨는 나를 무시한 채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나는 말없이 바지의 허벅지 부분을 찢어서 흉터를 보여 줬다. 천천히 고개를 든 아가씨가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하자는 거야?”
“해명하러 왔습니다. 저는 아가씨가 생각하는 그런 변태가 아니라,”
“변태가 아니라고 해명하러 온 놈이, 내 앞에서 바지를 찢어? 너무 설득력 없지 않나?”
아.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내 얼굴에, 아가씨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말로 하면 안 믿으실까 봐-”
“알았으니까 제발 꺼져…….”
그렇게 나는 허벅지를 걷어차여서 흥분하는 변태 새끼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아가씨에게 나는 다짜고짜 방에 찾아와서 바지를 찢는 미친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두 번 다신 이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땐 아주 능숙하고 덤덤하게 아가씨를 상대하고 말 거다.
*
계약 기간은 끝났지만 나는 공작저를 떠나지 않았다. 조금 더 이곳에, 정확히는 아가씨의 옆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나를 이곳에 데려온 날, 공작 부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아끼던 하녀가 세상을 떠나서 우울해하거든. 조금 불안정한 상태지. 그게 너를 그 애 옆에 두는 이유란다.’
불안정한 상태라고 했던가?
하지만 내가 본 아가씨는 우울해 보이지도 않았고, 불안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짜증이 조금 많았을 뿐이었지.
혹시 그 하녀가 죽은 뒤로 짜증이 많아진 거냐고 공작 부인에게 물어봤더니, 짜증이 많아진 이유는 나 때문이라고 했다.
‘설마…… 나 때문에 짜증 나서 나간 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미친 듯이 아가씨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아가씨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아가씨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공작저에 돌아왔다.
우울하긴 무슨. 도박장에서 아주 신나게 놀다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황당했지만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됐지.
그런데 말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끼던 하녀가 죽었다며?’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덤덤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공작 부인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딸은 생각보다 멀쩡하다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아주 오만하고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날따라 날씨가 좋았고, 하늘은 아름다웠다. 아가씨와 함께 무덤 앞에 앉은 나는 맑은 하늘과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행복을 느꼈다. 좋은 날에 좋은 사람과 함께 하니 기분이 좋았다.
좋은 사람?
그 단어에 묘한 괴리감을 느낀 내가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솔직히…… 조금 나쁜 쪽에 가깝지.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을 정정하는 동시에, 나의 마음을 인정했다.
무덤 앞에서 술을 마신 아가씨의 텅 빈 눈빛은, 조금 전까지 내 시선이 머물던 하늘을 향해 있었다.
나와 같은 하늘을 본 아가씨가 웃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참…… 찢어발기고 싶게 생겼네.”
“……뭐라고?”
하늘을 찢어?
잠시 뒤, 내 귀를 의심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짜증 난다고. 바람이 부는 것도 싫고, 꽃잎이 날리는 것도 짜증 나.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루를 시작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한낱 인간인 내가 떠오르는 해를 막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러니까 그냥…… 내가 영영 눈을 뜨지 못했으면 좋겠어.”
나는 그제야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가씨는 자기 자신을 싫어했고, 죽고 싶어 했다. 아끼던 하녀가 죽은 뒤 그 우울함이 더 커진 거고.
그 죽은 하녀는 알까. 자신의 존재가 아가씨에게 이렇게나 컸다는 것을.
바로 직전에 사랑을 인정했지만, 혀끝에는 쓴맛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겠지만, 아가씨는 모든 순간이 끝나기를 바랄 테니까.
무덤 앞에서 바람을 쐬는 아가씨의 모습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왜 아가씨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고작 몇 달간 뒤만 졸졸 따라다닌 주제에, 이 사람을 꽤 잘 안다고 생각했다.
슬픔의 형태는 모두 다양하고, 같은 마음이라고 해도 표현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가씨의 슬픔을 알아채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고 이기적이었다.
‘당신은 괜찮다고.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입안이 바싹 말랐고, 늘 달고 다니던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초조해졌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가씨는 그 뒤로도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자신은 아주 어려운 목표를 세워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그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살아갈 거라고.
아가씨는 그렇게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워 가며 연명하고 있었다.
초가 녹아 무너져 내리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불을 붙이는 꼴이었다. 어쩌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을 붙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가씨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불을 붙이는 것을 막느냐, 마느냐.
‘막아야겠지.’
하지만 초는 불을 붙이기 위한 것이다. 불을 붙이지 않으면 초는 존재 가치를 잃고 만다. 그렇게 된다면 아가씨는 아마…….
그래서 나는 차라리, 아가씨가 자신만의 목표를 이루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아가씨를 망치는 그 목표가 아가씨를 살아가게 만드니까.
이 세상에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고,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날에는…… 살아가는 게 조금은 즐겁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미 나의 오만은 당신의 우울과 슬픔을 외면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크나큰 오류를 범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당신을 바꿀 수 있다는 그런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진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빌 뿐이었다.
*
“당신도 나를 사랑해?”
“음, 나는 너랑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해.”
살아야 할 이유만을 생각하던 내게, 처음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죽음이 그렇게 낭만적인 선택지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가씨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나를 좋아하긴 했다. 나는 그 정도 마음으로도 충분했다.
‘언젠가는…… 같이 죽고 싶다는 말보다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겠지.’
아가씨는 나에게 휴가를 줬고,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데리러 오겠다는 아가씨의 말을 믿었다.
이상하게 찝찝했지만 그래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수도를 떠나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던 내 귀에는 아가씨의 처형 소식이 들려왔다. 필요한 게 없냐는 1황자의 말에, 처형일을 앞당겨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니, 뭐 이런…….”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정리하겠다고 말한 게…… 자기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뜻이었나?’
아니면 1황자 쪽 세력을 정리하겠다는 뜻이었거나.
어느 쪽도 확실하진 않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건 바로, 아가씨가 나를 데리러 올 일은 없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수도로 돌아온 나는 처형대에 올라선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1황자를 내려다보는 아가씨는 이상할 정도로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아가씨의 눈이 마주쳤고, 나는 숨을 쉬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를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아가씨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력과 밧줄의 협력 아래에서 죽어가는 아가씨를 바라보던 나는, 본능처럼 품 안을 더듬었다. 그러자 도박장에 다녀온 아가씨가 선물이랍시고 던져 준 단검이 자석처럼 손안에 들어왔다.
‘나랑 같이 죽고 싶다고 했던가.’
나는 검을 높게 쳐들어 심장을 겨누었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여느 때처럼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째깍, 째깍
검이 심장을 파고들기 무섭게, 귓가에서 시곗바늘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