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6화
전쟁이 나서 나라가 위태롭고, 적군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죽어 간다면, 힘이 있는 내가 나서서 싸우는 게 타당하다.
검의 재능을 타고난 신의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아군의 사기를 북돋울 것이고, 적군의 기세를 꺾기에 효과적일 테니까.
‘하지만 내가 활약하면 태양신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겠지.’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는 말이 맞았다.
설령 이름을 알리지 않고 싸운다 해도, 유명해지면 외조부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금도 조금만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면, 잃어버린 외손자일지도 모르니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고 했으니까.
‘하여간 끈질긴 인간.’
그 사람은 나를 교묘하게 이용하려 들겠지.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고, 내가 사랑하는 세상이 평화롭게 오래 유지되길 원했다.
그러니 이름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내게 주어진 힘으로 나의 세상을 지켜야 했다.
*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스물네 살의 나는, 북부의 티체프 지역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티체프에선 50년마다 특별한 하늘을 볼 수 있다는데, 그 하늘의 모습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봤을 때도 말이 안 나왔는데, 과연 그 실물은 내게 어떤 감정을 선물할지.
들뜬 마음으로 티체프로 향하던 중, 긴 여정에 지친 나는 북부의 한 마을에서 잠시 쉬었다가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예상과 달리, 나는 그 마을에 꽤 오래 머물게 되었다.
“닉스, 가지 마라. 가지 마!”
제정신 아닌 할아버지 한 분이 나를 죽은 손자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닉스라고 했던가. 호기롭게 괴수 토벌에 참여했다가 시체도 못 찾았다고 한다.
내가 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인지,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손자의 이름을 불러 댔다. 내가 마을을 떠나려고 하자, 할아버지는 내 다리에 매미처럼 매달린 채 떠나지 말라고 울었다.
“아버지께서 사실 날도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조금만 더 머물러 줄 순 없겠나?”
우는 할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할아버지의 아들까지 간청을 하길래 조금만 더 머물기로 했다.
‘예정일까지 시간도 충분하니까 괜찮겠지.’
어쩌면 나는 민들레 홀씨같이 허공을 떠도는 삶에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죽은 손자의 이름을 빌려 살았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마을을 떠났다.
“눈도 많이 왔는데 꼭 오늘 가야겠는가? 폭설 때문에 마을 다리에 문제가 생겨서 갈 거면 뒤쪽 산길로 가야 해.”
“산길은 위험할 텐데…….”
눈이 많이 왔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슬슬 티체프의 하늘을 보러 가야 했다. 티체프에 가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문 건데, 이 마을에 머무느라 티체프행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오늘부터 부지런히 걸어가면 되려나.’
마을의 유일한 다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산행을 택했다.
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허전함과 그리운 마음에 마을 쪽을 돌아본 그때였다.
“저게 뭐야……?”
반대쪽 산에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비가 오기 전 개미 떼가 줄을 지어 이동하듯이, 이상한 짐승 무리들이 조금 전까지 내가 머물던 마을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짐승이 아닌 사자의 몸통과 뱀의 꼬리를 가진 괴수였다.
“……저게 대체 몇 마리냐.”
피바다가 된 마을의 미래가 눈에 선했다.
‘마을로 돌아가야 해.’
수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해 볼 만한 숫자였다. 가서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괜히 내가 나섰다가, 혼자서 괴수 여럿을 처리해 마을을 지킨 남자가 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오랜 시간 신의 자녀가 나타나지 않은 제국은 어떻게든 영웅을 내세우고 싶어 하지. 영웅의 등장에 목이 마른 황실이라면, 제국민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라도 영웅을 만들어 낼 거다.
외면하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나의 운명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 답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이름을 알리지 않고 내게 주어진 힘으로 나의 세상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저것들을 다 죽인 다음에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지면 된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무언가를 썰고 있었다.
몇 마리를 해치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 탓에 허벅지를 깊게 물렸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왼쪽 허벅지는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했다.
더 이상 공격해 오는 괴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더러워진 눈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매서운 바람에 땀은 식어 가고,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죽나?’
죽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죽음을 각오한 순간이었다.
“죽은 괴수의 수는 스물아홉인데…… 그걸 해치운 사람은 딱 한 명이라.”
심지어 살아 있기까지 하네.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엔 차가운 눈 위에 불을 피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서운 바람에 여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내 어머니의 나이대로 추측되는 그 여자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곧 진귀한 골동품을 보는 수집가의 눈으로 바뀌었다.
내 쪽으로 몸을 숙인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밑에서 일하겠느냐? 그럼 데려가서 치료해 주마.”
그냥 좀 살려 주시지, 치사하게 다 죽어 가는 사람한테 조건을 다시네.
하지만 나는 살고 싶었기 때문에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 역시 내 몸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을 달았다.
“……정부는 안 해요.”
“허, 나도 정부 필요 없다.”
그 사람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맙다. 네 덕분에 피해를 면했어.”
“…….”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내가 피하려고 발버둥 쳤던 운명대로 단명해도 상관없…… 아니야, 그건 아니지.
단명은 안 된다.
나는 어머니의 말대로, 아주 오래 살 거야.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내가 편하게 눈을 감았다.
*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에 나는 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말에 눈을 감았다가 연초에 눈을 떴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 보니 스물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결국 티체프의 하늘은 보러 가지 못했다.
‘50년 주기랬으니…… 75세까지는 건강해야겠네.’
아쉽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늘어난 것이다.
이제 나는 75세의 삶을 기대하며 살 수 있겠지.
다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다. 나를 구한 사람이 리베르트 공작 부인이랜다.
‘……귀족일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높은 사람인데.’
공작 부인은 정신을 차린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6개월 동안 딸의 호위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내 쪽에서 먼저 해지 통보를 하지 않는 한, 고용 계약은 6개월마다 자동으로 연장된다.
월급도 꽤 되길래 수락했다. 6개월 정도 호위 노릇을 한 다음, 두툼해진 주머니로 떠날 생각이었다.
부상을 회복한 뒤 공작 부인과 수도에 도착한 나는, 말로만 듣던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2황자를 약혼자로 둔 그 사람은, 굉장히 불쾌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없어.”
내 답에 화가 난 아가씨는 혓바닥이 잘리고 싶은 거냐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름이 없다는 내 말에 무언가를 고민하던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리온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써.”
리온?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나의 이름은 단델리온이었고, 나의 어머니께선 나를 리온이라고 부르셨으니까.
쿵 하고 내려앉은 심장이 다시 방정맞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내 심장에 지조가 없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다.
누군가에겐 그 흔하고 흔한 일이 내게는 너무 특별하게 느껴져서, 나는 아주 ‘우연히’ 내 이름을 부른 아가씨마저 특별하게 생각하는 착각에 빠질 뻔했다.
뭐, 내가 혼자 감격을 하든 말든 아가씨는 나를 무시한 채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내 반말에 기분이 상하셨나 보다.
‘……이거 어쩌지.’
뒤늦게 변명을 해 보자면, 나는 결코 일부러 반말을 한 게 아니었다.
아가씨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신을 놓아 버린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거기다가 리온이라는 이름까지 선물 받으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10분 전으로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번 제대로 인사하고 싶었다.
마구간에 간 나는 마구간지기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죽은 말 이름이 히페리온이었다고요?”
“그래.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진 말게.”
나는 그제야 아가씨가 나에게 ‘리온’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는 나에게 죽은 말의 이름을 넘긴 것이다.
‘히페리온.’
태양을 상징하는 그 고귀한 이름을, 고작 말 따위에게 지어 주다니.
죽은 말의 이름을 들은 내가 시원하게 웃었다. 마구간지기는 별 미친 놈을 다 보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태양신을 미워하던 나는, 나의 대범한 주인에게 묘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내가 품은 호감과 관계없이 아가씨는 나를 싫어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