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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95)화 (95/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95화

리온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그 짧은 정적을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뭐가요?”

“내가 너를 전쟁터로 내몰았잖아.”

“그건 제 선택이었잖아요. 거절했으면 안 보내셨을 거면서.”

그래. 만약 그가 거절했다면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리온이 내 요구를 거절할 줄 알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왜 거절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온에게 그런 요구를 했을까.

나를 향한 그의 절대적인 마음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건 아니다.

그냥…… 못된 심보에서 비롯된 요구였다. 세상 사는 게 재미없어서 재밌을 만한 일을 찾다보니까 그렇게 됐다.

‘리온이 나가겠다고 하면 나가는 거고, 거절하면 나가지 않는 거고. 전쟁이 무섭다고 했으니까, 내 요구를 거절하겠지?’

그것이 과거의 못돼먹은 내가 품은 생각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과거의 나를 흠씬 두들겨 팼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어렵게 입을 뗐다.

“그런 말을 한 것부터가 문제야. 나는 네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너를 유희거리 삼았잖아.”

“음,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렇긴 하네요. 다른 방식으로도 저를 충분히 유희거리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전쟁터라니.”

“다른 방식?”

“그러게 저를 정부로 들이셨어야죠.”

저거 저거, 또 정부 타령이다. 설마 이번에도 정부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참 야망 없는 놈이다. 저번 생이야 그렇다 쳐도, 이번 생에선 정실 자리를 노릴 생각을 해 볼 법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리온이 물었다.

“어때요, 이번 생에선 정부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 없어.”

누누이 언급했지만 꽃 중에서도 민들레를 가장 좋아하는 나답게, 나는 일편단심 타입이다.

그러니까 노릴 거면 정실 자리를 노려야지.

물건을 팔듯이 저를 정부로 영업하는 리온이 우스워서, 지하 감옥이라는 장소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지켜보던 그의 눈에 간절함이 짙어졌다. 리온은 제 눈에 담긴 간절함이 무색할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하늘을 찢어발기고 싶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주기 전, 나는 간신히 나의 첫 번째 삶에서 리온과 나눈 대화를 기억해 냈다.

그때의 나는 분명, 우울감에 찌든 채로 하늘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슈아의 피아노 연주를 듣던 나는…… 창 너머의 푸른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지.

내가 나를 사랑하니 끔찍하게 싫었던 그 하늘이 아름다워 보이더라.

눈가를 매만지던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흩날리는 꽃잎이 짜증나진 않고요?”

“짜증나기보단 보기 좋던데. 누구 머리에 붙은 꽃잎 털어 주는 재미도 있고.”

“아침에 눈을 뜨는 건?”

“그건……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거지 같아. 그래도 막상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면 즐겁지.”

리온이 웃었다.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는 건 나인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건 리온 쪽이었다. 정말 이상한 놈이다.

과거의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미워했으며 나를 둘러싼 세상을 싫어했다.

그리고 리온은, 나를 싫어하던 내가, 나를 사랑하길 바란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조금 더 아름답고 즐거운 세상 속에서 살기를 바랐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를 많이 사랑했고, 미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나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

나를 이번 삶의 주인공이라고 여기지 못했지.

유타스로 휴가를 떠난 그날,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내 말에, 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저는 언제나 저를 주인공으로 생각해 왔는데. 아가씨는 다른 생각을 하셨나요?’

그렇게 그는 이번에도 망망대해를 떠돌던 나를 건져 올렸다. 지나간 여러 순간들을 떠올린 내가 철창살 사이로 리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마워. 내 행복을 빌어 줘서. 네 바람대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었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됐어.”

“……그때 호숫가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하셨죠. 그 마음은 여전하십니까?”

“어.”

“그럼 축하 인사도 같이 해 주세요. 저는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를 이뤘으니까.”

리온은 고통에 시달리며 죽고 싶어 하던 나를 조금이나마 살고 싶게 만들었다.

이곳을 떠나 다른 세상을 살아가던 나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했고, 다시 한번 이 세상에 돌아와서도 나를 사랑하자는 마음과 살고 싶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으니.

리온의 말대로 그는 그의 목표 중 하나를 이룬 셈이다.

그런데 그게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였을 줄은 몰랐지.

시야는 흐려졌고, 코끝은 따가웠으며 아까 전부터 자꾸 목이 메어 왔다.

눈코입 중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이를 티 내지 않고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래, 축하해. 너는 내가 살고 싶게 만드는 데 성공했어. 그러니까 이번 생은…… 내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 쉬어.”

네가 그렇게 미워하는 태양을 피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그거 좋네요. 아가씨가 쓰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놈이 출세한 거죠.”

그렇게 답한 리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창살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이 웃음소리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울컥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그대로 감옥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문! 문 열어 주고 가셔야죠!”

눈코입도 말썽을 부리더니 그새 귀까지 먹먹해져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약속대로 지하 감옥에서 태양을 제대로 피하게 해 줬다.

*

_리온 외전

태양신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공을 세워 나의 이름을 알리고 단명할 운명을 꼬리표처럼 달고 태어났다.

단델리온.

그것이 널리 알려졌어야 할 나의 이름이었다.

단델리온이라는 그 이름에는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작은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선 어린 나를 데리고 어느 숲에 숨어 살았다.

이따금 인간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찾아오시기도 했고, 귓가에는 종종 부드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지만, 나는 아버지의 공간이라 불리는 그 숲에서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

아버지인 태양신이 어머니를 죽였다.

태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동생은 태어나지 못했다.

로테 헤레이스가 둘째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신들의 세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무슨 신이 이래?’

성스럽기는커녕, 이기적이고 추하기 짝이 없었다.

신들의 이면을 마주한 그날 이후로 나는 태양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거부했고, 그렇게 나는 나의 의지대로 영영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신들의 자녀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신은 인간에게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자녀를 보내고, 인간들은 그런 재능을 가진 자식들을 ‘선물’한 신을 추앙한다.

신의 자녀는, 인간에게 신의 영향력을 확인시키는 수단인 동시에, 신이 인간의 사랑과 믿음을 받는 방식 중 하나였다.

‘특별한 힘이라.’

그렇다면 나는 무슨 힘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정확히 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검을 꽤 잘 다루는 것을 보니 검술 쪽 재능이 아닐까 싶었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런 힘은 유사시에 전쟁터로 끌려 나가기 딱 좋았으니까. 신의 아들인 걸 들키는 순간 끝장나는 거다.

차라리 그림이나 음악 쪽 힘을 받았어야 했다. 그럼 적어도 전쟁에서 고생할 일은 없지 않은가.

‘리온, 너는 네 이름을 감춰야 한다. 오래 살아야 해.’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지 않았다.

단순히 개명하는 걸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는 걸 직감했다. 내가 이름을 바꿔도, 내가 신의 아들이라는 그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어머니가 죽고 숲을 떠나 거리를 떠돌던 나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어볼 때 마다 ‘없어’라고 답했다. 하도 그러고 다녔더니 이제는 다들 내 이름이 ‘없어’인 줄 알더라.

들키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누군가 한 사람 정도는 내 진짜 이름을 불러 줬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모순이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

사람들의 마음에는 신의 자녀에 대한 환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러니 신의 아들인 내가 이렇게 한량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닐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숲 안에서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넓은 세상에서 처음 내던져진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숲을 떠나 세상을 떠돌던 나는, 넓은 세상의 향기를 맡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고 듣고 함께 했다.

그렇게 나는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매서운 추위까지 사랑하게 되었다.

이따금 좋지 않은 일에 엮일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나의 인생을 이루는 조각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국이 위험해지면 가장 먼저 튀어야겠다는 생각을 철회했다. 만약 제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러 나선다면, 나는 이를 외면할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가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아마…….’

돌아가신 어머니는 땅 밑에서 한숨을 푹푹 쉬시겠지만, 나는 내가 바라본 아름다운 세상을 지키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은 나 혼자 살아남는 삶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과 더불어 살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세상에는 인간이 있어야 했다. 누군가는 인간이 있어 세상이 추해졌다 말하지만, 적어도 나의 세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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