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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94)화 (94/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94화

단장과 함께 단상에 오른 나는 집합한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경들을 소집한 이유는, 내 허락 없이 도주한 리온 경의 체포를 명하기 위해서다.”

“리온 경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음…….

잠시 고민하던 내가 죄목을 정했다.

“9년 동안 나를 속였으니까, 기만죄?”

그러자 발끈한 체르티 경이 소리쳤다.

“9년이요? 그럼 호위직을 맡자마자 속인 거 아닙니까?”

“괘씸죄 추가요!”

“도주죄도 추가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여간 이 인간들, 어떻게든 리온의 죄를 늘리려고 안달이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일이 생겨서 그런가, 다들 신이 났다.

들뜬 분위기에 덩달아 신이 난 나 역시 크게 외쳤다.

“좋아, 잡아 와! 가장 먼저 리온을 잡아오는 조에는 상금과 포상 휴가를 주겠다!”

기사들이 서 있는 쪽으로 한 발을 내디딘 단장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칼을 빼들었다.

“그놈의 웃는 낯에도 침을 뱉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자!”

“보여 주자아!”

스읍. 이거…… 내 생각보다 기사단에서 리온 평판이 나빴나.

조금 뺀질거리긴 해도 서글서글하니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소공작님의 총애를 기만으로 되갚다니, 리온 그 괘씸한 놈!”

흥분한 기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외침 속에서, 나는 거슬리는 말 하나를 잡아냈다.

“내가 언제 총애를 했다고 그래?”

그러자 아래에 집합해 있던 기사들이 다 같이 소리쳤다.

“리온 경만 휴가 데려가시고!”

“그건 리온이 내 호위니까!”

“리온 경한테만 예쁜 옷 사 주고!”

이번에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아니 이 사람들이 말을 맞췄나? 미친 듯한 단합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뻔했다.

“어이가 없어서 참…… 경들도 시스루 사 주면 입을 건가?”

그러자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자리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예!”

“통풍이 잘될 것 같습니다!”

결국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고개를 젓던 나는, 사람을 불러 기사들을 위한 시스루 상의와 양말을 대량으로 구매하기로 했다.

다들 연분홍색이 좋다고 해서, 색상은 통일됐다.

*

내가 소공작이 되자마자 기사들을 소집하자,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셨는지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셨다.

“기사단을 소집했다며? 무얼 했느냐?”

“아버지를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왔죠. 반역을 도모하고 있거든요.”

“하하! 농담도!”

농담이 재밌다며 호탕하게 웃고 나간 아버지께선 10분 뒤에 다시 나를 찾아와서 그게 정말이냐고, 혹시 자기한테 마음 상한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가셨다.

몇몇 기사들이 입은 옷을 보고 놀란 어머니도 나를 찾아오셨는데, 혹시 나만의 하렘을 건국하는 게 꿈이냐고 물어보셨다.

멀리서 보니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만든 후궁들의 숙소 같아서, 나 역시 식겁했다. 하렘인지 기사단 숙소인지 구분이 안 가니 단체로 입고 몰려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리온은 도망친 지 반나절도 안 지나서 자루에 싸매진 채 지하 감옥으로 끌려왔다.

리온을 직접 체포한 체르티와 닉스 경의 말을 들어 보니, 정말 기가 찼다.

“수도 외곽 숍에서 리온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숍?”

“예. 피부 관리 받고 있던데요?”

“허…….”

이왕 잡아갈 거면 관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데…… 어디 얼마나 고와져서 돌아왔는지 확인이나 해 봐야지.

*

철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나는 바닥에 앉아 있는 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리온이 머쓱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죠?”

“죽고 싶어? 도망을 왜 가?”

“나간 지 반나절도 안 돼서 잡혀 왔는데, 이걸 도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들이는 즐거웠어?”

“네. 다음엔 같이 가죠.”

언제 머쓱해했냐는 듯, 내 물음에 리온은 뻔뻔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온을 체포해 온 체르티에게 물었다.

“경이 몇 조였지?”

“저와 닉스 경이 17조입니다.”

“내일 중으로 상금 지급할게. 수고했으니 이만 나가 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인 그녀가 기사들을 데리고 지하를 떠났다. 메이까지 지하를 떠난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나는 마음 편히 리온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도망은 왜 갔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어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리온이 입이 벌새 날개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찾으셨다면 분명 성격도 예전처럼 돌아왔을 텐데…… 예전 성격대로라면 괘씸하다며 제 팔 하나는 잘라 가실 것 같아서, 무서워서 도망쳤습니다. 화가 풀리셨을 때쯤 다시 오려고 했죠.”

팔을 자르다니. 이놈은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아니지. 두 번째 삶에선 폭군 그 자체였으니 리온이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했다.

“……안 그래.”

기억을 찾기 전이면 모를까, 찾은 후에는 혹시 모른다며 리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과오를 인정하며 대꾸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맑은 리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껏 도망쳐서 한 게 피부 관리야?”

“다시 돌아왔을 때 못생겨져 있으면 곤란하니까요.”

“고생한 티를 내서 동정표를 얻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고생한 티를 내서 동정을 받는 것보단, 잘생겨져서 사랑을 받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오…… 합격.

리온이 동의하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과 달리 의자에 앉은 내가 생각에 잠긴 채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경을 기다리면서 생각해 봤는데, 이상한 점이 있어.”

“뭔데요?”

“내가 사형당한 다음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말이야. 그때 분명 시간을 돌리는 힘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독을 먹은 다음엔 어떻게 시간을 돌린 거야?”

설마 힘이 남아 있었으면서, 사라졌다고 거짓말을 한 거였나?

하긴. 남용 가능성이 있으니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계신지 대충 알 것 같은데…… 제 힘은 제가 처음 죽었을 때 사라졌어요. 두 번째로 시간을 돌린 건 제 힘이 아닙니다. 그때 저는 그냥, 독을 마신 아가씨를 따라 죽을 생각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럼?”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기억하시나요?”

분명, 신을 넘어선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 신들의 질서를 위협할 거라고 했었지. 그래서 겁을 먹은 태양신이 리온의 어머니와 함께 그 아이를 죽였고.

호숫가에서 리온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끊기 직전, 신이 거두지 못한 죽은 동생의 힘이, 저만의 방식으로 저에게 넘어온 겁니다.”

설명을 들은 내가 천천히 리온의 말을 정리했다.

일단…… 내가 칼바도스에게 패배한 뒤 처형당했을 때, 리온은 나와 함께 죽기 위해 심장을 찔렀다.

‘그렇게 한 번 죽은 다음에야, 본인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것을 안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삶에서 내가 자살을 시도하자, 리온은 나와 함께 죽기 위해 다시 한번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흩어져 있던 동생의 힘이 리온에게 흡수되면서, 그는 우연히 시간을 돌릴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리온의 동생에게 주어진 힘 역시 신에게서 비롯되었다. 동생의 힘까지 합해서 시간을 돌릴 기회가 총 두 번 주어졌으니, 몇 번 능력을 쓰자 신이 내린 힘이 사라졌다는 그의 말이 맞는 셈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자, 앞에서 살살 눈치를 보던 리온이 입을 열었다.

“다른 궁금한 건 없으세요? 제가 아는 거면 답해 드릴게요.”

문득, 가장 처음 여덟 살로 돌아왔을 적에 내가 가졌던 의문이 떠올랐다.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집요하게 답을 쫓을 정도로 궁금해하지 않은 탓에 바로 잊어버린 작은 궁금증 하나가.

“왜 같은 시기로 돌아온 걸까. 그것도 두 번이나.”

처음 돌아왔을 때도 여덟 살이었고, 이번에도 여덟 살이었다. 내 여덟 살 시절에 뭐가 있나?

아니지, 시간을 돌린 건 리온이니까 리온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여덟 살이면 리온은 열두 살이니까……. 흠, 리온이 열두 살일 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나?

당시 있었을 법한 굵직한 사건을 떠올리려던 그때, 리온이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알아?”

“네. 그런데 별거 없어요. 그냥……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그때로 돌아가던데요.”

담담하게 말한 리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치겠네.’

답을 기대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리온이 모른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생각이었으니까.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 던진 부메랑이 나를 비웃듯이 되돌아와 내 머리를 때렸다.

목에 밧줄이 걸린 것도 아닌데, 숨이 턱 막혔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길 바랐다고.’

칼바도스를 끌어내린 순간도, 황제의 모든 권한을 손에 넣었을 순간도 아니다.

카인과 메이와 함께 공작저 정원을 뛰어놀던 그 여덟 살 시절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녀석은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나의 행복을 빌었구나.

순간 목을 매는 기분이 들었는데,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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