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공녀는 살고 싶다 (93)화 (93/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93화

여기가 현실이 맞나.

너무 오랜만에 눈을 뜨는 기분이라, 서서히 돌아오는 감각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 갑자기 내 시야로 메이의 머리가 휙 들어왔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아.”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내가 침대 옆에 놓인 시계와 창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들어올 땐 밤이었는데, 지금은 낮 같았다.

밤 12시에서 낮 12시가 된 건가?

‘꼬박 하루 동안 누워 있는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네.’

메이가 컵을 건넸고, 나는 얌전히 물을 받아 마셨다. 빈 컵을 건네면서, 뒤늦게야 메이의 반대쪽 손에 톱이 들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톱은 왜…… 들고 있는 거야?”

“하루가 지나도 안 깨어나셔서, 이 빌어먹을 의원을 없애 버릴 생각이었어요.”

“깨, 깨어나셨잖소! 무사히 깨셨으니 된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소공작님?”

나는 의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있나 했더니, 메이를 피해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루가 지나도 안 깨어났다고? 내가 12시간 동안 누워 있었던 게 아닌가?

이상함을 느낀 내가 눈을 깜빡이자, 메이가 눈치껏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정보다 12시간 더 누워 계셨어요.”

그럼 12시간 동안 누워 있었던 게 아니라, 총 36시간을 누워 있었던 셈이다.

본래 예정보다 깨어난 시간이 늦었지만, 세월을 정통으로 맞고 와서 그런지 하루 반이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긴 꿈을 꾼 나와 달리, 하루 만에 깨어날 거라는 의원의 말을 믿은 메이는 초조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1시간만 놀고 온다고 한 자식이, 3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부모 입장에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조금 늦었지만 무사히 깼으니 됐지. 톱은 넣어 둬라.”

“네.”

나는 톱을 정리하러 가는 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메이와 나는 가족이 아니었지만, 메이는 내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메이가 죽은 뒤 나는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그 상황을 직면하니 알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마어마한 상실감과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어.’

메이를 너무 아련하게 쳐다봤나, 의원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다리가 풀린 건지, 의원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여름에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 꼴이었다. 지연된 12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했다.

“덕분에 푹 잤어.”

“……답은 찾으셨습니까?”

“그것도 덕분에 찾을 수 있었지.”

내가 원하는 답은 날아가 버린 전생의 기억이었다.

‘답이 하난 줄 알았는데 중복 답안이었을 줄이야.’

양손으로 내 머리를 쥐어뜯을 듯 붙잡은 나는, 생각을 정리할 겸 손으로 이마 몇 대를 때렸다. 그러자 결론이 나왔다.

‘인성이 썩었어.’

과거의 나는 내로남불의 표본인 사람이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비난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사람이 그렇게 못돼먹기도 쉽지 않은데.”

첫 번째 삶에서 슈아를 죽인 게 나였다고? 그리고 그걸 다른 놈한테 뒤집어씌운 채로 루카스랑 손을 잡아?

이건 뭐, 슈아와 루카스한테 기꺼이 한 대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의원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나는 의원의 집에서 오랜 기억에 찌든 몸을 씻었다.

그리고 터지기 직전 상태인 머리를 식히며 의원이 가져온 빵과 수프를 먹고 있던 그때, 딸랑― 하고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리더니, 루카스가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누님? 여기서 뭐 해?”

“너는 정말……. 음, 아니다. 됐어.”

한동안 얼굴도 안 비추고 뭘 했냐고 한소리를 하려다가, 두 번째 삶에서 나에게 모든 권한을 빼앗긴 루카스가 가여워서 관뒀다. 나한테 무시당하면서 냉궁에 들어간 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잠시 뒤, 성인식 당일부터 거하게 외박을 한 나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고, 내 나름대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소설 속 이야기가 내 첫 번째 삶이었고, 그대로 처형당한 뒤 다시 여덟 살로 돌아와서 두 번째 삶을 살았지.’

그리고 두 번째 삶은…… 저주에 시달리다가 반쯤 미친 상태로 자살했다.

‘그러다가 기억이 끊긴 채 다른 세계를 살아가던 내가, 교통사고 후에 다시 한번 여덟 살 엘렌시아로 돌아온 건가?’

그럼 내가 읽은 『달의 미로』라는 소설은 뭐야? 그 이야기를 쓴 작가는 또 뭐고?

만약 내가 그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로 이 세상에 왔다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쉽게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어딘가 한 부분이 엉켜서……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 의문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시간을 돌린 사람은 바로 리온이다. 그러니까, 사제가 말한 ‘나와 같은 존재’는 회귀자인 리온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리온은 왜 나를 찾아와서 생색을 내지 않는 거지?

‘맨 처음 시간을 돌렸을 땐 바로 찾아와서 알은척을 했잖아.’

그놈도 나처럼 기억이 없는 건가 싶었지만, 예전에 호숫가에서 나눈 대화를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었다.

‘검과 관련된 능력이 아니라면…… 신이 너에게 선물한 힘은 뭔데?’

‘글쎄요. 전부를 바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알려 주기 싫으면 그냥 알려 주기 싫다고 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힘입니다. 몇 번 썼더니 사라지더라고요.’

‘언제 썼는데? 이것도 비밀이야?’

‘9년 전에 마지막으로 썼습니다. 이건 비밀 아니에요.’

리온은 자신이 시간을 돌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번 썼더니 사라졌다고.’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시간을 총 두 번 돌렸고, 그 사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거다.

9년 전이면 내가 여덟 살일 때니까…… 리온이 힘을 쓴 시기와 내가 돌아온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습관처럼 마차 벽면에 머리를 찧자, 자연스럽게 그때마다 내 머리를 받치던 리온의 얼굴과 그의 말들이 떠올랐다.

‘전생에 교수형을 당하면 그렇다는데. 못된 짓 하셨죠?’

‘우리…… 말 놓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오래 살아.’

‘자살하지 말고.’

9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리온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봤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이 자식 이거,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그냥 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 알면서 떠본 건가? 아니면 혼자 옛 감성에 젖어서 한마디씩 흘렸거나.

‘하, 짜증 나…….’

9년 동안 바로 옆에 회귀자를 달고 다닌 주제에,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니 스스로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리온이 힘을 썼다는 시기와 내가 빙의한 시기가 비슷했을 때부터 의심을 해 봤어야 했는데. 의심은커녕, 리온과 깔깔거리며 한량처럼 돌아다니기 바빴다.

‘어쩜 이리 어리석니.’

잔뜩 얼굴을 찌푸린 내가 이마를 덮은 손을 치웠다.

충분히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으니 이제 남 탓을 할 시간이다.

‘나야 그렇다 쳐도, 리온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래, 나를 좋아해서 나를 따라 죽었고, 그 방법으로 시간을 돌린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이왕 티를 낼 거면 대놓고 티를 낼 것이지, 자기가 무드등도 아니고 뭐 그렇게 은은하게 티를 내냐 이 말이다.

‘설마 내가 미워졌나? 그래서 이번 생에선 그다지 알은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든가…….’

오래 살고 싶다며 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감추고 살아온 놈을, 나 하나 심심하다는 이유로 전쟁터로 내몰았으니 싫어할 만도 하다.

루카스와 슈아의 주먹보다 훨씬 아프겠지만, 몇 대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아니지. 내가 싫어졌다면 애초에 나를 만나러 공작저에 오지 않았겠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그 누가 미워하는 사람을 그런 호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만약 지난 9년 동안 내 앞에서 보인 모습이 전부 다 연기였다면…….

‘그건 진짜 대상감이지.’

충격이고 뭐고, 진지하게 기사직을 내려두고 배우 쪽으로 나가길 권하고 싶다.

음. 더 이상 혼자 생각해 봤자 제자리걸음일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친히 리온이 있는 기사단 숙소를 찾아갔다. 그 튼튼한 녀석이 내 생일날엔 앓아누웠다고 했으니 병문안도 겸사겸사해서.

*

“리온이 나갔다고?”

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 내 예상대로 행동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의 아들인 걸 밝히고 전쟁에 나가라는 제안도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지 않은가.

“언제 나갔지?”

“오늘 오전 중입니다.”

방 안을 살펴보니, 그냥 몸만 나간 것도 아니고 짐을 싹 챙겨서 나갔다.

‘내가 기억을 찾은 걸 눈치챘나.’

그런데 왜 도망가지. 그동안 나를 속였다고 내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나는 텅 빈 방 안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화가 풀리면 돌아오겠다고 하더군요. 이 말을 남기고 나간 걸 보면, 그놈도 소공작님이 찾아오실 줄 알고 있었나 본데요?”

“망할 놈.”

“……무슨 일이 있습니까?”

“당장 기사들을 소집해라. 그때 설명할 테니.”

왜 나한테서 도망쳤는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잡아 와서 이유를 들어야겠다. 이유가 타당하다면 얼마든지 놓아줄 의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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