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2화
처음엔 내가 정말 미친 줄 알았다. 이곳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후 세계는 아닐까, 그런 의심도 했다.
한동안은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괜한 걱정을 샀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미친 사람 취급을 하니 성가시기 그지없더라.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죽은 줄 알았던 내가 왜 다시 눈을 떴는지, 왜 하필 여덟 살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와 메이를 보니 좋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뤄야겠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리온입니다.”
나는 무엇이든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생각을 집어치우기로 했다.
그놈이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그가 나와 함께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보다 13년 일찍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이름이 없다고 말한 첫 만남과 달리, 그는 내가 준 ‘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존재에,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반가움보다는 놀란 마음이 컸다.
“네가 어떻게…….”
“글쎄, 내가 신의 아들이라 그런가.”
“뭐?”
신의 아들이라고?
“잘 몰랐는데, 죽음을 통해 시간을 돌릴 수 있었나 봐.”
자신을 둘러싼 기운을 느끼듯, 리온이 손을 몇 번 오므렸다가 피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까,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 것 같고.”
“……얇고 길게 살고 싶다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이름을 알린 신의 자녀는 단명하니까.
“여긴 어떻게 왔어?”
“우연히 공작 부인을 만났어. 그쪽은 신의 아들인 나를 감춰 주고, 나는 신에게 받은 힘으로 당신의 호위가 되기로 했지.”
“힘은 이미 사라졌다며. ……아, 검술 쪽 재능이라고 속였구나?”
처음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 집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변명하듯 말을 얹었다.
“……빨리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래, 차라리 신이 선물한 힘이 검술 쪽 재능이라고 주장하는 게 신빙성 있었다. 인간의 실력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놈이었으니까.
어머니께서도 이놈의 가능성을 보고 수락하신 거겠지.
나는 그렇게 리온을 다시 만났고,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가지 큰 변화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와 레이몬드의 관계였다.
나는 어머니의 서재에 있던 레이몬드와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오빠는 아직 너무 어려서 저택 안에서 적당한 대화를 나누기엔 이 사람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와 나누는 대화는 꽤 즐거웠다.
‘어렸을 땐 그렇게 짜증 났는데.’
이름 뒤에 붙은 메릴이라는 성이 더럽다며 치를 떨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더 추한 사람이 되니 알 수 있었다.
레이몬드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은…… 흑마법의 제물이 되기 딱 좋다는 것을.
‘어쩐지 예전에 렘브로가 화나 있더라.’
눈 여겨둔 제물을 아버지가 동의 없이 쓱싹- 해 버렸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레이몬드는 그렇다 쳐도, 내 팔을 잘라간 레이델 메릴은 정말 짜증 나는 놈이었다. 이놈이 1황자 사람이 되면 까다로울 것 같아서, 레이몬드와 함께 내 쪽으로 당겼다.
‘전생의 앙금 때문에 바로 죽이기엔 실력이 아깝지.’
그리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1황자는, 과거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레이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나는 그 촌극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레이델과의 사이는 예전에 비하면 아주 좋은 편이었다.
레이몬드를 제물로 쓰는 과정에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게 흠이었지.
나는 후작가의 마정석과 흑마법 연구 결과를 훔쳤고, 후작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레이델을 함께 없애 버렸다.
사람의 영혼으로 마정석을 만들 수 있다니. 나는 다시 한번 마탑과 손을 잡고 연구를 진행했다.
오빠는 다시 한번 흑마법을 손에 넣었는데, 흑마법을 시전한 사람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오빠는 자기가 미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고, 저주에 걸리지도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후작가의 연구 보고서에 나와 있는 방법을 이용하여 저주의 방향을 내 쪽으로 틀었다.
너무도 나를 아낀 탓에 같이 사형을 당한 사람이니, 이 정도는 해야 했다.
저주의 방향을 내 쪽으로 틀어도, 내 쪽에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았거든.
나의 노력 아래에서 2황자는 황제가 되었고, 황후가 된 나는 황제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는 대신 황제의 곁에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슈아라는 여자를 붙여 주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고, 나는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은 나는 뒤늦게서야 한 가지 문제를 인식했다.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이루기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인데…… 그 목표들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이뤄 버린 것이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나를 덮쳤고, 나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다른 목표를 세워 봤지만 그 역시도 손쉽게 이뤄졌다.
‘진짜 리온을 정부로라도 들여야 하나.’
하지만 그놈도 나도 피에 절어서 희미해진 그 말을 이제 와서 다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새 목표를 세웠다.
시몬과의 전쟁을 통해 양국간 남매의 맹세를 으깨 버리자고.
“네가 가장 처음 받은 이름은 단델리온이고, 두 번째로 나에게 받은 이름은 리온이었지. 참 우연이네.”
“그러게.”
“처음 이름이 아닌 두 번째 이름이 알려져도 단명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
만약 그렇다면 모든 신의 자녀는 개명을 신청하려나.
문득 그게 궁금해져서, 나는 그에게 ‘리온’이라는 두 번째 이름으로 전쟁을 나가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리온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그걸 확인하면 당신이 조금은 즐거울까.”
“어. 즐거울 것 같아.”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맹세를 깨는 전쟁의 명분을 위해 신의 아들을 내세웠고, 그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전쟁터로 떠났다.
리온이 떠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고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머리로 자식을 낳은 어느 신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이 통증을 호소하자, 신의 아들이 도끼를 가져와 그의 머리를 살짝 쪼개었던가.
누가 나를 위해 도끼를 가져와 줬으면 싶었다.
‘그리고 그 도끼로 나를…….’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하자, 성격이 더욱 예민해졌다.
설마 이게 바로 흑마법 시전자에게 향하는 저주인가.
밤마다 귓가에서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니 미칠 만도 했다. 아무래도 내가 죽인 사람들의 목소리 같았다.
제대로 들지 않는 약을 가져오면 목을 자르겠다는 나의 협박에 시달린 의원이, 새로운 약을 가져왔다.
“……자주 사용하면 중독되실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부작용도 있을 테고요.”
내가 잘 알고 있는 약이었다.
전생의 내가 황후를 시켜 황제에게 가져다준 약이었으니까.
나의 죄가 돌고 돌더니 다시 내 앞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나는 생기 없는 선황의 눈동자를 떠올리면서도 거침없이 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이 조금씩 끊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어 둘까.’
이대로 가다간 오늘 오전에 한 일도 떠오르지 않게 생겼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기억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수첩 하나를 다 채웠을 무렵, 승전 소식과 동시에 리온의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리온이 죽었다고?’
차라리 리온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아직 그놈에 대한 기억은 생생했다.
이름을 감추고 조용히 살던 전생에서, 그는 나를 위해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전쟁을 떠난 신의 아들이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나는 너를 두 번 죽였구나.’
리온의 소식이 들려온 날 밤, 나는 죽음을 결심했다.
평소였다면 그놈이 그렇게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는 강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뿌리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서, 가만히 서서 버티는 것조차 어려웠다.
단순히 리온 때문에 죽음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약한 바람 한 점에도 무너질 정도로,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썩어 있었다.
리온의 죽음은,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무수히 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실은 나는 아주 예전부터 죽고 싶었고, 그의 죽음을 빌미로 삼아 이 기회에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래, 내 주위에는 언제나 기름이 퍼부어져 있었다. 리온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 위로 떨어지는 작은 성냥 불꽃이고.
나는 언제나 한발 늦게 나에 대해서 깨닫고 만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목을 맬까 했지만 그건 이미 아는 고통이라, 나는 서랍 속에 묵혀둔 독을 꺼내 삼켰다. 내성이 있어서 바로 죽지도 않았다.
‘에이씨, 괜히 이걸 주워 먹어서…….’
한 번에 가는 걸로 골랐어야 했는데, 속이 더럽게 아팠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 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는 남자가 리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얘 죽었다고 한 놈 누구야. 살아 있잖아.’
이상하다.
아까까진 분명 죽고 싶었는데, 지금은 조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를 죽고 싶게 만드는 수천 개의 이유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중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고 싶은 건지 살고 싶은 건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끓어오른 피를 토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나를 감싼 품 안에서 비릿한 향이 느껴졌고, 그렇게 영영 눈을 감을 줄 알았던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떴다.
이번에 눈을 뜬 곳은 여덟 살 적 내 방이 아닌, 의원의 아담한 침대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