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1화
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 귀에는 들어가지 않길 바랐는데.
이놈이 알게 된 이상 어머니가 아시는 건 시간문제다.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면, ‘아가씨가 말하지 말라고도 하셨어요.’라고 어머니께 보고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저번처럼 내 말에 따르라는 명령은 아직 못 받았다고 하거나.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나는 품 안에서 새로 구한 단검을 하나 꺼내 리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선물이야.”
“뇌물 아니고요?”
“시간 남으면 입 다물고 이걸로 죽지 그래.”
그 말을 들은 리온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계단을 올랐고, 계단 아래에 있던 그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글쎄요, 호위 일 때문에 시간이 남을지 모르겠네.”
“그럼 휴가라도 가든가.”
“싫은데요. 누구 좋으라고.”
리온이 히죽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아무래도 그는 이번 일로 나와 자기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멍청한 놈. 오히려 나를 더 꽁꽁 싸매면 싸맸지, 내가 네 앞에서 경계를 푸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
리온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한 놈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에 잠겨 마차 벽면에 내 머리가 부딪치면 그 사이로 손을 가져다 대고, 강한 햇빛에 눈을 찌푸리면 손으로 햇빛을 가려 주고, 불안한 마음에 손톱으로 반대편 손등을 꾹꾹 누르면 그 손을 붙잡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 요상하면서도 거추장스러운 호의가 익숙해졌을 무렵, 그놈이 멋대로 말을 놨다.
‘그래, 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도박장 건이 어머니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어느새 메이의 기일이 되었고, 나는 술병 하나를 들고 메이의 무덤가로 향했다.
술잔은 두 개였으나 술을 즐기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시체를 되찾지 못한 탓이었다.
볕이 잘 드는 무덤에 기댄 내가 햇빛 때문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내 어머니에게 충실한 나의 호위가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고 섰다.
“따라오지 말랬더니.”
“이젠 안 따라오면 허전하지 않나? 내 목표는, 내가 없으면 당신이 허전함을 느끼게 만드는 거야.”
반 정도는 성공했다는 말을 하려던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들은 리온이 기세등등하게 굴 것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성가셨기 때문이다.
태양을 가린 그의 뒤에는 드넓은 파란 하늘이 무대의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을 눈에 담은 내가 천천히 입을 열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늘이 참…… 찢어발기고 싶게 생겼네.”
“……뭐라고?”
바람이 부는 것도 싫고, 꽃잎이 흩날리는 것도 싫다. 아,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것도 싫었다.
떠오르는 해를 막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내가 영원히 눈을 뜨지 말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높고 이루기 어렵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목표를 세워야 했다.
적어도 그 어려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는 노력할 테고, 매일 아침 포기하지 않고 눈을 뜰 테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입 밖으로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리온이 나를 업고 걷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깜빡 잠들었나.’
달라진 숨소리에 내가 잠에 깼다는 사실을 알아챈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으면 좋겠어.”
내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소린가?
나는 지금도 나를 사랑했지만, 리온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짧게 질문했다.
“왜?”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머지않아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걸.”
리온의 말을 들은 내가 옅게 미소 지었다. 짜증이 나서 하늘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장난 같은 내 말에, 그가 너무도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를 사랑해?”
“당연하지.”
“정말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
물론이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서로의 머리카락이 비벼졌는데, 그게 간지러워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냥 네 대가리가 꽃밭이라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거 아니고?”
“대가리가 꽃밭인 건 모르겠고, 내 머리가 꽃 같긴 해. 꽤 예쁘잖아.”
“그러게. 확 꺾어 버리고 싶네.”
“방 안 화병에 곱게 꽂아 둔다면 날 꺾는 걸 기꺼이 허락할게.”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지.
그래도 제법 유쾌한 성가심이었다.
이런 이상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 메이가 죽은 뒤로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
“2황자가 황위에 오르고 나면, 당신은 황후가 되겠지?”
“그렇겠지.”
“그럼 나를 정부로 들이면 되겠다.”
“유감이지만 2황자는 남색가가 아니야.”
“……하, 아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응. 많이 멍청해졌네.”
최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건 바로 이놈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대놓고 속을 드러낼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영영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괜히 다른 말을 했다.
“그 실력이면 전쟁 한 번 나가서 공이나 세우지그래? 내 옆에서 황제의 정부가 되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나.”
“아니, 그쪽 정부 되는 건 관심 없다니까.”
자꾸 얼쩡거리는 것이 성가셔서 한 말이기도 했지만, 진심이었다. 실력은 보장한다는 어머니의 말대로 리온은 강했다. 기사단의 날고 기는 실력자들을 모두 제압했으니까. 그러자 드물게 진지한 얼굴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얇고 길게 사는 게 꿈이라 유명해지는 건 사절이야. 그리고 전쟁은 너무…….”
“너무?”
“무섭잖아…….”
부러 과장된 어조로 말한 그가 아양을 떨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대로 리온의 머리를 밀어내려던 손을 거두고, 그가 먼저 머리를 치우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머리통을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나는 그 상태로 리온에게 열쇠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야?”
“있잖아. 지금부터 나는 너에게 기한 없는 휴가를 줄 거야.”
“……휴가?”
“아무도 모르는 사택 열쇠인데, 위치를 알려 줄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내 손으로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내 발로 너를 데리러 갈 테니까.”
그러자 리온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정리하겠다고? 진심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의 생각과 달리 1황자 세력을 정리하겠다는 의미였지만, 그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말해 놔야 떠나겠지.’
옆에서 리온이 자꾸 말을 걸어 대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그리고 자꾸 이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놈을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기로 했다.
천천히 내 말을 곱씹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해?”
유감이지만 아직 나는 저놈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로맨틱한 말을 골라서 해 주었다.
“음, 나는 너랑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해.”
하지만 말을 마치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로맨틱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리온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놈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 같이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셈이니까.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가 붉어진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를 했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땐 다른 답을 할 수 있길 바랄게. 분명 우리는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내 어머니의 명령으로 내 곁에 머물렀던 리온이, 이번에는 나의 명령으로 내 곁을 떠났다.
하지만 리온의 바람대로 내가 그에게 다른 답을 하는 날은 오지 않았는데, 그건 반란에 실패한 내가 밧줄에 묶인 채 교수대로 질질 끌려갔기 때문이다.
목에 밧줄이 걸리고, 교수대 위에 선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1황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찍어누르려 했던 1황자를, 그럼에도 결코 내려다볼 수 없었던 1황자를, 이렇게 내려다보다니.
나는 비로소 인정했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내 쪽이었구나.’
처음에 열등감을 가진 건 분명 1황자 쪽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입장이 뒤바뀌었다.
나는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어머니께서 나를 지키기 위해 리온을 내 옆에 붙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고, 오빠는 어린 시절 사고가 불러온 죄책감 때문에, 나에게 미안해서 잘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그냥, 나를 많이 아꼈을 뿐인데.’
그렇게 죽음 직전에 선 나는 뒤늦게서야 나의 오만함과 열등감을 깨달았다.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형을 집행하라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침묵하고 있는 리온이었다.
‘기다리고 있으랬더니.’
밧줄이 내 목을 조여 오는 순간, 리온은 품 안에서 내가 선물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망설임 없이 그대로 제 심장을 찔러 버렸다. 얇고 길게 살고 싶다던 놈이 이렇게 쉽게 삶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나를 따라 죽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 내가 짧게 욕을 뱉었다.
‘……내가 미친 건가.’
나는 다시 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