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90화
“……리베르트 공녀?”
1황자는 나에게 열등감을 가졌고, 나는 일찍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그의 속을 안다는 눈을 하자, 1황자는 더더욱 나를 꺼리기 시작했다.
점점 이복동생인 2황자를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는데, 아등바등 아버지 총애에 매달리는 꼴이 참 우습더라.
하지만,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머리를 숙여야 하는 건 내 쪽이었고, 그는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놈이 황족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작문도 달리고, 왕국어 실력도 달리고, 검술도 달리는 놈이 황족이랍시고 나를 내려다보는 게 참 마음에 안 들었다. 그놈의 피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물론, 평민이 귀족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는 날은 오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튼 나는 멱살이나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1황자를 끌어내리고 싶어졌다.
시간이 흘러, 얼떨결에 시몬으로 가는 사절단에 끼인 나는 왕국에서 힐다 왕비와 칼린 2왕자를 처음 만났다.
아카데미 시험에 응시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왕국에 온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욕망을 감추지 않는 노골적인 힐다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제국에 돌아온 나는 시몬의 공주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1황자 그놈 속이 제대로 썩어들어 갔겠네.’
내가 직접 밟아 주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분을 이기지 못해 몸을 덜덜 떨 것을 생각하니 만족스럽더라.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아카데미 역사학부에서 공주를 만난 1황자는 내내 히죽거리고 다녔다.
‘1황자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성했나?’
실성한 놈이라 끌어내리기 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사에 여유가 없던 저놈이 시몬의 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쉴 줄 모르고 달리기만 하던 놈이었는데, 적당히 휴식을 취하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공주를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까지 배웠다.
그놈은 점점 밝아졌고, 행복해졌다.
나는 그대로건만, 그놈이 밝아질수록 나는 상대적으로 어두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이 세상이 1황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 스스로 어둠을 택하여 1황자의 존재를 부정하기로 했다.
*
나는 1황자를 끌어내린 뒤, 내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그 자리에 오르면,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가 채워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가 페르데니아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국의 초대 황제 로울레우스 페르데니아가 태양신과 피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빌어먹을 계약 때문에 로울레우스의 후손만이 천년 동안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여간 망할 황제 같으니.’
그러니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은 루카스 2황자뿐이다. 1황자보다 유약하고, 휘두르기 쉬운 성격이니 딱 좋았다.
‘2황자가 평민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덕분에 밖으로 나도느라 정신이 없댄다.
반항기인가, 어렸을 때 그렇게 무서워하던 메릴 후작의 말도 무시한다고 들었다.
흠. 이걸 어떻게 할까.
나는 사람을 시켜 2황자가 좋아하는 슈아라는 여자를 죽인 뒤, 세브리만 백작의 손자 로버트 세브리만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어차피 술을 마시면 기억이 끊기는 놈이니까 상관없겠지.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놈이기도 하고.
백작은 손자를 감쌀 것이고, 2황자가 눈물로 호소해도 황제는 백작의 편을 들 것이다.
황제는 2황자를 아들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고, 1황자를 위한 황제의 비밀 자금이 백작의 사업과 연관이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2황자 루카스가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공녀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처 지우지 못한 슬픔과 새롭게 새긴 분노가 뒤섞인 앳된 얼굴이었다. 황제를 증오하는 2황자는 황제의 절망을 원했다.
‘1황자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면 황제가 절망에 빠질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거겠지.’
2황자의 모습을 본 나는 입이 찢어지게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2황자가 무엇을 원하든, 황후는 그것을 실현한다. 나는 황후에게 약물을 건넸고, 황후는 황제의 식사에 약을 탔다.
약을 먹은 황제는 매일 밤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술과 약 없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고 이따금 환청을 듣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나는 황후에게 심각한 중독 문제가 있는 진통제를 선물했다. 시몬의 칼린 왕자가 준 정보였다. 황후는 의원에게 그 약을 전달했고, 황제는 서서히 약물에 중독되었다.
초라해진 아버지를 바라보는 1황자의 빛 잃은 눈동자는 나를 제법 흡족하게 했다.
*
메이가 죽었다.
리오스 1왕자와 더럽게 엮였기 때문이다.
1왕자의 수하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그대로 건물을 폭파시켜서 함께 죽은 것 같았다.
왕비와 칼린은 리오스 그놈 하나 정리하지 못하고 뭘 하고 있단 말인가.
흉포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용이 내 속을 물어뜯은 것처럼 아팠다. 크게 상심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 돌고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5월이 되어 있었다.
“체르티 경이 부상을 입었다지?”
“예. 조만간 은퇴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새롭게 너의 호위를 맡을 사람을 데려왔단다.”
리베르트 기사단 내부 사람도 아니고 외부에서 새롭게 영입한 기사라니. 심지어 길바닥에서 구르다 온 놈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직접 데려온 놈이라 해도 썩 내키지 않았다.
바로 수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어머니께서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실력은 보장하마. 내가 본 기사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어. 아, 얼굴도 훌륭하단다.”
“전 이미 사랑하는 약혼자가 있습니다만? 얼굴로 설득하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가 쓰게 웃었다. 메릴 가문을 그렇게 싫어하던 내가, 2황자와 메릴 가문과 손을 잡은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겠지.
나 역시 어머니께서 내게 새 호위를 붙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감시인가?’
아무래도 최근 통제를 벗어난 내 행동 때문인 것 같았다.
찝찝했지만 최근 리베르트 기사단 통솔권을 얻었으니 이 정도는 기껍게 받아들이자. 동부 해군 통수권은 어머니 손에 있으니 크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지.
감시가 아닌 보호를 위해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를 내 곁에 붙인 어머니의 뜻을,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고개를 끄덕인 뒤 나의 새로운 호위를 만나러 갔다.
‘오.’
새 호위의 얼굴이 훌륭하다는 어머니의 말은 빈말은 아니었다. 리베르트는 얼굴로 기사 뽑냐는 말을 듣기 딱 좋았다.
‘오가면서 눈요기는 하겠군.’
절망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기사였다.
그 푸른 눈이 1황자의 것과 비슷한가 싶다가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깊이가 섬찟함을 자아내는 탓에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눈앞의 남자를 더욱 아득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름이 뭐지?”
“없어.”
“뭐야, 혓바닥 잘리고 싶어?”
이 망할 놈이 말이 짧다.
어머니를 뒷배로 둬서 그런가, 내 말에도 남자는 쫄지 않고 웃었다.
하여간 건방진 놈. 얼굴값 하네.
‘그나저나, 이름이 없다고?’
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기 직전, 외눈박이 괴물에게 자신의 이름을 ‘nobody’라고 소개한, 내가 좋아하는 영웅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지만…… ‘없어’가 이름인지도 모르지.’
이름이 없다는 의미인지, ‘없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의미인지.
전자든 후자든 부르기 애매하긴 매한가지라, 나는 그 건방진 놈에게 리온이라는 이름을 넘겼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리온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써.”
얼마 전 죽은 내 말의 이름이 ‘히페리온’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메이처럼 저놈이 소중해서 이름을 지어 준 게 아니다.
그래도 내 호위인데, 사람들 앞에서 ‘없어’라고 부를 순 없지 않은가.
리온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 분명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나는 화병이 나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 빌어먹을 기사가 자꾸 내 속을 긁어 댔기 때문이다.
“귀가 썩었나?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 따라오지 않는 거야.”
“저는 당신의 뒤를 따라가고 당신을 지키는 게 일인데요?”
“내 말에 따르는 건 네 일이 아닌 모양이지?”
“따라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폭발한 내가 화병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아니 뭐 이딴……! 좋고 나발이고, 그러라고 달고 다니는 거잖아!”
매섭게 날아간 화병을 여유롭게 잡은 그가,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글쎄. 당신한테 복종하라는 명령은 아직 못 받아서.”
이놈은 자기가 어머니 사람인 걸 숨길 생각도 없구나.
리온은 그 뒤로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꼴이 참 짜증 나서, 나는 그놈을 엿 먹일 겸 해서 몰래 도박장에 다녀왔다. 물론 하녀에겐 며칠 쉬다 올 테니 찾지 말라는 말을 남겨 두고 말이다.
음, 잘 쉬었다.
옆에서 떠들어 대는 놈도 없으니 기분도 많이 괜찮아졌고.
하지만 저택에 도착한 나를 잡아채는 손에, 나는 다시 얼굴을 구겼다.
“……이틀 동안 대체 어딜-”
웃는 법만 아는 것 같던 리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머니한테 깨졌나.’
낯선 얼굴에 나는 웃음을 흘렸다. 분명 작게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게 웃었나 보다.
깔깔거리는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화, 걱정, 안도 등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나를 붙잡은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소매에 있던 도박장의 칩이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어졌다.
반대로 그걸 본 리온의 입에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