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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89)화 (89/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89화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고, 내 전생을 알 수 있는 그 빌어먹을 소설엔 엘렌시아의 심리가 거의 묘사되지 않았다.

기억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회귀자와 엘렌시아 아니, 그 인간과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공작 부인이나 공작인가? 아니면 카인?’

하지만 카인은 나와 함께 처형대에 있었다. 그리고 마법으로 시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예전에 확인했다.

그럼 도대체 어떤 미친 인간이 나같이 성격 더러운 악역을 위해서 시간을 돌리냐 이 말이다. 소설에서 그려진 엘렌시아의 성격상 누굴 진심으로 아껴 줄 위인은 못됐으니, 가식에 속아 넘어간 게 틀림없다.

진짜 호구 아닌가.

‘……설마 메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메이는 엘렌시아보다 먼저 죽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머릿속에서 메이의 얼굴을 지워 냈다.

‘이거 참, 기억이 없으니 답답하네.’

기억이 있다면 전생의 나에게 호감을 보인 사람으로 후보를 추려 볼 텐데 말이다.

나 때문에 시간을 돌렸으면 어떻게든 나를 찾아와서 생색을 내야지, 그 사람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하여간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돌린 거겠지.

‘아니지, 안 찾아오는 게 아니라 못 찾아오는 거면……?’

설마 그 사람도 나처럼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잖아?

신에게 답을 구하기라도 하듯이, 나는 간절하게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생기 없는 눈을 한 그녀가 신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망각은 죄다.”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 매달려라. 그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사제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레이델이 내게 다가와 안색이 나쁘다며 걱정 어린 말을 건넬 뿐이었다.

*

그날 밤, 나는 메이와 단둘이 저택을 빠져나가 루카스의 스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매달리려면 자살 시도를 해야 하는데, 주치의에게 부탁하면 공작 부부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소공작이 되더니 부담이 커진 거냐며, 공작 부부가 후계자 임명을 재고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본래 리온도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리온은 아까부터 열이 올라 끙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다고 해서 메이와 둘이 갔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의 방문에 지하 창고에 있던 의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고, 마음이 급했던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가 지금부터 자살을 시도할 건데, 자네는 지금부터 내가 죽지 않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게.”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그래, 그래.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황당한 거 이해해. 미안하네. 그런데 어쩌겠나? 내가 잠깐만 죽고 싶다는데.”

하얗게 얼굴이 질린 그녀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차라리 영영 죽으십쇼! 그게 쉽겠네!”

“유감이지만 내가 잘못되면 범인은 자네라는 글을 남기고 왔으니 반드시 나를 살려야 할 거야. 수하에게도 자네를 범인으로 지목하라고 지시했네. ”

뒤쪽에 서 있던 메이가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담긴 온기를 읽지 못한 루카스의 스승은,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한참을 떨던 그녀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흘리듯이 남겨 두고, 다시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자살 시도 후 나의 회복을 도울 약재를 가지러 간 것 같았다.

푹신한 방석이 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나는 내가 죽을 방법을 고민했다.

‘전생처럼 목을 매야 하나? 아니면 독?’

두 방법 다 내키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 리온이 선물한 검으로 목을 찔러 볼까 했지만, 그 역시 내키지 않았다. 나를 지키라고 선물해 준 검을 그렇게 쓰기 싫었다.

죽을 방법을 고르고 있던 그때, 창고에 다녀온 그녀가 탁자 위에 작은 병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두 손가락으로 병을 들어 올린 내가 내용물을 살폈다.

“이게 뭐야? 한 번에 가는 독?”

“하루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질 수 있게 하는 약입니다. 부작용도 없으니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일단 이 약을 써 보고…… 소공작님께서 원하시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때 목을 매든, 독을 먹든,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죠.”

오.

터무니없는 요구에도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괜히 협박으로 채찍질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쯤에서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나는 손에 든 병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마음은 말도 글도 아닌 돈으로 표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확인하고 무사히 눈을 뜨면, 그때 거하게 투자할게.”

그러자 의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 때문에 어릴 적부터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 다짜고짜 협박을 해서 은근히 섭섭했나 보다.

나는 사이좋은 친구처럼 의원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침대가 있는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의원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네는 천재야.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 의원이지.”

“……허, 참.”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의원이 나를 자신의 침대로 이끌었고, 침대에 누운 내가 병을 열었다. 뽕나무 열매와 비슷한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가사 상태로 만들어 주는 약이라니. 마치 줄리엣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약을 들이켠 다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가 빨리 죽지 않자 당황한 의원은, 따뜻해야 약이 잘 듣는다며 이불을 덮어 줬다.

어째 사약을 받아먹고도 죽지 않는 죄인이라 온돌방에 누워 있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사약이 잘 듣지 않는 체질이었으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밀려왔고, 나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메이가 의원의 앞에서 칼을 가는 소리와 의원이 다리를 떠는 소리가 들렸는데, asmr 같아서 재밌고 좋았다.

*

나는 아주 고귀한 사람이었다. 가문의 위상은 드높았고,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가 있었다.

어렸을 때 오빠의 마나 폭주로 큰 흉터가 생겼지만, 그걸 제외하면 나에겐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멘탈이 나가 버린 오빠는 가출 시도를 했다. 나는 오빠를 붙잡았고, 오빠는 순순히 내게 붙잡혀 줬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을 증명하듯이,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더 단단해졌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오빠의 마나 폭주가 있기 전, 나는 공작저에 있던 유모의 딸을 꽤 좋아했다.

그래서 내 보석함 안에 들어 있던 루비 목걸이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거 너 줄게.”

동그란 눈을 가진 그 애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받으면 안 된대요.”

하지만 안 된다는 말과는 반대로, 목걸이를 바라보는 그 애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유모의 딸이 내 선물을 받을지 고민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이걸 안 받으면 너랑 같은 방을 쓰는 아이의 침대에 이 목걸이를 숨길 거야. 그리고 그 애가 훔쳐 갔다고 하면…… 도둑이 된 그 애는 쫓겨나겠지?”

“네?”

“그 애가 쫓겨나면 그건 다 너 때문이야.”

유모의 딸은 내 선물을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유모에게 목걸이를 들킨 그 애가, 유모의 추궁을 못 이기고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망할 것 같으니.’

유모는 내가 한 행동이 나쁜 행동이라고 가르쳐 주며 목걸이를 돌려줬다.

무서운 표정을 지은 유모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처럼 나쁜 행동을 하면 뒷골목의 마르시가 잡아가요.”

내가 한 행동은 나쁜 행동이다.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뒷골목의 마르시가 나를 혼내기 때문이고.

‘그럼 마르시를 내 편으로 만들면 되겠구나.’

같은 편이면 나를 안 혼낼 거 아냐.

나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 마르시를 찾아 나섰고, 운 좋게도 바로 마르시를 만날 수 있었다.

시몬 왕국에서 살던 마르시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빚과 어린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동생은 죽었고, 점점 늘어나는 빚에 겁을 먹고 제국으로 도망쳤다고.

동생 장례를 제대로 치러 주지 못한 게 아직도 신경이 쓰인댄다.

본인을 마르시라고 밝힌 여자는, 나를 앞에 두고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입에서는 포도 냄새가 났다.

“제국에 오면 새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할 줄 아는 게 사람 죽이는 일밖에 없어서 아직도 이러고 있네.”

“동생하고 놀아 준 적 있어?”

“있지.”

“할 줄 아는 거 있네! 나랑 놀아 줘. 유모 딸이 나를 배신해서 이제 걔랑 안 놀 거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마르시는 훌쩍이면서 나를 따라왔고, 나는 마르시를 내 하녀로 들이겠다고 했다.

나는 소중한 것이 생기면 이름을 지어 주는 버릇이 있었는데, 마침 마르시를 만난 달이 5월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이름을 싫어했던 마르시에게 ‘메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줬다.

얼마 뒤, 유모는 공기 좋은 곳에서 아픈 아들을 요양시키고 싶다며, 딸과 아들을 데리고 시골로 떠났다.

조금 아쉬웠지만 메이가 있으니 괜찮았다.

유모의 추궁을 못 이기고 내 말을 바로 일러바친 그 애와는 다르게, 메이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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