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8화
“나의 딸 엘렌시아 리베르트의 성년을 축하하며, 이 자리에서 엘렌시아를 나의 후계자로 임명하고자 한다.”
나를 데리고 실내 단상 위에 오른 공작이 짧게 축사를 마쳤다. 공작이 머리 위로 잔을 들었고, 홀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공작을 따라 잔을 들었다.
단상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축하드립니다, 소공작님.”
“이제 짝만 찾으시면 되겠습니다. 마침 제 아들놈이-”
“큼. 짝보단 아카데미 졸업이 먼저지.”
내 쪽으로 다가온 공작 부인이 매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는 메릴이 아닌 헤르트라는 성을 쓰는 형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몬드와 레이델이 내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말끔하게 머리를 넘긴 레이몬드는 물오른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조만간 헤르트 백작가에 구혼장이 쏟아지겠구나 싶었다.
진심으로 내 생일을 축하하는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걸친 레이몬드가 물었다.
“제 선물은 받아 보셨습니까?”
“네. 오늘 아침에 하인이 달여 줬습니다.”
이 형제는 나에게 페가산의 뿔이라 불리는 약재를 선물해 줬는데, 악몽 탓에 아침부터 기운이 빠진 나를 보고 놀란 메이가 달여 줬다. 덕분에 아침 내내 입안에서 쓴 내가 진동했다.
다시금 떠오른 씁쓸한 맛에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건강은 일찍부터 챙기셔야 합니다. 지금 쌩쌩하다고 무리해서 밤새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게 다 나중에 쓸 체력을 당겨서 쓰는 거니까 앞으로는-”
잔소리 길이가 팔만대장경 급이네.
본인이 몸이 약해서 그런가, 레이몬드가 조금 흥분했다.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이쯤에서 끊자.
“그런데 그런 독한 걸 보내실 땐 사탕도 같이 보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참 센스 없으십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버지란 작자에게 보고 배운 게 없어서요.”
“허.”
블랙 조크인가?
이 인간 이거, 이제 직접 나서서 본인 아버지를 후려치고 있었다. 요 며칠 누가 뭐라고 했나.
성까지 갈면서 고인이 된 후작과 선을 그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된 모양이다.
당황한 것도 잠시, 주변에 사람도 많았겠다, 나는 레이몬드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큼, 아버지 직업이 뭔데요?”
“반역자십니다.”
누가 반역자 아들이라고 욕하기 전에 먼저 자길 후려쳐서 할 말 없게 만들겠다는 의도 같았다.
‘까이기 전에 먼저 까겠다는 건가.’
뭐, 후작 이야기를 들먹이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쭈그리고 있는 것보단 이렇게 나오는 게 낫지. 이편이 재밌기도 하고.
“아버지한테 보고 배운 게 없으셔서 다행이네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역시 연을 끊기 잘했지요.”
“덕분에 제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얹은 내가 흘끗 분위기를 살폈다.
애써 웃는 티가 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장단을 맞춰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레이몬드도 참, 생긴 거랑 다르게 기가 세구나.’
레이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따라 죽으려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나.
후작가 생활 3년이면 없던 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
“다들 차기 공작 부군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주제를 모르는 놈들이죠.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날을 잡아서 한번 밟아 줘야 합니다.”
자꾸 내 앞에서 몸을 배배 꼬는 남자들을 보며 카인과 공작이 속닥거렸다.
내가 남정네들의 독한 향수 냄새에 얼굴을 구기자, 공작 부인 역시 내게 속삭였다.
“혹시…… 저 중에 취향이 있느냐?”
“있을 리가요.”
“그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예술 교육을 시키길 잘했구나. 너는 미와 추를 구분하는 능력이 탁월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 공작 부군이 되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네 아버지 옆자리를 노리는 게 빠를 거라고 전해라.”
“아버지는 동의하셨나요?”
“네 아버지 뜻이 뭐 그렇게 중요하겠니. 너와 내 뜻이 중요하지.”
“하긴요.”
그 말에 놀란 공작이 손을 덜덜 떨며 다가왔는데, 귀찮아질 것 같아서 나는 칼바도스가 있는 곳으로 피신했다.
루카스 이놈은 사람이 많은 곳은 싫으니 나중에 따로 찾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어휴, 썩을 놈.’
이런 때일수록 찾아와서 얼굴을 내밀어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칼바도스가 있는 곳으로 피신하는 길. 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귀족 청년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역시 황태자비가 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인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한 내가, 환멸난다는 표정으로 칼바도스의 옆에 섰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칼바도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나와의 약혼설에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는 걸 인정해?”
“조금.”
나는 허망한 눈으로 칼바도스를 바라보며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바도스는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어렸을 때, 공작 부인이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
“너랑은 꼭 친구로 남아 있어 달라고.”
공작 부인이 칼바도스한테 그런 부탁을 했다고?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려고 했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 칼바도스가 먼저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땐 그게 싸우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건 너를 좋아하지 말라는 뜻이었어.”
친구는 혼자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두 사람이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공작저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그날, 공작부인이 테이블 아래에 숨은 칼바도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 한쪽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친구 사이로 남아 있을 수 없지.
대등하게 나눠 가진 관계의 의미가 한쪽으로 기울어 버리기 때문이다.
칼바도스에게 공작 부인의 말을 전해 들은 내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스 네가 나를 좋아할까 봐 걱정하셨나 봐. 그래, 그럴 만하지.”
그러자 칼바도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되면 같이 좋아하지 말고 거절해 달라는 의미였겠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워낙 훌륭해서, 네가 나한테 반하진 않을까 걱정이 많으셨을 테니까.”
“하여간 재수 없는 놈. 너도 알지? 너 재수 없는 거.”
“나도 잘 알지. 그래, 나는 정말…… 재수가 없어.”
나는 못마땅하다는 의미를 담아 재수가 없다고 한 건데. 칼바도스의 말은 마치, 본인이 참 운이 없다는 뜻처럼 들렸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했다.
창 너머로 들어온 햇빛에 눈이 따가웠는지, 칼바도스가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 웃었다.
“내 선물은 잘 받았고? 제국어 공부 열심히 해야지?”
“……어? 아, 네. 여르,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제국 최고. 음식이 맛있습니다.”
일부러 미숙한 척 제국어를 떠들어 대자 칼바도스가 폭소했다.
열심히 외국어 공부해 온 사람을 비웃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행동인지. 페르데니아 제국의 황태자는 사람이 참 글러 먹었다.
나는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구석에서 실실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주변을 의식한 우리는 각자 홀의 중앙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하얀 망토를 뒤집어쓴 사제였다.
이 세상에 또 다른 빙의자가 있다고 말해 준 그 사제였다.
‘사제가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나는 오늘 사제가 온다는 말을 전해 듣지 못했다. 나를 축복하기 위해서라면 공작 부부가 저런 하급 사제 말고 대신관을 불렀겠지.
이상하지 않은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며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이 홀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도 저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법인가?’
하지만 마법이라면 카인이 나보다 먼저 저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눈알을 굴려 카인을 살폈지만, 카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온 그 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직도 그대가 이방인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가?”
뭐?
얼떨떨하게 사제의 손을 맞잡은 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몽롱한 눈에 나를 담은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돌아왔다고?
나는 천천히 사제의 말을 되짚었다.
‘내가 이 세상의 이방인이 아니고, 돌아온 거라고.’
그럼 이건 단순히 내가 엘렌시아의 몸에 빙의한 게 아니다. 엘렌시아이자 나의 회귀지.
그 사실을 깨닫자, 자연스럽게 얼마 전 사제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그대와 같은 존재가 하나 있다.’
친절도 하셔라.
빙의자가 있다고 생각했더니, 오해를 정정하기 위해 사제의 몸을 빌려서 친히 여기까지 걸음 하셨다. 무슨 신이 이렇게 한가하담.
‘이럴 거면 착각하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똑바로 말해 주든가.’
그때 사제가 말한 ‘나와 같은 존재’는 빙의자가 아닌 회귀자를 의미한 거였다.
‘개나 소나 회귀를 할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그 사람과 나는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그대와 함께 돌아온 자가 시간을 돌렸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제가 답했다.
속마음이 들렸나.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내가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속으로 비꼬는 짓은 그만하고 질문이나 하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와 함께 돌아온 사람.
“그 사람이 시간을 돌린 이유가 뭡니까?”
“소중한 사람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서. 오직 그것 하나를 위해 시간을 돌렸다.”
“소중한 사람?”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변화의 시작점에 서 있는 존재다.”
모든 변화의 시작점에 있는 존재?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변화를 떠올리기 위해,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본래 이야기와 달리 슈아와 슈바는 살아 있다. 내가 두 사람을 살렸기 때문이다.
나는 칼바도스와 적이 아닌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갔으니까.
셀레네의 학부도 바뀌었다. 내가 극단 사업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모든 변화의 시작점에 서 있는 존재는 바로 나였다.
한 손으로 이마를 몇 번 내리친 내가 얼굴을 구긴 채 물었다.
“그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 저 맞습니까?”
사제가 대답 대신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