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7화
눈앞에 까마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깊은 어둠이었다.
모든 움직임이 제한된 나는, 가만히 서 있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자, 자연스레 촉각이 곤두섰다.
무언가 긴 끈 같은 것이 목에 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발을 디디고 있던 곳이 무너져 버렸다.
숨이 막혀 왔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을 때,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교수형에 처한 엘렌시아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꿈에서 깰 수 없었으니까.
‘설마 완전히 죽어야 깰 수 있는 건가.’
고통은 여전했고, 무력한 나는 고통 속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며 내가 죽는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
잠시 뒤, 땀범벅이 된 내가 힘없이 눈을 떴다.
전처럼 번쩍 눈을 뜰 힘도 없었고, 벌떡 일어나 내 몸을 살필 기운조차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내가 머리를 쓸었다.
‘나는 도대체 왜 아직도 이딴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이거, 생일날 아침부터 기분이 참 더러웠다.
앞으로 뭐가 잘 안 풀릴 예정인가?
이상할 정도로 찝찝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랍 속에서 수첩을 꺼내 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가 아는 소설의 내용을 적어 둔 수첩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또 다른 사건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나는 펜을 들어 이미 지나간 사건의 옆에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바꾸면서 일어나지 않은 칼바도스와 셀레네의 이야기에는 엑스 표시를 남겼다.
후작가 멸문 이야기는 재건으로 바뀌었고.
후작이 죽은 후엔…… 2황자파인 엘렌시아와 주인공 3인조가 대립하는 이야기와 엘렌시아가 처형당하는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이상한 마음을 먹지 않는 한, 소설 속 사건이 그대로 일어날 일은 없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후작가를 고발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내 오른팔이 날아갈 일도 사라졌고, 내가 처형당할 일도 사라졌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아.’
냉수를 들이켜며 천천히 생각을 해 보니, 아직 내가 해결하지 못한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그대와 같은 존재가 하나 있다.’
빙의자.
아직 그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 작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그 사람은 내가 엘렌시아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 사람이 누구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다.
내 쪽이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니 찝찝할 수밖에.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빙의자를 찾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찾은 다음엔 어떻게 할까.’
이야기를 어디까지 읽었는지 확인해 보고, 그 사람이 뭘 바꿨는지 확인해 보자.
그리고…… 음.
가만히 내버려 둘까 했지만, 역시 찾아서 없애는 쪽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
생일 연회 전, 준비를 마친 나는 얌전히 방 안에서 셀레네를 기다렸다. 연회 전에 따로 시간을 내 달라고, 셀레네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셀레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칼바도스가 보낸 선물을 열어 보기로 했다.
예전부터 나와 칼바도스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할 수 있는 선물 하나와 쓸데없는 선물 하나씩을 주고받았는데, 이 쓸데없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저번에는 칼바도스가 자기 초상화를 줬었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쓸데가 없어서 빈방에 처박아 뒀다. 시간이 지나서 나도 죽고 칼바도스가 죽으면 이 집 후손이 팔든가 하겠지.
‘올해는 어디서 뭘 주워 왔나 보자.’
뭐든 상관없다. 나는 내년에 요강으로 보답할 생각이니까.
칼바도스가 뭘 선물했든, 내 선물보다 멋지진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 상자를 열었다.
‘책?’
요란한 포장이 민망할 정도로, 상자 안에는 책 한 권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 권으로 완성하는 페르데니아 제국어』
“아니, 이 미친-”
완성이고 나발이고, 나는 페르데니아 사람이다.
웃음을 흘리며 이리저리 책을 살펴보니, 표지 뒷면에 짧은 편지가 적혀 있었다.
[지금 네 제국어 실력으로는 내 편지를 읽지 못하겠지만, 이 책을 완독한 뒤엔 내 편지를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때 답장 부탁해. 응원한다, 친구야!]
“기막혀…….”
하여간 웃기는 놈.
내년에 두고 보자.
방에서 혼자 얼굴을 싸맨 채 깔깔거리고 있을 때, 짧은 노크 후 셀레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표정을 정리하지 못한 내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셀레네를 맞이했다.
“하아, 오셨어요?”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었나요?”
“그냥, 재밌는 선물을 받아서요.”
우리끼리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한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칼바도스가 선물한 책을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얇은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셀레네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는 내가 선물한 달 모양 장신구가 얹어져 있었는데, 셀레네의 머리 색 때문인지, 정말 밤하늘에 달이 뜬 것처럼 잘 어울렸다.
‘보기 좋네.’
공작과 혼담이 깨졌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얼굴색도 좋아졌고.
로펨의 말대로라면 리오스가 셀레네를 죽일 가능성도 낮은 편이니, 내가 바꾼 이야기 때문에 여주인공이 제 오빠 손에 죽는 전개에선 벗어났다.
셀레네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는데, 조금 전 내가 뒤적거린, 소설 속 이야기가 적힌 수첩이었다.
어린아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아기자기한 수첩이 내 앞에 놓여 있으니 궁금할 만도 하겠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수첩을 쳐다보던 셀레네가 물었다.
“이 수첩은 공녀 건가요?”
“네. 어렸을 때 쓰던 거예요.”
“구경해도 돼요?”
“그럼요.”
나는 순순히 셀레네에게 수첩을 넘겼다.
어차피 한글로 써서 셀레네는 이걸 읽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만약 셀레네가 이 글자를 알아본다면, 빙의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셀레네의 주변에 있던 누군가가 한글을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 적힌 사건들은 이미 다 끝났고.’
그러니 설마 셀레네가 이 수첩에 적힌 뜻을 알아본다 해도, 내게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셀레네는 수첩을 넘겼고, 나는 그런 셀레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니 답이 나왔다.
‘역시 모르는구나.’
그래, 알 리가 없지.
나는 셀레네가 내용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반쯤 안도했고, 글자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실망했다.
“……이건 어느 나라 문잔가요?”
혼란스러운 표정도 잠시, 겨우 수첩에서 눈을 뗀 셀레네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녀가 어렸을 때 쓰던 수첩이라고 해서 귀여운 낙서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내 예상 밖이네요.”
“혹시 왕국에 이런 글자를 쓰는 사람은 없었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내 주변엔 없었어요. 처음 보는 글자인걸요.”
“그렇군요.”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쪽에선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 셀레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만이 남아 있었다. 셀레네가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거!”
수첩에 정신이 팔려 용건을 잊고 있었는지, 셀레네가 작게 손뼉을 쳤다.
“혹시 나한테 원하는 거 없나요? 공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요.”
“생일 선물은 이미 주셨잖아요?”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아, 내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셀레네가 내 손을 잡으며 웃었다.
“생일 선물 말고. 공작저에 머문 답례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아.”
뭘 원한다고 할까.
솔직히 셀레네가 제국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선물은 나도 다 살 수 있기 때문에 딱히 메리트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공주님이 성의를 표시하겠다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셀레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선물이 뭐가 있을까.
아, 그러고 보니 오직 셀레네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선물이 하나 있긴 하다.
머릿속으로 받고 싶은 선물을 결정한 내가 물었다.
“공주님, 다음 학기에도 동아리에서 문집을 낼 예정인가요?”
“그렇겠죠?”
“그럼 그때, 소설에 제 이름을 가진 인물 하나를 등장시켜 주세요. 주인공은 아니어도 되고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겸사겸사 내게 선물을 할 수 있으니 큰 부담은 아닐 것이다.
그러자 셀레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그거면 된다고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셀레네의 소설을 읽고 있던 칼바도스의 모습이 떠올랐고, 나는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지금 생각났는데 황태자 전하한테 1학기 문집 선물하셨죠? 2학기 문집은 그놈 말고 저 주세요. 전 그거면 돼요.”
“……좋아요, 그래도 문집에 이름을 그대로 쓰는 건 좀 그러니까, 살짝 변형할게요. 괜찮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셀레네가 해맑게 웃었다.
그 미소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셀레네에게 눈코입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빼면, 그녀와 리오스의 얼굴에서 서로를 닮은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한 탓이었다.
셀레네는 리오스와 레토가 증오하는 왕을 닮았고, 리오스는 레토를 닮았으니까.
나는 리오스가 어떤 마음으로 셀레네를 바라보고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