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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녀는 살고 싶다 (86)화 (86/111)

그 공녀는 살고 싶다

86화

_리오스 외전

‘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크레탄의 아들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

슬픈 눈을 한 레토가 그렇게 말했고, 어린 리오스는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레탄과 레토의 아들이다.

리오스는 습관처럼 어머니의 말을 따라 읊었다.

*

리오스는 다정한 아버지 크레탄과 어머니 레토를 사랑했고, 숙부인 렉시온과 숙모 힐다를 잘 따랐다.

완벽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줄곧 레토를 향해 있는 렉시온의 시선과, 형 크레탄을 향한 렉시온의 시기심을 눈치챈 것은 힐다뿐이었다.

힐다는 렉시온을 부추겼고, 렉시온은 레토를 차지하기 위해 제 형을 죽였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레토는 렉시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하는 것을 모두 내줄 테니 아들만큼은 살려 달라고.

그렇게 친형을 죽이고 시몬의 유일한 왕이 된 렉시온은,

‘리오스는 나와 레토의 아들이오.’

귀족들 앞에서 리오스가 레토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발표했다.

‘숙부님이 내 아버지라고?’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리오스는 어머니를 의심하지 않았다.

불륜남과 함께 남편을 죽이고 승기를 든 여자가, 저렇게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겠는가.

레토는 남편의 동생을 유혹했고, 그 동생을 부추겨 남편을 죽게 만든 요부가 되었다.

그리고 리오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에 다시 없을 요부가 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레토의 배 속엔 새 생명이 자리를 잡았다. 크레탄이 아닌 렉시온의 아이가.

아이가 태어날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레토는 우울감에 빠졌다.

고요한 방 안에서 그녀는 서서히 미쳐 가고 있었다.

왕을 쏙 빼닮은 공주가 태어났다.

“셀레네. 공주의 이름은 셀레네로 하지.”

공주를 낳고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레토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 직전 겨우 제정신으로 눈을 뜬 그녀는, 리오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아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리오스, 꼭 왕이 되거라.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너의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다.”

“……어머니를 위해서는요?”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는, 왕과 왕비와…… 셀레네를 죽여 다오.”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세요.”

배 속의 아이가 배를 차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울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에게 아직도 선명했다.

“가여운 내 아들. 내가 죽어도 렉시온이 너를 살려 둬야 할 텐데…….”

울음 섞인 레토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고, 레토는 눈을 감았다.

왕이 되라는 말, 왕과 왕비, 셀레네를 죽이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말을 곱씹던 리오스는 제 소매로 물기 가득한 어머니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렉시온이 리오스를 죽이지 않고, 제 아들이라는 사기를 쳐 가면서까지 리오스를 살려 둔 이유는, 레토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리오스가 왕의 보호 아래 있는 한, 레토는 렉시온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인질이었구나.’

리오스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렸을 때 그 사실을 눈치챘다면, 그는 일찍이 왕국을 떠났으리라.

그가 떠났다면 레토의 선택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왕에게 저항했을지도 모르지.

결국 어머니가 불행해지신 건 나 때문인가?

‘불행의 시작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 불행의 연장선을 그은 것은 바로 나다.’

리오스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레토가 죽은 뒤, 매일 새벽마다 리오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소년의 분위기가 풍기는 연분홍색 머리카락과 반대로, 낡은 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레토를 닮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크레탄과 레토의 아들이다. 그리고 레토는, 크레탄 왕의 아내이며 나의 어머니다. 렉시온의 애첩이 아니며, 셀레네의 어머니가 아니다.’

거울을 본 리오스는 레토가 죽은 후에도 왕이 자신을 살려 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레토를 닮았으니까.

*

그 뒤로 리오스는 습관처럼 셀레네를 살폈다.

곤히 잠든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베개를 들어 공주의 얼굴을 짓누를 듯이 가까이 들이밀다가.

그런 나날이 반복됐다.

저를 보며 웃는 공주의 얼굴을 볼 때마다, 리오스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우는 것이 다였던 셀레네가 말과 걸음을 배우고도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시녀를 향해 달려가다 넘어진 셀레네가 울음을 터뜨렸다.

“흐으, 엄마아……!”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순간, 리오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삼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충동에 휩싸인 그는, 공주의 간식에 조금씩 독을 섞었다. 공주의 궁에서 피우는 향과 상극인 독을.

그날부터 리오스는 잠자리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몰래 나쁜 짓을 해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하지만 불편해진 잠자리가 익숙해졌을 무렵, 리오스는 외조모인 프리아모스 자작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바로 그날, 새로운 충동에 휩싸인 리오스는 공주에게 해독제를 보냈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그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로펨이 물었다.

“왜 공주님한테 해독제를 먹인 거야?”

“나는 왕과 왕비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공주를 죽이고 도망치면 다시 왕궁에 돌아올 수 없어. 두 사람을 죽이기는 더 어려워지겠지.”

“음.”

“……그러니까, 공주는 왕과 왕비를 죽인 다음에 죽일 거다.”

로펨은 가늘게 뜬 눈으로 리오스를 바라봤고, 리오스는 그 눈을 피했다.

“겁쟁이구나, 우리 왕자님.”

“시끄러워.”

공주는 나중에 반드시 죽인다.

리오스가 그렇게 다짐했다.

부끄러울 정도로 겁이 많은 탓에, 그는 아직 혼자가 될 용기가 부족했다.

*

힐다는 리오스를 전쟁터로 보냈고, 죽으라고 보낸 전쟁에서 리오스는 보란 듯이 살아 돌아왔다.

1왕자의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리오스는 구석에 있는 셀레네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전쟁에 나선 후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했거늘.

‘시간이 흐르긴 흘렀군.’

어느덧 왕성을 떠난 시기의 자신의 나이가 된 셀레네를 보며, 리오스는 비로소 지난 시간을 체감했다.

리오스는 묘한 기분으로 왕비가 건넨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셀레네와 그의 눈이 마주쳤고, 셀레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겁을 먹은 건가?

‘어린 너에게 독을 보낸 사람은 바로 네 오라비라고. 왕비가 그렇게 말한 모양이지.’

독을 보낸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리오스가 입가에 잔을 가져가자, 시체 같은 얼굴을 한 셀레네가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고갯짓이었다.

‘마시지 말라고?’

왕비가 독이라도 탔나.

뒤에서면 몰라도, 왕비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독살을 시도할 정도로 무모한 인간이 아니다.

리오스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저렇게 속이 훤히 드러나는 공주에게 왕비가 독살 계획을 공유했을 리 없지.

‘왕비가 일부러 공주에게 말을 흘렸구나.’

왕비는 공주가 누구의 사람인지 시험하고 있는 거다.

내가 여기서 잔을 내려놓는다면 공주는 어찌 될까.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리오스는 술을 넘겼다.

저를 보며 고개를 젓는 공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갈증에 시달리던 목을 축이는 것과 같은 감각이 다시 한번 리오스를 덮쳤다.

‘너는 내가 살기를 바라는구나.’

물론 리오스의 모습을 본 셀레네는, 리오스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

답지 않게 눈을 구경하자는 친구 로펨의 말에, 리오스는 로펨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정원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이는 셀레네를 발견했다.

‘왜 울고 난리야.’

추워서 떨든지, 슬퍼서 울든지. 하나만 해라, 좀.

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산책을 할 수 없으니, 방 안에 들어가서 울었으면 했다.

산책을 망쳐 기분이 상한 리오스는 바로 1왕자 궁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리오스가 잘못 사귀었다고 생각하는 친구 중 1순위에 꼽히는 로펨이 실실 웃었다.

“왜, 신경 쓰여?”

“아니.”

“레오폴드가에서 공주님한테 혼담을 넣었댄다. 우실 만도 하지.”

“……공작의 첫째 아들이?”

“아니, 공작이.”

첫째 아들이 혼담을 넣어도 아니꼬운데, 다 늙은 공작이 혼담을 넣었다고?

일찍이 레오폴드 공작의 양심이 뒤진 줄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외조모를 찾아갔다.

프리아모스 자작은, 리오스가 셀레네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낼 때마다 아이에겐 죄가 없다는 말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랑이 넘치면 신전에나 들어가지, 뭐 하러 아픈 몸을 끌고 자작 노릇을 하냔 말이다.

자작과 오래 대화할 생각이 없었기에 리오스는 다짜고짜 말했다.

공주를 제국 아카데미로 보낼 생각이니, 공주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공주가 공작과 혼인하면, 레오폴드가를 등에 업은 칼린을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는 이유였다.

‘자작은 공주를 아끼니 제안을 받아들이겠지.’

그래, 그뿐이다.

나는 왕이 되어야 하거든.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괴롭힌 왕을 죽일 것이다. 왕을 부추긴 왕비도, 내 어머니를 조롱한 칼린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셀레네 너도.

공주를 제국에 보내기 전, 리오스는 오래전부터 공주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 둔 율리안을 불러들였다.

리오스가 내린 명령은 아주 간단했다.

“내가 죽이기 전까지 다른 사람이 공주를 죽일 수 없게 해라.”

율리안은 그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간 율리안에게선 공주가 떨어지는 책에 머리를 맞았다는 연락이 왔다. 대체 이놈은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공주의 삶은 왕국에 있을 적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아예 제국에 뼈를 묻게 할까…….”

차라리 돌아오지 말고 마음 편히 제국에서 죽었으면 했다.

떨어지는 책에 머리를 맞아 그대로 죽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공주를 다시 죽일 용기가 없었다. 로펨의 말대로 그가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리오스는 율리안에게 이번 여름은 왕국에 오지 말고 공주와 함께 제국에 머물라는 서신을 보냈다. 리오스의 명령을 받은 자작 역시, 공주에게 제국에 남으라는 서신을 보냈다.

짜증이 치미는 여름, 한가지 재미있고 속 시원한 일이 생겼다.

로펨이 세작 둘을 잡아 왔는데, 리베르트 공녀가 공작저에 머물고 있는 율리안을 통해 연락을 넣은 것이다.

칼린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자료를 줄 테니 세작 둘을 넘겨 달랜다. 무사히 인도받은 뒤에는 칼린과 왕비의 목을 쳐 낼 자료를 메인디쉬로 내주겠다고 한다.

허가되지 않은 약물에 대한 정보였다. 그런데 공녀는 이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공녀 역시 이 약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다 중간에 발을 뺀 것이겠고.’

이 여자도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리오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덕분에 힐다 왕비와 칼린을 죽이고 왕세자가 되었으니까.

머지않아 그는 왕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공주의 차례인데…….’

죽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구 한 명 정도는 공주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내게 간청하지 않을까?

‘……율리안은 공주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 보이니 딱히 간청하진 않을 것 같고.’

로펨은 내가 공주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는 놈이니, 굳이 간청하지 않겠지.

마땅한 후보가 자작뿐이군.

나이 많은 자작이 유언으로 공주를 살려 달라고 하면. 그땐 조금 고민해 볼까.

리오스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공주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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