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5화
후작가가 처형당하는 날, 공작과 공작 부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구경을 나갔다.
“오랜만에 사람들 틈에 섞여서 데이트를 하고 올 계획이란다!”
“젊었을 때 생각이 나서 무척 설레는구나.”
비위도 좋으시지.
처형식을 직관한 후엔 식사도 하고 오시겠다고 한다.
두 사람을 배웅하며, 나는 역시 내가 이 집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비위 좋은 두 분과 달리 비위가 약한 나는 얼마 뒤 있을 성인식에서 입을 옷이나 고르기로 했다.
엘렌시아가 서 있었던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같은 방법으로 죽는 모습을 직접 볼 자신이 없었다.
만약 내가 엘렌시아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나 역시 얼마 안 가 그 자리에 서게 됐겠지.
어쩐지 목이 갑갑하다.
나는 목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한 다음, 후계자 수업만 들으면 된다.’
소설의 최종 악역은 엘렌시아였고, 메릴 후작가는 그 전 단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악역이 되지 않았으니, 후작가를 처형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충분히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달라진 점도 꽤 있다.
백작위로 강등된 레이델과 레이몬드는 메릴이 아닌 ‘헤르트’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고, 일정 기간 동안 델소스 섬의 관리를 황실에 넘기게 되었다.
아, 한동안 마정석 사업을 두고 황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렇게 헤르트라는 성이 입에 익어 갈 때쯤, 시몬의 힐다 왕비와 칼린 2왕자의 목이 날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오스가 왕세자위에 올랐다는 소식도 함께.
엘렌시아의 죽음과 셀레네와 칼바도스의 러브라인 등을 제외하면, 내가 아는 이야기가 대충 완성됐다.
라면에 스프를 적게 넣고 끓였다고 해서 라면이 아니라고 할 건가? 조금 싱거워도 라면이지.
이야기가 조금 싱거워지긴 했지만 이걸로 『달의 미로』도 대충 완성이다.
‘리오스와의 거래도 끝났으니 이제 그놈과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고받을 일은 없어.’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양국의 결속을 단단히 하자는 의미에서 리오스 왕세자가 제국에 방문하기 때문이다.
왕세자 대신 마침 제국에 있는 셀레네를 참여하게 하는 것은 어떠냐고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리오스는 본인이 꼭 직접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어차피 자기 손에 죽을 공주한테 밥그릇 주기 싫다는 건가.’
굳이 공주를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리오스는 렉시온 왕의 딸인 셀레네를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
얼마 뒤 왕국 사절단이 제국에 방문했고, 나는 공작과 함께 방문 축하연에 참석했다.
공작은 내가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성인식에서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대충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해 왔다.
그렇게 알음알음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뒤 나는 잔 하나를 들고 연회장 내부를 살폈다.
레이델은 레이몬드 옆에 서 있었는데, 헤르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레이델과 레이몬드의 첫 공식 일정이 꽤 괜찮게 잡힌 것 같았다.
그리고 칼바도스는 리오스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이제 생각해 보니 화기애애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저 미소는 몹시 껄끄러운 상대 앞에서 억지로 웃을 때 나오는 미소였으니까.
‘리오스가 진짜 이상한 놈인가 보네.’
하긴.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껄끄러운 사람이었는데,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건 오죽하겠나.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칼바도스가 눈으로 말했다.
‘살려 줘.’
물론 나는 칼바도스의 말을 무시한 채, 영화 위대한 개x비의 한 장면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잔을 들어 보였다. 칼바도스가 눈으로 욕을 했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 눈감아 주자.
대충 대화도 다 나눴겠다, 나는 쟁반 채 술과 안줏거리를 챙긴 뒤 조용히 테라스로 향했다.
늘 칼바도스와 여기서 쉬었으니까 그놈도 쉬고 싶으면 여기로 오겠지.
후작 놈이 생각보다 쉽게 사라져서 그런가, 오늘따라 술맛이 좋았다.
그래도 여긴 황궁이니까 적당히 마시자. 적당히.
그렇게 다짐한 내가 칼바도스의 몫으로 가져온 술까지 목구멍으로 술술 넘기고 있던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도스 왔니?”
짧은 정적 후, 화가 난 칼바도스의 목소리가 아닌 느긋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스는 아니고 리오스인데. 나가야 하나?”
‘이런 썩을……!’
망했다는 걸 직감한 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리오스는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뒤이어 남자 한 명이 리오스를 뒤따라 들어왔고, 남자는 자신이 로펨이라고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저게 우리 정보원 잡아간 놈이구나.’
서글서글하게 웃는 걸 보니 짜증이 났지만, 티 내지 않고 악수를 받아 주었다.
로펨이 한 걸음 물러나고, 달빛을 닮은 남자가 난간에 기댔다. 한동안 내 얼굴을 훑던 리오스가 먼저 입을 뗐다.
“식사는 언제 하나?”
갑자기 웬 식사?
이 인간이 왜 나한테 와서 밥을 찾는지 모르겠다. 리오스의 의도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답해 주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귀빈이니까.
“저녁 만찬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식사 못 하셨습니까?”
제법 걱정이 된다는 나의 얼굴에, 리오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거 말고. 공녀가 먼저 함께 식사하자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너한테 밥을 먹자고 했…….
어?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밥 한번 먹어요~^0^’
다시 생각해 보니 편지에서 그 말을 하긴 했다.
문제는 그게 편지를 마무리하며 생각 없이 덧붙인 말이었다는 거지.
타국 왕족과 내가 시간이 나서 같이 밥을 먹을 일이 뭐 있겠냐 싶어서 던진 말이었다.
손에 들린 잔으로 생각 없이 편지를 보낸 내 머리를 내리치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언제쯤 초대할 생각이지?”
뻔뻔한 낯짝을 한 리오스가 답을 채근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눈에 담은 나는, 아주 잠시 쩔쩔맸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 왕성에서 눈치는 질릴 대로 보고 자란 인간이 이럴 리 없지.’
처음부터 식사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거다.
조금 전 내가 내 머리를 내리치고 싶다고 생각했던가?
나는 바로 그 생각을 철회했다.
나는 소중한 내 머리가 아니라 나를 골탕 먹이려 드는 리오스의 머리를 내리치고 싶어졌다.
“저하께선 저와 식사를 하고 싶으십니까? 진심으로?”
“당연한 소릴. 진심으로 공작저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네.”
“공작저 초대장이요? 아, 사실은 제가 아니라 공작저에 머물고 계신 공주님을 만나고 싶으신 거지요? 공작저에 방문하고 싶으셨다면 처음부터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 순간, 리오스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역시 셀레네 이야기 때문인가.’
굳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내친김에 나는 이놈의 속을 더 긁기로 했다. 조금 전 나를 쩔쩔매게 한 복수라고나 할까.
“제가 눈치 없었습니다. 가족끼리 오붓한 식사를 하고 싶어 한 저하의 뜻을 알아채지 못했으니까요.”
“쓸데없는 짓은 관둬. 공주는 나와 눈도 못 마주치거든.”
“걱정 마시죠. 공주님께서 편히 식사하실 수 있도록 은식기를 준비하겠습니다.”
필요하면 기미상궁도 불러 줄게.
굳은 채로 영영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리오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오스의 입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오스를 따라온 로펨은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리오스를 따라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한 나와 리오스의 눈치를 보고 눈을 깔았다.
로펨의 웃음소리가 멎고, 잔잔한 분위기가 찾아왔다. 테라스를 떠날 생각인지, 리오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만 나가 봐야겠어. 아, 조만간 공녀에겐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귀찮은 일?
이놈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귀찮은 일이 있을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리오스가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택에서 타국의 왕족 시체가 발견되면 귀찮지 않겠나?”
제국에서 셀레네를 죽이고 책임을 돌리겠다는 건가.
‘왕국이 망했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리오스는 미련 없이 테라스를 떠났다.
하지만 리오스가 떠난 뒤에도 로펨은 테라스를 떠나지 않았는데, 입구 쪽에 서 있던 로펨이 천천히 내 옆에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를 안심시키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말만 저렇게 하지, 저러고 안 죽이더라고요.”
“안 죽인다고요?”
웃기지 마라.
셀레네가 어렸을 때 독을 보낸 범인이 리오스라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어이없다는 내 반응에도 로펨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음, 못 죽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공녀께선 독살미수범이 우리 왕세자 저하라고 확신하시는 것 같습니다?”
“후보가 몇 없지 않습니까. 방금 저하의 반응으로 확신했고요.”
왕세자가 되고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건지, 은식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속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로펨은,
“맞아요, 저놈이 독을 보냈어요.”
깔끔하게 리오스의 범죄를 인정했다.
리오스는 정말 이렇게 입 가벼운 놈을 최측근으로 두는 건가?
그렇게 리오스의 안목에 대한 나의 신뢰도가 미미하게 하락했다.
“방금 저하께서 공주님을 못 죽인다고 말한 것 치곤 지나치게 파격적인 과거가 아닌가요.”
“그리고 해독제도, 저놈이 보냈고요.”
“그건 또 무슨…….”
셀레네에게 해독제를 보낸 게 리오스라고?
당황해서 생각이 멈춰 버린 나와 달리, 로펨은 산뜻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우리 저하께서 알면 화내실 테니까, 해독제 건은 비밀로 해 줘요.”
‘비밀로 해 달라니.’
독을 보낸 이야기엔 비밀이란 조건을 덧붙이지 않았으면서, 해독제를 보낸 이야기에는 비밀이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독살 시도가 아니라 해독제를 보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소설에서 셀레네는 리오스가 보낸 독을 먹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리오스가 보낸 해독제 때문이라니.
‘그 미친놈이…… 병 주고 약 주고 난리네.’
그토록 셀레네를 죽이고 싶어 했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해독제를 보낸 거지?
직전에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건가.
성격 급한 나는 혼자 답을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앞에 놓인 답안지에게 답을 묻기로 했다.
“저하께선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겁니까?”
“저놈이 은근 겁쟁이거든요.”
“허.”
우리나라 황태자나 저 나라 왕세자나 참 이상한 놈들만 모아놨구나.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나가는 건 시몬인들 특징인지, 로펨 역시 리오스처럼 멍해진 나를 두고 테라스를 떠나 버렸다.
하여간 시몬 왕국 놈들은 상도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