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4화
“오셨습니까.”
“네…….”
리온과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벌써 온몸에 힘이 빠졌다.
황궁에 도착한 나는 이미 오래된 손수건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레이몬드의 맞은편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나는 레이몬드의 얼굴을 살폈다.
‘이 인간은 좀 괜찮나?’
레이몬드가 가문을 고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니, 바깥에서는 아버지와 형제를 무너뜨리고 가문을 차지할 생각밖에 없다며 레이몬드를 욕하는 목소리가 컸다.
보통 사람이면 이렇게까지 비난 여론이 거세지 않을 텐데, 레이몬드의 박쥐 이미지 때문에 욕이 대다수였다.
비난 여론에 가뜩이나 마음 여린 레이몬드의 멘탈이 터질까 봐 걱정이 되어 찾아온 참이었다.
멘탈은 좀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때, 레이몬드가 먼저 내게 물었다.
“차를 내오라 할까요?”
“어, 네. 늘 마시던 걸로 달라하면 알 겁니다.”
뭐야, 멀쩡하네?
애써 멀쩡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생기가 돈달까.
이게 다 레이델 테라피 덕분인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동생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 거겠지.
사실 바깥 반응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레이델 이야기를 터뜨리면 회복될 테니, 바깥 반응은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다.
너희가 그렇게 사랑하는 영웅 에녹 헤르트가 사실은 악당의 사생아이고, 후작저에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그런데 이를 안쓰럽게 여긴 레이몬드가 레이델을 도망치게 만들고, 아버지와 형제의 죄를 고발했다고.
그 영웅이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보다 그를 사랑해 준 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가문을 차지하겠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고발한 게 그렇게 잘못인가.’
정말 그 이유로 레이몬드가 가문을 고발했다고 해도, 그건 사람들이 레이몬드를 욕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고발의 이유가 어떻든, 중요한 건 그가 인간을 이용해 마정석을 만드는 아버지와 형제들의 악행을 멈추게 했다는 거다.
“레이델은요?”
“죄수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아뇨, 방금 밥을 먹어서요.”
“아.”
비위 상하게 그런 곳을 왜 간단 말인가. 나는 이 아늑한 곳에서 레이몬드와 담소나 나누다 갈 예정이다.
재판은 칼바도스가 알아서 할 테니 나는 나중에 팝콘 사서 구경이나 가야지.
“밥은 잘 나오나요?”
“전하께서 많이 신경 써 주십니다.”
내 시선이 가라앉은 레이몬드의 손목에 닿았고, 시선을 느낀 레이몬드는 손목을 매만졌다.
그 뒤로 나와 레이몬드는 시종이 내온 차를 몇 번 홀짝이며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남을 때 수기를 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귀족이든 평민이든 사람들이 사서 읽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돈이 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돈을 생각한 나와는 전혀 다른 이유를 말했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한 번쯤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거든요.”
“원하신다면 출판사 사람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제2의 사샤라고 홍보도 해 줄걸요.”
『내부 고발자의 기록』이나 『나는 아버지를 고발했다』라는 제목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제목 몇 가지를 추천하자, 농담인 줄 알았는지 레이몬드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혹시 몰라 사재기를 할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굳이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극작가를 불러 절절한 형제애와 주군과 신하의 우정과 충성을 담은 연극 대본이라 쓰라고 했다. 우리 쪽 배우를 노골적이지 않을 정도로 한두 명 정도 넣을 계획이다.
권력의 개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극작가는 선불금을 받더니 바로 마음을 바꿨다.
‘권력의 개가 되지 않겠다더니?’
그렇게 물었더니, 알고 보니 자본의 개였다며 자신의 출신을 슬쩍 고백했다.
그 외에도 준비한 게 여럿 있었다. 황궁에 오기 전, 예전에 레이델이 머물던 웰링턴에서 노래를 부르던 놈에게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자 그놈은 꽤 중독적인 멜로디로 레이몬드와 레이델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꽤 성공적이었던 듯했다. 오늘 입궁하면서, 몇 안 되는 동네 아이들이 그 노래를 따라부르고 다니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나는 서동요 이야기를 정말 싫어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를 퍼뜨리는 방법으로 노래가 어느 정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더 퍼지겠지.
레이몬드는 말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알리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뒤, 그는 동생의 성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레이몬드 헤르트’로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문의 이름을 바꾸는 게 꽤 깐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황제가 흔쾌히 승인해 줬다고 한다.
그나저나…… 레이몬드 다음 문제는 황후와 루카스다.
역시 이쪽으로 불똥이 튈 줄 알았지.
루카스가 계승을 포기한 순간부터 황후는 오라버니인 메릴 후작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는데, 황후와 루카스가 후작가와 묶여서 언급되고 있었다.
중간에 나를 만나러 온 칼바도스와 나는, 세간에 도는 소문을 전해 듣고 배꼽을 잡았다.
후작이 카밀라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칼바도스의 어머니 일레노아를 독살했다나 뭐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눈 칼바도스가 사라진 후, 심심해진 나는 루카스의 자금 내역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문제가 될 법한 건 미리 알아 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금 내역을 확인한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거 아닌가.’
돈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어느 정도로 돈이 없었냐면, 어디 다른 곳에 돈을 죄다 빼돌려 놓고 없는 척한다고 욕먹을 수준으로 돈이 없었다.
‘그나저나 루카스가 사람들 몰래 기부를 하고 있었지.’
신문사에 은근하게 정보를 흘려 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님, 뭐 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내가 레이몬드의 방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루카스가 바로 나를 찾아왔다.
한동안 밖에 나다지는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 심심할 만도 하지.
다정하게 루카스를 맞이하려 했지만,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본 그 녀석은 내가 음습하다며 온갖 야유를 보냈다.
……망할 놈.
루카스가 돌아간 뒤, 나는 칼바도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칼바도스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본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루카스 2황자가 주기적으로 고아원에 기부를 했다는 것과 치료제 개발에 돈을 좀 썼다는 내용을 칼바도스가 신문사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바로 방금 말이다.
루카스가 몰래 기부하던 고아원 위치도 슬쩍 흘려 뒀다고 한다. 만약 루카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끼리끼리 친구 한다는 말을 했을 게 틀림없다.
*
레이델과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치즈 가루를 뿌린 버터구이 옥수수를 먹으며 연극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미 작가가 건넨 대본을 봤기 때문에 전개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뒤, 내가 잘 아는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동생과 함께 학대당하던 어린 형이 하녀에게 돈을 주고 동생을 집에서 도망치게 한다. 동생이 떠난 후 모든 괴롭힘은 형에게 집중되었고, 먼 마을로 도망친 동생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실력자에게 검을 배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동생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7명의 악당들을 해치우며 영웅이 된다.
동생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황제의 기사가 되었고,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형은 눈물을 감추며 그 모습을 지켜본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동생과 형은 서로를 모른 척 스쳐 지나간다.
그 후 동생은 왕세자의 절친한 벗이자 신하가 되었는데, 동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왕세자의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생은 왕세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왕세자는 진실을 밝힌 그와 진실 된 우정을 나눈다.
아버지가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형은 왕세자와 동생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왕세자는 반란을 진압하였고 형과 동생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감동적인 극이 끝나고, 성의껏 박수를 보내던 나는 살짝 굳은 레이델의 표정을 포착했다. 입술이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보니, 연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이 노골적이라 별론가? 흠, 하지만 이런 건 어느 정도 노골적이어도 괜찮지 않나.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래?”
“그냥…… 조금 답답합니다.”
“뭐가?”
“저를 구하러 오신 분도 공녀님이고, 제가 충성을 맹세한 분도 공녀님인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않습니까.”
아. 그게 불만이었구나?
하지만 저 이야기에 내가 껴 봤자 이야기만 복잡해진다. 군신 간의 믿음과 형제애를 강조해야 하는데 내가 끼면 그 두 주제가 흐려질 테고.
그리고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성격 더러운 카인이 레이델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았다.
이미 챙길 건 다 챙겨서 미련이 없었던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레이델을 다독였다.
“뭐 어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너랑 나만 알면 됐지. 저 사람들이 비하인드를 알든 말든, 평생 얼굴 보고 지낼 건 우리 둘이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렇게 눈이 마주치자, 레이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자리를 잡았다.
“왜 웃어. 너는 부족해?”
“아뇨, 저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공녀님 말씀대로 저와 공녀님이 서로 최선을 다하는 이 관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짧게 고개를 저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평생 얼굴 보고 지낸다는 말이 듣기 좋아서 웃었습니다.”
그렇지. 우리 둘은 성격이 제법 잘 맞는 것 같으니, 크게 싸우지는 않을 것 같다.
싸우더라도 금방 화해하겠지.
그러니 쓸데없이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를 좋아하게 되어 고백을 하지 않는 이상, 평생 얼굴을 보고 지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레이몬드의 것과 같은 연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예전보다 웃는 모습이 시원해진 걸 보니, 형을 만난 뒤로 그의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