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3화
레이몬드가 있는 방으로 향하던 중, 칼바도스는 어딘가 허전하다는 얼굴로 복도를 살폈다.
얼마 안 가 허전함의 이유를 알아챈 그가 물었다.
“네 호위는?”
“안에서 자고 있잖아.”
턱 끝으로 레이델이 자고 있는 방을 가리키자 칼바도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놈 말고. 리온 경이었나.”
“두고 왔어. 오늘은 레이델이 맡았지.”
“매번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왜?”
왜 리온을 두고 왔냐고? 나는 천천히 칼바도스의 질문을 곱씹었다.
내가 리온을 두고 온 이유는 간단하다.
얼마 전부터 그놈이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거슬린다는 말보다는…… 신경 쓰이는 쪽에 가깝나.’
사실 입술이 부딪힌 직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리온과 같은 침대에서 뒹굴며 게임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우리 얼마 전에 입 맞추지 않았나요?’
‘입술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바로 다른 남자와 혼담 얘기를 하시면 제가 너무 섭섭합니다.’
리온이 옆에서 그렇게 입을 놀려 대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망할 놈이…….’
그러니까 이건 다 방정맞은 리온 때문이다.
입을 꿰매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얼굴이 잘났고 목소리가 좋으니 참아 주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내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냥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내 표정이 험악했나. 덩달아 얼굴을 구긴 칼바도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안 좋은 일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칼바도스의 질문을 대충 넘기려던 나는 생각을 고쳤다.
그냥 이 기회에 칼바도스한테 솔직하게 말하면 이 불편한 속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칼바도스가 어디 가서 소문낼 놈도 아니기도 하고.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내가 칼바도스에게 귀를 대 보라고 손짓했다. 칼바도스는 따라오던 시종을 흘끗 보는가 싶더니,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음, 높이 적당하고. 이제 적절한 볼륨만 설정하면 된다.
나는 아주 알맞은 볼륨으로 칼바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얼마 전 휴가 때 리온이랑 입을 맞췄는데.”
“뭐?!”
“깜짝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바도스가 큰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나 대체 귓속말 왜 했니?”
조용히 좀 하란 뜻으로 칼바도스의 등을 여러 번 내리쳤지만, 물리적 공격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지 칼바도스는 횡설수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입을? 아, 아니지. 입을 맞춘다는 건 의견을 동일하게 조정한다는 뜻도-”
“진짜 입술이었어.”
“……진짜로?”
칼바도스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가짜겠니.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서 나한테 득 될 것도 없는데.
보자, 연초에는 황태자랑 사고 쳐서 약혼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아카데미에서는 낮에는 황태자 만나고 밤에는 영웅 만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여기서 공작가 기사까지 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난다?
그땐 내 얼굴이 먹으로 새카맣게 물들어 있을 거다. 가문 이름에도 먹칠하는 거고.
“어.”
“도대체 어쩌다가?”
네가 정리할 도박장에서 꼼수를 부리다 들켰고, 거기서 가드들을 따돌리던 중 클리셰가 먹히나 확인하기 위해 입을 맞췄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또 생각났잖아.’
어쩌다가 그랬냐는 칼바도스의 말에 답하기 위해 상황을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때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냥 칼바도스에게 이 일을 털어놓은 것 자체가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사고였어. 그런데 그 뒤로 조금 어색해져서…… 오늘은 그냥 두고 왔지.”
“대체 무슨 사고를 쳐야 너랑, 하.”
“아무튼 쪽팔리니까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이다.”
칼바도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표정이 묘하게 썩어 있었지만, 나였어도 갑자기 궁금하지도 않던 친구의 입술 사정을 들으면 저렇게 반응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칼바도스의 표정을 납득한 나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잠시 뒤, 호위 여럿이 서 있는 가장 안쪽 방의 문이 열리자 반듯한 모습의 청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낮게 묶고 얌전히 책을 읽던 레이몬드가 나와 칼바도스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레이몬드가 열아홉 살이었을 때였지.
‘그동안 얼굴이 좀 변했나?’
안 그래도 마음 여린 사람이 후작과 렘브로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르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레이몬드를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래, 어른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9년의 시간이 흘러, 풋풋한 서재 관리인에서 내부고발자가 된 레이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결한 자태는 숨을 쉬는 것을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못 뵌 사이 더 잘생겨지셨네요. 일 마치면 저랑 약혼이라도 하시렵니까?”
“못 뵌 사이 더 짓궂어지셨고요.”
내가 악수를 청하자 레이몬드가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칼바도스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물었다.
“농담이지?”
“……? 당연하지.”
“너, 너는!”
내 귓가에서 몸을 뗀 칼바도스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는 농담으로 청혼하고, 사고로 입 맞추고! 이러다 실수로 결혼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더더욱 신중하게 할…… 아니, 너도 나한테 농담으로 청혼했잖아? 나한테 왜 그래?”
“그건……!”
아카데미 의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칼바도스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깔끔하게 인정한 뒤, 조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진 모습으로 방을 떠났다.
괜히 레이몬드 앞에서 청혼 같은 소리를 했다. 조금 민망해진 내가 목을 가다듬으며 칼바도스의 욕을 했다.
“알다가도 모를 놈입니다. 무시하세요.”
“그렇습니까.”
요상해진 방 분위기에, 내 눈치를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이 방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그, 레이델은 어디 있습니까?”
“지쳤는지 황태자 전하의 집무실에서 곤히 자고 있습니다. 그냥 깨워서 데려올 걸 그랬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9년을 기다렸는데 하루를 못 기다리겠습니까. 편히 자고 있다니 저도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레이몬드가 데려올 것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을 마친 그가 안도하며 웃던 그때, 뭔가를 발견한 내가 레이몬드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뭐야, 다치셨어요?”
“아, 이건…….”
밧줄에 쓸려 생긴 상처 같았다. 손목을 어찌나 세게 묶은 건지 아직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적당히 풀어 줬어야지.’
체포 과정에서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황실의 공무 수행 능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나는 방 밖에 있던 시종을 불렀다.
“여태 상처 하나 살피지 않고 뭘 했나? 의원을 불러와라.”
“예, 예! 알겠습니다!”
시종이 떠난 후에도 내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레이몬드가 나를 다독였다.
“너무 화내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요.”
이거 뭔가…… 병약한 오빠를 둔 동생이 된 기분이다.
진짜 오빠는 마탑에서 몸 성하게 일하고 있을 테니 이런 이상한 기분은 최대한 빨리 떨쳐 내는 게 좋겠다.
흠, 내가 레이몬드의 상처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나?
만약 그렇다면 짐작 가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이 인간은 예전에 내 실수로 자살을 시도했으니까.
*
며칠 뒤, 레이몬드와 칼바도스를 만나기 위해 황궁에 가려던 날이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방문을 여니,
“어디 가십니까?”
리온이 서 있었다.
“황궁.”
최대한 짧게 대답하며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데, 내 뒤를 따라오던 리온이 물었다.
“오늘도 저 안 데려가세요?”
“어. 에녹 경이랑 갈 거야.”
“에녹 경은 어제 안 들어오셨던데.”
‘아, 맞다. 어제 황궁에서 안 돌아왔지.’
리온의 말에 나는 그대로 난간을 잡고 계단 중간에 멈춰 섰다.
“그걸 경이 어떻게 알았어?”
“요즘 에녹 경에게 제 자리를 빼앗긴 것 같아서 굉장히 예민한 상태거든요. 오늘은 에녹 경이 없으니 제가 따라가는 거죠?”
“따라오지 마! 난 체르티 경이랑 갈 거야.”
일부러 두세 칸씩 계단을 뛰어내려 갔지만, 리온은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 왔다. 이 정도는 우습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나와 리온을 본 공작은 계단에서 장난치지 말라는 말을 남길 뿐이었다.
호위는 지키는 게 일 아닌가?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호위한테 쫓기는 처지로 전락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도망치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끝까지 나를 쫓아온 리온이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그래도 저는 아가씨가 저를 피하시는 게 조금 기쁘네요.”
“……대체 뭐가?”
내가 피하는 게 기쁘면 나를 따라오지 말았어야지.
모순된 행동에 내가 표정을 구겼다.
“입을 맞춘 직후에는 아무 반응이 없어서 슬펐거든요. 한 침대에서도 편하게 잤잖아요.”
“…….”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나 저를 의식하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자, 어쩐지 리온을 쫓아내고 싶어졌다. 혼자 실실 웃으며 여유롭게 구는 게 더럽게 열 받았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던데 그 말이 맞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겠다. 경을 얼른 내다 버리라고.”
“저 짐승이에요?”
“죽어!”
면전에서 죽으란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좋았는지, 리온은 해맑게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하여간 속없는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