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2화
“델소스 섬에서 뭘 봤나?”
내 물음에, 귀신을 보기라도 한 듯 랜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름인데도 입이 덜덜 떨렸는데, 치아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랜든은 내내 끌어안고 있던 화구통 안에서 돌돌 말아 넣은 서류를 꺼내며 답을 대신했다.
“음, 수고했다.”
최종 검토는 나와 레이델이 한 다음 칼바도스에게 넘기면 되겠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메이를 시켜 랜든을 다른 곳에서 머물게 하고 감시를 붙였다.
이만 자러 갈까 싶었지만, 서류를 보는 레이델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훑어보고 잘까?”
“예!”
오늘 새벽은 다 갔구나.
결국 나와 레이델은 입에 사탕을 하나씩 물고, 얼마 남지 않은 새벽 내내 서류를 검토했다.
*
“제 아버지란 자가 썩어 빠진 놈이라는 건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최악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두툼한 서류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확인할 때까지, 레이델이 열 번도 넘게 내뱉은 말이다.
처음엔 적당히 반응을 해 주던 나도 중간부턴 무시했다.
메릴 후작가가 저지른 일은 방대했으나 가장 대표적인 걸 꼽자면 후작가에서 생산하는 마정석의 주재료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본래 후작가 소유의 광산과 다른 광산에서 나오는 마정석과 달리, 델소스 섬에서 생산되는 마정석은 사람의 영혼으로 만들어진다는 자료가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레이몬드가 델소스 섬에 다녀간 거고.’
칼린 2왕자가 입지를 다지기 위해 란도르와 전쟁을 준비 중인데, 이 전쟁을 위해 후작과 2왕자가 비밀리에 마정석을 거래하기로 했댄다.
물론 늘어난 거래량만큼 사람이 죽어 나갔다.
작년 가을, 시몬 왕국에서 항해를 나간 선원들이 모두 실종되었고, 이 선원들은 델소스 섬에 도착해 고스란히 마정석의 재료로 쓰였다.
배후에는 칼린 2왕자와 힐다 왕비가 있겠지.
그 뒤로도 후작가에서는 온갖 실험을 진행했는데, 그 실험 장소가 바로 델소스 섬이었다.
이미 소설을 한 번 읽어서 그런가, 나는 레이델만큼 동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짓을?’과 같은 반응을 하며 분노하기보단, ‘이놈들이 그렇지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소설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달라지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내 눈을 끈 정보는, 마정석의 공급량을 무리하게 늘리면서 괴수 출현 빈도가 높아졌다는 자료였다.
그리고, 레이몬드가 흑마법의 제물이라는 자료도 함께.
‘다룰 수 있는 마나가 아주 미약한 마법사여도, 제물을 바치면 흑마법을 쓸 수 있었지.’
그리고 그 제물의 조건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열망하며,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을 가진 성인이었다.
후작가에선 그게 레이몬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소설에선 멋모르고 레이몬드를 죽였지만, 이번에는 소설과 달리 레이몬드가 살아 있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레이몬드의 제물 가능성을 판단한 거고.
‘실험이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괴수가 출현한 거라면, 웰링턴에 괴수가 습격한 사건도 우연이 아니었겠네.’
소설과 달리 레이몬드가 살아남아서 생긴 결과물이었다.
‘원래 이야기대로 레이몬드가 죽었다면, 웰링턴에서 괴수가 나타나지 않았겠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설의 이야기가 바뀌지 않는 건가 싶어서 불안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가 바꾼 상황의 결과를 직면한 것뿐이었다.
서류 더미를 책상에 탁탁 내리치며 삐져나온 종이를 정리하던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열린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해 떴네.’
창밖에서 들리는 새 소리가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화가 난 레이델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계속 방 안을 빙빙 돌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만 내려가서 식사하지그래?”
그러자 레이델이 물었다.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안 먹는다. 입맛 없어.”
사탕을 먹어서 그런가, 단맛이 겉돌아서 뭘 맛있게 먹긴 글렀다.
사람 영혼으로 마정석 만드는 법이 자꾸 생각나서 속도 안 좋았다. 방법도 지나치게 구체적이라 비위가 상했다.
비위 좋은 레이델은 몇 번 더 식사를 권했지만, 나는 손을 저으며 앉은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
그날 오후, 나와 레이델은 바로 칼바도스한테 고발 서류를 가져다 바쳤다.
제법 두툼한 서류에 칼바도스는 얼굴을 구겼다가, 서류의 정체를 알고 후작가를 엿 먹일 생각에 신난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동안 후작가가 마정석으로 어지간히 생색을 냈어야지.
하지만 콧노래를 부르던 그는 생각보다 심각한 서류의 내용에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역시 칼바도스한테 넘기니 몸이 편하구나.’
내가 소파에 앉아 칼바도스를 바라보던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레이델이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전하께서 고생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나는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역시 이놈은 칼바도스를 싫어하는구나. 황당해서 레이델을 보고 있다 보니 부정할 타이밍을 놓쳤다.
“허.”
저쪽 책상에 앉아 있던 칼바도스가 나를 흘겨보며 불쾌한 티를 냈지만, 귀찮으니 무시하도록 하자.
‘그나저나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가, 슬슬 배고프네.’
나는 황태자궁 시종에게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고 했고, 시종은 친절하게 레이델 몫까지 가져다줬다.
“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칼바도스가 서류를 보는 동안 나와 레이델은 감자튀김을 해치웠다. 그리고 잡담을 좀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레이델과 머리를 맞댄 채 황태자궁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잠을 자는데 크게 거슬리진 않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
꽤 시간이 흘렀을 때,
‘……뭐야?’
나는 칼바도스의 집무실 소파에서 눈을 떴다.
커튼 때문에 실내는 어두웠고,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서걱거리는 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칼바도스는 어디 갔지?’
몸을 일으켜보니 나와 레이델만이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언제 옮겼는지 나는 레이델의 옆이 아니라 맞은편 소파에 누워 있었다.
편하게 자라고 칼바도스가 옮겼나.
레이델에게는 담요를 덮어 주지 않은 걸 보니 아까 레이델이 한 말 때문에 삐진 게 틀림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시계가 고장 났구나.’
고장 났어야만 한다.
분명 2시부터 황태자궁에서 노닥거린 것 같은데, 벌써 7시가 넘어 있었으니까.
……무슨 하루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냐.
더럽게 억울하네, 진짜.
다시는 밤 안 샌다. 패턴이 꼬이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낮과 밤을 휙휙 뒤집으면 얼마 안 가 몸이 상할 것 같았다.
목이 뻐근해서 목을 주무르는데 바깥쪽에서 꽤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 소리부터 재수 없는 게, 누가 들어도 이 궁 주인의 발걸음 소리였다.
바로 문이 열리고 칼바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행차라도 다녀왔는지 옷도 곱게 차려입었네.
나와 눈이 마주친 칼바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깼네?”
“어. 넌 어디 다녀와?”
“아.”
말하다 보니 목이 갑갑했는지 칼바도스가 단추 하나를 풀었다.
“메릴 일가를 죄다 체포해서 독방에 가두고 오는 길인데.”
“……뭐?”
후작가 사람들을 체포했다고? 그것도 우리가 여기서 자고 있을 때 말인가?
그런데 이 자식은 무슨 이런 어마무시한 말을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안 깨웠어?”
이제 집에 가라고 깨울 법도 한데 끝까지 내버려 뒀다. 물 뿌리거나 코를 막아서라도 깨울 놈인데.
덕분에 후작가 사람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체포당하는 재미있는 장면을 놓쳤다.
“분명 깨우려고 했는데,”
“깨우려고 했는데 뭐?”
천천히 내 얼굴을 훑던 칼바도스가 머쓱하게 눈을 피했다.
“……나가다가 까먹었다.”
“제정신이냐?”
“진짜야, 자꾸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았는데 그게 너였네.”
참 일찍도 안다.
내가 너무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우지 못하고 회의실에 다녀왔다가, 그대로 나와 레이델을 잊어버린 채 황궁을 떠났다고 한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후작가 사람들을 체포했다고 했지.
그 말을 떠올리기 무섭게 바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이몬드 님은? 어디 계셔?”
“메릴 공자는 이쪽으로 데려왔지. 죄인 취급하면 안 되니까. 어떻게, 지금 만나 볼래?”
“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칼바도스가 다시 문을 열었다. 내가 바로 따라나서려 들자, 그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긴 손가락으로 집무실 안쪽을 가리켰다.
“저놈은 안 깨워?”
저렇게 깊이 잠들었는데 어떻게 깨우겠는가.
여기서 나와 칼바도스가 이렇게 떠들어 대는데도 저 잠귀 밝은 녀석이 깨지 않는 건, 저 녀석이 무척 지쳐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는 쌩쌩해 보였는데 그간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 같았다.
나는 칼바도스를 그대로 지나쳐 얍삽하게 그가 열어 둔 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돌려 집무실 안에서 잠든 레이델을 바라보니 뭔가 따스한 감정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칼바도스도 내가 너무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깨우지 못했다고 했지.’
아마 지금 레이델을 두고 온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흐뭇해진 내가 칼바도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날 안 깨우고 나간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네.”
웃으며 말하는 나와 반대로, 칼바도스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그거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줄 알고 아니라고 해?”
“네가 저놈을 생각하는 마음이랑 내 마음은 다르다는 의미지.”
내가 레이델을 생각한 마음이랑 다르다고?
음, 그럼 좋은 감정은 아니라는 건데……. 옆에서 구시렁대는 걸 무시하고 잔 게 더럽게 아니꼬왔나 보다.
흐뭇함은 빠르게 휘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