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녀는 살고 싶다
81화
리오스와 편지를 주고받느라 기가 허해졌을 무렵, 공작이 돌아왔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내 몰골이 이 모양인 이유는, 또 다른 빙의자가 있다는 사제의 말과 리오스 왕자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질반질한 공작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웃기만 했다.
이렇게 내 상태가 안 좋은데, 다시 배신하진 않겠지.
멋쩍게 웃은 공작이 오는 길에 사 왔다며 무화과 케이크를 건넸다.
내가 고작 먹을 거 하나로 화를 풀 줄 아나 본데, 역시 내 아버지답게 나를 잘 알았다.
무화과 케이크는 맛이 아주 좋았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을 맛이었는데, 이걸 혼자 먹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둘이 먹다 하나가 죽는다면, 분명 살아남은 하나가 범인일 거다. 케이크를 독차지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른 거겠지.
꽉 찬 청소기 먼지통을 비우듯이, 내 속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시몬에 갔던 메이와 정보원이 돌아왔다.
메이와 함께 간 정보원이 리오스의 친구이자 수하인 로펨에게 쫓기던 중 부상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끌려갔다고 한다.
수척해진 몰골을 한 메이가, 고개를 숙이면서 함께 다녀온 남자의 머리를 꾹 눌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사히 왔으면 됐지. 이번 일로 왕자와 친분도 생겼고.”
내 이름 감추려고 연결 기구까지 박살 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됐다는 듯이 메이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친분이라 생겼다고 말한 걸 후회했으나 메이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뭐, 빈말이긴 했어도 그쪽에서 먼저 친하게 지내자고 했으니 이만하면 된 건가.
나는 편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보고는 저녁에 받을 테니 둘 다 방으로 가서 발 닦고 쉬어라.”
“예.”
그렇게 늦은 저녁 식사 후 메이의 보고를 들었는데, 시몬의 상황은 내가 아는 소설 속 상황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리오스와 칼린이 서로 열심히 물어뜯는 중이었다.
‘그래, 너희는 그냥 다른 짓 하지 말고 너희끼리 열심히 싸워라.’
제국에 불똥만 안 튀겼으면 좋겠다.
*
며칠 뒤, 율리안은 서재에 있던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식사를 제안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놈이랑 단둘이 밥을 먹어 본 적은 없는데.’
셀레네나 레이델이 껴 있었으면 몰라도.
“여자 친구 있는 남자랑 단둘이 식사하는 건 내키지 않는데요.”
“……공주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니까요.”
음,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리오스 이야기를 하러 왔구나.’
지난번에 하도 밀어붙이듯이 대화를 나눴더니 영혼이 털린 모양새였다.
밥 생각이 없어서 커피나 한잔 하자고 하니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의 나처럼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가 왕자님과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이걸 설명할 길이 없네. 소설에서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놈도 며칠 동안 어디서 들켰는지를 고민하다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며칠 내내 고민했을 율리안에게는 미안하지만,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치사하게 답하기로 했다.
“그냥…… 티가 나던데요?”
“뭐라고요?”
“거 앞으로는 조심해요. 나도 눈치챘는데 공주님이 끝까지 모를 거란 보장 있습니까? 걸리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허.”
내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율리안이 기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차분하게 잔을 들더니 얼마 안 가 표정을 구겼다.
커피가 뜨거웠나.
그러고는 한동안 조용히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정말 공주님께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는 거죠?”
“음, 네.”
처음엔 율리안이 쎄한 짓을 하면 바로 셀레네에게 이 사실을 알릴 작정이었다.
율리안은 리오스의 수하이고,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걸 빌미로 율리안을 협박해 정보원을 데리고 와 버린지라 다시 써먹을 구석이 없었다.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낫지.
찝찝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커피가 너무 써서 더는 마시지 못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안이 떠나고, 나는 잔에 들어 있던 얼음을 물었다. 치아 건강은 둘째 치고, 시원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입안에서 얼음을 박살 내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문밖에서 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메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지금부터 내 속이 매우 불편해질 것을 직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구분할 수 없겠지만 나는 안다. ‘아가씨’의 마지막 음절을 평소보다 낮은 톤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저건 틀림없이 나쁜 소식이다.
들어오란 말과 함께 얼음 알갱이를 삼켰다.
그리고 메이는 평소처럼 차분한 얼굴로 차분하지 못한 소식을 전했다.
“랜든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뭐?”
랜든이라면 내가 후작저에 심어 둔 하인인데…… 그놈이 죽었다고?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연락이 없다 했다.
“외곽에서 불에 탄 시체가 발견됐는데, 랜든의 신분증이 있었습니다.”
‘불에 탔다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으나, 머리가 멍해져서 그런지 바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가 지금 충격을 받은 건가?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랜든이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나는 일자리를 준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와 아들을 공작저로 불러들였다. 랜든은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니까.
그런데 랜든이 죽었다니.
그 두 사람한테 랜든이 죽었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와 레이몬드가 랜든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후작가에서 눈치채고 본보기로 죽인 건가?’
아니면 레이몬드가 이놈을 제 아버지한테 가져다 바쳤거나.
그 가능성을 떠올리기 무섭게 칼바도스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쪽에선 레이몬드 메릴이 배신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해.’
그땐 칼바도스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으론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푹 꺼지듯 무거워졌는데, 다행히 얼마 안 가서 나는 내게 쓸데없는 의심병이 도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몇 번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이 죽어서 그런지 마음이 심란했다.
복잡한 마음에 바람 좀 쐬자 싶어서, 메이와 레이델을 데리고 몰래 새벽 탈출을 감행했다.
나온 김에 랜든이 죽었다는 곳 근처에 가서 조용히 술이나 뿌려 줄까 싶었다.
그런데.
“고, 공……!”
“어, 너-!”
“공녀니임!”
“살아 있었네……?”
거지꼴이긴 했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랜든이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것이다.
턱 밑에 수염이 자글자글 자란 채 훌쩍이는 랜든의 모습은 참……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후작가에서 밥 안 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살이 아주 많이 빠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셋은 외출한 지 1시간 만에 랜든을 데리고 공작저로 복귀했다. 이놈 와이프도 여기 있고 아들도 내가 공작저에 뒀으니,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게 나았다.
오는 길에 대충 설명을 들었는데, 그동안 연락이 끊긴 이유는 레이몬드보다 먼저 델소스 섬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그 시체는 뭐야? 진짜 죽은 줄 알았잖아.”
나는 개인 집무실에 놓인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서 랜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랜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제가 죽은 줄 아셨습니까?”
“어.”
시체까지 나왔는데 살아 있겠다고 믿겠냐?
“이상하네요. 레이몬드 님은 공녀님이 바로 눈치채셨을 거라고 하시던걸요?”
“뭐?”
“공녀님을 따라 하는 것뿐이니 시체를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리셨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공작님 몰래 시체에 불 지르신 적 있습니까?”
내가 시체에 불을 지른 적이…… 있네?
옆에 있던 레이델과 메이가 같은 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내가 레이델을 빼돌린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기막혀라.’
랜든이 죽은 척을 한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허무했다.
그가 섬에서 뭔가 엄청난 것을 목격했는데, 수도에 돌아온 뒤 행동거지가 너무 수상해서 렘브로가 레이몬드에게 랜든을 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 여린 레이몬드는 랜든을 죽일 수 없었고, 결국 시체 하나를 구해 와 랜든을 죽은 걸로 위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을 텐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나는 카인과 메이의 도움을 받아서 레이델을 빼돌릴 수 있었다.
행동이 제한된 레이몬드가 시체를 구해서 랜든과 바꿔치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후작저에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꾸몄지?
그러자 랜든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니요? 크게 힘을 쓸 순 없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도움을 주는 이들이 몇 있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랜든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물었다.
“설마…… 레이몬드 님 곁에 새로운 사람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러게?
랜든의 말대로 나는 레이몬드의 곁에 새로운 사람이 생길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다. 소설에서 그 인간은 하인한테 배신당해서 죽었으니까.
후작저로 돌아가면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더니, 거기서 사람을 믿었다.
레이몬드의 방식이 맞았다.
그리고 그가 나의 말을 믿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